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드허스트 재단과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 재단
그리고 존 D. 앤 캐서린 T. 맥아더 재단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십 년간 편집을 맡아 준 앨버트 어스킨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바칩니다.
당신의 생각은 끔찍하고 마음은 어렴풋하다.
연민으로 인한 것이든 잔혹으로 인한 것이든 행동은 불합리하고
억제할 수 없다는 듯 평정을 잃는다.
결국 피는 더욱더 두려워진다. 피와 시간이.
— 폴 발레리
어둠의 삶이 비참함으로 가라앉고
슬픔에 빠지듯 사위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애당초 슬픔이라고는 없다.
슬픔은 죽음만이 삼킬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의 과정이야말로
바로 어둠의 삶이기 때문이다.
— 야코프 뵘
에티오피아 북부 아파르 지역 탐사대의 마지막 해를
이끌었던 클라크와 그의 UCB(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동창인
팀 D. 화이트 역시 같은 지역에서 발굴된 30만 년 전 두개골 화석을
재검사한 결과 당시 머리 가죽을 벗겼다는 증거가
포착되었다고 발표했다.
— 《유마 데일리 선》 1982년 6월 13일 자
본문 중에 나오는 스페인어는 괄호를 사용하여 뜻을 병기했다.
이 아이를 보라. 파리한 안색에 비쩍 마른 아이는 너덜너덜 해어진 얇은 리넨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있다. 아이는 식기실 난로에 불을 지핀다. 밖에는 눈으로 덮인 들판이 띄엄띄엄 검게 물들고, 그 너머에 더욱 시커먼 숲이 마지막 남은 몇 마리의 늑대를 품고 있다. 아이의 가족은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하급 노동자로 알려져 있지만, 기실 아이의 아버지는 교사이다. 그는 술에 취해 드러누워서는, 이제는 잊힌 시인의 시를 읊는다. 소년은 난롯가에 웅크리고 앉아 그를 바라본다.
네 녀석이 태어난 밤에, 1833년도였지, 사자자리인지 뭔지가 얼마나 대단하게 쏟아지던지. 하늘에 시커먼 구멍이라도 뚫린 줄 알았다. 북두칠성 국자가 뒤엎어지면 그럴까.
십사 년 전 그날,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생명체를 뱃속에 포태하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녀 이름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기에 아이는 어머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아이에게는 누나가 한 명 있긴 하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땟국이 질질 흐르는 파리한 아이는 가만히 바라본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아이의 안에는 이미 이유 없는 폭력이 스멀스멀 싹트고 있다. 모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잖는가.
열네 살에 아이는 가출한다. 동트기 직전의 어둠 속에서 소년은 소름 끼치는 그 집을 생애 마지막으로 본다. 장작도 대야도 이제 마지막이다. 소년은 서쪽으로 정처 없이 방랑하다 멤피스에 이른다. 납작한 초지 위의 고독한 이주. 들판의 말라깽이 흑인들이 등을 푹 수그린 채 거미 같은 손가락으로 목화를 딴다. 고통의 그림자가 서린 목화밭. 종이 지평선 위로 느리게 깔리는 어스름 속에서 지는 해를 등지고 흑인들이 꿈질거린다. 비에 젖은 강변 저지대에서는 거뭇한 형체의 고독한 농부가 노새를 내몰아 써레질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일 년 후 소년은 세인트루이스에 다다른다. 소년은 평저선을 타고 뉴올리언스로 향한다. 강물 위에서 사십이 일이 흐른다. 밤이면 물 위의 도시 같은 증기선들이 기적을 울리며 첨벙첨벙 시커먼 물을 가르고 나아간다. 평저선은 토막토막 쪼개져 목재로 팔린다. 소년이 거리로 들어서자 생소하기 짝이 없는 언어가 귓가를 호린다. 소년은 술집 뒤쪽 안마당이 내다보이는 2층 방을 얻는다. 밤이면 동화 속 야수처럼 내려와 배꾼들과 엉겨 치고받는다. 덩치는 크지 않지만 소년에게는 굵은 손목과 큼직한 주먹이 있다. 양어깨도 다부지다. 소년의 얼굴은 흉터로 뒤덮여도 묘하게 청허하고, 눈빛 역시 맑다. 그들은 주먹으로 발로 병으로 혹은 칼로 싸움질한다. 온갖 인종과 온갖 종자와 맞붙는다. 으르렁대는 유인원처럼 말하는 인간들. 아득히 멀고 기묘한 땅에서 온 인간들이 진창에 피 흘리며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서 소년은 인류의 결백을 입증한 듯한 기분을 만끽한다.
그러던 어느 밤 몰타 출신 갑판장이 자그마한 권총으로 소년을 등 뒤에서 쏜다. 소년은 몸을 돌려 달려들려다 심장 바로 아래가 꿰뚫린다. 그자는 달아나고, 소년은 셔츠를 주룩주룩 피로 물들이며 바에 기댄다. 다른 이들은 짐짓 못 본 체한다. 잠시 후 소년은 바닥에 주저앉는다.
소년은 두 주 동안 위층 접이식 침대에 누워 술집 안주인의 간호를 받는다. 안주인은 소년의 식사를 가져오고, 소년의 똥오줌을 받아 낸다. 안주인은 남자처럼 억센 체구에 드세 보이는 여자다. 소년은 몸을 제법 추스르자 안주인에게 줄 돈이 없어 밤도망을 쳐 강둑에서 잠을 잔다. 그러고는 타고 갈 배를 찾는다. 텍사스로 가는 배를.
이제야 겨우 소년은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벗어던진다. 소년의 고향은 소년의 운명만큼이나 까마득하다. 세상이 인간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는지 혹은 인간의 심장이 다른 종류의 흙으로 빚어진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거칠고도 야만적인 시기는 세상이 돌아가는 동안 다시 오지 않는다. 승객들은 내성적이다. 그들은 시선을 가둔다. 누구도 서로에게 어쩌다 배에 올랐는지 묻지 않는다. 소년은 갑판에서 다른 방랑자들 틈에 끼어 잠을 잔다. 소년은 아슴푸레 높아지고 낮아지는 육지를, 멀거니 쳐다보는 회색 물새를, 잿빛 파도 위로 날아가는 연안의 펠리컨 무리를 바라본다.
그들은 배에서 내려 거룻배로 갈아탄다. 재산을 싣고 온 이주자들은 나지막한 해안선을 유심히 살핀다. 아지랑이에 휘감겨 키 작은 소나무가 일렁이는 아래로 모래알이 기다랗게 만을 채운다.
소년은 항구의 좁은 길을 걸어간다. 공기에 갓 톱질한 목재와 소금 냄새가 실려 온다. 밤에는 창녀들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영혼처럼 어둠 속에서 돋아 나와 소년을 부른다. 일주일 후 소년은 다시 옮겨 간다. 일해서 번 몇 달러를 지갑에 넣어 두고 주먹 쥔 두 손을 싸구려 면 코트 주머니에 쑤셔 박은 채 한밤중 남부의 모랫길을 홀로 걸어간다. 흙을 쌓아 만든 둑길을 따라 습지를 가로지른다. 백로 떼가 이끼 사이로 양초처럼 새하얗게 서 있다. 바람이 나지막이 습지를 쓸더니 길가를 껑충껑충 뛰어올라 밤의 들판 속으로 쪼르르 달려든다. 소년은 자그마한 촌락과 농장들을 지나치며 공짜로 잠과 밥을 청하거나 날품팔이를 하며 북으로 나아간다. 마을 교차로에 부친 살해자가 목매달려 있다. 그자의 친구들이 달려와 오줌으로 시커메진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
소년은 제재소에서 일하고, 디프테리아 격리 병원에서 일한다. 어느 농부에게서 일당 대신 늙은 노새를 받는다. 1849년 봄 소년은 그 노새를 타고 근대의 프레도니아 공화국1)을 통과해 내커도처스 시내로 들어선다.
그린 목사는 비가 내리고 또 내려 두 주간을 매일 회당을 꽉 채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소년이 남루한 천막으로 불쑥 들어왔을 때 벽을 따라 한두 곳 겨우 발 디딜 자리가 남아 있었고, 빽빽한 습기에도 목욕을 하지 않아 맹렬해진 악취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은 이따금 제 발로 억수 같은 빗속으로 돌격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비에 쫓겨 다시 천막 속으로 기어들었다. 소년은 뒤쪽 벽에 자신과 비슷한 무리 틈에 끼었다. 소년에게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무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사는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는 내커도처스의 지옥처럼 더럽고 불결한 그곳을 멀리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그곳에 가십니까?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세상 끝까지라도 함께 가겠노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같이 가 달라고 청한 적 없소이다. 나는 말했습니다. 형제여, 굳이 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청하든 청하지 않든 매 걸음마다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형제여, 아무도 주님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정녕 그 지옥 구덩이 속으로 주님을 끌고 가셔야 합니까?
비가 이렇게 억수로 쏟아지다니 희한하지?
목사를 쳐다보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몰이꾼처럼 콧수염을 길게 기르고, 테가 넓고 나직한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살짝 사팔뜨기였는데, 비에 대한 의견을 꼭 알아야겠다는 듯 아주 진지한 표정이었다.
막 이곳에 왔는지라. 소년은 대꾸했다.
내 평생 이렇게 지독한 비는 처음이야.
소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순간 방수포 비옷을 걸친 덩치 큰 사내가 천막으로 들어와 모자를 벗었다. 돌덩이 같은 대머리에다 턱수염도 눈썹도, 심지어 속눈썹도 없었다. 키는 족히 210센티미터는 될 법했는데, 주님의 임시 거주지 안에서조차 태연히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모자를 벗은 것도 단지 비를 털기 위함이었던 듯 도로 머리에 썼다.
목사가 순간 설교를 멈추었다. 천막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모두가 그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모자 매무새를 바로 하더니, 나무 상자를 붙여 만든 설교단까지 거침없이 나아가 몸을 돌려 군중을 바라보았다. 진지하면서도 묘하게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손은 자그마했다. 그가 두 손을 내밀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부흥회를 이끌고 있는 목사가 사기꾼임을 알리는 것이 제 의무라고 믿습니다. 이자는 유서 깊은 단체든 신흥 단체든 그 어떤 종교 기관의 임명장도 받은 바 없습니다. 멋대로 꿰어 찬 이 자리에 걸맞은 자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요. 사기를 치려고 성서 몇 구절을 외워 엉성하게 흉내 내는 것이 다입니다. 여러분 앞에 주님의 대리인인 양 서 있는 이자는 사실상 완전 문맹일 뿐만 아니라 테네시주, 켄터키주, 미시시피주, 아칸소주에서 수배 중입니다.
오 하느님. 목사가 외쳤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그는 펼쳐진 성서를 열정적으로 읽어 나갔다.
수많은 죄목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최근에 지은 죄는 열한 살짜리 여자애와 관련이 있습니다. 열한 살요. 이자를 믿고서 찾아온 소녀를 하느님의 옷을 걸친 채 더럽힌 것입니다.
한탄이 군중을 휩쓸고 번져 갔다. 한 여인이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바로 이자입니다. 목사가 울부짖었다. 바로 이자입니다. 여기에 악마가 왔습니다. 바로 이자가 그 악마입니다.
저 더러운 작자의 목을 매달자! 뒤쪽에서 험상궂게 생긴 폭력배가 외쳤다.
여기 오기 삼 주 전에는 염소와 붙어먹은 죄로 아칸소주 포트스미스에서 달아났습니다. 예, 여러분, 틀림없습니다. 염소와 흘레붙었습니다.
내가 저 개자식을 쏘아 죽이지 않으면 내 눈깔을 후벼 파겠어. 천막 저편에서 한 사내가 일어나며 고함치더니 부츠에서 권총을 뽑아 발사했다.
젊은 몰이꾼이 즉각 품에서 칼을 꺼내 천막을 들입다 찢어 빗속으로 나갔다. 소년도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고개 숙인 채 호텔을 향해 진창을 달려갔다. 이미 천막 안에서는 총성이 난무했다. 캔버스 벽에 십여 개의 구멍이 생겨나더니 여자들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몇몇은 발이 걸려 비틀대다 진흙탕에 꼬꾸라져 마구 짓밟혔다. 소년과 새 친구는 호텔 현관에 이르러 눈에서 빗물을 훔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천막이 휘청휘청 실그러지더니 부상당한 거대한 해파리처럼 서서히 쓰러지며 갈기갈기 찢긴 캔버스 벽과 남루한 밧줄을 질질 끌었다.
두 사람이 술집에 들어갔을 때 대머리 사내는 이미 와 있었다. 사내 앞쪽 광을 낸 나무 바에 모자 두 개와 두 움큼 정도의 동전이 놓여 있었다. 그가 잔을 들어 보였지만 두 사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가서 위스키를 주문했다. 소년이 돈을 내려놓자 바텐더가 엄지로 도로 밀치며 턱짓을 했다.
판사님이 모두에게 쏘신단다.
그들은 마셨다. 몰이꾼이 잔을 내려놓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어디를 쳐다보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었다. 소년은 판사가 서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는 보통 사람은 팔꿈치를 올려놓을 수도 없을 만큼 높았지만, 판사에게는 겨우 허리께에 닿았다. 그는 두 손바닥을 바에 납작 붙이고는, 다시 연설을 하려는 듯 몸을 살짝 기대었다. 이 무렵 비와 진흙으로 얼룩진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이 판사 주위로 모여들었다. 목사를 쫓기 위한 추격대가 너나없이 조직되었다.
판사님, 그 망할 자식에 대해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계십니까?
소상히라? 판사가 말했다.
포트스미스에 계셨습니까?
포트스미스?
어디에서 그자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그린 목사 말이오?
네, 판사님. 여기 오기 전에 포트스미스에 계셨나 보지요.
내 평생 포트스미스에는 발도 디딘 적 없다오. 그자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러면 언제 그자를 보았습니까?
오늘 처음 보았다오. 기실 그자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오.
판사가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바에 이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내들은 진흙으로 빚은 주술 인형 같은 몰골이었다. 마침내 누군가가 웃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른 이가 따라 웃었다. 이내 모두들 배를 쥐고 웃어 댔다. 누군가가 판사에게 술을 샀다.
소년이 토드빈을 만난 것은 십육 일째 비가 퍼붓던 날이었다. 비는 내리고 또 내렸다. 소년은 여전히 그때 그 바에 있었고, 술을 마시느라 2달러를 제외한 전 재산을 탕진했다. 소몰이꾼은 사라지고 없었고, 술집은 휑했다. 열린 문으로 호텔 뒤편 공터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소년은 술잔의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밖으로 나갔다. 진창 위로 판잣길이 깔려 있었다. 소년은 공터 아래쪽에 쪽판을 얼기설기 엮은 변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줄기를 향해 걸어갔다. 변소에서 사내가 나와 올라왔다. 두 사람은 좁은 판잣길 중간에서 딱 마주쳤다. 사내는 약간 비틀비틀거렸다. 핀으로 앞쪽을 고정시킨 젖은 모자챙이 양어깨로 까닥까닥 들까불었다. 한 손에 병이 헐겁게 들려 있었다. 내 앞에서 꺼져. 그가 말했다.
소년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굳이 말해 봐야 입만 아플 터이기에 그저 그자의 턱으로 주먹을 날렸다. 사내는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너 죽었어.
그가 병을 휘두르자 소년은 머리를 휙 숙였다. 그가 다시 병을 휘두르자 소년은 뒤로 물러났다. 사내를 갈기는 순간 소년의 옆머리로 술병이 날아와 산산이 부서졌다. 소년은 판잣길에서 벗어나 진창을 휘청휘청 걸어갔고, 사내는 비쭉배쭉 돋은 병목을 쥐고 쫓아와 눈을 찌르려 했다. 그를 막으려던 소년의 양손이 피로 끈적끈적해졌다. 소년은 부츠에 숨긴 칼을 빼내려고 손을 뻗었다.
뒈져라, 이 새끼야. 사내가 말했다. 두 사람은 어둠이 내린 진흙탕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우다 소년의 부츠가 벗겨졌다. 소년이 마침내 칼을 꺼내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채 옆걸음질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사내가 달려들자 소년은 그자의 셔츠를 냅다 그었다. 사내가 병목을 내던지더니 목 뒤에서 큼직한 사냥칼을 꺼내 들었다. 모자는 벗겨지고 없고, 검은 머리털이 머리 위에서 진득진득 들썩였다. 그는 미치광이가 기도하듯 자신의 위협을 한마디로 알렸다. 뒈져.
시원하게 그어 버려. 인도에 주르르 늘어서서 구경하던 사내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뒈져라, 이 새끼야, 하고 말하며 진창을 첨벙거리는 그의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공터에 들어섰다. 소가 요란하게 물을 빠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자는 거대한 곤봉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소년에게 다가오더니 곤봉을 휘둘러 소년의 얼굴을 진창에 처박았다. 누군가가 소년을 뒤집어 놓지 않았더라면 분명 죽었으리라.
소년이 눈을 뜨자 환한 대낮이었다. 비는 그쳐 있고, 온통 진흙으로 범벅된 얼굴이 더부룩한 머리를 늘어뜨리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자는 뭔가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소년은 말했다.
그만할 거지?
그래요. 날 죽이려 들었다면 진작 골로 보냈겠죠.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드높이 날고 있는지 대머리독수리가 눈곱만 해 보였다. 소년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 목이 부러졌나요?
사내가 공터를 둘러보더니 침을 뱉고는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못 일어나겠어?
몰라요. 일어나 봐야 알죠.
네 목을 부러뜨리려던 건 아니었어.
알아요.
널 죽이려던 거였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날 죽이지 못했죠. 소년은 진창에서 버둥거려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부츠를 옆에 내려놓고 판잣길에 앉아 있었다. 멀쩡하구먼. 사내가 말했다.
소년은 뻣뻣한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부츠는?
사내가 곁눈질했다. 그의 얼굴에서 마른 진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누가 내 부츠를 가져갔다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어.
저기 저거, 네 부츠 아니냐?
소년은 허청허청 걸어가 부츠 한 짝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진흙덩이처럼 느껴지는 공터를 터벅터벅 가로질렀다.
형씨 칼이오? 소년이 말했다.
사내는 소년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런가 보네.
소년은 칼을 사내에게 던졌다. 사내는 몸을 굽혀 칼을 줍더니 큼직한 칼날을 바짓가랑이에 쓰윽 문질렀다. 누가 널 훔쳐 간 줄 알았단다. 사내가 칼을 향해 말했다.
소년은 나머지 부츠 한 짝도 찾아내 판잣길로 돌아와 앉았다. 두 손에 진흙이 덕지덕지 엉겨 있었다. 한 손을 무르팍에 쓱 문지르다 그냥 툭 떨구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황폐한 공터를 바라보았다. 공터 가장자리에 뾰족한 말뚝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너머 우물에 남자애가 물을 긷는 동안 우물가 마당에 병아리들이 돌아다녔다. 술집 문에서 한 남자가 나오더니 변소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더니 진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되돌아온 그는 다시 진창으로 들어가 빙 돌아 판잣길로 올라갔다.
소년은 옆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이상하게 좁고, 머리칼에는 기괴한 원시 시대 모자처럼 진흙이 들러붙어 있었다. 이마에 H와 T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양미간 사이에 F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인두를 너무 오래 대고 있었던 듯 글자가 번들번들 퍼져 보였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소년은 그의 양쪽 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내가 일어나 칼을 칼집에 꽂더니 부츠를 손에 든 채 판잣길을 걸어갔다. 소년도 일어나 뒤를 따랐다. 호텔까지 반쯤 갔을 때 사내가 멈추어 진흙탕을 바라보더니 판잣길에 주질러앉아 진흙투성이인 채로 부츠에 발을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일어나 공터를 어치정어치정 가로질러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다.
이것 좀 봐라. 사내가 말했다. 내 망할 모자야.
완전히 죽었다는 것 외에는 무엇인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형체였다. 그는 모자를 탁탁 펴 머리에 눌러쓰더니 걸어갔다. 소년은 뒤를 따랐다.
술집은 니스 칠한 판자로 징두리벽판을 댄 좁은 홀이었다. 벽을 따라 일렬로 탁자가 놓여 있고, 바닥에 타구가 늘어서 있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바텐더가 고개를 들었다. 바닥을 쓸고 있던 검둥이가 빗자루를 벽에 기대어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시드니는 어딨지? 사내가 진흙투성이 몰골로 말했다.
침대에 있겠지.
그들은 홀을 가로질렀다.
토드빈! 바텐더가 외쳐 불렀다.
소년이 돌아보았다.
바텐더는 바에서 나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문을 지나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에 이르는 동안 바닥에는 다양한 형태의 진흙이 남겨졌다. 계단을 오르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소리쳤다.
토드빈!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넬 쏴 죽일 거야.
시드니가?
시드니가.
두 사람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는 기다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복도 끄트머리에 난 창문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니스 칠한 문이 복도를 따라 주르르 닫혀 있는데, 아마 그 너머는 작은 방이지 싶었다. 토드빈이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문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듣더니 소년을 쳐다보았다.
성냥 있냐?
소년은 주머니를 더듬어 구겨지고 얼룩진 나무 상자를 꺼냈다.
사내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불쏘시개가 좀 필요해서 말이야. 그가 말했다. 그는 성냥갑을 부스러뜨리더니 그 조각을 문 앞에 쌓았다. 그리고 성냥을 하나 켜 불을 붙였다. 자그마한 불더미를 문 아래로 밀어 넣으며 성냥을 몇 개 더 보탰다.
그자가 안에 없으면 어쩌려고요? 소년이 말했다.
이제부터 확인하면 되지.
검은 연기가 굽이치며 치솟고 니스 칠한 문이 푸르게 타올랐다. 두 사람은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았다. 가느다란 불꽃이 벽판을 따라 달음질해 오르더니 다시 쪼르르 내려왔다. 두 사람은 습지에서 발굴된 시체 같았다.
가서 문 좀 두드려 봐라. 토드빈이 말했다.
소년은 일어났다. 토드빈도 일어나 잠자코 기다렸다. 방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문을 두드렸다.
더 크게 두드려. 술을 뭣같이 처먹었을 테니.
소년이 주먹을 말아 쥐고 문을 다섯 번 쿵쿵 두들겼다.
불이야.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는군.
그들은 기다렸다.
이 망할 놈의 불. 목소리가 말했다. 이윽고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남자는 손잡이를 돌리는 데 사용한 수건을 한 손에 움켜쥔 채 속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발견하자 몸을 돌려 도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토드빈이 남자의 목덜미를 낚아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머리채를 움켜쥐고 엄지로 눈알을 쑤셨다. 남자는 그의 손목을 걸머쥐고서 물어뜯었다.
아가리를 걷어차. 토드빈이 외쳤다. 어서.
소년은 그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 몸을 돌려 남자의 얼굴을 걷어찼다. 토드빈이 남자의 머리채를 단단히 잡아 머리를 숙이지 못하게 했다.
걷어차. 그가 외쳤다. 봐줄 것 없이 막 걷어차, 얘야.
소년은 걷어찼다.
토드빈이 피투성이 머리를 돌려 바라보더니 머리채를 놓아주고 일어나 직접 남자를 걷어찼다. 구경꾼 둘이 복도에 서 있었다. 문은 완전히 불타올랐고 벽과 천장 일부까지 타들어 갔다. 두 사람은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호텔 직원이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 올라왔다.
토드빈, 이 망할 자식. 그가 말했다.
토드빈은 그보다 네 단 위에 있었기에 발길질은 상대의 목을 강타했다. 직원이 계단에 주저앉았다. 소년이 지나가면서 그 옆머리를 갈겼다. 직원이 쿵 하고 쓰러지더니 아래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소년은 그를 넘어 내려가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왔다.
토드빈이 거리를 내달리면서 두 주먹을 번쩍 들어 흔들며 웃어 댔다. 진흙으로 빚은 거대한 부두교 저주 인형이 살아난 듯했다.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뒤에서는 불꽃이 호텔의 꼭대기 층 모퉁이를 핥고, 시커먼 연기 구름이 따스한 텍사스 아침 속으로 치솟았다.
소년의 노새는 도시 변두리에서 가축을 대신 돌봐 주고 돈을 받는 어느 멕시코 가족에게 맡겨 두었더랬다. 소년은 사나운 얼굴로 씻씻대며 그곳에 도착했다. 안주인이 문을 열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노새 내놔요. 소년이 씨근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소년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집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소년은 집을 돌아 걸어갔다. 뒷마당에 말들이 묶여 있고, 울타리에 기대 세워진 납작한 수레 가장자리에 칠면조가 주르르 앉아 내다보았다. 안주인이 뒷문으로 나왔다. 니토.(니토.) 그녀가 외쳤다. 벵가. 아이 운 카발예로 아키. 벵가.(여기로 와요. 말 주인이 왔어요. 여기요.)
소년은 마구간에 딸린 창고로 들어가 남루한 안장과 둘둘 만 담요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구간에서 자기 노새를 빼내어 생가죽 고삐를 씌우고 울타리로 끌고 갔다. 소년은 어깨를 노새에 기댄 채 안장을 척 얹고 뱃대끈을 조였다. 노새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며 머리채를 울타리에 비볐다. 소년은 노새를 끌고 뒷마당을 가로질렀다. 노새는 귀에 뭐라도 들어간 양 계속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소년이 노새를 끌고 길로 들어섰다. 멕시코인의 집을 지나치는데 안주인이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소년이 등자에 발을 거는 모습에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해진 안장에 털썩 올라앉아 노새를 앞으로 몰았다. 그녀는 대문간에서 발을 멈추더니 소년이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시내를 도로 가로지르며 보니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활활 타오르는 호텔을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은 텅 빈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두세 사람이 말 등에 앉은 채로 불구경을 했는데, 그중 하나는 판사였다. 소년이 지나치자 판사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말더러도 소년을 보라는 듯 판사가 말 머리를 틀었다. 소년이 돌아보자 판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노새의 옆구리를 살짝 치고는 낡은 석조 요새를 지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멀어져 갔다.
2초원을 가로지르다 — 은둔자 — 껌둥이의 심장 — 폭풍 몰아치는 밤 — 다시 서쪽으로 — 소몰이꾼 — 친절 — 다시 길을 떠나다 — 시체 수레 — 샌안토니오 벡사 — 멕시코 술집 — 또 다른 싸움 — 폐허가 된 교회 — 성구실의 시체 — 여울에서 — 강에서 멱을 감다
구걸의 나날이고 도둑질의 나날이다. 자기 자신을 제하고는 개미 한 마리 없는 길을 나아가는 노새 위의 나날이다. 소나무 숲을 벗어나 저 앞에 끝 간 데 없이 이어진 저지대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가다 보니 어둠이 뇌성처럼 떨어지고, 선득한 바람에 잡초가 빠드득 이를 간다. 밤하늘에 별이 어찌나 총총한지 검은 공간이 동이 나다시피 했다. 별은 밤새 쓰라린 호를 그리며 추락하지만 그 수는 도통 줄어들지 않는다.
소년은 일개 시민에 대한 두려움으로 왕의 도로2)에서 벗어난다. 초원의 자그마한 늑대들이 밤새 울부짖고서야 내린 새벽, 소년은 풀이 우거진 마른 개천 바닥에 바람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다. 두 발이 느슨하게 묶인 노새가 소년 위에 서서 빛이 배어 드는 동녘을 바라본다.
떠오르는 태양은 강철 빛을 닮았다. 노새에 오른 소년의 그림자가 수킬로미터에 걸쳐 기다랗게 늘어진다. 소년은 잎으로 만든 모자를 머리에 쓰고 있지만, 잎사귀는 진즉 햇볕에 바싹 말라 갈라진 지 오래다. 마치 새를 쫓다 말고 밭에서 달아나 방황하는 허수아비 같다.
저녁 무렵 나지막한 언덕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줄기가 눈에 띈다. 어스름이 깔리기 전 소년이 문가에 당도해 고함치자 늙은 은둔자가 나무늘보처럼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고독에 반쯤 실성한 눈은 뜨거운 철사 우리에 갇힌 양 붉은 테두리가 쳐져 있었다. 그래도 몸집은 제법 실해 보였다. 소년이 노새에서 내리는 뻣뻣한 모양새를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거센 바람에 누더기 넝마가 나부꼈다.
연기를 보고 왔어요. 소년이 말했다. 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늙은 은둔자는 때가 엉긴 머리칼을 긁적이며 땅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몸을 돌려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소년이 뒤를 따랐다.
안은 어둠과 흙냄새로 가득했다. 흙바닥에 자그마한 모닥불이 타오르고, 가구라고는 한쪽 모퉁이에 겹겹이 쌓인 가죽뿐이었다. 노인은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엮은 나지막한 천장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발을 질질 끌며 어둠을 갈랐다. 노인이 흙바닥에 놓인 양동이를 가리켰다. 소년은 몸을 숙여 양동이에 둥둥 떠 있는 바가지를 집어 물을 퍼 마셨다. 물은 짭조름하고 유황 맛이 돌았다. 소년은 연거푸 들이켰다.
밖에 있는 가엾은 노새한테도 물 좀 줘도 될까요?
노인이 주먹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때리더니 시선을 이리저리 데굴거렸다.
물은 제가 다시 길어 놓을게요. 우물이 어디 있는지만 말해 주세요.
뭘로 먹이려고?
소년은 양동이를 바라보다가 어스레한 오두막 안을 둘레둘레 살폈다.
노새가 주둥이를 댄 양동이에 내 입을 댈 수는 없어. 은둔자가 말했다.
못 쓰는 양동이나 그 비슷한 거라도 없나요?
없어. 은둔자가 소리쳤다. 없어, 없다고. 노인은 움켜쥔 두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소년이 일어나 문밖을 내다보았다. 제가 알아서 찾을게요. 우물은 어디 있나요?
언덕 위에. 길을 따라가.
너무 껌껌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길이 푹 파여 있으니 발 닿는 대로 걸어가. 노새를 따라가면 될 거야. 나는 못 가.
소년은 바람 속으로 나와 노새를 찾았지만, 노새는 없었다. 멀리 남쪽에서 번개가 소리 없이 희뜩였다. 몸부림치는 잡초들 사이로 길을 따라 올라가니 노새가 우물 앞에 서 있었다.
모래 가운데 난 구멍 주위로 돌덩이가 쌓여 있었다. 마른 가죽 한 장이 뚜껑 대신 덮여 있고, 그 위에 돌이 올려져 있었다. 생가죽 손잡이가 달린 두레박이 매끈매끈한 가죽 밧줄에 대롱거렸다. 두레박 손잡이 한쪽에는 돌멩이를 매달아 쉽게 기울어져 물이 잘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노새는 가죽 밧줄이 늘어지며 두레박이 내려가는 광경을 소년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소년은 두레박을 세 차례 길었고, 노새가 물을 쏟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죽 덮개를 도로 우물에 씌우고는 노새를 끌고 길을 따라 오두막으로 향했다.
물 잘 마셨습니다. 소년이 외쳤다.
문가에 시커먼 형체가 도드라졌다. 안에서 자고 가게.
괜찮습니다.
여기서 자는 편이 좋을걸. 곧 폭풍이 칠 거야.
정말요?
그래, 내 눈은 정확하지.
그럼.
침낭을 가져와. 귀중품도.
소년은 뱃대끈을 풀어 안장을 벗기고 노새의 앞발과 뒷발을 느슨하게 묶은 다음 침낭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닥불 외에는 아무 불도 없었다. 노인은 모닥불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아무 데나 좋을 대로 자리 잡게. 안장은 어디 있나?
소년이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밖에 뒀다가는 짐승들이 먹어 치워 버릴걸. 워낙 먹을 게 없는 곳이라서.
소년은 밖으로 나가다 어둠 속에서 노새와 부딪쳤다. 노새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꺼져, 자식아. 소년은 안장을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바람에 날려 가기 전에 문을 단단히 붙들어 매게. 노인이 말했다.
널빤지를 다닥다닥 붙여 만든 문은 가죽 경첩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소년은 문을 흙바닥 위로 질질 밀어 가죽 끈으로 비끄러맸다.
길을 잃었나 보지? 노인이 말했다.
아뇨, 쉽게 찾았어요.
노인이 휘적휘적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길을 잃어서 여기로 왔느냐고. 모래 폭풍이 불었나? 밤중에 졸다 길에서 벗어났나? 그도 아니면 강도를 피해 이리 온 건가?
소년은 신중히 대답했다. 예, 이리저리 하다 그만 길에서 벗어났어요.
내 그럴 줄 알았지.
오래 계셨어요?
어디에?
소년은 노인과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침낭 위에 앉아 있었다. 여기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엄지와 검지로 코를 쥐고 바닥에 두 줄기 콧물을 뿜어내더니 손가락을 청바지 가랑이에 문질렀다. 고향은 미시시피라네. 노예상이었지. 전혀 부끄럽지 않아.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면서도 한 번도 잡히지 않았어. 하지만 진절머리가 나더군. 껌둥이라면 신물이 나. 뭘 좀 보여 주지.
노인이 몸을 돌려 뒤적뒤적 가죽 사이에서 자그마하니 시커먼 것을 꺼내 모닥불 너머로 건넸다. 소년은 받아 들었다. 말라서 거뭇해진 사람의 심장이었다. 소년이 도로 내밀자 노인은 무게를 어림하듯 심장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딱 네 가지가 있지. 여자, 위스키, 돈, 껌둥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붕을 뚫고 연기를 뱉던 연통이 바람에 신음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윽고 노인이 심장을 치웠다.
이것 때문에 200달러를 썼지.
200달러나 주고 샀다는 건가요?
그래. 이 심장이 달려 있던 껌둥이의 몸값이었지.
노인이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시커멓게 찌든 놋쇠 주전자를 가져와 뚜껑을 열고는 손가락 하나를 찔러 보았다. 먹다 만 마른 토끼 고기가 차가운 기름에 파묻혀 있는데, 온통 연파랑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노인이 뚜껑을 도로 덮고 주전자를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얼마 없지만 나눠 먹을 만해. 노인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군. 노인은 모닥불을 휘저어 가냘픈 뼈를 재 밖으로 쌓아 올렸다.
소년은 대꾸하지 않았다.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죄인으로 산다는 건 참 힘든 일이지.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모든 사람에게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