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나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는데 이를 시대적 과제라 부른다. 그리고 그 과제를 해결하는 정신이 곧 시대적 정신이다. 이는 역사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은 역사적 과제, 역사적 정신이 된다.
나라가 무너져 갈 때, 이를 떠받쳐 지탱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요,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정신이며, 나라가 무너졌다면 이를 되찾아 세우는 것이야말로 시대적 과제요, 그것을 향해 나아간 정신이 곧 시대적 정신이다. 현대사에서 산업화나 민주화가 시대적 과제로 등장했듯이, 나라를 잃은 때에는 타협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아 독립국가를 세우고 완성하는 것이 시대·역사적 과제였다. 이를 위해 나선 사람들이 바로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추구되었다. 당시 말로 표현하면 독립운동 방략方略이라 일컫는다. 독립운동 방략은 독립전쟁을 비롯하여 의열투쟁·외교활동·문화활동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무장투쟁을 포함한 독립전쟁은 그 분야에 밝은 전문가가 필요한 영역이었다. 의병 출신이거나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 가운데 이론과 실무에 밝은 인재가 이끄는 것은 마땅하였다. 그런 인물에는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출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군에 참가한 인물, 그리고 중국의 군관학교와 강무당 출신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청사晴簑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첫 번째 인물에 속한다. 두 번째 인물로는 이청천과 김경천이 대표적이고, 세 번째 인물로는 이범석이 있다.
조성환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출신이다. 신민회에 들어 계몽운동에 이바지하고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확보한 뒤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에 기여하였다. 1930년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그는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을 때 군무부장을 맡았다. 즉 임시정부에서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음을 뜻한다. 군사 업무를 군령軍令과 군정軍政으로 나눈다면 이청천은 전자요, 조성환은 후자, 곧 군정을 총괄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광복군이나 독립군에 대해 말할 때, 대개 총사령관 이청천이나 2지대장 이범석을 들면서도, 정작 군무부장이던 조성환에 대해서는 그만큼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 또한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활약을 보인 인물 사이에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낮은 편이다.
이제 그의 삶의 자취를 찾고 뒤밟아 가면서 그 생애를 복원하고 의미를 확인해서 규명하는 길을 나서고자 한다.
2013년 9월
김 희 곤
글을 시작하며
1 무관학교에서 귀한 인연을 만나다
2 계몽운동을 시작하다
3 베이징에서 나라 안팎을 연결하다
4 신규식과 함께 신해혁명의 현장으로
5 국내로 끌려와 유배를 떠나다
6 「대동단결선언」과 「대한독립선언」
7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핵심 인물로
8 만주 독립군 부흥과 3부 통합을 위해
9 유일당운동을 벌이다
10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장이 되다
11 조성환의 두 부인과 아이들
12 한국광복군 만들기에 힘쓰다
13 군무부장으로서의 다양한 활동
14 고국으로 돌아오다
15 효창원에 영원히 잠든 군사전문가
16 글을 맺으며
조성환의 삶과 자취
참고문헌
청사 조성환
조성환은 1875년 7월 9일 서울 낙원동 124번지에서 조병희曺秉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창녕 조씨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출신으로, 고조부 조용진曺龍振은 장령掌令, 증조부 조석우曺錫雨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참봉을 지낸 부친 조병희는 조이승曺爾承의 양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성환은 서울 한복판에서 양반 가문을 잇는 장남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조성환은 청사晴簑라는 호를 썼다. 신민회新民會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벌이던 시절,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기고한 그의 자작시에 ‘청천사립晴天簑笠’이라는 표현이 있다. ‘맑은 날에 도롱이를 들고 갓을 쓴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데 맑은 날에 웬 도롱이와 갓이란 말인가? 이 말은 곧 닥쳐올 어려운 날을 미리 대비하는 다짐을 뜻한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고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한 뒤 그는 ‘조욱曺煜’이란 이름을 썼다. 나라를 잃고 다시 밝은 날, 광복의 날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본명인 ‘성환成煥’도 불꽃을 이룬다는 뜻으로 두 이름은 같은 의미를 담았다.
조성환의 가계도
25세가 되던 1900년 11월, 조성환은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는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외국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최고학부였다. 입학생도 대부분 칙임관勅任官의 자제들로 중심을 이루었으니 귀족학교였던 셈이다. 1기생은 1898년 7월에 시작하여 1년 6개월 동안 러시아식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00년 1월 19일 128명이 졸업시험을 통과하였다. 이들은 1월 24일 참위로 임명되어 육군무관학교는 장교 양성기관으로 틀을 다졌다. 조성환은 바로 1기생이 졸업하던 1900년에 입학하였다.
조성환은 육군무관학교에서 상반된 두 가지 일을 겪었다. 하나는 뒷날 나라가 무너진 뒤 함께 길을 헤쳐 나갈 귀한 인연을 만난 것이다. 학교에서 만난 동기생 신규식申圭植·서상팔徐相八, 교관이었던 노백린盧伯麟·김희선金羲善 등은 장차 독립운동 전선에서 얼굴을 맞대며 서로 힘을 보태는 동지로 살아가게 된다. 특히 1910년 나라가 무너진 뒤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으로 함께 가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의 현장을 둘러보고 힘을 모은 사람이 바로 조성환과 신규식이었는데, 이들의 만남은 이미 육군무관학교에서 시작된 것이다. 더구나 같은 무관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독립전쟁론에 중심축을 두고 군대를 길러 내거나 군사 업무를 주관하는 일을 맡았다.
무관학교에서 겪은 다른 한 가지 큰 충격은 그의 손으로 일어난 것이다. 졸업을 앞둔 1902년 1월 9일, 그는 무관학교 개혁 요구에 앞장서면서 자퇴 투쟁을 펼쳐 나갔다. 처음에 그는 학교와 군부 당국의 부패,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학교 운영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에 대한 개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거듭된 개혁 요구에도 학교 측이 꿈적도 하지 않자, 그는 동맹 퇴교라는 극단적 투쟁을 선택하였다. 조성환과 동기로 입학했던 신규식도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동맹휴학이 일어날 당시 몸이 아파 고향에 가 있던 덕분에 처벌을 피할 수 있었고, 1902년 7월 참위로 임관하게 된다.
동맹 퇴교 투쟁이 터지자마자, 조성환은 바로 붙잡혀 영창에 갇혔다. 당시 이 사건은 『황성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황성신문』 1902년 1월 20일
「무도이송武徒移送」
무관학도중武官學徒中 청원자퇴請願自退 수창자首唱者 조성환曹成煥은 중영창重營倉에 착수捉囚(필자)하고 기차其次 윤태운尹泰運 이창인李昌仁 심상면沈相冕 남상익南相翼 이인영李仁永 등等은 경영창輕營倉에 착수捉囚하얏난되 육군법원陸軍法院으로 이송移送 조율照律한다더라.
–『황성신문』 1902년 1월 20일
이 기사에서는 ‘청원자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스스로 무관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동맹 퇴학 투쟁이란 뜻이다. 또한 주동자가 조성환이란 사실과 함께 그가 주동자이기 때문에 남들과 달리 중영창에 갇혔다고 적고 있다. 2월 7일 그는 육군법원에서 역종신役終身, 즉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군법회의니 만큼 최고형에 달하는 형벌이었다. 정규환 등 나머지 12명도 법에 따라 등급에 차이를 두어 선고를 받았다. 그런 뒤 3월 2일 육군법원은 그에게 역役 15년을 최종 선고하여 처벌자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량을 선고하였다. 육군법원이 종신형에서 15년형으로 형량을 낮춘 것은 ‘지의旨意’를 참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성환이 주장하고 나선 동맹 퇴교 투쟁에 정당한 주장이 담겨 있었고 이것이 어느 정도 헤아려졌다는 뜻일 것이다.
보병 참위 임명장(1904년 6월 19일)
15년 유배형이 확정되자, 그는 유배지로 옮겨졌다가 2년이 지난 1904년 6월에 풀려났다. 『황성신문』 1904년 6월 20일자에 “부위 심상희 등 6인은 면관免官되고, 유배되었던 조성환 등 13인은 부직附職 수용需用”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것은 6월 19일자 칙령으로, 처벌 받은 학도 13명이 모두 복권되었고, 조성환도 보병 참위로 임관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다른 장교들과 달리 그에게는 차별 대우가 따랐다. 그는 홀로 보직을 받지 못했으며, 3년 뒤인 1907년 8월 1일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 그저 군적만 유지할 뿐이었다. 계급은 있어도 맡는 자리가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직책도 없던 초급장교 시절, 조성환은 상동교회尙洞敎會를 드나들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상동교회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청년지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전덕기는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자주독립·자유민권·자강개혁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그는 1902년 감리교선교회에서 전도사가 되었는데, 조성환과는 동갑내기였다.
조성환은 비록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이 교회를 드나들며 상동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대종교나 천도교 단체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도 여기에 참가한 것을 보면, 상동청년회는 기독교도로 한정된 모임이 아니라, 계몽운동을 벌이던 인물들이 모인 집단으로 보인다. 조성환은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조약(「박제순·하야시 강제합의」)’이 터지자 상소를 올려 외교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고, 전덕기도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였다.
『황성신문』(1906년 10월 5일)에 실린 조성환의 한시
1905년 조성환은 평양성당에서 세운 기명학교箕明學校의 교사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안중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안중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뒷날 안중근 의거가 터진 뒤 일제가 정리한 「이등공伊藤公 암살범 안응칠安應七(중근重根)」이란 조사 보고에는 안중근과 조성환과의 친교가 잘 나타난다. 안중근이 평양을 떠나기 전에 만난 인물은 기명학교 교사로 있던 조성환이었다. 안중근은 조성환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 이상설李相卨이 간도에서 문을 연 관전학교로 향했다. 이때 안중근은 조성환이 써준 첨서添書를 받아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안중근이 간도로 망명한 뒤 펼쳤던 자취는 조성환에게 받은 영향이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바로 이 무렵에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글이 발표되었다. 『황성신문』 1906년 10월 5일자 ‘사조詞藻’라는 문예란에 「청사자해晴簑自觧」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한시가 그것이다. 자신의 필명이자 호인 ‘청사晴簑’가 무슨 뜻인지를 스스로 풀이하는 시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청사는 ‘청천사립晴天簑笠’, 즉 ‘맑은 날에 도롱’이라는 뜻이다. 비가 올 때 덮어쓰는 도롱이를 맑은 태양 아래서 쓴다는 것으로 유비무환을 말하는 것이니, 나라가 무너지는 긴박한 순간에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사를 스스로 풀이하다晴簑自解
여름엔 베옷 겨울엔 갖옷이 각각 마땅하지만夏葛冬裘各適宜
갠 날 도롱이 삿갓도 서로 어울린다네晴天簑笠底相隨
강호의 본디 모습 원래 이와 같으니江湖本色元如此
비바람 앞날을 알기 어려울세라風雨前頭未可知
이슬 젖어 우거진 풀 언덕에 앉아 있으니露濕坐因芳草岸
밝은 달은 푸른 버들가지에 걸려 있구나月明掛在綠楊枝
사람들아 지금 소용이 없다고 웃지 마라傍人莫笑今無用
예로부터 처신에는 저절로 때가 있느니從古行藏自有時
조성환은 비바람이 몰아칠지도 모르는 앞날을 알기 어렵다면서, 지금 당장 소용이 없다고 웃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외교권을 잃고 나라가 무너져 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던 상황에서, 미리 준비하고 대처하자는 다짐과 권유를 담았다. 그러면서 마지막 연에서는 ‘행장行藏’, 곧 나아가고 머무는 처신은 때가 있다고도 썼다. 스스로가 초급장교이면서도 직책을 갖지 못하고 밖으로 나도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도 드러냈다. 이 작품에 대해 『황성신문』은 1906년 10월 5일자에 ‘스스로 좋은 재능을 지니고도 위양에 낚시를 드리우다自負利器垂釣渭陽’라는 평을 함께 실었다.
그 무렵 신민회가 비밀리에 조직되자 조성환은 여기에 참가하였다. 1907년 4월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신민회를 조직하고 나섰으므로,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조성환이 여기에 참가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신민회는 무너지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 자본을 모은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공화정체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독립협회 이후로 이어 온 정치운동의 맥을 잇기도 하였고, 전제군주사회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 나가려는 발전적인 성향을 읽을 수도 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일제가 헤이그특사를 구실로 삼아 광무황제(고종)를 퇴위시킨 뒤 융희황제(순종)를 억지로 즉위시키고서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을 빼앗았다. 그 조약의 부속 밀약으로 「한일협약규정실행에 관한 각서」라를 만들어 대한제국 군대를 정리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러시아를 물리친 뒤 대한제국을 빼앗기 위한 마지막 절차였다. 7월 31일 밤, 일제는 군대 해산에 대한 칙령을 반포하도록 강요하고 이튿날인 8월 1일 오전, 동대문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하며 저항하자, 그가 지휘하던 제1대대와 제2연대의 제1대대가 일어나 반일 전투에 나섰다. 남대문과 창의문 일대에서 시가전이 4시간 동안이나 펼쳐졌고, 기관총을 동원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저항은 원주진위대와 강화진위대를 비롯한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나타났다.
군대 해산 이후 장교들에 대한 면직을 담은 칙령이 발표되었다. 『황성신문』 1907년 9월 24일자에 따르면 9월 3일자로 발표된 육군 참위 316명 면관免官 내용에 조성환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리가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한 걸음 비켜나 있었다. 비록 장교이지만, 직위가 없던 그는 평양 기명학교 교사로서 교육구국운동에 힘쓰고 신민회에 참가하면서 언젠가는 직책을 맡고 나라에 쓰임을 받는 날을 기다렸던 것인데,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조성환은 군인들이 해산에 저항하여 시가전을 벌이다가 전사자와 부상자가 넘쳐나자, 이들을 위문하고 구휼하는 데 앞장섰다. 남대문 근처에 병원 문을 열었던 김필순이 부상자를 옮겨 치료에 나선 것도 이날이었다.
조성환은 정규환鄭圭煥·윤태훈尹泰勳·안준호安晙鎬 등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이들 가운데 정규환과 윤태훈은 무관학교 시절 동맹 자퇴 투쟁에 함께 나섰다가 처벌을 받은 동지였다. 이들이 찾은 병원은 세브란스병원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부상 장병들을 위로하면서, 의사에게 팔다리가 잘려 나간 중상자 8명에게 ‘인도고印度膏’로 의족·의수를 만들어 주는 데 필요한 금액이 얼마인지 물었다. 의사는 2,500환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들을 돕기 위해 신문에 구휼금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내기 위해 동지 세 사람들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구휼금 모금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구휼금수합소를 황성신문사·제국신문사·대한매일신보사에 두고 이를 『황성신문』에 1907년 9월 11일자부터 몇 달 동안 지속적으로 광고를 실어 모금운동을 펼쳐 나갔다. 기부금을 내는 인물 명단은 날마다 신문에 실렸다. 이들은 스스로도 1환씩 기부금을 내놓는 등 군대 해산에 맞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은 장병들을 돕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황성신문』 기부금 모집 광고
군대 해산 이후 나라 안에는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이 없어졌으며, 대한제국 영토는 자주권을 상실한 공간이 되었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국권을 지켜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나라를 빼앗길 것이라고 누구나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나라 밖에서 군사력을 기르는 길을 찾았고, 무관학교 출신인 조성환 또한 나라 밖에 기지를 세우고 군대를 길러내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연해주沿海州에 형성되고 있던 의병 조직을 눈여겨보고 1908년 1월 연해주로 가서 최고 실력자 최재형을 만났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개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신민회 차원의 선택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얼마 뒤 신민회가 나라 밖에 독립군기지 건설이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망명과 헌신의 길을 택한 사실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성환은 나라 밖으로 눈길을 돌리는 한편으로, 구국계몽운동에도 줄곧 몸담고 있었다. 1908년 8월에는 기호흥학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입회금과 월회비인 월연금月捐金 두 달 치로 20전을 납부했다. 특별기부금 납부자 명단을 보면 뒷날 그와 상하이에서 신해혁명 현장을 방문하게 되는 신규식이 특별기부금으로 1천 원을 약정하고 그 가운데 10원을 선납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성환은 나라가 무너진다는 사실이 불 보듯 확실해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시간을 갖고 실력을 길러 독립전쟁을 펼치는 장기적인 전략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의 생각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신민회도 그랬고, 그 계열이던 미주 지역의 공립협회共立協會도 러시아 한인사회를 조직화하기 위해 움직여 1909년 1월에 공립협회(2월에 ‘국민회’로 개칭) 블라디보스토크 지회를 설립하였다.
조성환이 신민회 차원에서 망명길에 오른 사실은 1910년 이후 안창호와 주고받은 서신과 193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던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韓民』에서 조성환을 소개하면서, “신민회의 사명을 지고 북경에 와서 근거를 정하고 있다가”라는 구절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성환이 망명길에 나선 때는 1909년 2월이었다. 그는 이보다 한 달 앞선 1월에 크라스키노(연추煙秋)를 다녀온 뒤 서울에서 신민회 간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앞으로 베이징에 터를 잡고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고 나라 안팎을 연결하는 창구 구실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런 논의는 서울 사직동에 있던 이종호의 집에서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노백린·이갑·유동열·정운복·김희선·안창호·양기탁 등이 참석하였다. 평안남도 경찰부장이 1910년 10월 25일에 전보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조성환에게 송별연을 열어 주었고, 이갑·유동열·이종호는 조성환에게 여비로 500원을 주었다고 알려진다.
정리하면 신민회가 나라 밖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연계시킬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베이징을 지목하고 이곳을 조성환에게 맡겼고, 조성환이 스스로 이 일을 맡고 나선 것이다. 베이징은 대한제국이 무너지기 전까지 세계정세를 확인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창구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게다가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라, 상하이上海나 난징南京보다 청국 수도인 베이징(당시는 연경燕京)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대한제국을 지켜낼 수 있도록 외교 활동을 벌일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없는 셈이었다. 미국은 이미 일본과 손을 잡은 형편이고, 러시아는 일본에 패하여 한 발 물러선 형편이었다. 그러니 비록 10여 년 전 청일전쟁에서 패하여 뒤로 물러선 청국이지만, 그래도 다시 외교 관계를 갖고 길을 찾을 수 있는 상대는 청국이라 여길 만했다. 조성환이 베이징을 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고, 그곳을 정보 수집 창구로 삼으면서, 한국 청년들에게 군사 교육을 도모할 수 있는 알맞은 곳으로 여긴 것이다.
조성환의 명함
조욱(曹煜) 호 청사(晴蓑), 베이징 숭문문내
팔보호동 좌1구 제6호
“나의 사랑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