김
혜
리
1995년 2월부터 줄곧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적을 두고, 영화와 영화 만드는 사람에 관해 글을 써왔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 영화학 석사 과정에 재학한 1년 남짓을 제외하고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지금까지 하나의 직업을 가졌고 개 두 마리와 살았다. 하루에 세 번 스스로에게 침착하라고 주문을 걸면서 일주일에 평균 네 편쯤 영화를 보고 있다. 다섯 권의 책 — 《영화야 미안해》 (2007), 《영화를 멈추다》 (2008), 《그녀에게 말하다》 (2008), 《진심의 탐닉》 (2010), 《그림과 그림자》 (2011) — 을 펴냈다.
엷은 빛으로,
사방을 에워싼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눈이 찾아가는
윤곽과 움직임과 색깔.
대낮에는 약하고
희미한 그것들이
개인의 생을 지탱한다.
비평가가 듣고 싶은 찬사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당신의 글을 읽기 위해서 그 작품들을 봤어요.” 내가 김혜리에게 하고 싶었으나 아직 못 한 말은 이것이다. “당신처럼 써보고 싶어서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어요.” 그의 글은 다음 네 요소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첫째, 분석. 분석이란 본래 해체했다가 재구성하는 일이어서 작품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인데 그가 우아하게 그 일을 할 때 한 편의 영화는 마치 사지가 절단되어도 웃고 다시 붙으면 더 아름다워지는 마술쇼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둘째, 인용. 그의 말이 지나치게 설득력이 있어 괜히 반대하고 싶어질 때쯤 되면 그는 그가 검토한 해외 인터뷰나 영화평들 중에서 중요한 코멘트를 적재적소에 인용해 독자로 하여금 이 영화의 모든 관계자들이 그의 글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셋째, 비유. 그가 개념적, 논리적 서술을 훌륭하게 끝낸 후에 정확한 문학적 비유로 제 논지를 경쾌하게 재확인할 때면 그의 글은 매체(영상과 문장) 간 매력 대결의 현장이 되는데 그는 결코 영화를 이기려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지도 않는다.
넷째, 성찰. 그는 영화 서사에 잠복돼 있는 ‘윤리적’ 쟁점에 극히 민감한데 그럴 때마다 특유의 실수 없는 섬세함을 발휘해 현재로서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이겠다 싶은 결론을 속삭여주곤 한다.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잘 쓴 글들이 많지만 김혜리의 글이 내게는 주관적으로도 그렇다. 그의 어휘, 수사, 리듬 등에서 나는 나를 거슬리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해내지 못한다. 그는 나의 전범 중 하나다. 나는 그냥 잘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처럼’ 잘 쓰고 싶다.
_ 신형철 문학평론가
책상 위에 던져둔 스마트폰에서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과 터렐 앨빈 맥크레이니 작가의 라디오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다. <문라이트>는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서민 공동주택 단지에서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성장한 감독과 작가의 기억이 강하게 반영된 이야기다. 부모에게 방치되고 또래에게 괴롭힘 당하는 내성적 주인공 샤이론은 열 살 되던 해, 후안이라는 동네 마약상 아저씨를 만나 보살핌을 받는다. 3부로 구성된 영화가 샤이론의 10대를 그린 2부로 넘어가면 후안은 이미 죽고 없다. 맥크레이니는 소년 시절 자신을 아들처럼 돌봐주었던 블루라는 마약 딜러로부터 후안의 캐릭터가 비롯됐다고 밝힌다.
작가는 생부의 집에 다녀온 어느 주말 어머니로부터 블루가 라이벌 마약상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눈 깜박하는 사이에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날부터 주의를 기울이자고 결심했어요.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걸,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소중한 좋은 것들이 사라져버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15초 앞으로’ 버튼을 눌러 맥크레이니의 이 말을 다시 들으며 옮겨 적는다.
주시하지 않으면 영화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본 것을 적어두지 않으면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은 2010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씨네21>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한 동력이었다. ‘김혜리의 영화 일기’가 아니라 볼썽사납게 소유격이 두 개가 들어간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여야 한다고 고집부린 까닭은 이 저널의 제1저자는 내가 아니라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일기’를 쓰는 나는 다만 매일 영화가 보여준 것을 적어두는 속기사였다. 2010년 8월 30일에 쓴 첫 번째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기를 쓰기로 한다. 나의 일기가 아니라 영화의 일기다. 영화관의 어둠에 잠겨 수천만 번째 태초의 빛이 스크린에 떨어지길 숨죽여 기다릴 때마다 나는 다시 한 번 살아보기를 결심하고 있다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 영화에 아무런 기대가 없을 때조차. 그래서 영화의 일기를 쓰기로 한다. 영화를 보는 마음이란 격류에 밀리고 내던져지는 오갈 데 없는 피조물의 기분인 동시에 살아 있음을 가장 능동적으로 실감하는 고양된 상태다. 영화, 우리의 대낮 같은 밤, ‘데이 포 나이트(Day for Night)’. 이것은 그저 영화를 보는 자의 출납부와 비슷한 기록이 될 것이다.” (<씨네21> 771호)
보고 듣는 행위는, 내가 우연히도 잡지 기자를 업으로 삼아 영화에 집중하기 전까지 시각과 청각이 기능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면 하기 마련인 다분히 소극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극장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동안이 내 삶에서 가장 감각이 활성화되고 타인을 공정하게 판단하고자 노력하고 세계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낱낱이 실감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사태는 역전됐다. 사물과 개인은 현실과 달리 프레임 안에서 하나하나 뚜렷한 나머지 나를 최고로 감정적인 동시에 이성적인 상태로 밀어갔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가장 살아 있다고, 잠시 더 나은 인간이 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좀 더 오래 소유하고 싶어서 영화가 아직 내 안에 흘러 다니는 동안 쓰고자 했다. 영화가 내게 다가와 쓰다듬고 부딪히고 할퀸 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이를테면 ‘인증 숏’을 남기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는데 영화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잠을 제외한) 임사체험이자 임생(臨生)체험을 제공했다. 바깥 세계와 나를 단절하고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으면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명이 떨어진 듯, 영사실 창에서 백광이 쏟아지고 하나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지만 앞에 썼듯 딱히 나의 삶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영화 한 편 안에도 무수한 삶과 죽음이 있다. 테이크는 지속되는 동안 현재 진행형의 삶이며 편집은 한 쇼트의 죽음이자 다음 쇼트의 탄생이다. 죽음이 삶에게 그러하듯, 쇼트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그 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삶에 포함돼 있지 않을 때 그것의 전경을 조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이 유용하다.
영화가 끝나 스크린이 암전되고 극장에 불이 켜지면 나는 방금 본 영화를 친애하는 사자(死者)처럼 추억하며 몸을 일으켜 내 몫의 지루한 원 테이크 영화, 그러니까 일상 속으로 황홀하게 비척이며 돌아온다. 게다가 영화는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내가 같은 물질로 이뤄진 ‘우리’의 일원임을 환기시킨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완벽히 혼자이지만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동료 관객의 감정에 감응하고 은연중에 갈등한다.
급속도로 자본주의화 중인 사회에서 중국인들이 느끼는 현기증을 그린 지아장커 감독의 영화에 언어와 인종, 역사적 체험이 상이한 관객들이 함께 울고 웃은 후, 감독에게 일제히 갈채를 보낼 때 우리는 공통의 근심과 희망을 확인한다. 나는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에게 1분 동안 시계를 같이 보자고 청했던 장국영의 대사를 극장에서 떠올리곤 한다. “우리는 1분 동안 함께했어. 지금부터 우리는 1분의 친구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과거가 됐으니까.” 인간은 각기 상대적 시간을 살아가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의 시간은 무심히 일치한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리 긴요할지언정 ‘영화의 일기’가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도에서는 눈썰미 좋은 아이에게 여럿이 돈을 모아 영화표를 사주고 나중에 둘러앉아 그의 구연을 통해 영화를 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어쩌면 영화 주간지의 독자들에게 일종의 전기수(傳奇叟)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운이 좋다면 나의 일기가 눈 밝고 생각 깊은 영화의 평자들에게 시시콜콜한 1차 자료로 쓸모 있기를 희망했다. 요컨대 ‘영화의 일기’는 단행본으로 묶일 가능성을 꿈에도 떠올린 적이 없는 글이다. 출판사 어크로스가 책으로 펴내자는 제안을 했을 때 당황했던 이유다. 그럼에도 한 주 한 주 마감의 압박 아래 거칠게 써낸 글들을 단정하게 고쳐 쓰는 일은 엄두도 나지 않았거니와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뻔뻔한 말이지만, 이 글은 한 쪽 한 쪽 써서 묶은 일기이며, 급한 호흡과 설익은 인상이 요체이기 때문이다.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는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영화 관람 날짜 기준으로 열두 달 목차로 재편한 책이다. 암실 같은 극장과 책상을 바삐 오가느라 계절의 왕래에 어두웠지만 책으로 모아놓고 보니 1월의 결기, 7월의 분주함이 행간에서 읽혀 신기하다. 대체로 비교적 최근에 해당하는 2014년부터 2017년 1월까지 <씨네21>에 실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중 어크로스 편집부가 선택한 글을 엮었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늑대아이>는 같은 잡지의 다른 지면에 썼던 평과 에세이를 끌어왔다. <우리들>과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관한 일기는 본디 짧았으나 관람 당시의 메모를 토대로 단행본을 위해 보완했다. 여러 날에 걸쳐 쓴 일기를 대상 영화를 기준으로 한 편으로 모으다보니 군데군데 문단의 호흡이 고르지 못해 독자에게 송구스럽다.
이렇다 할 영감을 주지 못하는 원고를 위해 기꺼이 사진을 제공한 서지형 포토그래퍼와 흩어져 날리는 글을 모아 책의 꼴을 갖추어준 강태영 편집자가 이 책의 공동 지은이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일기를 자칭하는 주제에 매주 더딘 마감과 거친 원고를 인내하고 조언과 격려를 쉬지 않았던 <씨네21>의 이다혜 편집팀장을 포함한 편집기자들, 취재하는 모습을 정다운 앵글로 담아준 사진기자 오계옥 선배에게도 오래 담아둔 고마움을 전한다. 약하고 게으른 나를 일원으로 포용해 훌륭한 동료와 지면을 허락해온 <씨네21>에게도 깊은 목례를 보낸다. ‘영화의 일기’와 같은 자유롭고 무용한 장문의 글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는 지면은 지금 달리 어디에도 없다.
나는 이번 주에도 ‘영화의 일기’를 쓸 것이다. 세상 곳곳에서 사랑하는 영화를 기억하기 위해 티켓을 모으고 비망록을 쓰는 무수한 당신들을 상상하며, 영영 셋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나 그리고 둘, 다시 하나 그리고 둘.
2017년 3월 용산에서
김혜리
1월 | 내일을 위한 시간 |
여행의 기술 | |
와일드 |
여행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영화를 덥석 믿지 못한다. 이 주저에는 내가 여행을 힘들어하는 부류라는 사실이 작용한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는 것만 해도 과업인데 기념품으로 무려 자아라니! 나는 짐 싸는 요령이 없고 방향치다. 별자리가 갑각류라서인지 집 떠나면 껍데기가 훌렁 벗겨진 달팽이나 소라가 된 기분이다. 여행 기간이 4박 5일이면 출발하는 날까지 약 2박 3일 동안 짐을 싸는데 반드시 빠뜨린 물건이 있고 도중에 분실물도 많다. 그래서 나의 여행지 방문 장소는 의도치 않게 현지인스럽다. 경찰서, 컴퓨터 A/S 센터, 병원, 은행, 철물점 등등. 좌충우돌하다 간신히 숙소의 냉온수 꼭지와 열쇠 돌리는 방향이 손에 익을 만하면 집에 갈 날이다. 내게 여행은 낯선 공간과 문화가 주는 매혹과 매일의 실제적 곤경이 뒤섞여 하루에도 열두 번 행복하고 열두 번 패닉에 빠지는 시간이다. 그야말로 희로애락의 밀도가 치솟는 기간이다. 돌아오는 길이면 파김치가 된 손발 끝부터 심장 쪽으로 안도감이 밀려든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해냈어. 아직은 고향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세상은 나를 받아줄 여력이 있어. 괜찮아. 어쩌면 나는 주기적으로 모종의 확인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여하튼 여행은 부정할 수 없는 고역이다. 세계는 저 밖에서 우리가 휴가 내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위안과 각성을 선물하는 놀이동산이 아니고, 대자연은 우리를 팔 벌려 안아주려고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의 고생스러운 면모를 배제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나 <꾸뻬 씨의 행복여행>(2014) 같은 영화는 그래서 미덥지가 않다. 지중해의 풍미를 담은 몇 번의 저녁 식탁이나 제3세계 국민과의 짧은 교류로, 자아가 발견되고 영혼이 치유될 가능성은 여행사 카탈로그와 항공사 CF에나 있다.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우리를 접대하고 가르치려고 작심한 상대가 아니라 예기치 못하게 부딪히고 부대낀 것들에 의해 딱지를 떼고 형태를 잡아나간다.
오늘 본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와일드>가 나를 붙든 첫 번째 까닭은 이 영화가 바라보는 여행의 개념이 ‘고생’이라는 점이었다. 평생의 사랑인 엄마(로라 던)와 사별한 후 회한을 견디지 못해 폭주하듯 살던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는 어느 날, 다시 궤도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완전히 압도하고 휘저어놓을 체험이라고 결정하고 4285킬로미터의 배낭 하이킹에 돌입한다. 이를테면 온갖 날씨와 하중 아래 자기를 던져놓고 ‘나’라는 인간을 실제로 이루고 있는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다는 심산이다. 보통의 로드 무비에서 알맹이는 주인공이 여정 중에 만나는 새로운 인물과 예기치 못한 사건이지만 <와일드>에서는 매일 짐을 지고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행위 자체가 본론이다. 사람들은 재회의 기약 없이 스쳐가고 일화들은 매끈한 서사를 이루기 위해 연결되지 않는다. 셰릴의 여행에는 목표가 없다. 여행 자체가 목표다. 출발 22일째는 23일째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만나야 할 새로운 사랑도, 풀어야 할 미스터리도 없다. 다시 길을 찾으러 떠났지만 해답이 꼭 반성과 희망이어야 한다는 전제조차 셰릴은 갖고 있지 않다.
<와일드>는 우리가 홀로 과중한 짐을 지고 악천후 속을 여행할 때 머릿속에 들려오는 소리와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집중하는 원초적 의미의 여행영화다. 물집과 근육통, 기호식품을 향한 기갈, 탈진한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되는 과거의 일, 결코 좋아한 적이 없는데도 끈질기게 맴도는 유행가 한 소절, 무표정한 자연과 속모를 이방인들 앞에서 치솟는 울렁임. 장 마크 발레 감독은 절묘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하염없이 카메라를 돌릴 수 있는 디지털 필름메이킹의 장점을 백분 활용해 무방비한 여행자의 감각과 의식을 콜라주한다. 그리하여 여행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길 위의 경험과 사색, 우연히 마주친 현자의 교훈을 종합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례적으로 길고 호된 물리적 고역의 ‘부작용’으로서 계시처럼 닥친다. 나는 극한 체험은커녕 오르막길도 기피하는 여행자지만 여행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예가 있다면 <와일드>의 방식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한다.
아, 그리고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는 여자다. <와일드>는 배낭 멘 여자의 이미지가 종단하는 영화다. 건조 식량과 간이 정수기, 몇 벌의 옷가지와 텐트, 반복해 읽을 책과 노트. 셰릴 스트레이드의 파란 배낭에는 그녀의 의식주와 정신이 몽땅 들어 있다. 한 명의 인간이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신의 등에 짊어질 수 있다는 사실, 나아가 짊어질 수 있는 부피를 넘어선 물건은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소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 예기치 못한 위안을 주었다.
로드 무비는 미국적인 장르의 하나로 서부극에서 가지를 쳤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주로 그들을 길들이려는 (여성적인) 문명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반면, 많은 여성 로드 무비는 가부장제 사회 바깥으로 탈출하는 여정이다. <델마와 루이스>(1991)와 <보이즈 온 더 사이드>(1995)의 여자들은 가정폭력, 성폭력, 레즈비언이나 싱글맘에 대한 차별로부터 도망쳐 길을 가는 동안 일시적 대안 가족을 이룬다. 여성 여행자들은 남자 없이도, 그들을 지켜주고 있으니 순응하라고 엄포를 놓던 가부장제 시스템 없이도 충만한 삶이 가능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수순대로 길 위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과연 집으로 돌아가서 꼭 필요할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도시와 마을을 떠난 후에도 남성적 장르가 규정한 여성성의 내용은 그대로이기에 그들은 남성과의 관계를 해결할 수 없다. 그냥 내버려두고 도주를 계속하는 길만 남는다. 여성 로드 무비들이 흔히 죽음이나 판타지에서 비상구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와일드>는 조금 다른 예다. 셰릴의 여행은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다. 오래전 나쁜 아버지의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남성적 폭력에 희생된 피해자의 위치에서 여행을 시작하지 않는다(단, 가정폭력으로 싱글맘이 된 후 아이들을 부양하느라 홀로 떠난 적 없는 어머니 대신 어머니의 기억과 동행한 여행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다). 셰릴은 피해자이기는커녕 불륜으로 착한 남편을 배신했고 약물 중독을 포함한 방종을 저질렀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완주하는 동안에도 델마와 루이스가 겪었던 것처럼 성적인 폭력과 차별에서 기인한 위협적인 사건은 셰릴에게 닥치지 않는다. <와일드>가 여성의 관점에서 그녀가 여행하는 세계를 그리는 방식은 보다 일상적이고 은근하다. 재미있게 비교할 만한 장면이 있다. <델마와 루이스>에 나온 트럭 운전기사들의 여성혐오적 언어폭력 대신 <와일드>에는 <부랑자 타임스> 기자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차도를 걷는 셰릴을 자동차로 따라잡은 남자 기자는 여성 부랑자는 희귀하다며 인터뷰를 시도한다. 셰릴은 발끈해서 “나는 그냥 여행 중이에요. 여자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 일상을 떠나기만 하면 부랑자 꼬리표가 붙어야 하나요?”라고 반박하지만 기자는 막무가내다. “어이구, 페미니스트처럼 말하네요?” “맞거든요!”
유별나게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평균적 20대 여성인 셰릴의 육체는 시종일관 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 확실히 그녀는 남성 여행자들보다 연약하고 요령이 부족하며 젊은 여성의 매력으로 인해 약간의 호의를 사기도 하고 집적거림을 당하기도 한다. 셰릴과 관객은 그녀가 남자들과 맞닥뜨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남자들 중 누구도 성폭행범으로 판명되지 않지만 희미한 위협은 언제나 공기 중에 떠돈다. 주의를 끄는 것은 평범한 남자들에게 내재돼 있는 과시욕과 가학성이다. 그들은 실제로 추행하려는 의도가 없으면서도 그것을 암시하는 말 — 남자들은 짓궂은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 을 하며 셰릴이 드러내는 두려움과 긴장을 즐긴다. 약자에게 자기가 가진 힘이 줄 수 있는 영향을 확인하고 재미있어한다. 요컨대 <와일드>는 치명적 사건을 배제한 채 여성으로서 여행하고 살아가는 일에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조건들을 보여준다. 끝으로, 셰릴은 영화 속 선배들과 달리 남자들과의 관계를 내팽개치거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의 선택은 나무랄 데 없는 전남편의 품으로 돌아가는 안전한 카드도 아니다. 영화 말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미래완료 시제로 셰릴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아이를 갖고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셰릴은 현실과 교섭을 포기하고 장렬히 산화해서 관객에게 죄책감을 남기거나 여행으로 죄의식을 털고 안온한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한번 과오를 저지른 여자는 남자보다 인생을 돌이키기 어렵다는 잠재적 통념에 맞선다. 이 반박의 힘은 영화가 앞질러 그녀의 과오를 보호자연하며 변명하지 않았기에 나온다. <와일드>에는 그랜드캐니언 위로 자동차를 날리는 <델마와 루이스>의 정지 화면만큼 해방의 이미지를 응축한 프레임은 없다. 이 영화가 주는 해방감은 다른 곳에서 온다. 전부 아니면 무, 성녀 아니면 창녀, 순응 아니면 통제 강박……. <와일드>는 여성 캐릭터들에게 강요되는 그 모든 양자택일의 프레임들을 거절함으로써 극장을 나서는 내가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는 겨우 이만큼, 아니 그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 | |
와일드 |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노동자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의 휴직 사유는 우울증이다. 복직을 앞둔 그녀는 회사가 1인당 1000유로의 보너스와 산드라의 복직 중 하나를 투표로 선택하라고 동료 노동자들에게 통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 다르덴 형제는 왜 하필 육체의 질병이 아닌 우울증을 골랐을까?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노동자의 분투만으로도 충분히 힘 있는 이야기에 괜한 감상성을 보탤 위험까지 무릅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겉으로 드러난 서사의 효용성 면에서 보면 우울증이라는 휴직 사유는 경계에 걸친 사례(borderline case)를 만든다. 마음의 병은 가시적이지 않기에 과소평가되기 쉬우며 심지어 태도 문제로 오도될 여지도 있다. 산드라가 일을 쉬게 된 원인이 신체의 중병이거나 상해였다면 문제는 법이 정한 복지의 영역으로 넘어갔을 테고 복직 후 업무 수행에 끼칠 영향도 상대적으로 자명했을 터다. 다시 말해 회복 이후에는 후유증이 없거나 후유증의 계량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병인 우울증은 고용주에게 빌미를 준다. 경영진은 정신이 연약해진 산드라의 능률이 떨어지리라고 애매하게 암시하면서 동료 노동자들의 판단에 갈등을 얹는다. 그녀가 다하지 못한 몫은 나머지의 부담이 될 텐데, 어차피 한 명을 감원할 계획이 있으니 이왕이면 현재 능률이 1인분에 모자라는 산드라가 나가는 편이 전체를 위해 합리적이라는 풍문도 슬쩍 흘린다. 그런데 회사의 논리에 스스로도 말려 흔들리는 산드라를 독려하는 남편 마누(파브리지오 롱기온)의 한마디가 우울증이라는 특정한 핸디캡이 이 영화에서 갖는 의미를 홀연히 일깨운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 눈물도 멈출 거야.” 반대로 일을 빼앗기면 눈물은 그녀의 생활을 삼켜버릴 것이다. 남편의 이 대사는 우울증을 노동력으로서 해고되어 마땅한지 평가받아야 할 고립된 결함이 아니라 실직하면 악화되고 복직하여 정상적 일상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완화될 일시적인 핸디캡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다르덴 형제는 우울 장애를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들과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우울증을 산드라의 캐릭터가 아니라 현재 처한 조건으로 취급한다. 그녀의 연약한 심리 상태는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두가 끌고 다니는 다양한 문제 중 하나다. 우울증의 원인 설명을 극 중에서 아예 배제한 연출은 센티멘털리즘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처인 동시에 원인이 무엇이었건 간에 영화 속 시간인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산드라가 겪는 상황에 대한 판단과 무관하다는 입장 표명이다. 요컨대 우울증이 변수로 게재된 특수한 상황이 산드라의 동료 노동자들과 관객에게 묻고 있는 것은 ‘우울증이 있으니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열등한 인력’이라는 고용주의 효용 중심 관점과 ‘일할 기회를 돌려줘야 건강한 인력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사람 중심 관점 사이의 선택이다. 한정된 자원 위에 구축된 현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를 우위에 두고 운영되는 사회를 원하는가? 당신에게 유의미한 진짜 ‘효율’은 무엇인가?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으로서 매일 내려야 하는 결단은 어떤 종류인가? 요컨대 <내일을 위한 시간>의 우울증이라는 모티브는 딜레마를 또렷이 드러내고 결정적인 질문을 정교하게 던지기 위해 다르덴 형제가 설계한 실험의 조건 통제로 보인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때가 중학교 사회 수업 시간이었는지 프랑스 혁명기를 그린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 를 읽는 동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뭐든 사회계약론에 대한 설명의 도입부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내가 원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야”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사장조차 아시아 업체와의 경쟁 탓에 인건비를 줄이지 않으면 회사가 위태로워 별수 없다고 해명한다. 그 말들은 거짓이 아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리는 오늘의 유럽 사회에서 악덕 사주 대 노조의 대결 구도는 옛이야기가 됐고, 산드라의 동료 중 누구도 “이 양자택일의 프레임은 부당하니 싸우자!”고 나서지 않으며, 내 이익이 동료의 이익과 배치되는 현실에 이미 적응해 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음을 모두가 말하는 시대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친다는 말이 아니라 타인의 삶이 어찌되든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로 변했다.
다시 사회 교과서로 돌아가면 우리는 노동(교과서가 쓴 단어는 ‘직업’이었던 것 같지만)이 경제적 부양 수단일 뿐 아니라 다른 사회 구성원과의 소통, 공동체에 대한 공헌, 자아실현 등의 기능을 갖는다고 배웠다. 산드라와 동료들의 일터에서는 앞에 나열한 노동의 모든 의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영화의 결말과 별개로 <내일을 위한 시간>이 돌아보게 하는 우리의 세상은 막다른 골목이다. 살자고 들면 나쁘게 사는 수밖에 없고 아니면 생존이 어렵다니 얼마나 암담한가. 그야말로 ‘죽거나 나쁘거나’다.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는 이 비좁고 굴욕적인 삶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의 여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고전적 의미의 연대이기는 불가능하다. 계급적 승리이건 정당한 경제적 대가이건 연대를 통한 보상을 약속할 수 없는 세계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산드라가 손에 쥔 한 줌의 자유를 갖고 선택한 것은 얼핏 연대처럼 보이지만 자긍심의 천명이다. 그녀는 동료 노동자의 처지에 감연히 ‘개의’한다. 내 탓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럼으로써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거스른다. 우리는 겨우 이만큼을, 아니 아직도 그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고 다르덴 형제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의지할 구석과 도움의 가능성을 뜻하는 따뜻한 보루였던 시절은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냉담하고 소극적으로 들릴지언정 이렇게는 여전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연결돼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조심이 낳을 결과가 연대의 그것보다 보잘것없으리라고 미리 낙담할 필요는 없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연배우 마리옹 꼬띠아르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꼬띠아르는 다르덴 형제만큼 영화를 만드는 동안 관객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언급하는 감독은 처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블록버스터를 포함해 상업영화도 여러 편 경험한 스타 배우가 오늘날 불친절한 예술영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감독과 작업한 다음 들려주는 이야기치고 독특하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가 밝힌, 그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동기와 꼬띠아르의 증언(?)은 잘 들어맞는다. “요즘 사람들은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찍어 식당이나 카페에서 함께 보도록 하고 싶었다.” 벨기에의 고향 소도시를 근거지로 노동자들의 역사와 생활에 대한 수십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극영화로 전환한 이유도 심플하다. 극영화는 다큐멘터리로는 담기 어렵지만 다르덴 형제 생각에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에 포함되는 결정적 사태 — 죽음과 극단적 수난 — 를 찍어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관객을 생각한다”는 말은 관객이 영화를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의미와는 무관하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남이 어떻게 사는지를 본다는 행위도 통념과 달리 다르덴 형제에게는 곧장 연민과 공감을 뜻하지 않는다. 뤽 다르덴은 2006년 평론가 조프 앤드루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리 영화의 관객이, 극 중 인물이 어디서 왔으며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설명할 수 없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아니, 이건 실패한 캐릭터 구축을 비판할 때 쓰는 말 아닌가? 다르덴 형제에게 캐릭터의 동기와 심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관객이 영화 밖 삶에서 형성한 기존 가치체계 안에서 인물을 파악하고 요약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내가 본 <로제타>(1999) 이후의 다르덴 영화는 인물을 동정하거나 판정하려는 관객의 몸에 밴 습성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차단한다. 우선 시나리오가 현재로 대뜸 뛰어든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산드라를 내내 괴롭히는 우울증의 원인을 언급하지 않는다. <더 차일드>(2005)는 젊은 브루노(제레미 레니에)가 어쩌다가 훔치는 족족 써버리는 길거리 인생을 택했는지 맥락을 암시하지 않는다. 관객이 ‘이 인물이 과연 내가 편들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를 판단하는 데에 쓸 변수를 아예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로 인물의 행태다. 육체노동자,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이민자가 대다수인 다르덴의 캐릭터들은 본인 행위의 동기를 말로 설명하는 일이 드물다. 액션과 몸짓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행동의 의도를 보는 이가 확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아들>(2004)의 목수(올리비에 구르메)가 아들을 죽인 살인범 소년의 목을 왜 조르는지, 또 그러다 왜 멈추는지 해명을 얻지 못한다.
무엇보다 다르덴의 인물들은 관객의 응시를 좀처럼 되돌려주지 않는다. 배우가 카메라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스크린에 슬픔이나 기쁨, 고통을 훤히 드러냄으로써 보는 이에게 잠정적으로 소통했다는 착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카메라가 인물에 밀착한 작품 <아들>의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도수 높은 안경 탓에 눈동자를 읽기 어렵다. 오해하지 말기를. 다르덴의 인물들도 물론 영화 속에서 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이유를 관객이 적시할 수 있는 예는 적다. 다르덴 영화를 관람하는 일이 힘겹게 느껴지는 데에는 핸드헬드 촬영 기법이 주는 어지럼증도 있지만 메아리 없는 응시가 주는 쓸쓸함도 한몫하는 셈이다. 이는 관객의 응시를 인물이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돌려주는 주류 영화와 다르덴 영화 메커니즘의 근본적 차이다(어쩌면 마리옹 꼬띠아르라는 아름다운 스타 배우가 우울증을 앓는 인물을 연기한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나마 가장자리에 걸친 경우일 것이다). 이 메커니즘에는 배우의 연기도 연기지만 카메라, 곧 감독의 자리가 결정적이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적재적소’에 있지 않다. 우리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볼 때 그렇듯 언제나 흔들리며 움직이고, 장애물이 시야를 가려 결정적 순간을 놓치기도 하면서 애써 설 자리를 찾고 따라간다.
“다큐멘터리에서 배운 점은 우리의 카메라가 모든 걸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찍는 현상은 종종 카메라를 거절한다.” 언젠가 밑줄 그었던 다르덴 형제의 인터뷰다. 이 거절까지 포함해 찍는 게 영화를 만드는 옳은 방식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결국 스토리, 인물, 카메라가 동정, 분노, 판단을 철저히 거절함으로써 관객의 자문은 “나는 이 인물과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서 “나는 왜 어떻게 어디서 저들을 ‘보고’ 있는가?”로 이동한다. 나와 영화 사이의 거리가 의미심장해진다. 관객은 고작, 그러나 치열하게 깨닫는다. 나는 절대 영화 속 저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와 같은 세계에 존재함을 인지하고 두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지켜볼 수는 있다. ‘고작’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어떤 감독에게는 영화라는 예술이 다다를 수 있는 최선이다. 다시 꼬띠아르의 인터뷰로 돌아가자. “언제나 관객을 생각한다”라는 진술은 감독을 포함한 관객이 영화를 응시하는 자리를 매 순간 염두에 두는 일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 만들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과제라는 의미로 읽힌다. 영화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카메라가 넘지 말아야 할 180도 선, 제4의 벽보다 더욱 절대적인 보이지 않는 선이 다르덴 형제의 머릿속에는 그려져 있을 것만 같다.
쓰면서 지워가는 이야기 | |
인사이드 르윈 |
<인사이드 르윈>의 포크 싱어 르윈(오스카 아이작)은 고생스러운 여행 끝에 유명 매니저 버드 그로스먼(F. 머레이 에이브러햄) 앞에서 실력을 보일 기회를 얻는다. 르윈의 노래를 듣고 난 버드의 평은 명쾌하다. “솔로로는 안 되겠어. 듀엣이었다고? 재결합하게.” 그러나 르윈의 파트너는 자살했으며 르윈에게는 듀엣이건 트리오건 새로운 팀의 일원이 될 의지가 없다. 더 애쓸 기력이 그에겐 없다. 아무런 부언 없이 르윈은 답례한다. “좋은 충고네요. 고맙습니다.” 필요한 것이 예술성이 됐건 대중의 귀에 감기는 호소력이건 임계점에 이르기에는 딱 한 되만큼 부족한 재능을 안고 중년에 접어든 아티스트의 피로에, 나는 예술가가 아님에도 설복되었다. 길의 막다른 끝이 보이는데 뒤돌아보니 기력을 소진한 다리로 되짚어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날의 아득함.
형제 감독이 ‘악동’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조엘과 에단 코언의 작품 대다수는 내게 경탄의 대상이었고 재미의 보증수표였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적은 없었다. “코언 형제는 아주 많은 걸 아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90년대 후반 평론가 애덤 마스 존스가 <파고>에 대해 쓴 한 줄과 비슷한 감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굉장한 장치를 설계했군”이라는 감탄이 매번 우선했다. 극도로 총명한 두뇌가 지상으로부터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며 군상을 조망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사랑>(2003)과 <레이디 킬러>(2004)가 연이어 내야 플라이에 그친 다음부터 코언 형제의 영화는 예전에 없던 황량한 온기를 띠기 시작했다. 더 황량해지면서 더 따뜻해지다니, 모순형용으로 들리지만 사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