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련 ————
• 정신분석학 박사
• 프랑스 국가공인 임상심리학자 및 심리치료사
•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원장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석사, 렌느2대학에서 임상심리학 및 아동청소년 임상심리학 석사를 마치고, 파리7대학에서 정신분석학 박사를 취득했다. 프랑스 빌–에브라르 병원 산하 오베르빌리에 아동청소년병원, 기욤 레니에 병원 산하 이제르 아동청소년병원, 생브리외 아동청소년 메디컬 심리센터 등에서 임상을 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하고, 고신의대 ‘인문사회의학·행동과학 연구소’ 객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정신분석』, 『자크 라캉 세미나 11』(공역) 등을 번역했다.
어른 1, 어른 2, 어른 3
퍼즐 맞추기는 매력적인 놀이입니다. 하지만 퍼즐 조각을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매우 난감해집니다. 다른 것으로 끼워 맞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찾아도 찾지 못하면 그냥 빈칸을 남긴 채 그 퍼즐은 실패작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대체가 불가능하다면 퍼즐 조각을 잃어버렸을 때처럼 무언가 어긋나버려도 해결할 방도가 없습니다.
아이의 성장은 일차적으로는 생리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와 더불어 ‘이미 존재해온’ 사회와의 관계를 만들어내야만 성장은 완수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아이가 ‘내 것’을 잃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뜻인 동시에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기존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퍼즐 맞추기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것’을 잃으면 모든 게 망쳐질 것 같아서 절대 잃을 수 없는 경우, ‘내 것’을 잃었는데 대신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경우, 다른 것이 주어지지만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죠. 어딘가에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고정된 요소가 있어서 대체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이라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묶이는 객관적인 근거들, 일반적이고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우리에게는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체질, 기질, 성질, 감정…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각자에게는 일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저마다 다르게 생긴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죠. 누구든 다른 사람과 같은 사람 취급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굳이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이의 성장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항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간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보편성과 고유성, 혹은 객관성과 주관성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이가 그 두 개의 세상을 자신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이의 보호자들의 역할인데 그 점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요컨대 문제는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보호자는 ‘무엇을 보호해줄 것인가’입니다.
아이의 보호자는 누구보다 부모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하려는 또 다른 보호자는 선생님입니다. 모두 아이에게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어른이면서 아이와 가장 가까이, 가장 오래 접촉하는 어른입니다. 기존 사회와 아이, 양쪽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대는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시대라고 합니다. 지식의 체계나 제도, 시스템과 아이 양쪽의 경계에 자리 잡고 중재를 해주던 역할이 생략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그 역할이 사라져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란이 일어나는 건, 역할을 잃고 이름만 맡고 있는 경우입니다. 자리를 맡아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죠.
어른이 사라지는 시대를 논하기 전에 여전히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그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어른들, 부모와 선생의 역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할은 기능의 수행입니다. 말하자면 부모의 기능, 선생의 기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라고 말했지만 정확히는 엄마의 기능과 아빠의 기능입니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엄마는 아이와 맨 처음 만나는 어른입니다. 따라서 엄마의 기능은 아이의 생존을 위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아빠는 그런 엄마와 아이 사이에 나타나는 어른입니다. 아이를 엄마로부터 분리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람을 부모라 하고, 배 속에 아이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여자를 엄마, 정자를 제공한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말하는 엄마와 아빠는 아이에 대한 역할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이때 엄마와 아빠의 각자의 기능이 수행되는 데는 그 순서와 시기가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어른 1, 어른 2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일반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는 어른 1의 기능을 엄마라는 여자가, 어른 2의 기능을 아빠라는 남자가 수행하는 사회는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핵가족 형태의 가족 시스템에서 가장 표준적인 것으로 여기는 역할 분담입니다. 사실 그 자리에 누가 와도 가능합니다. 남녀가 바뀔 수도 있고, 생물학적 부모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를 만들고,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방금 언급한 그 기능으로서의 엄마와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엄마의 기능을 남자가 수행할 때, 혹은 엄마와 아빠의 기능을 둘 다 여자가 수행할 때 등 각각의 경우 모두 동일한 효과와 결과에 이르지는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다른 결과에 이를 수 있지만, 그 기능이 제대로 수행된다면, 아이가 스스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보루는 지켜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선생의 기능은 아이를 지식 체계와 잘 접목시켜주는 데 있습니다. 어떤 지식을 얼마나 잘 이해시키고 전달하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그 지식과 만날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일입니다.
성장을 통해 아이는 ‘내 것’을 잃고 ‘기존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아이가 우선 ‘내 것’을 만들어냈고, 그에 대해 어떤 상실을 경험했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의 보호자들은 아이가 이렇게 ‘내 것’을 만들고, 잃고, 대체하는 과정을 감내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기존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것’은 무엇일까요? 잠시 ‘내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 몸, 내 생각, 내 감정, 내 물건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곧 그것들이 과연 순수하게 내 것인지, 아니면 기존 사회의 것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이미 기존 사회의 것을 받아들였다는 의미겠죠. 그렇다면 아이의 경우는 어떨까요?
아이가 자신의 것으로 타고나는 건 오직 몸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몸인가 하면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무지하고 무능한 몸입니다. 그 몸이 서서히 능력을 갖추고,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 생각, 경험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성장입니다. 아이는 그렇게 자기 몸 하나 쓰는 일에서부터 무언가가 외부로부터 덧붙여지고, 원래 갖고 있던 것을 잃게 되고, 그것이 대체되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겪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모든 것을 아이 혼자 겪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동물에 비해 턱없이 나약하게 태어난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살펴주고, 이후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 함께합니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니, 그들이 아이가 ‘내 것’을 만드는 데 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애초에 ‘내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에도 사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죠. 가장 먼저는 부모의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가 부모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떻게 아이의 ‘내 것’이 만들어지는지를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이는 성장이 아이의 독립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이가 여러 가지 능력을 배양하여 혼자 쓸 수 있게 되는 일이 아닌 이유를 이해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우리는 흔히 의존관계, 애착관계 등으로 부르지만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감정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부모와 아이 사이에 그런 관계들이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유대감, 의지, 사랑, 실망, 미움 등 우리가 매일 느끼고 겪는 감정들을 부모와 아이도 겪습니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의 관계의 핵심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부모와 아이를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사이로만 여기게 되면, 둘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좋은 감정으로 유대를 맺고, 부모는 아이에게 만족스럽고 긍정적인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베풀 것인지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쉽게 말해 아이를 많이 사랑해줄수록 좋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많이 사랑해주고, 좋은 것들을 부족하지 않게 주고,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관계만으로 아이의 성장이 보장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관계도 필요하겠죠. 하지만 그것을 언제, 어떻게, 누가, 무엇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모든 경우가 같은 결과를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보다 풍요로워서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오랫동안 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왜 갈수록 괴로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지, 왜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니, 모든 조건이 좋아진 지금이라면, 그런 문제들이 적어도 줄어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물어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의 성장 과정과 그 속에서의 어른들의 역할을 좀 더 면밀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성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아이가 ‘내 것’을 모두 잃고 빈손으로 사회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것’이 사회 밖으로 버려지게 됩니다. 아무 흥도 없이 시늉만 하며 살거나, 혹은 외부로 고립되어버리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겠죠. 아이가 ‘내 것’을 꼭 쥐고 놓지 않아도 되게 지켜주는 것이 어른의 일도 아닙니다. 그것 역시 사회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어려움에 부딪혀 곤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통해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저의 직업이 정신분석가이자 임상심리사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가 문제의 지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을 때는 일이 잘되고 있을 때라기보다는 무언가 삐걱거리는 지점이 있을 때입니다. 문제가 어디에서 왜 생긴 건지를 알아봐야 일이 잘되기 위한 조건을 추려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경계는 매우 모호합니다. 우리 모두는 정상적이면서 또 동시에 비정상적이기도 하니까요.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잘 이행하고 있는 어른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운 어른들, 무엇을 하고는 있지만 확신이 없는 어른들, 혹은 해야 할 일을 오해하고 있는 어른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제법 적절한 해법들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 여름
이수련
차례
| 들어가며 | 어른1, 어른2, 어른3
― 1부 —
애착, 깨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반드시 잃어버려야 할 사랑
애착의 반전
엄마의 사랑이 아이를 압도할 때
미래라는 시간은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 2부 —
아이는 아빠의 세계로 초대받고 싶어 한다
부모의 욕망이 아이의 자리를 만든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되고 싶다
아이는 아빠와 어떻게 만나는가
아빠에 관한 신화
아빠는 왜 아이의 친구가 될 수 없는가
아빠의 징표
― 3부 —
어떻게 배움의 세계로 들어서는가
즐거움의 원천에는 엄마가 있다
상실, 배움의 전환점
‘나’로서 즐기는 배움의 조건, 규칙과 관심
― 4부 —
학교, 성장은 상실을 동반한다
아이에게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의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을 때
지식의 역할
공부에서 자신의 무대를 지키는 법
아이는 응답을 기다린다
| 나오며 | 아이의 삶을 증언해줄 사람들
•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어도 힘들고 괴로울 때면 우리는 여전히 엄마를 부르곤 합니다. 외롭거나 속상할 때, 놀라거나 겁이 날 때 무심코 “엄마”라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는 그렇게 엄마를 불렀습니다. 배가 고파도, 뛰다가 넘어져도, 찾는 물건이 없어도,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를 찾았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변한 게 없나 봅니다.
어른이 된 우리가 엄마를 부르는 건 엄마에게 뭔가를 정말로 기대해서는 아니겠죠. 나직이 “엄마” 하고 부르면 마음이 애틋해지고 눈시울도 붉어지지만 그렇다고 당장 엄마를 만나러 달려가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그냥 그렇게 잠시 감동에 휩싸이고 지나갑니다. 게다가 막상 엄마를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애틋하지만은 않다는 건 꽤나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간절하지 않은 걸까요? 아니면 단지 우리 마음이 변덕스러운 것일까요?
사실 어른이 된 우리가 엄마를 부를 때, 우리가 진짜 부르는 사람은 현재의 엄마가 아니라 어린 시절 나만을 바라보던 과거의 엄마입니다. 어렸을 때,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해주고 귀하게 아껴주던 엄마 말입니다. 그때 엄마에게 나는 세상의 전부였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빛나고 소중한 존재였죠. “엄마” 하고 부르면서 우리는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준 그때의 엄마와 그때의 나를 그리워합니다. 이제는 엄마도 나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때처럼 빛나는 존재가 아니고, 이제 엄마의 사랑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지만 이제는 초라해지고 만 자신을 보며 무력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떠올리며 자신감을 되찾고 힘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상황은 같은데 절망에 빠질 수도 있고 희망을 품을 수도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어린 시절 엄마가 베풀어준 사랑은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일까요? 훗날 내 아이도 아마 혼자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나지막이 “엄마”를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때 아이가 자신감을 되찾으려면 아이에게 어떤 사랑을 주어야 하는지, 내 아이가 더 이상은 나의 힘으로 보호할 수 없을 만큼 커버렸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부모의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지,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애착은 무엇을 위해 쓰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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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무 능력도 없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하나부터 열까지 보살펴줘야만 합니다. 보통은 엄마가 그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강조되는데, 그 이유는 지극히 분명하며 합당합니다. 만약 아이가 처음부터 강하고 전능한 존재였다면, 아이에게 엄마와의 애착관계 같은 건 아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혼자서도 세상에 나와서 잘 살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아이에게 엄마와의 애착관계는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대략 신생아 때부터 생후 6개월까지가 절대적인 애착관계의 시기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엄마는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아이를 보살핍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배설을 도와주고, 아프지 않게 살펴주는 등 엄마와의 애착관계는 아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데 그 첫 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엄마와 아이의 애착관계가 단순히 아이의 배를 채워주고 생존을 이어가게 해주는 데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스스로를 만들어갑니다. 엄마는 아이를 부르고 바라봅니다. 아이를 안고 거울을 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게 바로 너야”라고 말하죠. 이렇게 아이가 스스로를 알게 되는 것은 엄마를 통해서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아이가 스스로를 의미 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즉, 아이가 스스로를 만들어나갈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애착관계의 두 번째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런 애착관계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을 통해 알게 되고 만들어낸 스스로의 모습, 그런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믿음, 이를테면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 어디에 쓰이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아이가 엄마와의 애착관계를 끊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쓰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느껴야 혼자 설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비참한 모습으로는 의존관계를 끊을 수 없겠죠. 아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독립이 불가능하다면, 아이는 유아기의 어느 시점에 묶여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셀렌의 코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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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으로 염색한 앞머리에 높은 굽 샌들을 신은 셀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어폰을 낀 채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는 약간 놀란 얼굴이었는데 그 속에 뭔가 반가움 같은 것이 묻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메디컬 상담센터 대기실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셀렌은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실제로 결석 횟수가 너무 많아 학교에서 상담을 권유했다고 했습니다. 학교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그것도 겨우 몇 시간만 다녀올 뿐이었죠. 상담 시간에 셀렌이 학교 이야기를 하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 하는 얘기도 전부 부정적인 것들뿐이었습니다. 선생님들, 친구들, 학교 시설, 급식까지 학교에서 셀렌이 마음을 붙일 곳은 아무 데도 없어 보였습니다.
● 본문에 인용된 사례들에서 개인의 신상 정보와 관련된 사항들은 재구성했음을 밝혀둡니다.
셀렌은 아침마다 패닉 상태가 되곤 합니다. 특히 학교 갈 준비를 하느라 거울을 보고 옷을 입을 때, 갑자기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나갈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울음이 쏟아지거나 구역질이 납니다. 무언가 자기 모습과의 관계 속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 날 셀렌은 집에서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멍하니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셀렌에게도 열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코스프레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따라서 옷을 입고 분장을 하는 것이죠. 동양인인 저를 보고 셀렌의 얼굴이 밝아진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동양 문화에 호감이 생겼고, 한국의 대중음악도 즐겨 듣는다고 했습니다. 셀렌은 학교에선 외톨이지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과는 코스프레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만나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던 셀렌이 코스프레로 일이 생겼을 때는 기꺼이 외출을 합니다. 심지어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코스프레 전시회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죠.
셀렌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온통 자기 사진으로 채워져 있는데, 모두 코스프레를 한 모습입니다. 셀렌은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변신하고, 이런저런 변화를 주면서 사진을 찍어 올립니다. 제게도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아주 만족스럽고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죠. 거울 속의 이미지 앞에서 우울해지고 구역질이 나던 셀렌이 코스프레 분장을 하고 나면 자신만만해집니다. 코스프레를 한 채로라면 더 이상 자신만의 방 안에 숨어 있을 필요도 없죠. 셀렌에게 코스프레는 단순한 복장 놀이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주요한 지지대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지속되는 애착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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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렌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사실 엄마와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셀렌 엄마의 관심은 오직 셀렌뿐입니다. 셀렌이 중학교 3학년인데도 엄마는 셀렌의 하루 일과 전부를 함께 나누고 싶어 합니다.
“저는 엄마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요.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 전부요. 엄마가 물어보고 제가 대답해요.”
누군가의 완전한 통제 속에 살면서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일 때, 일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엄마와의 관계 속에 갇혀 있다는 건 다른 어떤 관계도 시작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셀렌은 집이 아닌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엄마와 단둘만의 세상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엄마와 셀렌 모두에게 행복이 아닌 고통을 주게 됩니다. 셀렌이 거울 속에서 확인하는 이미지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의 모습이 아닙니다. 셀렌에게는 엄마에 대한 의존을 끊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모습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구역질이 날 만큼 셀렌의 자아는 나약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셀렌에게는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그 역할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셀렌에게 애착관계를 끊을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충분한 사랑의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셀렌은 자신의 모습을 참을 수 없고, 엄마와 잠시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캐릭터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합니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전사가 갑옷으로 무장하듯이, 셀렌은 코스프레로 자신을 무장한 후에야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코스프레를 하면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하고, 엄마와 떨어져 다른 도시로 갈 수도 있습니다. 오직 코스프레라는 보조 장치가 있어야만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갖게 되고, 혼자서도 뭔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셀렌에게 코스프레의 역할이 또 하나 있는데,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코스프레 전시회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전에도 참가한 경험이 있고, 저와 상담을 하는 동안에도 꽤 규모 있는 전시회를 두 번 다녀왔습니다. 특이한 점은 그렇게 다른 도시를 갈 때엔, 셀렌 혼자서 씩씩하게 다녀오기도 하지만 온 가족이 함께 동행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셀렌의 부모님은 5년 전에 이혼을 했고, 셀렌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중학생인 셀렌이 다른 도시를 갈 때, 당일 다녀올 수 있는 일정이라면 엄마는 셀렌 혼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잠을 자고 와야 하는 경우에는 엄마와 셀렌의 여동생, 그리고 따로 살고 있는 아빠까지 함께 길을 나섭니다.
이렇게 다른 도시로 가서 코스프레 전시회에 참가할 때 셀렌은 특별히 엄마 옆으로 아빠를 불러냅니다. 이는 꼭 엄마와 아빠의 재결합을 의도한다기보다는, 적어도 엄마 옆에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셀렌의 말 없는 외침과도 같습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엄마 옆자리에서 비켜서는 것이죠. 셀렌에게 코스프레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완해줄 뿐만 아니라, 엄마와 분리되는 것에 부담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빌미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코스프레는 셀렌 스스로 찾아낸 삶의 지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셀렌은 그것에 의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바깥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상담은 그런 셀렌이 엄마 옆이 아닌 사회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상담을 시작하고 7개월 정도 지났을 때, 다행히도 셀렌은 중학교 졸업시험을 보기로 결정하고 학교에 가서 시험도 보았습니다. 직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옷 만드는 일을 배우기로 결정했는데, 물론 코스프레를 할 때 옷을 더 잘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건 셀렌이 집 밖을 나서기 전에 휩싸였던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극복하고, 학교에 나가 그 속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은 잃어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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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랑은 아이에게 힘과 자신감을 줍니다. 엄마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하던 아이가 엄마를 떠올리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게 되는 순간, 엄마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엄마의 사랑은 처음으로 나를 만들어주고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줄 가장 튼튼한 울타리이지만, 그 사랑이 그렇게 튼튼한 울타리가 되는 것은 아이가 엄마의 품을 떠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엄마가 베풀어준 사랑이 정말로 의미 있는 사랑이 되는 것은 아이가 그것을 얼마나 잘 잃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엄마가 준 사랑을 잘 잃은 사람만이 현실의 고통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잘 잃을 수 있으려면 그만큼 견고한 사랑의 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 “엄마” 하고 부를 수 있다면, 엄마의 사랑이라는 축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저 어린 시절의 영광을 추억하며 지금의 초라한 나를 확인할 뿐이라면 엄마의 사랑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잃어버릴 수 있을 만큼 견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으로 강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혼자서 세상으로 나올 용기를 가졌다면, 살면서 겪는 아픔들로 고통을 느끼고 좌절해도 다시 일어설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되는 것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은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아낌없이 듬뿍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사랑을 잃어버려야 합니다. 요컨대 애착관계는 그것이 반드시 끝나고 깨진다는 목표를 이루었을 때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애착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면, 엄밀히 말해 애착관계가 공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셀렌과 엄마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셀렌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엄마의 사랑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 너무 오래 지속되는 애착관계, 그것은 제 몫을 다하지 못한 애착관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애착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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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무언가를 달라고 하는 ‘요구’입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신생아가 먼저 무엇을 달라고 하지는 않겠죠. 아이의 울음, 표정, 몸짓 등에 그와 같은 의미를 입히는 건 엄마입니다. “응… 배고프구나”, “왜? 졸려?”, “아이쿠, 더웠구나.” 엄마는 아이의 모든 것을 엄마를 부르는 신호로 해석하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제공합니다. 엄마가 주는 것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자기가 울면 무언가 만족할 만한 것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 엄마가 주던 것을 얻기 위해 울게 됩니다. 눈짓이나 손짓, 표정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쪽에서 엄마를 알아보고 엄마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처럼 무언가를 달라고 하면서입니다.
특히 신생아가 엄마에게 달라고 하는 것은 배고픔을 채워주는 엄마의 젖(혹은 분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젖을 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느끼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젖을 달라고 하는 순간부터 아이는 심적으로 엄마에게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배고픈 아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그 단순한 요구가 아이를 엄마에게 매달리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엄마에게는 아이가 달라고 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 수도 있지만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바로 이 거절의 가능성에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엄마의 거절은 단순히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마, 나에게 응답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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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했지만, 만약 엄마가 주지 않는다면 아이가 받지 못한 건 엄마의 젖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받지 못한 게 한 가지 더 생깁니다. ‘내가 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주지 않았어. 엄마가 나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어.’ 엄마의 응답, 달리 말하자면 바로 엄마의 사랑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하는 건 그 사람이 그것을 줄 수 있다는 기대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라고 했을 때 받지 못하면 ‘달라고 했던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애초에 ‘달라고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까지 실망하게 됩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달라고 한 것을 주지 않겠다는 것뿐인데, 우리는 ‘왜 주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사로잡히면서, 마치 나 자신이 거부당한 것처럼 서운함을 느끼게 됩니다. 달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상대에게는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되고, 우리는 그 순간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맡기게 됩니다. 달라고 한 것을 받지 못할 때 더불어 받지 못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애초에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