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가담해 첫 옥고를 치른 이래, 8년간의 투옥, 사형 구형 등의 고초를 겪었다.
독재권력에 맞서 자유의 증언을 계속해온 양심적인 행동인으로, 한국의 전통 사상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재창조하고자 노력하는 사상가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 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 『남』 『김지하 사상전집(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1993), 정지용문학상(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했다.
시삼백 一
이제 이렇게
이제 이렇게 한번 가보자.
어떻게?
시의 한 양식에만 매달리지 말고 여러 양식에 여러 가지 지향을 담아 그야말로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다 다른 얼굴로 비치되 작은 먼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살아 생동하도록 그렇게.
여러 해 전 나는 공자가 당대 민초들의 찬가나 정치적 비판 시 이외에도 노래와 이야기와 교훈적인 시들을 엇섞어 ‘시삼백’의 백화제방을 『시경』으로 들어 올렸음이 당대 문예의 한 방향 제시였음을 기억해냈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는 우선 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시삼백’을 원하고 있다.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
먼저 나 자신부터 천태만상이니 어쩌랴!
그 밖에도 목에 힘주고 한마디 하라면 이렇다.
조선조 말 천재 의학자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가 이런 말을 했다.
“옛날에는 사람 몸에 그리 병(病)이 많지 않았다는데 요즈음 사람 몸엔 웬 병이 이렇게 많은가? 아마도 지구 자전축이 서쪽으로 기운 뒤부터일 것이다.”
천재 의학자의 말이다. 그렇다면 지구 자전축은 언제부터 서쪽으로 기운 것인가?
예부터 동아시아 선비들 사이에는 ‘천지경위 삼천년(天地傾危三千年, 또는 二千九百年)’이라는 말이 있었다.
삼천 년 전에 천지가 위태롭게 기울었다는 말이다. 삼천 년이면 바로 주(周)나라 성립 때다. 지구 자전축이 주나라 때부터 기울었다는 이야기고 그때부터 병이 많고 생명이 위태로워지고 천지가 흔들흔들해졌다는 말이다. ‘서쪽’을 동양 간지학 (干支學)에서는 ‘기위(己位)’라 부른다. ‘기위’란 간지에서는 ‘대황락위(大荒落位)’라고 부르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밑바닥’이다.
‘밑바닥’으로 축이 기울었으니 병이 안 생기겠는가?
제3의 역(易)이라는 19 세기 한국의 ‘정역(正易)’은 후천개벽이 시작되면 바로 그 서쪽의 ‘기위’로 기울었든 지구 자전축이 본래의 위치인 지구 북극의 태음(太陰: 대빙산 지대) 방향으로 복귀 이동한다고 했고 또 그것을 ‘밑바닥이 임금 자리로 되돌아온(己位親政)’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이때에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정치 주체 노릇을 못해본 밑바닥 민중, 즉 ‘이십대 미만의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쓸쓸한 소외 대중’이 정치 전면에 나서는 ‘십일일언 (十一一言)’이라는 사태가 나타난다 했다. 이때에 바로 노자(老子)가 말한 ‘무위정치(無爲政治) ’ 즉 ‘화백(和白)’이라는 ‘직접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했다.
나는 2008 년 시청 앞 촛불사태를 그것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2004 년의 ‘쓰나미’, 즉 26 만 명이 한꺼번에 죽은 인도네시아 대해일이 지구판?해양판의 대충돌이고 그 충돌의 원인이 지구 자전축의 북극 이동이기 때문이다(『중앙일보』 2010 년 3월 3일자 ‘나사’의 발표 내용).
올해의 아이티 지진, 칠레의 지진 등이 다같이 바로 이 지구 자전축의 북극 이동( 8센티미터 이동)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나는 역시 2009 년 초 나의 촛불 시집 『못난 시들』에서 밝혔고 그때의 ‘십일일언’을 ‘밑바닥들의 후천개벽’으로 들어 올리려 애쓴 바 있다. 전혀 이해가 안 되었고 ‘후라이’라고 ‘미친 놈’이라고 매도되었다. ‘나사’가 ‘후라이’나 치는 ‘미친 놈 단체’인가?
그런데 그 지구 자전축이 서쪽으로 기운 삼천 년 전의 계기가 바로 주나라 성립 때다. 철기 문명, 농업 문명, 봉건 정치, 가부장제도, 중화 제국주의의 시작이다. 그리고 공자는 바로 이 시기의 중국 문명의 위대성을 ‘시경(詩經)’을 시삼백(詩三百)으로 높이높이 들어 올렸다. 이른바 ‘여성, 어린이, 소인, 오랑캐, 백성, 중생’을 밑바닥으로 처박아 멀리 귀양 보내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군자와 제후와 천자와 중국’과 함께 주나라 통치자인 주공(周公)의 친위부대인 ‘다남조숙인(多男朝肅人: 수많은 남성 어른들)’의 윤리, 도덕을 하늘같이 들어 올린 것이다.
바로 그것이 뒤집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쓰나미요 아이티 지진이요 칠레의 대해일이다. 이른바 ‘천하지하(天下地下)’인 밑바닥 욕쟁이 김지하의 ‘시삼백’이 안 나오고 배기겠는가? 시경(詩經)이 아니래도 못난 밑바닥들의 후천 화엄개벽 귀거래사는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아닌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명 앞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시는 쓰는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읽는데도 역시 큰 용기가 필요하다.
시커멓고 더럽고 쌍스럽고 욕투성이임에도 전혀 그와 반대로 한없는 숭고와 심오와 새로운 근원적 생명력, 우주 생명력의 ‘서기(瑞氣)’를 추구하고 있는 ‘흰 그늘’이기 때문이다. 내가 목에 너무 힘줬나? 허허허허허.
그래 내 좋아하는 문학이론가 홍용희 교수에게 어느 날,
‘당신이 공자 노릇을 해라. 내가 민초 노릇을 하겠으니 한번 내 뒤죽박죽 시작들 속에서 시삼백을 건져내보라!’
그래서 나의 수백 편의 최근 시편들을 이야기〔賦〕, 노래〔興〕, 교훈적인 것〔比〕, 풍자〔諷〕, 초월적인 명상〔神〕의 다섯 가지 양식으로 먼저 홍 교수가 갈라냈다. 그런데 홍 교수의 ‘시삼백’을 내가 다시 검토하면서 내 자신이 오히려 크게 놀라게 되었다. 물론 홍 교수가 손댄 원고 뭉치 이외에도 수많은 시고들이 그 밖에 또 있어서이지만 좌우간 ‘부, 흥, 비, 풍, 신’ 말고도 무엇으로 갈래 짓기 힘든 매우 복잡한 지향의 컴컴한 새로운 양식적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마구니 같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어서다. 하기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자리가 이전의 내 삶터와는 많이 다른 이른바 ‘배 부른 산 무실리(無實里)’이니 그러기도 하겠지만(공자의 ‘시삼백’은 그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가면서 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시삼백’의 구성을 새롭게 결단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홍교수가 갈래 지은 이백 편은 그대로 ‘부, 흥, 비, 풍, 신’으로 나아가되 그 밖에 백 편 정도는 다시 우선은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조금 애매한 말이지만 ‘땡’, ‘똥’, ‘뚱’으로 이름 붙여 재구성하기로 했다.
‘땡’은 물론 우리 집 고양이 김막내의 별명으로 ‘중생시(衆生詩)’의 양식이고, ‘똥’은 좀 구린내 나는 상상력의 영역, 이른바 흰 그늘이 조금 심한 편을, 그리고 ‘뚱’은 세상이 마음에 안 들거나 사는 데에 영 재미가 없는 그런 차원을 지적하는 것이겠다. 앞으로 이러한 지향이 다시 어떤 특정한 장르로까지 정립되고 미학적으로 제대로 발전할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난 잘 모르겠다.
그러니 백 편 위에 그저 ‘땡’, ‘똥’, ‘뚱’ 세 마디와 역순(逆順)의 집필 번호와 제목만 붙인다. 결과와 효과가 무엇이 될 것인지는 전혀 자신 없다. 다만 지금 우리의 삶이 무척이나 더럽고 지저분하고 시커멓고 또 복잡, 다양해서 어떤 형태로든 그 밑에 참으로 순결한, 쌔하아얀 하나의 큰 흐름이 있기는 있겠지만 결코 획일적으로 묶어서 그 무슨 ‘게놈’ 따위 ‘촌놈짓’을 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다시 말하지만 게놈은 분명한 촌놈짓이다.
한마디 잘라 말한다면 이 세상과 삶은 역시 갈 데 없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이고 ‘만년지상 화천타(萬年枝上 花千朶)’이니 역시 갈 데 없는 개체 융합(identity fusion)이고 ‘내부공생(Endosymbiosis)’이다.
시문학에서만이라도 기괴한 에코 파시즘은 애당초부터 촌놈 취급하는 쌀쌀맞은 시민적 새 세대적인 날카로운 눈치가 있어야겠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잘라 말한다. ‘게놈은 촌놈이다.’ 뻔한 수작 아닌가! 한우 고기까지 유전자 게놈이라니! ‘더러운 짝퉁!’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문예부흥이고 입고출신(入古出新)에 의한 바람직한 모심의 세계문화 대혁명의 첫 길일 터이다. 진정한 우주 생명력에 입각한 참다운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거대한 전환기다.
그렇다.
이제 이렇게 한번 가보자. 물론 어수선하겠지만 수운(水雲) 선생 가르침에도 ‘밝고 밝은 이 개벽운수는 각각 제 나름 나름으로 밝히라[明明其運 各各明]’란 내용이 있으니 한번 진중하게 고려해보기로 하자.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
땡이는
늘
서가의 책을 바라본다
책보기가
버릇이 되었다
다른 일 하다
언뜻 고개 돌려보면
땡이는 하염없이
그 수많은 책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내 가슴이
그때처럼 둥둥둥
뛰는 적 별로 없었다
재재작년
네이처지에서
마이클 위팅의 보고서
‘재진화’를 읽고 나서
텔레비전 E채널,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고양이가 병든 강아지를 안마해주는 장면을
장면 아니라 사건이다
그걸 본 뒤부터다
둥둥둥
심장이 뛴다
끝났다는 진화 재진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인간은
어찌 진화할 것인가 문제다
고양이가 책을 저리도 그리워한다면
아
저리도 큰 동경에 가득 찬 눈으로
늘
서가를 보고 있다면
(지금도 그렇다 시를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흘낏 바라보니 땡이는 책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
아!
개벽이다.
화엄개벽은 이제
고양이에게서,
곤충 겨드랑이 날개에서
단순히
외딴 섬 원숭이의 물에 씻은
고구마 사건에서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
그리고
전 세계 문화대혁명
발 플럼우드의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를 거룩한 우주 공동 주체로
들어 올리는 지극한
모심으로
모심으로
문화와 생활을 대변혁하는
문화대혁명 없이는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로
우리 스스로의 옛날로부터
바로
참 모심을 배워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
혁명을 밀어가지 않으면
2012년
그것으로 끝나는 마야달력의
검은 저주
대종말
그뿐
나는 오늘 고양이에게
(다시 돌아보니 땡이는 나를 보고 있다. 땡이는
우리 집 막내. 김막내다, 아비를 보고 있다. 왜?
어깨가 무겁다.)
오는 세상은
유리(琉璃)라
용화(龍化)라
화엄(華嚴)이라 미륵(彌勒)이라 말해준다
무량후천세계(無量後天世界)라 그리 말해준다
그 세계에서
땡이는
춤추며 노래할 것이다
말을 할 것이다
신기(神氣)의
화엄(華嚴)의
그전에 두 개의
활이 서로 다른 동쪽 서쪽으로
달리는
아리따운 저 중생부처의
계룡(鷄龍)의 시를 읊을 것이다
나는 안다
이 일이
절대로 캄파넬라나
그 비슷한 마르크스의 꿈 따위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나는 안다
이 일이
고양이 혼자서 이룩할 수 있지 않음을
나는 그리고 똑똑히 안다
지금 내가
그 땡이 어머니
그 땡이의 자애로운 어머니
한 배 안의
한울님
그 부처님을
마야부인처럼 모셔야 모셔야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
지금 그것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땡이
나의 딸
김막내는 지금
서가에 높이 꽂힌 나의 시집
‘화개(花開)’에서 다음 구절을 읽고 있다는 것
나는 안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아무것도 없다
바람이 불고
꽃이 핀다
그 꽃의 얼굴을
이제 신선의 흰 수염 난 땡이가
말한다
‘나의 모든 지난날
짐승의 날들을
거룩하게
드높이라고.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해탈의 대화엄의
개벽의 역사’라고.
나는 안다
이것을 안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이제
그 개벽의 길을 마침내 말하자고
누군가
나에게 제안해오고 있다
새로운 진보
다름 아닌
참 중도의 길
화엄개벽의
모심의
그 길
그 음개벽(陰開闢)의 길을.
(고양이는 내 시선 안에 지금 없다. 땡이는 우리
막내는 이미 이제 고양이가 아니다. 부처님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의
저 아득한
공(空)이다.)
고양이에게
책을 주자.
지금
여기
가장 아름다운 시들을 주자
그리하여
우리의 부모 책임을
힘 있는껏
힘 있는껏
다하자.
증산을
처음 감옥에서 읽을 때
현무경(玄武經)이 들어오고
현무경의 그 우주 후천개벽의
로드맵이 들어와 구역질을 일으키고
뒤를 이어
한자로 쓴
암호문자가 내게
기괴한 불쾌감을 가져왔다
어느 날
원주집에서
술김에
현무경을 갈갈이 찢어
방구석에 내팽개치며
다시는
증산 근처엔
안 가겠다 맹세했다
그런데
어제 낮
강남 삼성동
스튜디오에서
한글 크립토그람 전문가
안상수(安尙秀) 선생을 만나
강증산 한자 암호문자를
한글 크립토 사이사이
섞어 쓰는 픽토그람으로 개발해보라
조언하고
돌아오는 길
한강 위에서
멀리 나는 새떼를 보며
이 길은
아득히 먼 용화(龍華)의 길
고판례(高判禮)와
숱한 마당녜 부엌녜
뒷방녜들 샛별
갈퀴 엄마들의
길
그 길 열어가는 열쇠들의
신호체계
어째서
증산 이야기가
우리 원보 이야기 뒤에야
스스럼없이
떠오르는지를 이제 와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이제야
오는지를
알겠다
원보가
디지털 화엄학과 디지털
신화학으로 디지털만 아니라
아날로그까지 합쳐서
우주 후천의
대화엄개벽의
신호체계를 발신할 때가
왔구나
이제야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