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진재혁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은혜에 익숙하지만 정작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에서 영성을 적용하는 데 탁월한 저자가 은혜의 본질과 은혜로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은혜는 기독교의 정수이며 그리스도인이 보고 가야 할 등대다. 내가 얼마나 은혜에 빚진 자인가를 날마다 깨닫도록 돕는 이 책은 은혜의 강력한 힘과 말씀을 근거로 한 은혜의 속성과 구원, 겸손, 고난, 용서, 회복 등과 은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의 나침반을 항상 하나님께 맞추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이끈다.
저자는 미국 뉴비전교회를 담임하다가 2011년부터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아프리카 케냐의 선교사로 헌신하여 제3세계 리더들을 세우고 그들과 사역하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을 비롯, 다문화를 이해하는 저자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식견과 안목을 가진 목회자다. 그는 풍부한 목회 경험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지구촌교회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트리니티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M. Div.)를,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 석사 학위(Th. M.)와 리더십으로 철학 박사 학위(Ph. D.)를 그리고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D. Min.)를 받았다.
저서로 《언어의 영성》, 《당신은 진짜 크리스천인가?》, 《세상 중심에 서는 영성 리더십》, 《일상 영성의 힘》, 《부교역자 리더십》(이상 두란노), 《오늘 쓰는 영성》(생명의말씀사), 《아름다운 동역》(규장), 《기적을 살다》, 《고백》(이상 요단), 《리더가 죽어야 리더십이 산다》,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하나님》(이상 21세기북스) 등이 있다.
일상 은혜의 힘
지은이·진재혁
초판 발행·2017. 12. 18
전자책 발행·2017. 12. 28
등록번호·제1988-0000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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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사단법인 두란노서원
영업부·2078-3333 FAX · 080-749-3705
출판부·2078-3331
정가 : 12,000원
전자책 정가 : 8,400원
ISBN 978-89-531-3038-8 03230
E-ISBN 978-89-531-3049-4 0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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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서원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성령 받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던 장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8-20절의 정신에 따라 첫째 목회자를 돕는 사역과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사역, 둘째 세계선교(TIM)와 문서선교(단행본·잡지) 사역, 셋째 예수문화 및 경배와 찬양 사역, 그리고 가정·상담 사역 등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980년 12월 22일에 창립된 두란노서원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역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Prologue:
일상에서 은혜를 맛보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도 하나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에 삶의 나침반을 맞춘 사람은 가장 먼저 내가 얼마나 은혜에 빚진 자인가 깨닫게 된다. 또 은혜 안에 거하며 은혜로 충만한 삶을 맛보게 된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은혜를 영적으로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는 아버지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영적인 불구자였으나 아버지의 은혜로 새롭게 거듭났다. 내 힘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철저히 수동태다. 주어지는 것, 받는 것이다.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돕는 은혜, 일상 가운데 임하시는 은혜, 용서와 부르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인생을 맛보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은혜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본회퍼(DietrichBonhoeffer)는 나치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으며 은혜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무엇보다 은혜는 값비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된 존재다.”
당신은 이 은혜에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가!
은혜는 시작이자 끝이다
은혜에 관한 모든 것
“오늘 은혜 받았어?”
“다른 생각하느라 은혜가 안 됐어.”
설교를 듣고 난 뒤 성도들과 혹은 가족과 함께 나누는 대화 내용이다. 그런데 기존 신자들이야 이런 대화가 지극히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오늘 교회 예배에 나온 초신자에겐 대단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대화다. 은혜라는 말이 생소한 단어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이야기’(초신자에겐 설교가 그냥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은혜와 관련된 표현도 참 다양하다. ‘은혜 받으세요, 은혜가 되었다, 은혜가 많았다, 은혜롭다, 은혜를 끼쳤다, 은혜를 나누다…’. 표현이 다양한 만큼 은혜가 가진 색채도 다채롭다.
과연 은혜란 무엇일까.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다. 은혜라는 단어에 기독교의 진수가 거의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국에서 비교종교학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독특한 것이 무엇일까를 의논했다. 한 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입니다.”
그러자 다른 학자들이 반발했다. 다른 종교에도 신이 우리 가운데 오신 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이 아닙니까?”
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도 신이 환생하여 다시 태어난 일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때 C. S. 루이스가 일어나 한마디 했다.
“It’sGrace.”(은혜입니다)
루이스가 지적했듯 기독교가 타 종교와 차별되는 점이 은혜라는 것에 모두가 수긍했다. 그렇게 그날 종교학회는 기독교의 특별함을 ‘은혜’로 결론 내렸다.
기독교는 은혜를 빼고 논할 수 없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니 교회는 은혜 받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제자로서의 삶은 은혜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질문할 것이 있다.
은혜란 무엇인가?
먼저 사전적 의미로 살펴보자면 은혜란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이다. 무엇인가 더 주는 선물이나 은총, 축복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영어에서는 은혜를 ‘grace’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무엇일까. 성경은 시편 145편 8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145:8)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은혜는 영어로 친절하다는 뜻으로 ‘kindness’ 혹은 좋은 걸 해 준다는 뜻으로 ‘favor’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love’(사랑)라고도 한다. 모두 무엇인가 긍정적으로 도와주거나 베풀어 주는 선한 것을 의미한다. 흔히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 어떤 행동이나 행위로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행위를 통해 은혜를 베푼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한 번의 행동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끝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곧 은혜의 중심이고, 은혜의 근원이며,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이 곧 은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야 은혜와 마주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만날 때 은혜가 임하게 된다. 이쯤 되면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은혜와 그 의미가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십대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한 뒤 목회자로 헌신하면서 범죄 도시에서 복음의 역사를 일으킨 새무얼 채드윅(SamuelChadwick) 목사는 은혜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은혜는 자비 이상이며 사랑보다 더 위대합니다. 정의는 고결함을 요구하고 자비는 긍휼로 말미암습니다. 사랑은 대응과 감사와 반응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어떤 공로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어떤 선함도 내세울 수 없고 끌어올려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끝없이 흘러갑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 가치가 없는 자를 찾습니다. 은혜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합쳐진 것으로 죄인과 무례한 자, 배반한 자에게 손을 뻗칩니다. 은혜는 죄가 많은 자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만일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화목도 용서도 화평도 없습니다.”
채드윅 목사가 정의한 은혜는 사랑과 정의와 자비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은혜를 담은 성경 구절은 상당량에 이른다. 상황에 따라 다른 언어로 표현된 것까지 따진다면 성경은 은혜의 통로라고 할 정도로 은혜가 넘친다. 그렇기에 그 은혜를 더 잘 알아야 한다. 더 잘 느껴야 한다. 더 잘 누려야 한다.
은혜가 지닌 3無 속성
흔히 고유의 성질을 속성이라고 말한다. 이 속성이란 말은 대체로 사람을 포함한 개체에 사용되지만 추상적인 단어에도 사용된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몇 가지 속성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속성을 말씀을 통해 나타내셨다. 그 속성에는 세 가지가 없다. 즉 조건이 없고(무조건), 제한이 없으며(무제한), 제약(무제약)도 없다.
無조건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이 없다. 무조건적인 은혜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은혜가 임한다. 보통 무조건이라는 전제가 붙으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격과 상관없이’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 받을 대상의 상태와 관계 따위는 전혀 괘념치 않는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떠나 공 없이 주어지는 은혜,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주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럴 만한 권리를 가진 자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한 사람이나 5년, 10년 더 많이 봉사하고 사랑하고 수고한 사람이나 은혜 받을 자격이 없다는 점에선 똑같다. 모두 똑같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로마서 말씀처럼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쉽지 않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주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베푸셨다. 죄 많은 우리를 향해, 자격 없는 우리를 향해, 무조건적으로 베푸신 것이다.
우리는 의인도 선인도 아니다. 아니 도리어 최선의 모습이 아닌 최악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은혜는 받는 대상에 달려 있지 않다.
無제한
음주 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로 딸과 아내를 잃은 제럴드 싯처(GeraldSittser)는 그 참담한 심정을 《하나님 앞에서 울다》에 담아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발견한 통찰을 《하나님의 뜻》으로 펼쳐 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는 비극과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된 은혜의 신비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증언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사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이 비극을 겪었기 때문에 찾아온 변화도 잃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제한이라고 말한다. 흔히 상실과 고난에서 위로를 받고 즉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은혜로 여기지만 그가 깨달은 은혜는 느리고 더디고 평범한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또 제한 없이 찾아오는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의 은혜에 대한 통찰이 더욱 설득력 있다.
하나님 은혜의 두 번째 속성은 무제한이다. 사람들은 횟수 제한에 상당히 민감하다. ‘딱 한 번’ ‘한 번의 기회로’ ‘삼세판’ 등 횟수에 연연한다. 그만큼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강박이 있거니와 그것을 도리어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다. 은혜는 한 번 생색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단발성이 아닌 무제한, 무한 제공의 은혜인 것이다. 한 번 보여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은혜가 솟아오른다.
성경은 은혜가 마르지 않는다, 다함이 없다, 모자람이 없다,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디모데후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는 은혜는 영원 전부터였다. 영원 전부터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는 무제한이다. 은혜는 멈추지 않고, 한계가 없으며, 진멸하지 않고, 영원무궁하다.
無제약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14)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택하여 일을 시켰는데 노동한 시간도, 일의 경중도 달랐건만, 주인은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한 시간도 일하지 않은 사람이나 품삯을 똑같이 주었다. 세상적으로 따지면 주인의 처사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지만 주인은 자신의 뜻대로 행한다. 은혜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어지는 것이다. 주시는 자의 뜻에 맡길 따름이다.
하나님 은혜의 세 번째 속성은 무제약이다. 보통 ‘제약’이라고 하면 방해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그 은혜를 방해하고 반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가운데 베푸시는 것이기에 그것을 블로킹하고 막을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9:14-15)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이 원하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으로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이 주권적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인 은혜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막을 자가 없다.
이렇듯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무조건’, ‘무제한’, ‘무제약’의 속성이 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신다. 차고 넘치도록 제한 없이 부어 주신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주신다. 이게 바로 은혜다.
은혜는 선물이다
은혜를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한다. 헬라어 카리스는 ‘기쁨’이라는 뜻의 카라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호의를 베푸심으로 기뻐하시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며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래서 참 믿음은 응답을 얻기 위해 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이라고 표현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선물은 전적으로 주는 사람 마음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의 기분과 환경은 물론 깜짝 놀라움까지 생각해서 선물을 준비한다. 그래서 선물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감동이다.
하나님은 은혜라는 선물을 일상을 통해, 부르심을 통해, 구원을 통해 주시는데, 그 선물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의 최고 절정이다.
그렇다면 이 은혜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정답은 ‘값을 측정할 수 없다’이다. 값이 없으나 값비싼 은혜다. 하나님은 로마서를 통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고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원이라는 은혜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그 값어치를 측정할 수 없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는 말씀을 통해 은혜의 본질은 부요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거저 주시는 은혜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하나님이 거저 주셨다. 그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Gratiagratuita.”(은혜는 거저다)라는 말로써 은혜가 전적으로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세는 선물을 받는 자로서 겸손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종의 자세를 추천해 주었다. 그는 “종의 자세로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다”라고 말했다. 종이 주인의 긍휼을 바라듯 겸손한 자세로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선물 받는 자의 자세다.
은혜가 지닌 능력
하나님의 은혜는 부드럽고 온유하다. 하지만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듯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경험할 때 큰 능력을 나타낸다.
거듭나게 만드는 능력
무조건 무제한 무제약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잘 나타난다. 디도서 2장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2:11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 무제한 무제약적인 은혜를 나타내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나 역시 아들이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장면을 떠올리며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열심히 찾았을 것 같다. 아들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은혜를 베풀 방법을 말이다.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는 ‘구원’을 경험하게 해 준다. 죄인이던 우리를 용서 받은 의인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능력이다.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능력
은혜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또 다른 능력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것’이다. 시편 23편의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는 말씀이 그 근거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은혜가 일생 동안 우리를 좇는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그의 계획 가운데, 그의 목적과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이제는 나의 능력이 되어 견디게 하신다. 이기게 하시며 참게 하신다. 지나가게 하시고 찬양하게 하신다. 감사하게 하신다. 여전히 살아 있게 하시고,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신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 교회에는 목장 모임이 있는데, 교인들은 목장에서 아주 사소하더라도 자신이 체험한 은혜를 나눈다. 주님이 얼마나 우리 삶 깊숙이까지 개입하셔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삶을 이끄시는지를 나누며 은혜를 은혜로 볼 수 있도록 경험한다. 은혜는 이처럼 우리 삶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도록 인도한다.
죄를 정복하는 능력
은혜를 경험하면서 나타나는 또 다른 능력은 죄를 정복하는 것이다. 무디(D.L.Moody) 목사는 율법과 은혜의 차이에 대해 명확히 말했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삐뚤어져 있는지 말해 주지만, 은혜는 나를 교정하고 성숙시킨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죄를 정복한다. 정복이란 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