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5월 15일 초판 1쇄 펴냄
펴낸곳 | (주) 꿈소담이
펴낸이 | 김숙희
글 | 이창수
그림 | 김승연
주소 | 136-023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가 115-24 4층
전화 | 747-8970 / 742-8902(편집) / 741-8971(영업)
팩스 | 762-8567
등록번호 | 제6-473(2002. 9. 3)
홈페이지 | www.dreamsodam.co.kr
전자우편 | isodam@dreamsodam.co.kr
ISBN 978-89-5689-463-8 74810
ISBN 978-89-5689-459-1 74810 (세트)
제작 | (주)한국이퍼브
----------
이eBook은네이버에서제공한나눔글꼴에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글: 이창수
이창수선생님은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3년 <파란 꿈을 먹은 아이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여러 출판사에서 어린이를 위한 좋은 책을 만들며 아동문학 작품을 지었습니다. 한국아동문예상, 한국아동문학작가상,김영일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화상 대상 등 많은상을받았고 지은 책으로는 <다람이의모험>, <정수가 위험해>, <외딴 섬 아이들의 엽기여행> 등이 있습니다.
그림: 김승연
김승연선생님은 1950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년소녀가장돕기동시화전에 4회 참가하였으며, 교과서 삽화와 위인전기, 창작동화, 전래동화 등 많은 작품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현재 좋은 그림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 중입니다.
책머리에
‘배 비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왜냐하면, 이 고전소설은 조선 시대에 씌어진 해학문학이기 때문이다.
해학이란 익살스러우면서도 풍자적인 말이나 몸짓을 일컫는데, 요새 말로 말하면 ‘개그’이다. 그렇지만, 그냥 웃고 마는 개그가 아니라, 그 밑바닥에는 현실을 꼬집고 진실을 나타내는 값진 요소가 담겨져 있다. 때문에 해학문학은 재미있으면서도 배울 점이 많다.
우리의 조상님들은 참으로 어렵게 살았다. 가난도 가난이려니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숨쉬기조차 힘든 때가 많았다. 더욱이 흉년이 계속 들면 나무와 풀뿌리로 목숨을 이어 가야 했으며 또, 관리들의 횡포로 피를 빨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토록 살기 힘든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님들은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슬기를 후손들에게 보여 주었으므로, 대단히 장한 일이다.
이 고전소설은 해학문학인 동시에 서민문학이다. 잘사는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고통 받고 어렵게 사는 백성들을 위해 나온 문학인 것이다. 때문에 <배비장전>은 시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에게 환영받는다.
해학이어서 때로는 ‘허황된 말이나 짓’도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주인공 자체가 고지식하고 착한 인물이니까.
배 비장과 그 친구, 주위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의미 깊게 잘 생각하며 읽기 바란다.
이 창 수
차례
비칠거리는 배 서방
칼춤으로 무과에 합격
배 선달의 행진
청렴결백한 관리
부인의 놀라운 지혜
비장 벼슬을 얻었으나
제주로 출발
고생길로 들어선 예방과 형방
처녀 귀신 소동
젊은 미녀가 된 할멈
배 비장을 바다에 넣으렷다
신관 배 비장 거동, 구관 정 비장 거동
금니 뽑아 가는 여우
골짜기에서 목욕하는 여인
오, 홍랑 낭자여
상투 튼 개, 장님 점쟁이
저희 낭군을 쏙 빼 닮았어요
벌거숭이가 되다
애랑을 차지한 배 비장
헛꿈은 꾸지 말아야지
✽ 작품 해설
비칠거리는배 서방
“그게 정말이야?”
배 서방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인 들창코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건 나만 알고 너만 아는 비밀이야. 남산에 산삼이 두 개 자라는 것을 발견했어. 그러니 우리 둘이 한 뿌리씩 캐어 먹자구.”
`엄청 비싸고 구하기 힘든 산삼을 발견했으면, 왜 제가 다 캐어 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대답을 들려주려는 듯 친구가 말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말씀이야, 머리가 하얀 노인이 나타났어. 노인이 ‘나는 산신령이다.’ 하고 나서, ‘남산 검바위 밑에 산삼 두 뿌리가 자라고 있으니, 캐어서 너의 배 친구랑 각각 하나씩 나누어 먹어라.’ 하지 않겠어. 만일 내가 다 캐어 가지면 큰 재앙이 내리고, 너랑 사이좋게 하나씩 먹으면 장차 무과(무관을 뽑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얻는다는 거야.”
“아아, 산신령님 꿈을 꾸었구나.”
그제야 고지식한 배 서방은 친구의 말을 믿었다.
배 서방이라 하여 나이가 많은 게 아니었다. 이 무렵은 열네 살만 되어도 장가를 드는 풍습이 있어서 배 서방도 일찍 장가를 들어, 겨우 열여덟 살밖에 안 되었다. 성이 문씨인 친구 들창코도 장가를 들어 문 서방이라 불렸다.
두 친구는 남산 검바위 아래로 가서 산삼 두 뿌리를 캐어 각각 하나씩 날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힘나지?”
들창코가 물었다.
“응!”
배 서방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도 밤낮 너희 아버지한테 돈을 달래서 쓰지만 말고, 무과에 합격해서 벼슬 한 자리 얻어 돈을 벌라구.”
“알았어. 그런데, 정말로 산삼 먹으면 나같이 힘이 세지 않은 사내도 무과에 합격할까?”
“그러엄. 우리는 산신령님이 뒤를 밀어주잖아.”
배 서방은 키만 컸지 약골(몸이 약한 사람)에 속했다. 귀하게만 자라서 마당을 쓰는 싸리비 한 번 안 들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배 서방은 싱글벙글하였다.
“웬일로 오늘은 네가 비칠거리지 않니?”
아버지 배 첨지가 아들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배 서방의 집은 서울 마포 서강에 있는데, 아버지 배 첨지는 대대로 그곳에서 살아 터줏대감 행세를 하였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논밭이 많아 부자 소리를 들었으며, 새우젓 장사를 하여 매일 뭉칫돈을 만졌다.
서강은 서울에서 사람이 많이 붐비는 나루 중 하나였다. 제물포(인천)에서 배로 고기, 특히 새우젓을 가득 실어다가 서강 나루터에 풀어놓으면, 장사꾼들이 와서 떼어다가 장사를 하였다.
“이 녀석아, 돈만 많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것이 배 첨지가 아들 배 서방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이었다.
“에이구, 저거 약골에 사람마저 변변찮으니…….”
배 첨지는 아들만 보면 속이 상해서 투덜거렸다. 장가를 일찍 들이면 비칠거리지 않고 사람 구실을 할까 싶었으나, 자고 일어나면 ‘아버지, 돈!’ 하고 손을 내밀었다.
“주긴 주는데, 함부로 쓰지 마라. 돈을 잔뜩 모아야 우리도 양반 벼슬 한 자리 살 것 아니냐?”
배 첨지는 무엇보다도 양반 행세를 하는 게 소원이었다.
아버지만 보면 비칠거리는 배 서방이었다. 쓰러질 듯 휘청휘청하였다.
“이 녀석아, 너는 남보다도 더 잘 먹고 잘 입으면서 왜 그렇게 툭하면 비칠거려?”
아버지가 호통을 치면 배 서방은,
“아버지가 약하게 만들어 주어서 그래요.”
하고 둘러대었다. 그러면 배 첨지는 한숨을 푹푹 쉬다가 쌈지를 풀어 돈을 꺼내 주었다.
“가서 곰국이나 한 사발 사 먹어라.”
배 서방은 돈을 받으면 몸보신한다고 나가 건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랬는데, 오늘은 비칠거리지도 않고 씩씩하게 일찍 집으로 돌아와 싱글벙글하는 게 아닌가!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냐? 금덩이라도 주웠냐?”
“아버지, 나 오늘 산삼 먹었어요!”
“산삼?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못 사는 산삼이 아니냐? 그런 것을 네가 어떻게…….”
“문창코(들창코 문 서방) 친구가요…….”
배 서방은 들창코와 남산에 갔던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녕코 네 친구가 산신령 꿈을 꾸었다면 틀림이 없다마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들이 사귀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정직하고 똑똑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몽땅 술꾼이었다.
“아버지, 두고 보세요! 들창코 덕분에 무과에도 합격하고 벼슬도 한 자리 얻을 거예요.”
“그렇다면, 비만 오면 코에 물이 들어갈까 봐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다니는 들창코가 네 친구 중에서 가장 쓸 만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들창코가 배 서방네 집에 찾아왔다.
“문창코, 웬일이야?”
“간밤에 나 또 산신령님을 꿈에 보았어! 우리에게 산삼 한 뿌리씩 먹게 해 준…….”
“그래? 그래서?”
“이번에는 네 아버지에게도 산삼 한 뿌리 캐어 잡수시게 하래. 검바위 아래에 백 년 묵은 산삼도 한 뿌리 자라고 있대.”
“그러면 너희 아버지 캐어다 드리지 왜?”
배 서방은 의심스러웠다. 그 의심도 들창코가 풀어 주었다.
“산신령님이 이번에는 그냥 주지 않는대.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대. 그러니까 돈 1천 냥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거래.”
“에이, 산신령님이 돈을 어떻게 받니?”
“돈을 항아리에 넣어 산삼 캔 자리에 묻으면 신선이 밤에 아무도 몰래 내려와 꺼내 간대. 그러니까 얼른 너희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배 서방은 들창코가 서두르는 바람에 사랑방으로 가서 아버지를 뵈었다.
“아버지, 어제 저한테 산삼 한 뿌리 캐어 먹게 한 들창코가 왔어요.”
배 첨지는 누워 있다가 일어나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창코는 무릎을 꿇고 ‘산신령님 꿈’, ‘백 년 묵은 산삼’, ‘산삼 값 1천 냥’ 이야기를 조리 있게 말했다.
배 첨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당으로 나가 하인을 불러 귀엣말을 하였다. 다시 사랑방으로 들어온 배 첨지가 들창코에게 말했다.
“그러하다면 좀 있다가 남산에 같이 가자.”
“돈 1천 냥을 항아리에 넣어 가지고 가야 합니다. 백 년 묵은 산삼을 캐고 나서 그 자리에 묻어야 하니까요.”
배 첨지는 들창코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가 지나자, 대문 밖이 왁자했다. 배 첨지 하인이 포졸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누구요, 허황된 소리로 협잡질(사기)을 하려는 놈이?”
포졸이 사랑방을 들여다보며 외쳤다. 배 첨지는 턱으로 들창코를 가리켰다.
포졸이 들어와 뒷덜미를 낚아채자, 들창코는 버들버들 떨며 애원했다.
“하이고,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를…….”
포졸이 이실직고(사실 그대로 고함)하라고 을러대자, 들창코는 마당으로 끌려나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산삼이 아니라 도라지지? 산신령 꿈도 거짓말이고?”
배 첨지가 고함쳤다.
“네네, 맞습니다요. 우리 집 밭에 심은 도라지를 캐어다가 심고 친구에게 산삼이라고 장난한 겁니다요. 하도 빈둥빈둥 놀면서 비칠거리는 게 안타까워 함께 무술이나 익혀 무과를 보려고요.”
“하면, 백 년 묵은 산삼을 캐고 1천 냥을 그 자리에 묻으라는 것은?”
이 말에는 들창코가 얼른 대답했다.
“어젯밤 꾼 산신령 꿈은 거짓말이 아닙니다요! 절대로 아닙니다요.”
“그렇다면 백 년 묵은 산삼이 있다는 곳에 가 보자. 가서 정말 산삼이 발견되면 1천 냥이 아니라 1만 냥이라도 항아리에 넣어 묻으마.”
이렇게 하여 배 첨지와 포졸들, 그리고 들창코와 배 서방과 하인이 남산으로 향했다.
칼춤으로무과에 합격
“어디냐? 백 년 묵은 산삼이 있다는 데가…….”
배 첨지가 묻자, 들창코가 말했다.
“여기에 도라지를 심었다가 캤으니까, 바로 그 아래라면 이쯤 될 것입니다.”
배 첨지는 하인을 시켜서 들창코가 가리키는 곳과 그 주위를 가지고 온 삽으로 파 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풀뿌리만 나올 뿐이었다.
검바위 아래쪽 사방은 물론, 위쪽까지 살펴가며 파 보았으나 산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녀석! 산신령 꿈 거짓말이지?”
“아닙니다요, 어젯밤 꿈에 정말로 산신령님을 만나 보았습니다요.”
“그렇다면 왜 산삼이 없어?”
“도망갔나 봅니다.”
“이놈아, 산삼에 발이 달렸단 말이냐?”
들창코와 배 첨지가 한참 실랑이를 한 뒤에, 포졸들이 달려들어 들창코를 꽁꽁 묶었다. 관가에 끌고 가서 곤장을 치려는 것이었다.
이때,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포승(죄인을 묶는 끈)을 풀어 주어라.”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 열 살이 갓 넘었음직한 소년이었다. 포졸들은 그 소년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배 서방도 덩달아 엎드렸다.
“산신령 아드님이신가 보다!”
들창코도 꽁꽁 묶인 채 외치고 나서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포졸이 그 소년에게 말했다.
“김 진사 나리께서 어인 일로 여기를 다 오셨나이까?”
이 소년은 지체(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높은 신분이나 지위) 높은 양반 댁 아드님이었는데, 이미 어린 나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 장안에서 신동(재주나 지혜가 남달리 뛰어난 아이)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진사 소년이 말했다.
“산에 와서 조용히 글을 읽는데, 너희가 참으로 우스운 일을 벌이기에 귀를 기울였느니라.”
“사실은 이 녀석이 협잡질을 하려고 산신령님을 꿈에서 보았느니, 백 년 묵은 산삼이니 하여…….”
소년은 ‘하하하’ 웃고 나서 말했다.
“산신령 꿈이 아니라 ‘개꿈(맞지 않는 허황된 꿈)이니라.”
“개꿈?”
“꿈이라는 것은 다 맞는 게 아니잖느냐? 너희도 꿈을 꾸어 보아 알겠지만, 맞지 않는 꿈을 수도 없이 많이 꾸지?”
“네.”
“저 사람도 그런 개꿈을 꾼 거야.”
“아, 네.”
“그러니 무슨 죄가 있느냐? 어서 풀어 주어라.”
포졸들은 부리나케 들창코를 풀어 주었다. 들창코가 소년에게 불쑥 말했다.
“어쩌면 어젯밤에 꿈속에서 뵌 산신령님처럼 생기셨나이까? 진사 어른, 그 산신령님 아드님이라고 해도 곧이듣겠나이다.”
“헛헛헛…….”
소년은 또 한바탕 웃고 나서 들창코에게 물었다.
“네 소원은 무엇이냐?”
들창코가 배 서방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친구와 함께 무과 시험을 보아 합격하는 것이옵니다.”
“호, 그래? 그거 어렵지 않지. 나같이 문과(문관을 뽑는 과거)에 합격하려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지만, 무과 정도는…….”
이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배 첨지가 나서서 말했다.
“하이고, 제 아들이 툭하면 저를 닮아서 비칠거립니다요. 그러니 어떻게 무과 시험을 보옵니까?”
“비칠거린다? 하면, 어떻게 비칠거리는지 한 번 구경 좀 해 보자.”
소년 진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배 첨지는 아들에게 그런 시늉을 해 보이라고 하였다. 상것들이니, 아무리 나이가 어린 진사이지만 그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배 서방은 벌떡 일어나서 평소에 아버지에게 돈을 타려는 방편으로 해 오던 몸짓을 해 보였다. 그것은 보통 사람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기묘했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하면서도 몸을 발딱 일으키고, 뒤로 곧 자빠질 듯하면서도 몸을 불쑥 일으켰던 것이다.
웃어 가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년 진사가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