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책에 나온 모든 상담 사례는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수록됐으며, 일부는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각색됐음을 밝힙니다. 모든 사례는 가명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정의하는 말 중
‘피를 나눈 사이’만큼 뜨거운 말이 있을까요?
‘타인’보다 차가운 말은 어때요?
이 책은 뜨거워야 하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사이, 나이 든 부모와 나이 들어가는 자녀들의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저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며 지금은 70대 후반의 할머니가 된 엄마와 이미 세상을 떠난 아빠를 수없이 만났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엄마는 설날 아침 세배를 받으면 나이 한 살을 더 먹게 된다며, 세배받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나이에 예민하게 반응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설날이 되기 한참 전부터 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할머니가 되어 계십니다.
이 책은 제가 쓴 책들 중 출간 순서로는 7번째지만 집필한 순서로는 6번째가 됩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이번엔 원고를 오래 붙잡고 있었던 만큼 특히 더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제가 상상만 해봤지 실제 경험한 적 없는 노년의 나이 듦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은 나의 나이 듦이 아닌, 나보다 조금 먼저 노인이 된 부모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정리된 책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심리상담과 교육 그리고 지인들의 생생한 경험을 조금씩 다듬었습니다. 더러는 이야기 속 부모가 안쓰러웠고, 더러는 이중부양에 심신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버린 자녀에게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때때로 부모님의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떠올라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만나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늘 부모에게는 부족함이 많은 자녀였기에 어쩌면 이 책을 쓰는 동안 저는 용서를 구하고, 이해를 받고, 미뤄뒀던 회복의 과정을 거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저와 같은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감정이 올라옵니다.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만 관계를 이해하며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책은 한 개인이 노년의 생애주기에 접어들면서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문제와 더불어 나이 든 노부모와 살아가는 성인 자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해결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Part 1〉은 인생의 은퇴자가 되어 상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부모의 심리에 대해, 〈Part 2〉는 이중 부양으로 이미 지쳤지만 책임감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자녀의 심리에 대해, 〈Part 3〉는 부모-자녀 간 심리적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경계에 대해, 〈Part 4〉는 차가운 타인이기보다 따뜻한 타인이 되기 위해 알아두면 좋을 관계를 위한 3가지 제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책을 통해 제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는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창시자 프리츠 펄스가 말한 기도문의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가 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한다.
나는 너의 기대에 맞춰 살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도 나를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우연히 서로 일치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프리츠 펄스, 〈게슈탈트 기도문〉 중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어느 날 부모가 되고, 가까운 미래에는 그 자녀의 아이가 되어 다시 살아가게 됩니다. 당연히 우리 중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나이 듦’이 되는 것이죠. 어느 단락은 이해할 수 없었던 노부모의 마음으로, 어느 단락에선 괘씸하기만 했던 자녀의 마음으로 읽어가다 보면 그때 우리가 왜 그렇게 차가운 타인으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서로를 향한 연민의 틈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에 익숙해지다 보면 ‘부모니까, 자녀니까’로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는 것에 소홀해지거나, 아무렇지 않게 침범해버리는 실수를 하곤 합니다. 더 이상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세상 어떤 관계보다 특히, 부모와 자녀는 경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안 되는 관계여야 합니다.
뜨거운 피를 나눈 가까운 사이, 하지만 각자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사랑을 전하는 독립된 타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부모와 자녀들에게 성숙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동시에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공감의 글이길 바라봅니다.
손 정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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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 아쉬운 마음이 며칠 동안 이어졌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존재하지 않기에 슬프고, 애달프며 쉽게 수용할 수 없어 화가 나고 억울해지는 거다. 이것이 바로 상실이다.
나는 이 기분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이 든 엄마의 상실에는 너무 쉽게 “다 그런 거야”라고 인색해질 때가 종종 있다.
‘노인들은 원래 저래’ 하루하루 안 좋아지는 거지, 별 수 없어.’ ‘나이 들면 원래 깜박깜박하고 기억력도 나빠지는 거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인데 어쩌겠어?’ ‘젊어 보이고 싶은 것도 욕심이야.’ ‘병들고 나이 든 부모는 자식한테 그리 반갑지 않지.’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쉽게 말해버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처럼 너무 쉽게 나이에 대해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만나면 고쳐 말해주고 싶다. “니들도 다 늙어.”
시험에 떨어진 사람, 애인과 헤어진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어 위로하는 게 인지상정이라 믿고 있었던 미자는 자신을 쓸모없이 버려진 물건처럼 취급하는 세상과 그 세상의 시선에 동조하는 가족이 밉다. 인생의 무대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것도 속상한데 그저 모든 것을 순리대로 어른답게 받아들이라고 조언하는 선생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다.
30년 동안 작은 미용실을 운영했던 미자는 52세가 되던 해 막내딸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평생 쉬어본 적 없이 일만 했기에 미용실을 정리한 후엔 남편과 함께 여행이나 하며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그동안 종일 서서 일을 했던 무릎과 허리 통증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미뤄뒀던 집안일을 봄날 대청소하듯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더 이상 치울 것도, 갈 곳도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며 두렵기만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남편과 자녀들은 만류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쉬는 것을 즐겨보라며 집에 있기를 권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르게 늦은 나이에도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고, 자신이 너무 빨리 인생에 백기를 든 패배자가 된 것 같아 씁쓸했다.
그토록 늙고 싶지 않았던 미자는 자신이 피하고 싶었던 나이 60대 후반이 되었다. 공원, 정형외과, 집 앞 마트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 전부였다. 사람들은 쉽게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한다. 그런데 미자는 그 60이라는 나이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힘들어도 좋으니 다시 일할 수 있는 나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미자에게 나이는 자신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빼앗아가는 것, 아직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배우에게 이제 당신 역할은 끝났으니 그만 내려오라는 비참한 신호였다.
철학자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도서출판 숲, 2005)에서 노년을 비참하게 보이게 만드는 네 가지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첫째, 노년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게 만든다. 둘째, 노년은 몸을 허약하게 만든다. 셋째, 노년은 삶에서 즐겼던 거의 모든 쾌락을 빼앗아간다. 넷째, 노년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세상에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게 보이길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노년이 겪는 비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제한하고 포기하면서 시작된다. 누가 그들에게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심리적으로는 안정감을 느끼고, 성적 표현에도 자유로우며, 새로운 것들을 여전히 경험하고 싶은 욕구를 빼앗아간 것일까? 바로 자신이다. 그렇다면 나이 탓을 하는 노인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나의 10대, 20대 시절을 떠올려보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기왕이면 누구나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자리에 있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 당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모두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내가 설 수 있는 무대의 높이를 낮춰야 했고, 화려한 무대장치도 포기해야 했다. 어떤 무대는 스스로 겁에 질려 도망쳤고, 어떤 무대는 뽑아주질 않으니 올라가지 못했다. 내가 서고 싶은 무대와 설 수 있는 무대를 두고 수없이 타협해야만 했다. 제한과 타협 속에서 유지해온 직업을 통해 나는 조금씩 인생의 명암(明暗)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노년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노인도 체념하며 포기할 수 있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 타협할 수도 있다. 그저 무대가 조금 바뀌는 것뿐이다. 나이 덕분에 오히려 쓰임 있는 활동,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활동, 이것은 스스로 가치 있는 무대임을 인정할 때 발견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 듦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가져다줄 세상이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나이 듦은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이고, 그로 인해 미래의 희망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 나이 듦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노화를 비롯한 많은 상실의 경험을 동반하므로 우울, 불안, 분노 등의 정서를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절망할 일만은 아니다. 사회 참여나 취미생활을 통한 자기실현의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의 차이다.
자신의 통제 영역 밖의 것에 초점을 맞추면 누구라도 우울해진다. 많은 전문가가 생물학적 노화를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출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으로 ‘자기 나이에 적응’하기를 제안한다. ‘나이’를 인식함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시기가 왔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다.
노년의 무대를 즐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고, 두 번째는 나이듦에 대한 자기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나이만큼 먹어야 하는 약의 개수도 늘어난다는 말을 어디서든 쉽게 한다. 과연 약으로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최근 노인복지 영역에서는 ‘활동적 노화(Active aging)’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서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건강, 참여 및 보장의 기회를 최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30년 넘게 미국의 시애틀에서 노화를 연구한 의사 에릭 라슨의 노화 연구 보고서 《나이 듦의 반전》(도서출판 파라사이언스, 2019)을 보면, 그의 연구 대상은 건강한 노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지였다. 그가 발견한 건강한 노화의 조건은 영양 보충제를 포함한 각종 의료 서비스가 아니라 노화에 대한 수용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능동적 활동을 통해 축적된 회복력이었다.
특별히 소개된 107세의 노인 에반젤린 슐러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녀는 청년기를 사회복지가로 일했고, 은퇴 후에는 구세군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일생을 타인을 돕는 데 헌신했던 거다. 그녀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거나 평화 봉사단에서 봉사자로 활동하고, 여행을 다니며 사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도 가족들도 노년기를 보내며 충분한 만족감을 느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활기 있게 만들었을까?
첫째, 삶을 향한 책임감이었다. 자신이 가진 한계 내에서 목표를 세웠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를 동기부여하는 계획을 세웠다. ‘주 3회, 15분씩 정기적인 활동을 할 것’, 이 간단해 보이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둘째,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과 노화하면 신체적으로 불편을 겪는 일은 피할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남은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적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성과를 위한 도전보다는 정서적으로 의미 있는 것에 목표를 둘 수 있다. 이렇듯 ‘활동적 노화’는 고령의 그녀를 마지막 순간까지 빛나게 한 ‘현명한 노화’로 작용했다.
내가 이 책을 준비하며 접했던 정보들에 의하면 현명한 노화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고,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건강한 청년들에겐 아직 먼 이야기처럼 들리고, 나이 든 노인들에겐 그저 공허하게 들린다. 노년은 쉽게 수용하기보다는 최대한 거부하고 싶은 편에 속한다. 그러니 나 또한 스스로 가지고 있는 노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들을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느리다, 인기가 없다, 외롭다, 활력이 떨어진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한다, 초라하다’처럼 낮은 가치와 연결된 단어들이다.
노인이 안겨준 굴욕감과 패배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미자는 다시 설 수 있는 화려한 무대가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나 직장처럼 이미 지나가 버린 무대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미자는 우울했다. 물론 미자의 생각처럼 노화 자체가 여러 가지 기능을 저하시키며 노인들로 하여금 가치감을 떨어뜨리는 이유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에릭슨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노화의 과정을 수용하지 못하는 낮은 자존감이 우울, 허망함, 무기력을 만들기도 한다.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로 유명한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87세 때 〈뉴욕타임스〉에 노년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우선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그것은 인생의 법칙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신체는 계속 나빠질 거란 사실은 인정하되 절망하지 않기 위해 ‘자아 통합감(Ego-integrity)’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65세 이상의 노년기에는 일생 동안의 사회적 경험에 대한 가치 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아 통합감을 얻기도 하고,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노화나 노년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다. 핵심은 가치 있는 일에 활동하라는 것이다.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면 좋은 것이 생애주기에 따른 역할 변화와 심리적 요인들이다. 발달주기를 토대로 나와 부모, 나의 자녀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생애주기 모델은 대략적 나이를 기준으로 시기적 · 단계적으로 나눈 임의적 구분이라는 점에서 개별성을 모두 포함하지 못한다는 단점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여정에서 각자가 맡게 되는 다양한 역할들의 개념을 파악하고 예상할 수 있다. 또 시기별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사건들에 개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나이대의 인생을 이해하고, 살면서 놓친 인생의 도전 과제들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국의 노년학자 브롬리가 만든 생애발달주기 모델을 통해 성인기부터 노년의 시기에는 어떤 심리발달 과제들이 집중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물론 노년기에 접어든 모든 부모가 동일한 생애 단계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변화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생애발달주기 모델에서 성숙기에 해당하는 나의 시기에는 부모의 사망이 적혀 있다. 75세인 엄마의 시기는 표의 마지막 칸만을 남겨두고 있다. 짧은 시간, 생각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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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대만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당시 대만 여행객들의 필수품 중 하나가 ‘유스 트래블 카드(Youth Travel Card, 청년여행카드)’였다. 지정장소에 가서 여권을 보여주면 발급받을 수 있는데, 관광지에서 이 카드를 제시하면 입장권 등을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으니 관광객들에겐 필수 아이템이었다.
우리 일행도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숙소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일부러 이동했다. 호기롭게 여권을 건넨 후 카드 발급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곳에 있던 두 명의 직원이 뭔가 문제라도 생겼는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덩달아 당황했고, 직원들은 여권의 생일을 가리키며 재차 확인까지 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됐는지 잠시 후 그들이 우리에게 나이를 물었다. 여행 첫날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던 나는 손가락 4개를 친절하게 펴 보이며 ‘포티(Forty, 40)’이라고 말해줬다. 두 사람은 이제야 알겠다는 눈짓을 서로에게 보내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유스 트래블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연령은 15~30세까지라고 말해줬다. 나는 그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고, 방금 전까지 내가 해 보였던 유치찬란한 손동작이 떠올라 빛의 속도로 뒤돌아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나의 별명은 한동안 포티가 되었을 정도로 대만 여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최고의 에피소드인 것은 맞지만, 그때는 참 많이 당황했었다. 겸연쩍었던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내내 “아니, 왜? 나이 많은 사람은 여행도 하지 말라는 거냐”며 불만을 토로했었다.
내 고향은 전라도다. 가끔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사건의 발생 지역이 전라도일 경우 대놓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악의적인 댓글이 달린다. 물론 나를 가리켜 욕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불쾌하다.
과거 다니던 직장에는 회사의 제품을 교육하는 사내 강사들이 있었는데, 아웃소싱의 고용 형태였다. 어느 날 부서에서 갑작스럽게 회의가 소집되었고, 해당 강사도 함께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팀장 한 분이 “우리랑 회사 이름 다른 사람은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해외에 나가 있는 친구들에게서 심심찮게 동양인 혐오 발언으로 상처를 받았다거나, 아침 첫 승차 손님으로 여성을 태우면 재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거나, 자신의 차가 출강 나간 기업 브랜드의 자동차가 아니어서 주차를 거부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나이, 출신 지역, 학력, 국가, 종교, 성별 등에 따라 불평등한 대우를 하거나 배제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불쾌하고, 더러는 화가 난다. 여러 차별 중에서 특별히 노인에 대한 차별과 배타주의,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들로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소외와 무시 등의 부적절한 행동이 가해지는 것을 ‘에이지즘(Ageism)’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2016년 11월을 기점으로 65세 이상 노인의 수가 0~15세 유소년 수보다 많은 ‘노인 추월 시대’에 접어들었다. 어딜 가도 노인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카페나 식당에 영유아나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 키즈 존(No kids zone)’이 많아진 것은 알고 있었는데 중 · 장년층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 시니어 존(No Senior Zone)’도 생기고 있으니 시대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소비자가 상품이나 매장을 선택할 수 있듯이 판매자도 소비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공정한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는 것도 그다지 즐겁지 못하다.
사실 우리는 이유 없이 승차 거부만 당해도 분노하고, 법적으로 나의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신고한다. 성별, 국가, 인종 등의 차별에 대해서는 여기저기 많은 부분에서 공론화하고 있고, 대부분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이로 인한 차별은 아직까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게 사회적 분위기다. 그러나 이제는 민감하게 다뤄야 하는 차별이 오히려 ‘에이지즘’ 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는 거스를 수 없는 인생 발달의 확실한 과정이고, 그로 인해 모두가 언젠가는 거절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진행한 노인실태조사에 의하면 노인 451명 중 7.1퍼센트가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연령차별이 클수록 노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깊어지고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갈 곳이 없다. 반기는 곳은 더더욱 없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있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그야말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가끔 인터넷 뉴스를 통해 노인들이 택시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겪었던 수모를 다룬 기사를 읽게 된다.
“노인네가 집에나 있지 뭐 하러 다녀요.” “아, 빨리빨리 타세요. 민폐인 줄도 모르고… 쯧.”
그렇게라도 태워주면 다행인데 아예 대놓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뿐만이 아니다. 복지관에서 이런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