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이자 뇌공학자.
KAIST에서 물리학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복잡계 모델링 방법을 적용한 알츠하이머 치매 대뇌 모델링 및 증세 예측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일대학교 의대 정신과 연구원,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연구교수, 컬럼비아대학교 의대 정신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및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연구 분야는 의사결정 신경과학이며, 이를 바탕으로 정신질환 대뇌 모델링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분야, 뇌기반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있다. 2009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서 ‘차세대 글로벌 리더’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매년 10월 마지막 토요일,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과학자의 강연 기부 행사 ‘10월의 하늘’을 진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 《열두 발자국》,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등이 있다. 함께 쓴 책으로는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쿨하게 사과하라》(김호 공저), 《눈먼 시계공》(김탁환 공저), 《1.4킬로그램의 우주, 뇌》(정용, 김대수 공저) 등이 있다.
개정증보 2판 서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가 출간된 지 정확히 19년이 지났다. 2020년 올해가 20년이다. 20년 전 스물아홉 살 젊은 물리학자가 호기롭게 쓴 이 책을 지금도 많이 사랑해주시는 독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고백건대, 나를 키운 건 8할이 ‘과학 콘서트’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이 책과 함께 물리학자 정재승도 조금씩 성숙했다. 이 책을 쓸 무렵,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를 컴퓨터상에서 가상으로 만들어 앞으로 어떻게 증세가 악화될지 시뮬레이션을 하던 어린 물리학자는 20년이 지난 지금, 머릿속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컨트롤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는 뇌공학자가 되었다. 인간 뇌를 탐구해 인간처럼 상황을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뇌를 닮은 인공지능Brain-inspired Artificial Intelligence’을 가르치고 탐구하는 공학자가 되었다.
또 대학생들이 쪼르르 달려와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를 읽고 과학자의 꿈을 키우게 됐어요”라고 말하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할 때 가장 기뻐하는 철없는 교수이면서, “소음 공명 현상은 모든 소음에 대해 적용 가능한가요?” 같은 질문을 받으면 바쁜 와중에도 제일 먼저 이메일 답장을 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이렇게 이 책은 이제 내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번 개정증보 2판은 10년 전 개정증보판이 나온 이후 바뀐 내용들을 점검하고, 수정할 내용들을 고쳤다. 학문적으로 새롭게 발전한 내용들은 ‘두 번째 커튼콜’을 통해 대거 보완했다. 20년에 부치는 개정증보 2판은 독자들에게 복잡계 과학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문적 나이테이자, 과학자 정재승이 독자들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문적 주름이다. 앞으로도 개정판들을 통해 독자와 함께 책도 성장하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나이테가 쌓이고 주름이 늘어가면서, 독자들과 성숙해지는 책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드리고 싶다.
개정증보판부터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를 새롭게 만들고 꾸준히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해주신 어크로스 출판사 김형보 대표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 글을 알아봐주는 편집자와 함께 책을 내는 저자만큼 행복한 저자가 어디 있으랴! 어크로스와의 작업은 내게 그런 의미다. 내 글을 가장 먼저 읽고 정성스레 다듬어주는 박민지 편집자에게 감사드린다. 박민지 편집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늘도 나는 내 글을 고친다. 이 책이 눈 밝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도록 애써주시는 이연실 팀장과 김사룡 마케터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이들과 함께 전국으로 떠나는 ‘독자들을 위한 강연회’가 세상에서 제일 즐겁다. 아울러, 과학 콘서트 강연회에 찾아와주시는 독자들은 ‘지성인의 필독서’인 이 책을 알아봐주신 우리 시대 진정 ‘눈 밝은 지성인’들이다.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6월, 코로나19가 지구를 강타해 전 세계인들을 넉 달 넘게 집에 가둬놓고 있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규모 팬데믹으로 인해 집에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학생들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한다. 사회 전체가 위축되다 보니, 기업은 신입사원을 뽑지 않아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은 지원할 회사가 없어 속절없이 절망적인 상태다. 학교에 입학했으나 친구들과 제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청소년들도 불안하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소풍이나 꽃놀이 한 번 없이 봄을 떠나보낸 시민들은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복잡한 세상, 명쾌한 과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세상에서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이해할 만한 작은 이정표를 제시하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복잡하며,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어우러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면 복잡한 세상도 이해할 만하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두 번째 개정판을 내는 지금도 그 소박한 바람에는 변함이 없다. 세상은 더욱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지만, 과학 콘서트를 통해 사회에 대한 통찰을 서로 나누면서 불안이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함께 애썼으면 한다. 젊은 날 혼돈과 불면의 밤에, 이 책이 ‘통찰이 위로가 되는’ 작은 선물이었으면 한다.
2020년 6월 18일
코로나19 사태를 통과하며
개정증보판 서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가 출간된 지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 책에 보내준 언론과 독자들의 과분한 상찬에 저자로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신문과 TV, 잡지 등에서 이 책의 메시지를 중요하게 다루어주었고, 과학책으로서는 이례적인 주목을 독자들로부터 받았다. 어느새 세상은 사회 현상을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 많이 익숙해졌고,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조화롭게 협력하고 때론 열정적으로 논쟁해야만 복잡한 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소박한 바람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사이 복잡계 물리학은 하나의 개별 학문에서 복잡계를 다루는 다양한 과학 분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으며,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Complex Network Science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에서 처음 다루었던 ‘여섯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는 과학 테제가 이제는 상식처럼 회자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은 ‘복잡계 과학’을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 분야로 선정했으며,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도전적인 연구 주제 7’ 중 하나로 선정한 바 있다. 또 인간 사회를 복잡적응계로 간주하고 비선형 동역학과 복잡계 물리학으로 설명하려는 이른바 ‘사회물리학’ 분야가 과학계에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지난 10년간 복잡계 과학은 큰 성장의 굴곡을 겪어온 것이다.
이번 개정증보판은 출간 이후 과학계에서 일어난 지난 10년의 일을 정리하고, 새롭게 맞이할 10년을 전망하기 위해 마련됐다. 지난 10년간 편지와 엽서, 이메일과 문자, 최근 들어서는 트위터로 보내준 독자들의 응원과 질문, 그리고 따뜻한 서평과 날카로운 비평들에 대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속 깊은 응원의 메시지와 따뜻한 서평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비평들은 대뇌 깊숙이 아로새겨두었다. 이번 개정증보판에 덧붙여진 ‘커튼콜’에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과 날선 비판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보았다. 화려했던 과학 콘서트에 대한 ‘10년 늦은 커튼콜’ 또한 독자들께서 즐겨주길 바란다.
지난 10년간 이 책이 감사해야 할 분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가장 고마운 분은 동아시아 한성봉 사장님이다. 이 책을 제일 먼저 밝은 눈으로 알아봐주셨고, ‘과학 콘서트’라는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셨고, 지난 10년간 《과학 콘서트》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주셨다. 내게 그렇듯 자식 같았을 이 책을, 새 둥지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흔쾌히 떠나보내주셔서 감사하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 책의 편집자 차수연 편집장의 흔적이 모든 페이지에 묻어 있다. 항상 고맙다.
앞으로 다시 10년, 또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유쾌하게 읽고, 이 책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책 속에 담긴 수많은 예제들을 즐겁게 음미할까? 덧붙여, 지난 10년간 삶의 성장을 이 책과 함께해온 독자들이 이 책을 다시 얼마나 찾아줄까?
지금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널리 읽히곤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애초에 대학생과 일반인들을 위해 쓴 것이다. 그러니 중·고등학생 독자들에게 각별히 부탁드리고 싶다. 책을 읽어나가다 혹여 어렵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나오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종종 다시 펴보면 새롭게 보이는 구석이 많을 테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오래도록 즐겨주셨으면 좋겠다.
고백건대, 이 책을 통해 가장 성장한 사람은 누구보다 과학자 정재승이다. 애송이 연구원 시절부터 이 책의 원고를 쓰면서 복잡계 과학을 포함해 거대한 인접 분야까지 과학을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를 배울 수 있었고, 각 분야의 내공 깊은 대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섬세한 독자들의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을 얻었다. 나의 30대는 이 책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한 뼘만큼 더 좋은 과학자가 되었다.
과학 콘서트, 척박한 우리 과학 지성계에서 지난 10년을 잘 버텨와 주어 고맙다. 더 깊이 있는 과학, 더 성숙한 통찰력으로 2021년의 너를 기다리마. 생일 축하한다.
2011년 7월
정재승
MBC 〈!느낌표〉 선정 도서 기념판 서문
이 책이 MBC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의 선정 도서가 되어 책의 판매 수익이 어린이 도서관을 건립하는 데 사용된다고 하니 작게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도서관 안에 어린이들의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세상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배울 수 있는 과학도서들이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 또한 가져본다.
2003년 10월의 마지막 날
콘서트에 앞서
세상은 얼마나 복잡한가?
과학이란 마치 길 건너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 반대편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술 취한 사람과 흡사합니다.
가로등 아래에 빛이 있기 때문이죠.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 노암 촘스키, 언어학자
내가 다닌 경기과학고는 수원 외곽에 있는 산 중턱을 깎아 지은 기숙학교였다. 산책과 몽상이 취미였던 나는 밤이 깊으면 운동장에 나가 바쁘게 움직이는 수원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보곤 했다. 도로에 늘어선 자동차들과 가로등 불빛, 들쭉날쭉 늘어선 집들과 휘청거리는 도시의 네온사인. 나는 여기 이렇게 혼자 있는데 사람들은 저기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있던 7월은 폭풍 같은 날들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시험 기간이라 주말에 집에도 못 가고 학교에 남아 수학 문제를 풀고 생물 도표를 외웠다. 기말고사가 끝난 주말,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좌석버스에서 거의 한 달가량 지난 신문을 우연히 보았다. 그 신문에는 중국에서 총서기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각지의 학생들과 노동자, 시민들이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체제의 위기를 느낀 덩샤오핑은 6월 4일에 이들 학생운동을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하고 인민해방군을 출동시켜 전차로 돌진하고 기관총을 난사해 500여 명의 학생·시민들이 죽고 3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른바 ‘톈안먼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내게 깊은 비애감을 안겨주었다. 중국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돌진하는 탱크와 무자비한 기관총에 맞서 자유와 민주화를 외치며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그 순간에 나는 기말고사를 위해 물리 문제를 풀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소식을 한 달이 지나서야 묵은 신문을 통해 알게 됐다는 사실이 내게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것 같은 일종의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덕연구단지 한복판에 위치한 대학을 다니면서, 그리고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내가 하는 일은 점점 더 사람 사는 일과 멀어져갔다. 천체물리학을 전공하려 했던 나의 학부 졸업 논문은 ‘SignusX-1이라는 중성자별에 전자가 들어갔을 때 상대론적 효과에 의해 그 속도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해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었다. 논문을 마무리할 때쯤 나는 좀 더 세상과 가까운 학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성자별은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세상이 복잡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나 복잡하냐고 물어보면 시원스레 대답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도대체 세상은 얼마나 복잡한 것일까?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는 걸까?
20년 전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물리학자들이 다루는 시스템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우주였으며, 시간이 갈수록 물리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 혹은 거대한 우주를 향해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게다가 그들은 인간 사회처럼 복잡한 시스템을 다룰 만한 학문적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시스템 구성요소들의 성질만 제대로 알면 그 시스템이 보이는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스템을 몇 개의 요소로 단순화해서 접근하는 시도는 그동안 많은 자연계에서 얼추 잘 들어맞았기 때문에 오랜 전통을 갖고 꾸준히 지속됐다. 그러나 인간 사회를 비롯해 자연계 대부분의 시스템은 구성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한 행동 패턴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시스템을 몇 개의 요소로 단순화하는 데 익숙한 물리학자들에겐 복잡한 현상을 기술하는 데 필연적으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단순화할수록 시스템의 복잡한 행동 패턴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촘스키의 말처럼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법을 계속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리학자들은 풀어야 할 문제를 풀었다기보다는 풀 수 있는 문제를 풀어왔던 것이다.
20세기 후반 일련의 과학자들에 의해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과학적 패러다임’, 이른바 ‘복잡성의 과학’ 분야가 발전하면서 물리학자들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복잡한 패턴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속에 담긴 법칙들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의 과학은 그동안 과학자들이 손대지 못했던 복잡한 자연 현상들 속에서 규칙성을 찾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행동 패턴, 다시 말해 ‘복잡한 사회 현상’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직 세상을 다루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물리학자들은 이제야 비로소 그것을 다룰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왜 피라미드 기업이 그토록 기승을 부리는지, 불규칙한 주가 곡선에는 어떤 질서가 숨어 있는지, 비틀스의 음악은 왜 아름답게 들리며 세상은 왜 그토록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또 그것이 아름다운 조개껍데기 무늬, 숲을 메우고 있는 나뭇가지들,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 책은 복잡한 사회 현상의 이면에 감춰진 흥미로운 과학 이야기를 독자와 함께 나누기 위해 쓰였다.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경제, 사회, 문화, 음악, 미술, 교통,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회 현상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카오스와 프랙털, 지프의 법칙, 1/f 등 몇 개의 개념만으로 그 모든 현상들이 그럴듯하게 설명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물음을 던지는지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길 원한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해 그 안에 인용된 논문을 읽어보거나 인터넷 웹페이지에 들어가보길 간절히 바란다. 이 부분은 이 책을 쓰면서 특별히 신경 썼던 점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 책에 실린 과학적 사실들이 수백 년 동안 검증받아온 고정불변의 지식이 아니라,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과학저널에 실린 최근 논문들에 담긴 내용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과학자들의 ‘논쟁적이며 때로는 주관적일 수도 있는’ 주장들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또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문제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회 현상을 과학적 시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과학을 친근하게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전작인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세계로 들어갔던 과학이 스크린을 뚫고 현실의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도록 오랜 시간 기다려주신 동아시아 한성봉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근사한 책을 위해 애써주신 동아시아 식구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의 일부분은 〈동아일보〉와 〈과학동아〉, 〈우리교육〉에 실리기도 했는데, 좋은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세상은 얼마나 복잡한가? 이 책에 등장하는 물리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고 따뜻한 대답을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다고.
2001년 6월 24일
인간에 관한 과학이 자연과학을 포함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도 앞으로 인간에 관한 과학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두 과학은 머지않아 하나의 과학이 될 것이다.
- 카를 마르크스
한때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케빈 베이컨의 6단계six degrees of Kevin Bacon’라는 게임이 유행했다. 케빈 베이컨은 우리에게 영화 〈자유의 댄스〉로 처음 알려진 이후, 〈일급 살인〉, 〈JFK〉, 〈리버 와일드〉, 〈슬리퍼스〉, 〈와일드 씽〉, 〈할로우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 연기파 배우다.
정작 케빈 베이컨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는 이 게임의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영화에 함께 출연한 관계를 1단계라고 했을 때,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이 케빈 베이컨과 몇 단계 만에 연결되는가를 찾는 게임이다. 예를 들면 로버트 레드퍼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과 함께 주연을 맡았고, 메릴 스트립은 케빈 베이컨과 〈리버 와일드〉에 함께 출연했으므로, 로버트 레드퍼드는 케빈 베이컨과 2단계 만에 연결된다. 줄리아 로버츠는 덴젤 워싱턴과 〈펠리칸 브리프〉를 찍었고, 덴젤 워싱턴은 톰 행크스와 〈필라델피아〉에 출연했으며, 톰 행크스는 케빈 베이컨과 〈아폴로 13〉에 함께 나왔으니, 줄리아 로버츠는 3단계 만에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
줄리아 로버츠는 3단계 만에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
이 게임의 핵심은 케빈 베이컨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경로를 찾는 것이다. 한때 캠퍼스 곳곳에서 학생들이 모여 앉아 케빈 베이컨 게임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엔딩 크레딧을 외우느라 영화가 끝나도 일어나지 않는 관객이 꽤 많았다고 한다. 버지니아대학 컴퓨터학과 학생들은 배우의 이름을 집어넣으면 케빈 베이컨과 몇 단계 만에 연결되는가를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했을 정도로 이 게임의 인기는 대단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게임에서 대부분의 할리우드 배우들이 6단계 이내에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케빈 베이컨이 장르를 넘나들며 많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계가 생각보다 좁은 사회라는 의미이기도 하리라. 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게임을 한다면 어떨까? 안성기나 명계남만 거치면 두세 단계 만에 모든 배우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단지 영화판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케빈 베이컨 게임은 ‘여섯 다리만 건너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six degrees of separation’라는 서양의 오래된 통념을 반영한 놀이다(무선전신과 라디오의 발명자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처음 이 이론을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는 간단한 수학만으로 77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좁은 세상이며, 배우 심은하와 내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를 증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알고 지내는 사람이 대략 300명 정도 된다고 가정해보자. 학창 시절 동창들만 해도 족히 수백 명은 넘으니 그다지 후하게 어림잡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각각 300명의 친구를 두고 있을 테니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은 9만 명에 이르게 된다. 4단계 건너 아는 사람은 9만 명의 제곱인 81억 명. 지구에 사는 77억 인구가 4단계면 모두 아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미처 고려하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작은 메모지 한 장 분량의 이 증명 과정에는 77억 인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거대한 사회가 하나의 균일한 집단이며, 그 구성원들은 거리의 제한 없이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는 가정이 숨어 있다. 이 가정대로라면 아프리카의 추장이 알고 있는 300명 중에는 샤론 스톤이 끼어 있을 수 있으며 북극의 에스키모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 친구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거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무리 지어 살고 있으며, 다른 사회 집단과 지역적으로 혹은 인간관계 면에서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만 벗어나도 아는 사람의 수는 급격히 줄어든다.
인간관계를 주변의 아는 사람들로만 국한한다면, 계산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만약 내 주변에서 살고 있는 300명만을 친구로 두고 있다면, 서울 한복판에 살고 있는 내가 줄리아 로버츠의 사인을 건네받기 위해서는 1억 명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맺고 있는 인간관계는 위에서 했던 두 가정의 중간 어디쯤에 놓여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주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민이나 이사로 먼 지방,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도 하고, 사업이나 여행, 소개팅이나 학회 참석 등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받기도 한다.
작은 세상 네트워크
1996년 미국 코넬대학교 응용물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던컨 와츠Duncan Watts와 그의 지도 교수 스티븐 스트로가츠Steven Strogatz는 왜 할리우드 배우들이 케빈 베이컨으로부터 6단계 이상 벗어날 수 없는가를 증명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을 점으로 표시하고 그들의 관계를 선으로 표시한다면, 사람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지형도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점들과 그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선들의 네트워크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네트워크 개념을 도입해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에 착수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얼마나 복잡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간관계 지도를 상상해보라. 그것은 아마 서울 시내 도로 지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복잡하게 뒤얽힌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던컨 와츠는 우선 1천 명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생각한 다음 그 각각의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열 명의 주변 사람들과 알고 지낸다고 가정했다. 그러면 이때 네트워크의 모양은 1천 개의 점들이 마치 소금 결정의 구조처럼 주변의 점들하고만 규칙적으로 연결된 잘 짜인 구조regular network가 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거리와 상관없이 고르게 관계를 맺으며 선들이 완전히 뒤얽힌 네트워크random network는 3단계 만에 임의의 두 사람이 연결될 수 있는 데 반해, 주변 사람들하고만 연결된 사회regular network는 평균적으로 50단계를 거쳐야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한다.
1998년 6월 〈네이처〉에 실린 와츠와 스트로가츠의 시뮬레이션 결과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하고만 연결된 잘 짜인 네트워크에서 엉뚱한 곳으로 가지를 뻗은 인간관계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도달하는 데 걸리는 단계’가 얼마나 감소하는지를 계산해보았다. 놀랍게도 결과는 우리의 상상을 크게 벗어났다. 100개 중 하나의 가닥만 다른 지역으로 연결해도 필요한 평균 단계 수는 10분의 1씩 줄어들었다. 잘 짜인 네트워크 연결에서 몇 가닥만 엉뚱하게 가지를 뻗기만 해도, 이 거대한 사회가 몇 단계 만에 누구에게든 도달할 수 있는 ‘작은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들은 몇 가닥의 무작위 연결만으로 모든 사람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이 네트워크를 ‘작은 세상 네트워크small world network’라고 불렀다.
그들이 케빈 베이컨 게임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들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적용한 곳은 역시 할리우드 영화계였다. 할리우드에 정식 자료 요청을 통해 던컨 와츠는 미국 영화계에는 대략 22만 5천 명의 배우가 있으며, 한 배우가 함께 일하는 배우의 수는 평균 61명 정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 할리우드 데이터를 프로그램에 입력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적용했더니, 모든 배우들은 평균 3.65단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시 말해 케빈 베이컨이 아니더라도 할리우드의 모든 배우들은 3.65편의 ‘영화’라는 아름다운 끈으로 연결된 친구라는 것이다. 이것은 버지니아대학 사이트의 통계에서 케빈 베이컨으로 가는 경로가 3, 4단계인 경우가 가장 많다는 결과와도 일치한다.
와츠와 스트로가츠의 논문이 1998년에 발표된 가장 주목받은 논문 중의 하나임엔 틀림없지만, 그들이 ‘작은 세상 이론small world theory’을 처음으로 내놓은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 샌디에이고대학 신경과학연구소의 올라프 스폰스Olaf Sporns와 그의 동료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네트워크라 할 수 있는 뇌의 신경세포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과 작용을 하는 뇌가 어떻게 그토록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송하고 처리하는가를 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포유류의 뇌가 ‘작은 세상 효과small world effect’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뇌는 비슷한 작용을 하는 영역들의 세포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곳곳에 큰 가지들이 무작위로 뻗어 있어서 몇 개의 신경세포만 거치면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영역의 세포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세포가 다른 세포들을 향해 수상돌기나 축색의 가지를 뻗을수록 뇌의 부피는 점점 커지고 그러면 에너지 소모도 커지므로, 주어진 부피 안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서 뇌가 작은 세상 효과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우리 뇌 또한 ‘작은 세상 효과’를 이용하여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송한다.
수학자들의 공동 연구 네트워크, 에르되시 프로젝트
수학 분야에서도 케빈 베이컨 게임과 유사한 프로젝트가 있다. 오클랜드대학교 제리 그로스먼Jerry Grossman 교수가 추진한 ‘에르되시 프로젝트Erdös Number Project’가 그것이다.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 팔Erdös Pál(1913~1996)의 이름을 딴 이 프로젝트는 영화 대신 논문을 그 매개로 한다.
《화성에서 온 수학자》(1998)와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1998)라는 전기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에르되시 팔은 헝가리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천재적인 두뇌와 수학에 대한 열정, 괴짜 같은 삶으로 더욱 유명하다. 화성에서 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던 그는 네 살 때 음수의 개념을 스스로 깨쳤고, 열여덟 살에 ‘1보다 큰 임의의 수와 그 배수 사이에는 적어도 하나의 소수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체비쇼프의 정리Chebyshev’s Theorem를 간단한 방법으로 증명하면서 수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무한을 흠모하는 우리 수학자는 모두 광인일세”라고 말할 정도로 평생 수학의 아름다움에 빠져 살았던 그는 함수론과 기하학, 확률론 등 수학 전 분야에 걸쳐 무려 1500편의 논문을 남겼다. 1996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학회 참석 중 수학 문제와 씨름하다 신발을 신은 채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그의 묘비명에는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어리석어지지 않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에게 삶이란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천재 수학자 에르되시 팔.
에르되시는 일생 동안 세계 각국의 학자 485명과 함께 1500여 편의 논문을 쓰면서 공동 연구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에르되시 프로젝트는 그와 다른 연구자들과의 관계를 ‘에르되시 수Erdös Number’로 표시한다. 에르되시와 함께 논문을 쓴 공동 저자라면 에르되시 수가 1, 이들 공동 저자와 함께 논문을 쓴 학자는 에르되시 수가 2가 된다. 그로스먼의 통계에 따르면, 1998년까지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한 수학자는 모두 에르되시 수가 5 이하이며, 에르되시 수가 8 이하인 노벨상 수상자도 63명이나 된다고 한다. 에르되시가 다른 수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에르되시와 함께 논문을 발표해 에르되시 수가 1인 수학자 대니얼 클라이트만Daniel Kleitman은 영화 〈굿 윌 헌팅〉의 수학 자문을 맡으면서 영화에 잠깐 출연했는데, 함께 출연했던 여배우 미니 드라이버가 케빈 베이컨과 〈슬리퍼스〉에 출연한 적이 있어 케빈 베이컨 게임으로도 ‘2단계’라는 작은 값을 가진 최초의 수학자가 되었다. 또 클라이트만이 영화에 잠깐 출연한 덕분에 에르되시와 케빈 베이컨은 세 다리 건너 아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학자 사회와 영화계 사이에 ‘클라이트만’이라는 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다. 에르되시 프로젝트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독자적인 연구가 관습화되어 있는 수학 분야에서 공동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되기도 한다.
경제 분야 역시 보기와는 달리 ‘작은 세상’이었다. 경영학자 브루스 코것Bruce Kogut은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학원 와튼스쿨에 있을 당시 그의 동료 고든 워커Gordon Walker와 함께 독일의 대기업들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를 조사해 네트워크 형태로 표시해보았다. 기업을 하나의 점으로 표시하고 두 기업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를 두 기업을 잇는 선으로 표시하면, 독일 대기업 소유 현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지도가 된다. 분석 결과 기업계 전 분야에 걸친 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모두 4단계를 넘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화로 인해 인수 합병이 줄을 잇게 될 재계가 작은 세상의 일례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지구촌이라는 작은 세상
과학자들은 몇 가닥의 무작위 연결이 국소적으로 무리 지어진 폐쇄 사회를 ‘작은 세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열린사회로 만들 수 있다는 ‘작은 세상 이론’이 공학적 설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다. 작은 세상 이론을 활용하면 도로 설계를 전면 수정하지 않더라도, 몇 가닥의 고가도로와 다리만으로도 도시의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바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전화선이나 휴대전화 통신망에서 몇 가닥의 무작위 연결만으로도 원하는 두 지점을 빠르게 연결할 수 있으며, 인터넷에서 정보의 흐름을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1998년 9월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인디애나주에 있는 노트르담대학의 과학자들은 인터넷에서 하나의 웹페이지에서 임의의 다른 페이지로 이동하는 데 평균 19번의 클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수백만 개의 사이트가 19번의 클릭만으로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은 인터넷 자체가 이미 작은 세상이 됐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작은 세상 이론을 적용하면, 앞으로 몇 가닥의 추가적인 연결은 인터넷의 효율성을 수십 배 더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세상이 이처럼 지구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점점 작아진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작은 세상 이론’은 중세에 페스트가 어떻게 유럽 인구를 3분의 1이나 감소시킬 수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작은 부족에서 처음 발생한 에이즈가 어떻게 20년 만에 전 세계 3800만 명의 보균자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를 설명해준다. 영화 〈외계인의 침입〉에서 한 도시의 주민들이 불과 며칠 만에 모두 외계인으로 변해버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가늠케 하기도 한다.
‘지구촌 세상’은 감염과 집단 발병에 취약한 세상이기도 하다.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에서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MERS-CoV) 입자.
1976년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의 옛 이름)와 수단에서 아프리카 유행성 출혈열이 집단 발병하여 600명이 감염되고, 42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하는 이 유행성 출혈열은 인체의 장기세포를 파괴하여 5일 안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중앙아프리카에서 집단 발병이 일어난 지 몇 주 후, 영국 남부의 윌트셔 지방에서 에볼라 바이러스 환자가 발생했다. 수단과 자이르에서 집단 발병을 연구하던 한 생물학자가 병균을 몸에 실은 채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행히 그는 생명은 건졌지만 아프리카에서 발병한 전염병이 다른 대륙으로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건너갈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준 장본인이 되었다. 작은 세상 이론으로 따지자면, 무작위 연결 가지 노릇을 했다고나 할까?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과 인터넷의 등장, 자유로운 교류와 무역, 해외여행은 반지름 6400킬로미터의 거대한 지구를 점점 ‘좁은 세상’으로 만들고 있다. 사회가 좁아진다는 것은 일면 긍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대면 접촉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네트워크의 역학적 특성에 의해 좁아진 사회는 따뜻한 인간관계와 공동체 의식 등 좁은 사회가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은 수용하지 못한 채 부작용만을 안을 우려가 크다.
이제 우리는 한때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 행운의 편지에 시달려야 했던 이유와 피라미드식 기업이 그토록 거대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또 연예인에 관한 고약한 유언비어가 어떻게 그 진원지도 모른 채 사실인 양 계속 퍼져갈 수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전 세계 컴퓨터 네트워크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더 이상 기우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위험할 정도로 작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세계가 형성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캉디드가 물었다.
“우리를 괴롭히기 위함이다.” 마르탱이 대답했다.
- 볼테르의 《캉디드》
살다 보면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다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안 되는 일이 더 많다.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면 꼭 다른 줄이 먼저 줄어들고,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 하필 옷에 커피를 쏟거나 버스를 놓쳐 지각하기 일쑤다. 소풍날이면 어김없이 봄비가 내리고, 수능시험을 보는 날엔 한파가 몰아친다. “하필이면 그때…” 혹은 “일이 안 되려니까…” 같은 말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가!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법칙이 있으니, 이름 하여 머피의 법칙Murphy’s law. 수많은 구체적인 항목들로 이루어진 머피의 법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잘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된다If anything can go wrong, It will’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정리해놓은 이 법칙은 불행하게도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 하고 낙담하지 마시라. 다른 사람들도 당신만큼 재수가 없으니까.
머피의 법칙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머피의 법칙은 단지 우스갯소리일 뿐, 종종 들어맞는다는 사실조차 우연이나 착각으로 여겨왔다. 머피의 법칙을 반박할 때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선택적 기억selective memory’이다. 우리의 일상은 갖가지 사건과 경험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경험일 뿐 일일이 머릿속에 남진 않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일이 잘 안 풀린 경우나 아주 재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머릿속엔 재수가 없었던 기억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는 것이다.
소풍 때마다 비가 오고 수능시험 날이면 어김없이 추위가 몰아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봄비가 한창인 4월 무렵에 소풍날을 잡고, 안 추우면 오히려 이상한 11월 중순에 수능시험 날짜를 정해놓고, 비가 안 오고 날씨가 따뜻하기를 바라는 심보는 또 뭔가!
그러나 이 정도 설명으로는 어쩐지 만족할 수 없다. ‘왜 하필이면’을 연발케 하는 재수 더럽게 없는 사건들이 모두 과연 ‘선택적 기억’이라는 우리의 착각일까?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날까지 멀쩡하던 날씨가 어떻게 소풍날만 되면 어김없이 비가 올 수 있을까? 오죽하면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귀신 소문까지 돌았을까.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버터 바른 토스트의 법칙
이런 찜찜한 기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과학자가 있다. 신문 칼럼니스트이자 영국 애스턴대학 정보공학과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로버트 매슈스Robert A. J. Matthews는 선택적 기억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머피의 법칙이 그토록 잘 들어맞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하나씩 증명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가 처음 증명했던 머피의 법칙은 ‘버터 바른 토스트’에 관한 것이었다. 아침 출근 전 부산을 떨며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허둥대며 먹다 보면 빵을 떨어뜨리기 쉽다. 그런데 하필이면 버터나 잼을 바른 쪽이 꼭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빵을 다시 주워 먹기도 곤란할뿐더러 바쁜 와중에 바닥까지 닦아야 한다. 젠장할!
1991년 영국 BBC 방송의 유명한 과학 프로그램 〈Q·E·D〉에서는 ‘버터 바른 토스트’에 관한 머피의 법칙을 반증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토스트를 공중에 던지게 하는 실험을 했다. 300번을 던진 결과, 버터를 바른 쪽이 바닥으로 떨어진 경우는 152번, 버터를 바른 쪽이 위를 향하는 경우는 148번으로 나왔다. 그들은 ‘확률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머피의 법칙은 결국 우리의 착각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호기심 해결!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일상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은 토스트를 위로 던지는 경우가 아니라 대부분 식탁에서 떨어뜨리거나 손에 들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경우다. 이런 경우에도 위 실험과 같은 결과가 나올까? 버터를 바른 면이 위쪽을 향해 있던 토스트가 식탁에서 떨어지는 경우, 어떤 면이 바닥을 향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떨어지는 동안 토스트를 회전시키는 스핀에 의해 결정된다. 토스트를 회전시키는 힘을 물리학자들은 토크torque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 중력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로버트 매슈스는 식탁 높이나 사람의 손 높이에서 토스트를 떨어뜨릴 경우 토스트가 한 바퀴를 회전할 만큼 지구의 중력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간단한 계산으로 증명했다. 대부분 반 바퀴 정도만 돌고 떨어지기 때문에 버터를 바른 면이 반드시 바닥에 닿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계산해보면, 공기의 저항이나 얇은 버터층의 무게는 토스트의 회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버터 바른 면이 늘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머피의 법칙이 들어맞는 이유는 지구의 중력과 식탁의 마찰계수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스트는 정말 버터를 바른 쪽으로 떨어질까? 로버트 매슈스가 영국의 초등학생·중학생 1천여 명과 함께 진행한 토스트 실험 장면.
자료 : Robert A. J. Matthews, School Science Review, September 2001, 83(302).
만약 인간의 키가 훨씬 더 컸다면, 그래서 충분히 높은 식탁에서 빵을 먹었다면, 토스트는 한 바퀴를 회전했을 것이고 버터 바른 면이 늘 위를 향해 떨어졌을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천체물리학과의 윌리엄 프레스William H. Press 교수는 양쪽 발로 서서 생활하는 인간이 지구 환경에서 넘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키가 가장 적당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의 키는 중력이 우리를 당기고 있는 힘과 우리의 골격이 이루고 있는 화학적 결합이 평형을 이루면서 정해진다. 좀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빅뱅에 의해 결정된 우주 상수와 그것들로 결정된 지구의 역학적 특성이 인간의 키를 2미터 안팎의 높이로 만들었고, 불행히도 그 때문에 ‘버터 바른 토스트’에 관한 머피의 법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버터 바른 식빵을 떨어뜨리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이 우주가 인간에게 가혹하도록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행에 대처하는 과학적 자세
슈퍼마켓에서 혹은 현금 인출기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어느 줄에 설까’를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빠른 눈 굴림과 쪼잔한 잔머리를 동반해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고민 끝에 제일 빨리 줄어들 것 같은 줄에 서지만, 늘 다른 줄들이 먼저 줄어든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줄에 섰으면 지금쯤 계산이 끝났을 텐데 말이다. 젠장할!!
이 문제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슈퍼마켓에 12개의 계산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공교롭게도 내가 선 줄의 계산대가 말썽을 일으킨다거나 사람들이 물건을 많이 사서 유독 계산이 느리게 진행될 수도 있겠지만, 평균적으로는 다른 줄과 별 차이가 없다고 가정할 수 있다. 다른 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람들은 늘 가장 짧은 줄 뒤에 서려고 할 것이므로 줄의 길이도 대개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평균적으로 내가 선 줄이 가장 먼저 줄어들 확률은 얼마일까? 당연히 12분의 1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줄이 먼저 줄어들 확률이 12분의 11이나 된다는 얘기다. 여간 운이 좋지 않다면, 어떤 줄을 선택하든 결국 나는 다른 줄이 먼저 줄어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왜 내가 선 줄만 느리게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까?
우연히 라디오를 켰는데 비 예보가 흘러나온다. “난 정말 운도 좋지. 일기 예보를 못 들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하며 기쁘게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서지만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하루 종일 햇볕이 쨍쨍하다. 그것도 화가 나도록 무진장 맑다. 더욱 억울한 상황은 집에 도착하고 나면 그제야 비가 오는 경우다. 일기 예보의 정확도가 80퍼센트가 넘는 이 시대에 도대체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날씨마저도 나를 배신하는 걸까?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로버트 매슈스의 계산에 따르면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더라도 우산은 안 가져가는 것이 좋다. 일기 예보의 정확도가 평균 80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