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100년의 변화를 뛰어넘는
2010~2020년의 새로운
‘거의 모든 IT의 역사’
『거의 모든 IT의 역사』는 2010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을 중심으로 한 IT 산업 역사에서 주요 인물과 기업들의 이야기를 ‘인간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기존 산업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는 달리 접근해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IT 역사는 여느 역사와는 달리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래서 내용을 업데이트하는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필자가 게으른 탓도 있고 찔끔찔끔 개정증보판을 내는 일도 부담스러워서 시기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IT 역사에는 마치 여느 역사의 수백 년이 흐른 것과도 같은 큰 변화가 있었다. 전통의 강자들인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아마존이 급부상했고,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의 IT 기업들도 전 세계 IT 역사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많아졌다. 그뿐인가? 원래는 페이팔이라는 기업을 통해 IT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일론 머스크는 IT 기술을 활용해 자동차 산업, 에너지 산업, 우주산업, 심지어는 인간의 뇌에 칩을 심을 수 있는 생명공학 기업까지 혁신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이제는 정말 개정증보판을 내야 할 때라고 결심하게 되었고, 때마침 책의 출간 10주년을 맞이해 대폭 내용을 덜어내고 새롭게 추가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10주년 기념판이기는 하나, 사실상 새로운 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일반적인 개정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새롭게 바뀐 원고가 전체의 1/3에 이르며, 지난 10년간 변화와 앞으로의 미래상까지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또한 기존 책이 IT 산업 전반을 정리한다는 느낌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면, 이번 10주년 기념판은 모든 산업이 IT의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물결에 들어간 것을 감안해 사실상 모든 산업의 최근대사와 미래에 대한 이슈를 다룬다는 각오로 집필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비롯해 10년 전 발간된 책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 역시 새로운 10주년 기념판을 읽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충실히 보강했다.
개정된 내용이 워낙 많아서, 그 내용을 일일이 개괄하는 것조차 간단치 않다. 그래도 10주년 기념판을 구매하기에 앞서 서문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매우 간략히 설명하면, 우선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거의 모든 IT의 역사』에서 다루지 못했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IT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정리해보았다는 점에 있다. 2020년 코로나19를 비롯해 전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일들이 많았지만, 우리나라 IT 역사에서 가장 큰 획을 그었던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이 타계한 일도 IT 역사에 하나의 방점을 찍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이 책을 집필할 당시만 해도 사실상 미국 중심의 플랫폼 기업들이 전 세계를 집어삼키는 분위기였기에 책 집필도 여기에 초점을 맞췄지만, 지난 10년간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과 중국, 일본의 거대 IT 기업 그리고 손정의 회장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미국의 거대 기업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들의 개별 이야기와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지는 국가 수준의 IT 산업 변천사도 같이 담아내려고 많은 공을 들였다. 이 새로운 글은 ‘스페셜 챕터 거의 모든 동아시아 IT의 역사’라고 이름 붙였다. 이 내용만으로도 이번 10주년 기념판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자신한다.
또한 마지막 장에서는 미래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인공지능 기술의 부상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전망하고,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의 변화에 IT 기술과 IT 역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게 될지 가늠해보았다. 이 장 역시도 향후 한 권의 책으로 따로 엮어내도 될 만큼 알차게 담아냈다.
그밖에 나머지 장들에서도 지난 10년간 있었던 무수한 변화들을 고스란히 업데이트했다. 애플 CEO인 팀 쿡, 마이크로소프트 CEO인 사티아 나델라, 구글과 알파벳의 CEO인 순다 피차이 등 『거의 모든 IT의 역사』에서 다루는 주요 기업들의 대표가 모두 바뀐 점을 감안해 이들과 이전 대표들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방향으로 기업을 이끌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봤다. 특히 지난 10년간 가장 일취월장한 아마존과 제프 베조스 그리고 IT 산업을 넘어 전 세계 주요 산업에서 혁신을 이끌고 있는 일론 머스크의 이야기를 대폭 보강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언급한 수많은 기업들의 소소한 변화들도 모두 새롭게 검증하고 변동된 부분은 모두 수정했다.
끝으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언급하고자 한다.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랑케와 크로체라는 인물의 두 가지 역사관이 유명하다. 랑케는 역사를 객관적 사실에 의거해 있는 그대로 검증하고 기술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에 비해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오늘의 역사”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역사가가 오늘날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을 중시했다. 이 둘의 시각을 종합한 E. H. 카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대해 기술하고 이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언급했다. 필자는 저 말에 『사피엔스』라는 명저의 저자이며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미래는 역사의 연장”이라는 시각을 더하여 역사를 미래지향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IT 역사는 ‘미래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가까운 미래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교훈을 많이 던져준다. 이 책을 통해 IT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의 역사, 아니 우리 사회 전체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영감을 독자들이 적어도 하나씩 얻기를 기원한다.
2020년 11월 가을 끝자락에
정지훈
사람의 역사가 IT의 역사다
E. H. 카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다. 역사 자체에 관심이 없으면 자칫 지겨울 수도 있는 이 책의 요지는 절대적인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객관주의적 역사관과 절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도 역사가의 해석에 달렸다는 주관주의적 역사관 사이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며 미묘한 균형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역사는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과 사건을 통해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논란이 된 국사 과목 의무화 주장이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과거에 비해 주변 여건과 환경은 바뀌었지만 인간이 가진 보편타당한 판단기준이나 욕구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 더구나 근현대사에 접근하면 그 유사성은 더욱 커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는 IT 산업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또 그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특정 기업이나 제품, 기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도대체 어떤 인물들이 이런 기술과 제품, 서비스들을 만들어냈고, 무슨 이유로 그런 일들을 시작했으며, 주변 환경이 어땠는지에 관한 기초 자료는 본 적이 없다. 기술이나 기업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고, 이들의 철학과 에너지가 모여서 기업과 제품, 서비스로 이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아마 IT 산업 자체가 기술 중심 산업이고 업계 종사자도 대부분 과학과 공학 등을 공부해온 사람들이다 보니,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쓰려고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블로그에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의 IT 삼국지>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2~3개 정도의 글을 포스팅하겠다는 단순한 의도였는데, 글을 읽어주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멈출 수 없는 작업이 되었다. 하지만 블로그 글로는 IT 산업 전체를 담을 수도 없고 지나치게 장구한 역사를 다룰 수도 없어서, 일단 1955년에 태어난 동갑내기 세 천재인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에릭 슈미트와 그들이 이끄는 회사인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을 중심으로 자료를 정리했다. 가능한 한 사실을 바탕으로 IT 업계와 인물들의 흥망성쇠를 비교적 담담하게 기술하려고 했고 필자의 생각이나 우리나라 IT 업계에 하고 싶은 말 등을 전달하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글을 다듬고 보태서 이 책을 내게 됐다.
우리네 삶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 말처럼 실제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보고 있으면, 기술만 나열한 지겨운 IT 관련 글들을 볼 때와는 달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때 사건들을 머릿속에 그리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작업을 하면서 너무나 많이 배웠다. 새로 알게 된 사실도 많았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다시 이해하는 계기도 되었다. 또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사람과 회사의 이미지도 달리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방진 말일 수도 있지만, IT 산업의 미래가 흘러가는 방향을 읽는 눈도 생긴 것 같다.
이 책을 쓰면서 다음에는 더 최근의 일에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적으로 탐구해야 할 인물들에 대해 더 조사를 해서 IT와 관련한 역사의 후속편을 집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외국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IT기업과 인물들을 통해 국내 IT 역사를 정리해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젊은 창업자들을 위한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올 때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은 아내 서가원과 우리 아이들 선우와 민서,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또한, 고집스러운 필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많은 부분 양보를 하면서도 훌륭한 책을 만들어준 메디치미디어 식구들과도 출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2010년 11월 가을 끝자락에
정지훈
등장인물
애플 왕국
스티브 잡스 Steve Jobs
애플 창업자. 애플Ⅱ로 개인용 컴퓨터에서, 아이폰으로 스마트폰에서 IT 역사에 길이 남을 혁명을 두 번이나 일으킨 천재. 애플Ⅱ 이후 IBM PC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자신이 데려온 존 스컬리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픽사와 넥스트를 거치면서 창의적인 리더십으로 재무장하고 돌아온 뒤 애플의 전성기를 열었다.
스티브 워즈니악 Steve Wozniak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창업했다. 애플Ⅱ를 실질적으로 개발해낸 희대의 천재 엔지니어. 스티브 잡스와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애플의 성공을 이끌었다. 부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뛰어들며, 외부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기발하고 상상력 넘치는 괴짜로 유명하다.
존 스컬리 John Sculley
펩시콜라의 유명한 마케팅 시리즈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최연소로 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던 최고의 스타 마케터. 스티브 잡스의 도발에 자극을 받아 애플에 입사를 결심한 뒤 스티브 잡스를 몰아내고 애플의 실권을 장악한다. 애플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지만, 결국 혁신 에너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애플에서 쫓겨난다.
조나단 아이브 Jonathan Ive
매킨토시에 반해 애플에 입사한다. 처음에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었으나 스티브 잡스의 복귀와 함께 최고 스타로 부각된 디자인 천재. 아이맥과 다양한 파워맥, 아이팟, 아이폰 등 애플을 대표하는 제품의 디자인을 직접 책임지고 있으며, 오늘날 가장 성공한 디자이너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팀 쿡 Tim Cook
스티브 잡스에 이어 애플의 CEO가 된 인물. 스티브 잡스와 달리 공급망 관리를 중심으로 하는 관리의 달인으로 불리웠기에, 스티브 잡스의 색깔이 강한 애플이라는 거함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기존 애플의 장점을 크게 훼손시키지 않고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는 데 성공하면서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제국
빌 게이츠 Bill Gates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 소프트웨어의 전성기를 열면서 MS-DOS와 윈도, 오피스로 대표되는 거함 마이크로소프트를 진두지휘했다. 뛰어난 사업전략과 협상기술로 IBM과 협력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직접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폴 앨런 Paul Allen
빌 게이츠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한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빌 게이츠의 단짝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병의 악화로 2018년 유명을 달리했다. 활발한 지역사회 운동과 고향 지역의 프로스포츠단 인수, 기부활동 등으로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스티브 발머 Steve Ballmer
빌 게이츠의 뒤를 이어 마이크로소프트 CEO가 된 인물. 하버드 대학교에서 맺은 인연으로 빌 게이츠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제국을 완성했다. 불같은 성격에 고집이 세서 빌 게이츠와도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으며, 2000년 빌 게이츠를 밀어내고 마이크로소프트 CEO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10년 동안 새로운 혁신을 일으키는 데 실패하면서, 애플과 구글이라는 라이벌들의 추격을 허용했다.
사티아 나델라 Satiya Nadella
2014년 스티브 발머의 뒤를 이어 마이크로소프트 CEO로 발탁된 인물. 애플과 구글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것처럼 보였던 마이크로소프트를 다시금 최고의 IT 기업으로 평가받게 만드는 혁신을 과감히 실행해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감한 M&A와 과거의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오픈소스 중심의 개방적 혁신전략으로,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미래지향적인 기업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구글 공화국
세르게이 브린 Sergey Brin
구글 공동창업자. 구소련에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다가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컴퓨터 천재. 래리 페이지와 더불어 구글을 설립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지금도 인권이나 민주화 같은 이슈에 민감하다.
래리 페이지 Larry Page
스탠퍼드 대학교 선배인 세르게이 브린과 운명적으로 만나서 구글을 창업했다. 내성적이지만 비즈니스에 밝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고집도 세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의 웹 사이트를 복사하고 검색랭킹을 만드는 등 구글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에릭 슈미트 Eric Schmidt
대학시절에 유닉스 운영체제용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제작할 만큼 뛰어난 프로그래머로,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기업인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기술총책임자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 노벨 CEO를 거쳐 구글의 좌충우돌하는 젊은 창업자들을 이끌어갈 CEO로 발탁되었으며, 유약하다는 처음의 이미지를 벗고 입지를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
쉐릴 샌드버그 Sheryl Sandberg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와 MBA 역사상 최고의 여성 인재 중 한 명으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 스승인 로렌스 서머스를 따라 백악관 비서진으로도 활약한 여걸. 에릭 슈미트의 권유로 구글에 입사한 뒤 검색광고 애드워즈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페이스북 CEO인 마크 주커버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페이스북 COO로 자리를 옮긴다.
순다 피차이 Sundar Pichai
2015년 구글 공동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의 뒤를 이어 구글의 CEO로 취임한 인물. 크롬 브라우저를 성공시키고, 크롬OS와 크롬북까지 제대로 안착시키며 신임을 얻었다. 2014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CEO로도 물망에 올랐는데, 구글에서 그를 CEO로 지명하면서 사티아 나델라와 실리콘밸리 인도계 CEO 경쟁구도가 성사되었다. 2019년 12월, 구글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기업들을 관리하는 지주회사인 알파벳의 CEO로도 임명되며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루게 된다.
그 외 주요 인물
마크 주커버그 Mark Zuckerberg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CEO. 하버드 대학교 재학시절 인맥을 연결하고, 이를 일종의 공공앨범으로 엮어내려던 프로젝트가 미국의 여러 대학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일약 구글을 견제할 수 있는 다크호스로 성장한다. 젊은 나이지만, 뛰어난 창의력과 실행력뿐만 아니라 쉐릴 샌드버그, 브렛 테일러 등 뛰어난 인물들을 영입하고 설득하는 카리스마까지 겸비했다.
제프 베조스 Jeff Bezos
이베이와 함께 닷컴 열풍을 일으킨 아마존 CEO. 인터넷을 통해 처음으로 책을 판매하면서 전자상거래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과감히 개방해 쇼핑몰을 열어주는 개방형 마켓 정책을 도입했다. 50년간 버려졌던 전자잉크 기술을 활용한 리더기 킨들로 혁신을 일으키는 등 놀라운 직관력을 가졌다. 구글의 두 창업자를 만난 자리에서 바로 거액의 수표를 끊어주며 투자를 감행할 정도로 실행력이 있으며,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명장이다.
에반 윌리엄스 Evan Williams
웹 기반의 개인관리 서비스를 제작하는 파이라랩스를 창업했으며, 그중 일부 서비스인 블로거 서비스 플랫폼을 만들면서 구글과 한 식구가 되었다. 창업정신이 충만한 탓에 다시 독립해 팟캐스트를 위한 서비스 오데오를 창업하지만, 본 서비스보다는 임시로 만든 트위터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어찌 보면 운을 몰고 다니는 사나이.
일론 머스크 Elon Musk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몇 가지 거대한 꿈을 품고 모친이 있던 캐나다로 건너와 다양한 혁신기업을 설립한 풍운아. 인터넷 영역의 세계적인 지불결제 플랫폼인 페이팔을 창업해 IT 기업으로서 큰 성공을 거둔 뒤, 전기자동차와 우주산업, 인간의 뇌를 확장하기 위한 하드웨어 기업에 이르기까지 매우 어려운 혁신사업들에 잇따라 도전했다. 주변의 우려와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딛고, IT 기술의 혁신성과 접근방법을 이들 산업에 접목하며 성공신화를 계속 써나가고 있다.
손정의 Masayoshi Son
한국과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IT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소프트뱅크 창업자. IT와 관련한 미디어와 전시사업으로 시작했으며, 미래를 보는 탁월한 안목과 승부사적인 투자감각을 무기로 야후!와 알리바바라는 당대 최고의 IT 기업에 초기 투자하였다. 수많은 전도유망한 기업에 대한 인수 합병과 투자를 거듭하며 현재도 전 세계 IT 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병철과 이건희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IT 기업으로 도약한 삼성전자의 창업자 부자. 초창기에는 일본의 전자제품 생산 기업들의 모델을 따라하면서 성장했으나, 1983년 도쿄에서 비장한 각오를 담아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를 발표한 도쿄선언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반도체 신화를 달성하며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글로벌 IT 기업으로 키워냈다.
2010년 1월 28일, 스스로 얼리어댑터라고 자신하는 한 누리꾼이 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아침 일찍 접속했다. 미국시간으로 1월 27일 발표할 예정이었던 아이패드가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 애플이 이번에는 또 어떤 제품을 들고 나올까 기대를 품고 커뮤니티에 올라온 동영상을 눈을 비비며 쳐다보았다. 결과는 대실망이었다. 혁신적인 제품일 거라고 생각하며 지켜봤지만 새로운 거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 누리꾼은 커뮤니티에 댓글을 남겼다.
“이게 뭐야? 그냥 화면만 커진 아이폰이잖아. 스티브 잡스도 한물간 건가?”
잠시 후 자신의 댓글 바로 아래에 댓글이 달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라고, 이 바보야!”
IT 전문가들이 넷북의 성능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정쩡한 기기라고 혹평하던 아이패드는 ‘2010년 최대 히트작’이 되었다.
아이패드가 처음 나왔을 때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많은 IT 전문가와 블로거 들은 이 제품에 의문점을 표시했다. 노트북처럼 성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아이폰이나 아이팟처럼 휴대성이 좋은 것도 아닌 이런 기계로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느냐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1GHz의 CPU로는 턱없이 부족할 거고 키보드도 없으니 입력도 불편할 거라며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했다.
기술의 발전만을 진보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몇 개월이 지난 후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패드는 아이폰보다 조금 더 큰 화면을 가진 것에 불과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컴퓨팅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_사람들, 그리고 회사의 DNA를 알아야 한다
수많은 회사들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어떤 회사들은 세계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적인 상품을 선보이기도 하며, 멋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구글과 같이 전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보여주는 기업은 많지 않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조업 기반의 기업들이 있지만, 이들이 현재 세상을 움직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피스 제품군 중심의 비즈니스 생활이라는 강력한 영토와 소프트웨어 판매를 통해 이익을 추구해왔다. 애플은 PC를 판매하는 회사였지만,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이후에는 아이팟과 아이폰 그리고 아이패드를 중심으로 경험을 디자인하고 개인의 생활을 즐겁게 해주는 영역을 개척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구글은 태생부터 인터넷에 자리 잡고 수많은 데이터를 검색해 찾아주는 서비스를 시작한 회사로, 인터넷에서 가장 강성한 영토를 차지하고서 이를 다양한 방향으로 넓혀가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세 회사는 저마다 영역이 명확했고 서로 협조도 하면서 성장해왔지만, 2010년을 기점으로 물러설 수 없는 충돌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여기에 더해 다크호스 정도로 생각했던 페이스북과 아마존이 약진하고 있고, 단순한 영화 유통서비스로 생각했던 넷플릭스와 줌(zoom)이 코로나19와 함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세운 기업들도 IT 혁명에 관여한 기술을 에너지와 자동차, 우주개발 등 또 다른 거대 산업분야로 확장시키며 전 세계에 끊임없는 뉴스거리를 던져주고 있고, 아시아에서 도약한 소프트뱅크, 알리바바, 삼성전자 등과 같은 신흥강자들까지 급부상하고 있다. 이로 인해 IT 역사의 미래는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들이 펼치게 될 미래산업과 미래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들 기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기업문화와 DNA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피엔스』의 저자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는 “미래는 역사의 연장”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제 미래로 연장되는 역사의 현장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보자.
_PC 혁명, 새로운 철학과 함께 시작되다
1980년대 초 PC 혁명이 일어난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PC 시장을 놓고서 자웅을 겨룬 것은 전통의 동부에 자리 잡은 컴퓨터 업체들인 IBM, 왕랩, 마이크로컴퓨터 등과 서부 실리콘밸리에 자리 잡은 매우 작은 신생회사들인 애플, 탠뎀(HP 출신들이 1974년 설립했고 1997년 컴팩에 합병되었다) 등이었다. 이들의 대결은 컴퓨터 전쟁이라고 부를 만했는데, 서부의 작은 다윗들이 동부의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리면서 오늘의 실리콘밸리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서부가 이긴 것은 컴퓨터 아키텍처 디자인 철학의 승리였다. 동부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계층적인 전통 제조업 기반의 논리였고, 서부의 디자인 철학은 인간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철학을 기반으로 했다.
어떻게 서부에서 동부의 전통적인 철학에 반대되는 디자인 철학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60년대 젊은 세대들이 동부의 기존 문화질서에 저항하면서 서부,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한 거리에 모여 히피 문화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구의 전통 기독교 대신 동양의 참선과 요가를 하고 육식 대신 채식을 하는 등 기행을 하면서, 자유와 대중을 중심에 두고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는 여러 가지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이들도 인생이란 게 있는 터라 70년대 말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도 낳고, 교육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다녀야 했다.
히피 문화를 경험했던 이들이 머리가 나쁘거나 교육을 못 받았던 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인근 실리콘밸리에서 막 태동한 신생 컴퓨터 회사의 프로그래머, 시스템 분석가, 컴퓨터 아키텍처 디자이너 등으로 취직했는데, 그들이 그동안 갖고 있던 철학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디자인 철학으로 승화하였고, 이런 디자인 철학이 PC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교 연구진과 제록스의 파크 같은 세계적인 연구소를 이끌어간 수많은 인재들이 과거에 히피 생활을 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스티브 잡스만 해도 동부의 유명한 대학이 아닌 오리건에 있는 리드 칼리지라는 곳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대마초를 팔아서 창업자금을 만들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들이 상상한 건 IT 기술을 새로운 문명 창출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출간되던 잡지 <몬도 2000>에서는 ‘어떻게 IT와 비서구적인 철학이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주로 다루었고, 특히 인간의 영혼을 중시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글을 많이 실었다.
_비즈니스가 아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IT 산업을 움직이는 것이 복잡한 과학과 기술이라고 생각해서 컴퓨터와 논리의 싸움, 돈과 비즈니스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다.
산업에서 파생되는 제품과 서비스는 기술적인 것이지만, IT 산업에 종사하고 새로 만들어진 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된 철학을 만들 수도 없고, 무모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 IT 산업은 제조업 논리를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주로 제조업 마인드를 가지고 설비 투자, 생산성 향상 및 비용절감을 경쟁력으로 삼거나, 정부에서 주도한 막대한 인프라 산업과 이를 독점한 일부 대기업의 서비스를 중심으로 발달하다 보니 IT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종되어버렸다.
물론 미국의 닷컴 버블이 있던 시절, 국내에도 벤처기업(최근에는 스타트업 기업이라고 한다)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젊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창업에 나섰고, 맨주먹으로 아이디어만 가지고 시작해 오늘날 굴지의 기업이 된 사례도 있다. 메디슨을 창업한 고(故) 이민화 회장은 우리나라 벤처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열을 불태웠다. 실제로 국내 벤처기업의 자금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해준 코스닥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물론 코스닥이라는 시장을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거액을 챙겨서 흥청망청 쓴 일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그 거품이 꺼진 여파로 오늘날까지 창업이 힘들어진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 경영자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빼돌리고 호의호식하면서 돈놀이를 통해 회사를 전횡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스타트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일정 부분 가지고 있다. 물론 최근 뛰어난 창업자와 좋은 스타트업 들이 많이 등장했고, 정부도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과거와 비교하면 사정이 크게 나아졌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로 낙인찍힌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업에 전망이 없는데도 접지 못하고, 그렇게 부실만 키워가다 실패하면 결국 인생을 망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그런 부정적인 인식을 끊고, 새로운 도전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혁신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다.
유명한 IT 관련 블로그 미디어 <리드라이트웹> COO인 버나드 런은 1997년 인도 잡지에 ‘미국이 최고의 기업환경을 가진 5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인도와 미국을 비교한 글을 썼다. 버나드 런은 독일 베를린 태생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에서도 풍부한 사업 경험을 가진 글로벌 경영자이고 인터넷 관련 사업에도 정통한 사람이다. 그의 글을 다 소개할 순 없지만, 현재 우리나라 기업들과 기업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맥킨지나 앤더슨, 부즈 앨런 같은 거대한 컨설팅 회사가 최근 똑똑한 인재들을 뽑기 어려운 이유를 들면서, 미국의 최고 인재들은 언제나 실리콘밸리나 다른 곳에 있는 작은 벤처기업에서 자신의 꿈을 시작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글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똑똑한 인재들은 죄다 대기업에만 가려고 하거나 전문직 자격증에만 집착한다. 직업의 안정성이 꿈을 펼쳐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버는 돈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문화의 문제다. 이렇게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서 잘나가는 작은 회사를 만들 환경이 없는데, 어떻게 작은 기업이 성공신화를 쓸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먼저 혁신에 대한 보상과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최대 강점은 위험과 실패에 대단히 관대하고, 건전한 복구시스템이 있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위험이 많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실패도 많다. 미국에서는 스타트업을 하다가 실패한 젊은 엔지니어가 회사 문을 닫으면, 젊은 사람이 경험을 통해 많이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음에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을 거라고 여긴다. 물론 큰 회사에서도 실패한 사람들을 기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경제가 살려면 뛰어난 젊은이들이 과감히 창업할 수 있고, 이들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하며, 동시에 실패하더라도 그들의 경험을 높이 사고 재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도 많이 나오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러한 기업가 정신을 재발견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스타트업 기업의 생태계를 재창조하는 일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신산업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내는 환경을 갖추지 않으면 결국 사람이 최고 재산인 우리나라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많은 엔지니어들을 포함한 여러 회사 직원들이 버닝맨이라는 이벤트에 참여한다. 도대체 이 독특한 이벤트와 실리콘밸리 문화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버닝맨은 네바다주 블랙락 사막 한가운데서 열린다. 사람들은 인근에서 가장 싼 모텔이나 차 안에서 또는 아예 사막에 천막을 치고 잠을 청하는 불편을 감수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면 사막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린다. 이곳에는 상당히 별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상한 아이로 취급받았거나, 직장에서 사이코로 불렸던 사람들도 여기에서만큼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예술가들과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 정열적인 음악가와 엔지니어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사막에 모여서 무얼 하는 것일까? 사막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사람 모형이 서 있는데, 이 모형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며 즉석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를 바라본다. 이들은 생판 처음 만나지만 자신들의 열정을 나누는 것이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는 계속 물을 먹고 선블록을 듬뿍 발라야 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충분한 음식과 물 그리고 자신을 열사의 태양으로부터 대피시킬 피난처를 직접 확보해야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왜일까?
버닝맨 참가자는 누구도 관객이 아니다. 모두 참가자들이며 새로운 월드를 같이 만든다. 피난처도 같이 만들고 필요한 물품도 즉석에서 구하고 차량을 장식해서 예술활동에도 동참한다. 짚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처음으로 치마를 입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모두 함께 즉석에서 만들어진 버닝맨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눈을 감고 마음껏 몰아보기도 하고, 그릴에 구운 치즈 샌드위치처럼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맛본다. 이상형을 만나는 경우도 있으며, 잘 아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서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지기도 한다.
토요일 밤이 되면 사막 한가운데서 참가자들을 맞아준 커다란 사람 형상의 구조물을 불태운다. 이 불타는 사람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린 뒤에 모두 같이 대규모 캠프파이어를 경험한다. 개인에게도 엄청난 체험이겠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새롭게 하나가 되는 커다란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이 버닝맨이라는 행사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며칠 동안 같이 만든 모든 것을 부수고 태우고 소모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이 남아서 몇 주간 사막을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복원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이 행사는 완전히 끝난다. 그렇지만 버닝맨의 기억과 이 행사에서 맺어진 인연과 네트워크는 계속 발전한다. 새로운 세상을 같이 만들어본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버닝맨 커뮤니티라고 한다.
버닝맨은 1986년 샌프란시스코의 해변 파티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네바다의 가장 깊숙한 사막으로 장소를 옮겼는데, 초기에는 훨씬 더 거친 환경이었다. 규칙도 없었고, 차를 타고 가면서 총을 쏘는 사람이 있는 등 무법천지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안전과 질서를 위한 많은 장치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안정되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개방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탓에 불행한 죽음이 생기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이들은 이 행사를 멈추지 않는다.
버닝맨 주간이 되면,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지역의 인구가 줄어든 것이 느껴진다. 차량도 적고 주차장 공간도 비교적 여유롭다. 버닝맨 이벤트를 즐기려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린 것이다.
버닝맨이 열리는 블랙락 사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시간 정도 달리면 나오는 네바다주 리노라는 도시에서 2시간 정도 더 가면 있다. 이 사막의 버닝맨 주변 지역은 일주일 동안 네바다주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가 된다. 그러고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를 블랙록 시티라고 하는데, 일주일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빌딩과 설치물이 세워진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창의성과 야망을 불태우는 것이다. 이 활동에 상업적인 회사의 입김은 얼음과 커피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전혀 들어올 수 없다.
일주일 동안 몇 개의 신문사와 수십 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생기며 테마 캠프 수백 개가 즉석에서 만들어지는데, 원하는 곳에 참여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이곳에는 실리콘밸리에 속한 무수한 회사 직원들이 참가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작업을 같이하고 있으며, 새로운 문화를 몸속 깊이 체험한다.
버닝맨 문화는 개방과 창조성, 자기조직, 공유, 그리고 혁신이라는 실리콘밸리의 가장 중요한 문화와 그 맥이 닿아 있으며, 서로에게 셀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생긴 오픈소스 운동 아이디어가 버닝맨의 개방형 협업에서 기원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버닝맨에는 실리콘밸리 신화 중 가장 중요한 숨겨진 요체와도 같은 측면이 있다. 거대한 플라야(광장)는 방대한 인터넷과도 같이 느껴지는데, 다른 의미로는 엄청나게 커다란 캔버스이자 사람들의 창의력을 발산시키는 플랫폼이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버닝맨 문화를 이해할 때 더욱 잘 헤아릴 수 있다. 우리도 이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창의성을 주입해서 모두 같이 공유하고 개방하며 나누는 문화 이벤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를 비즈니스와 기술 그리고 시장과 같은 일반적인 논리로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를 몸으로 느끼고 공감하면서 그 이상의 행복을 추구하고 서로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실리콘밸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_사람과 꿈 그리고 열정에 대한 이야기
『거의 모든 IT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과 회사 들을 보면 하나같이 꿈과 희망 그리고 열정이 넘친다. 실패도 많이 하고, 권모술수도 등장하며,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2010년 10월 쉐라톤 워커힐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서 마크 주커버그와 함께 페이스북을 창업한 크리스 휴즈가 ‘페이스북 스토리와 소셜 웹의 미래’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필자는 국내에서 소셜 웹과 관련한 글을 많이 쓴 인연으로 그 세션 좌장 역할을 맡아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크리스 휴즈는 당시 스물일곱 살로 대단히 혁신적이며 사회 발전을 위해 애쓰는 젊은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페이스북을 창업해서 잘 나가고 있었지만, 2007년 오바마 캠프에서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온라인팀을 맡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오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주저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인생에서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오바마가 가진 혁신적인 사고에 반해서 당시 민주당에서도 한참 열세였던 선거판을 뒤집는 데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 등의 소셜 미디어를 총동원해 사실상 미국 역사에서 길이 남을 선거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유명 잡지인 <패스트 컴퍼니> 2009년도 표지를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든 아이들’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장식했고, 그가 일으킨 선거혁명은 선거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 선거 이후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미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문제점을 파악한 그는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인터넷을 활용해서 사람과 재능이 부족한 곳에 필요한 것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기 위해 ‘주모’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
이렇게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가 어째서 페이스북 같은 최고의 회사를 때려치우고 어린 나이에 선거판에 뛰어들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하려는 ‘거의 모든 IT의 역사’가 꿈을 꾸는 젊은이와 안정기에 접어든 선배, 그리고 여력이 있는 커다란 기업들과 사회 전체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고, 미래를 관통하는 지혜를 얻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977년 히피 행색을 한 두 젊은이가 차고에서 흰색 플라스틱 박스를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젊은이들은 일반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떠들었다.
“벽돌깨기는 선명한 TV 화면으로 보는 게 낫겠어. 안에 RF 모듈레이터를 집어넣어야 해.”
“그것보다는 이쪽을 곡선으로 만들어야 더 아름다워 보이고 쓰기에도 편할 것 같은데.”
“메모리를 끼워 넣으려면 곡선은 안 돼!”
“무슨 소리야. 여기를 곡선으로 하지 않으면 이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철저하게 사용자 중심인 스티브, 그리고 뼛속까지 공학자인 또 하나의 스티브. 두 스티브는 하나의 안건을 놓고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격한 감정의 격돌 끝에 탄생한 하얀 박스에 이들은 이름을 붙였다. 두 명이 공동작업으로 만든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의 이름을 물려받아서, 이 하얀 박스는 애플Ⅱ라 불렸고, 세계는 드디어 개인용 컴퓨터 시대로 접어들었다.
숙명의 두 라이벌,
그리고 미래의 라이벌이 탄생하다 | 1955
1955년 2월 샌프란시스코, 동거 중인 대학원생 부모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온 가난한 대학원생이어서 이 커플은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이들은 태어난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아이를 입양기관에 넘긴다. 아이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터전을 잡은 한 기계공 부부에게 입양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스티브 잡스다. 스티브 잡스가 다섯 살이 되던 해, 가족은 마운틴 뷰(오늘날 실리콘밸리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도시)로 이사를 가고, 여기에서 애플이 탄생했다.
_과수원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도시로
캘리포니아 북부 샌프란시스코 만 남부에 위치한 실리콘밸리는 초창기에는 라디오와 TV 그리고 전자부품을 군대에 납품하던 스탠퍼드 대학교 주변 회사들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1940~50년대 스탠퍼드 대학교 공대학장이던 프레데릭 터먼은 교수와 학생 들의 창업을 장려했고, 이런 정책 속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회사가 휴렛팩커드(HP)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반도체와 전기, 전자 관련 하이테크 회사들이 나타나면서 실리콘밸리는 오늘날 세계를 대표하는 기술 중심지가 되었다. 1953년 벨 연구소를 떠난 윌리엄 쇼클리는 1956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창업하고, 게르마늄보다 실리콘으로 트랜지스터를 만들면 훨씬 좋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서 여러 가지 연구를 진행했으나, 자신의 회사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회사 엔지니어 8명이 독립해 창업한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독립해 인텔을 창업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로 뿌리가 이어지면서 실리콘밸리 신화는 가속화했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학창시절 문제아였다. 학교도 다니기 싫어해서 자주 결석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자신을 돈과 사탕으로 구슬리지 않았다면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거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혔다.
그런 그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HP에 다니던 동네 아저씨가 건네준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용 전자공학 키트와의 만남이었다. 양아버지도 기계공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가 대여섯 살 때 이미 작은 워크벤치와 도구들을 주면서 언제라도 뭐든지 만들 수 있게 했다. 이런 재미있는 체험은 스티브 잡스에게 열정과 자신감을 선사했다. 멋지고 창의적인 하드웨어를 갈망하는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DNA는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_동갑내기 라이벌의 탄생
스티브 잡스의 평생 라이벌이 될 빌 게이츠는 1955년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유력한 은행의 이사진이었다. 외할아버지 또한 내셔널뱅크의 총재였기에, 태어날 때부터 빌 게이츠는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시스템인 법과 경제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은 다소 평범했다. 스티브 잡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실리콘밸리 한가운데서 신기한 물건과 기계 들에 둘러싸여 자란 반면, 빌 게이츠는 열세 살이 되어 레이크사이드 스쿨(중고등학교 통합 사립학교)에 입학해 컴퓨터와 운명적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비교적 무난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빌 게이츠는 처음부터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의 DNA가 되었다.
_컴퓨터를 좋아한 엘리트 집안의 모범생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1955년에 태어난 동갑내기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구글이라는 거함을 이끌었던 에릭 슈미트 역시 1955년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들이 모두 한 해에 태어났다는 점도 어찌 보면 역사의 필연이 아닐까 싶다.
에릭 슈미트는 1955년 4월 27일 버지니아주 폴스처치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워싱턴 DC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살기 좋은 도시다. 아버지 윌슨 슈미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경제학 교수였고 닉슨 대통령 시절 미국 재무부에서 일을 했으며, 어머니인 엘 리너는 심리학 석사 출신의 전업주부로 내조와 가정에 충실했다. 이렇게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에서 에릭 슈미트는 자랐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와 마찬가지로 에릭 슈미트 역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대형컴퓨터를 이용한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 살았다. 시간을 나누어 써야 했던 카드 천공식 컴퓨터였지만, 그 역시 컴퓨터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에릭 슈미트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어렸을 때부터 창업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공부도 잘했지만 운동 역시 잘했던 에릭 슈미트는 특히 장거리 육상에 소질이 있어서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대표하는 최고의 육상선수였다.
에릭 슈미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워낙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좋아해서 전기공학과로 전과하기로 결정한다. 대학 컴퓨터가 밤만 되면 빨라졌기 때문에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프로그래밍을 했다. 매해 여름이 되면 당시 최고의 연구소 중 하나였던 벨 연구소에서 일했는데, 벨 연구소는 가장 위대한 운영체제 중 하나이며 수많은 운영체제의 원형이 된 유닉스를 1969년 탄생시킨 곳이다. 이곳에서 에릭 슈미트는 대학생 신분으로 역사에 남을 프로그램을 하나 완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컴파일러를 만들 때 사용하는 구문해석기(lex)라는 소프트웨어다.
1979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취득한 에릭 슈미트는 같은 해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컴퓨터 공학을 좀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버클리를 선택한 그는 여름이면 제록스 파크 연구소에서 다양한 연구를 하며, 컴퓨터 공학의 이론과 실제를 꾸준히 공부하고 수련하면서 착실히 내실을 다졌다.
에릭 슈미트는 1982년 버클리에서 대학 졸업 3년 만에 초고속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기간에 바로 옆 동네인 실리콘밸리에서는 동갑내기 천재인 스티브 잡스가 이끄는 애플이, 그리고 시애틀에서는 빌 게이츠가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소처럼 꾸준히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경력을 쌓던 에릭 슈미트는 결국 두 명의 천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회사의 CEO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에 태어난 세 명의 거인은 서로 라이벌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컴퓨터가 이끈 혁명은 세 명을 라이벌로 만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학교 공부에 재미를 붙인 스티브 잡스는 6학년 때는 한 해를 월반해서 바로 중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스티브 잡스는 현재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녔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실리콘밸리라는 환경은 그에게 많은 경험을 제공했다. 스티브 잡스는 열 살 때 컴퓨터를 처음 보았다. NASA가 실리콘밸리에 설립한 연구센터에 놓여 있던 터미널이었다. 터미널 자체는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엄밀히 말해 컴퓨터는 아니지만, 유선으로 메인 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_운명적 동지와의 만남
스티브 잡스는 어린 학생이었지만 이미 히스키트를 통해 전자부품 조립과 기계의 작동원리를 깨우쳤고, 팔로알토에 위치한 HP에서 주최하는 방과 후 강의에 짬이 나는 대로 참여했다. 특히 전자제품 조립에 취미가 있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두둑해서, 심지어는 HP 창업자인 휴렛에게 전화를 걸어 수십 분간 설득한 끝에 원하는 부품을 얻기도 했다.
이곳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위대한 엔지니어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워즈니악이다. HP는 방과 후 강의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스티브 잡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스티브 잡스에게 여름방학 동안 일하는 인턴을 제의했고, 잡스 역시도 이를 받아들여서 실제로 일을 시작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1950년생으로 스티브 잡스보다 다섯 살 많다. 정말 희대의 괴짜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흔히 ‘워즈’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그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방위산업체로 이름 높은 록히드마틴 사에서 일하는 미사일 개발자였기에,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과 희한한 기계 들을 만들어냈다. 워즈니악은 UC 버클리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다가 평생 엔지니어로서 기계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휴학하고 HP에 취직했다. 기계를 좋아하는 괴짜들이 만났으니 둘이 친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_교황청과 통화한 괴짜들
1971년 스티브 워즈니악은 ‘블루박스’라는 장치를 만들었다. 전화회사 시스템 특성을 분석한 뒤에 전화선에 접속해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전화를 거는 장치인데, 스티브 워즈니악은 워낙 장난기가 심한 사람이라 이 장치를 이용해서 여기저기 장난전화를 걸곤 했다.
이를 본 고등학생 스티브 잡스는 직감적으로 이 물건이 돈이 된다고 판단하고 부품을 40달러 정도에 구해서 스티브 워즈니악에게 더 만들어 달라고 한 뒤에, 완성된 박스를 UC 버클리 학생들에게 150달러에 판매했다.
이들은 장치를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장난전화를 많이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스티브 워즈니악이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를 흉내 내서 바티칸 시티에 있는 교황과 통화를 시도한 사건이다. 교황이 잠을 자고 있었기에 통화는 무산되었다. 워낙 강심장인 워즈니악이지만, 바티칸에서 교황을 깨워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덜컥 겁이 나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_스티브 잡스의 뇌리에 박힌 한 편의 강의
1972년 스티브 잡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틀랜드 오리건에 위치한 리드 칼리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잡스는 단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둔다. 스티브의 양부모는 스티브를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대학교육을 약속했다. 그래서 대학교육을 위해 저축을 했는데, 그 돈을 입학금과 등록금으로 한 학기 만에 다 썼다는 사실을 잡스가 알아버렸다. 그 사실을 안 다음부터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잡스는 이 사실을 양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빌붙어 살면서 2년간 자신이 원하는 수업들을 들으러 다녔다. 그중에서 그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친 강의가 있었는데, 바로 서체 디자인 강의다. 이후에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연설할 때 서체 디자인 강의에서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10년 뒤 매킨토시에 구현하면서 전자출판 혁명을 이끌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그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만약 대학을 중퇴하지 않았다면 학교에서 지정하거나 졸업에 필요한 강의 위주로 수강하고 마음이 끌리는 강의는 듣지 못했을 터이기에, 오늘날의 스티브 잡스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는 이처럼 엔지니어면서도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지닌 독특한 사람이었다. 잡스는 서체 디자인 강의를 도강하면서 서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으며, 그 서체 속에 깃든 역사와 세상의 일부를 몸으로 느꼈다.
_아타리 컴퓨터를 찾아간 기인
1974년 스티브 잡스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서 배짱도 좋게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의 문을 두들긴다. 놀란 부쉬넬(1943년생이며, 비디오 게임 산업의 아버지로 유명하다)이 창업한 아타리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게임인 퐁의 대성공에 힘입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게임에 매료된 스티브 잡스는 무작정 아타리의 직원이 되고 싶었다.
1974년 가을, 아타리를 찾아간 스티브 잡스는 냄새나는 수염투성이에 장발을 한 더러운 히피 모습 그대로였다. 경비원은 무작정 회사를 찾아와 높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스티브 잡스를 보고, 부랑자가 찾아왔다며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아타리의 경영진이자 퐁의 게임 디자이너였던 앨런 알콘은 열여덟의 잡스가 HP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생각보다 기술에 해박하다는 점을 파악하고, 아케이드 게임기를 고치는 일에 투입할 요량으로 즉석에서 5달러 시급을 주는 조건으로 채용했다.
이때가 1974년 5월로, 스티브 잡스는 잘나가는 40인의 아타리 직원 중 한 명이 되었다. 언제나 맨발로 돌아다니고, 다른 직원들의 일에 간섭하며 이상한 말만 하는 스티브 잡스는 회사 내 기피인물 1호였다. 이에 앨런 알콘은 하는 수 없이 잡스가 거의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에만 나와서 일을 하도록 했다. 스티브 잡스는 주로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놓은 디자인을 약간씩 변형해 회로를 일부 추가하거나 다른 음향을 집어넣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런데 야간에 아타리에서 스티브 잡스와 희희낙락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가 바로 괴짜 스티브 워즈니악이었다. HP 엔지니어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던 스티브 워즈니악 역시 아타리의 광팬으로, 퐁 게임을 자기 마음대로 디자인해서 만든 독특한 퐁 게임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밤마다 스티브 워즈니악을 아타리 본사로 불러들인 스티브 잡스는 그의 실력을 동료들에게도 자랑했다. 앨런 알콘은 스티브 워즈니악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타리로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HP에서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일에 만족해하던 스티브 워즈니악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래도 워즈니악은 스티브 잡스를 따라 밤마다 아타리를 찾아서 여러 가지 일을 같이(실은 워즈니악이 거의 도맡아)했다. 어쨌거나 상당히 어려운 일들도 쉽게 해결했기에, 아타리 창업자인 놀란 부쉬넬은 스티브 잡스를 주목했다. 6개월 정도 아타리에서 일을 하던 스티브 잡스는 회사 수뇌부에게 인도로 여행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사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시절부터 인도에 심취해서 영혼여행을 떠나고 싶어했다. 신참내기 직원의 황당한 요구에 앨런 알콘과 놀란 부쉬넬은 당황했지만, 때마침 독일에서 터진 게임기 문제를 현지에 가서 해결한다면 인도 여행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티브 잡스는 바로 짐을 싸서 독일로 날아가 단 2시간 만에 문제를 해결했다. 다행히 문제는 앨런 알콘이 예상했던 것과 동일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 앨런에게 고치는 법을 배웠던 스티브 잡스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를 해결한 뒤에 스티브 잡스는 곧장 리드 칼리지를 다닐 때부터 친구였고 앞으로 애플에서 같이 일하게 되는 댄 콧키와 함께 6개월간 인도 여행을 떠난다.
스티브 잡스는 인도 여행을 통해 기대한 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지독히도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물질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런 경험들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때부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스티브 잡스는 아타리로 다시 복직하는데, 히피 행색을 버리고 삭발과 면도를 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앨런 알콘은 잡스가 예전처럼 다시 밤에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친한 친구이자 스티브 잡스의 집에서 같이 살던 댄 콧키에게도 일을 맡겼다.
_전설의 게임, 벽돌깨기의 탄생
이 시기에 아타리는 회사의 여러 프로젝트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타리는 차세대 게임인 벽돌깨기(Breakout) 게임 디자인과 프로토타입에 대한 사내 아이디어를 수집하면서, 보드에서 TTL 칩(당시 아케이드 게임 대부분에 이용되던 칩)을 줄이는 아이디어나 기술에 돈을 거는 콘테스트를 진행했다. 당시 게임 하나에 보통 130~170개 정도 칩이 들어갔는데, 아타리는 칩을 70~100개 정도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히 콘테스트에 지원해서 벽돌깨기 사양서를 받아 왔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4일이라고 워즈니악에게 설명한 잡스는 아타리에서 칩을 50개 이하로 설계하면 700달러, 40개 이하면 1,000달러를 주기로 했다고 말한 뒤에 협상을 통해 칩의 수를 몇 개로 줄이든 스티브 워즈니악이 700달러 중 반을 받고 보너스는 없는 것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훗날 스티브 워즈니악은 원래 아타리에서는 4일로 시간을 제한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빨리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싶었던 스티브 잡스가 임의로 시간을 설정하고서 워즈니악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워즈니악은 4일 밤을 새면서 게임보드의 프로토타입을 거의 완성했다. 워즈니악은 TTL(Transistor-Transistor Logic) 칩 수를 44개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고, 이들의 성과에 감명받은 아타리 경영진은 스티브 잡스에게 원래 지급하기로 했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5,000달러를 주었는데,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원래 약속한 350달러만 주고 오리건으로 몇 달간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워즈니악의 디자인이 워낙 정교해서 당시 기계로는 양산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만들다시피 한 이 게임은 워즈니악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수정해서 1976년에야 세상에 선보였고,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히트작 중 하나로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전설의 게임 ‘벽돌깨기’다.
스티브 잡스에 비해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 한번 본 것은 모조리 외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백과사전이나 성경책을 통째로 암송할 정도였다.
빌 게이츠는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시애틀의 유명한 사립학교인데, 동부의 명문 대학 등록금보다 학비가 비쌌고 그만큼 시설도 좋았다. 교육방식도 굉장히 엄격했는데, 빌 게이츠는 이런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반항적인 행동 때문에 아동심리 치료까지 받았는데, 다행히 심리치료사로부터 마음의 안정을 얻고 학업에 복귀해 잘 적응했다. 특히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으라는 심리치료사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엄청난 양의 독서가로 변신했다. 스티브 잡스에게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었다면, 빌 게이츠에게는 마음의 병을 치료해준 심리치료사가 있었던 것이다.
_폴 앨런, 그리고 컴퓨터와 만나다
1968년 빌 게이츠의 인생은 한 번의 만남으로 뒤바뀐다. 레이크사이드 스쿨은 부모회에서 주최한 바자회의 수익금으로 컴퓨터 단말기를 들여놓았는데, 제너럴 일렉트릭(GE) 사의 ASR-33이라는 단말기였다. 컴퓨터가 매우 드물던 당시에 시애틀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는 환경을 최초로 구축한 곳이 레이크사이드 스쿨이었다. 이때만 해도 메인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컴퓨터가 외부에 있고, 이 컴퓨터와 연결한 터미널을 내부에 들여놓고 이용했다. 메인 프레임 컴퓨터와 터미널은 전화선으로 연결했는데 사용량에 따라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 방식이었다. 시간당 40달러나 되는 요금을 감당할 만한 학교의 재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빌 게이츠는 폴 앨런이라는 친구와 함께 이 컴퓨터 단말기 앞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들은 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평생 친구로 지내게 된다.
그런데 선생님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닦은 그들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과도한 컴퓨터 사용량 때문에 초기에 확보한 예산이 단 몇 주 만에 동난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는 컴퓨터 사용을 금지했는데, 다행히 이미 컴퓨터를 잘 다루게 된 이들에게는 컴퓨터를 쓸 방법이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실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몇 명의 친구들을 더 모아서 레이크사이드 프로그래밍 그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들은 메인 프레임 컴퓨터를 임대 및 판매하는 인근 회사에 찾아가서 프로그래밍을 하고 버그를 찾는 일을 하는 대신 컴퓨터를 마음껏 쓰게 해달라고 했고, 야간에는 써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다 이 회사가 망하자, 이번에는 폴 앨런의 아버지가 주선해서 시애틀에 있는 명문 대학인 워싱턴 주립대학교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실력이 뛰어나서, 고등학생들이지만 일거리를 주는 곳들이 생겨났다. 특히 인포메이션 서비스라는 회사가 만든 급여관리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빌 게이츠가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 3개월간 1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벌기도 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사업에 눈을 뜬 빌 게이츠는 정식으로 창업한다. 이때 아버지가 직접 창업을 도와주었는데, 그 회사가 ‘트래프-오-데이터’였다. 이 회사는 당시로서는 최신 마이크로프로세서였던 인텔의 8008(후에 8080이 나오고, 그 후속으로 개발된 8088이 IBM PC에 채택된다) CPU를 이용해서 교통상황을 점검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빌 게이츠는 이를 바탕으로 1973년 초에 미국 하원의회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외부에서 용역 받은 일로도 돈을 벌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관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한 빌 게이츠는 1973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둘러싸여 지내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감한다.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빌 게이츠는 그를 이어 마이크로소프트 CEO를 맡게 되는 스티브 발머를 만난다. 하버드 대학교에서도 학업보다 컴퓨터에 심취했던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1974년 여름에는 하니웰에서 같이 일을 했다.
빌 게이츠는 고등학교 시절 컴퓨터와 관련한 사업을 하면서도 하버드 대학교에 여유 있게 들어갈 만큼 공부도 잘했던 천재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벌레같이 공부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컴퓨터를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 때문에 학교라는 울타리는 그에게 족쇄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_하버드를 버리고 선택한 창업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알테어 8800은 <파퓰러 일렉트로닉스> 1975년 Vol 7, 1권 표지를 장식했다. 잡지에서 소개한 조립키트는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와 256바이트 RAM, 라이트와 스위치, 그리고 철제 케이스와 파워 서플라이를 합쳐서 397달러였고, 조립을 완료한 제품은 498달러였다.
가판대에서 이 잡지의 표지를 본 폴 앨런은 언제나 이야기하던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잡지를 사서 바로 빌 게이츠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운명이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닫고 대학 캠퍼스를 나와서 사업에 뛰어든다.
알테어 8800이 신나게 판매되고 있을 무렵, 에드 로버츠(알테어 8800을 생산하던 MITS 창업자)는 시애틀에 있는 한 회사에서 베이식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구매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 편지를 받았다. 당시 베이식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던 에드 로버츠는 회사에 전화도 해보고 주소로도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편지는 보스턴에 있던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보낸 것으로 그때까지 베이식을 개발한 건 아니었다. 다만 에드 로버츠가 베이식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알고 싶었는데, 여러 차례 사업을 통해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 말보다는 기업체의 공신력 있는 편지를 더 신뢰한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에드 로버츠가 그 편지를 읽어보게 하기 위해 머리를 썼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해프닝을 거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에드 로버츠와 접촉할 수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당돌해 보이긴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에드 로버츠는 한번 만들어서 가져와보라고 했다. 에드 로버츠가 일단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PDP-10 미니컴퓨터에 있는 8080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베이식 인터프리터(프로그램 언어를 한 줄씩 읽어 들여 실행하는 일종의 프로그램 번역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프로그램을 종이테이프에 천공해서 MITS가 있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까지 날아간 폴 앨런은 알테어 8800에서 자신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실행시켰지만, 화면에 ‘Altair Basic’이라는 표시만 남기고 작동을 멈췄다. 첫 번째 작업이 실패했지만 일단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에드 로버츠에게 심어주는 데에는 성공했고, 지속된 작업을 통해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여기서 바로 역사적인 기업 ‘마이크로소프트’가 탄생한다. 베이식을 시작으로 포트란 컴파일러와 디스크 운영체제인 MITS-DOS를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는 결국 MITS의 품을 떠나 워싱턴주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길을 걸어나간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가 베이식을 그토록 사랑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역사가 있었다.
컴퓨터광이었지만 ‘만드는 것’보다 ‘판매하는 것’에 먼저 눈을 뜬 빌 게이츠는 이렇게 판매처를 확보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 방식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앞날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인물 열전
에드 로버츠
인텔 8008 기반의 마크-8을 시초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세계 최초의 PC로 일컬어지는 알테어 8800은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에서 탄생했다. MITS 창업자인 에드 로버츠와 포레스트 밈스 3세는 미국 공군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다. 1969년 이들은 로켓을 제작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제작키트를 만들어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스탠 케이글과 로버트 잴러와 함께 MITS를 창업한다. MITS가 만든 로켓 제작키트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키트 제작사업에 흥미를 잃은 케이글과 밈스는 회사를 떠난다. 회사에 남은 에드 로버츠는 일렉트로닉 어레이라는 회사에서 전자계산기를 제작할 수 있는 LSI IC들을 발표하자, 이를 이용해 계산기를 조립하는 키트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완성된 제품이 MITS 816 계산기 키트였다.
이 키트는 1971년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의 커버를 장식하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어 1973년에는 MITS 1440 계산기를 선보였고, 점점 발전된 모델을 다른 잡지에도 소개했다. HP에 입사했던 스티브 워즈니악은 틈틈이 스티브 잡스와 아타리의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맡았던 원래 역할이 바로 이런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공학용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해서 PC로 이어진 것이다.
MITS는 주로 전자계산기 조립키트를 만들던 회사였기에, 당시 판매와 홍보 역할을 동시에 담당했던 <라디오 일렉트로닉스>나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와 같은 잡지사와 관계를 맺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파퓰러 일렉트로닉스> 편집장이었던 레스 솔로몬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CPU였던 인텔 8080을 MITS가 잘 다룬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완성된 제품(현대적 PC 개념)을 개발하도록 권유한다. 솔로몬은 박스까지 완전하게 제작된 전문적인 제품키트를 원했고, MITS는 이 권유를 받아들여서 알테어 8800을 설계하고 제작에 착수한다.
1976년에 개최된 알테어 컴퓨터 컨벤션에서 레스 솔로몬은 알테어라는 이름을 당시 열두 살이던 딸이 스타트렉 에피소드를 보면서 제안했다고 밝혔다. 당시 스타트렉 에피소드는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이 알테어 별을 향해 가는 내용이었는데, 미지의 신세계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선택한 이름이었다.
에드 로버츠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깊이 고심한 부분은 바로 CPU를 정하는 것이었다. 인텔의 4004나 8008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고민한 내셔널 반도체의 IMP-8이나 IMP-16은 외부 하드웨어를 요구했으며, 모토롤라의 6800은 아직도 개발 단계였다. 그래서 다소 위험 부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