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똑. 똑. 똑.
누구야?
누군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정신없이 필기를 하고 있다. 칠판에 빽빽하게 들어찬 글자들을 따라 적느라, 떠들기는커녕 숨도 쉬지 않는 것 같다. 너무 조용해서 멈춰 버린 것 같은 교실에 글씨 쓰는 소리만 시간처럼 흐르고 있다.
쓱 쓱 쓱, 쓰악 쓰악 슥탁. 쏙닥, 쏙닥쏙닥, 쏙닥쏙닥쏙닥…….
나도 다시 필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누가 그런 거지?
나는 누군가 다시 장난을 시작하기를 은근히 기다리며 잔뜩 귀를 기울였다.
또옥. 또옥. 또옥.
누구지?
1분단이나 4분단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분명하다. 그래야 벽을 두드릴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나는 벽이 어딘지 살폈다. 맨 뒤, 그것도 3분단 끝에 앉아 있으니 교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또오……옥. 또오……옥…….
오른쪽? 왼쪽? 아니야. 이 소리는 뒤에서 나고 있어. 내 뒤? 내 뒤엔 아무도 없잖아. 벽 너머에서 그러는 건가?
이 교실은 맨 끝 교실이다. 내 등 뒤, 벽 너머에는 더 이상 교실이 없다. 게다가 3층이다.
학교 벽에 페인트칠이라도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무시해 버리려 했지만, 마치 벽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꺼림칙한 소리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또오오옥. 또오……옥. 또옥. 또옥.
차가운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피부에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벽 속에 갇힌 뭔가가 나를 향해 노크를 하는 것 같은 섬뜩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또옥. 또옥. 또옥 딱, 똑딱.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소리에 휩쓸려 내 숨소리도 가빠졌다.
똑딱. 똑딱똑딱. 똑딱똑딱똑딱, 똑딱똑딱똑딱똑딱똑딱똑딱, 딱딱딱딱딱딱탁!
몰아치던 소리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나도 숨을 멈췄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뭔가가 내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뒷머리가 당기고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있는 대로 오그렸다. 두 손은 허벅지 위 치마를 꽉 움켜쥐고, 눈은 크게 뜬 채 정면을 향했다. 눈앞이 하얘졌다. 등을 돌리고 필기를 하는 선생님과 아이들. 교실이 여전히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눈앞이 하얘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마비된 채로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도 그 알 수 없는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숨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 등 뒤엔 하얀 벽이 있는 듯 없는 듯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기주를 봤다. 그 애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야.”
나는 아까 들린 소리에 대해 물어보려고 기주를 툭 쳤다.
기주는 특유의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러고는 왜 불렀는지는 묻지도 않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시선이다.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했다. 괜히 짜증이 났다.
너랑 얘기하느니 차라리 벽이랑 말을 하지.
나는 거칠게 책상을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기주가 앉은 채로 넘어질 뻔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희진이를 데리고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 전에 겪은 일이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악몽을 꾸고 났을 때처럼 찜찜한 기분이 남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학교 건물 왼편으로 돌아가, 교실이 있는 3층을 올려다봤다. 페인트칠이나 보수공사를 한 흔적은 없었다. 거기엔 교실 안과 마찬가지로 하얗고 밋밋한 벽이 있을 뿐이었다.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혹시, 귀신 아냐?”
“야! 장난치지 마. 안 그래도 무서운데.”
우리는 황당한 귀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교실로 돌아왔다.
“똑, 똑, 똑. 계세요?”
희진이가 장난스럽게 노크를 하며, 벽에 귀를 갖다 댔다.
“어? 진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머뭇거리며 벽에 귀를 갖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벽에 낀 때가 보였다. 그저 하얗기만 한 줄 알았던 벽에 얼룩이 지고 때가 껴 있었다. 더러웠다.
얼른 벽에서 떨어졌다. 순간, 벽 속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벽의 차가운 기운이 귓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끈적끈적한 손때가 내 몸에 옮겨 붙을 것만 같았다. 수많은 손이 이 벽을 만졌겠지.
“기분 나빠.”
내가 귀를 문지르며 말하자 희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무 썰렁해.”
그러고 보니 벽은 그냥 비어 있었다. 이상할 만큼 텅 비어 있었다. 전에는 아니,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벽에는 분명 게시판이며 거울 따위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못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비어 있는 하얀 벽은 마치 안개처럼 그 속을 통과해 계속 걸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문득, 2학년 첫날 이 교실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낯설음과 거부감이 떠올랐다. 나는 1학년 때도 이 교실을 썼으니까 줄곧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낯설 이유가 없었다.
그날 나는 반 배정을 받자마자 2학년 교실이 있는 4층으로 뛰어올라 갔다.
“1반, 2반, 3반, 4반…… 8반. 어? 9반은 어디 있지?”
교실을 찾아 다시 3층으로 내려왔다. 맨 끝 교실. 1학년 9반 교실이 2학년 9반 푯말을 달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방금 나왔던 교실로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선뜻 교실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뭔가 달랐다.
왜 그때,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사람이 드나든 흔적과 온기가 전혀 없는 빈집이 떠올랐을까?
“에이 진짜. 다 마음에 안 들어. 우리 반만 뚝 떨어져서 이게 뭐야?”
희진이가 툴툴거렸다.
우리 반만 3층에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같은 학년과 떨어져 건방진 1학년 후배들과 같은 층을 쓴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맞아. 지용이도 못 보고. 지용이가 날 못 보는 건가? 또 4층에 한번 올라가 줘야겠군. 팬들 관리하러.”
지용이는 우리 학년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자애였다. 그런 지용이가 나를 좋아했다. 아니, 지용이도, 라고 해야겠다. 나를 좋아하는 애들은 한둘이 아니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공주병엔 약도 없다며 핀잔을 주던 희진이가 웬일인지 아무 대꾸도 안 했다. 희진이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다가 영주에게 가 버렸다.
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곧 잊어버리고 조그만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수시로 거울을 보는 나를 아이들은 거울 공주라고 놀리지만 사실은 부러워서 그러는 거다. 나는 질투 날 정도로 예쁘니까.
나는 예쁘다. 그저 예쁜 정도가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가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예쁘다. 큰 키에 가느다란 팔다리, 조그만 얼굴. 쌍꺼풀 진 큰 눈에 기다란 속눈썹, 오똑한 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시선이 느껴졌다. 기주가 나를 훔쳐보고 있다. 기주는 틈만 나면 나를 훔쳐본다. 물론 기주만 그러는 건 아니다.
담임이 들어와 사회 수업을 시작했다. 열심히 설명하던 담임이 곧이어 열정적으로 칠판에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필기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 담임은 글자들로 칠판이 하얗게 덮이자, 칠판을 대충 지우고 다시 하얀 글자들을 적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담임이 글자를 지우기 전에 공책에 베껴 쓰려고 펜이 부러져라 팔을 놀렸다.
뚝─.
펜이 부러졌다. 아니, 볼이 튕겨 나갔다.
펜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얼얼했다. 나는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슬쩍 기주를 훔쳐봤다. 그 애는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글씨가 저렇게…….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고 비스듬한 그 애의 글씨는 독특했다. 글씨는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해야 예쁜 거다. 따라서 기주의 글씨는 예쁜 게 아니다. 당연히 아무도 그 글씨를 칭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꾸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기주의 얼굴처럼.
나는 몰래 기주를 훔쳐봤다.
기주의 얼굴은 예쁘지 않다. 코가 오똑하지도 않고, 치열이 고르지도 않다. 광대뼈가 불거진 얼굴은 넓적하고, 흐릿한 눈썹 아래, 쌍꺼풀 없이 축 늘어져 있는 눈은 멍청해 보인다. 하지만 그 못생긴 부분들이 모여 신비한 느낌이 들 정도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매력이 있다.
결코 예쁘지 않지만 끌리는 것. 볼수록 아름다운 것. 사람들은 그걸 매력이라고 부른다. 기주뿐만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다. 못생긴 사람일수록 숨어 있는 매력이 많다. 내 옆에 있으면 시녀처럼 보이는 주근깨투성이 희진이도 가끔 반짝반짝 빛이 난다. 희진이가 웃을 때면, 희진이를 못난이로 만들던 그 주근깨들이 개구쟁이처럼 꺄르르 웃는 것만 같다. 그래서 희진이가 순수하고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런 느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매력들을 놀려 대서 단점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람들이 희진이나 기주의 매력을 안다고 해서 그 애들을 나보다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싫다. 누구나 다 나름대로 예쁘다는 게 나는 너무 싫다. 그 애들은 나를 돋보이게 해 주면서, 배경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면 되니까.
나는 기주의 눈에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짜증 나. 쟤는 왜 저렇게 못생긴 거야? 어유, 저 멍청한 눈. 볼 때마다 짜증 나.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게 질투라는 걸. 차라리 기주가 매력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는 질투에 휩싸이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이 내 예쁜 얼굴에서 그 애한테로 옮겨 갈까 봐 불안해하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기주를 미워하지도 않을 텐데.
시선이 느껴졌다.
또 누가 쳐다보는 거겠지.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훔쳐본다. 나는 예쁘니까.
2
내가 처음부터 기주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2학년이 된 첫날이었다.
아이들은 주변에 앉은 아이들을 사귀느라 분주했다. 나는 주위에 앉은 아이들이 먼저 말을 걸길 기다리며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사귀느라 바빴다. 그러고 보면 새 학기 첫날은 늘 그랬다. 아이들은 일부러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처럼 예쁜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관심 없는 척했다. 힐끔거리며 훔쳐보는 주제에 말이다.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어색해 희진이 쪽을 보니, 희진이는 과장스럽게 깔깔대며 뒤에 앉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옆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 애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봤다.
그게 바로 기주다. 내가 새 학년 첫날 사귄 친구. 나는 기주가 마음에 들었다. 기주는 어른스러웠고 조용했다. 그리고 못생겼다.
나와 기주, 희진이는 자연스레 붙어 다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접근해 온 영주, 세희, 소영이와 더불어 하나의 패거리를 이루었다.
기주는 우리 패거리 중에서 가장 눈에 안 띄는 아이였다. 하지만 점점 아이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그것도 아주 조용히, 특별한 노력도 없이 말이다.
기주가 화장실에 가고 없을 때였다.
“기주, 자꾸 보니까 멋지다. 그치?”
“응. 키도 크고. 쟤가 우리 학년에서 제일 클걸?”
“키가 커서 그런지 몰라도 쟤 모델 같지 않니? 얼굴은 그저 그런데 왠지 분위기 있는 것 같지?”
아이들이 기주를 칭찬했다. 나는 괜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기주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분위기?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 분위기? 원래 저런 애들이 뒤에서 별별 짓 다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까 좀…….”
희진이가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어머, 너도? 나도 그런 거 느꼈는데.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는데, 아닌 것 같아. 말할 때 눈 아래로 내리깔잖아.”
영주가 말하자 세희와 소영이도 기주를 헐뜯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 마음속에도 나처럼 기주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던 걸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은근히 기주를 따돌렸다. 기주가 무슨 말을 하면 괜히 우리끼리 키득거리며 눈빛을 주고받았고, 일부러 말을 자르거나 무시하곤 했다.
결국, 기주는 우리와 같이 다니지 않게 됐다. 하지만 다른 패거리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미 아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리고 있었다. 어딘가 끼기에는 어정쩡한 시기였다.
같이 어울리지 않게 된 뒤에도, 우리는 은근히 기주를 괴롭혔다. 내 짝이었기 때문이다. 옆에 앉아 있으니 싫은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옆모습, 어두운 표정의 창백한 얼굴,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기주의 모든 것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그래서 나는 기주에게 괜히 비꼬는 소리를 하거나, 일부러 부딪쳐 놓고는 얄밉게 사과를 하고, 바로 뒤에서 친구들과 수군거렸다. 그래도 기주는 큰소리 내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꾹 참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기주의 그런 태도마저도 거슬렸다.
조용했던 기주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더 조용해졌고, 학교에 와서 집에 갈 때까지 책상에 박힌 듯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늘 혼자 다녔다.
하지만 내가 기주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기주를 괴롭혔다고 해도, 폭력이라기보단 장난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기주랑 어울리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 기주가 새 친구를 사귀지 못한 건 그 애 문제일 뿐이다.
“우리 끝나고 햄버거 먹으러 가자!”
내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난 별론데. 떡볶이나 먹자.”
희진이였다.
“떡볶이? 좋아!”
영주가 맞장구쳤다. 영주가 좋다고 하자 세희와 소영이도 좋다고 했다. 내 의견이 무시되는 것에 기분이 나빠졌다.
요즘 들어 희진이가 내 의견에 반대하는 일이 잦다. 게다가 영주는 희진이 말이라면 무조건 찬성이다.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희진이가 내 자리로 왔다.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내가 중심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모두들 희진이 자리로 간다. 하지만 이건 희진이가 중심이라서가 아니다. 영주가 희진이에게로 가기 때문이다. 영주는 희진이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다.
영주는 전교 1, 2등을 다투는 아이다. 거기다 영주네 집이 부자라는 건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이다. 영주 아빠가 학교로 찾아올 때면 교감과 담임이 운동장까지 쫓아나가 굽실거리며 인사를 할 정도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영주에게서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그런 영주가 나도 아니고 희진이 같은 애랑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하필 내 옆에 시녀처럼 붙어 있는 희진이일까? 아마도 영주는 나를 질투해서 내 단짝인 희진이에게 접근한 걸 거다.
그런데 정작 희진이는 영주에게 관심이 없다. 영주 같은 애가 다가오면 감지덕지하는 게 당연한데 요즘 희진이는 뭐든지 다 귀찮다는 식이다. 뭘 물어보면 건성으로 대답하고 신나게 누군가의 험담을 해 대다가도 멍하니 딴생각에 빠지기 일쑤다.
사춘기인가?
그러고 보니, 희진이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나 있었다. 언제부터 나기 시작했는지 코끝에 빨간 여드름이 툭 불거져 있고, 앞머리로 가린 이마에는 좁쌀 같은 여드름이 도돌도돌 올라와 있다.
“깨밭에 웬 딸기?”
나는 깔깔대며 희진이의 코를 가리켰다. 주근깨가 잔뜩 난 양 볼 한가운데인 코에 빨간 여드름이 툭 불거져 있는 꼴은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어떡해. 진짜 웃겨. 너 광대 같아.”
내 말에 아이들이 웃어 댔다. 희진이는 익살스럽게 코를 찡긋해 보였다.
“야! 여긴 좁쌀밭이다.”
나는 희진이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이마에 난 여드름을 드러냈다. 희진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깨밭, 좁쌀밭, 딸기밭!”
나는 희진이의 볼과 이마와 코를 차례로 가리키며 놀려 댔다. 마지막으로 코를 가리킬 때는 코에 난 여드름을 콕 찍었다.
“앗!”
희진이가 나를 노려봤다. 아주 잠깐이었다. 눈물을 꾹 참고 있는 눈이 시뻘겠다. 하지만 이내 눈을 돌려 아이들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같이 장난친 건데 화내 봤자 자기만 우습게 될 게 뻔하니까. 그까짓 장난인데.
“윽. 진짜 아프다.”
벌게진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모습이 더 우스꽝스러웠다.
제까짓 게.
기분이 좋아졌다. 묘한 흥분이 온몸에 생기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수많은 시선이 내 걸음에 맞추어 나를 따라왔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나를 따라다니는 시선들. 부러움과 질투와 동경의 눈빛들.
수업이 시작됐지만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좀 심했나? 많이 삐친 건 아니겠지?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일면서 걱정이 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희진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내일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하게 지낼 게 뻔했다. 우린 늘 그래 왔으니까.
희진이에 대한 생각을 금세 털어 버리고 수업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언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묘한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지?
다락방이나 창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눅눅하고 탁한, 오래 묵은 공기의 진한 냄새.
그리고 신경을 건드리는 미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삭, 사삭, 사삭.
벽에 옷이 스치는 것 같은, 누군가 벽에 바짝 붙어 걷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바로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내 뒤에 서 있는 걸까?
가끔 수업 시간에 교감이 조용히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런 거겠지.
시선은 계속해서 내 등과 팔, 손, 손가락들을 훑었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꺼림칙하고 불길한 느낌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사삭. 사악, 사아악. 스아아악, 스아아압. 스으으읍, 스으으읍.
소리는 점점 더 커지다가 거친 숨소리처럼 변했다.
스으으읍, 스으으읍. 스으읍, 스으읍, 스읍. 스읍, 습.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심장이 눌린 것처럼 헐떡댔다.
온몸이 이상한 긴장감에 휩싸여 딱딱하게 굳어 갔다. 하지만 눈은 탁 풀리면서 벌어졌다.
교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교과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생님과 아이들, 창문, 교실 구석구석, 오른쪽 구석에 놓인 휴지통과 그 옆에 떨어진 휴지 조각. 심지어 내 등 뒤까지.
그건 내가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높고 넓은 시야를 가진 누군가가 보는 영상이 내 머릿속을 점령한 것 같았다. 내 눈은 그저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기능을 잃고 눈앞이 흐릿해진 채.
시선이 느껴졌다. 확연히 다른 하나의 시선. 내 뒤통수를, 내 머리채를 움켜쥘 듯이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
벽?
벽이 날 보고 있다.
혹시, 이게 가위라는 건가?
학교에서 자다가 가위에 눌렸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정신은 깨어 있지만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수면 상태.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학생들에겐 흔하다면 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일이 친구들의 이야기와는 뭔가 다르다는 걸.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그 끔찍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내지르는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교실에서 도망쳐야 해.
3
“야, 너 아까 수업 시간에 왜 그러고 있었어?”
청소 시간에 희진이가 다가와 물었다. 희진이는 그새 화가 풀렸는지 평소와 다름없이 굴었다.
“가위 눌렸어. 재수 없게.”
“눈 뜨고? 으, 끔찍해. 이게 다 교실 분위기가 칙칙해서 그래. 이 교실은 도대체 왜 이래? 퀴퀴한 게 교실이 아니라 창고야, 창고. 일 년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어.”
작년에는 이렇지 않았으니까.
“하여튼 맘에 안 들어. 아, 정말 반 바꾸고 싶다.”
희진이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 반 바꿔 달라고 할까?”
희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우리는 얼른 교무실로 달려갔다.
담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담임 얼굴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자식이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안 돼. 나가 봐.”
“선생님, 저희는 정말 심각해요. 제발요, 네?”
“참 내. 그래, 뭐 땜에 그러는 건데?”
“자꾸 가위 눌린다고요.”
“클 땐 다 그런 거야. 그건 네가 안 자면 되는 거 아냐? 학교에서 잠을 왜 자, 이 자식아.”
“그것만이 아니고요. 뭔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왜 이 교실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벽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학교 오기가 싫어요. 우리 반엔 친한 친구도 한 명 없고. 우리 교실만 뚝 떨어져서…… 다 너무 싫어요.”
희진이가 말했다.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말이 탁, 걸렸다.
나는?
희진이와 나는 1학년 때부터 줄곧 가장 친한 친구다. 담임을 설득하려고 한 말이겠거니 했지만 기분이 찜찜했다.
담임은 그제야 여드름을 잔뜩 붉히고 있는 희진이를 쳐다봤다. 아니, 발견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는 표정이었다.
“이 녀석아, 친구야 차차 사귀면 되지. 혹시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니지?”
담임이 물었다. 순간, 불쾌한 기억이 등줄기를 달렸다. 하지만 이내 웃음이 나왔다.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을 하는 내게 따돌림이라니. 작년 여름의 일은 따돌림이라기보다는 잠깐 동안의 오해에 불과했다. 나한테 그런 일이 또 일어날 리 없다. 나는 항상 아이들의 중심에 있다. 게다가 내가 낀 패거리는 항상 반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이들이다. 뭐, 희진이는 내 단짝이라서 끼는 거지만.
결국 우리는 싱겁게 교무실을 나왔다. 아까 희진이의 태도가 떠올랐다. 희진이는 나와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