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되었지만 잘 살아보겠습니다

혼자가 되었지만 잘 살아보겠습니다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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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다 데루오 西田輝男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잃은 후 일흔의 나이에 슬픔을 치유할 새도 없이 혼자 살아가게 된 저자는, 서툰 집안일 앞에서 악전고투를 벌이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세요”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1947년 오사카 출생. 오사카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한 후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스케펜스 안(眼)연구소(Schepens Eye Research Institute)에서 유학했다. 1993년부터 야마구치대학교 의학부 안과학 교실 교수로 근무했으며, 2001년에는 미국 각막학회에서 일본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카스트로비에호 메달(Castroviejo Medal)을 수상했다. 현재 일본안구은행협회 상무이사로 재직 중이며, 일본의사회의학상, 서일본문화상, 일본안과학회상, 중국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옮긴이 최윤영

자신이 전하는 글이 따스한 봄 햇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며 일본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하나와 미소시루』, 『여리고 조금은 서툰 당신에게』, 『패밀리 집시』, 『당신이 매일매일 좋아져요』, 『직장인을 위한 7번 읽기 공부법』, 『아버지와 이토 씨』,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등이 있다.

70SAI, HAJIMETE NO OTOKO HITORIGURASHI

by Teruo Nishida

 

Copyright ⓒ 2017 Teruo Nishida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ness edition published by Gentosha Inc.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Gentosha Inc.

through The English Agency (Japan) Ltd. and Eric Yang Agency, Inc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Eric Yang Agency)를 통한

저작권사와의 독점 계약으로 글담출판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라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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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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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는 세탁기 위쪽 선반에 놓여 있어요. 앞에서부터 차례로 세제, 표백제 그 순서대로 세탁기에 넣어요. 뚜껑을 닫고 제일 안쪽에 놓여 있는 유연제를 세 번째로 넣고요. 알았어요? 전원은 버튼만 누르면 들어와요.”

 

나는 세탁기 앞에서 아내의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인 다음 시작 버튼을 눌렀습니다.

세탁의 시작입니다.

 

그다음으로 요리 특훈입니다. 주방에서 채소를 썹니다.

머뭇머뭇 천천히, 들쑥날쑥 고르지 않게 써는 건 그럭저럭할 수 있지만, 양파 다지기는 도저히 모르겠군요. 아무리 썰어도 작은 사각으로 다져진 양파 모양이 안 나옵니다. 결국에는 적당하게 썬 양파를 모아 마구잡이로 칼질해, 썬다기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으깨고 있는데 아내가 주방에 오더니 한 소리 합니다.

 

“이리 줘봐요. 처음 썰 때는 가장자리를 남기고 썬 다음 방향을 바꿔서 이번에는 끝까지 썰어요. 알겠어요?”

“맛은 맛국물로 내고, 간장과 미림을 적당히 넣어 맛을 보면서 간을 조절하면 돼요. 자신의 혀를 믿어요!”

 

아내 인생의 마지막 몇 달간은 이렇게 세탁과 요리 특훈이 이뤄졌지요.

이 무렵 아내는 이미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아서 거의 소파에 누워만 있었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일어나 주방에 와서 집안일에 관해 여러모로 세세하게 알려줬습니다.

아내는 봄날 꽃구경과 가을 단풍놀이를 좋아했습니다.

“일생에 꼭 한 번은 요시노에 벚꽃 보러 가요.”

이렇게 자주 말했었지요.

몇 년 전 내가 대학을 완전히 떠나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오사카성 공원의 벚꽃, 요시노의 벚꽃, 나라의 벚꽃을 보러 갈 계획을 세웠지요.

15주년 결혼기념일을 친구네 부부와 함께 축하하고는 마치 아이가 소풍 가는 듯한 밝은 기분으로 다음 날 꽃구경에 나섰지요.

오사카성 공원과 나라의 신야쿠시지나 도다이지에는 벚꽃이 때맞춰 만개해 근사한 벚꽃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요시노의 벚꽃은 조금 일렀는지 아직 3분의 2만 피었더군요.

“좋아. 내년에 다시 데리고 와주겠소. 내년에는 반드시 타이밍 맞춰서 만개한 요시노의 벚꽃을 보러 옵시다.”

그렇게 말하며 야마구치로 돌아왔지요.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촬영한 사진을 정리하고 마음에 드는 걸 인쇄하는 거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이때 이미 병마가 아내의 몸을 침범하기 시작했으리라고는 두 사람 모두 꿈에도 생각 못 했지요.

 

꽃구경을 하고 2, 3주가 지난 4월 말의 일이었습니다.

“부정출혈이 있어서 의사한테 진찰 좀 받고 올게요.”

이 말을 남기고 아내는 의학부 시절 동창생에게 진료를 받으러 후쿠오카로 외출했습니다.

 

진찰 결과는 자궁경부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아홉 달에 걸쳐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가 진행됐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폐와 간으로의 전이가 발견됐고 반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암 진단으로부터 약 1년 반 후.

 

나를 남겨두고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혼자 사는 생활을 시작해보니 필요한 최소의 집안일은 요리와 세탁과 청소지만, 그 외에도 실로 많은 일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무엇이든 아내에게 맡기던 나는 사실 현금 자동입출금기에서 돈을 찾거나 입금하는 일 같은 걸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통장과 인감을 들고 은행에 가면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구닥다리 생각을 하는 인간이었지요. 거기에 집과 마당 손질이나 확정신고 문제 등, 그야말로 다양한 집안일이 산더미만큼 있더군요.

 

시작해보니 집안일이라는 게 하루 중 터무니없이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집안일 중에서도 끼니를 챙기는 일은 매일 절대 필요한 일이더군요. 요리가 집안일의 최우선이 되더란 말입니다. 세탁이야 살짝 게으름을 피워도 여벌의 속옷과 양말을 충분히 구입하면 어찌어찌 되지요. 청소는 쓰레기만 제때 버려 집안을 쓰레기더미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면 먼지로 공기야 더럽겠지만 뭐, 나중에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도전한 집안일이 요리였지요.

나를 걱정해주는 지인과 친구에게 도움도 받아가며 조금씩 집안일에 익숙해졌고, 세탁과 청소 및 할 수 있는 집안일의 목록도 늘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떠나고 1년 이상이 흐른 지금, 아내의 손길로 늘 청결하고 쾌적했던 예전의 집과는 매우 큰 차이가 나더군요.

어떻게든 ‘쓰레기 집만은 되지 않도록’ 기를 쓰는 게 고작입니다. 실제로 혼자서 생활해보니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라 대체 왜 진작 아내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는지 후회의 연속입니다.

 

아내를 보낸 후 오랜 벗과 지인에게서 ‘나도 마찬가지로 몇 년 전에 아내를 떠나보냈습니다’라고 적힌 편지를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평균수명을 생각할 때 남자가 먼저 죽는다고들 생각하는데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편지에는 어떻게 그 고난을 극복했는지, 어떻게 쓸쓸함을 이겨냈는지 하는 등의 경험담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생활해나가기 위한 비법 등도 친절하게 알려줬지요. 무엇보다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에게서 받은 격려의 편지가 내 마음에 스미어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 채 멍하니 있는 내게 큰 위로와 도움이 됐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1년 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경험한 지금에야 겨우 어떻게 생활해야 좋을지가 대강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흔을 맞아 혼자가 된 남자의 마음속에 어떠한 갈등이 있고 어떻게 집안일을 소화하며 살아나가야 할지 적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삶의 보람이나 일하는 보람을 찾아 상실감을 극복해나가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요.

 

집안일을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살아남을 방도가 없습니다. 실패한 이야기도 포함해서 저의 경험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니시다 데루오

1장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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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난 후에야
알게 된 것들

 

 

 

 

 

대학을 졸업한 이후 나는 평생을 대학 의학부 안에서 보냈습니다. 안과의로 진료에 종사했고 안과 연구자로서 몇 가지 새로운 지견을 발견했으며, 또한 교육자로서 차세대 안과의를 키워왔습니다.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생활했으니 소위 집안일과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늦게 귀가해도 집에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지요. 청소, 세탁은 물론이거니와 부끄럽지만 내 서재 정리조차도 스스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안과의였던 터라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논문이나 자료를 휙 훑어보고는 내용별, 혹은 프로젝트별로 꼼꼼하게 분류해서 정리해줬습니다.

매일 외출할 때의 복장도 모두 아내가 준비해줬지요. ‘그런 거야 아무렴 어떻다고.’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매일 아침마다 양복색에 맞춰 와이셔츠를 고르고 넥타이를 선택하느라 아내는 늘 분주했습니다.

벌써 입었는데 바지 다림질이 시원찮다 싶으면 아내는 “다림질하게 얼른 벗어요” 하면서 내가 “이만하면 괜찮소”라고 말할 새도 없이 바지를 벗겨갔지요.

“오늘 이불 말렸어요. 기분 좋죠?”

“고맙구려. 기분이 참 좋네.”

항상 이런 식이었지요. 더군다나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일도 대부분 아내가 해줘서 나는 일 년에 몇 번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회나 강연으로 출장을 갈 때는 일정을 일러주면 속옷과 와이셔츠를 필요한 개수만큼 미리 챙기고, 지병으로 챙겨 먹는 약까지 가방에 넣어둬서 그냥 그걸 들고 가기만 하면 됐지요.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컴퓨터와 파워포인트 자료 등, 강연 관련 자료를 잊지 않고 준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덕분에 출발 전 마지막 순간까지 강연 슬라이드를 수정하며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막상 아내가 떠나고 보니 외출 준비를 해줄 사람이 없어 직접 며칠분의 약을 챙기고 속옷이며 와이셔츠 개수를 세어 적당한 크기의 여행용 가방을 찾아 채워 넣는 작업을 해야만 했지요. 이게 또 엄청나게 시간을 잡아먹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강연 내용을 확인하기보다 먼저 외출 준비부터 한 다음에 남은 시간에 슬라이드와 자료를 확인해야 했지요. 친구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니 이러더군요.

“자네는 지금껏 너무 응석받이였지. 출장 준비는 원래 스스로 하는 거라네.”

친구는 조금도 내게 맞장구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나는 지금껏 아이처럼 오냐오냐 대접만 받은 게지요.

매일의 식사 준비, 세탁 그리고 가끔 하는 청소…… 따로 놓고 보면 집안일은 크게 시간을 잡아먹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체로 보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매일 오는 편지와 광고 우편물을 처리하는 데만도 한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실제로 혼자 해보니 집안일이라는 게 엄청난 작업임을 알게 됐지요.

‘집안일에 치여 죽겠다!’

마음속으로 외쳐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내와 함께 생활한 16년 반 동안은 내게 있어 인생의 수확기이기도 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미국 각막학회가 매년 전 세계에서 단 한 명에게만 수여하는, 꿈꿔오던 최고의 명예인 카스트로비에호 메달(Castroviejo Medal)을 수상했지요. 그 이후에도 서일본문화상, 일본의사회의학상, 일본안과학회상, 중국문화상 등 잇달아 큰 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현재 승인된 약제로는 치료에 이르지 못하는 난치성 각막 장애를 치료하는 방법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세 개나 발견해낼 수 있었습니다.

연구로 고민할 때면 주저하는 법 없이 “시도해봐요” 하고 항상 등을 밀어준 아내 덕분에 나는 언제나 마음껏 연구를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집 밖에서 실컷 날갯짓을 하며 연구해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귀가 후의 평온한 분위기, 그리고 깨끗하고 깔끔한 복장으로 외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느라 아내가 들인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고맙구려.” 말해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정말로 고마움 가득한 심정이며, 내가 혹여 어느 정도 사회에 이바지했다면 그 반은 아내 덕분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한데 각오야 다졌지만 실제로 아내 없이 나 홀로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대한 일까지 갖가지 일이 참 다양하게도 일어나네요.

아내와 함께했던
마지막 시간

 

 

 

 

 

16년 전에 아버지를, 10년 전에 어머니를 배웅했습니다. 부모님의 죽음은 확실히 마음을 무겁게 했지요. 하지만 그 역시 이 세상의 일과로 결국은 맞이해야 할 일이라고 각오하고 있었고, 또 두 분 모두 80년 이상의 인생을 보내며 천수를 누렸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마구치에 사는 나를 대신해 오사카에서 남동생이 마지막까지 병구완을 해준 덕에 상주로서 담담히 부모님을 배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80세 이상이라고 하는 오늘날 아내가 예순여덟에 죽으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지요. 나도 아내도, 남자인 내가 먼저 떠날 거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60대에 아내를 잃는다는 건 부모님을 배웅하는 것과는 마음이 전혀 다릅니다. 자식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았기에, 둘이서 보낸 집에서 아내가 떠나고 난 뒤 혼자 생활해나간다는 게 정말이지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내가 먼저 간 후 1년 반의 생활을 돌아보니 혼자 사는 생활이 궤도에 오르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더군요. 하나는 아내의 죽음 받아들이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죽은 아내와 마음의 거리 두기입니다. 아내의 죽음을 마음으로 준비할 때와 막상 현실에서 아내가 사라진 이후의 마음가짐, 감정 그리고 생활은 크게 달랐습니다.

 

증상이 나타나 암 진단을 받고 아홉 달의 치료를 받은 시기, 전이됐다는 사실과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 추가 치료를 단념하고 죽기까지의 반년, 그리고 아내가 떠나버리고 난 이후의 1년 반, 약 3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각각의 시기마다 내 마음은 강하게 요동쳤고 크게 변화해갔습니다.

치료를 받던 시기에는 반드시 암이 없어져 건강을 되찾을 거라고 확신했고,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야 있었지만 아직 희망을 품고 있었지요. 전이를 알게 되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하고서는 이 세상을 떠나는 시점이 명확해진 시기라 맞이할 그날을 향해 살아가는 나날이었습니다. 아내는 나를, 그리고 나는 아내를 생각하며 일상을 보냈지요. 아내로서는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안에 가능한 한 직접 많은 것을 정리하려 한 시기였습니다.

내게는 아내에게 미련이 남지 않도록, 아내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행복을 느끼며 그날을 차분한 마음으로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우며, 조금이라도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려고 했던 시기였습니다.

다행히 대학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을 관둔 터라 모든 시간을 아내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어떤 후회도 없습니다. 계속 공직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니 신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런 배려를 해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통증이나 배의 부기 등으로 고통스러워했던 건 마지막 한 달 반뿐이었습니다. 그 덕에 아내에게 여러 가지 집안일을 배울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이는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아내가 갑자기 떠나기라도 했다면 모든 일을 아내에게만 맡겨뒀던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분명 우왕좌왕했을 겁니다. 아내가 먼저 가는 것에 대해 본인뿐만 아니라 나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할 시간이 주어진 셈이지요.

그럼에도 막상 그 시간이 찾아오니 공허함과 무상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도저히 말로 표현 안 되는 마음과 감정이 솟아났습니다. 실제로 죽고 나서 사십구재, 납골, 백일재까지의 약 석 달은 아내의 넋을 애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내 생활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백일재를 지난 무렵부터 나 혼자서 생활해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무겁게 실감하기 시작했지요. 그 무렵부터 일과 함께 집안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시기가 됐습니다.

버릴 수 없는 유품

 

 

 

 

 

실상 혼자서 많은 집안일을 처리해야 하고 보니 처음으로 부딪히는 문제는 집 안 어디에 무엇이 정리돼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더군요.

주방의 어느 서랍에 어떤 조미료가 있고 냉장고 안은 어떤 규칙으로 정리돼 있는지, 청소기를 두는 위치는 어딘지 등등 정말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물건 찾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지요. 청소기는 과감히 새로 구입했는데 여기저기서 이전에 사용하던 다양한 모양의 청소기가 튀어나오고는 합니다. 조미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슈퍼마켓에서 맛있어 보이는 조미료를 골라 사 와서 요리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 주방 상황이 차츰 파악되자 서랍 속에 가지런히 정리된 같은 조미료를 몇 개나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뭔가 필요한 게 생기면 어지간히 급한 게 아니면 절대로 사지 않고 먼저 집 안을 빠짐없이 탐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냥저냥 그대로 참을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식사 및 세탁과 관련해서, 더구나 속옷이나 양복, 와이셔츠 등 매일 나갈 때마다 필요한 물건은 내 나름대로 알 수 있도록 새로 정리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일단 지금 있는 물건을 어딘가로 대피시켜놓을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아내가 정리해놓은 것 중에서 내가 사용하지 않을 만한 것을 버리고서 공간을 만들어야 하지요.

사실 이것이 참으로 힘든 작업입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쳐다보면 아내와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백화점의 근사한 포장지나 예쁜 끈 같은 게 서랍 가득 들어 있으면 필요할 때 사용하려고 소중히 챙겨뒀구나 싶어서 내가 사용할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차마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그 서랍을 비울 수 없다는 의미여서 새로운 정리는 거기서 중단됩니다.

일단 급한 대로 봉투에 담아 바닥에 뒀는데 그 수가 쌓이니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고령자의 쓰레기 집 같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런 집이 생기는구나, 실감하며 ‘그 상황만은 절대로 안 돼!’ 하고 이성이 움직이더군요.

그래서 나 혼자 생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안 쓸 것 같은 것은 미련 없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공간이 비면 거기에 물건을 정리해 넣는 유형이라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또렷하게 이해하고 있었지요. 필요한 때에,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하면 어딘가에서 꺼내줬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내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일 뿐이라서 아내가 없는 지금은 물을 수가 없으니 나로서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일이 순서대로 서랍을 열어가며 내 나름대로 이해를 해나가는 수밖에 없지요.

1주기는 내게 매우 중요한 단락이었습니다. 1년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필요한 게 뭔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지요. 추운 날이면 머플러를 찾느라 소란을 피웠지만, 지금은 ‘겨울 물건은 여기에’ 하고 내 나름대로 정리가 됐습니다. 아직도 정리해야 할 것이 많지만 일단 1년 사계절 동안 사용하는 물건을 파악한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새롭게 내 고유의 정리정돈을 해나갈 수 있을 듯합니다.

 

통증완화병동에 입원하기 전까지 아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집 안을 정리했습니다.

은행 통장은 인감과 체크카드와 함께 하나하나 파우치에 담아뒀고, 자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