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수연
강원국
남의 글을 쓰다가 남의 회사를 다니다가 우연히 출판사에 들어갔고, 난데없이 베스트셀러 저자가 돼서 지금은 저자 겸 강연자로 살고 있다.
처음부터 글을 잘 쓴 건 아니었다. 30대 중반까지는 증권회사 홍보실 사원으로 열심히 저녁 약속을 쫓아다녔다. 대우그룹 회장의 연설을 쓰다가 김대중 정부 때 연설비서관실로 옮겼다. 그리고 운명처럼 노무현 대통령 연설비서관을 맡았다. 지금도 책에 서명을 할 때에는 ‘김대중처럼 노무현같이’를 즐겨 쓴다. 누구처럼 누구같이 살고 싶었으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고, 지금은 그냥 글 쓰는 사람 강원국으로 살고 있다.
걸출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 평생 신경성 위염을 달고 지냈다. 글쓰기로 지식 자작농을 이룬 뒤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어떻게 써야 창피는 안 당할지, 어떻게 써야 괜찮다는 소리를 들을지 궁리하는 것 하나는 일등이다.
이 책은 그 궁리의 상처들이자 축적물이다. 결론은 ‘투명인간으로 살지 않으려면 내 글을 써야 한다’는 거다. 이 책에 그 헤아림과 방법에 관한 내 생각을 담고자 했다. 이제는 나답게, 강원국답게 살아간다.
“이제 대통령은 그만 팔아먹지?”
간혹 듣는 소리다. 이제 당신 얘기를 할 때도 됐지 않았느냐는 애정 어린 질책이다. 고맙게 받아들인다.
2014년 2월 첫 책 《대통령의 글쓰기》를 내고 1,000번 가까이 강연을 했다. 블로그, 홈페이지에 2,000개가 넘는 글을 썼다. 모두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다. 첫 책 출간 이후 1,500일 가까이 글쓰기에 관해서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글쓰기로 고통받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게 생겼다. 28년간 암중모색과 고군분투 과정을 거쳐 얻은 나의 글쓰기 방법론이다. 청와대 경험을 《대통령의 글쓰기》에 녹였고, 기업에서 겪은 얘기로 《회장님의 글쓰기》를 썼다. 둘 다 나의 책이 아니다. 관찰기이자 대통령과 회장에게 배운 글쓰기론이다.
이제 비로소 내 얘기를 하려고 한다.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 글을 잘 쓰기 위해 마음 상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둘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셋째, 글쓰기 기본기는 어떻게 갖춰야 하는가. 넷째, 실제로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다섯째, 글을 잘 쓰기 위한 주변 여건과 환경은 어떠해야 하는가.
내가 습득한 모든 글쓰기 노하우를 담았다고 자부한다. 한 사람의 28년 경험을 이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있다. 원고 하나하나가 두 시간짜리 강의 내용이다. 모두 읽으면 100시간 강의를 듣는 효과가 있다.
또한 많은 글쓰기 책의 큐레이터 역할을 자임하고자 했다.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다른 글쓰기 책을 읽을 필요가 없도록 하자는 생각으로 썼다. 이를 위해 글쓰기에 관한 책을 100권 가까이 읽었다. 그 내용이 이 책 구석구석에 녹아 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글쓰기가 두렵지는 않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아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
쓰느라 힘들었다. 이제 당신이 읽느라 고생할 차례다.
2018년 6월
수서 카페에서
- 글쓰기는 자신감이 절반
간혹 방송 출연 요청이 들어온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나가도 되는 이유를 얘기해준다. 첫째, 생방송이 아니고 녹화라는 사실이다. 잘하지 못하면 편집할 텐데 무슨 걱정인가. 둘째, 당신이 할 만하니까 불렀다. 그들 판단을 믿으란다. 셋째, 시청률이 5% 넘는 프로그램은 흔치 않다. 100명이면 고작 한두 명 본다. 넷째, 대본도 있으니 사전에 준비하면 된단다. 다섯째,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부족한 부분은 제작진이 도와줄 테니 걱정 말란다. 그제야 나는 자신감을 갖고 방송에 나간다.
글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쓰면 된다. 첫째, 쓰고 나서 편집하면 된다. 퇴고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둘째, 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쓸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가. 셋째, 당신이 쓴 글에 다른 사람은 그다지 관심 없다. 당신이 다른 사람 글에 크게 관심 없는 것처럼. 넷째, 자료 열심히 찾고 시간을 들이면 된다. 다섯째, 최선을 다해 쓰고 남에게 보여주면 된다. 글은 다른 사람 의견으로도 좋아질 수 있다.
글 쓰는 일에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는데 어찌 잘 쓸 수 있겠는가.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자전거도 배워야 탈 수 있다. 걸음마도, 젓가락질도 해봐야 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작문 시간은 있었지만 그 시간에 글쓰기를 따로 배우지는 않았다. 배우지 않고 해보지 않고 어찌 잘할 수 있겠는가.
글쓰기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작가들의 작가’라 불리는 글쓰기 교수법의 대가 윌리엄 진서(William Zinsser)가 그랬다.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는 실제로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인간의 행위 중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다.
왜 어려운가. 쓰기 싫기 때문이다. 쓰기 싫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뇌는 예측 불가하고 모호한 것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안전 욕구가 본능적으로 있다. 그런데 글쓰기야말로 정체를 알 수 없다. 정답이 없다.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모호한 대상이다. 여기에다 끝까지 못 쓸까봐 불안하고, 못 썼다는 소릴 들을까봐 또 불안하다. 결국 피하고 본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뇌가 말한다. ‘너, 피곤하지 않아? 왜 굳이 오늘 쓰려고 해?’ 결국 우리의 의지는 꺾인다. ‘그래, 내일도 있잖아.’ 뇌의 유혹에 지고 만다.
글쓰기는 또한 고도의 정신 활동이다. 복합적 능력을 요구한다. 머릿속 생각을 끄집어내면서 적절한 어휘를 찾는다. 문장을 쓴다. 논리적으로 문장을 연결한다. 전체 구성을 짠다. 핵심적인 메시지를 찾아 표현한다. 독자의 지적도 염두에 둬야 한다.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 순서를 결정하고 문단을 구성하는 데에도 갈등이 따른다. 선택해야 한다. 한마디로 골치 아프다. 이 모든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여기에 육체적인 피곤도 감수해야 한다. 어찌 글쓰기가 쉽겠는가.
여기에 엄살도 끼어든다. 독서량이 적다, 어휘력이 부족하다, 준비가 안 됐다 등등 자신의 역량을 과소평가한다. 막상 쓰지 못했을 때 실망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약점을 과장함으로써 예방주사를 맞는다. 이런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연구 결과가 있다.
심리학에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게 있다. 능력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반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능력 없는 사람의 착각은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한마디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이에 반해 능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허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과소평가한다. 자신의 글쓰기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야말로 능력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늘 막연했다. 이번에는 쓸 수 있을까 두려웠다. ‘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이유는 세 가지 두려움 때문이다. 첫째, ‘어떻게 시작하지?’라는 첫 줄에 대한 공포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든다. ‘나는 이렇게 시작할 거야. 내가 이렇게 쓴다는데 어느 누가 뭐라고 해?’ 둘째, ‘쓸 말이 있을까?’라는 분량의 공포다. 나는 이렇게 주문을 건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이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내가 갖고 있는 콘텐츠는 하나밖에 없어. 내가 살아온 날만큼 쓸 말도 많아. 내 것이 가장 독창적이야.’ 마지막은 ‘내일까지 쓸 수 있을까?’라는 마감의 공포다. 나는 이렇게 되뇐다. ‘쓰면 써지는 게 글이야. 이전에도 늘 그랬잖아?’
일부러라도 자신감을 북돋워줄 필요가 있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내 안에 있는 쓸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집토끼가 아니라 산토끼를 찾아 헤맨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참고자료부터 뒤진다. 사방팔방 물어본다. 이전에 누군가 써놓은 글이 없는지 찾는다. 자기 안에 파랑새를 두고 구천을 헤매는 격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찾는 게 먼저다.
사람은 하루에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이 무수히 많고, 거기서 얻은 정보가 무의식에 저장된다. 버스를 타고 가다 혹은 산책하다 문득 생각난다. 자신이 의도해서 생각난 것이 아니다.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이런 무의식의 세계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무의식에 저장돼 있는 것을 길어 올려 쓰려면 스스로를 믿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내 안에 쓸거리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쓸거리는 살아온 시간만큼 축적돼 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과도하게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 글이 안 써지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주어진 일을 그르친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불안이 뇌의 특정 부위를 긴장시켜 적절한 행동을 방해한다. 물론 나와 같은 ‘관심 대마왕’은 예외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머릿속으로 썼다 지웠다만 반복한다. ‘내가 이렇게 쓰면 상사가 뭐라고 하겠지? 틀림없이 이러저런 지적을 할 거야.’ 자체 검열을 하며 쓰는 것을 주저한다.
이렇게 지레 겁을 먹으면 글이 그것을 눈치채고 글 쓰는 사람 위에 군림한다. 글을 지배하고 글 위에서 호령해야 할 내가 오히려 글의 눈치를 보고 글에 갇혀 옴짝달싹못한다. 당연히 생각도 나지 않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도 못한다.
글은 쓰면 써진다고 믿고 써야 한다.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술술 써지는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기발한 생각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개요도 써야 정리되고 짜인다. 시작할 때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써가며 알게 된다. 알아서 쓰는 게 아니다. 모르니까 쓰는 것이다.
자신감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언제든 내가 쓴 글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이 보여줄수록,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수록 글은 좋아진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보여주는 것을 망설인다. 벌거벗은 생각과 감정을 내보이는 게 부끄럽고, 남의 평가가 두렵다. 눈치를 보면 절반은 진 것이고, 주눅이 들면 완패다. 써지지도 않을뿐더러 써도 좋은 글이 안 나온다.
이에 반해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자기 글을 남에게 자신 있게 보여준다. 호평이나 혹평에 흔들리지 않는다. 칭찬받았다고 우쭐하지도, 혹평에 의기소침하지도 않는다. 타당한 건 흔쾌하게 받아들이고 무시할 것은 묵살한다. 나아가 마음속 다툼도 없다. 당신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고 생각한다. 청탁병탄(淸濁倂呑)한다. 맑은 것과 탁한 것을 함께 삼킨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람은 더 잘 쓰고, 안 보여주는 사람은 갈수록 못 쓴다. 보여주지 않는 글은 의미가 없다.
자신감은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나는 글 잘 쓰는 사람’이란 표식을 붙이자. 조직에서 ‘나는 글을 못 쓴다’, ‘글쓰기가 어렵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그런 딱지가 붙은 사람의 글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부터 하기 때문이다. 지적해줘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불타 사정없이 고친다. 결국 자신감을 잃고 진짜로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글쓰기 자신감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내 글에 호의적인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다. 내 곁에는 보험회사에 다니는 친구 한 명이 있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그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그는 늘 내 편이다. 그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자신감이 붙는다. 지속적으로 글을 쓰려면 그런 친구가 곁에 있는지, 그 친구가 누군지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또 다른 방법은 매일 글을 쓰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작가는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라고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일 일정 분량을 쓰는 것이 자신감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자신감은 성실함에서 나온다. 내가 열심히 하면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다. 글을 열심히 쓰면 뿌듯하다. 새벽까지 쓰고 나면 스스로가 대견하다. 그러면 자신감이 생긴다. 그 힘으로 또 열심히 쓴다.
일정 시간이 아니라 일정 분량을 매일 써보자. 하루 1시간씩 쓰지 말고, 하루 원고지 5매씩 쓰자고 다짐해보자. 시간은 일정하기 때문에 지루하다. 원고지 5매는 다르다. 어느 날은 금세 써지고 어느 날은 온종일 걸린다. 변화가 있다. 오늘은 빨리 써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단, 분량은 최소한으로 정하자. 많이 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얻는 것이 긴요하다.
글로써 목표를 이루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글을 잘 써서 이룰 수 있는 꿈은 많다. 작가가 되겠다는 혹은 책을 쓰겠다는 간절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자신감은 저절로 붙는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꿈을 비웃었다. 이루지 못할 목표를 좇는 것이 어리석게 보였다. 꿈이라는 미명 아래 나를 채찍질하는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뀌었다. 이젠 나도 글을 써서 이룰 수 있는 장대한 꿈을 꾼다. 내 글이 점점 나아져 글을 잘 쓰게 되지 않을까, 혹시 내 안에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꿈꾼다.
잘 쓰는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살아오면서 누구 못지않게 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밀운불우(密雲不雨)라고 했다. 구름 안에 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데 비를 뿌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누가 아는가. 언젠가 소나기 같은 폭우가 쏟아지면 곧장 소설이 될 것이요, 또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보슬비처럼 시가 되어 내리는 날이 올는지. 소설은 내 경험에 ‘만약’을 더하면 된다. 체험에 만약을 추가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시도 ‘무엇’ 되기와 비유 능력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 되어 그것의 마음을 비유로 표현하면 되지 않겠는가.
굳이 큰 꿈이 아니어도 된다. 글 쓸 때마다 작은 목표를 하나씩 정해보자. 창피만 면하면 된다, 분량을 채우기만 하자, 마감 내에 쓰기만 하자, 문법에 맞게만 쓰자, 독자가 이해 못하는 글만 쓰지 말자. 이런 목표를 갖고 쓰면 성공한다. 작은 성공이다. 이런 성공이 모여 자신감을 만든다.
나는 스스로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만한 이유를 찾는다. 그동안 글을 많이 쓰지 않았다. 이제 고작 세 권째다. 앞으로 좋아질 일만 남았다. 전도가 양양하다. 내 인생 최고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내게는 시간이 있다. 시간이 있는 한 언젠가 좋은 글을 쓸 것이다.
- 문제는 욕심이다
대학입학 학력고사 2교시 수학시간. 1번부터 5번까지 한 문제도 못 풀었다. 풀긴 풀었는데, 나온 답이 사지선다형 보기에 없으니 답안지에 마킹할 수가 없다. 식은땀이 나고 가슴만 쿵쾅쿵쾅 뛰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공식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더 앉아 있어봤자 승산이 없을 것 같아 그냥 나가려고 답안지를 찍어서 메웠다. 채우고 나니 희한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수험장을 나가지 않고 풀 만한 문제를 찾아봤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한 문제씩 풀어나갔다. 오답에 마킹해놓은 답안지를 하나씩 고칠 때마다 희열이 느껴졌다.
글도 이렇게 써야 한다. 일단 써놓고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100점 맞겠다는 욕심으로 1번부터 푸는 것은, 첫 문장부터 완벽하게 글을 쓰려는 마음과 같다. 그러면 부담만 커지고 신이 나지 않는다. 일단 찍어놓고 0점에서 시작해 조금씩 점수를 더해나가는 것은 재미가 있다. 명문장을 쓰겠다는 욕심으로 첫 문장부터 비장하게 달려들기보다는 허접하게라도 하나 써놓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심적 부담이 덜하다. 비록 허름하지만 여차하면 내놓을 수 있는 글이 하나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글 쓸 때 욕심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자료에 관한 욕심이다. 읽다 보면 누더기 느낌이 나는 글이 있다. 억지로 꿰맨 흔적이 역력하다. 용접한 부위가 우둘투둘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원인은 찾아놓은 자료가 아까워서 꾸역꾸역 쑤셔 넣은 탓이다. 자료를 찾다 보면 더 찾고 싶어진다. 더 찾으면 더 좋은 자료가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끝이 없다. 어느 지점에서 타협해야 한다.
아는 것을 표현하는 데도 욕심이 개입한다. 이 글에서는 이것만 써야 하는데, 저것도 안다고 말하고 싶다. 좀 더 멋있게 표현하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그러다 보면 글쓰기 진도가 나가지 않을뿐더러 글도 나빠진다. 핵심에서 벗어나 중언부언하기 십상이다. 멋있게 쓰려는 욕심에 글이 느끼해진다. 형용사, 부사가 난무하다.
취사선택의 분별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어느 것은 쓰고 어느 것은 버릴지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모호하고 경계가 불확실해지면 ‘이건 중요하니까’, ‘저건 버리기 아까우니까’ 이유를 만들고 욱여넣는다. 글의 성패는 여기서 갈린다. 여러 개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다 넣으려고 욕심 부리면 망한다. 적절한 지점에서 추가하는 것을 멈추고 버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는 것 중에 하나만 쓰는 절제는 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글에서 여백의 미가 풍긴다. 독자에게는 필자가 숨겨둔 메시지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준다. 소풍 가서 보물을 찾았을 때 느끼는 뿌듯함 같은 것이다. 손해 본다 생각하지 말고 아는 것, 쓰고 싶은 말을 남겨두자. 그것이 글 쓰는 사람의 여유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도 장애물이다. 평가를 낮게 받지 않을까, 지적당하지 않을까 두렵다. 일종의 주목 공포증이다. 나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강박 장애를 겪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하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갈수록 이런 증상이 심해졌다.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도 쳐다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가 됐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내내 수시로 뒤를 봐야 했다. 안 그러면 숨이 가빠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급기야 정신신경과 치료를 받았다.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글을 읽는 사람은 글쓴이가 얼마나 잘 쓰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관심 없다. 그들이 관심 갖는 것은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얘기가 뭔지, 그 얘기가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것이 독자에게 어떤 효용이 있는지에 집중하는 게 맞다.
글쓰기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 실력이 80점인 사람이 마치 100점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글을 못 쓰고 끙끙 앓는다. 혹은 자기 스스로를 100점이라고 착각한다. 머릿속에 든 만큼, 마음으로 느낀 만큼, 나의 글쓰기 수준만큼 써서 보여준다 생각하면 못 쓸 게 없다.
직장에서 글 쓰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이들을 자존감과 실력이라는 두 잣대로 분류하면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자존감도 높고 실력도 있는 부류다. 자기 실력을 100% 보여주지 않는다.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글에 욕심이 들어가지 않는다. 설렁설렁 쓴다. 대부분의 경우 글이 좋다. 그러나 간혹 결정적 실수를 한다. 둘째는 실력은 그저 그런데 자존감이 높은 부류다. 매우 성실하다. 일찌감치 글을 써놓고 계속 수정한다. 실수가 거의 없다. 마감 준수 등 항상 기본은 한다. 그러나 뛰어난 것은 나오지 않는다. 셋째는 자존감은 낮으나 실력이 괜찮은 부류다. 남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민감하다. 인정받고 싶어 한다. 지적당하면 화를 내거나 의기소침해한다. 상사와 멀어지고 조직과 겉돌게 된다. 행복하지 않다. 끝으로 자존감과 실력 모두 낮은 부류다. 눈치를 심하게 본다. 결과도 안 좋다. 자신도 괴롭다. 글쓰기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게 좋다.
글쓰기에서는 욕심과 실력이 함수관계를 이룬다. 채우기 아니면 비우기다. 실력을 높이거나 욕심을 줄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욕심이 많아도 실력이 있으면 상관없다. 욕심은 많은데 실력이 없는 경우가 문제다. 실력이 없으면 ‘내가 이 정도 썼으면 잘한 거야’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도 욕심이 나면 실력을 쌓아야 한다.
독자와 관계에서도 그렇다. 내 역량이 독자의 기대보다 높은 수준일 때는 문제없다. 독자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치부하면 될 일이다. 이런 경우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게 된다. 투지는 글쓰기에 약이 된다. 역량은 없는데 독자가 과한 기대를 할 때가 문제다. 내 수준보다 높은 결과물을 기대하는 상황이 난감하다. 실력을 키우면 좋겠지만 이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톨스토이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가난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재산을 늘리거나 욕망을 줄이는 것. 전자는 우리 힘으로 해결되지 않지만 후자는 언제나 우리 마음가짐으로 가능하다.”
글쓰기가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다 잘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주제 하나에 집중한다.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지에 몰두한다. 감동? 재미? 논리? 이런 것은 그다음 문제다. 여력이 있을 때 신경 써도 늦지 않다. 오직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생각한다. 하나의 주제에 몰입한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욕심이 사라진다.
주제가 실종되는 경우도 욕심이 앞설 때다. 찾아놓은 자료에 멋있는 표현과 좋은 내용을 많이 욱여넣을 때, 모호함을 심오함으로 착각해서 관념적·피상적으로 흐를 때, 잘 써 보려는 욕심에 수사법과 수식어를 과하게 쓸 때 애초 생각했던 길을 잃고 미로를 헤맨다.
글은 한정식이 아니라 일품요리로 써야 한다. 백화점이 아니라 전문점이 돼야 한다. 주제 혹은 논지와 관련 없는 내용은 가차 없이 버린다. 그러면 단순해진다.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것과 관련 있는 내용만 덧붙이는 방법도 있다. 곁가지를 뻗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무엇보다 아는 체하고 싶은 욕심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은 단순 반복의 미니멀리즘으로 성공한 경우다. 글쓰기도 미니멀리즘을 지향할 수 있다. ▲단문으로 쓴다. 복문, 포유문, 중문을 지양한다. ▲수사적인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수사법 사용을 절제한다. ▲최대한 짧게 쓴다.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쓴다. ▲독자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을 자제한다. 그것도 소유욕이며 미니멀리즘에 역행하는 일이다.
글쓰기가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말과 달리 글에는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한 몸이다. 어휘력과 논리력 등 요구하는 역량이 같다. 결정적 차이는 시간의 문제다. 말은 곧장 하고, 글은 시간이 주어진다. 글을 쓸 때는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린다. 잘 쓰려고 한다. 그래서 어렵다.
말은 욕심 낼 여지가 없다. 준비 없이 즉각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수식이 붙을 틈이 없다. 물에 빠지면 “사람 살려”, 도둑이 들어오면 “도둑이야”라고 한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으로 곧장 들어간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자신이 아는 것을 보여주고, 잘 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궁리한다. 그만큼 쓰기가 어려워지고 사족이 붙는다.
글을 말하는 것처럼 쓰는 방법이 있다. 시간을 정해놓고 쓰는 것이다. 일부러 시간을 짧게 잡고 그때까지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마친다는 생각으로 쓴다. 그러면 글이 좋아지기도 한다. 야구선수가 방망이를 짧게 잡고 출루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잘 칠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남으면 뱀 다리[蛇足]까지 그리게 된다.
촉박하게 쓰는 것과 함께 분량을 제한하는 것도 방법이다. 분량을 200자 원고지 1매로 한정해놓고 써보라.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달리는 기분이랄까? 답답하다. 200자가 그렇게 짧은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평소엔 그렇게 부담스럽던 ‘만주 벌판 같던 분량’이 그립다.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럴 수만 있다면 훨훨 날 것 같다.
욕심은 천성이다. 가만 놔두면 발호하기 때문에 잘 다스려야 한다. 어떻게 욕심을 다스릴 수 있을까.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굳이 이번에 다 쏟아부을 이유가 없다.
과거에는 글을 쓰다가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이 있으면 버리는 게 아까워서 어떻게든 욱여넣었다. 하지만 이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메모해뒀다가 다음에 쓰자고 생각한다. 글 쓰는 과정은 내 머릿속 어느 한구석에 있을지 모를 쓸거리를 뒤지는 시간이다. 있는 것을 못 찾았다면 나중에 써먹으면 된다. 보여줄 기회는 한 번만 있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고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아는 만큼, 쓸 수 있는 만큼만 쓴다. 토해놓는다는 심정으로 쓰면 금세 쓸 수 있다. 일단 뭐라도 쓰는 것은 나중에 고치기 위해서다.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고칠 것을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써야 한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독자를 완전히 감동시켜버리겠다는 욕심과 불퇴전의 각오로 첫 문장부터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것이다.
‘남겨둬야 다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글은 한 번 쓰고 말 게 아니다. 쓸 수 있다고 다 써버리면 회복 불능 상태가 될 수 있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아예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어느 작가는 글감이 차고 넘치는 순간에 글쓰기를 중단하기도 한다. 다음 날 또 쓰기 위해서.
욕심나는 지점보다 더 높이 올라가서 보는 것도 방법이다.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 들면 그보다 더 윗사람의 높이에서 글을 써보라. 그래도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 드는지. 반대로 바닥까지 내려가 쓰는 것도 욕심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내가 지금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내일이라도 이 조직을 떠날 수 있는데, 떠나면서 욕심부린 내가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럼에도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런 생각이 없으면 잘 쓸 수 없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나 욕구는 욕심과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표현 욕구를 갖고 있다. 인정받길 원한다. 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도 있다. 그런 욕구는 많을수록 좋다.
문제는 과대 포장하고 싶은 욕심이다. 백 번은 써야 제대로 쓸 수 있는데, 쉰 번만 쓰고도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은 욕심이다. 열 번은 고쳐야 제대로 글이 되는데, 다섯 번만 고치고도 제대로 안 고쳐졌다 푸념하는 것도 욕심이다. 심지어 글을 써보지도 않고 글이 안 써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또한 할 일은 다하지 않고 다한 것처럼 보이려는 욕심이다. 욕심낼 자격부터 갖추는 게 먼저다.
참여정부 3년 차 때 한계점에 봉착했다. 내가 아는 내 수준은 70점도 안 됐다. 대통령 연설비서관으로서 90점 이상의 실력이 필요했다. 나는 그렇게 보여야 했다. 언제 들킬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밤샘하며 몸으로 때웠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대통령께 사의를 표했다. 끝내 그만두진 못했지만, 그 이전과 이후는 달랐다. 청와대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때가 바닥이었다.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오를 일밖에 없었다. 내 글에 관한 평이 좋지 않아도 괴롭지 않았다. 잘 보이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다. 잘 써서 칭찬받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썼다.
- 글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1968년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 교수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 학생 20%를 무작위로 뽑아 담임교사에게 명단을 전달하며 이 아이들의 지능지수가 높다고 말했다. 8개월 뒤 명단에 있던 학생들의 성적이 실제로 올랐다. 담임교사가 해당 학생들에게 관심과 기대를 보였고, 그들이 이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적이 향상된 것이다. 이를 ‘로젠탈 효과’라고 한다.
1989년 아내와 결혼했다. 다른 것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 하나는 아내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아내도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아내가 같은 일을 해서 도움이 됐다. 나의 첫 번째 책이자 스스로 글쓰기 책의 전범(典範)이라고 우기는 《대통령의 글쓰기》 최초 독자도 아내였다. 《대통령의 글쓰기》 마지막 꼭지는 원래 그 자리가 아니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 꼭지가 맨 끝에 위치한 것이 화룡점정이었다고 많은 독자가 말한다.
아내 덕분이라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아내는 늘 칭찬한다. 내가 아는 나는 60점에 불과한데, 아내는 나를 80점으로 치켜세운다. 당신은 할 수 있다고, 지레 겁먹었을 뿐이라고, 노력하면 충분하다고. 나를 60점으로 평가하는 사람을 보면 아내는 화를 낸다. “강원국을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처음엔 꿍꿍이로 알았다. 그래야 내가 움직일 테니까. 그러나 30년이다. 일관되게 속일 순 없다. 진심이란 걸 5~6년 전에 알았다. 아내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 남편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친구는 처음 본다”며 나보고 좋겠단다. 아내는 나를 진짜 80점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글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두 가지 경우를 대비해보자. 나보다 글쓰기 실력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글쓰기 가르침을 받았을 때 어느 쪽이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내 경험으로는 뒤의 경우다. 뛰어난 상사를 만난 적이 있다. 매일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하루 링에 오르는 심정이었다.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실력이 모자라니까. 내가 다섯 가지를 말하면 그는 여섯, 일곱 가지를 내놨다. 바위에 계란 치기였다. 그는 종이 한 장에 내가 써야 할 글을 그림으로 그렸다. 글의 설계도였다.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글을 쓰면서 수없이 지적받으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글 쓸 의욕마저 잃었다.
이에 반해 신입사원 시절 그분을 만난 것은 내 글쓰기 인생 최대 행운이었다. 그분은 항상 “어떻게 이렇게 잘 쓰느냐”고 놀라워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내용대로 해보자.” 때로는 내용조차 보지 않았다. “자네가 썼으면 오죽 잘 썼을라고.” 그에게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 밤새워 썼다. 나를 믿고 검토조차 하지 않는 그가 더 윗사람에게 꾸지람 듣지 않도록 열심히 썼다. 어떻게 써야 그가 놀랄까 생각하며 썼다. 놀랄 거리를 찾았을 때 흥분했다. 그것을 찾는 과정이 즐거웠다. 나의 직장 생활은 그에게 인정받고, 그를 통해 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직장에서 글 잘 쓰는 법을 물으면 나는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이렇게 답한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되세요.”
진심이다. 잘 쓰고 싶으면 ‘잘 쓰는 사람’이 되면 된다. 글솜씨와 관계없이 “저 친구는 글 좀 써”라는 입소문이 나면 시비 걸지 않는다. 그 사람이 쓴 글에 대한 지적이 줄어들고 반응이 좋으면 자신도 그런 평판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글을 잘 쓰게 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자신이 잘 쓴다고 생각하고, 글쓰기를 즐기며,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질책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질책과 칭찬 비율이 8대 2, 적어도 7대 3 정도 된다. 지적이 상사의 의무라는 생각으로, 가르치겠다는 마음으로, 더 윗사람에게 지적받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문제점을 찾는다.
결과는 어떠한가. 부하 직원은 주눅이 들고 손은 얼어붙는다.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나지 않기 위해 일한다. 창의는 고사하고 무기력과 무력감만 학습하게 된다.
그렇다면 칭찬과 지적 비율은 얼마만큼이 적정할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긍정심리학자 바바라 프레드릭슨(Barbara Fredrickson)에 따르면, “성공한 조직은 칭찬과 긍정이 부정적 반응보다 3배 정도 많다”고 한다.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 말의 비율이 3대 1일 때 좋은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율이 11대 1을 넘어가면 긍정적 말은 도리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한다. 조건 없는 칭찬도 능사는 아니다.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봤다. 서양과 동양의 학생을 대상으로 공부에 대한 생각 차이를 비교한 실험이다. 결론은 이렇다. 서양 학생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더 열심히 한다. 동양 학생은 자신이 남보다 부진하다고 생각할 때 더 노력한다. 서양인은 더 잘하기 위해 힘쓰는 데 반해, 동양인은 못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두 가지 점은 분명하다. 서양 학생보다 동양 학생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글에는 네 가지 반응이 따른다. 지적, 위로, 격려, 칭찬이다. 지적은 이렇게 고치라고 한다. 위로는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한다. 격려는 다음에 잘하라고 한다. 칭찬은 잘했다고 한다. 이 모두 선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글쓰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칭찬이다.
칭찬은 지적보다 어렵다. 뇌의 속성 탓이다. 칭찬은 뇌의 논리적 영역이 담당하고, 지적은 감정적 영역에서 처리한다. 논리적 근거를 대는 일은 귀찮고 복잡하다. 감정적 반응은 즉흥적이고 수월하다. 또한 뇌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신속히 반응한다. 그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잘 쓴 글보다는 못 쓴 글, 칭찬할 거리보다는 지적할 게 먼저 눈에 띈다. 논술이나 자기소개서는 잘 쓴 글을 뽑는 시험이 아니다. 지적할 거리가 마땅히 없어 살아남는 글이 뽑힌다. 지적할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적이 글을 잘 쓰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적은 못 쓰지 않게 할 뿐이다. 허심탄회한 피드백도 좋지만, 기왕이면 내게 호의적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낫다.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누구든 좋다.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나아가 남의 칭찬에만 기대지도 말자. 스스로 칭찬하고 북돋아주자.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쓴다. 내 글의 가치를 남의 평가에서 찾지 말고 스스로 대견해하자.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내 안의 나를 꺼내 쓸 수 있겠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에게 관심이 있겠는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자신을 토닥여줘야 한다. ‘그럴 수 있다. 누구나 그런다.’ 그러다가 한 줄 내디디면 ‘고생했어. 대단해. 지금처럼만 해.’ 수시로 칭찬하고 고무하자. 뇌는 칭찬받는 짜릿함을 기억해뒀다 다시 그것을 느끼기 위해 시도한다. 마치 술 취했을 때 기분 좋음을 다시 느끼기 위해 술을 마시듯. 난 그렇게 살기로 했다.
글쓰기가 전부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자. 여러 세상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쓰자. 남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에 유익한 글을 쓰자고 마음먹자. 그러면 글쓰기가 편안해진다.
실제로 나의 글쓰기는 세 단계를 밟았다. 1단계 남에게 지적받지 않는 글, 2단계 남에게 칭찬받는 글, 3단계 스스로 만족하는 글. 지금은 3단계 어디쯤에서 서성이며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그다음 단계를 지향하고 있다.
나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은 술 마시는 것, 또 술 마시는 것 그리고 칭찬받는 것이다. 글쓰기에도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쓰다 막힌 곳이 뚫렸을 때, 다 썼을 때 그리고 잘 썼다는 소리를 들을 때다. 그중 으뜸은 역시 잘 썼다는 칭찬을 받을 때다.
아내가 두고두고 칭찬하는 두 가지가 있다. 아들 이름을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란 뜻의 ‘하람’으로 지은 것과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것이다. 《대통령의 글쓰기》는 인세 영향이 크겠지만, 아무튼 둘 다 글과 관련한 칭찬이다.
나는 오늘도 칭찬을 갈구하며 아내에게 글을 보여준다.
- 글쓰기 동기부여 방법
“강의 듣고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글쓰기 강의하고 들은 평가 중 가장 기분 좋은 말이다. 내가 강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의로 글쓰기를 가르칠 수는 없다. 글쓰기 책도 마찬가지다. 다만 글 쓸 용기와 자신감, 쓰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켜줄 뿐이다.
나는 쉽게 중독되는 편이다. 가장 최근에 경험한 중독은 블로그에 글 쓰는 일이었다. 집착에 가까웠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했다. 심리적 의존과 남용이 대표적 중독 증상이라고 하는데, 내가 딱 그랬다.
그러나 내게 블로그는 매일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계기, 동기, 환경이란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블로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매일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중독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고 하는데, 블로그 포스팅은 오히려 매일 글을 쓰게 하는 동기부여 장치가 됐다. 블로그 이웃에게 내 글을 보여주고, 그들이 내 글을 기다리는 상황이 다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작용했다.
글을 쓰려면 계기가 필요하다. 이왕이면 잘 쓰고 싶은 동기면 좋다. 글쓰기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좋은 글을 읽다 보면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절절한 구애 편지를 써야 한다든가, 꼭 들어가고 싶은 직장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경우도 계기가 된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동기를 부여받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 의도나 의욕, 욕구를 갖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 차이다.
자본주의 경전이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두 가지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다. 그 하나는 여행과 친교라는 계기다. 애덤 스미스는 공작 자제의 가정교사가 돼 유럽 각지를 여행하는 기회를 얻었다. 3년 동안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또 중농주의로 유명한 프랑수아 케네를 비롯해 당대 지식인들과도 교류했다. 이 여행이 《국부론》을 쓰는 계기가 됐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배려라는 동기다. 스미스는 부자 편이 아니었다. 국가의 부와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 생산된다고 주장했고, 부자의 탐욕은 사회가 허용하는 규범과 도덕의 한계 안에서만 용인했다. 부자들의 이기적 욕망으로 가격이 무제한 오르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손이 제어해줄 것으로 믿었고, 자유무역 역시 약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봤다. 이러한 계기와 동기가 《국부론》을 집필하게 했다.
글쓰기 동기에는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가 있다. 내적 동기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하는 것이고, 외적 동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이다. 내적 동기가 바람직하지만, 내공이 없으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외적 동기라도 꾸준히 자극해야 한다. 방법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보여주는 것을 즐겨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 잘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라는 개념이 있다. 접근 동기는 좋은 상황을 상상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회피 동기는 나쁜 상황을 예상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칭찬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접근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이고, 혼나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은 회피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접근 동기로 쓰는 사람은 ‘이것을 왜 써야 하는지’ 목적과 이유를 생각한다. 회피 동기로 쓰는 사람은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날까’를 생각한다. 접근 동기의 경우 성취에 이르렀을 때 행복감을 느끼고 실패하면 슬픔을 느낀다. 반면 회피 동기는 성취했을 때 안도하고 실패하면 불안을 느낀다.
예전에 나는 글을 쓸 때 회피 동기로 썼다. 못 쓰면 대형 사고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밤새도록 두려움 속에서 썼다. 무난하게 넘어가면 안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접근 동기에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회피 동기나마 있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글에는 쓰고 싶은 글과 써야 하는 글이 있다. 쓰고 싶은 글을 쓸 때는 접근 동기가 필요하다. 즉 칭찬이 동기부여를 한다. 쓰기 싫은데 써야 하는 글은 회피 동기가 필요하다. 지적받지 않겠다는 생각이 동기를 부여한다.
책 집필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글은 접근 동기로 써야 한다. 독자에게 호평받는 상황을 그리면서 쓰는 것이다. 급하게 써야 하는 글은 회피 동기로 써야 한다. 쓰지 못했을 때 감수해야 할 상황을 겁내면서 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뇌가 위기감을 갖고 집중한다. 이 밖에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글은 접근 동기, 몰입으로 해결책을 찾는 글은 회피 동기를 자극하는 것이 좋다.
나는 접근 동기로 글을 써야 한다고 믿는다. 못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쓰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 그러자면 다섯 가지 접근 동기가 필요하다. 먼저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다. 이기적인 글쓰기를 해야 한다. 내가 재밌고, 나에게 유용하고, 스스로 감동해야 남에게 줄 게 생긴다. 독자를 위해서만 쓰는 글은 쉬 지친다.
내가 쓰는 글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지 따져봐라. 어떤 글을 써야 내게 도움이 되는지, 나의 미래를 밝혀줄지 찾아봐라. 찾아낸 바로 그것을 써라. 그래야 신바람이 나서 쓸 수 있다. 자료도 찾고, 사람들 얘기도 듣고, 유심히 관찰도 하게 된다. 내가 쓰는 글이 내 밥벌이와 연관되면 더 좋다. 그것이 가장 힘센 글쓰기 동기부여다. 그런 사람은 독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독자의 좋은 반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들볶거나 애면글면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보상이다. 나는 기고 원고를 쓰고 나면 막걸리를 한 통씩 마신다. 나의 뇌는 막걸리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로 쓴다. 고된 일을 하는 농부들이 새참을 먹는 것과 같다. 술이 아니더라도 보상할 방법은 많다. 쓰고 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보상은 글이라는 결과물이다. 쓰다 보면 결과물이 나오고, 이것이 보상이 된다. 보상은 다시 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세 번째는 모방이다. 많은 사람이 글쓰기에 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글이라는 것을 평생 써왔기 때문에 글쓰기에 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 썼다, 못 썼다 평하면서 잘 쓰는 사람을 무시하려 든다. 동시에, 글쓰기가 두려워 글을 멀리한다. 그러면서 글쓰기는 부질없는 짓이라며 폄하한다. 여우가 높은 나무에 있는 포도를 따 먹지 못하자 그 포도를 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글쓰기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그래서는 잘 쓸 수 없다.
글을 잘 쓰려면 쓰기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글쓰기는 유익하다, 글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준다,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잘 쓰는 사람을 닮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글 쓰는 동기가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필사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베껴 쓰다 보면 그 작가처럼 쓰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는다.
네 번째는 성장이다. 글을 쓰지 않고는 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