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E MORE POWERFUL THAN YOU THINK
Copyright © 2017 by Eric L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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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99%의 힘
시민 권력
초판 1쇄 발행 2017년 7월 20일
지은이 에릭 리우
옮긴이 구세희
펴낸이 강경혜
펴낸곳 저스트북스
책임편집 최서윤
표지디자인 오필민 본문디자인 이하나
마케팅 이종률
출판등록 2016년 2월 11일
주소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45 메세나폴리스 101-3601
전화 010-6321-4744
팩스 070-8627-4744
이메일 khkang11@gmail.com
종이책 ISBN 979-11-960894-0-5 03340
전자책 ISBN 979-11-960894-1-2 0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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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으로 만든
민주주의의 진보
최근 몇 년 동안의 한국은 시민 권력의 사례 연구장 같은 곳이었다. 민중이 들고 일어나 사람, 아이디어, 자금, 사회 규범 등을 조직하여 정치판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한국의 시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이 책에서 내가 설명한 시민 권력의 법칙들과 그 법칙에서 비롯되는 행동들을 보다 건설적인 방식으로, 여러분의 공동체와 국가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회가 포용적일수록, 그리고 권력을 더 널리 순환시킬수록 장기적으로 더 큰 회복력을 갖게 된다. 오늘날의 미국은 이 심오한 진리를 잊을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은 부디 이것을 실행할 수 있기 바란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_시민의 힘으로 만든 민주주의의 진보
프롤로그 _이모칼리와 포터스빌
제1장 시민 권력의 시대
• 우리의 순간, 우리의 권력, 그리고 우리의 계획
우리는 지금 어떤 순간을 맞고 있나
오늘날 권력은 어떻게 움직이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계획
제2장 권력을 이해하는 방법
• 권력은 신중히 다뤄야 할 선물이다
권력이 선물인 이유
권력 생태계 속의 우리 역할
• 가장 핵심적인 권력의 3대 법칙
법칙 1_권력은 집중된다
법칙 2_권력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법칙 3_권력은 무한하다
이 법칙들은 어떻게 펼쳐지는가
• 정당성과 권력 구조의 메커니즘
포용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권력
권력 구조의 메커니즘을 알아야 하는 이유
시스템을 꿰뚫어보고 전체를 통찰하기
경험만큼 확실한 이해는 없다
제3장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
• 게임, 이야기, 등식을 바꿔라
올바른 권력 행사를 위한 세 가지 필수 과제
• 게임을 바꿔라
전략 1 _무대를 조정하라
전략 2 _규칙을 다시 조작하라
전략 3 _상대방의 계획을 공격하라
• 이야기를 바꿔라
전략 4 _대안을 묘사하라
전략 5 _여론을 조직하라
전략 6 _싸움을 전설로 만들어라
• 등식을 바꿔라
전략 7 _기하급수적으로 행동하라
전략 8 _호혜적으로 행동하라
전략 9 _권력자처럼 행동하라
제4장 권력의 이유
• 세 가지 질문, 고결, 포용, 이익
권력과 도덕적 선택 앞에서 고결함을 지키는 법
포용을 지속하는 사회는 더 앞서간다
나의 이익과 공동의 이익이 갈등할 때
우리 앞에 놓인 과제
에필로그 _그들과 우리
감사의 글
참고문헌
이모칼리와
포터스빌
잘 익은 붉은색 토마토를 하나 떠올려보자. 주방에 한 개쯤 있을지도 모른다. 있다면 가져다가 손에 쥐어보자. 그 무게를 느껴보자.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생각해보자.
토마토를 따는 이민자들
그 토마토는 6억 달러에 달하는 토마토 산업의 중심지 플로리다에서 수확한 것일 가능성이 꽤 높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플로리다 주에서도 무더운 남서부, 토마토 농장이 몰려 있는 이모칼리라는 곳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토마토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마디로 노예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땄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플로리다에 위치한 이모칼리Immokalee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가보지 못한 곳이다.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대부분 그곳에서 생산되는 방대한 양의 과일을 한번쯤은 먹어보았다. 토마토를 따는 일은 기계화할 수 없는 것이어서 수확은 언제나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불행히도 그 일을 하는 이들은 육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학대받고, 막대한 빚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또 따가운 햇살 아래 이루어지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수확한 토마토의 양(한 양동이 당 정해진 금액)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 그렇게 어렵사리 번 돈을 수시로 감독관들에게 빼앗긴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제기했다가는 권총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자물쇠 달린 컨테이너에 갇히기 일쑤인 그들은 멕시코나 남미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그들은 무력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고, 의지할 곳이 없었으며, 그들을 옹호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자신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모칼리 노동자연합
1993년, 그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몇몇이 지역 교회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함께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고, 그다음으로 단식 투쟁, 그러고 나서는 수백 킬로미터씩 계속되는 긴 단체 행진에 나섰다. 그렇게 그들은 이모칼리 노동자연합을 이뤘다.
가장 먼저 언론에서 이를 알아챘다. 그들은 급여 인상을 위해 싸웠고, 5년 뒤 마침내 농장주들에게서 인상안 합의를 얻어냈다. 그늘진 휴식 공간 같은 정말 작고 사소한 것들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입에 풀칠할 정도를 면하자 사람이라면 본디 갈망하는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싸웠다. 바로 존중과 인정이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투명인간 처지에서 벗어난 다음에는 비자발적인 강제노역이라는 체제 자체를 없애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들은 검찰과 손을 잡고 인신매매에 맞섰다. 수사와 기소를 반복해 1,200명이 넘는 농장 노동자들을 감금과 강제노동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역시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착취가 농산물을 대량 구매하며 가격인하 압력을 행사하는 대형 슈퍼마켓과 패스트푸드 체인들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2001년 최초로 패스트푸드 회사인 타코벨에 맞서는 농장 노동자 보이콧 운동을 조직했다. 마침내 4년 뒤, 타코벨의 모회사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고 공급망을 개선하는 데 동의했다. 이러한 승리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도움의 손길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맥도날드와 버거킹에 압력을 가해 타코벨과 같은 조건에 합의하도록 했다. 또한 페어푸드프로그램Fair Food Program이라는 운동을 조직해 식당과 소매 체인점들로 하여금 공정한 임금을 제공하고 연방법보다도 훨씬 엄격한 행동 규범을 준수하는 농장의 농산물만 공급받도록 했다.
바이어들은 한때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으로 벌었던 보잘것없는 금액(토마토 한 양동이당 1페니)만큼 기부금을 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교육을 위한 공동 기금을 조성하는 데 동의했다.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진 월마트도 2014년에 합류했다. 처음 시작 단계부터 1,000만 달러가 넘는 돈이 기금으로 마련되었다. 이렇게 이모칼리의 토마토 수확 노동자들은 공정한 기회를 위해 싸웠고 지금도 여전히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스스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니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영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남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지, 자신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이 사람들을 떠올려보라. 죽은 사람과 다름없던 처지의 이모칼리 노동자들이 힘을 모으고 함께 삶을 변모시킬 수 있었다면 누군들 그렇게 못하겠는가? 그들이 그리했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부터는 당신이 일하고 사는 곳을 떠올려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누가 이곳을 다스리는가?
생각만큼 단순한 질문은 아니다. 일단은 몇 군데 관공서나 공무원, 관리자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시장이나 시청 공무원, 지방자치단체 의원 등. 이번에는 렌즈를 더 넓혀보자. 어떤 기업들이 지역 경제를 이끌고 있는가? 이런 기업체에서는 누가 지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발언권을 갖는가? 조금 더 시각을 넓혀보자. 거래나 결정이 내려지는 영역은 어디이며, 그것은 누구에게 공개되는가? 누가 문제를 해결하고, 누가 실무를 보고 결정을 집행하는가? 언제나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단체나 연합체, 이해단체 등이 있는가? 다시 한 번, 누가 이곳을 다스리는가?
정답의 감을 잡았으면 다음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지금부터는 ‘포터스빌Pottersville 뒤집기’라고 이름 붙인 게임을 한번 해보려 한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고전영화 〈멋진 인생〉에서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자신이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비현실적 세계에서 그의 고향 베드포드 폴스Bedford Fall(신뢰와 상호협력, 민주적인 자부심으로 가득한 목가적인 마을)는 빈민가와 저질 술집, 전당포 들이 가득한 밑바닥을 향해 빠르게 곤두박질치는 포터스빌로 전락해 있고, 이 모든 것들을 소유한 건 바로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구두쇠 포터다.
〈멋진 인생〉이 개봉한 이후로 약 3세대 동안 부와 영향력이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손에 집중됐다는 면에서 미국의 많은 도시들이 베드포드 폴스보다는 포터스빌에 가깝게 변했다. 베드포드 폴스를 한쪽 끝, 포터스빌을 반대쪽 끝에 놓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그 사이 어디쯤에 해당하든,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상상을 해보자.
이런 식이다. 당신과 이웃들이 다른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부와 욕망의 힘에 의해 짓뭉개진 곳에 살고 있다면 그곳이 베드포드 폴스로 바뀌었을 때 어떤 느낌일까? 아니면 반대로 당신이 시민의 삶이 건강하고, 다양한 기회가 넘치는 곳에 살고 있다면 그곳이 포터스빌로 전락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이번에는 당신의 삶 속 다른 공간들을 이 실험에 대입해보자. 당신이 다니는 회사는 누가 운영하는가? 캠퍼스는? 주州는? 관습이나 문화, 규범 등을 바꾸고 싶다면 누구를 만나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가? 혹은 누구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수치심을 안기고, 누구를 칭찬해야 하는가? 아니면 원하는 변화를 얻기 위해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누가 동네를, 정당을, 클럽이나 단체를 좌지우지하는가? 누가 무엇을 어디에서 얻을지 결정하는가? 무엇이 공정한 기회라고 여겨지는가?
이 질문을 던진다는 건 곧 답변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모칼리의 이주노동자들은 〈멋진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지도 못했고 어쩌면 들어본 적도 없을지 모른다.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아마 그들의 문화 사전에 존재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포터스빌 뒤집기를 해냈다. 그들은 먼저 무력함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투명한 존재감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상상했다. 그런 다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변화의 씨를 뿌렸다. 그리고 이제 그 열매를 거둬들이고 있다.
상상 속이든 냉장고에 있든, 처음 이야기한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로 돌아가 보자. 그 안에 담긴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상을 느껴보자. 그리고 그 토마토를 이용해 스스로에게 이 단순명료한 사실을 상기시키도록 해보자.
우리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다음은 지난 몇 년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아랍의 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역시 우크라이나의 메이단 시위, 이란의 녹색 혁명,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 유럽 전역으로 번지고 있는 ‘분노한 시민들’이라는 뜻의 로스 인디그나도스, 홍콩 민주화 시위인 우산 혁명, 영국의 브렉시트, 아이슬란드, 폴란드, 한국, 에티오피아, 헝가리, 태국, 브라질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들.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Occupy Wall Street, 정치 운동인 티파티Tea Party 운동, 불법 체류자의 단계적 영주권 취득을 돕는 더 드림 법안, 흑인을 향한 폭력 및 인종차별 반대 운동인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인종차별과 빈곤에 대항하여 최저 임금 인상을 위한 $15 나우$15 Now, 미국 원주민 거주 지역인 스탠딩 록 보존 운동,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를 지지하는 ‘필 더 번Feel the Bern’ 운동, 마지막으로 트럼프 지지 단체인 ‘트럼프 트레인Trump Train’까지.
물론 이런 운동들이 모두 전통적 의미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아니, 대부분이 (아직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여전히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는 ‘우리가 99%다’로, 다시 ‘패스트푸드 포워드Fast Food Forwar(패스트푸드 식당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운동–옮긴이)’로, ‘$15 나우’로, 마지막으로 버니 샌더스 선거 운동으로 이어졌다. 티파티 운동은 급진적인 반체제 정신으로 무장하여 공화당을 장악하고,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승리를 뒷받침했으며, 새로운 포퓰리즘을 촉발시켜 기존의 선택지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유주의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바야흐로 시민 권력의 시대다. 그리고 오늘날 격동의 미국 정치판과 시민 생활보다 이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불법 체류자들의 커밍아웃, 처음엔 점진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갑자기 실현된 동성 결혼 평등 운동가들의 성공, 종교적 자유를 향한 역공,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 언론의 자유를 위한 시위, 성폭력 피해자들의 높아진 목소리, 총기 규제를 외치는 부모들의 출현, 원주민 문화 보호주의자와 백인 국수주의자들의 적나라한 분노, 미국 원주민 환경 운동의 부상, 정당 정치부터 소비 시장, 대중 매체, 대중문화까지 보통 사람의 진입을 막던 엘리트층의 소멸. 이 모두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과거의 방식은 끝났다. 그리고 아직 새로운 방식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다.
오늘날의 시민은 지금껏 독점적인 정치와 기업들이 우리에게 억지로 떠안겼던 똑같은 패키지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뉴스를 접하는 방식부터 음악을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방식, 먼 곳으로 이동할 때 교통편을 구하는 방식부터 지지하는 정당이나 성별, 인종 등으로 우리 자신을 규정짓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패키지는 낱낱이 해체되어 각 개인에 맞게 바뀌고 있다.
그것이 개인적 선택권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식의 낙관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분리와 해체는 동시에 우리의 결집력, 안전, 존엄성을 갉아먹기도 한다. 신뢰와 공동의 목적의식이라는 사회 계약은 이미 신기술에 의해 하나하나 해체되어 우리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세세히 나누고 분류해놓았다. 연금과 각종 수당, 생계유지에 필요한 최저 임금, 근로 안전 같은 집단적 경제 조치들은 이미 우버화(소비자와 공급자가 중계자 없이 인터넷을 통해 직접 만나는 공유 경제 시스템–옮긴이)와 세계화에 의해 분해되었다.
그 결과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미국인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일터에서는 결정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고 소모품 취급을 받는다. 소비자로서의 삶은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인간미도 없는 거대 브랜드들에 의해 지배된다. 시민으로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수동적인 구경꾼 노릇을 하거나 관료주의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지금 우리는, 온갖 재화는 과잉으로 가지고 있지만 특별한 관심이나 목적의식은 부족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가족과 친지라는 더 작은 공동체 속으로 숨어들다 보니 시민 공동체는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부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집중되면서 더욱 가속화된다. 1980년대 이후 소득 수준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국민소득 내 비중은 세 배로 뛰었다. 2010년 세계적 경제위기가 끝난 이후 경기회복으로 인해 발생한 소득의 90퍼센트 이상이 바로 그 상위 1퍼센트에게 돌아갔다. 40년 동안 평균 임금은 거의 변동이 없는 반면 CEO의 연봉은 열 배나 올랐다. 연방 세금 우대 조치의 혜택 중 절반 이상을 상위 5퍼센트가 가져갔으며, 저소득층 가정은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 어린이가 자라서 부자가 될 것인지 가난하게 살 것인지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부모가 부자냐 아니냐이다. 미국인이 굳게 믿는 사상적 잣대에 비춰본다면 이것은 매우 비非 미국적이다.
부의 집중은 곧 권력의 집중을 가져온다. 오늘날 의회는 부유한 개인이나 기업의 정책 선호에 따라 좌우된다. 정치학자 벤저민 페이지Benjamin Page와 마틴 길렌스Martin Gilens의 의회 활동 연구에 따르면 어떤 정책에 대한 평범한 미국인의 시각이 부자들의 시각과 충돌할 때 거의 항상 부자들의 시각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밝혀졌다. 평범한 미국인의 목소리가 경청의 기회를 얻는 순간은 오직 부유한 기부자들이 우연히 같은 목소리를 낼 때뿐이다.
도전자를 막기 위해 선거구를 조정한 의회는 개혁에서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공화당은 저소득 유색인종 유권자들이 투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날조된 선거 조작 혐의를 씌우기도 한다. 그리고 공화당, 민주당 할 것 없이 모두 월스트리트를 향하는 회전문을 통해 영원히 돌고 또 돈다. 우린 이미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우리의 정치 체제는 진정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새로운 소식이 있다면 이 유례없는 권력의 집중으로 인해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점화된 모든 형태의 권력에 맞서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더 큰 발언권을 얻기 위해 우파, 좌파, 그 밖의 모든 위치에서 피부색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들고 일어난 시민들의 중구난방 어수선한 시위가 바로 그것이다. 샌더스와 트럼프가 약속한 혁명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둘 중 한 명만이 연방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 대대적인 저항 운동, 이 혼란스럽고 전염성 강하고 여러 사상과 이념을 모두 아우르는 평범한 자들의 반란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시끌벅적한 시작일 뿐이다. (또한 끝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한창 진행중인 또 다른 거대한 변화에 의해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바로 백인다움과 미국인다움의 분리다. 유색인종 위주의 미국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사실(권력 구조는 여전히 백인에 의해 거의 지배되고 있고, 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들은 점점 기회와 수명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은 이미 공중에 떠돌고 있는 불안감과 기대감, 변동성을 더욱 확대시켰다. 이것은 인종차별주의자를 포퓰리스트로, 포퓰리스트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들었다. 또 사회정의 옹호자들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성급히 자기주장을 고집하게 만들기도 했다.
언젠가는 시민의 정치 생활이 안정적이고 새로운 평형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권력을 쥔 사람과 ‘민중’, 독점과 그에 대한 불만 사이에 많은 유형의 갈등과 마찰이 발생할 것이다. 노예 해방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말한 것처럼 “권력은 요구 없이는 그 무엇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요구하는 것과 그러한 요구가 관철되게 만드는 것 사이에는 확실한 격차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혁명에 수반되는 다양한 미사여구와 실제 혁명으로 이어지는 가치관, 체제, 습관, 기술의 실질적인 변화 사이의 격차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 ‘혁명의 격차’를 좁히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 또 당신이 더 나은 요구를 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 책은 시민이 삶 속에서 권력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과 그것을 주장하고 행사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들을 알려줄 것이다.
간단한 정의에서 시작해보자. 권력이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말이 위협적이거나 불쾌하게 들린다면, 아니면 이 말을 듣고 거북함이 느껴졌다면, 이제 이번 기회를 통해 그런 거부감을 극복해보기 바란다.
권력이란 우리가 입에 담기 불편해하고,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기 꺼리는 대상이다. 민주주의 문화와 신화 속에서 권력은 민중에게 있는 것이 원칙이고, 이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다. 거기에 무언가 덧붙이는 것은 불필요하며 환영받지도 못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에서 권력이란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분위기를 내포한다. 권력에 미쳤다거나, 권력에 굶주렸다거나, 권력을 움켜쥔다거나, 권력을 과시한다거나…. 권력은 이래저래 더러운 단어다. 권력을 자주 ‘목소리’나 ‘힘’과 같은 완곡한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라는 단어 자체는 불이나 물리학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선과 악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단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스스로 이용하려 노력하느냐다.
권력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능력이라면 시민 권력은 선거에서든, 정부에서든, 아니면 사회나 경제 분야에서든 시민이 공개적으로 행사하는 능력을 뜻한다.
앞서 권력을 설명할 때 ‘행동하게 만드는’이나 ‘행동하게 강제하는’이 아니라 ‘행동하게 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권력은 강제성을 갖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설득이나 전파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이라는 표현은 통용되는 신분증이나 서류를 갖춘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여권에 국적이 뭐라고 적혀 있든, 우리의 일상에 공헌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국가 안의 모든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시민 생활에서 권력은 폭력과 물리적인 힘, 부, 국가 행위, 발상, 사회 규범, 수치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띤다. 그리고 제도, 조직, 네트워크, 법과 원칙, 담론, 이념 같은 다양한 도관을 통해 흐른다. 이런 형태와 도관을 지도처럼 서로 얽히게 그려보면 우리가 소위 ‘권력 구조’라고 부르는 것이 만들어진다.
오늘날의 문제는 그런 지도를 그리기는커녕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권력에 관한 한 의도적으로 배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이 너무나도 많다. 권력이 무엇인지, 어떤 형태를 띠는지, 누가 그것을 갖고 있는지, 누가 그것을 갖지 못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행사되는지 등을 말이다.
그 결과 시민 생활에서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 즉 법안이 어떻게 법률이 되는지 이해하는 건 물론이고, 인맥이 어떻게 보조금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선입견이 어떻게 정책으로 바뀌는지, 아니면 슬로건이 어떻게 하나의 운동으로 변모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시민 대다수의 무지 속에 만들어진 빈 공간을 차지하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쉬워졌다.
인맥은 어떻게 보조금으로 이어지는가? 정부 관료가 민간 기업 로비스트가 되어 예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의 관계를 이용해 기업에 도움이 되는 혜택을 가져다주는 식으로 아주 매끄럽게.
그럼 선입견은 어떻게 정책으로 바뀌는가? 정지 신체 수색권(경찰관이 길거리에서 아무나 임의로 멈춰 세우고 질문과 수색을 할 수 있게 한 권한–옮긴이)처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슬로건은 어떻게 하나의 운동으로 변모하는가? 티파티 운동가들이 미 해병의 초창기 슬로건이기도 했던 “나를 밟지 마라Don’t Tread on Me”라는 말을 끌어들인 것처럼 변모한다. 혹은 블랙 라이브즈 매터가 해시태그를 운동으로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바이럴 방식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보지도 못하고 알아보려 하지도 않는다. 이런 무지와 무관심, 권력 문맹의 상당 부분은 고의적이고, 바로 이러한 점이 문제를 더욱 가중시킨다.
권력을 둘러싼 이 모든 일들을 추잡하다고 여겨 정치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거둬들인 채, 지역 사회 봉사나 직접적인 행동만 하려고 하는 젊은이들.
그저 데이터를 더 많이 수집하고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권력 불균형이나 남용을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고, 기술 네트워크는 본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믿는 기술 전문가들. 기업만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좌파 성향의 사람들. 그리고 정부만이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우파들. 둘 다 편파적인 분노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좋은 일들은 그냥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 나쁜 일들도 그저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믿는 냉소적인 사람들. 운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모두 자신의 운은 미리 준비된 것이거나 어쩌다 얻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권력의 결과로 능히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대신 그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Charles Wright Mills가 저서 《파워 엘리트The Power Elite》에 썼듯 “둘 중 한 가지 시각(모든 역사는 음모라고 믿거나 모든 역사는 흘러가는 물결이라고 믿거나)을 받아들이는 건 권력이 갖는 여러 사실과 권력자들의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과 같다.”
시민들 사이에 조금씩 체념이 퍼졌다. 그 결과 오늘날 시민의 참여나 지식, 교류, 인식의 수준은 맥이 풀릴 정도로 낮다. 정치적 삶은 일련의 전문가들, 즉 돈을 굴리는 사람, 메시지를 퍼뜨리는 사람,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청 주듯 넘겨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을 소위 ‘호구’처럼 느낀다. 때문에 사회 체제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배우고 싶은 의욕은 더욱 꺾일 수밖에 없다. 이 만연한 권력 문맹은 악순환을 통해 사회 내 기회와 부, 영향력이 집중되는 현상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민학을 권력에 대한 교육과 학습으로 재정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어쩌면 지금이 지난 세기보다 더 절실하다.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당신 몫까지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빌려, 당신의 지역 사회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가로채서, 심지어 때로는 당신이 원하는 바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이다.
권력은 집, 직장, 광장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무대에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 책에서는 일단 정치와 시민의 삶 속 권력, 그러니까 우리가 민중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런 권력에 있어 핵심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누가 의사결정을 내리는가?
복잡한 사회에서 집단으로서 존재의 면면은 셀 수 없이 많은 겹으로 쌓인 무수히 많은 의사결정의 결과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래 전에 내려진 의사결정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사결정도 포함된다.
생각해보라. 우리 마을에는 어떻게 철도가 깔렸으며,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 할지는 누가 결정했는가? 왜 어떤 사업주는 세금 우대를 받는 반면 어떤 사업주는 받지 못하는가? 왜 이 지역사회센터는 보조금을 지원받는데 저곳은 못 받는가? 왜 유치원 대신 교도소를 새로 짓는가? 누가 그런 것을 결정했는가?
어떤 시에서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를 보호하기 위한 반차별 법령을 통과시켰는데 해당 주에서 그 법령보다 우선하는 법안을 내놓았다고 치자. 그때부터는 그 지방 정부의 법률뿐 아니라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논쟁까지 벌어지게 된다. 어떤 정당에서 대표자를 할당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한 후보의 정책이 그 시스템에 반발하는 경우, 이 분쟁은 의회 규정이라는 언어로 펼쳐지지만 사실 더 깊숙한 곳에서는 알력과 ‘거리의 압력’의 형태로 발생한다.
누가 의사결정을 내리는가? 모든 정치는 그 의문을 중심으로 돌고 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답은 혼란스러울 만큼 수시로 달라진다. 권력에 문맹이라면 누가 영향력을 가졌는지, 어떻게 권력이 행사되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쓸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의문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전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책은 자기 계발 측면에서 본 개인의 힘 키우기를 다룬 책이 아니다. 여기에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같은 건 없다. 마키아벨리의 철학적 관점에서 본 권력론도 아니다. 상사를 뒤에서 조종하는 법이라든가, 직장 내 경쟁자를 몰아내는 방법 같은 건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권력 다툼에 휘말린 조정 대신이 아니라 시민의 시각을 제시한다.
시민의 시각은 그 정의상 일단 개인의 시각보다 더 의미가 크다. 전체의 일원이자 공동체에 공헌하는 자인 시민은 그 정의상 사회적인 맥락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바라보는 시민의 시각은 이타적이라고 볼 수 없다. 때로 꽤 이기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 계발과 발전이 사회로부터 분리된 한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시민 권력은 집단 속 정체성과 행동, 즉 어떻게 우리가 함께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다룬다.
미리 밝혀둘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이 책은 강자나 이미 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약자와 도전자들을 위한 것이다. 현 상태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변화의 동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변화는 좌파든 우파든 어디에서나 시작될 수 있다. 좌와 우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경우도 많다. 어쨌건 이 책은 권력을 독식하기보다 민주적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 다룰 것이다.
앞으로도 이야기하겠지만 독식은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울 뿐 아니라 체제 면에서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우리 사회를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권력과 권력의 이해 능력을 최대한 널리 퍼뜨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권력의 언어를 이해하고 쓰는 것은 단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낯선 외국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고 상상해보자. 그곳의 언어를 읽거나 쓸 줄 모른다면 삶은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거리의 표지판, 상점 간판, 신문, 공공 안내문 등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경우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 수 없으므로 사기의 쉬운 표적이 된다. 별것 아닌 일상적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며,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킬 기회로부터 차단된다. 모든 면에서 목소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생존은 할 수 있겠지만 절대로 잘 살 수는 없다.
권력을 읽고 쓰는 법을 모르는 것 역시 이와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권력은 언어다. 문법도 있고 구문론도 있다. 우리의 욕구와 필요를 표현하며, 이를 협상하고 충족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권력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포부와 안녕에 해를 끼친다.
권력을 이해하는 능력은 곧 권력의 무엇, 어떻게, 왜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앞으로 이 책이 다룰 내용이다. 2장에서는 권력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을 새로이 상상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시민 생활의 패턴을 결정짓는 것은 물론, 우리의 권력을 부주의하게 그냥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순환시키도록 도와주는 권력의 핵심적인 3대 원칙을 알아볼 것이다.
3장에서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 구체적으로 말하면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시민의 경우 위의 세 가지 원칙 말고도 각각 어떤 세 가지 전략을 이용해야 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마지막 4장에서는 왜 시민 권력을 가져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도대체 어떤 목적과 이유로 정치 행동의 요소와 전략들에 대해 배워야 하는가? 영향력을 원하는 우리의 욕구에 어떤 도덕적 목적의식과 윤리적 기반이 필요한가?
각 장마다 과거와 현재의 실제 사례들을 살펴볼 것이다. 고백컨대 대부분의 사례는 현대 미국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맹목적 애국심 때문도, 편협한 사고방식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내가 무엇을 가장 잘 아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자신이 직접 처한 상황 속에서 사례를 이해하고 결론을 도출하기가 더 쉽고, 그럴 용의도 더 커지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념적으로 다양한 범위를 넘나드는 사례들을 살펴보려 한다. 여기에서 만나게 될 몇몇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라든가 신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련한 시민은 어디에서든 교훈을 찾아내는 법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아직까지 눈치 채지 못했을까 봐 말해두건대 나는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객관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나는 진보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각을 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 합동 시민 행동, 저술 활동 등을 통해 실행에 옮기려 애쓰는 한 시민으로서 이 책을 쓴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아큐파이의 좌파부터 티파티의 우파,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노력하는 교차 이념적 조직인 ‘시티즌 유니버시티Citizen University’의 창립자로서 글을 쓰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공통의 관심사를 찾는 것을 독려한다. 또한 언뜻 보아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협력관계와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상호부조를 통해 참여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한다. 때로 정책과 지적 패러다임에 동의하지 않기도 하지만, 지금이 굳건히 자리 잡은 권력의 독점자들을 몰아내고 시민 권력을 더욱 높일 때라는 것만은 누구나 동의하지 않는가.
나는 야구광이라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야구와 관련된 표현을 많이 사용하곤 한다. 나는 뉴욕 북부에서 자란 뉴욕 양키스 팬이다. 보스턴 레드 삭스는 정말로 싫어한다. 그런데도 야구라는 경기의 기본적인 건전성과 안녕에 대해서만큼은 보스턴 레드 삭스 팬과 똑같은 관심을 갖고 있다. 야구 경기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야구를 배우는 사람을 위한 지원이나 기반이 늘어날수록, 게임이 덜 부패되고 덜 조작될수록,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엄격한 벽이 낮아질수록, 모두에게 더 바람직해진다고 믿는다.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에 관계없이 일단은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병들지 않도록, 모든 면에서 번창하도록 만들자. 그런 다음에는 우리 양키스가 레드 삭스를 얼마든지 곤죽을 만들어도 좋다.
오늘날 시민의 삶은 전반적으로 매우 약하다. 수십 년에 걸친 민주주의의 쇠퇴 속에서 트럼프 정권이 태어났다. 한때 사람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던 클럽과 각종 협회들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믿을 수 있는 지역 언론이 증발하고 있다. 각종 음모나 부패를 캐는 탐사 저널리즘은 그보다 더 찾기 힘들어졌다. 학교에서 시민의 삶에 대한 교육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남은 곳에서는 단조롭고 지루한 “논란을 가장 덜 일으킬 수 있는 최소한의 내용”만 가르쳐 공민학을 재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공민학은 심하게는 모세를 미국의 헌법 제정자 중 한 명으로 부르거나 노예를 ‘노동자’라 표현하는, 역사에 눈이 먼 광신도들에 의해 날조되어버렸다.
이런 스포츠, 즉 공민학은 병이 들었다. 그리고 병든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다.
지금부터 이것을 치유하는 일을 함께 시작해보자.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력을 더러운 단어라고 생각할까? 그것이 강제성과 폭력성을 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권력을 인간 본성 중 최악의 부분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 물론 권력이 온갖 형태의 지배나 폭력, 혹은 그 이상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국 정치인이자 역사가인 존 댈버그 액턴 경1st Baron Acton of Aldenham의 “권력은 부패한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권력에 대한 가장 유명한 격언인 것도 그것이 우리의 가장 심오한 직관과 일치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를 빌려 권력을 대하는 조금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조금 다른 시각이라고 해야겠다. 이것은 액턴 경의 격언처럼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열이나 빛, 무게 같은 것들이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존재하는 것처럼 나의 제안은 직관보다는 사실에 가깝다.
우리의 시각은 언어, 그중에서도 우리가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에 특히 큰 영향을 받는다. 앞서 나는 권력이 불과 같다고 말했다. 그것이 본디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고 두 방향으로 모두 사용이 가능하기에 우리가 완벽히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이다. 이런 비유는 권력을 하나의 도구나 연장으로 생각하게 한다. 권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의 인성이 달리 평가된다.
비유를 한 가지 더 제시하겠다. 권력은 물과 같다. 그것은 항상 우리 주변을 흐른다. 때로는 역류나 강한 저류처럼 혼란스럽게 흘러가는 액체의 형태를 띠며 실생활에 적용된다. 때로는 이미 정해진 법안처럼 굳어진 고체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정책이 곧 얼음의 형태를 띤 권력 아닌가. 또 때로는 공기 중의 수증기처럼 보이지 않게 우리의 행동을 조종하기도 한다. 신념이나 이념, 감정 같은 것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시각은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도덕적 상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권력을 무엇으로 상상하든, 즉 불, 물, 질량, 힘, 아니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개념화시키든 간에 우리는 권력을 담는 그릇도 권력의 대상도 아니라는 점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진실이다. 우리가 바로 권력의 원천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를 통과해 흐르거나 우리에게 작용하는 권력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권력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권력을 내어준다.
그래서 난 권력이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힘이 강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순진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틀린 생각을 고집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지금부터 자세한 설명을 해보겠다.
권력이 선물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권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할 종교적인 방법도 있다. 많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신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 즉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게 하는 그 힘을 신성한 선물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곧 창조의 힘이다. 신학자 앤디 크라우치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절은 ‘그렇게 만들어라’라는 명령의 정신이 아니라 ‘있게 하라’라는 초대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힘은 강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만들고 실현하는 것, 번영의 불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게 모태 신앙은 없다. 건국이념을 바탕으로 한 세속과 영성이 결합된 미국만의 시민 종교를 내가 믿는 종교라고 했을 때, 나는 인간의 존엄성은 자신과 자신의 세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자유와 힘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그런 힘, 권력은 선물이자 인간의 생득권이다.
우연찮게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같은 미국 시민권자들은 특정한 형태의 특권으로 그 보편적인 선물을 포장한다.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받은 것이니 자신의 힘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평생 동안의 공헌과 다양한 행동을 통해 갚을 수 있다고 말이다.
둘째, 권력은 재능이라는 면에서 선물과 같고, 우리에게는 그 재능을 전파하고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누군가를 타고난 화가나 가수, 운동선수라고 이야기하는 건 곧 그 사람에게 무언가 특별하고 귀한 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에는 그 사람에게 특별한 재능을 더욱 가꾸어 세상과 나눌 책임이 있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양도 불가능한 권리뿐 아니라 양도 불가능한 의무도 함께 받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일종의 순환 작용이 함께한다고 볼 수 있고, 이 순환은 영구적이다. 《더 기프트The Gift》라는 책에서 저자 루이스 하이드는 진정한 예술을 끝없는 선물 교환의 순환 과정이라 설명하며 예술과 창의성을 일종의 상품으로 여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경고한다. 예술을 상품화시키는 사고방식은 신뢰와 애정이라는 인간적 유대감을 말살시킨다. 하이드의 시각으로 본 재능은 단순히 시장을 위한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선물이다.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끝없이 재활용되고 돌고 도는 진정한 권력은 그 영원한 세월에 비하면 짧디짧은 찰나의 순간 그것을 쥔 자들에게 남을 위해 베풀 것을 요구한다.
셋째, 권력이 선물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문자 그대로 권력은 선물처럼 우리가 남에게 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점을 가장 강조하고 싶다. 권력은 선물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기관은 모두 우리가 그것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권력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우리 대부분은 그 사람이나 기관에 권력을 넘겨준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처럼 경화되고 부패한 민주주의 사회에 살든, 아니면 당신이 하는 일과 배우는 것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독재 사회에 살든, 사회가 우리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넘겨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행사하는 한 표는 어차피 중요하지 않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