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리비Jon Levy
존 리비는 영향력, 인간관계 그리고 의사결정에 대한 연구로 가장 많이 알려진 행동과학자이다. 그는 삼성,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AB 인베브 등 Fortune 500대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기업을 클라이언트로 두고 있으며, 기업이 마케팅, 세일즈, 소비자 참여 및 기업문화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10여 년 전, 존 리비는 노벨상 수상자, 올림픽 메달리스트, 할리우드 스타부터 기업가, 사업가, 예술가, 음악가 등 업계 리더들을 초대해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비밀만찬 ‘인플루언서 디너The Influencers Dinner’를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함께 요리를 하며 식사를 준비하지만 식사 전까지는 서로의 직업이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식사가 준비된 후 자리에 앉고 나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할 수 있다. 인플루언서 디너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커뮤니티로 발전했고, 현재 수천 명의 회원을 가진 영향력있는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존 리비는 세계 7개 대륙을 횡단하고, F1 그랑프리, 아트 바젤, 버닝 맨페스티벌, 스페인의 황소 달리기 축제 등 세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행사에 참석하며 도전을 즐기고 있다. 현재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 @jonlevytlb
옮긴이최소영
성균관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불문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코리아헤럴드 번역센터, 잉글리시고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책의 도시 파주에서 프리랜서로 번역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크러쉬 잇! SNS로 열정을 돈으로 바꿔라》 《채리티: 워터》 《ACTION!》 등 자기계발, 실용, 역사, 철학, 심리, 소설, 아동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30여 권의 책을 옮겼다.
블로그 http://aninet.kr
옮긴이우태영
뉴욕대학교 재학 중 CNN 앵커 앤더슨 쿠퍼, 필 실러 애플 수석부사장, 빌 테일러 패스트컴퍼니 공동창업자, 김용 세계은행 총재, 지영석 엘스비어 회장, 오준 전 UN 대사 등 글로벌 리더들을 다수 섭외해 다양한 강연을 기획했다. 세계적인 마케터이자 기업가 게리 바이너척을 만난 후 그의 책 《크러싱 잇! SNS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번역 출간했고,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스캇 해리슨의 혁신적인 자선 이야기를 담은 《채리티: 워터》도 펴냈다.
현재 뉴욕에서 IT 스타트업을 운영 중이며, 2019년에 설립한 CNH북스를 통해 세상 속 가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한국에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taeyoung1025
YOU’RE INVITED : The Art and Science of Cultivating Influence
Copyright © 2021 by Jon Levy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Harper Business, an imprint of HarperCollins Publishers.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s © 2021 by CNH Books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HarperCollins Publishers through EYA(Eric Yang Agency).
다시 연결된 세상, 코로나 이후의 커뮤니티를 말하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발행일 2021년 10월 30일
지은이 존 리비
옮긴이 최소영, 우태영
펴낸이 우태영
펴낸곳 씨앤에이치북스
등 록 2017년 12월 27일 제2017-000100호
주 소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78-7
전 화 0507-1418-0784
팩 스 050-4022-0784
이메일 ilove784@gmail.com
카카오톡 천그루숲
마케팅 백지수
유 통 천그루숲
ISBN 979-11-88348-89-3 (15320)
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향력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 해답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영향력은 우리가 누구와 ‘연결’되는지,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제가 사는 여기 뉴욕에서도, 파리, 모스코바 또는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사하라 사막, 남극 대륙, 중국 하동의 차 농장에서도 저는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한국에 계신 독자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너무 뿌듯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과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드세요.”
저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에서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제가 이 책을 쓰며 매우 즐거웠던 만큼, 여러분도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맺는 인간관계, 이루고자 하는 성공,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지는 놀랍고도 의미 있는 커뮤니티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의 새로운 친구,
존 리비 Jon Levy
2021년 4월, 나는 약속된 시간에 뉴욕 센트럴파크 서쪽에 있는 브런치로 유명한 더 스미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커플과 가족들이 주로 앉아있는 야외테이블 맨 구석에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한 남자가 최신형 아이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반쯤 마신 음료 잔과 하얀색 마스크에도 가려지지 않는 진한 턱수염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존 리비를 알아봤고, 그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과 함께 앞의 의자를 가리키며 통화가 끝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약 10분 동안 그의 인터뷰의 마지막 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은 ‘이케아효과’라고 불리는데요, 기업들이 그저 고객에게 퍼주기만 하지 않고 고객들이 그 브랜드에 더 투자하도록 유도할수록 충성도가 올라간다는 뜻이죠.”
브랜딩, 홍보, 심리, 고객 커뮤니티 구축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대화를 마무리한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나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30분 단위로 빼곡히 적혀 있는 아이폰 속 스케줄을 보여주며 말했다.
“올해 하반기에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게 되면 사회 전반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많아질 텐데, 그 과정 속에서 인간관계와 커뮤니티를 어떻게 되찾고 잘 활용할지 고민하는 개인과 기업이 많은 것 같아요.”
내가 처음 그를 접하고 그의 책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저자를 직접 만나기 두 달 전이었던 2021년 2월 초, 나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오디오 기반 SNS ‘클럽하우스’를 통해 존 리비를 처음 만났다. 미국 마케팅 전문가들이 모인 대화방에서 ‘미국 최상류층이 참가하는 비밀 저녁식사 모임을 만든 행동과학자’로 소개된 그가 마이크를 잡고 있었고, 그의 경험담을 들은 나는 마치 또 다른 내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0년 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강연, 모임, 공연 그리고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던 나는 존이 사람들을 커뮤니티로 모았던 이야기를 들으며 특별한 동질감을 느꼈고, 그가 곧 관련 책을 출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을 취했다. 고맙게도 그는 나의 여러 질문들에 장문의 답변을 보내주었고, 내가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제안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일상의 삶이 바뀐 지 거의 2년이 흐른 지금,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대면접촉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우리는 단순히 여가로 느껴지는 모임만을 잃은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모임은 시장에 새로운 제품을 소개했고, 인간에게 노동의 성취감을 안겨주었고, 사회적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주었으며, 개개인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공동체 속 연대감에 너무나 익숙했던 우리는 모임이 불가능해진 순간 가장 비슷한 효과를 느낄 수 있는 기술적인 대안을 발 빠르게 찾았다. 그리고 인터넷, 컴퓨터, 카메라, 마이크 등을 활용해 우리는 연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듯이, 인류는 항상 팬데믹을 극복해 왔고 이번에도 극복할 것이다. 2021년을 백신 접종과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마무리하며, 약 2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바이러스와의 무기력한 싸움을 끝내고 2022년부터는 새로운 사회적 삶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멈췄던 많은 모임과 행사들은 새로 회복될 것이고, 새로운 공동체와 새로운 삶의 방식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주는 커뮤니티의 힘을 팬데믹 이후의 세상에 맞게 다시 연구해야 한다.
존 리비는 자신의 경험과 함께 그가 만날 수 있었던 세계 최고의 기업가, 아티스트, 스포츠 스타, 지식인 등을 통해 인간이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갈망하는지 연구했고, 그 이야기를 이 책에 모두 소개하고 있다. 또 이케아, 레드불, 디즈니 등 익숙한 글로벌 기업들부터 스포츠 국가대표팀 감독, 전과자 출신의 헬스 트레이너, 해병대 교관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커뮤니티의 힘을 활용해 어떻게 목표를 이루었는지에 대해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다.
2019년 ‘세계의 지혜를 소개하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시작한 CNH북스의 세 번째 책으로 이 책을 독자 앞에 내놓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온라인 세상에 더욱 깊이 연결되었고, 곧 일상활동의 회복과 함께 오프라인 세상에서도 새로운 관계를 위해 다시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커뮤니티의 힘’을 새롭게 정립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더욱더 의미 있는 도전을 추진하기를 바란다.
2021년 10월
우태영
당신의 인생을 바꿀 초대의 힘
대릴 데이비스는 열 살이 되어 마침내 미국으로 돌아왔다. 외교관으로 근무하는 부모님을 따라 대릴은 2년마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생활했다. 외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닐 때 붙임성 좋고 활달한 성격으로 꽤 인기가 있었던 대릴은 고국으로 돌아와 컵스카우트에 가입해 다양한 단체활동을 체험하게 되었다.
몇 달 뒤 컵스카우트 대원들은 미국의 독립운동가 폴 리비어의 활약을 기리기 위한 거리행진에 초청을 받았다. 빳빳하게 잘 다린 유니폼에 배지를 단 소년들이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행진하는데 난데없이 병과 깡통, 돌멩이들이 대릴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대릴은 이때 ‘왜 사람들이 스카우트를 싫어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 스카우트 리더들은 그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무리에서 보호를 받는 사람은 모든 스카우트 대원이 아닌 대릴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대릴은 부모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드렸다. 부모님은 대릴을 앉혀 놓고 처음으로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세계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자라는 동안 대릴이 다닌 학교의 친구들은 모두 다른 생김새에 다양한 체격과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고 배경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는 어느 집단이든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의 스카우트 대원 중 대릴은 유일한 흑인 아이였다. 열 살의 나이로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돌을 던질 정도로 자기를 그토록 격렬하게 싫어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피부색에 신경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는 부모님이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지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당하고, 미 전역의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지고서야 비로소 그는 인종차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라면서 대릴은 자신의 열정을 좇아 재즈로 학위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척 베리 같은 거장들과 함께 블루스, 부기, 록앤롤을 연주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영화 <도시의 카우보이> 개봉 후 컨트리 음악의 인기가 폭발하면서 대릴은 컨트리 밴드에 합류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전국 어느 공연장에 가더라도 그는 그곳의 유일한 흑인이었다.
어느 날 저녁 매릴랜드주의 한 바에서 공연을 마치고 내려오니 한 남자가 대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흑인이 제리 리 루이스처럼 피아노를 잘 치는 건 처음 봐요.”
대릴은 자신이 제리 리 루이스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면서 제리의 스타일이 원래는 흑인 음악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대릴의 말을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를 흥미롭게 여긴 남자는 대릴에게 자기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에 동석하자고 권했다. 대릴이 그 자리에 합석해 주스 잔을 집어들자 남자는 친구들과 같이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난생처음으로 흑인과 술을 마셔 보네요.”
그런 상황이 의아했던 대릴은 순진하게도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남자는 테이블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머뭇거리다 그의 친구가 대답을 재촉하니 겨우 입을 떼었다.
“왜냐하면 내가 KKKKu Klux Kla(미국의 백인 우월주의 비밀결사단체) 단원이거든요.”
대릴은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KKK 단원이 어째서 자신을 끌어안고 술자리에 초대를 하겠는가? 하지만 남자가 단원증을 꺼내 보이자 대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남자는 정말로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혐오단체의 회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들은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자는 대릴에게 자기 전화번호를 주면서 다음에 다시 공연을 오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친구들을 데리고 ‘제리 리 루이스만큼 연주를 잘하는 흑인 남자를 보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6주에 한 번씩 대릴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남자는 그때마다 동료 KKK 단원들을 대동하고 나타나곤 했다. 그중에는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었고 회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수개월을 보낸 대릴은 어릴 적 스카우트 사건 이후로 그를 괴롭혀 왔던 ‘사람들이 왜 나를 싫어하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릴은 확실한 해답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KKK 단원들을 인터뷰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먼저 그는 바에서 만난 남자에게 매릴랜드주의 그랜드 드래곤(각 주의 KKK단 지부장에 해당하는 직함)인 로저 켈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릴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길 의도가 없었지만 상대방 누구도 그 점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인터뷰 장소에 나온 로저와 그의 개인 경호원은 그들의 철천지원수인 흑인 남자 하나가 맞은편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대릴과 악수를 나누었고, 시원한 탄산음료와 앉을 자리를 권유받은 뒤 인터뷰에 들어갔다. 대릴은 녹음기와 성경만을 앞에 두고 로저와 마주앉아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장감이 팽배한 와중에 갑자기 “탁!” 하는 정체 모를 소리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릴은 목숨을 잃을까 두려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마터면 그랜드 드래곤을 공격할 뻔했다. 동시에 경호원 역시 대릴이 무슨 짓을 하려는 줄 알고 얼른 차고 있던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 그 정체 모를 소리는 탄산음료에 들어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캔이 쭈그러지며 난 소리였다. 진상을 파악한 세 사람은 다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릴은 그후에도 전국의 KKK 단원들과 신나치주의자들을 찾아다녔고, 그중 가장 극단적이라고 평가받는 매릴랜드주 다른 지부의 그랜드 드래곤이자 전직 경찰관 밥 화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대릴은 그때를 이렇게 술회했다.
“밥 화이트는 극도로 폭력적인 데다 반유대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안 좋은 점은 다 갖다 붙여도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들이 모두 흑인과 유대인 때문이었죠.”
대릴은 밥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누었다. 대릴은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기보다 언제라도 죽이려 드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짧으나마 인간애가 공유되는 순간들이 나타났다. 결국 빈번한 접촉과 대릴의 착한 심성 덕분에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뜻밖에도 절친이 되었다. 그리고 흑인 남자와 친구가 되는 것은 KKK의 원칙과 맞지 않았기에 밥 화이트는 KKK단을 탈퇴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싫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릴이 답을 찾은 것은 로저 켈리와의 인터뷰 도중 정체 모를 소리가 났을 때 두려움과 불확실성 속에서 양쪽 모두가 목숨을 위협받는 듯한 반응을 보였던 바로 그날이었다. 대릴은 말했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가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렸고, 그 두려움은 돌연 강렬한 증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증오는 그들이 나를 총으로 쏘든 내가 그들을 다치게 하든 하마터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뻔했습니다. 어린 시절 사람들이 나에게 병과 돌을 던졌던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모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나를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지의 존재라는 점이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했고, 그 두려움이 증오를 불러일으켰으며, 나아가 파괴적인 행위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사람들이 나에게 친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30년 동안 대릴은 수백 명의 KKK 단원들을 인터뷰했다. 그중 200명 이상이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단념했으며, 50명 이상이 증오의 삶을 뒤로 하고 자신의 단복을 대릴에게 넘겨주었다. 로저 켈리는 대릴과 첫 인터뷰를 한 지 약 10개월 뒤에 임페리얼 위저드(KKK 전국 지도자를 부르는 명칭)로 추대되었지만 대릴은 절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 해 두 해 대릴과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쌓아가던 로저는 그와 만난 지 8년 차 되는 해에 KKK를 떠나 대릴에게 자신의 단복을 넘겼다.
* * *
대릴이 말도 못하게 용감했다는 사실 외에 내가 이 스토리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는 바로 ‘초대’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릴은 인터뷰를 통해 인연을 맺는 참신한 방법으로 신뢰를 쌓으며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고, 이후 그들을 자신의 공동체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의 스토리를 보면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차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고립감으로 인해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우리를 더 많이 노출하면 할수록 그들이 우리를 더 좋아하게 되고, 우리도 그들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KKK단의 그랜드 드래곤과 흑인 뮤지션이 절친이 될 수 있었다면 세상에 인연을 맺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빠른 방법이 ‘초대’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의 초대를 수락해 줄 때 함께 마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를 했을 때 상대방이 “예스”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은 참여를 약속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그들의 참여를 부탁하는 수동형에서 그들 스스로가 참여하겠다는 능동형으로 맥락이 바뀐다. 대릴이 KKK 단원에게 인터뷰를 하자고 초대한 순간, 내가 누군가를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순간, 또는 당신이 고객에게 당신 회사의 프로젝트에 초대하는 순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시작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경우처럼 용기를 내어 초대를 해야 할 때도 있고, 결혼식에 지인들이 와서 축하해 주기를 바라는 경우처럼 기쁜 마음으로 초대를 하게 될 때도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평생 함께할 수 있는 깊고 유의미한 관계로 발전할 뿐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는 긍정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이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할 ‘초대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 * *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바꿀 경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근대 역사상 그 어느 때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고 고립되어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소득과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당신은 다시 사람들과 만나고 신뢰를 쌓고 공동체 의식을 키울 수 있는 모든 도구와 지식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더 행복하고 충만해질 것이며, 조직에서 더 큰 성공을 일구고, 커뮤니티의 지원을 받으며, 사랑하는 이들의 인생과 당신에게 중요한 모든 일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누가 당신과 여정을 함께하게 될지 궁금한가? 당신이 바라는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다.
당신이 이 책에 소개된 모든 아이디어를 다 활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되었건 몇십 명이 되었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다음, 그것을 지속해 나가기를 당부한다. 무엇을 하든 나만의 영향력을 만들어 그것이 당신의 가치와 일치되도록 하라. 당신에게는 놀라운 삶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한 번의 초대에서 시작될 것이다.
인플루언서즈
창립자이자 주최자
존 리비
1
다이어트 모임을 만들어
수십억 자산가가 된 주부
뉴욕에 사는 진 나이디치는 170㎝의 키에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하는 서른여덟의 가정주부였다. 1961년 가을의 어느 날, 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헐렁한 드레스를 입고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 그녀는 계산대에 수북이 쌓아놓은 과자 상자들을 보며, 계산원이 ‘다 아이들 먹이려고 사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실은 자신이 욕실에 숨겨 놓았다가 밤이면 모조리 먹어치우곤 했지만 말이다. 계산을 마치고 슈퍼마켓의 통로를 지나는데 아는 아주머니 한 분이 진에게 참 좋아 보인다며 인사를 건넸다. 진이 고맙다고 막 대답을 하려는데 곧바로 이런 질문이 이어졌다.
“예정일이 언제예요?”
진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그분은 진이 임신을 한 줄 알았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진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살을 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자제력과 결단력만 있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된 운동과 자제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잘 알 것이다. 진은 건강한 체중에 도달하기 위해 오로지 달걀이나 자몽만 먹기, 쫄쫄 굶기, 잡지에서 본 연예인의 다이어트법 따라하기까지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다. 그때마다 몇 kg씩 살이 빠지긴 했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보는 순간 폭식을 하게 되어 늘 몸무게가 원상태로 돌아갔고, 때로는 전보다 더 찌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진은 감량한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진은 몸무게를 30kg 넘게 감량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과 달리 53년 간 그 체중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천만 명의 몸무게도 빼도록 도왔다. 모르긴 해도 덕분에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 나이디치는 수십억 달러의 자산가이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진이 설립한 다이어트 전문회사 ‘웨이트 워처스 인터내셔널Weight Watchers International’의 성공은 그녀가 연대와 공동체 효과의 중요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예 해방운동의 선구자가 된
도망자 노예
진이 건강한 몸을 원하는 과체중의 주부였다면 프레드릭 베일리는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 노예였다. 도망친 노예였던 그는 붙잡힐 경우 고문이나 총살감이었고, 본보기로 사나운 개들에게 던져질 수도 있었다.
1838년 9월, 프레드릭은 노예제도가 있었던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자유의 도시 뉴욕으로 가기 위해 필라델피아행 열차에 몰래 올라탔다. 그리고 흑인 승객들이 모여 있는 일명 ‘깜둥이칸’에 숨어들어 객실 내의 혼잡하고 부산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차장이 자신이 내미는 가짜 서류에서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하기를 빌었다. 차장을 속이기 위해 프레드릭은 자유인 신분의 선원에게서 서류를 빌리고 선원처럼 보이도록 빨간 셔츠와 모자 등으로 복장을 갖춰 입었다. 운이 좋으면 서류와 옷차림, 선박에 대한 지식(그는 한동안 조선소에서 강제 노역을 한 적이 있었다)이라는 삼박자로 의심을 피하기를 바랐다. 차장이 다가오자 프레드릭은 그에게 서류를 건넸다. 다행히 차장은 서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음 사람에게로 건너갔고, 그렇게 프레드릭은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다음 날 그는 열차에서 연락선으로, 다시 열차로, 또 증기선으로 갈아타고 마침내 필라델피아에 다다랐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뉴욕행 열차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꿈에 그리던 자유인이 되었다.
다시 붙잡히는 일이 없도록 베일리에서 더글러스로 성을 바꾼 프레드릭은 3년 뒤 미국노예제폐지협회AASS, American Anti-Slavery Society의 한 강연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노예제 폐지론을 주장하던 주간지 <리버레이터>의 발행인이자 공동창립자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주관하는 강연회였는데, 참석자들에게 그의 경험담을 들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강연회에서 프레드릭의 이야기를 들은 개리슨은 프레드릭이 장차 노예 해방운동을 이끌어 갈 커다란 재목이 되리라 직감했다. 그러나 정작 프레드릭 본인은 그날 자신의 대중연설이 향후 노예제 폐지 운동과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 그와 동료 흑인들의 자유 획득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초대의 힘’을 통해 시작한
인플루언서 디너
진의 다이어트 목표와 프레드릭의 노예제 폐지운동의 목표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내가 이 두 사연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살았던 시대도 백 년 이상 차이가 날 뿐더러 인종과 종교는 물론이고 문화와 지향하는 바도 달랐다. 세계적으로 최소 280만 명이 해마다 비만 관련 문제로 사망한다. 진은 전 세계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다이어트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도록 돕는 지극히 개인적인 투쟁에 헌신했다. 반면에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자유를 구속당한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되찾아 주려는 사회적・도덕적 의무를 위해 싸웠다. 서로의 여정과 사명은 달랐지만 그들을 성공으로 이끈 방법은 동일했다. 둘 다 ‘영향력 방정식Influence Equation’과 ‘초대의 힘Power of an Invitation’ 덕분에(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그들 사이에 깊고 유의미한 연대를 창출할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스토리를 통해 진이 그녀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서 깨달았던 사실과 미국노예제폐지협회가 그들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사용했던 전략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다분히 개인적・직업적 성공을 도모하려는 마음에서 살펴보았던 인간행동과 의사결정에 관한 연구였지만 이 이야기들은 내가 행동과학자이자 연구자로서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통찰을 얻은 뒤 나는 좀 별난 일을 벌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불러보아 나에게 저녁식사를 차려 주도록 한 것이다. 그들 중 대다수는 각자의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축에 드는 인물들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저녁식사 모임은 십여 년 동안 이어졌고, 이 식사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식사 모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저녁식사에 나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12명씩 초대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함께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직업은 물론이고 이름도 밝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위해 자리에 앉고 나서야 참석자들은 동석한 이들이 저마다 각계각층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임을 알게 된다. 참석자의 면면은 노벨상 수상자나 올림픽 메달리스트에서부터 음악가와 화가, 심지어 왕실의 일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참석자들이 저마다 각자의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인지라 이 식사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만찬Influencers Dinner’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인플루언서들의 커뮤니티는 저녁식사 외에 문화행사, 모임 등에서 만남을 이어가며 내부 사람들과 지역사회, 나아가 전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다는 사명을 갖게 되었다. 십여 년 동안 나는 수백 번의 저녁식사에 수천 명의 사람들을 초대했으며, 참석자들에게 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깊고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 IT기업에는 개별 커뮤니티를 만들어 주었고, 일반기업에는 보다 건강한 기업문화를 조성해 주었으며, 스타트업에는 고객들과 의미 있고 지속적인 관계를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세일즈 프로세스를 만들어 주었다. 비영리재단의 경우는 대의에 충실한 후원자 모임을 구성하여 지원했다.
인플루언서 디너와 행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나는 스물여덟 살 때 참석했던 세미나에서 배웠던 ‘성공을 위한 단 한 가지 기본원칙’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우리 삶의 질을 결정짓는 근본요소는
우리와 가까이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다.”
이 원칙을 알기 전까지 나는 자기계발서나 경영서, 강의에서 배운 전략들을 활용해 삶을 개선해 보려고 애썼다. 그 전략들이 내 문제점을 바로잡아 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좋은 결과도 얻지 못했다. 결국 나는 20대 시절을 돈이 없다고, 몸매가 좋지 않다고, 이상형과 연애를 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보냈다. 하지만 이 원칙을 접한 후 나는 불안정한 생활과 실패에 허덕이지 않고 특출한 성과를 낼 능력,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교류할 능력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말해 나는 영향력을 갖길 원했다. 이는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솔직히 나는 아보카도 토스트를 먹지도 못하고 손바닥만한 수영복을 입을 만한 몸매도 못되는지라 내가 셀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영향력이란 내 커리어와 소득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말한다. 그 외에도 나는 업계 리더들의 존중을 받고 내가 관심을 가지는 사회적 대의에 영향을 미치며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할 능력을 갖기를 원했다.
그 세미나 강사의 말이 맞다면 내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있었다. 그 방법은 내가 원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었다. 오전 6시에 알람을 맞추고 체육관에 가는 대신 그저 운동선수나 피트니스 마니아들과 친해지면 되었다. 그러면 곧 운동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될 테니까. 빠듯한 예산에 맞춰 생활하려 애쓰는 대신 비즈니스 전문가들과 친해지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인맥을 활용하여 보다 나은 직장을 구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만으로 알람을 네 번이나 끄고 더 자느라 운동을 빼먹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꿀꿀해지거나 신용카드 연체대금을 갚느라 쩔쩔매지 않아도 된다니 실로 솔깃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이어트 모임의 성공비결
결국 진이 택한 방법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진은 늦게나마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했다. 임신부로 오해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맨해튼에 뉴욕시 보건국 산하의 무료 비만 클리닉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버스를 두 번, 전철을 한 번 갈아타고 찾아간 클리닉에서 진은 뚱뚱한 여자들이 가득 들어찬 방 안에 조용히 앉아 날씬하고 깐깐한 영양사의 설명을 들었다. 진이 보기에 영양사는 공감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몸무게와 씨름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수치심과 슬픔, 마음껏 먹지 못하는 괴로움을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다. 97kg의 진에게 영양사는 64kg이라는 목표 체중을 제시했다. 진은 충격을 받았다. 성인기 내내 그런 체중에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영양사는 진에게 지정된 음식 외에 다른 어떤 음식도 절대 입에 대지 않도록 지시했다.
10주 뒤 진은 9kg이 빠졌다. 결과는 고무적이었지만 다이어트 과정이 치료식으로 진행되는 데다 참가자들 간에 대화를 장려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진은 고립감에서 벗어나 누군가와 함께 마음을 나누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특히 다이어트를 지속하고 감량한 체중을 유지하려면 보다 나은 지원체계가 필요했다. 자신의 고충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그래서 진은 어느 날 저녁, 카드게임이나 하자며 뚱뚱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여자들 여섯이 게임을 즐긴다는 명목으로 모였지만 진의 진짜 의도는 살을 빼는 어려움에 대해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자리를 만드는 데 있었다. 저녁이 깊어가도록 그들은 각자의 건강하지 못한 강박적 습관들과 창피한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그러면서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이 모두가 가벼운 초대 한 번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손님 한 명이 다음 주에도 또 모이자고 제안하자 진은 아예 이 모임을 정례화하기로 했다. 한 번 두 번 만남이 이어지면서 기존 멤버들이 다른 지인들을 초대하고 그들이 또 다른 지인들을 초대한 결과 이 모임의 인원은 두 달도 안 되어 40명이 되었고, 만나는 횟수도 일주일에 두 번으로 늘었다.
모임을 주최하며 진은 자신이 다이어트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함을 솔직히 밝혔다. 그녀는 의학전문가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의사의 조언은 효과가 없었다. 의사들은 간단한 해결책으로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현실 속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게 고충을 털어놓을 때 생겨나는 놀라운 공동체 의식이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와 씨름한다. 직장에서의 걱정거리, 우울증으로 인한 고립감, 건강 악화의 두려움,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패배감, 또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신경안정제에 의존하거나 폭식을 해대거나 자신의 문제를 꽁꽁 감추는 사람들과 해결책을 찾아내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바로 ‘관계’에 있다. 이것이 진의 모임이 지니는 장점이다. 진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 마음을 나누고 금세 신뢰를 쌓으며 나아가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여기에 공동체 효과의 강점이 있다.
“우리 관계에 공동체 의식이 싹틀 때
눈부신 성과가 피어난다.”
진은 내가 들은 세미나 강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척 사람들과 다과를 나누며 친목만 도모할 수도 있었지만, 진은 관점을 전환하여 일주일에 두 번씩 꾸준히 만남을 가지면서 건강에 관한 대화를 나눌 시간을 계획했다. 체중 문제에 관한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건강을 해치는 습관을 전파하는 대신 서로에게 무비판적인 지원자가 되었고, 참석자 모두가 새로운 우정과 신뢰, 아이디어, 규칙적 일과를 공유하며 좋은 변화를 만들어 갔다.
진이 알버트와 펠리스 리퍼트 부부를 만난 것도 이 모임에서였다. 이 부부는 떼굴떼굴 굴러갈 만큼 살이 많이 쪘다며 자기들 스스로 비치볼이라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모임에 참석한지 4개월 만에 알버트는 몸무게가 18kg 줄었고 펠리스는 23kg 가까이 줄었다. 다이어트의 효과를 직접 경험한 부부는 진을 회사의 간판으로 내세우고 진의 성공사례를 토대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여도 괜찮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웨이트 워처스 인터내셔널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회사 설립 후 첫 공식모임이 1963년 5월 15일에 있었는데, 50명 정도 오리라 예상하고 마련한 공간에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후 6년이라는 기간 동안 알버트의 프랜차이즈 사업은 무럭무럭 성장하여 참가자 전체가 총 7,700만 kg에 달하는 체중을 감량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1973년에 진과 리퍼트 부부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웨이트 워처스 마니아들과 함께 창립 10주년을 기념했다. 가맹점 수가 110개로 늘었고, 연매출이 1,500만 달러에 이르는 등 성장세가 가팔랐다. 그리고 설립 15년 만인 1978년에 웨이트 워처스는 유명 케첩회사 H. J. 하인즈에 7,100만 달러(현재 기준으로 약 2억 8,00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
인맥을 성공의 발판으로 활용하는 전략은 분명 유효하다. 인간관계가 개인적・사회적・사업적 도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인생을 바꿔보려던 시도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시고 나니 내게는 단순히 감명 깊은 이야기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인맥 쌓기를 꾸준히 하다 보면 실제로 성과가 나타난다는 증거가 필요했고, 나는 그 증거를 과학적 연구 결과에서 찾았다.
미국의 비만 인구는 2000년대에 최고점을 경신했다. 두 연구자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와 제임스 파울러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비만이 감기처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전염병일까? 아니면 유전자나 습관 같은 다른 요인들에 의해 발생하는 개인적 경험일까?”
이 질문의 답이 인간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어 놓았다.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