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찬은 서울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가톨릭대 신학부에 들어갔다. 신학부 도서관에서 한 번도 대출된 적 없이 먼지만 잔뜩 쌓여 있는 라틴어로 된 중세 철학 원전들을 바라보며, 거기에 담긴 보화를 연구해서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이때 중세는 철학의 암흑기였다는 인식이 얼마나 그릇된 편견인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중세의 사상 체계가 얼마나 독창적이고 풍부한 세계인지를 확인하고 매료되었다.
1988년부터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10년 동안 공부하며 중세철학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 학위 논문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중세 언어철학의 신학적 수용 : 유비 문제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네덜란드의 브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중세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널리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라틴어 원문으로 된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을 우리말로 옮겼고 엘더스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도 번역해서 소개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중세 철학 전반에 걸쳐<스콜라 철학 융성기의 언어철학>, <유비개념 발전에 관한 역사적고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수용과 스콜라 철학의 발전>, <인격 개념의 근원과 발전에 대한 탐구>와 같은 논문도 여러 편 발표했다. 현재 가톨릭대에서 인문학부 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중세 철학이라는 인류 문화의 보고에서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할 값진 사상을 얻기 위해 동료 학자들과 함께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중세 철학의 사유가 현세적이고 감각적인 자극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인간의 본성을 깊이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주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저술했다.
elias@catholi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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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들어가는 말
중세는 암흑의 시대?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의 권위가 인간의 이성을 속박하고 뛰어난 학자들이 쓸모없는 신학 연구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던 암흑의 시대. 따라서 중세 철학 또한 진지하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없으며, 플라톤Platon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로 대표되는 고대 철학에서 인간의 이성이 다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이후의 근대 철학으로 건너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철학이란 이성의 빛으로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일진대, 이성과 신앙, 철학과 종교가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어떻게 ‘진정한 철학’이 가능했겠는가?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근대의 눈으로 볼 때, 철학의 역사에서 중세는 생략 가능한 괄호 안의 시대였다. ‘철학은 신학의 하녀’라는 명제가 중세 철학을 대표하는 말로 오인되며 이런 비판에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철학은 신학의 하녀’라는 표현은 본래 11세기에 빠른 속도로 발달한 논리학과 문법학의 지식을 그대로 신학적인 토론에 적용하려고 했던 변증론자들과의 논쟁에서 철학을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했던 반변증론자 페트루스 다미아니가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중세 철학 전체를 나타내는 표어로는 적합하지 않다.
이러한 중세에 대한 편견의 직접적인 원인은 중세와 근대 사이에 놓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체험했던 중세 철학, 즉 스콜라 철학 쇠퇴기(15세기 이후)의 철학에서는 더 이상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고, 지나치게 세분화된 개념들에 관한 논쟁들이 오히려 중요한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또한 자연에서 만나는 다양한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탐구조차도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기존 학자들의 저서에 언급된 내용들에만 집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스콜라 철학 쇠퇴기의 왜곡된 교육 형태와 성과들을 체험했던 인본주의자들은 중세와 중세 문화를 전면 거부하고 자신들을 고대 사상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자처했다.
또한 근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중세 자연학 이론들의 많은 오류가 밝혀지면서 중세의 자연관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이 이루어졌다. 일단 중세의 자연과학 지식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자 중세 철학에서 이루어진 다양하고 복잡한 토론들마저 극히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믿고 따르는 데는 신앙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이성에 따른 복잡한 논증들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이유로 중세 철학에서는 “작은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아 있을 수 있는가?”와 같은 터무니없는 질문에 대해 토론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식의 편견도 퍼져나갔다. 사실 중세 철학자들은 천사를 순수 영적인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토론은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근대 과학의 발전과 종교개혁은 중세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을 더욱 가속화했고, 이런 경향은 19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서 서양 철학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확신한 철학자 헤겔G. W. F. Hegel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 형식적으로 반복할 뿐인 중세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라고 주장했다. 중세 철학은 철학과 같은 대상을 고찰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신학의 범주를 따르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어떤 전제도 없이 오직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탐구할 수 있는 반면에,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미 진리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 될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헤겔과 마찬가지로 중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중세 철학 전체를 불모의 체계라고 단정했다. 심지어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Denis Diderot는 “중세 철학은 인간 정신의 가장 큰 재앙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근대의 소위 ‘새로운 철학 체계’의 모순과 위험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중세에 대한 평가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부터 강조되기 시작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헤겔의 철학에서 그 정상에 도달했지만, 이런 경향은 보편적 이성 이외의 감정, 육체, 개체 들의 소중함을 무시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일부 학자들은 신앙을 충만한 합리성이 꽃피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비판하며 인간 이성을 새로운 종교 수준으로 신뢰하고 절대화했다. 그러나 인간 이성을 통한 지속적인 발전이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는 20세기 들어 1·2차 대전이라는 참상을 겪으며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으로 발전시킨 기술들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 이상적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했지만, 인류에게 다가온 것은 환경오염과 점증하는 자연 재해 같은 새로운 위협이었다.
인간 이성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위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도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무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맹신과는 다른 방향에서 인류의 정신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모든 것이 덧없으며 찰나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온 생애를 걸 만한 결정적인 가치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대에 널리 퍼져 있는 주장의 뿌리에는 허무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다가오는 인류의 위기 앞에서도 일부 현대 철학의 부류들은 명확성이나 실용성 등의 가치를 중시하느라 철학이 연구해야 할 범위들을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해야 할 철학의 사명을 망각하고 말았다. 따라서 철학의 역사에 안목이 있는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근대 문화가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면서 야기한 다양한 문제의 해결책을 그 문제가 야기되기 이전으로 올라가 새롭게 찾기 위해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허무로 돌리는 허무주의는 현대인들에게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허무주의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지성작용은 탐구가 목적일 뿐,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나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허무주의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인생이란 한시적인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감각과 경험의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19세기 말에 이성의 절대화가 가져올 위험을 예언했던 교황 레오Leo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를 도화선으로 가톨릭 학자들은 오랜 침체기를 극복하고 중세 철학, 그 중에서도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사상의 부흥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일련의 중세 학자들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중세의 다양한 수사본을 발굴해 소개함으로써 중세 철학이 지닌 풍부함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고, 서구에서는 중세 철학 전체를 재조명하여 복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부터는 당대에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영미 분석 철학의 영향으로 언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중세에 이루어진 놀라운 언어 철학적인 성찰들이 새롭게 재발견되고 심도 있게 연구되었다. 이로써 19세기까지 팽배해 있던 중세 철학에 대한 폄하는 사라졌다. 이제까지 이루어진 다양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중세 학자들도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순수하게 철학적인 관점과 방법에 따라 다룰 줄 알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레오 13세는 19세기 말 기존 사상들이 붕괴하는 유럽의 총체적 위기에 가톨릭 교회를 이끌었던 교황(재임 1873〜1903)이다. 그는 정신적인 위기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문화를 다시 정착시키는 데 필요한 사상 체계를 찾기 위해 가톨릭 사상사를 면밀히 검토했다. 드디어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 사이의 그 어느 것도 격하시키지 않고 조화롭게 종합해 웅장한 체계를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안에서 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사상을 발견한 그는 1879년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를 반포하고 중세 사상,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으로 복귀할 것을 호소했다.
분석 철학은 20세기 현대 영미 철학의 주류를 이루던 철학 사조. 철학 문제를 고찰할 때 언어의 작용에 주목하고 언어 분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 및 로크와 흄에 의해 발전한 경험주의적 사고방식을 계승한 것이 특징이다. 일상 언어로 된 명제의 표면적인 문법 구조에서 불필요한 철학적 문제가 많이 발생하므로, 이를 완전한 논리 구조를 나타내는 명제로 바꾸어놓으려는 철학적 분석에서 분석 철학이 시작되었다. 이상적인 인공 언어의 구성을 추구하는 논리적 원자론(러셀, 초기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빈 학파), 이와는 달리 일상 언어의 실제 사용법을 주의 깊게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 일상언어 학파(무어) 등이 분석 철학에서 발전해나왔다.
이들의 연구 성과와 그들이 현대 철학자들과 벌인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중세 철학이 신앙을 전제하기 때문에 참된 철학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렇게 비판하던 철학자들 또한 자신들의 주장처럼 아무런 전제 없이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실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오늘에 와서는 중세 철학이 ‘천편일률적’이며 수준 낮고 업적이 빈약하다든가, 중세 철학에는 풍요성과 다양성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스콜라 철학의 약점과 후기에 나타난 역사적인 쇠퇴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자들은 중세 철학을 새롭게 평가하고 중세 철학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향이 서구 학계보다 수십 년 늦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최근 들어 중세 철학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으며 연구 결과물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제까지 국내에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던 중세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 이 책은 중세 철학의 발전 과정을 종합적으로 다룰 것이다. 앞으로 다룰 중세 철학의 주요 내용만 살펴보아도 중세 철학이 이성적인 탐구의 측면에서 다른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측면에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각 시대의 사상은 당대의 정치·경제·문화적인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므로, 사상적인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시대 상황의 변화를 연결해줌으로써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우선 철학적인 주제별로 각 사상가들의 입장을 대비시키기보다는 시대 흐름에 따라 중세 철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만남으로 태동된 중세 철학(1~8세기)이 어떻게 스콜라 철학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갔으며(9~12세기), 13세기 들어 융성기에 도달한 스콜라 철학의 풍부하고 원숙한 사상이 어떤 이유로 쇠퇴해갔는가(14~15세기)를 전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거의 1,500년 동안 활동했던 많은 사상가를 나열식으로 다루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요한 사상가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개별적인 주제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중세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주요 사상가들이 제기한 윤리와 악의 문제, 보편과 개체의 관계, 신 존재 증명, 이성과 의지의 상호 관련성 등 다양한 주제의 개요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줄 것이다.
청소년기는 인생의 어떤 시기보다 다양한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이 과정에서 청소년들은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거나 타협하며 살아가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자신이 의미를 두는 이상적인 가치와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그들에게는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중세 철학자들의 노력과 성과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이, 중세 철학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중세는 암흑의 시대’라는 편견을 완전히 극복하고, 중세 철학이라는 인류 문화의 보고에서 이상적인 가치와 괴리된 현실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해결할 작은 실마리를 찾았으면 한다. 특히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적인 가치가 자신의 삶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중세 철학을 다루는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부모의 신앙 가치를 받아들여 생활해오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발달할수록 막연히 믿어왔던 많은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의문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 문제에 대해 인류가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중세 철학이야말로 청소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해본다.
제1장
중세 철학을 위한 준비운동
중세 철학이란 단지 ‘중세’의 철학일까?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중세와 철학자들이 말하는 중세는 같은 시기일까? ‘서양 중세 철학’이라는 말에는 중세라는 특정 시기에 존재했던 서구인들의 철학이라는 사실 외에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
중세 철학이라고 하면 먼저 13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중세 철학을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과 동일시하는 학자들은 약 9~1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발전한 철학을 중세 철학이라고 본다. 이와 달리 역사학계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을 고대의 종말로 보고 콘스탄티노플의 정복(1453)이나 종교개혁(1517)의 발단과 더불어 근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해서 이 사이를 중세로 보며, 이를 따르는 학자들은 5세기 말에서 15~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 발전한 서양 철학을 중세 철학이라고 분류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들은 역사적 사건에만 집착하여 사상적인 연관성을 충분히 고찰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사실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요 구원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철학에서 제기되는 질문에도 답변하기 때문에, 철학과 종교의 대화나 투쟁은 그리스도교의 태동부터 불가피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인간과 세계는 어디에서 왔는가, 영혼은 불멸한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삶이란 무엇이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은 이전에는 철학에서 다루어졌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대안이 제시되었다. 유럽의 사상과 문화를 주도해왔던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를 만나면서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 자유의지, 악의 문제 등과 같은 새로운 주제들과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리스 철학이 다루어왔던 것들도 근본적인 변형을 겪었다. 그리스도교 또한 초기에 가해진 그리스 철학의 공격을 극복하고 자신의 입장을 철학적인 용어와 체계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이단이 생겨나는 등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지만 이 두 거대한 사상의 융합은 양측 모두에게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선물을 마련해주었다. 그리스 철학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통한 고대의 몰락 이후 자칫 존재마저도 잊힐 뻔했으나 서유럽 전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그리스도교라는 수호자를 가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한 지역에서 태동한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지중해 전체에 퍼져 있던 그리스 로마 문화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다른 지역 종교들이 도달하지 못했던 포괄적인 체계화를 이룰 수 있었고, 이런 과정에서 얻은 설득력은 이후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교부 시대인 초창기를 거쳐 중세 철학의 전성기인 스콜라 철학 시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서 유래한 교부 철학 시기와 스콜라 철학의 시기, 즉 2~15세기에 걸쳐 발달한 서양 철학의 흐름을 통틀어 ‘중세 철학’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중세 철학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철학이 주류를 이룬 중세 서유럽의 철학이다. 물론 중세 철학이 모두 그리스도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신플라톤 철학, 유대 철학, 아랍 철학 등이 그리스도교와는 독립적으로 발달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근대 유럽 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 철학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중세 철학의 참모습을 규정하기 어렵다.
신플라톤 철학 또는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전통에 입각하여 2〜6세기 유럽에서 흥성했던 그리스 철학의 일파로 플로티노스, 포르피리오스, 프로클로스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들은 만물의 근원인 ‘일자(一者)’에서 정신, 세계혼을 비롯한 모든 실재가 계층적으로 ‘유출(流出)’하여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보다 낮은 계층은 높은 것을 모방하며 그것보다 복잡하고 불완전하다. 또 만물은 ‘관조(觀照)’를 통해 근원인 일자로 되돌아가려고 애쓴다. 신플라톤 철학은 인간도 일자와의 직접적인 합일에 도달하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13세기에 이슬람 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아랍인들의 철학 및 종교 철학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주류였지만 초기에는 신플라톤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다가 후기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원형을 회복했다. 아랍인들이 그리스 철학을 연구한 것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코란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 스콜라 철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12세기에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중세 철학은 그리스에서 발달한 고대 철학과는 다른 관심과 사명을 가지고 출발했다. 중세 철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련의 종교적 사건뿐만 아니라, 그 모태가 되는 유대교의 종교적 세계관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중세 철학의 세계관에 따르면 신은 유일의 절대자로서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고 인간에게 ‘신의 모상imago Dei’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 교부 철학에서 스콜라 철학에 이르는 중세 철학은 이런 독특한 신앙적 세계관을 ‘이 세상의 지혜’인 그리스 철학의 방법을 수용해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발달된 철학이다.
따라서 중세 철학은 중세 그리스도교가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 이루어낸 학문적 성과 전부를 포함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무척 다양하다. 그렇지만 다양한 중세 철학의 경향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에 기초한 철학적 진리와 계시에 기초한 신앙의 진리가 하나의 근원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둘 사이의 필연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공통된 근본 전제로 삼고 있다. 이런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에 따라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가 정식화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표현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신앙에 관련된 사안에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성의 잘못된 사용을 경계하는 것이었으며 중세 철학의 역사 속에서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세 철학 시대에는 세계와 인간 그리고 신을 에워싼 커다란 문제들을 이성의 힘으로 다루는 철학은 종교, 즉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고, 신앙 또한 철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체계화하는 한편 철학적 사고를 더욱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중세 철학을 포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어떤 시기에도 볼 수 없었던 ‘통일과 질서’에 대한 확신이다. 이러한 대규모의 통일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창조주의 선한 의도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였다. 그리스도교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세계를 창조한 후 “보시니 좋더라”라고 긍정했다고 믿음으로써 세계 속의 질서를 인정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세계를 ‘조화로운 우주Kosmos’로 보는 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는 정신적이고 형상적인 측면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물질도 신에게서 창조되었다고 믿음으로써 정신적인 요소는 물론 물질적인 요소까지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중세 그리스도교인들은 인간의 범죄 때문에 세계 질서가 혼란스러워졌더라도, 역사는 궁극적으로 신의 선성(善性, 선한 본질)이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완성에 이를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과 달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무한한 권능과 지혜를 지닌 신과 대조되는 유한한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만이 신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이란 신과 다른 피조물들의 중간자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능가할 수 있는 탁월한 점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의 다양한 능력이었다. 중세인들은 또한 진정한 행복은 신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완성되며, 자신들은 모든 피조물을 신의 뜻대로 관리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인간 사회를 관장하는 법률의 타당성도 단순히 인간들 사이의 약속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자연법에 근거하고 있을 때만 인정되었다. 이러한 자연법은 자신의 근거를 신적 이성과 동일시되는 영원법 안에 두고 있었다. 더 나아가 국가 권력도 폭력을 통해 특정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쟁취하는 것으로는 인정받지 못했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신의 뜻에 따라 권력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신성로마제국 성립에서 나타나듯 지상에서 신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비록 정치적인 현실에서는 다른 세계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음모가 난무했지만, 중세 말기의 세속적인 정치 이론이 득세할 때까지는 신의 뜻에 따르는 국가라는 이상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확인되듯 중세인들에게 질서 자체는 자명한 것이었으며, 이 질서를 인식하는 것만이 과제로 남아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소수 엘리트들이 논했던 다양한 주제들은 비록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에서 일부 변형되었을지라도, 중세인들이 지니고 있던 통일과 질서에 대한 열망 안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각 개인이 지닌 고유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자각이 본격적으로 표현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지만, 근본적으로 중세에 확립된 모든 인간이 신 앞에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는 생각 없이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정한 사회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실정법과 달리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법. 실정법이 민족과 사회에 따라 내용을 달리하는 데 비해‘자연’에 기초한 자연법은 변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효력을 가진다. 로마법인 만민법에서도 세계를 일관하는 자연적 질서의 사상이 나타나지만 자연법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한 플라톤주의의 수용과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자연학이 수용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발달되었다. 중세에는 그리스적 자연 질서가 신(神)의 이성에 내재하는 영원법이라 생각했고, 존재자는 각기의 방법으로 영원법을 실현해야 한다고 여겼다. 즉 자연법은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 정신에 내재화된 영원법이며 실정법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정법 이외에는 법 규범을 인정하지 않는 법실증주의는 이러한 자연법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통일성에 대한 추구가 곧 모든 것이 획일화되어야 한다는 압력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이나 신앙이 모든 학자의 정신적 배후에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저마다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철학을 전개했다. 중세 철학의 발전과 분화의 다양한 계보를 연구했던 중세 역사가들은 중세 사람들이 어떤 시대의 철학자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독특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세는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들로 매우 열띤 토론과 논쟁이 벌어졌던 시기다. 앞으로 다룰 신앙과 이성의 관계, 보편과 개체의 중요성, 신 존재 증명의 가능성, 윤리 기준으로서의 지성과 의지의 문제 등을 살펴보면, 중세가 결코 획일화된 무채색의 세계가 아니라 각각의 다양한 생각이 뚜렷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다채로운 세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동시대에 벌어진 토론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변화 안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가 만난 중세 철학의 태동기(2~6세기)에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다양한 이론이 난무했는데, 이론들은 저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리스도교의 계시 내용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가 종합한 중세 철학의 거대한 사상 체계는 본격적인 꽃을 피우기 위해 9세기까지의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카를 대제Carolus Magnus의 문예 부흥과 다양한 학교의 설립으로 다가온 스콜라 철학의 봄은 문법학과 논리학의 발전, 다양한 학문 방법론의 개발을 통해 본격적인 발전을 준비했다. 그 결과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을 통해 맞게 된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13세기)는 가장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여름에 비할 수 있는 시기였다. 축적된 연구 내용과 체계적인 지원 방식, 재능 있고 열정적인 학자들이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의 황금기와 비견될 수 있는 놀라운 사상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발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4세기 들어 시작된 자연 재해와 인간이 저지른 무질서들로 말미암아 찬란했던 중세의 전성기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고대하는 가을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런 시대적인 변화 때문에 중세 철학에서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 보편과 개체의 문제 등 동일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매우 다양한 색채가 나타났다. 이렇게 동일한 주제가 시대 변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는 것에 주목해보는 것도 중세 철학의 새로운 맛을 느끼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제2장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의 만남—중세 철학의 태동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敎理)를 체계화하고 확립하는 데 공헌한 학자들을 ‘교부(敎父)’라고 부르며, 교부들이 이룬 학문적인 성과를 교부 철학으로, 이들이 활동했던 2~8세기를 교부 시대라 부른다. 바로 이 교부 시대에 서양 문명의 두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이 항상 그랬듯이, 이 두 문화의 융합도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그리스도교 태동 당시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는 자신들에게 점령된 그리스의 높은 문화와 사상에 매료되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그리스가, 정치·사회적으로는 로마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 시기의 문화를 그리스 로마 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헬레니즘이라 부르며 헤브라이즘이과 대비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발달한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 과정에 한정될 때가 많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그리스 로마 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다.
다신교적 종교관을 가졌던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은 노력에 따라 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일반인들의 소박한 종교관과 달리 신화적 신관을 벗어나려던 철학자들은 철학적 사유로 도달할 수 있는 우주 원리로서의 신관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세계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끊임없이 순환한다고 믿었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교 문화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종말 때 신이 심판자로 온다는 유일신적 사상을 가진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