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군표
1954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오랜 시간 공무원으로 살았다.
어쩌면 뒤늦었다 할 나이 쉰이 훌쩍 넘어
역사와 문학의 재미에 빠져 글을 쓰기 시작했다.
『효옥』은 그의 첫 소설이다.
일러두기
• 이 소설은 사육신 사건과 세조, 예종 임금 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였지만 대부분 이야기들은 모두 허구요, 상상이다.
• 인물들의 대사는 가급적 현대 우리 대화체를 따름으로 무엇보다 가독성을 높였다.
난신亂臣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노비로 주고……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1456년 9월 7일
먼저 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1453년 계유년 음력 10월 10일은 양력으로 11월 초였다. 손석풍孫石風이 싸늘한 때였다. 인왕산 숲속에도 붉어진 나뭇잎들이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
길일로 받아놓은 세 날 중 오늘이 마지막날이었다. 더이상 미룰 수 없었다. 거미치미는 욕심도 내려놓기 어렵지만 기실 수양은 양 갈래 생각중에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주공周公처럼 어린 조카인 왕을 도와서 성군으로 만들어드리는 것이 백번 도리인데 그다음이 전혀 가늠되질 않았다. 수양 스스로 주공과 같이 신심을 다해 어린 조카인 왕을 보좌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어린 왕이 철이 나면 왕으로서의 권한도 행사할 터였다. 또 세자가 책봉되고 나면 수양의 처지는 거추장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거추장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왕과 신료 입장에서는 수양대군이 언제라도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수양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거칠고 야심만만한 수양 스스로도 권력을 갖고 정사를 하면서 대신들과 매끄러운 관계로 지내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종친과 다름없이 얌전히 뒤로 물러나 밥만 먹고 살 성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양녕대군처럼 술이나 마시고 여자들이나 쫓아다니며 미친 척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뒤로 물러나 있더라도 의심을 받을 종친이 수양이었다. 형님인 선왕 문종이 수양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을 그 자신도 모르지 않은 바였다. 문종이 신료들에게 아들 단종을 부탁하는 고명에서조차 제외해버리지 않았던가? 게다가 황보인, 김종서같이 늙은 신하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수양 자신을 견제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들이 안평을 가까이하고 있는 것도 마뜩잖았다.
안평은 수양과 어쩔 수 없이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학식이 높아 선비들이 많이 따랐다. 무엇보다 임금자리를 노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컸다.
애초에 수양이 설 자리는 없었다. 어린 조카의 주공이 되려는 그답지 않은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런저런 전후를 따져보면 순수하게 좋은 생각만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힘없는 종친의 하나로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었다. 설사 그러고 있더라도 안평이 먼저 죽이려 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인 그 자체였던 수양에 비해 안평은 타고난 예술가이며 시와 그림에 능했다. 송설체를 완성한 조맹부의 글씨를 능가한다며 중국의 사신들이 오면 안평의 글씨를 받아 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세종 임금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 글씨도 안평대군이 쓰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안평의 재주를 따라갈 수 없으니 수양은 그가 더욱 미울 수밖에 없었다.
안평대군의 집은 자하문 밖 수성동水聲洞에 있었다. 그 이름을 세종께서 비해당匪解堂이라고 지어주었다. 『시경詩經』의 증민烝民편에 나오는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똑똑한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큰아들 문종과 원손 단종을 잘 보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안평은 이곳에서 시서화詩書畵에 빠져든 채 지냈다.
세상이 어지러워질 조짐이 보이자 힘이 커진 두 대군 사이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문종 승하 이후에는 신료들은 물론 조정 안팎, 세종의 후궁과 환관, 시녀 들까지 수양을 따르는 쪽과 안평을 따르는 쪽으로 세력이 형성되었다.
당시 정무를 이끌던 문신들이나 선비들은 수양대군을 제지할 대군으로 욕심 없는 안평을 택하였다. 그들이 그 시대의 주류였다. 수양이 그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하였지만 한명회가 수양을 달래었다.
“그까짓 바람을 노래하고 달을 희롱하는 선비놈들이야 쇠몽둥이 한번 번쩍하면 그냥 땅바닥에 누울 자들이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대신 무사들을 포섭할 방법을 제시하였다.
“활쏘기 연습을 명분으로 모화관과 훈련원에 나가서 무사들과 활쏘기를 하고 술과 안주를 많이 먹이면 됩니다.”
무사들뿐만 아니었다. 선왕의 스승이던 좌필선 정인지, 고명을 받은 신하 신숙주까지 그의 편에 서 있었다. 늙은 정인지는 하관이 뾰족한 만치 세상 흐름을 보는 눈치가 빨랐다. 순군巡軍의 지휘관인 홍달손도 수양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임금을 호위하는 내금위 무사 봉석주, 양정, 유하까지도 포섭해두었다. 심지어는 임금의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비서장 도승지를 하다 이조참판에 오른 강맹경까지 수양에게 붙었다. 임금의 내시 중에 제일 가까이 있는 전균, 엄자치, 시녀 중에 춘월이, 소근이, 충개까지 수양 쪽에 누웠다.
종친들은 대체로 수양의 편이었다. 안평이나 그와 가까운 대신들에게 힘이 실릴라치면 저들의 설 땅이 없음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큰어른 격인 양녕대군, 세종 후궁의 아들인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공, 밀성군 이침 등이 수양대군과 가까웠다.
단종의 측근 종친은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 혜빈 양씨의 소생인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이었다. 혜빈 양씨는 단종에게 스스로 젖을 먹여 키운 유모이자 할머니였고 그의 아들들은 단종과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이었다.
그러니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실질적 힘은 수양에게 쏠려 있었다. 세상 인심은 수양이 곧 행동에 나서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한명회가 이런 수양에게 불을 질렀다.
“먼저 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는 은밀히 술사 기백氣白을 추천하였다.
“안평대군이 거느리는 지화池和보다 도력이 더 높은 고수올시다. 그 기백이 말하길 대군 앞에 이미 보위가 놓여 있으니 앉으면 된다 하더이다.”
믿을 것 없는 시대였다. 불교까지 금하였으니 궁에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달 보고 내일을 점치고 별 보고 소원을 빌었다. 내로라하는 집안들은 대소사를 점치는 술사나 무당을 따로 거느리고 있었다.
안평이 지화라는 용한 점쟁이를 데리고 있다 해서 신경이 쓰였던 수양이 그보다 더 도력이 높다는 기백을 한번 보자 하였다. 기백은 애꾸눈에다 꾀죄죄한 두루마기를 걸친 왜소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한쪽뿐인 눈이 더 형형하였다. 어린 조카의 임금자리를 넘보는 수양의 야욕을 꿰뚫어 읽고 있는 듯 슬쩍 비웃음을 띤 것 같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사랑채 보료에 깊숙이 기댄 수양이 그를 달아보았다.
“두 눈 다 가지고도 세상 일 보기 어려운데 어찌 한 눈으로 앞날을 촌탁忖度할까?”
기백이 감히 외눈을 지릅뜨고 수양을 한번 찌르듯이 쳐다보았다.
“대군마마, 일목요연이란 말을 들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먼 날을 보는 데는 차라리 외눈이 낫다 싶습니다만.”
희번덕거리는 외눈이 한명회의 모들뜬 눈과 닮아 있었다. 눈동자에 귀기鬼氣가 서린 것도 비슷하였다. ‘큰일을 치르는 데는 차라리 이런 자들이 낫다.’ 그를 거둔 이유였다.
내게 오는 사람은 이제부터 다 내 편이다
그러한 술사 기백이 여러 날 삼각산에 올라 치성을 드리고 받은 날이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제사상에 올려주어야 하는 날이니 하늘에 뜻을 묻고 땅의 기운을 얻었다고 했다. 그 세 날 중 마지막날이 음력 10월 초열흘이었다.
그날은 마침 누이 경혜공주의 생일이었다. 외로운 임금은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의 생일에는 항상 매형의 영양위궁에 가서 저녁을 먹고 정을 나누었다.
올해도 이조참판이 된 강맹경으로 하여금 그날 임금이 영양위궁으로 행차하리라는 확인을 받고 거삿날을 잡아둔 터였다. 내금위는 실세 봉석주를 비롯해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데다가 그날 임금을 따라붙는 내금위 병사가 몇 명 되지 않으니 여차하면 공격하기도 쉬웠다.
문제는 역모를 저지르다 실패하면 모두 죽어야 한다는 두려움이었다. 무엇보다 역모를 저지를 명분이 약했다. 겨우 만들어둔 것이 ‘어린 임금이 유충하여 정사를 잘 못하니 늙은 신하들이 황표정사黃標政事로 인사를 전횡한다’ 정도였다.
황표정사는 문종 임금의 유언에 따라 의정부 삼정승에게 부여한 인사 결재 체제의 하나였다. 세종 임금 때도 의정부 서사제를 택하여 모든 정책은 삼정승의 추인을 받도록 하였다. 육조직계제에서는 판서나 참판만 내 사람으로 만들면 임금의 눈을 가리기는 더 쉬웠다. 의정부 서사제하에서는 삼정승의 추인을 받는 게 큰 걸림돌이었다. 인사가 만사라, 인사가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트집을 잡았다.
안평대군과 삼공육경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여야 하는데 특별히 역모로 볼 증좌를 잡지 못한 점도 문제였다. 역모를 꾸미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알이꾼*들이 끊임없이 안평을 감시하였지만 하루종일 붓글씨를 쓰거나 시나 읊어대는 모임을 하거나 사냥 다니거나 담담정에서 뱃놀이나 즐기고 있었다.
* 남의 사정이나 비밀 따위를 몰래 염탐하는 사람.
그렇다고 절호의 날짜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이날 수양궁에는 활쏘기 대회가 열렸다. 소도 잡고 술도 나누는데 활 잘 쏘는 궁수들뿐만 아니라 칼 좀 쓴다는 검객, 철퇴 부리는 자, 창 쓰는 자들도 다 불러들였다.
새벽부터 한명회, 권람은 물론이고 홍달손, 강곤, 홍윤성, 임자번, 최윤, 안경손, 홍순로, 민발 등 수양의 수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명색이 잔칫날 같은 활쏘기 대회인데 흥겹기보다는 무거운 긴장감이 수양궁에 가득하였다.
수양대군이 역란의 뜻을 밝히자 얼굴이 새파래진 송석손, 유형, 민발이 나서서 말렸다.
“먼저 임금의 윤허를 받아야 합니다.”
수양이 잠시 주춤하려는 찰나, 한명회가 독려하였다.
“길 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합니다.”
홍윤성까지 가세하여 수양을 재촉하자 드디어 수양이 벌떡 일어섰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생살부生殺簿를 집행하고 역모라고 우겨서 추인받으면 된다.”
수양이 말리는 문객 송석상이나 민발 등을 발로 걷어차고 일어났다. 윤씨부인이 옷 속에 갑옷을 입혀주었다.
돈의문 밖 김종서부터 습격하였다. 수양이 노둣돌도 없이 말을 타고 앞섰다. 충복 임어을운과 양정 그리고 무사 몇 명이 따라나섰다. 김종서는 대감들 중 유일하게 사대문 밖에 살 만큼 곧고 충직한 당대의 신하였다. 별명이 큰 호랑이인 이 절재 대감이야말로 유일하게 수양 일파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수양대군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한훤寒喧의 수인사는 채 하지도 못했다. 김종서는 달빛에 기대어 수양이 내어준 편지를 읽었다. 그 충직한 머리를 임어을운이 배래기에서 쇠뭉치를 꺼내 내리치고 양정이 칼로 다시 베었다. 양정의 칼이 김종서의 등에 꽂히는 것을 확인한 뒤 수양이 몸을 날려 말에 올랐다.
대호 김종서가 쓰러지고 난 이후에 도성에서 수양대군을 막을 세력은 없었다. 순군의 지휘관 홍달손이 수양의 수하로 들어와 있고 내금위장인 봉석주까지 통하여 있으니 임금이 어떤 어명을 내리더라도 그들은 수양의 편이었고, 수양이 먼저 손을 쓸 수도 있는 참이었다.
스산한 음력 10월 초열흘의 돈의문 앞을 달빛에 기대어 말 달리는 수양대군은 이제 거칠 바가 없었다. 수양이 무장한 양정과 임어을운을 데리고 영양위궁에 칼을 찬 채로 들어갔다. 어린 임금이 울면서 수양에게 매달렸다. 1년을 넘게 준비해 온 생살부가 한명회의 품안에 있었다. 온갖 괄시를 받으며 살아온 한명회가 드디어 제 마음대로 세상을 호령하고 그가 모양을 꾸미는 대로 사람의 생사가 갈리는 세상을 바로 앞에 두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부터 그 잘난 삼공육경들의 생사여탈권이 자기 손바닥에 있으니 차가운 겨울바람 부는 광화문 앞 어둠 속 말 위에 앉아서 그가 흘리는 웃음에는 귀기마저 서려 있었다. 말 그대로 저승사자였다. 스산한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무사들의 발소리만이 어지러웠다. 생살부에 이름을 올린 영의정 황보인부터 삼공육경과 신료들이 한명회의 손짓 하나에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성승成勝과 성삼문成三問도 생살부에 올랐다 지워졌다.
“성삼문이 안평의 당여가 확실한가?”
그를 아까워하는 수양이 묻자 한명회가 특유의 모들뜬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답했다.
“안평의 편은 아닙니다만, 임금의 편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편이 아닌 자는 하루 속히 죽어야 합니다.”
수양은 성삼문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성승은 당대의 무장이요, 성삼문도 언젠가 우리 편으로 끌어오면 될 일이니 일단 지우시오.”
삶과 죽음이 쉽게도 갈렸다. 성삼문 부자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한양 도성이 피로 물들었다. 안평대군은 준수방俊秀坊*으로 흘러내려오는 수성동 개울물 길의 상류 꼭대기에 비해당을 짓고 살았다. 맑은 개울물 소리와 산새 소리가 세상의 시끄러움을 막아주고 있었다. 이 맑은 물이 경회루 연못을 채우고 청계천까지 흘러갔다.
* 태조 이성계와 세종 임금이 태어난 궁이 있던 곳.
이곳에서 꿈꾸었던 별유천지의 비경을 안견이 그려내었다. 그렇게 <몽유도원도>라는 걸작이 탄생하였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마을을 감싼 복사꽃이나 강과 폭포수, 기암절벽은 말 그대로 신선이 사는 몽유도원이었다.
비해당 위쪽에는 무계정사를 지었는데 두 건물 모두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삼각산 보현봉과 문수봉 쪽을 향해 있었다. 궁궐 부근에 살면서 어찌하든 정사에 관여하려던 수양의 삶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비해당과 무계정사가 안평대군이 역심을 품었던 증거로 제시되었다. 맹인 지화가 “보현봉 아래 명당에서 만대에 왕이 일어난다”고 부추겨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얘기를 했다 고하였다.
하나의 죄목이 더 붙었다. 태종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일찍 죽자 안평대군이 양자가 되어 이 제사를 모셨다. 성녕대군의 부인은 천하의 절색이라 소문나 있었는데 그 양모와 통정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많은 재주를 내려놓고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안평安平, 그 이름과는 너무도 다른 운명이었다.
정인지와 신숙주는 본래 안평과 가까이 지냈다. 〈몽유도원도〉의 발문은 정인지가 제일 먼저 썼고 신숙주도 이름을 남겼다. 정난 뒤에 안평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할 때 수양의 맘에 들고자 그들이 앞장을 섰다. 수양의 앙가발이들이 정인지와 신숙주가 안평의 당여라고 소리를 높였지만 수양은 개의치 않았다.
“대해불양일수大海不讓一水라 하지 않던가. 내게 오는 사람은 이제부터 다 내 편이다.”
그렇게 정인지와 신숙주는 수양의 최대 공신이 되었다.
안평도 죽고 그의 점술사 지화도 죽었다. 바둑 친구 이승손까지 파직되었다. 대신 수양대군이 스스로 영의정 겸 이조판서, 병조판서, 서운관사, 내외병마도통사가 되어 국가통치권, 군권, 병권, 인사권까지 모든 권력을 틀어쥐었다. 면류관만 쓰지 않았지 수양대군이 진짜배기 임금이었다.
성씨들은 절의가 대단해
잘 꺾이지 않는다 합디다
궁중의 혼사는 곧 정치였다. 권력의 확장과 보존, 다른 권력과의 연대와 견제가 철저한 계산 아래 이루어졌다. 혼인을 통해 한편으로 묶이기도 하고 더 돈독해지기도 하고, 한편이 되어 다른 편을 제어하기를 도모하였다.
아직 왕비도 맞아들이지 못한 어린 임금 단종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졌으나 수양은 친구 송현수의 딸을 이미 점찍어둔 뒤였다.
궁중에 바치는 공물을 취급하는 풍저창의 종6품, 벼슬이라고 할 것도 없는 한미한 집안의 말단 관리가 송현수였다. 수양과는 친구처럼 내왕하는 사이인데 극히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어서 걱정거리를 만들 위인이 아니기도 한데다가 수양을 잘 따르던 막냇동생 영응대군의 처남이기도 하였다.
“자네 딸을 왕비로 간택할 터이니 그리 알고 계시게.”
송현수가 왕의 장인인 국구가 되면 정1품, 돈녕부영사에 오르고, 부인이 왕의 장모인 부부인으로 정경부인이 되는 셈이었다. 정1품에게 지급되는 전답이 110결이고 쌀, 현미, 콩, 좁쌀, 밀, 삼베, 명주가 계절마다 녹봉으로 내려진다. 그러하나 그 즉시 송현수의 집안은 왕의 처가, 외척 집안이 되어 경계의 대상에 놓인다.
이는 영광이기도 했으나 닥쳐올 환난이 눈앞에 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태종 이방원은 그가 정권을 잡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였던 부인 원경왕후의 동생 민무구, 민무질을 죽여버렸다. 민씨 집안이 멸문당할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세자였던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까지 죽여버렸다. 아버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이 계모의 꼬임 때문이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이복동생인 세자와 형제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왕이 된 이방원이 처족을 경계하는 심사가 그 정도였다.
그런데 불원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지도 모르는 어린 단종 임금의 장인이 되라고 하다니, 그것도 단종의 숙부이자 당대의 권력자이며 곧 단종에 이어 임금이 될지도 모르는 영의정 수양대군의 말이라니. 소심한 송현수는 진심으로 국구의 자리를 마다하였다.
“이를 데 없는 광영이오나 그야말로 어리석고 한미한 집안이올시다. 미숙한 딸을 왕빗감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을 받들기 어렵나이다.”
수양은 송현수가 사양하는 것을 겸양지사로 받아들이고 국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하의 자세임을 강조하였다. 송현수는 큰마음 먹고 용기를 내어 수양대군에게 다시 애원하였다.
“훗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인을 역적으로 몰지 마옵소서. 훗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의 딸을 과부로 만들지 마옵소서. 대신 영상대군께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양 눈가에 눈물까지 어린 송현수가 수양의 약속을 받고 물러나왔다. 이는 어디까지나 송현수의 바람일 뿐이었다. 수양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는 두 아들의 혼사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나라의 입김이 대단할 적이었다. 명나라의 승인이 없으면 임금도 될 수 없었다. 그걸 잘 아는 수양이기에 먼 곳 명나라에 사신으로 직접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조정의 명나라통은 좌찬성 한확 대감이었다. 그의 누이가 둘이나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책봉된 덕분에 한확은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벼슬까지 얻었다.
수양이 첫째 아들 도원군의 배필로 한확의 막내딸을 점찍었다. 수양은 절색 며느리를 얻는 데 더하여 명나라와도 원만해질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확 역시 세자의 장인으로 국구가 되는 일을 마다할 리 없었다.
수양의 둘째 아들 황의 배필로 거론되는 아이가 성삼문의 딸 효옥이었다. 성삼문은 중시에서 수석을 한데다 문장이 뛰어난 재사였지만 항상 겸손하고 명랑해서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였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에서 신숙주와 함께 한글 창제에 매진하기도 했던 그였다. 둘째 며느리는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서 제일 명망이 높은 성승의 집안에서 데려오면 좋을 듯하였다. 성승이 오위도총관이요, 아들 성삼문이 집현전 학사에 승지고, 다른 아들들 삼고, 삼빙, 삼성이 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명문 집안이었다. 똑 부러지게 제 편이 되지 않으려 하니 사돈을 맺으면 자연스럽게 한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수양에게는 컸다.
“듣자 하니 성씨들은 절의가 대단해 잘 꺾이지 않는다 합디다.”
윤씨부인이 걱정하였다. 한명회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성승도 그렇지만 성삼문은 고집을 쉽게 꺾을 자가 아닙니다. 안 그래도 계유정난 이후에 다들 하지 못해 난리가 난 공신명부에 대군께서 이름도 올려주었는데도 성삼문 스스로가 ‘소인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공신이 될 수 없습니다. 공신록에서 저를 지워주시옵소서’ 하고 상소를 내었지 않았습니까.”
틈만 나면 제 딸을 수양의 며느리로 밀어넣으려 한 한명회의 간계였다.
“기왕에 공신록에 오른 이름까지 빼달라고 그 난리를 치다니 허허 참……”
그럴수록 성삼문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음이 간절해지는 수양이었다. 그런 수양의 심사를 눈치챈 윤씨부인이 그의 의중을 이리 잘랐다.
“안 그래도 며칠 있다가 정경부인들 잔치가 있는데 그때 딸, 손녀들을 데려오라 해서 얼굴을 한번 보겠습니다.”
멀찌감치 기백이 관상을 보기로 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많아 장안은 온통 상갓집이니 잔치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역적 집안이 되어 장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곡소리만 높은데 새로이 공신 된 사람들은 취라치, 태평소 앞세우고 벽제* 소리 드높이면서 행차하였다.
* 지위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벼슬아치의 집에서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이 일반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는 일을 이르던 말.
일등공신에게 땅이 60만 평, 노비 스물다섯 명, 구사丘史 일곱 명, 반당伴倘* 열 명이 상으로 내려졌다. 이때 공신들에게 나누어준 공신전만 어림해도 6,400결, 2천만 평이 넘었다. 나라의 땅이 모두 공신들의 땅이 되었다.
* 왕가 공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리던 병졸.
성승은 잔치가 열린다는 소식에 근심이 깊었다. 성승과 가깝던 허후가 속마음을 숨기지 못해 고초를 겪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계유정난의 성공과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술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무용담을 나누고 있을 때 허후는 한쪽 구석에서 홀로 웃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다. 찬성贊成으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수양의 제안도 물리친 뒤였다. 연회에서 춤을 추며 분위기를 돋우는 이계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이계전은 수양에게 온갖 아부를 떨어 병조판서가 된 인물이었다. 할아버지가 고려 말 사림의 존경받던 이색이요, 어머니는 역시 고려 말 충절로 일컬어지던 권근의 딸이었으니 유명한 충절 집안의 사람이었다.
선비들이 이계전을 비난하였다. 충절의 명문 집안에서 이런 자가 나왔으니 비난의 목소리는 더 크고 셌다. 이계전이 수양에게 일러바쳤다.
“이렇게 기쁜 날 좌참찬 허후 대감께서는 왜 저렇게 찡그리고 앉아 있는 겁니까?”
이계전뿐만 아니라 수양 앞에서 손뼉을 치고 떠들고 웃으며 수양의 비위를 맞추던 정인지, 한확, 박종우 역시 허후의 기색을 못마땅해했다. 그때 운성위 박종우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다들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데 허대감은 왜 얼굴을 그리 찡그리고 있소?”
허후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점잖게 답하였다.
“조부의 기일이기 때문이오.”
잔치 분위기가 일순 어색해졌다. 기분이 언짢아진 수양이 다시 다그쳐 묻자 허후가 눈을 감고 묵연히 있더니 무언가 각오한 듯 천천히 입을 떼었다.
“도대체 황보인, 김종서가 무슨 죄가 있어 머리를 깨어 죽이고 목을 시장 바닥에 매달았단 말이오.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 자손들까지 다 죽인단 말이오. 김종서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황보인은 내 죽마고우로 평생을 교유하며 그 인품을 아는데 절대 반역을 도모할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정난을 하례하는 이런 연회도 중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싶소.”
서슬이 퍼런 질타였다.
“대감이 술을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는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구랴.”
수양은 얼굴이 벌게져 허후에게 소리쳤다. 허후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이 깐깐하게 대답하였다.
“그렇소이다. 조정의 원로들이 모두 죽었는데 어찌 술 마시고 고기 먹고 풍악 소리에 기뻐하겠소.”
늙은 허후의 붉어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는 수양대군뿐만 아니라 잔치에 참석한 자들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이 고얀 사람 같으니……”
수양은 역정을 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허후가 일어나 눈물을 훔치며 그 자리를 비켰다.
수양뿐만 아니라 공신들 역시 바른말하는 허후를 두고 볼 수 없었다. 허후부터 죽여야 정난의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 앞설 정도였다. 결국 허후는 거제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교형을 당하고 말았다.
소녀가 효옥인 걸 어찌 아십니까
걱정하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어머니와 달리 효옥은 수양궁에서 열리는 잔치에 간다고 들떠 있었다. 몇 벌 안 되지만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보며 부산을 떨었다. 어떤 옷을 입든 눈에 띄게 이쁜 아이였다.
어쩌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수양의 둘째 아들 평보 이황이 윤씨부인에게 졸랐다.
“어머니, 저도 제 배필을 미리 보게 해주세요.”
왕족인 대군 가문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있지만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왕가의 법도가 있는데 그건 아니 될 말이다. 내일 활터에서 활이나 쏘거라.”
남편 수양이 임금이 될 것이다. 그리되어도 세자 자리는 황의 형 도원군 몫이었다. 세자가 될 수 없는 대군은 다른 일반 양반보다 사는 것이 조심스러워야 했다. 애초에 정치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 그걸 깨뜨리고 영의정이 되어 정치 전면에 나선 게 수양이었다. 윤씨부인은 둘째 아들이 아비 수양과는 달리 정사의 뒤에 숨어 조용히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양녕대군처럼 파락호로 사느니 착하고 아름다운 며느리와 소소하게 살아가는 맛이라도 즐겼으면 좋겠다 싶었다.
잔치에 따라나선 효옥은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예뻤다. 그 나이또래 여식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테이지만 특히 맑은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는 사람을 쉬이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얌전하려고 애썼으나 온몸에서 특유의 발랄함이 묻어났다. 멀찍이서 바라보던 윤씨부인은 입에 웃음을 머금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가 나오게 하는 좋은 인상을 가진 아이로구나……’
잔치의 중심은 당연히 이날의 주재자 윤씨부인이었다. 어린 임금에게 아직 왕후도 없을 때이니 지금 궁 안팎, 내외명부를 통틀어 내정의 최고 계급은 정경부인 윤씨였다. 영의정이자 대군의 부인이었다. 윤씨부인이 입은 원삼과 머리 모양의 격은 왕비에 못지않았다. 왕비가 하는 대수머리는 아니었지만 가체 높이가 그에 못지않은 어여머리였다. 왕비가 입는 적의는 아니었지만 적의나 다름없는 녹원삼을 입었다. 용무늬 금박만 입히면 왕후의 홍원삼이었다.
잔치에 참가한 사람들은 윤씨부인의 복식이 과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감히 누구도 일언반구 하지 못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하거나 말없이 질투하거나 이제 곧 왕후가 될 윤씨부인에게 아부하기에 바빴다. 어여머리에 꽂힌 백옥 떨잠과 나비형 은제 떨잠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우아하게 흔들렸다.
잔칫상들을 한 바퀴 옮겨다니던 윤씨부인이 마침내 성삼문의 어머니 미치와 아내 차산, 딸 효옥이 있는 상으로 왔다. 머리 앞부분에 꽂힌 선봉잠이 햇빛에 번쩍 빛났다. 효옥은 그저 윤씨부인의 화려한 머리 모양과 거기에 꽂힌 앞꽂이, 뒤꽂이, 떨잠과 처음 보는 옷차림 구경에 정신없었다. 이 어린 여자아이가 아주 솔직하게도 말을 하는데 누구도 말릴 새가 없었다.
“머리도 멋있고 비녀도 아름다우나 특히 떨잠이 너무 예뻐요. 제가 좀 만져봐도 될까요?”
미치와 차산이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절하고는 혀를 차며 효옥을 말렸다. 윤씨부인은 웃음으로 걱정을 덜게 하였다.
“효옥이 네가 활도 잘 쏘고 바둑도 잘 둔다 들었다. 계집이 하기 어려운 일인데 대단하구나.”
미치와 차산이 책을 잡힌 것 같아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효옥은 낭랑하게 이리 대답하였다.
“활을 배워두면 몸에도 좋고 쓰임새도 요긴하게 있을 것 같았사옵니다. 바둑은 나중에 지아비 심심하다 할 적에 상대가 되어주면 즐겁지 아니할까 하여 조금 흉내나 내볼 정도는 되옵니다. 할아버지께 배웠는데 둘 다 잘하지는 못하옵니다.”
‘그래. 황이 대군으로 정치도 못하고 뒷방에서 지내야 할 때는 네가 같이 놀아줄 수도 있겠구나.’
사람을 끄는 눈동자 때문인지 해맑은 그의 천성 때문인지 윤씨부인은 효옥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명문 집안의 자손인데다 밝고 예쁘고 똑똑한 아이였다. 마음속으로 이미 둘째 며느리로 반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