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렬
한국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전기 작가. 한국의 문화 및 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삶을 되살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인물의 궤적과 시대정신을 담아내 독보적인 전기 작가의 길을 개척했다. 1994년 《실천문학》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아, 김수환 추기경》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천년의 화가 김홍도》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등이 있다. 전기를 통해 한국 문화예술계 대표 인물의 생애를 발굴·복원한 공로로 제3회 혜곡최순우상을 수상했다.
1846년 25세의 나이로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기까지 김대건 신부의 삶을 총체적으로 다룬 이 전기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禧年을 기념하여 한국 천주교회 연구기관인 (재)한국교회사연구소의 감수를 받아서 펴내는 공식적인 최초의 정본定本 전기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어린 시절과 5년 반 동안의 마카오 신학교 생활은 물론, 그동안 불분명했던 여러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했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가 되었음을 친필로 서약한 〈김대건 신부 서약서〉도 교황청을 통해 입수한 라틴어 원본을 170여 년 만에 정식으로 공개한다. 19세기 조선을 둘러싼 세계사적 역동 속에서 온갖 박해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피어난 한국 천주교회의 다채로운 신앙 여정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어, 한국 가톨릭 신앙의 뿌리와 본질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 인세의 반은 그동안 김대건 신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재)한국교회사연구소의 연구기금으로 기부된다.
추천사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1846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신 김대건金大建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인들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분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김대건은 한국인 첫 사제요, 순교성인이요,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모두 낯선 표현입니다. ‘사제司祭’란 천주교 미사를 집전한다는 의미에서 신부神父를 가리키는 호칭이고, ‘순교성인’은 순교한 이들이 절차에 따라 성인이 되었을 때의 호칭이며, ‘대주보’란 ‘큰 수호자’라는 뜻의 한자어로 옛 천주교 용어입니다.
19세기 교회박해 상황에서 김대건 신부님이 얼마나 많은 역경을 헤치면서 첫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고 순교에 이르렀는지를, 전기 작가 이충렬 실베스테르 씨는 역사적 사실과 확실한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복원했습니다. 이번 전기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님은 용인의 구석진 교우촌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열다섯 살 때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9천 리 떨어진 마카오에 임시로 설치된 조선 신학교에서 최양업 신학생과 함께 철학과 신학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8년여 동안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소신학교 인문학 과정과 대신학교 서양 철학, 신학 공부의 과정을 마치고 1년 동안의 부제(사제 이전 품계) 활동 후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라틴어 편지와 한문 편지, 한글 편지를 남겼습니다. 특히 삽화를 그리고 라틴어로 쓴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는 당시 조선의 신자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 노력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회유문)에서 “이런 황망한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고, 부디 서로 우애友愛를 잊지 말고 도우라. …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자비하신 때를 기다려라”라며, ‘천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함께 신앙을 지키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새남터 형장에서는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해 “이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고, 칼을 들고 자신의 목을 칠 준비를 하는 희광이를 향해 “자, 그럼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나는 이제 천당에 올라가 지금처럼 당신들을 보게 될 것이오. 여러분도 천주교인이 되어 나와 함께 있도록 하시오”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보여준 깊은 신앙심과 큰 용기는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21년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는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이며, 한국 백성들이 박해와 고통을 겪었던 어려운 시기에도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전하던 사도”라는 메시지를 발표하셨습니다.
이번 정본定本 전기를 감수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의 삶 속에 조선 후기의 천주교 역사, 박해 시기를 살아가던 교우촌 생활과 신앙생활을 잘 담아냈고, 그동안 김대건 신부의 삶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던 부분도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함으로써 ‘정본 전기’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하신 작가님과 자료를 제공해주신 한국교회사연구소, 김영사 관계자 여러분과 독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부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실 때 ‘조선 청년 김대건’의 열정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2022년 6월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차례
추천사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
저자 서문 -짧고 길었던 25년의 삶
1부
가야만 하는 길
1. 폭풍 속으로
2. 조선의 섬이 보입니다
2부
길을 떠나다
3. 고향 솔뫼를 떠나다
4. 한양 청파에서 서당에 다니다
5. 정하상과의 운명적 만남
6. 청파를 떠나다
3부
신앙의 요람 교우촌
7. 용인 한덕동 성애골에 자리잡다
8. 교우촌에서 신앙에 눈뜨는 소년
9. 조선 천주교의 앞날은?
10. 마침내 세워진 조선대목구
4부
부르심을 받은 소년
11. 모방 신부의 입국과 신학생 선발
12. 성애골을 찾아온 정하상
13. 안드레아는 천주의 부르심을 받았다!
14. 어렵기만 한 라틴어
15. 마카오를 향하여
5부
신학생의 길
16. 6개월 동안 9천 리를 걷다
17. 라틴어는 인사와 기도만 할 줄 알아요
18. 사전과 씨름하며 시작한 소신학교 과정
19. 좌절을 딛고 일어서다
20. 기해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한 사실을 모른 채
6부
멀고도 험한 조선으로 가는 길
21. 조선을 향해 떠나다
22. 영적 스승 메스트르 신부
23. 황해를 앞에 두고 배에서 내리다
24. 요동에서 입국의 기회를 모색하다
25. 무너지는 가슴
26. 신의주에서 만난 위기, 다시 요동으로 돌아오다
27. 함경도에서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만주 벌판을 횡단하다
28. 다시 조선을 향해서
7부
조선의 첫 번째 사제
29. 한양에 도착하다
30. 나의 도착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마시오
31. 목자를 맞이할 바닷길을 열어야 한다
32.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도착하다
33. 상해에서 보여준 용덕
34. 조선의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8부
사목 활동을 시작하다
35. 다시 황해를 건너다
36. 한양 돌우물골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다
37. 1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다
38. 경기도 교우촌을 다니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다
39. 백령도 뱃길을 열어야 한다
9부
순교자가 된 조선의 첫 사제
40.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41. 50회의 신문을 견뎌내다
42. 스승 신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다
43. 조선 천주교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44.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10부
“김대건 신부는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
- 프란치스코 교황
45. 미리내에 잠든 조선의 첫 사제
46. 에필로그
감수의 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정본 전기
김대건 신부 연보
참고문헌
서문
짧고 길었던 25년의 삶
김대건 신부가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이가 많다. 우리나라 첫 번째 신부라는 사실은 알지만,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200년 전,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김대건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을까? 어떻게 조선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으며, 왜 사제 서품 1년 1개월 만에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서는 왜 김대건 신부를 모든 성직자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것일까?
그동안 김대건 신부에 관한 많은 책과 연구 결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소년 시절과 마카오에서의 신학 공부 과정은 거의 베일에 가려진 채, 그의 편지 자료를 통해 마지막 3년 정도의 삶만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건 신부의 전기傳記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장 먼저 접촉한 곳은 천주교서울대교구의 (재)한국교회사연구소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64년 고故 최석우 몬시뇰(가톨릭의 고위 성직자 칭호)이 설립한 후부터 현재까지 로마 교황청과 조선 후기 조선교구를 담당한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관되었던 김대건 신부 관련 자료뿐 아니라 조선 시대의 관련 문헌들을 수집, 축적했다.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교회사 연구자들이 모여 수많은 연구 결과와 출판물을 만들어낸 기관이다. 그 결과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성 김대건 신부 전기 자료집’을 출간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등 김대건 신부 관련 1차 자료를 총망라한 세 권의 자료집인데, ‘전기 자료집’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전기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료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김대건 신부의 공식 혹은 정본定本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그래서 3년 전 어느 가을날, 한국교회사연구소 조한건 소장 신부님과 송란희 학술이사, 전 국사편찬위원장이자 연구소 고문이신 조광 교수님을 뵙고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禧年에 맞춰 ‘정본 전기’를 쓰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다행히 흔쾌히 자료 협조를 승낙하셨고, 한국교회사연구소와 김영사 사이에 ‘김대건 신부 정본 전기 출간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한 후 집필 작업을 시작했다.
전기 작업은 자료와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자료를 취합해서 연보가 완성되어야 주인공의 삶이 머릿속에 들어오고 그래야 자신감 있게 삶을 복원할 수 있어서다. 만약 중간에 공백이 있으면 삶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온전하게 복원할 수 없는데, 그동안 알려진 김대건 신부의 자료에는 공백이 많았다. 출생지가 충청도 솔뫼라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어린 시절의 삶과 용인 한덕골 교우촌에서의 소년 시절 그리고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임시로 설립된 조선 신학교에서 배운 교과과정과 교재, 심지어는 외국어를 모르던 조선의 소년이 어떻게 라틴어를 배워 능숙하게 편지를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은 공백이었다.
그동안 전기를 쓰면서 느낀 건, 주변 인물들이 남긴 자료의 중요성이다. 다행히 한국교회사연구소와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김대건 신부를 사제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 신부들의 편지를 번역한 자료집을 발간했고, 그 외 조선 후기 조선 천주교와 관련된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 자료들의 번역 작업도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자료들 속에 김대건 신부의 소년 시절과 마카오 유학 시절의 구체적인 교육과정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있어, 김대건 신부의 25년 삶을 복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흩어져 있는 자료를 찾아 맞추는 작업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공백이 있는 채로 ‘정본 전기’를 출간할 수는 없었다. 결국 목표로 했던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인 2021년 8월 21일에 맞춰 전기를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미루고, 나름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다 찾은 후에 집필을 하느라 예정보다 1년 가까이 늦어졌다. 그러나 늦어진 만큼 더욱 완성된 ‘정본 전기’의 틀을 갖출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동안 흐릿한 사본을 통해 존재만 알려졌던 ‘김대건 신부 서약서’(교황청 복음화성 문서번호 Fondo S. O. C. P. vol. 78, f 405)의 소개다. 이 자필 서약서는 2021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교황청을 통해 입수한 원본 이미지 자료로, 김대건 신부가 첫 번째 조선인 사제로서 교황청이 정한 절차를 완벽히 밟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번역을 통해 이 서약서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인 1845년 8월 30일에 작성되었고, 페레올 주교가 확인 서명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희년을 맞아 기존에 연구소에서 출판한 세 권의 전기 자료집을 25년 만에 개정 출간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자료집》 세 권도 이전의 잘못되었던 번역과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몸속에는 조선 천주교의 박해를 상징하는 순교의 피가 흘렀고, 그의 어깨에는 조선 천주교의 재건이라는 무거운 짐이 있었다. 청년 김대건은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했기에 조선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고, 두려움 없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원고를 마감하자 긴 시간 여행을 하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200년 전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조선 천주교인들의 삶과 신앙을 복원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당시 사용하던 천주교인 특유의 용어와 기도문이 현재와 달랐고, 어느 정도 기록이 남아 있는 최양업 신부 시대와도 달랐다. 김대건 신부 시절은 기도문이 조선말로 번역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윤의병(바오로) 신부가 박해 시기의 교우촌 생활을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복원해 193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잡지인 〈경향잡지〉에 연재한 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출간한 소설 《은화隱花》를 참고하면서 당시 천주교인들의 삶과 언어를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자료 제공과 철저한 사실관계 확인 및 감수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한건 소장 신부님, 송란희 학술이사님,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하시고 현재 연구소 고문이신 조광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추천사를 써주신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순택 대주교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영사에서 여덟 번째 책이다. 이번에도 흔쾌히 출판을 맡아주신 김강유 회장님과 고세규 사장님, 집필하는 2년 반 동안 함께하며 원고의 완성도를 높이도록 도와준 김영사 관계자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김대건 신부의 삶을 통해 자신의 신앙심을 담금질하는 계기가 되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조선 후기 시골 소년의 성취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자신감을 얻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 가득하다.
이 책의 인세의 반은 그동안 김대건 신부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재)한국교회사연구소의 연구기금으로 기부된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천주교회사를 위해 노력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이 책을 삼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영전에 바친다.
2022년 6월
이충렬
일러두기
1. 외래어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2. 근대 천주교 용어 중 현재에도 이해 가능한 용어는 당시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신공神功(기도), 공과功課(기도문), 매괴신공玫瑰神功(묵주기도), 도리(교리), 종도신경(사도신경) 등 의미를 바로 알기 어려운 용어는 현재 통용되는 말로 바꿨습니다.
3. 이 전기에서는 ‘하느님’을 모두 ‘천주天主’로 표현했습니다. 1964년 9월 1일부터 ‘하느님’을 ‘천주’와 함께 쓰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하느님’을 공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고지도 중 〈대동여지도〉는 국립중앙박물관, 나머지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자료입니다. 이외에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자료는 모두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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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으로
1845년(헌종憲宗 11년) 8월 31일 상해上海의 한 선착장.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라파엘Raphael호에 오르는 김대건 신부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작은 배가 다시 무사히 황해를 건널 수 있을까. 마포나루에 도착하면 관헌들의 눈을 피해 무탈하게 상륙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십상인 위험한 길이지만 그래도 조선 천주교를 위해 가야만 하는 길이 아닌가 ….
라파엘호는 큰 바다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배가 아니었다. 길이 25자(7.5m)에 불과한 작은 황포돛배였다. 강화도나 연평도 쪽으로 나아가 조기를 잡기 위해 만든 배였지만, 더 큰 배를 구할 길이 없었다. 차선책으로 뱃사공을 구할 때 물길잡이 역할을 할 사공 외에 배를 수리할 소목공小木工 한 명과 배 안에 물이 차면 물을 퍼낼 힘센 농민 출신 선원 두 명을 구해 함께 타고 왔다.1
결국 황포돛배는 황해를 건너올 때 거센 풍랑에 돛이 부러지고 갑판도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파도가 높아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상해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양자강揚子江 하구에 있는 오송吳淞항에 도착해 수리를 마치고 다시 조선으로 가기 위해 상해로 온 것이었다.
상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제물포로 가는 일행은 모두 열네 명이었다. 보름 전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조선교구(당시 조선대목구2)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l(1808~1853) 주교, 얼마 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다블뤼Daveluy(1818~1866, 조선 이름 안돈이安敦伊)3 신부 등 세 명의 사제와 일곱 명의 조선인 평신도 대표 그리고 교우 한 명을 포함한 네 명의 뱃사람이었다. 평신도 대표들은 이번에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를 모시러 조선에서 건너온 이들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세 명의 선교사가 순교한 이후 6년 동안 조선에는 사제가 없었다. 천주교에서 사제가 없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미사를 드릴 수 없어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2년 전에 제3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자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미사를 드리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과 김대건 당시 부제副祭4 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일을 서둘렀다. 그러나 의주 관문의 검문이 삼엄해 프랑스인인 페레올 주교가 통과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페레올 주교는 8개월 전인 지난 1월 1일, 김대건 부제만을 한양으로 보내면서 바닷길을 개척하라는 임무를 맡긴 후 자신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가서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는 4월 30일 마포포구를 출발해 황해를 건너 5월 28일 상해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오송항에 도착했다. 그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오송항에 와 김대건 부제와 조선인 교우들을 반갑게 만났다. 페레올 주교는 수리 중인 황포돛배를 보며 이렇게 조그만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천주의 안배按排’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2주 전인 8월 17일, 페레올 주교는 상해 연안에 있는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한 명의 주교와 두 명의 신부가 조선을 향한 뱃길에 함께 오르게 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오송항에서 수리가 끝난 황포돛배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조선에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있는 상해로 건너가 출항 준비를 마쳤음을 알렸다. 배에 오른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선장으로 임명했다. 또 이 작은 황포돛배에 여행자의 수호천사인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호’라 이름 붙이고, 배가 무사히 황해를 건너 조선에 도착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축복을 청하는 기도를 했다.
라파엘호는 닻을 올렸다. 그러나 포구를 벗어나자마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소나기가 퍼붓더니 세찬 맞바람까지 불어닥쳐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9월경에는 상해 앞바다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 중국인들의 말처럼, 8월 31일부터 거의 매일 비가 내리더니 바람이 거세지면서 기온이 떨어져 내리던 비가 우박으로 바뀌곤 했다. 바다는 무섭고 거칠었다. 그래도 김대건 신부는 날씨가 개는 날이면 조선으로 가기 위해 닻을 올렸지만 번번이 포구로 되돌아오기를 세 번이나 거듭했다. 김대건 신부는 라파엘호를 제물포와 직선거리로 가까운 산동山東반도 쪽으로 끌고 갈 대형 중국 선박을 찾았다. 항해의 위험을 최소화하려면 항해 거리를 줄이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대형 선박이 굵은 밧줄로 라파엘호를 연결해 산동반도까지 예인해주면 그곳에서 한강 입구로 향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프랑스 선교사 페브르Jean-Faivre(1803~1864) 신부를 태우고 산동으로 가는 중국인 교우 선장이 라파엘호를 끌어주겠노라 했다. 그러나 중국인 선장은 하루 이틀에 그칠 비가 아니니 부근에서 가장 안전한 양자강 하류 어귀에 있는 숭명도崇明島 포구로 가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라파엘호는 중국 배를 따라 숭명도 포구로 이동하여 이미 그곳에 정박해 있던 100여 척의 배들과 함께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숭명도에서 기다린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9일, 김대건 신부는 문득 새벽잠에서 깨었다. 아직 어스름이 깔린 갑판 위로 오른 그는 먼바다를 바라다보았다. 일주일 넘도록 비바람이 몰아치던 바다가 오늘은 잔잔했다. 이 정도 날씨라면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대건 신부는 날이 밝자 중국 배의 선장을 만나 상의하고 페레올 주교에게 출항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중국 대형 선박에 굵은 밧줄로 연결된 라파엘호는 미끄러지듯 숭명도 포구를 떠나 산동반도로 향했다. 양자강을 벗어나자 선원들은 돛을 올렸다. 라파엘호의 황포돛은 순풍을 받아 안고 한껏 부풀어 올랐다. 김대건 신부의 눈에 산동반도 쪽으로 향하는 중국 배들이 거대한 선단처럼 무리 지어 항해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 드디어 조선으로 가는 건가 ….’
김대건 신부는 그제야 라파엘호가 조선을 향해 가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벅찬 가슴이 황포돛처럼 부풀어 올랐다.
한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아직은 보이지 않는 조선 쪽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가장 위험한 선교지 중의 한 곳으로 알려진 조선! 이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1752~1801) 야고보 신부와 한 명의 프랑스인 주교 그리고 두 명의 프랑스 인 신부를 비롯해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피 흘린 순교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간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며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보다는 하루빨리 그리고 무사히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여덟 명의 조선인 신자들도 모두 한마음이었다.5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 가겠다고 얼마 전 김대건 부제와 함께 상해에 온 현석문玄錫文(가롤로, 1799~1846), 이재의李在誼(토마스, 1785~1868), 최형崔炯(베드로, 1814~1866), 임치화林致化(요셉), 노언익盧彦益, 임성실林聖實, 김인원金仁元은 모두 순교자들의 아버지요 아들이거나 친척이었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을 잃었지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라파엘호와 비슷한 규모의 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1년에 촬영된 황포돛배
◆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이탈리아계 영국인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1832~1909)가 강화도에 도착한 미군함 콜로라도Colorado호에서 찍은 사진으로, 2022년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의 황포돛배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출처: Getty Museum, 〈The First Korean Junk Bringing Dispatches onboard the U.S.S. Colorado, Immediately on Her Casting Anchor〉 (1871. 5. 30.)
항해는 순조로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잔잔하던 바다가 성난 바다로 변하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잔잔하던 바다에 거센 비가 몰아치며 큰 파도가 뱃전으로 밀려왔다. 그때부터 라파엘호는 파도를 타고 오르내렸다. 중국 선박에 연결된 밧줄 덕분에 북쪽으로 향하고는 있지만, 선원들과 신자들은 배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과 바닷물을 쉴 새 없이 퍼내야 했다. 성난 바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몸부림쳤지만 라파엘호는 굵은 밧줄 덕분에 계속 산동반도를 향해 나아갔다.
거친 파도는 다음 날에도 잠잠해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새벽부터 어제보다 더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라파엘호는 높고 깊은 파도의 마루와 골을 오르내렸다. 위기였다. 김대건 신부는 안전을 위해 갑판 아래 선실에 내려가 있던 두 사제에게 갑판 위로 올라오라고 라틴어로 소리쳤다.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 어서 갑판 위로 올라오세요! 선실 안쪽이 더 위험합니다. 갑판이 무너질지도 몰라요! 어서요, 어서!”
앞서 황해를 건너올 때 배가 파도의 마루에서 골로 곤두박질치면서 갑판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김대건 신부가 외치는 소리에 두 사제가 급히 갑판 위로 올라왔고, 곧이어 갑판 한쪽의 판자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벗어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갑판 위에서 옷 소매를 걷어붙이고 선원들과 함께 바가지로 물을 퍼냈다. 그러나 폭풍우는 거세어져만 갔고, 중국 선박과 라파엘호는 파도의 방향을 따라 중국 해안 쪽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어로 소리쳤다.
“이보시오! 선장! 여기를 좀 내다보시오!”
라파엘호가 점점 해안 쪽으로 접근하자 김대건 신부는 중국 선박을 향해 고함을 치며 손짓을 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이 파도 소리에 묻혀 전달되지 않자 신자들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에게 모두 함께 고함을 지르자고 했다. 고함이 함성으로 바뀌자 중국 배의 뒤편에 선원이 나타났다.
“부탁이 있소. 지금 이 배에 타고 계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당신들 배에 좀 옮겨 태워주시오. 부탁하오!”
김대건 신부는 애타게 소리쳤지만, 그 소리도 다시 파도 소리에 묻혔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 두 분은 중국 선박으로 옮겨 타셔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 파도에 휩쓸려 중국 해안으로 밀려가면 모두 체포될 겁니다. 그러면 저를 비롯한 조선인 신자들과 선원들은 조선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조선으로 압송될 게 뻔하고, 주교님과 신부님도 저희들 때문에 곤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교님과 신부님께서는 저 중국 선박으로 옮겨 타시고, 그 즉시 라파엘호와 연결된 밧줄을 끊어주십시오. 저희는 이대로 천주님의 섭리에 따라 항해하겠습니다.”
“안드레아(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신부 ….”
페레올 주교는 아득한 눈길로 김대건 신부를 바라보며 잠시 고뇌에 빠졌다. 조선대목구 대목구장인 주교와 선교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걸 모르지 않아서였다. 김대건 신부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자신들을 조선으로 모셔 가겠다며 이미 숱한 고비를 넘기며 상해까지 온 그들만 험한 파도 속으로 떠나보내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김대건 신부는 간절한 눈길로 페레올 주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선에서 상해로 올 때 사용한 허름한 나침반과 바다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기 위해 지니고 있던 바다의 별6이 그려진 성모 상본을 내보이며7 간곡히 말을 이었다.
“천주님과 성모님께서 저희를 보호해주실 것이니 염려 마시고, 어서 중국 선박으로 옮겨 타십시오.”
그사이에도 파도는 계속 몰아쳤다. 페레올 주교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조선대목구의 앞날을 위해 김대건 신부의 의견을 따르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대건 신부와 일행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뱃머리 앞으로 보낸 후 중국 배를 향해 다시 함성을 질렀다. 마침내 중국 선원의 모습이 보이자, 김대건 신부는 두 사제를 중국 선박으로 옮겨달라고 소리치며 손짓을 했다. 잠시 후 중국 선박이 라파엘호 옆으로 다가왔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 선박에서 내려준 밧줄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허리에 묶은 후 위에서 끌어당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 큰 파도가 두 배를 덮치면서 중국 선박과 라파엘호를 붙들어 맸던 밧줄이 끊어졌다. 순간, 라파엘호는 중국 배에서 멀어져갔다. 다시 고함을 지르자 중국 선박은 라파엘호를 향해 다가오면서 밧줄을 던졌다. 하지만 파도를 뚫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주교 신자인 중국 선박의 선장은 두 번 더 라파엘호로 다가와 밧줄을 던졌으나 파도는 밧줄을 계속 삼켰다. 그사이에 파도는 점점 더 높아졌고, 중국 선박도 파도의 마루와 골을 오르내리다 중국 연안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중국 선박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높은 파도를 거슬러 이동하다가는 배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선장은 없기 때문이었다.
중국 선박과 밧줄이 끊긴 라파엘호는 포효하는 폭풍우를 맞으며 파도의 마루로 치솟았다가 다시 곤두박질치기를 되풀이했다. 배에는 점점 더 물이 차올랐고, 거센 바람에 돛이 찢기고 키도 부러졌다. 김대건 신부는 선원들에게 도끼를 들어 두 개의 돛대를 찍어 넘기라고 지시했다. 배를 가볍게 하고, 자칫 돛이 쓰러지며 배를 크게 파손시키지 않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앞으로의 항해보다는 성난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돛대가 배의 앞부분 일부를 파손시키면서 바다로 떨어졌다. 페레올 주교는 선원들에게 돛대를 건져 올리자고 했지만, 파도를 헤치고 돛대를 건져 올릴 기운이나 용기가 남아 있는 선원은 없었다.8
이제 라파엘호의 운명은 어찌 되는 것인가? 페레올 주교는 사제들과 신자들을 모아놓고 천주께서 이 배와 자신들을 보살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신자들이 하나둘 눈물을 흘리자, 선원들은 페레올 주교의 기도가 세상에 대한 하직 인사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울부짖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바다가 잠잠해져갔다. 김대건 신부와 일행은 모두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갑판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바다는 평화로웠다. 금방이라도 라파엘호를 삼킬 듯 무섭게 달려들던 파도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잔잔해진 물결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어디쯤일까?’
따가운 아침 햇살에 눈을 뜬 김대건 신부는 사방을 둘러봤다. 그러나 보이는 건 바다뿐이었다. 어디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연안에서 멀어진 것 같아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안위를 확인한 후, 신자들과 선원들이 모두 무사한지 확인했다. 그 험한 폭풍우에도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그뿐 아니라 전날 폭우 속에서 잘라낸 돛대도 뱃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흔들리며 떠 있었다. 돛대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밧줄 일부가 배에 걸리면서 라파엘호와 함께 표류한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날씨가 좋아지는 대로 소목공께서는 돛대와 키를 수리해주시오. 그러면 다시 돛을 달고, 이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동쪽으로 키를 잡으면 마침내 조선에 당도할 것이오.”
김대건 신부의 차분한 설명에 일행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해에서 마련해 온 음식과 물을 꺼내 요기를 했다. 파도를 따라 배 안으로 들어온 바닷게와 해파리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해충海蟲 들이 마르면서 악취를 풍겼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이제 조선에 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긴 것이다.
2
조선의 섬이 보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기운을 되찾은 선원들과 함께 돛대를 건져 올렸다. 도끼날에 잘려나갔던 돛대는 원래보다는 조금 짧아졌지만 라파엘호를 조선으로 인도하는 데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소목공은 능숙한 솜씨로 키를 새로 만들고 선원들은 여러 갈래로 찢어진 돛폭(돛의 천)을 기웠다. 돛폭이 거센 폭풍우 속에 갈기갈기 찢어지거나 날아가지 않은 건, 천에 황토 진흙을 발라 만든 덕분이었다. 망망대해 위에서 배를 수리하는 동안 다행히 바다는 조용했다. 라파엘호는 사흘 만에 수리를 마쳤고, 그때부터 김대건 신부는 나침반을 보며 물길잡이 선원에게 동쪽 방향을 알려줬다.
바다가 잔잔해져서였을까, 멀리 중국 배들이 보이곤 했다.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어선인지 물건을 옮기는 화물선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루에 10척에서 15척의 배가 보였다. 숭명도에서 출항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사흘은 폭풍우에 시달리고 사흘은 배를 수리했기 때문에 아직은 중국 해안에 가까운 곳인 것 같았다. 김대건 신부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자 중국 배를 향해 조난을 알리는 ‘흰색 깃발’을 흔들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추고 라파엘호를 도와주러 오는 배는 없었다.
상해에서 제물포까지는 바닷길로 2천 리(약 800km)였고, 황포돛배는 바다에서 바람만 잘 만나면 하루에 150리(60km)~200리(80km)를 갈 수 있었다.
“바람만 도와준다면 앞으로 열흘이나 보름쯤 후엔 조선에 당도할 겁니다. 다들 기운 내십시오. 천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겁니다.”
김대건 신부는 이렇게 말하며 일행에게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자고 격려했다. 페레올 주교는 이런 악천후와 악조건을 뚫고 조선을 향할 수 있는 건 천주님이 보우하시고 인도해주신 덕이라며 다시 한번 감사 기도를 드렸다. 김대건 신부는 계속해서 나침반을 바라보며 물길잡이 선원에게 라파엘호의 키를 동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다 바람이 역풍으로 불어 라파엘호가 조금씩 남쪽으로 밀려갔지만, 김대건 신부는 사공들에게 서북쪽을 향해서 가자며 독려했다. 열흘쯤 후, 나침반과 먼 바다를 번갈아 보던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주교님, 이제 곧 조선의 서쪽 해안에 있는 섬들이 보일 겁니다. 그 섬들을 지나면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강어귀가 나올 겁니다. 그러면 신자들이 먼저 내려 상황을 살피면서 무사히 내릴 만한 장소를 물색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다음 날 김대건 신부가 말한 대로 작은 섬이 보였다. 김대건 신부는 물길잡이 선원에게 일단 섬으로 가자고 했다. 1845년 9월 28일이었다.
라파엘호가 계획했던 항로와 실제 항로
◆ 상해(8월 31일 출발)→ 숭명도(9월 9일 출발)를 경유한 라파엘호는 산동반도 쪽에서 한강 어귀로 갈 예정이었지만, 예정 항로에서 오른쪽으로 표류(9월 15일)하여 제주도를 마주한 반도의 남쪽에 있는 섬에 도착했다(9월 28일).
페레올 주교는 1845년 10월 29일 강경포구 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처음에 도착한 곳이 “제주도를 마주한 반도의 남쪽에 있는 섬”이라고 서술했다(수원교회사연구소 엮음,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3, 341쪽). 그러나 이 섬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현재 제주교구에서는 1998년 12월 서두옥 전 제주대 교수가 중국 상해와 제주도 사이의 해양·기상 특성을 기초로 조사 분석해 제주교구에 제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제주도 표착지에 관한 연구〉에 근거해 이 섬이 제주도 옆 차귀도이며 맞은편에 있는 용수포구에서 배를 수리하고 미사를 드렸다고 추정하지만, 문헌적 근거가 없다. 페레올 주교는 위의 서한에서, 이 섬에서 떠난 라파엘호가 “배 안으로 계속 물이 많이 들어와 안전하게 항해하기가 어려워 한양까지 가지 못하고 전라도의 강경포구에서 좀 떨어진 외딴곳에 닻을 내렸다”고 밝혔다. 표착한 섬에서 수리하지 못하고 떠났다는 ‘결정적 단서’다.
라파엘호가 해안가에 다가가자 섬에서 주민 몇 명이 보였는데, 다행히 흰옷을 입은 조선 백성들이었다. 배에서는 마침내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김대건 신부는 신자 중 연장자인 현석문에게 부탁했다. 현석문은 6년 전인 1839년 앵베르Imbert(1797~1839, 한국 이름 범세형范世亨) 주교가 순교하기 전에 조선 천주교회의 책임자로 임명한 믿음 좋은 신자였다.
“지금 선원들과 배에서 내려 이곳이 어느 섬인지부터 알아봐 주시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기대 반 걱정 반의 표정으로 김대건 신부를 바라봤지만, 김대건 신부도 이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신자들이 돌아왔다.
“안드레아 신부님. 이 섬은 제주도를 마주한 반도의 남쪽에 있는 섬으로 한양에서 1천 리나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아 ….”
김대건 신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떨궜다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이곳이 어디인지를 통역하자 낙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김대건 신부는 현석문에게 물었다.
“이곳 사람들이 우리 배를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더이까?”
“안드레아 신부님,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풍랑을 만났다고 둘러대었더니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현석문이 알아 온 내용을 통역해주며, 이제 북쪽을 향해 떠나면 된다고 했다. 페레올 주교가 일단 섬에서 식량을 구해 싣고 가자며 중국에서 가져온 은화를 건네자 현석문은 섬사람들에게 의심을 살 염려가 있다며, 전대에 조선에서 가져온 돈이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섬에서 식량을 구해 온 신자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김대건 신부에게 말했다.
“안드레아 신부님, 섬사람들 중에 우리가 많은 식량을 구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불과 몇 달 전인 6월 25일,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가 제주도 앞 우도牛島에 정박한 후 제주도 연안을 측량하고, 7월 15일에는 우도를 떠나 거문도 등 다도해 일대를 돌아보고 우도로 돌아갔다가 7월 말경 일본으로 떠난 일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제주도와 남해안 부근의 섬에 경계령을 내린 상태였다.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는 이 섬에서 오래 머물면 자칫 예기치 않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동의한 후, 출항 준비를 서둘렀다. 생각 같아서는 풍랑을 맞아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갑판을 수리하기 위해 섬에서 나무를 구하고 싶었지만, 섬사람들의 의심을 사면 좋을 일이 없을 듯했다. 김대건 신부는 서둘러 선원들에게 닻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라파엘호는 북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린 후,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섬들 사이의 미로와 다름없는 위험한 항로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섬에서 서둘러 떠나느라 배를 수리할 나무를 구하지 못했기에 신자들은 배 안으로 계속 들어오는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전하게 항해하기가 어려운 데다 배의 닻줄까지 끊어질 지경이었다. 만일 닻줄이 끊어지면 배를 해변에 좌초시켜야 했다.9 그런 상황이 오면 해변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관군을 부르느냐 마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 다블뤼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좌초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뿐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키를 잡은 선원에게 ‘오른쪽’ ‘왼쪽’ 하며 섬과 섬 사이 바닷길을 헤쳐나갔다.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의 눈동자는 섬과 섬 사이를 보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다행히 바다에 어둠이 내리기 전에 라파엘호는 섬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제야 김대건 신부는 땀을 닦으며 어둠이 내리는 바다를 바라봤다.
‘무사히 한강 어귀까지 갈 수 있을까?’
그는 라파엘호가 무사히 한양에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3
고향 솔뫼를 떠나다
“재복再福(김대건의 아명)아, 저기 할아버지 곁에 꼭 붙어 앉거라.”
꼬마 김대건의 손을 잡고 배에 오르던 대건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1796~1839)은 앞서 배에 오른 자신의 아버지 쪽을 가리켰다. 포구에 정박한 채 잔물결에 흔들리는 배 안에는 대건의 할아버지와 어머니, 손위 누이가 앉았고, 마지막 세간을 싣는 삼촌이 뒤이어 배에 오르고 있었다.
“아범아, 이제 모두 배에 오른 게냐?”
“예, 이제 아우가 배에 올랐으니 떠날 준비를 마친 듯합니다. 아버님.”
김제준은 배에 오른 식솔들과 배 안 가득 실린 세간을 한번 돌아본 후 사공에게 일렀다.
“자, 그럼 출발하시게.”
배 뒷머리에 있던 사공이 삿대로 강바닥을 힘껏 떠밀자 배는 미끄러지듯 강물 위에 올라탔다. 천천히 멀어지는 포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 안 지나 범근내(삽교천)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넓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다행히도 바다는 잔잔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배를 타는 대건은 할아버지 곁에 꼭 붙어서 몸을 움츠렸다. 사공 두 명이 팔뚝에 힘줄이 도드라지도록 황포돛을 올리자 배는 물살을 갈랐다. 황포돛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안고 한껏 부풀어 올랐다.
태안반도 북쪽과 아산만 일대는 바다가 잔잔해서 한양까지 가는 뱃길이 위험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바닷물이 범근내를 통해 내포內浦 지역1에까지 들어와 한양을 오가는 바닷길이 발달해 있었다. 진상품과 세곡을 운반하기가 육로에 비해 수월해서였다. 그런 연유로 내포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품목과 맞바꾸기 위해 농산물과 수산물 특히, 인근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싣고 한양으로 갈 때 육로보다 빠른 바닷길을 선호했다.
배가 순풍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자, 배 뒷머리에서 키를 잡은 사공은 한강 노들나루로 가기 위해 북쪽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대건의 가족은 그제야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에 각자 고심에 잠겼다. 이때가 1827년(순조純祖 27년) 여름, 김대건이 여섯 살 때였다.
여섯 해 전인 1821년 8월 21일, 조선 최초의 신부가 될 김대건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솔뫼에서 김제준과 장흥 고高 씨(1798~1864)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솔뫼는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면천군沔川郡 범천면泛川面 송산리松山里(오늘날의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다. 산에 유난히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해서 ‘솔뫼’, 충청도 사투리로는 ‘솔미’라고도 불렸다.
솔뫼는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이었고, 대건의 집안은 한미하긴 하지만 양반의 가문이었다. 집 앞에는 보리밭이, 동편에는 뽕밭과 물을 길어 먹을 수 있는 샘이 있어 사는 데도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정든 고향을 두고 낯선 한양으로 떠나야 했다. 그의 집안이 뿌리 깊은 천주학쟁이 집안이라며 마을 사람들이 곁을 주지 않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주교인은 천주학쟁이, 천주학꾼, 서학꾼으로 불리는 나라의 ‘죄인’이었다. 집 안에서 천주교 교리서나 기도문이 나오면 양반 상놈 가릴 것 없이 포졸들에게 끌려가고, 집 안 살림살이는 체포한 포졸들이 나눠 가졌다. 당시 천주학쟁이들의 재산은 포졸들의 몫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건의 집안에 곁을 주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의 솔뫼 부분도
◆ 홍주목 면천군 범천면 송산리 옛 지도(19세기 중반).
김대건의 집안이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건 증조부 김진후金震厚(1738~1814) 때부터였다. 고향인 솔뫼가 있는 면천군에서 작은 벼슬을 하던 그는 ‘내포의 사도使徒’라고 불리며 충청도 지방의 천주교세 확대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존창李存昌(1752~ 1801)에게 감화되어 50세 때 입교했다. 이존창은 여사울(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중추적인 인물이다. 김진후는 입교한 후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훗날 대건의 할아버지가 되는 둘째 아들 김택현金澤鉉(1766~1830)을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와 혼인시켰다. 김택현과 이 멜라니아는 선대 어르신들의 영향으로 신앙심이 깊었다. 아침저녁으로 단정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묵주기도, 주기도문, 성모송, 사도신경 같은 천주교 기도문을 열심히 바쳐서 버선코가 늘 납작할 정도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김제준이고, 이존창은 대건의 진외조부가 된다.
천주교에 대해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 것은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한 후부터였다. 천주교에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가 승하하고 뒤이어 불과 열한 살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을 주도했다. 정순왕후는 1801년(신유년) 1월 10일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을 내렸다. 천주교 4대 박해의 하나인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김대건의 진외조부인 이존창은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셋째 형인 정약종丁若鍾(1760~1801) 등과 함께 체포되어 참수斬首되었다. 이들과 함께 이승훈李承薰(1756~1801), 이가환李家煥(1742~1801)과 같은 당시 조선 천주교의 중추적 인물과 천주교를 서학으로 해석하던 진보적 학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정약전丁若銓(1758~1816)과 정약용 형제 등 400명이 유배되었다. 또한 1794년부터 조선에 들어와 6년 동안 활동하며 신자 수를 만 명에 가깝도록 전교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도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도 솔뫼에서 100리(40km) 떨어진 서산 해미읍성 감옥에서 10년 동안 고초를 겪다가 결국 1814년 76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김대건 신부 집안의 순교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진후의 셋째 아들로 솔뫼를 떠나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오늘날의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 살면서 전교 활동을 하던 대건의 작은종조부인 김종한金宗漢(족보에는 김한현金漢鉉)은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관덕당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김종한의 사위인 손연욱(대건의 당고모부)도 이듬해인 1817년에 체포되어 해미에서 7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24년에 옥사했다. 이렇듯 대건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순교자를 배출한 집안이었으니, 솔뫼에서의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던 터였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도 대건의 가문이 솔뫼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양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시 홍주 목사가 포악하지 않았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대건은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을 때인 1821년에 태어났지만, 천주교를 금한다는 정순황후의 교지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래서 대건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주교를 멀리하는 듯 행동해야 했다.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이었다.
대건의 가족은 솔뫼에서의 삶이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그랬듯이 막상 고향을 떠나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세월을 보내던 즈음, 1827년 2월, 전라도 곡성에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해박해丁亥迫害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신유박해로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대부분 정죄했다고 판단하고 박해를 적극적으로 이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앙의 상황과 달리 지방에서는 천주교도에 대한 지방관들의 과잉 색출이나 밀고 등에 의한 박해가 각 지역에서 크고 작게 벌어지고 있었다. 곡성에서의 박해 역시 밀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4월 중순에는 전주에서도 밀고가 있어 이번에는 전라도가 박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다행이라면 조정에서 주도한 박해가 아니라 5월이 되자 그 기세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2월부터 5월까지 500명에 달하는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16명이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중에는 전라도 교인들과 연고가 있던 경상도 상주에 살던 6명과 충청도 단양 출신 2명도 있었다.2
남쪽에서 일어난 정해박해 소식은 소문을 타고 충청도나 경상도의 교인들에게 전해졌다. 신유년의 박해를 겪은 천주교인들은 불안했다. 언제 어디서 포졸에게 붙잡힐지 모를 일이었다. 잡혀가면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배교하거나 순교를 당하는 게 당시 천주교인들의 삶이었다. 특히 박해 때마다 희생자가 나온 김대건 집안의 불안감은 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건의 할아버지 김택현이 큰아들 제준에게 큰 결심을 한 듯 무겁게 입을 뗐다.
“아비야, 우리가 천주께서 도우셔서 지금까지는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만, 이번 군난窘難(당시 천주교인은 박해를 군난이라 불렀다) 소식을 들으니 아무래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예, 아버님. 저도 그래야 하지 않나 생각하던 차입니다.”
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은 어려서 신유박해 때 외할아버지를 잃었다. 또한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마저 순교하는 등 조선 천주교의 암흑기를 직접 겪으며 성장했기에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 컸다.
“군난도 군난이지만, 여기서는 남이 들을까 봐 삼종경三鍾經(삼종기도)은 고사하고 경문經文(기도문)도 마음 놓고 통경하지 못하니 수계상 불편하기 이를 데 없구나. 근 30년을 교우들과 연락마저 끊긴 채 살고 있으니 지금 우리 조선에 신부님이 다시 오셨는지도 알 수가 없고, 이러다가 성사聖事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뼛골을 놓을까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이곳 고향 땅을 떠나서라도 가끔 교우들을 만나서 교중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런 곳으로 가고 싶구나.”
“아버님. 그러시면 어디 염두에 두신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내 일전에 버그내장터[泛斤川場]에 갔을 때 옹기장수가 된 옛 교우를 만나 눈인사를 하지 않았겠느냐. 그랬더니 이이가 지나가는 말로 ‘요즘 한양에는 유식한 교우들이 천주교를 다시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 위해 한곳에 모여 머리를 모으고 있다’더구나. 옹기장수들이 사는 점말(옹기촌)은 교우촌이나 다름없고, 그들이 여기저기 장을 돌아다니며 교중 소식을 듣고 있으니 틀림없는 말일 게다. 한양에 가면 교중 소식을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 터이니, 아비가 한번 다녀오겠느냐.”
“예, 아버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버그내장터 표시가 있는 <1872년 지방지도>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830)의 〈예규지倪圭志〉 면천군 편에 보면, “면천군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범천면泛川面(현재 우강면)에 버그내장이 1일과 6일 자에 개설된다沔川;泛斤川場 在邑 東二十里 泛川面 一,六日設”라고 했다. 범근천泛斤川을 이두식으로 읽으면 버그내이고, 삽교천의 옛 이름이다. 현재의 버그내장터는 지도에 표시된 곳이 아니고 훗날 옮겨 간 합덕의 운산리에 있다.
옹기촌! 천주교 박해 때 체포를 피한 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속에 모인 천주교인들은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경사진 언덕을 찾아 옹기가마를 만들었다. 흙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무거운 매통 자루로 내리치는 일이나 어둡고 좁은 가마 안으로 들어가 옹기그릇 하나하나에 받침을 괴고 며칠 동안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은 고되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산속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붉은 흙으로 옹기를 빚고 굽는 일뿐이었다. 신자들은 구워낸 옹기를 지게에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이 장터 저 장터를 다니며 곡식과 바꾸면서 박해에 대한 소문도 전해 듣고 그 와중에 전교도 했다. 대건의 할아버지 김택현도 그런 옹기장수를 버그내장터에서 만나 천주교 재건 운동 소식을 들은 것이다.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후 조선은 1833년 12월 중국인 유방제劉方濟(1795~1854, 원래 이름은 여항덕余恒德)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32년 동안 ‘사제가 없는 땅’이었고, 김대건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신유박해 때 목숨을 건진 신자들 중 일부에서는 조선 천주교의 재건을 위해 북경北京교구에 밀사를 파견해 신부를 보내줄 것을 끈질기게 청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세한 내막은 극비리에 진행되었기에 일부 열성 신자들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님…, 한양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면 되올는지요?”
“글쎄다. 그건 나도 알 수가 없구나. 며칠 뒤 장이 서는 날 다시 가서 알아보겠다만, 내포에 살던 교우들 중에 한양 노들나루와 가까운 청파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풍문은 들은 바 있다.”
당시 청파는 노들나루나 동작나루를 통해 한양과 호남, 호서를 오가는 사람들이 꼭 거쳐 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이 많았던 충청도 내포와 공주 출신 사람들이 그곳으로 옮겨 와 사는 수가 꽤 있었다.
“예, 아버님. 알아보시면 제가 버그내포3로 가 한양에서 들어오는 배를 타고 다녀오겠습니다.”
버그내포는 솔뫼에서 소들 평야[牛坪]를 따라가면 10리(4km)쯤 되는 곳에 있던 포구로 조선 말기에는 규모가 큰 포구였다.
얼마 후 대건의 할아버지는 옹기장수를 통해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기 위해 청파에서 주막을 열고 있는 교우의 소식을 알아 왔다. 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은 버그내포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떠났다. 주막 주인은 조심스럽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고, 제준이 순교자의 자손임을 확인하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곧 그를 주막의 한 방 안으로 들이며 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전했다.
“하이고, 교우님, 반갑소. 먼 길을 달려오셨구려. 고향에서 눈치 보며 사는 일이 여의치 않거든 이참에 한양으로 옮겨 오시는 건 어떻겠소?”
주막 주인은 자신을 찾은 제준의 사정을 알겠다며 이사하기를 권했다. 가끔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교우들이 있는데, 집값이 저렴한 숭례문 밖 청파나 약현 그리고 아현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런 곳으로 옮겨 온 이들은 칠패시장七牌市場(현재 서울역 부근 봉래동)이나 그 부근에서 장사를 하는데, 양반 체면만 버린다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될 거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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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청파에서 서당에 다니다
솔뫼로 돌아온 대건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상의한 끝에 청파로 옮겨 그곳에서 교중 소식을 알아보기로 했다. 일은 서둘러 진행되었다. 솔뫼 집과 집 앞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땅뙈기도 팔았다. 한편 아버지는 다시 한양에 올라가 주막 주인의 도움으로 청파에 아담한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한 후 돌아와서 이삿짐을 꾸렸다. 고향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버그내포에서 배를 빌렸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배를 타면 내포에 온갖 소문이 나돌까 싶어서였다.
마을 사람들의 배웅도 없이 떠나는 길이었다. 대건의 가족은 그렇게 쓸쓸하게 우평牛坪(소들) 평야를 지나 버그내포에서 기다리던 배에 올랐다. 배 안은 대건의 가족과 바리바리 싼 이삿짐으로 한가득이었다. 이제 고향을 뒤로하고 떠나는 순간, 배에 탄 가족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멀어지는 고향을 외면하듯 모두 먼 바다만 바라보았다. 이때 대건은 고개를 돌려 우평 평야의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왜 떠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막 주인의 조언처럼 되는대로 장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장사 경험이 없었으니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머니 역시 아는 이도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느라 얼굴 가득히 그늘이 져 있었다.
〈수선전도首善全圖〉 청파 부분
◆ 김대건의 가족이 솔뫼에서 청파로 옮겨 간 이유는 1839년(헌종 5년)의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천주교인들에 관한 기록인 《기해일기己亥日記》의 〈김제준 이냐시오 조條〉에서 엿볼 수 있다. “조부가 본 읍 옥중에 10여 년을 갇혀 있다가 치사한 고로, 고향에서 수계하기가 불편한지라”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청파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은 부친 김제준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39년 8월 13일 문초를 받을 때 “저는 본디 청파에서 살다가 용인 땅으로 이사하였습니다”라고 자백했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이 구한 집은 네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청파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만초천蔓草川에 놓인 돌다리인 청파 배다리[舟橋] 부근에 있었다.
청파 배다리에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레 지나가는 소리와 무거운 짐과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악다구니 쓰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청파는 한양 남부에서 삼남 지방을 잇는 병조 직할의 역촌驛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근의 용산 및 마포가 수로 교통의 요충지여서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청파는 한강을 건너 한양 도성문인 숭례문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용산방龍山坊에 포함되면서 한성부로 편입되었으니, 그래도 한양에 속한 곳이었다. 한강 주변이 상업 중심지로 전환되면서 거주민이 증가한 결과였다.
칠패시장은 숭례문과 소의문(서소문)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매우 큰 시장으로, 종루시전鐘樓市廛, 동대문 배오개에 있는 이현시장梨峴市場과 더불어 3대 시장 중 한 곳이었다.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인구가 많아지고 용산, 노량진, 마포와 가까워 생선뿐 아니라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특산 농산물을 사고파는 크고 작은 가게와 좌판, 행상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김제준은 이사를 마치고 세간을 다 정리한 뒤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칠패시장을 몇 번 돌아봐도 도대체 무슨 장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그는 양반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고향에서도 얼마 안 되는 논밭을 양반 체면에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소작을 줬을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선뜻 양반 체면을 버리고 장터에서 장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갑갑한 일이었다. 애타는 마음에 주막 하는 교우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지만 용기를 내 좌판이라도 벌이면서 경험을 쌓으라는 소리만 돌아왔다.
그렇게 김제준은 한양에 올라온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장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세월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동생 김제철金濟哲(1803~1835)이 대신 나섰다.
“형님, 아니 되겠소. 이 아우가 이것저것 생각해보았소.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쓰는 망건을 파는 망건 장사는 어떨까? 왕골이나 볏짚으로 만든 물건과 나막신 등을 파는 초물전草物廛을 해볼까? 아니면 대나무로 만든 물건을 받아다 파는 죽물전竹物廛을 할까?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어느 한 가지를 파는 것보다 여러 가지 잡물을 취급하는 잡상雜商을 하는 게 나을 성싶소. 형님 생각은 어떻소이까?”
제철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여러 물건을 취급하면서 어느 물건이 장사가 잘되는지 경험을 쌓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김제준은 동생의 생각이 그럴듯하다 싶어 솔뫼에서 전답을 팔아 초가집을 사고 남은 돈 중에서 일부를 꺼내 장사 밑천으로 내주었다.
한편 청파로 온 대건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 비친 대건은 새로운 걸 보면 신기해하는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 게다가 솔뫼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때나 어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울 때도 늘 열심이었다. 제법 총명하고 부지런히 배우는 아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대건이 다닐 만한 서당을 알아봤다. 솔뫼의 마을 서당에서는 천주학쟁이 집안 아이라고 받아주지 않아 《천자문》 다음에 배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은 아직 배우지 못한 터였다. 직계 3대가 천주교를 믿느라 과거를 보거나 출사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자문》의 다음 단계인 《동몽선습》까지는 배워야 했다. 당시 천주교 교리서는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 교리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문을 이해하는 지식인층만 그 뜻을 알 수 있었고,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은 그 지식인들에게 의지해서 교리를 배우던 실정이었다. 김제준은 가격家格이 한미해도 양반의 후손인 대건이 한문으로 된 천주교의 기본 교리서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주막 주인은 김제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서당을 소개해줬다. 김제준은 대건을 데리고 마을 서당을 찾아갔다.4 대부분의 마을 서당 훈장이 그렇듯 청파 마을 훈장도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래도 한양에 거주한 덕분에 문과 과거의 첫 관문인 소과小科 생원시에 입격入格했지만 그 이상은 오르지 못하고 훈장을 하면서 말년을 보내는 노인이었다. 훈장은 김제준이 김해 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 후손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근엄한 표정으로 《천자문》 첫 장을 펼쳐 대건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일월영측日月盈昃, 진수렬장辰宿列張.”
“뜻을 새겨보아라.”
“하늘은 위에 있으니 그 빛이 검고 그윽하며, 땅은 아래에 있으니 그 빛이 누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진다. 별자리가 하늘에 넓게 벌려져 있다.”
“역시 양반 가문인 김해 김씨 안경공파 자제라 그런지 열심히 했구나.”
훈장의 칭찬에 대건의 아버지는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양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이 놓인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천자문》은 다 뗀 셈이니 《동몽선습》부터 배우면 되겠소. 마침 얼마 전에 ‘수편首篇’을 시작한 아이들이 있으니, 그 아이들과 함께 배우면 되겠소이다. 이미 공부한 앞부분은 내가 따로 시간을 내어 가르칠 터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훈장은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였다. 삭전朔錢(월사금)을 아이 앞에서 말할 수 없다는 표시였다. 김제준은 대건에게 나직이 일렀다.
“먼저 집으로 건너가 할아버지께 가 있거라.”
대건은 서당에서 물러 나와 집으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며 다시 한번 청파 배다리 부근의 혼잡한 거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건은 다음 날부터 서당에 다니며 《동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