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uki Murakami ⓒ 2009 by ELENA SEIBERT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으로 노마문예신인상을,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1987년 『노르웨이의 숲』을 발표,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1995년 『태엽 감는 새』로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했고, 2005년 『해변의 카프카』가 당시 아시아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2009년에는 『애프터 다크』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1Q84』가 출간되자마자 한일 양국의 서점가를 점령하며 또다시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2017년 『기사단장 죽이기』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세계 50여 개 이상의 언어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6년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해럴드 핀터 등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받은 체코의 프란츠 카프카 상을, 2009년 이스라엘 최고의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201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1Q84 BOOK2
by Haruki Murakami
Copyright ⓒHaruki Murakami, 2009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09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Originally published in Japan by SHINCHOSHA Publishing Co., Ltd., Tokyo.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Haruki Murakami, Japan through THE SAKAI AGENCY and SHINWON AGENCY CO.
All rights reserved.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신원 에이전시와 THE SAKAI AGENCY를 통해 저자와 독점 계약한 (주)문학동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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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아오마메
거긴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동네였어
장마가 끝났다는 공식발표는 아직 나지 않았지만, 하늘이 파랗게 맑아서 한여름 햇볕이 유보 없이 지상에 내리쬐고 있었다. 우거진 초록 잎을 늘어뜨린 버드나무는 오랜만에 농밀한 그림자를 도로 위에 출렁였다.
다마루가 현관에서 아오마메를 맞아주었다. 어두운 색감의 여름용 정장을 입고 하얀 와이셔츠에 단색 넥타이를 매고 있다. 그러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몸집이 그렇게 큰 남자가 아무리 무더운 날에도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건 아오마메에게는 항상 크나큰 불가사의였다.
다마루는 아오마메를 보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들리지 않는 짧은 인사를 입에 올렸을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둘이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복도를 앞서 걸으며 아오마메를 노부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안내했다. 누군가와 잡담을 나눌 기분이 아닐 거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개가 죽은 일이 상당한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집 지키는 개는 또 찾을 수 있어.” 그는 전화로 그렇게 아오마메에게 말했다.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게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건 아오마메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암컷 독일 셰퍼드는 그에게는 소중한 존재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그런 개가 느닷없이 영문 모를 죽임을 당한 것을 그는 일종의 개인적인 모욕, 혹은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교실 칠판처럼 널찍한 다마루의 말 없는 등판을 바라보며 그가 느끼고 있을 조용한 분노를 아오마메는 상상할 수 있었다.
다마루는 거실 문을 열어 아오마메를 안에 들이고 자신은 문 앞에 서서 노부인의 지시를 기다렸다.
“지금은 마실 건 괜찮아요.” 노부인이 다마루에게 말했다.
다마루는 별말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노부인과 아오마메만 남았다. 노부인이 앉은 팔걸이의자 옆 테이블에 둥근 유리어항이 놓였고, 그 안에서 빨간 금붕어 두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금붕어이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어항이었다. 으레 그렇듯이 물속에는 초록색 바닷말이 떠 있었다. 아오마메는 이 단정하고 널찍한 거실을 벌써 몇 번이나 방문했지만, 금붕어를 본 건 처음이었다. 에어컨이 약하게 설정되어 있는지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살갗에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등뒤 테이블에는 흰 백합꽃 세 송이가 든 꽃병이 놓여 있었다. 백합은 큼직하고, 명상에 잠긴 이국의 작은 동물처럼 느긋했다.
노부인은 손짓으로 아오마메를 곁에 있는 소파에 앉게 했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에는 하얀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졌지만 여름 오후의 햇살은 유난히 강렬하다. 그 빛 속에서 노부인은 여느 때 없이 피폐해 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로 힘없이 뺨을 괴고 큼직한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었다. 눈은 움푹하고 목의 주름도 늘었다. 입술은 색깔을 잃고, 기다란 눈썹 끄트머리는 마치 만유인력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듯 아래로 조금 처져 있었다. 혈액의 순환기능이 저하되었는지도 모른다. 피부가 군데군데 가루를 뿌린 듯 허옇게 보였다.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최소한 대여섯 살은 더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늘은 그같은 피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노부인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삿일이 아니다. 적어도 아오마메 앞에서 그녀는 항상 말끔하게 가다듬은 모습으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기력을 남김없이 동원하여 반듯한 자세와 생동감 있는 얼굴 표정을 유지하면서 노년의 징후는 요만큼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항상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은 이 집 안의 많은 것들이 평소와는 다르다, 아오마메는 그렇게 생각했다. 방 안의 빛조차 평소와 다른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아한 앤티크 가구가 가득한 이 천장 높은 방에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흔해빠진 금붕어와 어항.
노부인은 그대로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 팔걸이에 의지해 팔로 뺨을 괸 채 아오마메 옆에 있는 공간의 한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아오마메도 잘 알고 있었다. 노부인은 그저 잠시 시선을 둘 데가 필요했을 뿐이다.
“목마르지 않아요?” 이윽고 노부인은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아뇨, 목마르지 않아요.” 아오마메는 대답했다.
“거기 아이스티가 있어요. 괜찮다면 따라 마셔요.”
노부인은 방문 근처의 서비스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얼음과 레몬이 든 아이스티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색깔이 다른 컷글라스가 세 개.
“고맙습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하지만 그 자세 그대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부인은 다시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지만, 그것을 입에 올리면 거기에 포함된 사실이 사실로서 보다 확고해져버릴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고 싶다, 그런 심정이 담긴 침묵이었다. 그녀는 곁의 어항에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체념한 듯이 마침내 아오마메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 양 끝은 의식적으로 약간 들어올렸다.
“세이프하우스를 지키던 개가 죽었다는 얘기는 다마루에게 들었지요?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 노부인이 물었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쓰바사가 없어졌습니다.”
아오마메는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없어져요?”
“자취를 감췄어요. 아마도 밤사이에. 오늘 아침에 알았어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답니다.”
아오마메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린 채 할말을 찾았다.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번에 하신 말씀으로는 쓰바사는 항상 다른 사람과 함께 잔다고 하셨는데요. 같은 방에서 지켜보기 위해.”
“그렇답니다. 하지만 그 여성은 여느 때 없이 깊이 잠이 들어서 쓰바사가 없어진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군요. 날이 밝았을 때는 쓰바사가 이불 속에 없었답니다.”
“독일 셰퍼드가 죽고, 그다음 날 밤에는 쓰바사가 없어졌다.” 아오마메는 확인하듯이 말했다.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가지 사건이 서로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도 관련이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아오마메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테이블 위의 어항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부인도 아오마메의 시선을 따라가듯이 거기에 눈길을 던졌다. 두 마리의 금붕어는 몇 개의 지느러미를 미묘하게 움직이며 유리로 만들어진 연못 속을 시원스레 오락가락했다. 여름빛이 어항 속에서 기묘하게 굴절해, 신비에 찬 심해의 일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금붕어는 쓰바사를 위해 산 거예요.” 노부인은 아오마메의 얼굴을 보며 설명해주듯이 말했다. “아자부의 상점가에 작은 축제가 있어서 쓰바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었지요. 방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해서는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다마루도 함께였지요. 거기 야시장에서 어항과 함께 이 금붕어를 샀습니다. 그 아이는 금붕어에 큰 관심을 보였어요. 자기 방에 두고 하루 종일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 내가 여기로 가져왔어요. 나도 요즘 자주 금붕어를 바라봐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봅니다. 참 신기하게도, 정말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질 않아요. 지금까지 금붕어를 이렇게 열심히 바라본 일은 없었는데.”
“쓰바사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시는 데는?” 아오마메는 물었다.
“짐작 가는 데는 없습니다.” 노부인은 말했다. “그 아이가 찾아갈 만한 친척 집도 없어요. 내가 아는 한, 이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아이예요.”
“누군가 억지로 끌고 갔을 가능성은요?”
노부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각다귀를 쫓듯이 신경질적으로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아이는 그냥 거기서 나간 거예요. 누가 찾아와 억지로 데려간 게 아닙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주위 사람들이 눈을 떴겠지요. 그 집에서 지내는 여성들은 그러잖아도 잠이 얕아요. 쓰바사는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갔을 거예요.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가 조용히 현관문을 따고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간 것이지요. 나는 그 광경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나가도 개는 짖지 않았어요. 이미 그 전날 밤에 죽었으니까.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갔어요. 바로 곁에 갈아입을 옷을 잘 개켜두었는데, 파자마 차림 그대로 가버렸어요. 돈 한푼 없었는데.”
아오마메의 얼굴이 다시 좀더 일그러졌다. “혼자서 파자마 차림으로?”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열 살 먹은 여자아이가 달랑 혼자서 파자마 차림으로 돈 한푼 없이 그 한밤중에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왠지 그게 딱히 이상한 일로 생각되지를 않는군요. 아니, 지금은 오히려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났다는 마음마저 듭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행방을 찾지도 않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금붕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요.”
노부인은 어항에 흘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똑바로 아오마메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그 아이를 찾아다녀도 모두 쓸데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 아이는 이미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괴었던 팔을 내리고 오래도록 몸 안에 고여 있던 숨을 천천히 밖으로 토해냈다.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로.
“하지만 어째서 나가버렸을까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세이프하우스에 있으면 잘 지켜줄 거고, 달리 갈 곳도 없는데.”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개가 죽은 일이 원인이었을 거라는 마음이 들어요. 이곳에 온 뒤로 그 아이는 개를 몹시 좋아했고 개도 그 아이를 유난히 잘 따랐어요. 사이좋은 친구 같은 관계였지요. 그래서 개가 죽은 일로, 더구나 그렇게 피투성이로 수수께끼 같은 죽임을 당했으니 쓰바사는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요. 당연한 일이에요. 세이프하우스의 사람들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개의 무참한 죽음은 쓰바사에게 보낸 메시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메시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 네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걸 안다. 너는 이곳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또다시 네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메시지죠.”
노부인의 손가락은 무릎 위에서 가상의 시간을 세밀하게 쫓고 있었다. 아오마메는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마도 그 아이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했고, 결국 스스로 마음을 정하고 이곳을 떠났을 거예요.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니랍니다.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파요. 아직 열 살 어린아이가 그런 결심을 해야 하다니.”
아오마메는 손을 내밀어 노부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그쳤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부인은 말을 이었다. “내게는 말할 것도 없이 크나큰 충격이에요. 몸의 일부를 쥐어뜯긴 것 같은 심정이에요. 그 아이를 내 자식으로 정식으로 맞아들이려고 마음먹었는데. 물론 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어요.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그러면서도 원했던 일입니다. 그 일이 잘되지 않았다고 누구에게 우는소리를 할 처지도 아니지요. 하지만 솔직히 이 나이가 되니 힘든 게 몸에 사무치는군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하지만 쓰바사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올지도 몰라요. 가진 돈도 없고 달리 갈 곳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노부인은 어딘지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 열 살이지만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결심을 하고 이곳을 나갔습니다. 아마 자기 스스로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요.”
아오마메는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근처 서비스 테이블로 다가가 파란색 컷글라스에 아이스티를 따랐다. 딱히 목이 마른 건 아니지만, 자리를 떠서 한 박자 틈을 두고 싶었다. 그녀는 소파로 돌아와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테이블 유리판에 내려놓았다.
“쓰바사 이야기는 우선 여기까지예요.” 노부인은 아오마메가 소파에 자리잡기를 기다려 말했다. 그리고 마음에 금을 그으려는 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몸 앞에서 두 손을 단단히 맞잡아 깍지 꼈다.
“이제부터 ‘선구’와 그 리더 이야기를 하지요.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요. 그것이 오늘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중요한 용건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쓰바사에 관한 일이기도 해요.”
아오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녀가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그 리더라는 인물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처리해야 합니다. 저쪽 세계로 옮기는 것이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이 인물은 습관적으로 열 살 전후의 소녀들을 성폭행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아직 초경을 맞지 않은 소녀들이에요. 그같은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교리를 날조하고 교단 시스템을 이용합니다. 나는 거기에 대해 가능한 한 상세하게 조사했어요. 합당한 루트에 조사를 의뢰하고 약간의 돈을 썼습니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어떻든 지금까지 이 사내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소녀를 네 명까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네번째 소녀가 쓰바사예요.”
아오마메는 아이스티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맛을 알 수 없었다. 입 안에 솜이 들어서 모든 맛을 흡수해가기라도 하듯이.
“상세한 건 아직 판명되지 않았으나 네 명의 소녀 중 적어도 두 명은 지금도 여전히 교단 내에서 살고 있어요.” 노부인은 말했다. “그녀들은 리더의 측근으로서 무녀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군요. 일반 신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습니다. 그 소녀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교단 내에 남았는지, 아니면 도망칠 수 없어서 그곳에 머물러 있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녀들과 리더 사이에 지금도 성적인 관계가 있는지 어떤지, 그것도 분명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든 리더와 그녀들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군요. 마치 가족처럼. 리더가 거주하는 공간은 완전한 오프 리미트여서 일반 신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많은 일들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어요.”
컷글라스가 테이블 위에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은 잠시 틈을 두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습니다. 네 명 중 첫번째 희생자는 리더의 친딸이라는 겁니다.”
아오마메는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 근육이 저 혼자 움직여 크게 일그러졌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요. 그 사내는 가장 먼저 친딸을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칠 년 전, 그 아이가 열 살 때.” 노부인은 말했다.
노부인은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마루에게 셰리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그사이에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제각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마루가 쟁반에 새 셰리주 병과 가늘고 기품 있는 크리스털 잔 두 개를 얹어 내왔다. 그는 그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새의 목이라도 비틀듯이 단호하고도 정확한 동작으로 병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잔에 따랐다.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마루는 목례를 건네고 방을 나갔다. 그는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개 때문만이 아니었어,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소녀가(그것도 노부인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소녀가) 사라져버린 일이 다마루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건 정확히는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입주 근무를 하는 것도 아니라서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밤이 되면 도보 십여 분 거리의 자기 집에 돌아가서 잔다. 개가 죽은 것도, 소녀가 사라진 것도 그가 없는 밤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어떻게도 막을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의 업무는 어디까지나 노부인과 ‘버드나무 저택’을 경호하는 것이며, 부지 밖 세이프하우스의 안전유지까지는 미처 손이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 사건들은 다마루에게는 개인적인 실책이고, 자신에게 던져진 용서하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당신은 그 인물을 처리할 준비가 되었나요?” 노부인은 아오마메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오마메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노부인은 말했다. “물론 그간 당신에게 부탁했던 일들은 어느 것 하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번만은 특히 더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온 힘을 다해 처리하겠지만 당신의 안전을 어디까지 확보할 수 있을지, 나는 아직 확신을 가질 수 없답니다. 아마도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더 큰 리스크가 있을 거예요.”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을 위험한 장소에 보내는 그런 일을 나는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솔직히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그자를 이 세계에 살려둘 수는 없어요.”
노부인은 잔을 손에 들고 셰리주를 한 모금 핥듯이 마셨다. 그러고는 다시 한참이나 금붕어를 바라보았다.
“여름날 오후에 마시는 상온의 셰리주를 나는 옛날부터 아주 좋아했답니다. 날씨가 무더울 때 차가운 술을 마시는 건 그리 좋지 않아요. 셰리주를 마시고 자리에 누워 설핏 눈을 붙입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잠이 들어요. 잠에서 깨어나면 조금쯤은 더위가 사라집니다. 언젠가 그런 식으로 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름날 오후에 셰리주 한두 잔을 마시고 소파에 누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고, 그대로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았으면.”
아오마메도 잔을 들고 셰리주를 조금 마셨다. 아오마메는 그 술의 맛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뭔가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이스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얼마간 맛이 느껴졌다. 알코올의 강한 자극이 혀를 찔렀다.
“솔직히 대답해주면 좋겠는데,” 노부인은 말했다. “당신은 죽는 것이 두려운가요?”
대답을 하는 데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아오마메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두렵지는 않아요.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노부인은 엷은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노부인은 조금 전보다 얼마간 다시 젊어진 듯이 보였다. 입술에도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아오마메와의 대화가 그녀를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량의 셰리주가 효과를 발휘했는지도.
“하지만 당신에게는 좋아하는 이가 한 사람 있지요?”
“네. 그러나 제가 그 사람과 현실에서 맺어질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제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잃어버릴 것 역시 한없이 제로에 가까울 뿐이죠.”
노부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 사람과 맺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나요?”
“딱히 없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제가 저라는 것 외에는.”
“당신 쪽에서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행동에 나서볼 생각은?”
아오마메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가 그를 진심으로 깊이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노부인은 감탄하는 눈빛으로 잠시 아오마메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신은 대단히 단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군요.”
“그럴 필요가 있었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그리고 셰리주 잔을 그저 흉내 삼아 입에 옮겼다. “좋아서 그렇게 된 건 아니구요.”
침묵이 잠시 방을 가득 채웠다. 백합꽃은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금붕어는 굴절한 여름빛 속을 계속 헤엄쳤다.
“리더와 당신이 둘만 있는 상황을 만드는 건 가능해요.” 노부인은 말했다. “간단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 시간도 상당히 걸리겠지요. 하지만 최종적으로 나는 그걸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다른 때와 똑같은 일을 해주면 되는 것이지요. 다만 이번에는 일이 끝난 뒤 당신은 자취를 감춰야만 합니다. 얼굴 성형수술도 해야 해요. 지금 나가는 직장도 그만두고 먼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이름도 바꾸고요. 지금까지 당신이 당신으로서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다 버려야 합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당신은 상당한 보수를 받게 됩니다. 그밖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지요.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잃을 게 없어요. 직장도 이름도 도쿄에서의 현재 삶도 제게는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이의 없습니다.”
“얼굴이 바뀌는 것도?”
“지금보다 예뻐지겠죠?”
“당신이 그리 원한다면 물론 그건 가능합니다.” 노부인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겠으나, 당신의 희망에 따라 얼굴을 만드는 건 가능해요.”
“하는 김에 가슴 확대 수술도 받는 게 좋겠네요.”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물론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만.”
“농담이에요.” 아오마메는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별로 자랑할 건 못 되지만 제 가슴은 이대로도 괜찮아요. 가벼워서 달고 다니기 편하고 게다가 속옷도 사이즈를 모두 바꿔야 하니, 그것도 꽤 귀찮을 거 같아요.”
“그 정도야 내가 얼마든지 사주지요.”
“농담이에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노부인도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당신 농담에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성형수술을 받는 데 별 저항감은 없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아직까지 성형수술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지금 꼭 그걸 거부할 이유는 없겠죠. 원래부터 그리 마음에 드는 얼굴도 아니었고, 딱히 마음에 들어해준 사람도 없었어요.”
“친구들도 잃게 됩니다.”
“제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그리고 문득 아유미를 떠올렸다. 아무 말 없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춰버리면 아유미는 섭섭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배반을 당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유미를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경찰을 친구로 사귀기에는 아오마메는 너무도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
“내게는 자식이 둘 있었어요.” 노부인은 말했다. “아들 하나와 세 살 아래의 딸. 그 딸아이는 죽었어요. 전에 말한 것처럼 자살했지요. 그 아이에게 자식은 없습니다. 아들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나와는 오래도록 사이가 그리 좋지를 않아요. 요즘은 거의 말을 나누는 일도 없습니다. 손자가 셋이 있지만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어요. 하지만 만일 내가 죽는다면, 내가 보유한 재산의 대부분은 아들과 손자들에게로 가겠지요. 거의 자동적으로.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유언장이라는 게 그리 큰 효력을 갖지 못해요. 그래도 현재로서는 내가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돈이 상당히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쳐준다면, 당신을 위해 그 대부분을 양도할 마음입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었으면 싶어요, 당신을 돈으로 매수하려는 마음은 없어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내가 당신을, 말하자면 내 친딸처럼 느낀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내 진짜 딸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아오마메는 조용히 노부인의 얼굴을 보았다. 노부인은 문득 생각난 듯이 손에 든 셰리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뒤로 돌려 백합의 아름다운 꽃잎에 눈길을 주었다. 그 풍성한 냄새를 맡고는 다시 아오마메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도 말한 대로 나는 쓰바사를 거두어 양녀로 삼을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결국 그 아이를 잃고 말았어요. 그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한밤중 어둠 속에 그 아이 혼자 사라져가는 걸 그저 손을 놓고 바라만 본 셈이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을 전에 없이 위험한 곳으로 보내려고 하는군요. 사실은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로서는 목적을 이룰 방법은 그것 말고는 찾을 수가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수고에 대한 현실적인 보답을 하는 정도뿐이군요.”
아오마메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노부인이 침묵하자 유리문 너머에서 새 울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새는 한바탕 울더니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처리해야 합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지금은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에요. 저를 그처럼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 데는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사연이 있어서 부모를 버린 사람이에요. 사연이 있어서,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람이죠. 부모의 정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어요. 저 혼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단호한 마음가짐에 저 자신을 적응시켜야 했어요. 쉬운 일은 아니었죠. 이따금 저 자신이 무슨 찌꺼기 같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아무 의미 없는 더러운 쓰레기.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게 너무나 감사해요. 하지만 제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어요. 하지만 쓰바사는 다르죠. 그 아이에게는 아직 구원의 여지가 있을 거예요. 쉽게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희망을 잃지 말고 그 아이를 다시 찾아주세요.”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군요. 물론 쓰바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온 힘을 다해 그 아이를 되찾을 작정이에요. 하지만 보시는 대로 지금 나는 너무 지쳤어요. 그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어요. 잠시 시간이 필요해요.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제 내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도 모르죠.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활력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오마메는 소파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로 다가갔다. 의자 팔걸이에 앉아 손을 내밀어 노부인의 그 가늘고 기다란, 우아한 손을 꼭 쥐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부인께서는 놀라울 만큼 강한 여성이세요. 다른 어느 누구보다 강하게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좀 실망하셔서 피곤하고 지쳤을 뿐이에요. 자리에 누워 잠시 쉬시는 게 좋아요. 잠에서 깨어나면 원래대로 생기를 되찾으실 거예요.”
“고마워요.” 노부인은 말하며 아오마메의 손을 맞잡았다. “아닌 게 아니라 좀 자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오마메는 말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신변도 정리해두죠. 짐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지만.”
“가볍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해둬요. 부족한 게 있다면 내 쪽에서 곧바로 준비해줄 수 있으니까.”
아오마메는 노부인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편히 주무세요. 모든 일이 틀림없이 다 잘될 거예요.”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자 안에서 눈을 감았다. 아오마메는 다시 한번 테이블 위의 금붕어 어항을 바라보고 백합 향기를 들이마시고, 천장이 높은 거실을 뒤로했다.
현관에서는 다마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시가 되었지만 태양은 아직 하늘 높이 떠서 전혀 기세를 잃지 않았다. 그의 검은 코도반 구두는 늘 그랬듯이 깨끗이 닦여 눈부신 빛을 반사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하얀 여름 구름은 태양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한쪽 구석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장마가 걷히기에는 아직 이른데도 요 며칠 동안 한여름을 연상시키는 날들이 이어졌다. 매미 소리가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아직은 조심스레 눈치를 보는 정도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여름의 전조였다. 세계는 평소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매미가 울고, 여름 구름이 흘러가고, 다마루의 가죽구두에는 얼룩 한점 없다. 하지만 아오마메에게는 그것이 왠지 신선한 일처럼 여겨졌다. 세계가 이렇듯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다마루 씨.” 아오마메는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시간 있어요?”
“좋지.” 다마루는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시간은 있어. 시간을 때우는 게 내 업무 중 하나니까.” 그는 현관 바로 앞에 있는 가든체어에 앉았다. 아오마메도 그 곁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 튀어나온 처마가 햇빛을 가려 두 사람은 시원한 그늘 속에 있었다. 새로 돋은 풀냄새가 났다.
“이제 여름이군.” 다마루는 말했다.
“매미도 울기 시작했고.” 아오마메는 말했다.
“올해는 매미 우는 게 평소보다 좀 빠른 거 같아. 이 동네는 앞으로 한참 동안 또 시끄러울 거야. 귀가 아플 만큼.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서 며칠 머물렀을 때 마침 꼭 이런 소리가 났어.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소리가 이어졌지. 백만 마리의 크고 작은 매미가 일제히 울어대는 듯한 소리가.”
“나이아가라에 갔었어요?”
다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동네였어. 나 혼자 거기서 사흘을 묵으면서 폭포 소리 듣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어.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책도 못 읽었어.”
“나이아가라에서 혼자 사흘씩이나 뭘 했는데요?”
다마루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게 고개만 저었을 뿐.
다마루와 아오마메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어리어리한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다마루는 얼마간 흥미가 생긴 듯했다. 아오마메는 부탁을 그리 자주 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녀는 말했다.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부탁이에요. 혹시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뭐, 일단 들어주는 거야 할 수 있지. 게다가 내 나름의 예의라는 게 있어서 숙녀분의 부탁을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하지는 않아.”
“권총이 한 자루 필요해요.” 아오마메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핸드백에 들어갈 만한 사이즈. 반동이 작고,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파괴력이 있고 성능은 믿을 만한 거. 모델건 개조품이라든가 필리핀제 복제품 같은 건 곤란해요. 쓴다고 해봤자 딱 한 번밖에 안 쓸 거예요. 탄환도 한 발만 있으면 될 거고.”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에 다마루는 아오마메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시선은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마루는 확인하듯이 천천히 말했다. “이 나라에서는 일반 시민이 권총을 소지하는 건 법률로 금지되어 있어. 그건 알고 있지?”
“물론.”
“잘 모르는 거 같아서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는 지금까지 형사 사건으로 문초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다마루는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전과가 없다는 거야. 경찰 쪽에서 놓치고 넘어간 게 몇 개 있긴 했을 거야. 그것까지는 굳이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기록상으로 말하자면 나는 완전하게 건전한 시민이야. 청렴결백, 오점 하나 없지. 게이이기는 하지만 그건 법률에 위반되는 건 아니야. 세금은 내라는 대로 꼬박꼬박 냈고, 선거 때는 투표도 해. 내가 투표한 후보자가 당선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주차위반 벌금 역시 전부 기한 내에 냈어. 속도위반으로 걸린 일도 최근 십 년 동안 한 번도 없고. 국민건강보험도 들었어. NHK 수신료도 은행 자동이체로 내고 있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마스터 카드도 갖고 있어. 현재로서는 그럴 생각이 없지만, 만일 내가 원한다면 삼십 년 상환으로 주택자금 대출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걸 나는 항상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는 지금 이 사회의 초석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사람에게 권총의 수배를 부탁하고 있는 거야. 그건 알고 있어?”
“그래서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했잖아요.”
“그건 나도 들었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당신 말고는 그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다마루는 목구멍 속에서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억눌린 한숨처럼 들린다고 할 수도 있는 소리였다. “혹시 내가 그런 물건을 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상식적인 기준에 따라 나는 아마 이렇게 질문하겠지. 대체 그걸로 누구를 쏠 작정이냐고.”
아오마메는 둘째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아마도 여기를.”
다마루는 그 손가락을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 이유는, 이라고 나는 다시 질문하겠지.”
“잡히는 건 싫으니까. 죽는 건 무섭지 않아요. 형무소에 가는 것도 끔찍하게 불쾌하기는 하지만, 허용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산 채로 잡혀서 고문을 당하거나 하는 건 곤란해요. 나는 누구의 이름도 불고 싶지 않으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죠?”
“알 거 같아.”
“누군가를 쏠 마음도 없고 은행을 털 마음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십 연발 세미오토매틱처럼 거창한 건 필요 없어요. 콤팩트하고 반동이 작은 것이 좋죠.”
“약이라는 선택도 있어. 권총을 입수하는 것보다 그게 더 현실적이야.”
“약은 꺼내서 먹을 때까지 시간이 걸려요. 캡슐을 씹어 삼키기 전에 누가 입 안에 손을 처넣기라도 하면 꼼짝달싹 못 해요. 하지만 권총이 있으면 상대를 견제하면서 일을 처리할 수 있죠.”
다마루는 거기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가 약간 들린 채로.
“나로서는 가능하면 너를 잃고 싶지 않아.” 그는 말했다.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들어. 그건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아오마메는 아주 잠깐 미소를 지었다. “여자치고는, 이라는 얘기?”
다마루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남자든 여자든 혹은 개든, 나는 그다지 많은 상대를 마음에 들어하는 건 아니야.”
“물론.” 아오마메는 말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담의 안녕과 건강을 지키는 게 내 코앞에 닥친 중요 임무야. 그리고 나는 뭐랄까, 어떤 종류의 프로야.”
“두말할 것 없이.”
“그런 관점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좀 알아봐야겠지. 보장은 못 해. 하지만 어쩌면 네 부탁에 응할 수 있는 친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긴 해. 다만 이건 지극히 미묘한 일이야. 통신판매로 전기담요를 사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지.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일주일쯤은 걸려.”
“그건 괜찮아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다마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매미가 우는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가지 일이 부디 잘 풀리기를 기도하고 있어. 그게 타당한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 할 일은 꼭 할게.”
“고마워요. 이번 일이 아마 내 마지막 임무가 될 거예요. 어쩌면 더이상 다마루 씨를 못 만날지도 모르겠어요.”
다마루는 두 팔을 펼쳐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마치 사막의 한복판에 서서 비가 내리기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고 두툼한 손바닥이었다.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은 몸의 일부라기보다 거대한 중장비의 부품처럼 보였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마루는 말했다. “나는 부모에게도 안녕이라는 말을 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어.”
“돌아가셨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나는 사할린에서 종전 전해에 태어났어. 사할린 남부는 일본 영토가 되어서 당시 가라후토라고 불렸지만, 1945년 여름에 소비에트 군이 점령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포로로 잡혔어. 아버지가 항만시설에서 일했던 모양이야. 일본 민간인 포로 대부분은 그 얼마 뒤에 일본으로 송환되었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노동자로 그쪽에 송출된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았어. 일본 정부가 그 거래를 거부했거든. 종전과 함께 한반도 출신자는 더이상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참 너무한 얘기지. 배려라는 게 전혀 없잖아. 희망하면 한반도 북쪽으로는 갈 수 있었지만 남쪽으로는 보내주질 않았어. 소비에트는 당시 한반도 남쪽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부산 근교의 어촌 출신이라서 북으로 갈 마음은 없었어. 북쪽에는 친척도 친구도 한 사람 없는데 거길 어떻게 가겠어. 아직 젖먹이였던 나는 일본인 귀환자의 손에 맡겨져서 홋카이도로 건너왔어. 당시 사할린의 식량 사정은 최악에 가까웠고 소비에트 군의 포로에 대한 대우도 지독했지. 부모에게는 나 말고도 몇 명이나 되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으니까 나를 거기서 키우기는 어려웠을 거야. 나만 먼저 홋카이도에 보내놓으면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마침 잘됐다 하고 짐을 덜어낸 것인지도 모르고. 자세한 사정은 몰라. 어쨌거나 부모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어. 아마 지금도 사할린에 남아 있을 거야. 아직 죽지 않았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부모님에 대해 기억나는 건 있어요?”
“하나도,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어. 헤어질 때 겨우 한 살 조금 지났을 때였거든. 나는 나를 데려온 일본인 부부의 집에서 잠깐 살다가 하코다테 근처 산 속의 고아원에 맡겨졌어. 그 부부도 나를 계속 돌봐줄 만한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지. 가톨릭 단체가 운영하는 시설이었는데, 정말 거친 곳이었어. 종전 직후에는 유난히 고아들이 많아서 식량도 난방도 부족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별별 짓을 다해야 했어.” 다마루는 자신의 오른손 손등에 흘끔 눈길을 던졌다. “거기서 서류 형식만의 양자결연을 맺어서 일본 국적을 얻고 일본인의 이름을 얻었지. 다마루 겐이치. 본명은 ‘박’이라는 것밖에 몰라. 그리고 박씨 성을 가진 조선인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
아오마메와 다마루는 그곳에 나란히 앉아 제각기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시 다른 개를 기르는 게 좋겠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마담도 그런 얘기를 하시더군. 세이프하우스에는 새 번견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도무지 그럴 마음이 안 나.”
“그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찾아보는 게 좋아요. 나도 남에게 충고를 할 만한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지.” 다마루는 말했다. “훈련받은 번견은 역시 필요하겠지.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개장수에게 연락할게.”
아오마메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몰까지는 아직 한참 시간이 있다. 하지만 하늘에는 저녁노을의 기척이 희미하게 엿보였다. 파란 가운데 또다른 색감의 파랑이 섞이기 시작했다. 셰리주의 취기가 약간 몸에 남아 있었다. 노부인은 아직 잠을 자고 있을까.
“체호프가 말했어.” 다마루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 고.”
“무슨 뜻이죠?”
다마루는 아오마메를 정면으로 마주하듯이 서서 말했다. 그가 아주 조금 몇 센티미터쯤 키가 컸다. “이야기 속에 필연성이 없는 소도구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거지. 만일 거기에 권총이 등장했다면 그건 이야기의 어딘가에서 발사될 필요가 있어. 체호프는 쓸데없는 장식을 최대한 걷어낸 소설 쓰기를 좋아했어.”
아오마메는 원피스 소매를 바로잡고 숄더백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당신은 그걸 걱정하는 거군요. 만일 권총이 등장한다면 그건 반드시 어딘가에서 발포되는 결과를 낳고 말 거라고.”
“체호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래.”
“그래서 가능하다면 내게 권총을 건네주고 싶지 않은 거고.”
“위험하기도 하고 불법이기도 해. 게다가 체호프는 믿을 수 있는 작가야.”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아니에요. 현실세계의 일이지.”
다마루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하고 아오마메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걸 누가 알지?”
제 2 장 덴고
영혼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얹고 자동재생 버튼을 눌렀다.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하는 시카고 교향악단. 턴테이블이 1분당 33회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턴암이 안쪽을 향해 움직이고, 바늘이 레코드의 홈을 읽어낸다. 그리고 브라스 인트로에 이어 화려한 팀파니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덴고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그는 그 음악을 들으며 워드프로세서 화면을 마주하고 자판을 두드려 문장을 입력해나갔다. 이른 아침에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는 것은 나날의 습관이었다. 고등학생 때 벼락치기 타악기 주자로 그 곡을 연주한 이래, 그것은 덴고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음악이 되었다. 그 음악은 언제나 그를 개인적으로 격려하고 지켜주었다. 적어도 덴고는 그렇게 느꼈다.
연상의 걸프렌드와 함께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기도 했다. “제법 나쁘지 않네”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클래식 음악보다는 오래된 재즈 레코드를 좋아했다. 그것도 오래된 것일수록 더 좋은 모양이었다. 그 나잇대의 여자로서는 약간 특이한 취미다. 특히 좋아하는 건 젊은 시절의 루이 암스트롱이 W.C. 핸디의 블루스를 모아 노래한 레코드였다. 바니 비가드가 클라리넷을 불고, 트러미 영이 트롬본을 분다. 걸프렌드는 그 레코드를 덴고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덴고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듣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섹스가 끝난 뒤 침대에서 곧잘 그 레코드를 들었다. 몇 번을 들어도 그녀는 그 음악에 싫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과 노래도 물론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지만 내 의견을 한마디 곁들이자면, 여기서 자기가 꼭 주의해서 들어야 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바니 비가드의 클라리넷이야.” 그녀는 말했다. 그렇긴 해도 그 레코드에서 바니 비가드의 솔로 부분은 아주 적었다. 그리고 어떤 솔로도 원 코러스만의 짧은 것이었다. 그건 누가 뭐래도 루이 암스트롱이 주인공인 레코드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비가드의 그 짧디짧은 솔로 하나하나를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항상 그 부분을 조그맣게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바니 비가드보다 뛰어난 재즈 클라리넷 주자는 그 외에도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처럼 따스하고 섬세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재즈 클라리넷 주자는 어디에도 없다, 고 그녀는 말했다. 그의 연주는—물론 훌륭할 때는, 이라는 얘기인데—항상 마음속의 어떤 풍경을 그려내.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덴고는 그밖에 어떤 재즈 클라리넷 주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그 레코드에 담긴 클라리넷 연주가 아름다운 분위기를 가졌고, 강요하는 느낌 없이 자양분과 상상력이 풍부한 연주라는 건 수없이 듣는 사이에 덴고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몹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했다. 유능한 가이드도 필요했다. 그저 막연히 듣기만 해서는 놓쳐버린다.
“바니 비가드는 천재적인 2루수처럼 아름다운 플레이를 해.” 그녀는 언젠가 말했다. “솔로도 멋지지만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나타나는 건 역시 남의 뒤에 숨어서 연주할 때야. 엄청나게 어려운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워버려. 그 가치는 주의 깊은 귀가 아니면 결코 알지 못해.”
LP의 B면 여섯번째 곡 〈애틀랜타 블루스〉가 시작될 때마다 그녀는 항상 덴고의 몸 어딘가를 꼭 잡고, 비가드가 연주하는 그 간결하고도 절묘한 솔로를 절찬했다. 그의 솔로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와 트럼펫 솔로 연주 사이에 끼어 있었다. “저거, 저거, 잘 들어봐. 우선 처음에 작은 아이가 내는 듯한, 와악 하는 긴 부르짖음. 놀란 건지 기쁨이 뻗친 건지 행복하다는 호소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게 유쾌한 날숨이 되어서 아름다운 물길을 구불구불 나아가 어딘가 단정한, 사람들 모르는 곳으로 매끈하게 빨려드는 거야. 들어봐. 이렇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솔로는 그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못 불어. 지미 눈도 시드니 베셰도 피 위도 베니 굿맨도, 모두 다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이긴 한데 이런 정교한 미술 공예품 같은 건 아무튼 못 해.”
“오래된 재즈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덴고는 언젠가 물었다.
“내게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과거가 아주 많아. 아무도 바꿔 쓸 수 없는 과거가.” 그러고는 덴고의 고환을 손바닥으로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오전 작업을 마친 뒤, 덴고는 역까지 산책을 나가 매점에서 신문을 샀다. 그리고 찻집에 들어가 버터토스트와 달걀 완숙 모닝 세트를 주문하고, 그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았다. 고마쓰가 예언한 대로 사회면에 후카에리의 기사가 있었다. 그리 큰 기사는 아니다. 신문 지면 맨 아래쪽 미쓰비시 자동차 광고 위에 실려 있었다. ‘화제의 고교생 작가, 실종인가’라는 제목이었다.
베스트셀러 소설 「공기 번데기」의 저자 후카에리 씨(본명 후카다 에리코, 17세)가 행방불명이라는 것이 ○○일 오후에 밝혀졌다. 오우메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낸 보호자이자 문화인류학자 에비스노 다카유키 씨(63세)에 의하면, 6월 27일 밤부터 후카에리 씨는 오우메 시의 자택에도, 도쿄 도내의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두절된 상태다. 에비스노 씨는 전화취재에 응하여,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에리코 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이었으며 자취를 감출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 연락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모종의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기 번데기」를 출판한 ○○사의 담당편집자 고마쓰 유지 씨는 “책은 6주일에 걸쳐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라 주목을 받고 있지만 후카에리 씨는 매스컴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번 실종 소동에 본인의 그러한 의향이 관련된 것인지, 출판사 측으로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후카에리 씨는 아직 어린 나이에 풍부한 재능을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다. 한시라도 빨리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하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현 단계에서 신문이 발표할 수 있는 건 이런 정도일 거라고 덴고는 생각했다. 요란하게 센세이셔널한 문제로 다루었다가 그 이틀쯤 뒤에 후카에리가 아무 일 없이 훌쩍 귀가한다면, 기사를 쓴 기자는 망신살이 뻗칠 것이고 신문사의 입장 역시 난처해진다. 경찰의 입장도 거의 비슷하다. 모두 다 우선은 관측기구를 띄우듯이 간결하고도 중립적인 의견을 내놓고 잠시 경과를 지켜본다. 세상의 동향을 살핀다. 문제가 커지는 건 주간지에서 나서고 텔레비전 뉴스쇼가 떠들어대기 시작할 때부터다. 아직 그때까지는 며칠의 유예가 있었다.
하지만 늦건 빠르건 사태가 후끈 달아오를 것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공기 번데기」는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저자 후카에리는 한창 이목을 끄는 열일곱 살의 아름다운 소녀다. 그런데 이 소녀 작가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떠들썩한 사건이 되지 않을 리 없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납치된 게 아니라 모처에 혼자 은신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네 명밖에 없을 것이다. 본인은 물론 알고 있다. 덴고도 알고 있다. 에비스노 선생도. 그의 딸 아자미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어느 누구도 이 실종 소동이 세상의 이목을 끌기 위한 연극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그것을 아는 사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우려해야 할지, 덴고는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기뻐해야 하리라. 후카에리를 걱정하며 혼자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되니까. 후카에리는 안전한 곳에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 복잡하게 뒤엉킨 음모에 깊이 가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에비스노 선생은 지렛대를 사용하여 거대하고 불길한 바위를 들어올리고 거기에 햇빛을 들이대 바위 밑에서 무엇이 기어나오는지 지켜볼 태세다. 덴고는 본의 아니게 그 옆자리에 세워졌다. 무엇이 기어나오건 덴고는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 건 가능하다면 보고 싶지 않다. 어차피 엄청나게 귀찮은 것이 나올 게 뻔하다. 하지만 안 볼 도리가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덴고는 커피를 마시고 토스트와 달걀을 다 먹고, 읽고 난 신문을 내려놓고 찻집을 나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이를 닦고 샤워를 하고 학원에 나갈 준비를 했다.
학원 점심시간에 낯선 인물이 덴고를 찾아왔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직원용 라운지에서 잠깐 쉬면서, 아직 읽지 못한 몇 군데 신문사의 조간을 펼치던 참이었다. 이사장의 비서가 다가와 덴고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덴고보다 한 살 많은 유능한 여자였다. 공식 직함은 비서지만 학원 경영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실무를 그녀가 처리했다. 미인이라기에는 얼굴 생김새가 약간 난잡한 편이지만 스타일이 멋지고 옷 입는 감각도 훌륭했다.
“우시카와 씨라는 남자분인데.” 그녀는 말했다.
그런 이름은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얼굴을 슬쩍 찡그렸다. “중요한 일이라서 되도록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대.”
“중요한 이야기?” 덴고는 놀라서 물었다. 이 입시학원까지 그를 찾아올 정도로 중요한 일 같은 건 없다.
“응접실이 비어서 우선 거기로 안내했어. 원래는 덴고 선생 같은 말단이 사용하면 안 되는 곳인데, 내가 그냥.”
“고마워.” 덴고는 인사를 건넸다. 비장의 미소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미소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아네스 베의 새 여름 재킷 자락을 펄럭이며 날쌘 걸음으로 가버렸다.
우시카와는 키가 작고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허리통은 이미 굴곡을 모두 잃어 두둑하고 목 주위에도 군살이 붙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나이에 대해서는 덴고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그 생김새의 특이함(혹은 비일상성) 때문에 나이를 추측할 만한 요소를 포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좀더 나이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훨씬 젊은 것도 같다. 서른두 살에서 쉰여섯 살까지. 그중 어떤 나이라고 해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치열이 좋지 않고 등뼈가 묘한 각도로 굽었다. 널찍한 머리꼭지 부분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납작하게 벗어졌고 그 주변이 우그러져 있었다. 그 납작한 부분은 협소한 전략적 구릉지 꼭대기에 만들어진 군용헬기장을 생각나게 했다. 베트남 전쟁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런 걸 본 적이 있다. 납작하고 일그러진 머리 주위에 매달리듯이 남아 있는 굵고 까만 곱슬머리는 필요 이상으로 길게 자라 두서없이 귀를 덮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은 아마도 백 명 중 아흔여덟 명에게 음모陰毛를 연상시킬 것이다. 나머지 두 사람이 대체 무엇을 연상할지, 그건 덴고가 알 바 아니다.
이 인물은 체형이며 얼굴 생김새며 모든 것이 좌우 비대칭으로 빚어진 것 같았다. 처음 딱 보자마자 덴고의 눈에 들어온 것이 그것이었다. 물론 인간의 몸은 정도가 크든 작든 원래 좌우 비대칭이게 마련이므로 그것 자체는 딱히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덴고 역시 오른쪽과 왼쪽의 눈꺼풀 모양이 약간 다르다. 왼쪽 고환은 오른쪽 고환보다 조금 처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몸은 공장에서 규격대로 만들어낸 대량생산품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의 경우, 그 좌우의 차이가 상식의 범주를 뛰어넘고 있었다. 누구라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그 균형의 왜곡은 얼굴을 마주한 상대의 신경을 좋든 싫든 자극하여 어쩐지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굴곡이 심한(그런 주제에 기분 나쁠 만큼 선명한) 거울을 앞에 두고 있을 때처럼.
그가 입은 회색 정장에는 자디잔 주름이 무수히 잡혀 있었다. 그것은 빙하에 침식된 대지의 광경을 떠올리게 했다. 흰 와이셔츠의 한쪽 칼라는 바깥으로 삐져나왔고 넥타이 매듭 부분은 마치 그곳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불쾌해서 몸을 배배 꼬고 있는 것처럼 비틀어졌다. 정장도 넥타이도 와이셔츠도 조금씩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넥타이 무늬는 솜씨가 형편없는 미대생이 머릿속에 퉁퉁 불어터진 국수 면발이 뒤엉킨 장면을 떠올리며 추상적으로 묘사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한결같이 싸구려 가게에서 대충 구색 맞춰 사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래 보고 있으니 그래도 그 몸에 붙어 있어야 하는 옷이 점점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덴고는 자신이 입는 옷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지만 남의 옷차림에는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성격이다. 그가 최근 십 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워스트드레서를 선정하라고 한다면 이 인물은 그 리스트의 최상위권에 들어갈 것이다. 그저 단순히 옷차림만 지독한 게 아니다. 그곳에는 복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도적으로 모욕하려는 듯한 인상마저 엿보였다.
덴고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상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첩에서 명함을 꺼내 고개를 한 차례 숙인 뒤 덴고에게 내밀었다. 건네준 명함에는 ‘우시카와 도시하루’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아래 알파벳으로 Ushikawa Toshiharu라고 쓰여 있다. 직함은 ‘재단법인 신일본학술예술진흥회 상임이사’라고 되어 있었다. 협회의 주소는 지요다 구 고지마치, 거기에 전화번호가 붙어 있었다. ‘신일본학술예술진흥회’라는 곳이 어떤 단체이고, 상임이사라는 건 어떤 포지션인지, 그런 건 덴고는 물론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명함은 돋을새김 마크가 들어간 번듯한 것이어서 임시로 급조한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덴고는 잠시 그 명함을 들여다보고 다시 한번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신일본학술예술진흥회 상임이사’라는 직함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인상을 가진 인물은 아마 없을 거라고 덴고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각각 일인용 소파에 앉아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남자는 손수건으로 몇 차례 이마의 땀을 쓱쓱 닦고 나서 그 불쌍한 손수건을 상의 호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접수처 여직원이 두 사람에게 차를 내주었다. 덴고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우시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연락도 없이 실례를 해서, 이거 참 죄송합니다.” 우시카와는 덴고에게 사과했다. 말씨는 일단 정중했지만 그 어조에는 묘하게 친한 척 엉겨드는 듯한 여운이 있었다. 덴고는 그 느낌이 뭔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식사는 하셨습니까? 괜찮으시면 밖에 나가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하는 게……”
“일하는 중에는 점심을 먹지 않습니다.” 덴고는 말했다. “오후수업 끝난 뒤에 가볍게 좀 먹죠. 그러니 식사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드리지요. 여기라면 마음 편히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는 응접실 안을 평가하듯이 한 바퀴 휘이 둘러보았다. 큰 응접실은 아니다. 산을 그린 큼직한 유화 하나가 벽에 걸려 있다. 사용된 그림물감의 무게가 상당했겠다는 것 이상의 감흥은 품을 수 없다. 꽃병에는 달리아 비슷한 꽃이 꽂혀 있었다. 재치라고는 없는 중년여자를 연상시키는 그야말로 둔중한 꽃이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입시학원에 이런 음울한 응접실이 필요한 것인지 덴고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인사가 늦었군요. 명함에도 있지만 저는 우시카와牛河라고 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우시牛라고 하지요. 아무도 우시카와라고 제대로 불러주지 않아요. 그냥 우시라고 합니다.” 우시카와는 그렇게 말하고 웃음을 지었다.
친구들? 어떤 사람이 자진해서 이런 사람의 친구가 되는 걸까, 덴고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단지 순수한 호기심에서 생겨난 의문이었다.
첫인상을 솔직히 말하자면 우시카와라는 사람은 땅 밑 어두운 구멍에서 기어나온 으스스한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미끌미끌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사실은 빛 속에 나와서는 안 되는 무언가. 어쩌면 이 사람은 에비스노 선생이 바위 밑에서 끌어낸 것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덴고는 무의식중에 미간을 좁히며 아직 손 안에 있던 명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우시카와 도시하루, 그것이 이 남자의 이름이다.
“가와나 씨도 바쁘시겠죠. 그러니 쓸데없는 서론은 접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요점만 말씀드리지요.” 우시카와는 말했다.
덴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시카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운을 뗐다. “가와나 씨는 아마 ‘신일본학술예술진흥회’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적 최근에 설립된 재단법인이고요, 학술이나 예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활약을 하고 계시는 젊은 세대 여러분, 특히 아직 일반사회에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선발하여 후원을 해드린다, 하는 것이 활동의 중심입니다. 요컨대 일본의 현대문화 각 분야에서 다음 시대를 짊어지고 갈 젊은 새싹을 육성하자, 라는 취지예요. 각 부문별로 전문 리서처와 계약을 맺어 후보자 인선작업을 합니다. 해마다 다섯 분의 예술가와 연구자를 선발하여 후원금을 지급합니다. 일 년 동안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하도록 하자는 것이죠. 조건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연말에 형식상의 리포트를 제출해주시면 됩니다. 일 년 동안 어떠한 활동을 했고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는가, 그걸 간단히 써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리포트가 당 재단이 발행하는 잡지에 게재됩니다. 귀찮을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직 이러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어떻든 우선은 형식에 맞춰 실적을 쌓는 게 중요한 작업이 되는 것이지요. 요컨대 아직 씨앗을 뿌리는 단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일인당 삼백만 엔의 연간 후원금이 나갑니다.”
“상당한 액수군요.” 덴고는 말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창조하자면, 혹은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하자면 시간도 걸리는 것이고 돈도 들게 마련이지요. 물론 시간과 돈을 들인다고 반드시 훌륭한 게 나온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돈이든 시간이든 둘 다 많아서 방해가 되는 일은 없어요. 특히 시간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시계는 지금도 재깍재깍 시간을 새기고 있어요.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갑니다. 기회는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그걸로 시간을 살 수 있어요. 사려고 마음먹으면 자유까지도 살 수 있습니다. 시간과 자유, 그건 인간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지요.”
덴고는 그 말을 듣고 거의 반사적으로 손목시계에 눈을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은 재깍재깍 쉴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 제가 귀한 시간을 빼앗고 있군요.” 우시카와는 당황하며 말했다. 덴고가 시계를 바라본 동작을 일종의 시위로 여긴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서두르지요. 물론 요즘 세상에 기껏 연간 삼백만 엔 정도로는 풍족한 생활은 못 합니다. 하지만 젊은 분들이 생활해나가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요. 생활을 위해 아등바등 일할 것 없이 연구나 창작에 일 년 동안 완전히 집중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희의 원래 의도인 것입니다. 연말 심사 때 일 년 동안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냈다고 이사회에서 인정을 하게 되면 일 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다음 해까지 후원금이 계속 지급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덴고는 아무 말 없이 그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저는 며칠 전 이 학원에서 가와나 선생의 수업을 넉넉히 한 시간 동안 경청했습니다.” 우시카와는 말했다. “아, 참으로 흥미 깊은 수업이었어요. 나는 수학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라고 할까, 옛날부터 수학이라면 질색이어서 학교 다닐 때도 수학 수업만은 정말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수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가와나 씨의 수업은, 정말 대단히 즐거웠습니다. 물론 미적분 논리 같은 건 요만큼도 모르지만, 그래도 선생의 말씀을 듣고는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수학을 좀 공부해볼까 하는 마음까지 들더군요. 정말로 대단해요. 가와나 씨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재능이 있어요.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능이라고 할까. 입시학원 선생님으로서 널리 인기를 얻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그러실 만합니다.”
우시카와가 언제 어디서 자신의 수업을 청강했는지 덴고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수업을 하는 동안, 교실에 누가 있는지를 항상 세심하게 관찰한다. 학생 전원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만일 그곳에 우시카와처럼 이상한 풍채의 인물이 있었다면 그걸 놓칠 리는 없다. 설탕 항아리 속의 지네처럼 눈에 띄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굳이 추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잖아도 장황한 이야기가 점점 더 길어져버릴 테니까.
“아시는 것처럼 저는 그저 입시학원 계약직 강사입니다.” 덴고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자기 쪽에서 입을 열었다. “딱히 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지식으로서 널리 알려진 것을 학생들에게 그저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거죠. 대학 입시 문제를 풀기 위해 보다 유용한 방법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런 일에는 어쩌면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문 연구자가 되는 건 오래전에 포기했어요.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학문의 세계에서 입신할 만한 소질과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시카와 씨께는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군요.”
우시카와는 급히 한 손을 쳐들더니 그 손바닥을 똑바로 덴고에게로 향했다. “아뇨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내가 아마 말을 좀 복잡하게 한 모양이군요. 그건 사과드리지요. 아닌 게 아니라 가와나 씨의 수학 강의는 재미있어요. 참으로 유니크하고 창의적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드리려고 오늘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닙니다. 저희가 주목한 것은 가와나 씨의 소설가로서의 활동 쪽입니다.”
덴고는 허를 찔려 몇 초 동안 할말을 잃었다.
“소설가로서의 활동?” 이윽고 덴고는 물었다.
“그래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저는 분명 최근 몇 년 동안 소설을 쓰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활자화되어 발표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아직은 소설가라고 할 수도 없죠. 그런데 어떻게 그쪽 분들의 주목을 받습니까?”
우시카와는 덴고의 반응을 보고 그야말로 반가운 말이라는 듯 빙긋이 웃었다. 그가 웃자 지독한 치열이 그대로 드러났다. 며칠 전 큰 해일에 씻긴 바닷가의 말뚝처럼 그 치아는 다양한 각도로 구부러지고, 다양한 방향을 지향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이제 와서 그것을 교정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그에게 올바른 양치질법을 가르쳐주는 게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런 면이 말이죠, 저희 재단의 유니크한 점이에요.” 우시카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희가 계약을 맺은 리서처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직 주목하지 않는 곳에 눈을 돌립니다. 그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 가와나 씨가 말씀하신 대로 분명 정식으로는 아직 한 번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잘 알아요. 하지만 가와나 씨는 지금까지 펜네임을 사용하여 문예지 신인상에 해마다 응모하셨지요. 유감스럽게도 아직 당선은 되지 못했지만, 몇 번이나 최종 후보작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그 작품을 읽었어요. 그중 몇몇 사람이 당신의 재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신인상을 수상하고 작가로서 데뷔하리라는 건 틀림없다는 게 저희 리서처의 평가입니다. 입도선매, 라고 하면 말이 좀 험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다음 시대를 짊어지고 갈 젊은 새싹을 육성한다’는 것이 우리의 원래 목적입니다.”
덴고는 찻잔을 들고 조금 식은 차를 마셨다. “제가 신인 소설가로서 그 후원금의 후보자가 되었다, 그런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후보자라고 해도 실제로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수락하겠다는 말만 해주시면 제 단독 판단으로 이번 일은 최종 결론이 나게 됩니다. 서류에 사인을 해주시면 삼백만 엔은 지금 당장이라도 은행으로 들어갈 겁니다. 가와나 씨는 이 학원을 반년이든 일 년이든 휴직하고 본격적으로 집필에 뛰어드시면 돼요. 현재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우시카와는 다시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눈동자 안쪽의 빛은 어디까지나 차가웠다.
“저희 리서처는 아주 열성적이고 유능합니다. 몇몇 후보자를 선정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조사를 해요. 가와나 씨가 지금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는 건 주위의 몇몇 분은 아마 알고 있겠지요? 매사에 말이라는 건 새어나가는 법이거든요.”
덴고가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고마쓰는 알고 있다. 연상의 걸프렌드도 알고 있다. 그밖에 또 누가 있었더라. 아마 그 외에는 없다.
“그 재단에 대해 잠깐 묻겠는데요.” 덴고는 말했다.
“네, 무엇이든 대답해드리지요.”
“운용되는 자금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어느 개인이 자금을 대고 있습니다. 그 개인이 소유한 단체, 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현실적인 레벨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끼리 얘기지만 이건 세금대책의 일환이기도 해요.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그분은 예술과 학술에 깊은 관심을 품고 있고, 젊은 세대를 지원하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자세한 말씀은 여기서는 드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본인은 물론, 그분이 소유한 단체까지 모두 익명으로 일이 진행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운영은 재단의 위원회에 일임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저도 바로 그 위원회의 일원입니다.”
덴고는 거기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시카와가 말한 것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그대로 한 줄로 늘어놓은 것뿐이다.
“담배를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우시카와가 물었다.
“예, 그러시죠.” 덴고는 말했다. 그리고 무거운 유리재떨이를 그쪽으로 밀어주었다.
우시카와는 상의 호주머니에서 세븐스타 담뱃갑을 꺼내 입에 물고 금장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가늘고 값비싸 보이는 라이터였다.
“어떻습니까, 가와나 씨.” 우시카와는 말했다. “저희 후원금 수령을 수락해주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 개인적으로도 그 유쾌한 수업을 청강하고 보니 가와나 씨가 앞으로 어떤 문학세계를 추구하실지, 참으로 기대가 큽니다.”
“이런 제안을 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덴고는 말했다. “저한테는 과분한 일이죠. 그렇기는 하지만 그 후원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시카와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덴고의 얼굴을 보았다. “그건 무슨 말씀인지?”
“우선 첫째로, 저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로, 현재로서는 별로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사흘 동안 학원에서 수업하고, 다른 날에는 집중적으로 소설을 쓰는 것으로 나름대로 잘 꾸려나가고 있어요. 그런 생활을 굳이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 두 가지입니다.”
셋째로, 나는 우시카와 씨 당신과는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없다. 넷째로, 이 후원금 이야기는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지나치게 달콤한 얘기잖아. 틀림없이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 같아.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감이 좋은 인간은 아니지만 그런 것쯤은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물론 덴고는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우시카와는 말했다. 그리고 연기를 폐에 담뿍 빨아들이고 그야말로 맛있다는 듯이 다시 토해냈다. “그래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 말도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가와나 씨, 뭐 꼭 여기서 당장 답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에 돌아가서 이삼 일 찬찬히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런 다음에 천천히 결론을 내리시면 돼요. 저희는 일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세요. 절대 안 좋은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덴고는 딱 잘라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결정하는 게 서로 간에 공연한 시간과 수고를 줄일 수 있습니다. 후원금 후보로 선정해주신 건 영광입니다. 이렇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주신 데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됐습니다. 이건 최종적인 결론이고 재고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시카와는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겨우 두 모금을 피운 담배를 아쉽다는 듯 재떨이에 비벼 껐다.
“괜찮아요. 말씀하시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 가와나 씨의 의견은 존중해드리고자 합니다. 저야말로 귀중한 시간을 빼앗았군요. 유감이긴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하지만 우시카와는 전혀 자리에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실눈을 뜨고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말이죠, 가와나 씨, 본인은 그걸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은 작가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재능이 있어요. 수학과 문학은 아마 직접적인 관계는 없겠지만, 당신의 수학 수업은 마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흥취가 있었습니다. 그건 보통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당신은 뭔가 특별한, 이야기해야 할 것들을 많이 갖고 있어요. 그건 나 같은 사람이 보더라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요. 그러니 되도록 자중자애하시는 게 좋아요.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괜히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게 좋습니다.”
“쓸데없는 일?” 덴고는 되물었다.
“이를테면 당신은 「공기 번데기」를 쓴 후카다 에리코 씨와 뭔가 관계를 맺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아니, 그보다 지금까지 적어도 몇 번은 만났죠. 그렇지요? 그리고 오늘 신문기사에 의하면, 아, 우연히 아까 참에 기사를 읽었는데, 그 소녀가 아무래도 행방불명이 된 것 같다더군요. 언론에서는 분명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겠지요. 화제성이 뛰어난 재미있는 사건이니까.”
“제가 혹시 후카다 에리코를 만났다고 해도 그게 그쪽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우시카와는 다시 한번 손바닥을 덴고에게로 향했다. 손은 자그마한데 손가락은 퉁퉁하니 굵었다. “아, 그렇게 감정적이 되지는 마시고. 나쁜 마음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보다 내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말이죠, 생활을 위해 재능이나 시간을 품팔이하듯이 낭비하는 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그런 얘기지요. 주제넘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와나 씨처럼 잘 갈고 닦으면 진주가 될 뛰어난 재능이 별것도 아닌 일에 휘둘리느라 손상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요. 후카다 씨와 가와나 씨의 일이 만일 세상에 알려졌다가는 반드시 누군가 집으로 찾아갈 겁니다. 그리고 귀찮게 따라붙겠지요. 있는 거 없는 거 다 캘 겁니다. 아무튼 질긴 자들이거든요.”
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우시카와의 얼굴을 보았다. 우시카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하고 큼직한 귓불을 북북 긁었다. 귀는 작은 편이지만 귓불만 이상하게 컸다. 이 인물의 몸 구조에는 아무리 쳐다봐도 질리지 않는 데가 있었다.
“아, 내 입으로야 아무한테도 말 안 하지요.” 우시카와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되풀이했다. “약속해요. 이래봬도 입은 꾹 다무는 편입니다. 제가 전생에 조개 아니었느냐는 말을 듣는 사람이에요. 이 일은 나 혼자서만 가슴속에 담아두지요. 가와나 씨에 대한 제 개인적인 호의의 표시로서.”
우시카와는 그렇게 말하고 드디어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옷에 생긴 자잘한 주름을 몇 차례 잡아당겨 폈다. 하지만 그래봤자 주름은 펴지지 않는다. 공연히 더 남의 눈에 띌 뿐이다.
“후원금에 대해 만일 마음이 바뀌시거든 언제라도 명함의 전화번호로 연락주세요. 아직 시간 여유는 많아요. 만일 올해 안 되더라도, 예, 또 내년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그는 양손의 둘째손가락으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빙그르르 도는 시늉을 했다. “저희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직접 뵙고 대화할 기회도 가졌고, 가와나 씨에 대한 저희 메시지도 전해드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는 다시 빙긋 웃으며 괴멸적인 치열을 과시하듯이 잠시 내보이더니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다음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덴고는 우시카와가 입에 올렸던 말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