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을 위한 요한복음Ⅱ
IVP(InterVarsity Press)는
캠퍼스와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는
IV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출판부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문서 운동을 실천합니다.
ⓒ 2002, 2004 Nicholas Thomas Wright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John for Everyone (part 2) published by SPCK
36 Causton Street, London SW1P 4ST, England.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of SPCK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This Korean edition ⓒ 2011, 2020 by Korea InterVarsity Press
156-10 Donggyo-ro, Mapo-gu, Seoul 04031, Republic of Korea.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를 통하여 SPCK와 독점 계약한
IVP에 있습니다. 신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올리버에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요한의 말씀을 기억하며
한국어판 서문
이제 이 시리즈가 한국어로도 출판된다니 참으로 기쁘다. 이 시리즈 집필을 시작하면서 내가 기도한 소망이 있다. 바로 세계 곳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이 시리즈의 도움으로 성경 읽기를 즐기고 유익을 얻는 일이다. 이제 그러한 소망과 기도가 실현되었으니,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다.
유럽 곳곳에서는 교회 수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매우 흥미진진하다. 수적으로 증가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신자들이 신앙을 배우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언제나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온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 회중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성경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이 시리즈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다.
따라서 한국의 친구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이 시리즈를 사용하여 신약을 읽을 때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여러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이 낡아빠졌고 현실 적합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많은 세력과 세속주의에 맞서 분투하는 우리 서구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면 감사하겠다. 다가오는 세대에 여러분과 나는 물론 전 세계의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과 성경, 서로에게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를 알릴 기회를 맞았다. 우리가 이 기회를 지혜롭고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또한 이러한 큰 과제를 수행하는 데 이 시리즈가 작은 몫이나마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국 독자들을 축복하며 따스한 마음을 전한다.
톰 라이트
서론
예수님을 전하려고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선 그는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이 메시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그날은 위대한 날로서, 교회의 탄생일로 불리기도 했다. 하나님의 영이 큰 바람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들을 휩쓸고 지나가자, 그들은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깊이 의식하게 되었다. 그들의 지도자 베드로는 제 발로 일어서서, 세상을 영원히 바꾼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고 많은 군중에게 설명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거짓말하고 저주하며 예수님을 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고서 어린애처럼 목 놓아 울던 그가 아니었던가. 바로 그런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이제 베드로가 온 세상을 위해 시작했다. 새로운 삶과 용서, 새로운 희망과 권능이 오랜 겨울이 지난 후 봄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세상에서 새 일을 행하실 새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새 시대는 바로 그때 그곳에서부터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멀리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행 2:39). 이 약속은 단지 당신 옆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약속은 놀라우리만치 순식간에 실현되었다. 갓 태어난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알려진 세계 곳곳으로 널리 확산되었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을 위한 약속이 성취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저술을 통해서였다. 이 짧은 글들(대개 편지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 널리 회람되었고, 사람들은 열심히 읽었다. 그 저술들은 결코 종교적·지적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역사적 증거와 원어(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어로 썼다)의 의미, 여러 저자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세계와 그들 자신에 대해 말한 내용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시리즈 역시 그러한 연구 작업에 밀접하게 기초한다. 그러나 이 시리즈의 주안점은 모든 사람, 특히 책을 읽으면서 통상 각주와 그리스어를 거들떠보지 않을 사람들도 핵심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책 뒤에 ‘용어 풀이’를 실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용어 풀이에는 반드시 의미를 알고 넘어가야 할 핵심 단어들을 수록하고, 그 의미에 간략한 해설을 달았다. 본문에서 별표(*)를 붙인 단어가 나올 때 ‘용어 풀이’를 참고하면 관련된 사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신약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일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필자의 사역(私譯)을 사용했다. 이는 더 공식적이고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한 일부 표준 번역본의 어조를 반드시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물론 최대한 원어에 가깝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나의 주된 목표는 말씀이 일부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늘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책이었다. 한편으로, 요한복음은 모든 복음서 중에서 가장 단순하다. 다른 한편, 요한복음은 가장 깊이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친구가 쓴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과 성취를 조금씩 더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다각도에서 살펴보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도우면서 남은 생애를 보낸 사람이 쓴 것 같다. 수백 년간 무수한 사람들이 이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온정과 빛과 약속으로 충만한 실제 인물로 다가오신다고 느꼈다. 사실 요한복음은 세계 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책 가운데 하나다. 요한복음의 탁월성은, 높은 학식을 갖춘 고상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겸손과 소망으로 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 신비를 드러내는 데 있다. 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요한복음을 여기에 내어놓는다!
일러두기
•이 책에 나오는 성경 본문은 저자의 사역(私譯)을 우리말로 옮긴 『하나님 나라 신약성경』을 사용했다. 국내의 다른 역본을 사용한 경우에는 괄호 안에 별도로 표기했다.
•본문 중 앞에 별표(*)가 붙은 단어는 책 뒤의 용어 풀이에 저자의 설명이 나와 있다.
요한복음 11:1-16
나사로의 죽음
1베다니에 나사로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었는데, 병이 들었다. 베다니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다가 사는 마을이었다. (2마리아는 주님께 몰약을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은 여자다.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빠였다.) 3이에 자매들은 예수께 전갈을 보내 말했다. “주여,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 4예수께서 전갈을 받고 말씀하셨다. “이 병으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를 통해 영광을 받을 것이다.” 5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 여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6예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일단 계시던 곳에 이틀을 머무셨다. 7그런 다음에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유대로 돌아가자.” 8제자들이 대답했다. “선생님, 방금 전까지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정말 거기에 다시 가시겠다는 뜻입니까!” 9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 아니냐? 낮에 다니면 헛발을 딛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의 빛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10하지만 누구든 밤에 다니면 헛발을 디딜 것이다.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 11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를 깨우려 한다.” 12제자들이 대답했다. “주여, 그가 잠들었다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13그들은 예수께서 평범한 잠을 언급하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실 그의 죽음을 말씀하셨다.) 14그러자 예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15사실 너희를 위해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아 기쁘다. 너희 믿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게 가자.” 16쌍둥이라는 이름의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갑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는 편이 낫습니다.” |
왜 그들은 무언가를 ‘하지’ 않았을까?
내 친구 하나가 성장 일로에 있는 활기찬 교회의 목회자로 청빙받았다. 친구와 그 가족들은 빨리 가서 이 새로운 기회에 부응하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교회 측에서는 그들이 살 집 문제를 놓고 일부러 질질 끄는 듯 보였다. 현재의 사택은 도저히 적합하지 않다. 새로운 사택을 지을까? 교회 건물을 개조할까? 조금 떨어진 곳에 잠시 살면서 다른 대안을 기다려야 할까?
그사이 교회 부근에 적당한 집이 매매 시장에 올라왔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친구의 가족들은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기도하고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했는데도,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친구가 그 교회에서 임직식을 할 때가 되었다. 중요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결정적 사건은 계속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온 교회가 기도하면서, 일거에 정체가 해소되었다. 결정이 내려졌다. 그들이 처음부터 점찍어 둔 가장 적합한 집의 가격이 이제야 내린 것이다. 교회 당회는 그 집을 샀고, 친구의 가족은 이사하여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던 몇 달간의 절망을 잊을 수가 없다. 적절한 해결책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무시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모두 지쳐 갔다. 사람들은 짜증이 났고, 우리가 어디선가 큰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이번처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않았거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여러 이야기를 알고 있다. 많은 면에서 세상의 이야기가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나라와 인종 간의 정의와 평화, 번영과 화합을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애먹이지 않으신다. 나는 그 점을 분명히 확신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그분의 타이밍은 우리의 타이밍과 다르다.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는 가장 극적인 실마리 하나가 이 본문 6절에 있다. 두 자매가 보낸 전갈, 도움 요청, 비상 상황이니 얼른 와 달라는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다. 가려는 준비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가고 있다”라는 답장도 보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냥 그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사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베다니에서 사랑하는 오빠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과 씨름하고 계셨다. 제자들은 제대로 짚었다(8절).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행여 당장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아니시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동네로, 올리브산 동쪽 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일단 거기 도착하면, 당신은 거룩한 도시에 쉽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게 된다. 게다가 이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나사로가 등장하는 이 경이로운 이야기,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이 이야기가 나사로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장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대로 돌아가지 마시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50절). 또 예수님이 아버지께 자기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감사하셨을 때(41-42절), 이것은 요단강 건너편 광야에서 그 신비하고 조용한 이틀을 지내면서 하신 기도(10:40)를 가리키신 말씀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위해 기도하시되, 자신의 계획 및 동선과 관련해서도 지혜와 지침을 구하셨다. 이 둘은 서로 맞물린다. 한편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위해 하실 일은 당국자들이 그분을 쫓아내려 하는 주된 구실이 될 것이다(45-53절). 다른 한편, 이 일은 요한복음을 지나가는 우리의 자취를 표시하는 일련의 ‘표적’ 중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전모가 무엇인지, 특히 그분의 삶과 사역이 어떻게 절정의 해결책에 도달하는지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표적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기다림의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여느 때처럼,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자신이 자주 언급하신 그 친밀한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셔야 했다. 그분은 그런 뒤에야 행동하실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바라는 방법이 아닌, 그들이 꿈도 꾸지 못한 방법으로 말이다.
‘베다니’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집’이란 뜻이다. 실제로 베다니가 그랬다는 여러 증거가 있다. 가난하고 궁핍하고 병든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곳, 도시 외곽에 약간 떨어진 일종의 보호소 같은 곳. 예수님은 전에도 아마 여러 번 그곳에 가신 적이 있었다. 예수님이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거듭 표명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기뻐하고 병든 사람들이 낫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그들에게 보장하신 데서 드러나듯이, 예수님은 베다니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요한은 2절에서, 나중에 설명할 어떤 순간(12:1-8)을 앞질러 지시한다. 바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 왜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느냐며 야단법석이 벌어진 그 사건이다. 가난한 집에서는 사치가 달갑지 않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놀라게 하시며 그들의 기대를 뒤엎으셨는가다. 그분은 자매들이 요청했을 때는 가지 않으셨다. 또 제자들이 만류했는데도, 결국 그분은 가셨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뜻으로 ‘잠’을 언급하셨지만, 제자들은 보통 잠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중간(9절)에 예수님은, 낮에 다니는 사람은 헛발을 딛지 않지만,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헛발을 딛는다는 이상한 속담을 말씀하셨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의 의도는 이런 것 같다. 즉 당신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판단대로 길을 가려고 하면, 당신은 어둠 속에 있을 것이기에, 넘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예수님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분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본다면,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지 의아해하며 며칠, 어쩌면 몇 년을 보낸다 해도, 마지막에는 올바른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본문 말미에는 요한의 중요한 조연급 인물이 소개된다. 도마는 충성스럽고 억척스러웠다. 판단력은 둔했지만, 예수님의 명령을 진득하게 따르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도마의 말에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예감이 짙게 배어 있다. “우리도 가서, 그와 함께 죽읍시다.” 물론 그들은 그분과 함께 죽지 않는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올바른 반응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고, 우리의 기대와 계획은 꺾이기 일쑤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간다면,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가더라도, 우리는 빛 가운데서 걷게 될 것이다. 반면에 오만하게 자신의 계획과 야망을 따라 밀고 간다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 11:17-27
부활과 생명
17예수께서 도착해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벌써 나흘이 되었다. 18베다니는 예루살렘 부근, 삼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많은 유대 사람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와서 그들 오빠의 일을 두고 위로했다. 20예수께서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를 만나러 갔다. 그동안 마리아는 집에 머물러 있었다. 21마르다가 예수께 말했다. “주여!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럼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하지만 지금도 저는 주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 23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24마르다가 말했다.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오빠가 다시 살아날 줄 압니다.” 25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누구든 나를 믿는 사람은 설사 죽더라도 살 것이다. 26그리고 누구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분명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마르다가 말했다. “주여, 그렇습니다. 주님이 메시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에 오시기로 한 분임을 제가 믿게 되었습니다.” |
최근 당신은 “만약 …했다면”이라는 말을 해 본 일이 있는가?
만약 그가 그 차 앞으로 걸어 나오지만 않았다면….
만약 그가 좀더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만약 지난 대선에서 다른 사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면….
만약 바로 그 주간에 휴가를 가기로 결정하지만 않았다면….
그게 무엇이든 시계를 되돌려 놓고 싶은 아린 느낌을 알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같은 영화가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기나긴 역사 속을 이리저리 이동하여 이전 세대의 사건을 바꾸어 놓아, 현재와 미래의 일들이 전혀 다르게 펼쳐지도록 한다. 물론 이것은 아쉬운 꿈일 뿐이다. 이것은 향수병 같은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라, 만약 과거가 조금만 달랐어도 가능했을 수 있는 현재에 대한 향수병이다. 모든 향수병이 그렇듯이, 모두 망상에 불과한 줄 알면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순간의 추억을 달래는 달콤쌉싸름한 느낌이 거기에 있다.
여기서(21절)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한 “만약”에는 이 모든 의미와, 그 이상이 담겨 있다. 마르다는, 만약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면 나사로를 고쳐 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예상보다 적어도 이틀이나 더 걸려 그곳에 도착하셨다는 걸 그는 알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듯 나사로는 이미 사흘 전에 죽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혹시….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 또 그다음 그들이 나눈 대화는, <백 투 더 퓨처>와 같은 아이디어가 단지 영화 제작자의 공상만은 아님을 보여 준다. 과거를 들여다보며 가능했을 수도 있는 일(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 대신, 예수님은 미래를 보라고 마르다를 초청하신다. 미래를 바라보게 하신 다음에는, 그 미래가 느닷없이 현재로 파고들었다고 상상하라고 요청하신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초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현재 본문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어느 곳보다 또렷하고 생생하게 그러한 주장을 펼친다.
먼저,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미래를 지시하신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은 물론 마르다도 이것이 유대교의 정통 가르침임을 알고 있다(일부 유대인, 특히 *사두개인은 미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단 12:3을 비롯한 다른 구약의 핵심 본문을 근거로 미래의 부활을 믿었다). 그들은 이사야 65장과 66장의 비전을 공유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 완전히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 우리 세계와 비슷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힘은 더해지고, 그 고통과 추함, 슬픔은 사라진 새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 그 새 세계에서는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 몸이 주어져, 새 창조의 *생명을 공유하고 누릴 거라고 그들은 믿었다.
마르다도 이것을 믿는다. 하지만 24절에서 상당히 단조로운 그의 대답은, 이런 믿음이 당장은 큰 위로가 되지 못함을 보여 준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대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미래가 현재로 들이닥쳤다. 새 창조, 또 그와 함께 부활이 역사 끝에서 역사 한복판으로 진입했다. 우리가 가끔 말하고 노래하듯이, 예수님은 단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것만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미래에서 현재로, 뒤죽박죽 엉켜 있는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도 그에 버금가는 진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부활’은 한낱 교리가 아니다. 부활은 한낱 미래의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격이며, 그분은 마르다에게 신뢰와 희망의 엄청난 도약을 하라고 촉구하시면서 여기 그 앞에 서 계신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만약 그랬다면”을 “만약 예수님이라면”으로 바꾸도록 도전하고 촉구하신다.
만약 예수님이 그가 믿게 될 그런 분이시라면….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 예언자들이 약속하신 분, 세상에 오실 분이라면….
만약 그분이 하나님의 친아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신비롭고 새롭게 임재하시는 분이라면….
만약 그분이 인격화한 부활, 장차 실현될 생명이시라면….
이 이야기는 이 대목에서 중단되면서, 마르다가 자기 여동생에게 가는 동안 계속 긴장감을 준다. 하지만 이 긴장감—아무튼 요한은 이야기의 달인이다—은, 동일한 질문을 우리가 혼자서 곰곰이 생각할 여유를 주려는 장치다. 이것은 등장인물과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마르다는 활동적이고 분주한 인물이고(눅 10:38-42을 보라), 마리아는 차분한 인물이다. 우리는 곧 마리아의 반응을 볼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그렇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예수님께 그분의 방법이 이상하다고 우리의 생각을 말해야 직성이 풀린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또 “만약 그랬다면”을 지금 마음에 담고 있다면, 마르다의 입장이 되어 보라. 뛰어가서 예수님을 만나라. 그분께 문제를 아뢰라. 왜 좀더 빨리 오시지 않았는지, 왜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두셨는지 그분께 여쭈어 보라.
그런 다음 깜짝 놀랄 대답을 들을 준비를 하라. 나는 그 대답이 무엇일지 예언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놀라움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어떤 모습일지는 알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미래에 속한 새로운 요소로 당신의 문제를 다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가 복음과 희망,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당신의 현재 시간 속으로, 혼돈과 슬픔 속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그때처럼 지금도, 이 모든 것의 열쇠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낳으신다. 하지만 이 일은 기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세계는 어중이떠중이 모든 이들을 쓸어 담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에 동참하는 열쇠는 믿음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 그분이 하나님의 메시아, 다시 말해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죽음 속으로 오는 분이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28-37
예수께서 무덤에 가시다
28이렇게 말한 다음 마르다는 돌아가서 동생 마리아를 불러 살짝 말했다. “선생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찾으셔.” 29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께 갔다. 30예수께서는 아직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르다를 만나셨던 그 자리에 계셨다. 31마리아를 위로하며 집에 함께 있던 유대 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짐작하고 따라갔다. 32예수께서 계신 곳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분을 보고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3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그와 함께 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깊이 동요하시고 몹시 괴로워하셨다. 34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말했다. “주여, 와서 보십시오.” 35예수께서 눈물을 터뜨리셨다. 36유대 사람들이 말했다. “그분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좀 보세요!” 3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그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했잖은가? 이 사람이 죽지 않게 무언가 할 수 없었단 말인가?” |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문화적 장벽 중 하나는 장례 절차다.
세계 여러 곳에서는 지금도 예수님 시대에 했던 것과 아주 비슷한 방법으로 죽은 사람을 애도한다. 장례 행렬이 관을 들고, 거리를 지나, 장지나 화장터까지 간다. 모든 사람, 특히 여자들이 흐느끼며 운다. 마음을 뒤흔드는 구슬픈 음악이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애도가 시작된다. 한 사람의 슬픔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우리가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구체적 슬픔을 공유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슬픔이 우리를 감염시키는 현상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신비로운 특징 가운데 하나다. (심리학자들은 우리는 모두 한두 가지의 깊은 슬픔을 안고 있으며, 더 절박하게 슬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이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고 지적할 것이다.)
다른 문화, 특히 세속화된 현대 서구 사회에서 우리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터득했다. 40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한 남편과 사별한 한 노부인을 방문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분은 이것저것 준비하고, 전화를 걸고, 옷을 정리하고, 장례식에서 어떤 옷을 입어야 좋을지 고민하느라 분주했다. 장례식 날에는 밝고 활기차게, 가족과 친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중에 우리가 찾아가서 함께 차를 마실 때에도, 유쾌하게 잡담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옛날 방식, 오늘날에도 세상 대부분의 지역에서 해 온 방식이 실제로 훨씬 정감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픔을 감추거나 없는 것처럼 꾸미는 건 아무 유익이 없다. 우리가 희망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바울이 말할 때(살전 4:13), 이 말은 우리가 절대로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말은, 세상에 두 종류의 슬픔, 즉 희망 없는 슬픔과 희망 있는 슬픔이 있다는 뜻이다. 희망 있는 슬픔도 슬픔이다. 그런 슬픔도 아주, 아주 괴로울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눈물을 터뜨리신다(35절). 이것은 전체 *복음서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 중 하나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을 우러르고 죽음을 다스리는 그분의 승리를 기뻐한 초대교회에서 이런 일을 꾸며 낼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요한이 그 속에서 우리가 깨닫기 바라는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우리는 일부 옛날 저자들처럼, 예수님의 눈물을 단지 그분이 사람처럼 ‘행세’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진짜 인간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데서 만족하면 안 된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예수님의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그분이 모든 사람처럼 감정이 있는, 살과 피를 지닌 실제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복음 전체에서 요한은 훨씬 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특히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단지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육체가 된 *말씀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1:1-14). 세상을 만드신 말씀이 아이처럼 친구의 무덤에서 우신다. 잠시 멈추고 이것을 깊이 묵상할 때에만 우리는 요한복음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할 것이다. 홀로 고립된 하나님 상을 떨어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신 말씀이 세상의 울음을 우시는 그림을 채워 넣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자마자 눈물을 터뜨리셨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라고 예언자는 말했다(사 53:4). 예수님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또 만약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그들이 전해 주었을 이야기와 달리) 무대에 난입하여, 눈물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으며, 나사로는 죽은 게 아니라 잠들었을 뿐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신다(막 5:39을 보라). 그분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 곧 명백히 드러날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할 일과 아버지께서 자기를 통해 하실 일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그분이 승리에 도취되었다거나, 자신이 얼마나 현명한지 보여 줄 비밀 공식을 들고 나와서 으스대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슬픔과 고통에 친숙하고, 그것에 공감하여 눈물까지 흘리는 슬픔의 사람이 있다.
마리아와 무리의 눈물 탓에 예수님 마음 안에 있던 어떤 슬픈 감정이 요동친 것일까? 우리는 그저 짐작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짐작한 것 중에서, 과거에 경험한 다른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죽음에 대한 슬픔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다. 이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죽으실 때 제기될 질문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게 많은 표적을 행했던 사람이 다른 표적을 행해서, 자기가 죽지 않을 수는 없었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했던 이가 마지막에 자신을 구할 수는 없었는가? 요한은 요한복음 곳곳에 둔 수많은 암시와 이미지로 우리에게 대답한다. 오직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오직 그분이 인류의 공동 운명에 친히 동참하심으로써, 세상은 구원될 수 있다. 35절의 예수님의 눈물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죽음까지 일직선이 그어진다. 그 죽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슬픔만이 아니라 세상의 운명까지 공유하신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일에 대한 암시도 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예수님은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바로 한두 주 후에, 막달라 마리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 갔는데, 그분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릅니다”(20:13). 나사로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 사이에 울리는 메아리에 귀 기울여 보라. 이것은 요한이 이 이야기를 전한 이유 중 하나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사건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복음서가 12:9-11에 암시된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나사로를 보호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아마 요한이 저술하던 당시에는 이런 위험이 과거지사가 되었을 것이다.)
“와서 보십시오.” 머무시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던 초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던 것(1:46)과 똑같이, 그들은 대답한다. 이것은 가장 단순한 초대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닿는다. “와서 보십시오.” 우리는 눈물에 젖어 가장 깊은 슬픔과 비애가 있는 곳으로 예수님을 이끌면서 그분께 말씀드린다. “와서 보라.” 예수님은 슬픔을 거쳐, 이제 그분이 빛과 사랑과 *부활의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그곳으로 우리를 이끄시면서 말씀하신다. 게다가 더 많은 것을 연상시키며 말씀하신다(21:12). “와서 아침을 들어라.” 새날이 동트고 있다. 우리는 밤이 심히 어둡고 눈물은 심히 쓴 곳에서 살지만, 멀지 않은 데서 빛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요한복음 11:38-46
나사로를 일으키시다
38예수께서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괴로워하셨다. 그분은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이었고, 그 앞에는 돌이 놓여 있었다. 39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을 치워라.” 죽은 사람의 동생인 마르다가 말했다. “하지만 주님, 냄새가 날 거예요! 벌써 나흘째입니다!” 40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41그들은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을 들으시니 감사합니다! 42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 말을 들으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한 것은 주위에 둘러선 무리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그들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 크게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44그러자 죽은 사람이 나왔다. 그의 손과 발은 세마포 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45이 모든 일의 결과로,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몇이 그분을 믿었다. 46하지만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린 사람도 있었다. |
어젯밤에 고대 생명체처럼 보이는 화석 유물에 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것은 사람과 비슷해 보였지만, 훨씬 키가 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장류나 유인원과도 상당히 달라 보였다. 이제 고고학자들은 탐험가들(이 모든 일은 중국의 가장 외진 몇몇 산맥에서 일어나고 있다)과 협력하여 이 생물이 지금도 존재하는지 알아보고 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고, 귀추가 주목된다. 하지만 나를 가장 매료시킨 건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서로 연결시키는 방식이었다. 여기 동물의 일부로 보이는 화석이 있다. 여기 같은 동물의 일부였을지 모르는 뼈가 있다. 여기 고산 지대에, 깊은 동굴 속 바위에 달라붙은 털 한 가닥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짜 맞출 수 있을까? 퍼즐 한 조각이 다른 퍼즐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 본문은 예수님의 전체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셨을 때, 그분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방 밖으로 나가 달라고 하셨고, 일을 마친 뒤에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엄청난 군중 앞에 서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외치신다. (그 당시 많은 경우처럼, 무덤은 분명 커다란 바위가 입구를 막고 있는 동굴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죽은 남자가 밖으로 나온다. 오싹하는 공포와 주체 못할 기쁨이, 마치 진흙과 액체금처럼 한데 엉켜 있는, 심장을 멎게 하는 순간이다. 이건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 감동을 느끼지 못해 경외심과 감사와 희망으로 이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글을 읽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거나 마음이 돌처럼 굳은 자다.
장례를 치른 다른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일으키지 않으신 경우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신비한 독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된 신비가 이 순간에 깃들어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한 작은 공간에 선명하고 뚜렷하게 집중시키셨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사랑과 능력은 나머지 세상으로 분출될 것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날카롭게 제기한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이 본문에서 가장 대단한 일은 아니다. 가장 대단한 일은,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치 고고학자가 화석과 뼈를 짜 맞추려고 애쓸 때처럼, 풀리지 않을 수도 있는 두 수수께끼 사이의 연관성이다.
우선, 본문에서 예수님이 대답하시지 않은 마르다의 불평에서 출발해 보자. 늘 걱정하며 분주한 정 많은 마르다는, 이런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 돌을 옮기지 마십시오! 냄새가 날지 모릅니다!” 그는 사람의 몸이, 특히 더운 기후에서는 죽고 나서 기껏해야 사흘 안에 부패하기 시작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기후에 속한 많은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당일 장례를 치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가 믿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완곡한 설명 외에는 마르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이제 그분이 하실 일이 그 말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나사로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부패가 시작되었을까?
설명이 생략된 다른 작은 실마리는, 사람들이 돌을 옮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를 일으킬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자기 말을 들어주셨다고 아버지께 감사하신다. 그리고 자기를 믿어야 함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 주게 해 달라는 약간 색다른 설명을 덧붙이신다.
어떻게 이 두 실마리를 연결하여 의미가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요한이 생략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람들이 무덤에서 돌을 옮겼을 때 냄새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가 그 함의를 파악하기를, 또 거기에 강하게 매료되기를 바란다. 그 순간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았거나, 더 이상 죽은 존재가 아님을 아셨다. 그의 몸은 부패되지 않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마디 명령뿐이었다. 그러면 앞을 보지 못하는 나사로는, 발을 끌며 밖으로 나와, 수건을 벗어던지고, *생명과 빛의 세계로 풀려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지점에 도달하셨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결론은 아주 놀랍다. 요단강 건너편에서 조용히 보내신 이틀 동안(11:6), 예수님은 * 제자들에게 문제를 말씀하시기도 전에 기도하셨다. 나사로가 죽겠지만, 부패되지 않고 보존되도록 기도하셨다. 마침 그들이 베다니에 당도했을 때, 무덤 안의 시신이 온전히 보전되어 생명을 되찾을 준비를 갖추도록 기도하셨다. 사람들이 돌을 옮겼을 때, 그분은 자기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아셨다.
물론 이런 설명은 이 이야기 배후에서 불거지는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제자들은 유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예수님께 경고했다(11:8). 이것을 암담한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도마는 가서 그분과 함께 죽자고 제안한다(11:16). 그사이 예수님은 이제 고인이 된 소중한 친구를 위해, 그의 몸이 죽어 장례를 치른 뒤에도 부패하지 않고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두 가지, 곧 나사로의 운명과 예수님의 운명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위해 기도하신 다음 그를 다시 일으키시면서, 지금 자신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아셨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걷는 이 길이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한 준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고 말이다.
물론 둘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나사로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그저 죽음의 과정이 역전되었다. 그는 다시 병에 걸릴 수도 있었다. 언젠가는 그도 죽을 것이다(12:10이 암시하듯이, 그런 일이 조금 더 빨리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걸어가실 여정은 죽음을 거쳐서, 그 반대편에 있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두 장에 이를 때 우리는 이 신비 속을 들여다볼 것이다.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예수님의 믿음과 기도를 묵상해 보자. 본문에서 보았듯이, 우리도 인생의 퍼즐 조각 두세 개가 서로 들어맞아야 하는데, 어떻게 맞는지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를 만나곤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실마리가 기도와 믿음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도와 기다림의 시간이 예수님께 필요했다면,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요한복음 11:47-57
가야바의 계략
47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해서 물었다.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소?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고 있으니 말이오. 48이대로 계속 그를 내버려 두면, 모두가 그를 믿게 될 것이오!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강탈할 것이오!” 49그들 중 하나인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50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소! 당신들에게 가장 유익한 일은 바로 이것이오. 민족 전체가 없어지느니, 차라리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게 하시오.” 51이것은 그가 자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해의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이것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해 돌아가시리라는 뜻이었다. 52또 그 민족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돌아가실 것이라는 뜻이었다. 53그래서 그날 이후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54그래서 예수께서는 더 이상 유대 사람들 가운데 공개적으로 다니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광야 근방 에브라임이라는 고을로 가셨다. 그분은 거기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다. 55유대 사람들의 유월절 때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그들은 예수를 찾았다. 그들은 성전 안에 서서 예수에 대해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그가 명절에 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