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Ian McEwan
굳건한 비평적 지지와 대중적 성공을 동시에 성취한 현대 영문학의 대표 작가. 1948년 6월 21일 영국 서리 지방의 알더샷에서 태어나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싱가포르와 독일, 리비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1970년 서식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이스트앵글리아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소설집 『첫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서머싯 몸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하여 부커상 후보에 여덟 차례 올랐고 1998년 『암스테르담』으로 수상했다. 2000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 커맨더 훈장을 수여받았고 이후 전미비평가협회상, 영국작가협회상, LA타임스 도서상, 예루살렘상, 괴테문화원이 수여하는 괴테 메달 등 수많은 수상 경력이 있다.
1997년에 발표된 이언 매큐언의 여섯번째 장편소설인 『견딜 수 없는 사랑』은 비극적 사고를 목격한 후 삶이 뒤흔들리게 된 인물의 변화를 놀라운 플롯과 눈부신 문장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작가의 최고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속죄』 『토요일』 『체실 비치에서』 『시멘트 가든』 『차일드 인 타임』 『솔라』 『칠드런 액트』 『넛셸』 『스위트 투스』 등이 있다.
옮긴이한정아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이언 매큐언의 『속죄』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박스』 『드롭: 위기의 남자』 『다섯번째 증인』 『나인 드래곤』 『혼돈의 도시』 『클로저』 『유골의 도시』 『엔젤스 플라이트』 『보이드 문』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하버드 스퀘어』 『헛된 기다림』 등이 있다.
디자인
표지 김현우
본문 최미영
ENDURING LOVE
Copyright ⓒ Ian McEwan 1997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3 by BOKBOKSEOGA, Co. Lt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Rogers, Coleridge and White Ltd. through EYA(Eric Yang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Eric Yang Agency)를 통해 Rogers, Coleridge & White Ltd.와 독점계약한 복복서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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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본문의 주석은 모두 옮긴이주이다.
2. 본문의 강조체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표시된 부분이다.
애널리나에게
하나
시작은 표시하기 쉽다. 우리는 햇빛을 받으며 떡갈나무 아래 있었고, 떡갈나무가 강한 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와인 오프너를 쥐고 풀밭에 무릎을 대고 있고, 클래리사는 1987년산 도마스 가삭을 내게 건네고 있었다. 이 순간, 시간 지도에 찍힌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이 순간. 나는 손을 내밀었고, 차가운 병목과 검은색 포일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 남자의 고함을 들었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들판을 바라보았고 위험을 발견했다. 다음 순간, 나는 그 위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와인 오프너를 떨어뜨린 것이나 벌떡 일어선 것, 결정을 내린 것, 혹은 뒤에서 클래리사가 조심하라고 외치던 소리를 들은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떡갈나무 옆 봄날의 풀밭에서 느끼던 행복을 박차고 달려나가 이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뛰어들어가다니,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또다시 고함이 들렸고 아이가 우는 소리도 났는데, 산울타리를 따라 늘어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나는 더 빨리 달렸다. 그리고 갑자기 들판 곳곳에서 네 명의 남자가 나타나, 그 위험의 현장을 향해 나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100여 미터 상공에서 독수리의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본다. 조금 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기류를 따라 급강하해 선회하던 그 독수리의 눈으로. 다섯 남자가 40만 제곱미터가 넘는 들판 한가운데로 말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바람을 등지고 남동쪽에서 접근했다. 내 왼쪽으로 200여 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에서는 두 남자가 나란히 달려왔다. 들판 남쪽 끝에서 도로와의 경계 역할을 하는 울타리를 수리하던 농장 인부들이었다. 그들 너머로 똑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는 자동차로 이동중이던 존 로건이라는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고, 그의 자동차는 문 하나 혹은 여러 개가 활짝 열린 채로 길가 풀숲에 멈춰 서 있었다. 그땐 몰랐던 것을 알고 있는 지금, 400미터 떨어진 들판 저 반대편의 너도밤나무숲에서 튀어나와 바람 속을 달려 내 앞에 불쑥 나타난 제드 패리의 모습을 떠올리려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상황에 얽히는 바람에 우리에게 닥칠 슬픔을 알지 못한 채 연인들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오는 패리와 내가 독수리 눈에는 초록 들판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흰 셔츠를 입은 아주 작은 형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를 미치게 만들 만남까지는 아직 몇 분이 남아 있었고, 그 만남의 중대한 의미는 시간이라는 장벽뿐만 아니라 들판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것으로도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쪽에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고통에 비하면 엄청난 크기였고 그 무시무시한 비율의 힘이 우리를 끌어당겼다.
클래리사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녀는 자신이 들판 중앙을 향해 빨리 걸어갔다고 말했다.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참았을까. 내가 이제부터 묘사하려는 그 일, 즉 추락 사건이 일어날 즈음 그녀는 우리를 거의 따라잡았고, 참여, 밧줄과 외침, 처절한 협업 실패라는 부담을 지지 않은 관찰자의 위치에 있었다. 내가 묘사하는 일은 클래리사도 본 일, 그리고 강박적인 재검토의 시기에 둘이 나눈 대화를 통해 구성된 것이다. 여파. 이것이 초여름의 풀베기를 기다리는 들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적절한 용어일 것 같다. 여파, 이모작 작물, 5월의 첫 풀베기로 촉진된 성장.
나는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 못하고 망설이는 중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순간에서 이렇게 머뭇거리는 것은 그땐 아직 다른 결과들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관점에서 볼 때, 평평한 초록 들판의 한 점을 향해 여섯 명이 모여드는 것은 기하학적으로 안정된 그림이다. 제한된 평면의 당구대. 힘과 힘의 방향이라는 초기의 조건들이 모든 가능한 경로, 충돌과 회귀의 모든 각을 결정하며, 천장의 불빛이 당구대와 녹색 베이즈 천과 그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선명하게 비추는 당구대. 나는 우리가 서로 만나기 전, 한곳을 향해 모이고 있던 순간 수학적인 은총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의 위치와 상대적 거리와 방위를 두고 자꾸 미적대는 것은 이 일들에 관해 내가 무언가를 분명히 이해한 것이 이때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까? 우리 가운데 완전한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풍선이었다. 만화 속 등장인물의 말이나 생각을 담은 말풍선이나,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어 만드는 풍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헬륨이 가득 든 거대한 기구였다. 별들의 핵 용광로에서 수소로부터 만들어진 원소.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생각을 포함해 우주의 모든 다양한 물질의 탄생을 가능케 한 시작.
우리는 재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재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용광로였다. 그 용광로의 열에 인간의 정체성과 운명이 얽히고 녹아서 새로운 모양을 이루게 될 터였다. 기구 아래쪽에 달린 바구니에는 소년이 타고 있고, 바구니 옆에는 도움이 필요한 남자가 밧줄을 붙잡고 있었다.
⁎
기구가 없었더라도 그날은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6주 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매우 기쁜 날이었기 때문이다. 클래리사와 내가 함께한 7년 중 가장 오래 떨어져 있다 재회하는 거였다. 나는 히스로 공항으로 가는 길에 코벤트 가든에 들러 카를루치오 레스토랑 근처에 차를 세운 뒤 레스토랑에 들어가 소풍 가서 먹을 것들을 샀다. 제일 중요한 건 커다란 공처럼 생긴 모차렐라 치즈로 점원이 나무집게로 커다란 도자기 그릇에서 꺼내주었다. 검은 올리브와 믹스 샐러드와 포카치아 빵도 샀다. 그러고는 롱 에이커 거리를 부지런히 걸어가 버트럼 로타 서점에서 클래리사의 생일 선물로 주문해두었던 것을 찾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구입한 것 가운데 아파트와 자동차 다음으로 비싼 물건이었다. 차로 돌아오는데 그 작은 희귀본이 두꺼운 갈색 포장지 속에서 열을 발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40분 후 나는 여객기 도착 정보 전광판을 훑어보고 있었다. 보스턴발 여객기는 조금 전에 도착했고 그렇다면 30분은 기다려야 할 터였다. 인간 감정의 다양한 표현은 보편적이고 유전적으로 새겨져 있다는 다윈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얻고 싶다면, 히스로 공항 4번 터미널 도착 게이트 옆에 몇 분만 있어보라. 카트를 밀고 나오다 마중 나온 군중 속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풍만한 체구의 나이지리아 여성, 입술이 얇은 스코틀랜드 할머니, 창백하고 차림새가 단정한 일본인 기업가의 얼굴에 똑같은 기쁨과 똑같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인간의 동일성을 관찰하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을 관찰하는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다. 말끝이 내려가는 탄성 섞인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가 포옹하며 나지막이 이름을 부를 때 자주 들렸다. 장2도, 아니면 단3도, 아니면 그 중간의 음조였을까? 아빠! 욜란타! 호비! 은제! 또한 올라가는 어조의 탄성 섞인 목소리도 들렸는데,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버지나 조부모가 즉각적인 사랑의 반응을 바라면서 뚱하고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기들의 이름을 살살 달래듯 부를 때였다. 해나? 토미? 나를 받아줘!
개인의 드라마에서는 다양성을 볼 수 있었다. 튀르키예인으로 보이는 아버지와 10대 아들은 서로를 용서하는 것인지 혹은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지 자기들이 카트를 막아 정체를 빚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오랫동안 조용히 부둥켜안고 서 있었다. 일란성쌍둥이인 50대의 두 여성은 서로를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건성으로 악수하고 볼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얼굴이 낯선 아빠의 어깨에 올라탄 어린 미국인 사내아이는 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대서 지친 엄마의 성질을 돋우었다.
그러나 대개의 드라마는 미소와 포옹으로 가득했다. 나는 35분간 50건이 넘는 해피엔딩 드라마를 지켜보았는데, 갈수록 주인공들의 연기력이 이전 드라마의 주인공들보다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는 내가 감정적으로 지친 나머지 어린아이들마저 연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하면 클래리사를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군중 속에서 나를 찾아 돌아다니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그 순간 나의 무심함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어조로 기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난 후 우리는 크리스마스 커먼 근처 칠턴스 언덕에 있는 너도밤나무숲 길 입구에 차를 세웠다. 클래리사가 신발을 갈아 신는 동안 나는 소풍 배낭을 쌌다. 아직 재회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우리는 팔짱을 끼고 길을 나섰다. 손의 크기와 감촉, 따뜻하고 고요한 목소리, 켈트족의 창백한 피부색과 초록 눈 같은 그녀의 익숙한 면들이 낯선 빛을 받아 반짝이며 새롭게 느껴졌고, 우리의 첫 만남과 사랑에 빠져 함께한 몇 달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나는 다른 남자, 즉 나 자신의 성적 경쟁자가 되어 나에게서 클래리사를 훔치러 왔다는 상상을 했다. 그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얼간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걸음을 멈추고 키스를 하면서 곧장 집으로 가서 침대로 뛰어들걸 그랬다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대한 헬륨 기구가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둥둥 떠가는 모습이 새로 돋아난 나뭇잎들 사이로 보였다. 남자도 소년도 우리 눈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종사가 아니라 바람이 항로를 정하는 저런 기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교통수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매력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즉시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칼리지 우드를 통과해 피스힐을 향해 가는 동안 가끔 걸음을 멈추고 너도밤나무에 돋은 새순을 보며 감탄하곤 했다. 나뭇잎이 스스로 빛을 발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초록색의 순수성과 너도밤나무의 새순을 화제로 대화를 나눴고, 새순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나뭇가지들이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우리는 이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런던 중심부에서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지역 가운데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이곳 구릉지의 완만한 굴곡과 백악과 석영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풍경이 좋았고, 그 구릉을 내려가면 나오는 너도밤나무숲의 어둠과, 방치되고 물이 거의 마른 계곡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오솔길을 사랑했다. 계곡의 썩어가는 나무 몸통들에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는 이끼가 빽빽이 덮여 있었고, 숲속을 헤매는 먼잭*의 모습이 가끔 보이기도 했다.
* 동남아시아 원산의 작은 사슴.
우리는 서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서 클래리사의 연구 주제인 존 키츠의 말년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나눴다. 키츠는 조지프 세번이라는 친구와 함께 묵고 있던 로마의 스페인 계단 아래쪽에 있는 주택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쓴 키츠의 미출간 편지 서너 통이 존재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중 한 통은 연인인 패니 브론에게 쓴 것일 수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를 확보한 클래리사는 안식년이 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패니 브론과 키츠의 여동생 패니와 관련된 집들을 방문했다. 그런 다음 하버드대학교 호턴도서관에서 연구하다 세번의 먼 친척들에게 서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보스턴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키츠의 마지막 편지는 그가 사망하기 석 달 전쯤 찰스 브라운이라는 오랜 친구에게 쓴 것이었다. 키츠는 예술 창조에 대한 뛰어난 묘사를 엄숙하게, 그러나 덧붙여 말하듯 무심하게 쏟아냈다. “콘트라스트에 대한 지식, 빛과 그림자에 대한 느낌, 시에 필요한 (원시적 의미에서의) 모든 정보가 병의 회복을 막는 강력한 적이 되고 있네.” 그 편지는 과묵함과 정중함이 통렬하게 느껴지는 유명한 작별인사였다. “자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가 쉽지 않군, 편지에서조차 말일세. 나는 항상 어색하게 인사를 했지. 신이 자넬 축복하기를! 존 키츠.” 그러나 모든 전기傳記는 키츠가 이 편지를 썼을 때 결핵에 상당한 차도를 보이고 있었고, 그후 열흘은 그렇게 회복된 상태였다는 데 동의한다. 키츠는 보르게세 공원에 갔고 코르소 길을 거닐었다. 세번이 연주하는 하이든의 곡을 즐겁게 감상했고, 맛이 형편없다며 저녁을 먹지 않고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짓궂은 행동도 했으며, 심지어 시를 구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쓴 편지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세번이나 브라운은 왜 그 편지를 숨기고 싶어한 것일까? 클래리사는 브라운의 먼 친척들이 1840년대에 주고받은 서신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더 많은 증거와 다른 자료들이 필요했다.
“그는 패니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클래리사가 말했다.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종이에 적힌 패니의 이름을 보는 것조차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될 거라고 말했지. 그러면서도 패니에 대한 생각을 멈추진 않았어. 12월의 그 며칠간은 상당히 건강했고,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했지. 그러니 부칠 의도가 전혀 없는 편지를 쓰는 그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아?”
나는 클래리사의 손을 꼭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츠나 그의 시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그가 연인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편지를 쓰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나는 클래리사가 이런 가상의 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상황, 그리고 편지에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완벽하지 않다는 그녀의 확신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고 나서 몇 달 동안, 그리고 아파트를 사기 전까지 그녀는 우리의 사랑이 이제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랑과도 다르고 우월한 이유를 열정적이고도 추상적으로 적어 내려간 아름다운 편지를 내게 보냈다. 자신들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것을 찬미하는 것, 그것이 바로 러브레터의 본질일 것이다. 나도 그런 편지를 쓰려고 애썼지만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실뿐이었고, 그 사실이 내겐 충분히 기적적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여인이 덩치 크고 서툴고 탈모가 진행중이며 자신의 행운을 믿지 못하는 남자를 사랑하고 그에게서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메이든스그로브 숲으로 가다 걸음을 멈추고 독수리를 보았다. 우리가 자연보호구역 주변 골짜기를 뒤덮은 숲속에 있는 동안 기구는 우리가 지나온 길로 되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이른 오후 우리는 리지웨이 길에 있었고, 급경사면을 따라 북쪽으로 걷고 있었다. 잠시 후 거대한 손가락 모양의 언덕이 나타났다. 칠턴스 언덕에서 서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그 언덕 아래로 비옥한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거기 서서 보니 옥스퍼드 계곡 너머로 코츠월드 언덕의 윤곽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옅은 푸른색 덩어리 같은 브레콘비콘스산맥이 보였다. 언덕 끝의 전망이 가장 좋아 거기서 소풍을 하는 것이 우리 계획이었지만, 바람이 너무 거셌다. 결국 우리는 들판으로 되돌아와 북쪽 끝에 있는 참나무숲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 나무들 때문에 기구가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야 나는 기구가 왜 바람에 떠밀려 멀리 날아가지 않았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날 150미터 상공에서 불던 바람이 지표면에서 몰아치던 바람과 같지 않다는 사실 역시 나중에 알았다.
배낭에서 점심을 꺼내면서 키츠에 대한 대화는 자연스레 들어갔다. 클래리사가 배낭에서 와인을 꺼내 병 밑동을 잡고 내게 건넸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와인병의 병목이 내 손바닥에 닿는 순간 고함이 들렸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조되는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시작과 끝의 표지였다. 그 고함을 들은 순간 내 인생의 한 장章이, 아니 한 단계 전체가 끝났다. 그런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그리고 2~3초 정도 여유가 있었더라면, 나는 약간의 향수를 스스로에게 허락했을 것이다. 클래리사와 나는 아이 없이 7년째 사랑의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클래리사 멜런은 다른 남자도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남자의 200번째 생일이 다가오는 상황이라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우리가 힘의 균형을 이루는 방식이자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인 전투적인 대화에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런던 북부에 있는 아르데코 양식의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걱정거리도 평균보다 적었다. 물론 우리가 한두 해 동안 경제 형편이 안 좋았던 적도 있고, 암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 친구들의 이혼과 질병, 내가 때때로 내 일에 만족 못해 폭발하는 바람에 클래리사를 화나게 하는 정도의 걱정거리는 있었지만, 우리의 자유롭고 친밀한 삶을 위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소풍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크기가 집채만하고 눈물방울 모양을 한 거대한 회색 기구가 들판에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기구가 땅에 닿았을 때 조종사는 승객을 태운 바구니에서 내리려던 중이었던 것 같다. 기구 고정 장치와 연결된 밧줄에 그의 한쪽 다리가 감겨 있었다. 그때 바람이 거세지면서 기구가 급경사면 쪽으로 밀려 떠올랐고, 그는 질질 끌려갔다. 바구니 안에는 열 살가량의 사내아이가 있었다. 갑자기 소강상태가 되었고, 남자는 일어서서 바구니인지 소년인지를 꽉 붙잡았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돌풍이 불었고 조종사는 휙 떠밀려 거친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그는 발을 지탱할 곳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쳤고, 기구를 땅에 붙들어두기 위해 자기 뒤에 있는 고정 장치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가 기구를 붙들어둘 수 있었다고 해도, 다리에 감긴 밧줄은 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기구를 땅에 붙잡아두기 위해 온몸의 체중을 실어 버텼지만, 바람은 그의 손에서 밧줄을 홱 낚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기구를 향해 달려가던 나는 남자가 소년에게 바구니에서 뛰어내리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들판 위에서 기구가 이리저리 요동치자 소년은 바구니 안에서 이리 쿵 저리 쿵 하고 부딪쳤다. 소년이 다시 균형을 잡고 일어서서 한 다리를 들어 바구니 위에 걸쳤다. 그 순간 기구가 날아올랐다가 떨어지며 작은 언덕에 쿵 부딪쳤고, 소년은 뒤로 넘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남자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소리쳤다. 말을 한 건지 너무 무서워서 비명을 지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상황이 진정되었을 때 나는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바람이 잦아들었고 남자는 일어서서 허리를 굽히고 고정 장치를 땅속에 박으려 하고 있었다. 다리에 감긴 밧줄은 이미 다 풀어낸 후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이 놓였는지 또는 피곤했는지 아니면 지시를 따른 것인지, 소년은 바구니 안에 남아 있었다. 거대한 기구가 흔들리고 기울어지고 떠밀리고 있었지만, 분명 야수는 얌전해져 있었다. 나는 멈추지는 않았지만 속도를 줄였다. 남자가 허리를 펴고 서더니 우리에게—적어도 농장 인부들과 나에게—빨리 와달라고 손짓했다. 그는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나는 마음이 놓여 속도를 줄이고 걸었다. 농장 인부들도 걷고 있었다. 한 명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러나 자동차로 이동중이던 존 로건은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는지 계속 달려오고 있었다. 제드 패리는 우리 사이에 놓인 기구에 가로막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 꼭대기에서 다시 광포해진 바람이 내 등을 때렸다. 그리고 기구를 강타했는데 이리저리 우스꽝스럽게 흔들리던 기구가 갑자기 멈추고 잠잠해졌다. 기구의 움직임이라고 해봤자 기구 속에 담긴 에너지가 축적되면서 기구 표면에 잔물결이 일고 반짝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기구가 갑자기 탈주를 감행했다. 고정 장치가 흙먼지를 날리며 날아오르면서 기구와 바구니도 3미터쯤 공중으로 떠올랐다. 소년이 다시 나동그라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 손으로 밧줄을 쥐고 있던 조종사는 땅에서 50센티미터 정도 떠올랐다. 조종사 앞에 도착한 로건이 기구에 매인 수많은 밧줄 중 하나를 잡지 않았더라면, 기구는 소년을 태우고 멀리 날아가버렸을 것이다. 대신 두 남자가 들판 위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농장 인부들과 나는 다시 달리고 있었다.
내가 농장 인부들보다 먼저 그 자리에 도착했다. 내가 밧줄을 잡았을 때, 바구니는 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그 안에서 소년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오줌 냄새가 났다. 잠시 후 제드 패리가 밧줄을 잡았고, 그러고 나서 농장 인부 조지프 레이시와 토비 그린이 밧줄을 잡았다. 그린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면서도 밧줄을 놓지 않았다. 조종사가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외쳐대고 있었지만 너무 흥분해 있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듣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기구와 씨름하는 바람에 지칠 대로 지치고 감정적으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 다섯 명이 밧줄을 붙잡고 있어 기구는 날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서서 천천히 바구니를 잡아당겨 내리기만 하면 됐고, 조종사가 뭐라고 외쳐대건 그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우리는 가파른 언덕에 서 있었다. 땅은 가파르게 비탈져 내려가다가 바닥에 가까워지면서 완만한 평지로 변했다. 겨울이면 동네 아이들이 터보건 썰매를 타러 오는 곳이었다. 다들 동시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우리 중 두 명, 즉 나와 존 로건은 기구를 언덕 끝에서 안쪽으로 끌어오고 싶어했다. 다른 누군가는 우선 아이부터 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누군가는 기구를 땅으로 끌어내려 단단히 고정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어느 것부터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들판 쪽으로 옮기기만 해도 자연스레 기구를 지표면으로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견해가 우세했다. 조종사가 네번째 아이디어를 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도,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다. 우리가 같은 목표를 가지면서 미약하게나마 연대감이 형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한 팀은 아니었다. 그럴 가능성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우리는 우연히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었고 이타적인 성향 때문에 기구 아래로 모였을 뿐이었다. 책임자가 없었고, 아니 모두가 책임자였고, 다들 소리 지르기 시합의 참가자였다. 우리는 상기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조종사를 무시했다. 그는 열을 발산하듯 무능함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큰 소리로 자기주장을 펼친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확실한 리더였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 대해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고, 인격의 힘이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어떤 리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수렵채집사회부터 산업화 이후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사회 가운데 리더와 피지배자들이 없었던 사회는 인류학자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로는 어떤 긴급 상황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기구에 달린 승객 탑승용 바구니를 충분히 끌어내려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소년이 바구니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이 이름이 뭐죠?” 우리가 상기된 얼굴의 조종사에게 물었다.
“해리.”
“해리!” 우리가 소리쳤다. “일어나, 해리. 해리! 내 손을 잡아, 해리. 거기서 나와, 해리!”
그러나 해리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우리가 자기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움찔했다. 우리의 말이 돌멩이처럼 날아가 소년의 몸을 때리는 듯했다. 소년은 의지가 마비된 상태, 즉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증상은 특이한 스트레스를 받는 실험동물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문제해결 능력과 생존 본능이 완전히 사라진다. 우리는 바구니를 땅으로 끌어내려 붙든 후, 바구니 안으로 몸을 숙이고 소년을 들어올리려고 했다. 그 순간 조종사가 우리 어깨를 밀치더니 바구니에 올라타려고 했다. 나중에 그는 그때 자기가 뭘 하려던 것인지 우리에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고함치고 욕하느라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가 하는 행동이 어처구니없어 보였지만,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도는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그는 바구니 안에 얽혀 있는 코드를 뽑아서 기구에서 기체를 빼낼 생각이었다고 했다.
“뭐 하는 거야, 멍청하게!” 레이시가 소리쳤다. “아이 빼내는 걸 도와야지.”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하기 2초 전,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마치 고속열차가 우듬지를 가로질러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는 듯한 소리였다. 씽씽,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0.5초 만에 최대 볼륨으로 커졌다. 나중에 경찰이 공개한 그날의 풍속을 보면 시속 110킬로미터 이상의 돌풍이 여러 차례 불었다. 이 바람이 그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만 시간을 멈추고—정지 상태에서는 안전하다—기구를 빙 둘러싸고 있던 우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내 오른쪽으로는 땅이 가파르게 비탈져 있었다. 왼쪽에는 존 로건이 있었는데, 그는 옥스퍼드에 사는 42세의 일반 개업의로 역사학자인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었다. 그가 우리 가운데 가장 젊지는 않지만 가장 건장했다. 카운티 대회에 나갈 만큼 테니스를 잘 쳤고 산악회 회원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웨스트 하이랜드에서 산악구조대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로건은 온화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리더를 자청하고 나서서 비극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왼쪽에 있었던 조지프 레이시는 63세의 농장 잡역부로 동네 볼링팀의 주장이기도 했다. 언덕 아래쪽에 있는 와틀링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레이시의 왼쪽에는 동료인 토비 그린이 있었다. 나이는 58세에 직업은 레이시와 마찬가지로 농장 잡역부였다. 그는 미혼으로, 어머니와 함께 러셀스 워터에 살았다. 레이시와 그린은 스토너 농장에서 일했다. 골초처럼 기침 발작을 일으킨 사람은 그린이었다. 우리 옆에서 바구니로 들어가려고 애쓰던 조종사는 제임스 개드라는 55세의 남자로 작은 광고회사 대표였고, 아내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성인 자녀 한 명과 함께 레딩에서 살았다. 경찰조사 때 개드는 기본 안전 수칙 가운데 대여섯 가지를 위반한 것으로 밝혀졌고, 검시관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 위반 사항을 열거했다. 개드의 기구 조종 면허는 취소되었다. 바구니에 있던 소년은 조종사의 손자 해리 개드로, 나이는 열 살이고 런던 캠버웰에 살았다. 내 맞은편에는 제드 패리가 있었고, 그의 왼편으로 땅이 완만한 경사로 비탈져 있었다. 패리는 28세의 무직자였고, 유산으로 받은 햄프스테드의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조종사는 우리에 관한 지휘권을 포기한 것 같았다. 우리는 흥분해서 숨을 헐떡이며 각자의 계획을 밀어붙이려고 하고 있었지만, 소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애써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소년은 몸을 웅크리고 누운 채 두 팔로 세상을 가리고 있었다. 레이시와 그린과 나는 소년을 바구니에서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고, 제임스 개드는 우리 머리 위를 타 넘고 있었다. 로건과 패리는 큰 소리로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개드가 손자의 머리 옆에 한 발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그린이 욕을 퍼부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강력한 일격이 기구를 재빠르게 두 번 강타한 것이다. 하나, 둘. 첫번째 주먹도 셌지만 두번째가 훨씬 더 강력했다. 첫번째 일격에 개드가 바구니 밖으로 홱 밀리며 땅에 떨어졌고, 기구가 바람에 1.5미터가량 공중으로 떠올랐다. 개드의 육중한 몸이 사라지자 균형도 깨졌다. 밧줄이 내 손안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올라가는 바람에 손바닥이 쓸려 화끈거렸지만, 나는 버텼고 줄 끝까지 50센티미터 정도 남은 상태에서 간신히 줄을 잡았다. 다른 이들도 밧줄을 잡고 있었다. 이제 바구니는 우리 머리 바로 위에 있었고, 우리는 주일날 교회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종을 치는 사람들처럼 두 팔을 높이 들어 밧줄을 잡고 있었다. 다들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데, 두번째 일격이 기구를 강타하면서 기구가 서쪽으로 밀렸다. 갑자기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밧줄을 잡은 채 허공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던 그 1~2초가 내 기억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강을 따라 올라가는 긴 여행만큼이나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기구를 무겁게 만들어 지표면 가까이 붙잡아두려면 밧줄을 계속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무기력했고 금방이라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고압송전선이 있었다. 그리고 기구 바구니에는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가 홀로 있었다. 밧줄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 내 의무였고, 우리 모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밧줄을 붙잡아서 아이를 구하고 싶은 마음—나중에는 이 마음이 신경세포의 진동에 불과했던 것처럼 느껴졌다—이 든 것과 거의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두려움과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즉각적인 계산이 뒤섞였다. 기구가 서쪽으로 떠밀려가면서 우리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땅은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나는 두 다리와 발로 밧줄을 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밧줄 끝은 허리께에 있고, 밧줄을 잡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지고 있었다. 두 다리가 공중에서 마구 흔들렸다.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지표면과의 거리가 눈에 띄게 멀어졌고, 밧줄을 놓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순간이 올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나의 상황에 비하면, 바구니 안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해리는 안전했다. 기구는 언덕 밑에 안전하게 내려앉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밧줄을 계속 붙들고 있으려는 충동은 조금 전에 시도한 것을 지속하려는 마음에 불과했고, 상황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내 무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에 자극받은 심장이 한번 박동하기도 전에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었다. 누군가가 손을 놓았고, 그 바람에 기구와 밧줄을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 요동치면서 1미터 이상 더 날아오른 것이다.
나는 누가 제일 먼저 밧줄을 놓았는지 그때도 알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그때 우리의 단합이 깨지지 않았다면, 몇 초 뒤 돌풍이 잦아들면서 언덕 아래로 4분의 1도 채 가지 않아 우리 몸무게의 총합이 기구를 땅에 내려앉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는 한 팀이 아니었고 아무 계획도 없었으며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합의를 깰 일도 없었다. 실패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옳은 결정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합리적인 수순이었다고 다들 만족했을까? 우리는 결코 그런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의 본성에 새겨졌고 이젠 거의 자동으로 소환되는 더 엄중한 약속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협력. 그것은 인류 초기에 사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이자, 발전하는 언어능력의 동력이었고, 사회적 화합을 위한 도구였다. 그 사고 이후 우리가 느낀 고통은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줄을 놓는 것도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행동이었다. 이기심 또한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무엇을 주고 자신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 이것이 우리 포유류가 직면한 갈등이다. 그 선線을 잘 지키는 것, 서로를 통제하고 통제받는 것이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칠턴스 언덕 위 3~4미터 상공에 떠 있으면서 ‘우리냐, 나냐’ 하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도덕성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누군가가 나라고 말했다면, 그다음에 우리를 말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대체로 우리는 선善이 합리적일 때 선하게 행동한다. 좋은 사회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사회다. 기구 밑에 매달려 있던 우리는 갑자기 나쁜 사회 구성원이 되었고, 사회는 해체되고 있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갑자기 합리적인 선택이 되었다. 그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 아이를 위해 죽을 생각은 없었다. 한 사람—근데 누구일까?—이 줄을 놓고 떨어지는 것을 흘끗 보고 기구가 휘청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을 느끼자, 문제가 정리되었다. 이타심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나는 줄을 놓고 떨어졌다. 4미터 가까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옆으로 둔탁하게 떨어졌지만, 넓적다리에 멍이 들었을 뿐 다른 부상은 없었다. 나보다 먼저인지 나중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주위에서 사람들이 연달아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제드 패리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 토비 그린은 발목이 부러졌다. 최고 연장자에 낙하산 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조지프 레이시는 일시적인 호흡곤란을 겪었을 뿐 다른 이상이 없었다.
내가 일어섰을 때 기구는 50미터 가까이 멀어져 있었고, 아직도 한 명이 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의사이며 산악구조대였던 존 로건의 마음속에서 이타심의 불길이 조금 더 강하게 타올랐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 불길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 가운데 네 명이 밧줄을 놓자, 300킬로그램 가까이 덜어낸 기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1초의 머뭇거림이 로건의 선택지를 없애버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일어서서 로건을 보았을 때 그는 30미터 상공에서 점점 높이 올라가고 있었고, 그 밑에선 언덕의 비탈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몸부림도 발버둥도 치지 않았고, 바구니 위로 기어 올라가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완벽하게 정지된 자세로 밧줄을 붙들고, 점점 힘이 빠지는 손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모습은 아주 작아졌고, 조금 지나니 하늘에 찍힌 검은 점으로 보였다.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기구와 바구니는 서쪽으로 둥둥 떠가고 있었고, 로건의 모습이 작아질수록 공포감은 더 커졌다. 너무 무서운 마음에 갑자기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고, 곡예나 농담, 만화같이 느껴져서 두려움으로 뒤범벅된 웃음이 내 가슴속에서 터져나왔다. 벅스 버니나 톰과 제리에게나 일어날 법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어서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오직 나만이 이 농담 속에서 진실을 볼 수 있고, 이 일을 결코 믿지 않으면 현실을 바로잡고 로건이 안전하게 땅에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서 있었는지 쓰러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토비 그린은 발목 때문에 십중팔구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용한 가운데 내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던 것을 기억한다. 아까와는 달리 어떤 감탄사도, 참견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기력한 침묵. 로건은 이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100미터 상공에 떠 있었다. 우리의 침묵은 일종의 용인이고 사형 집행 영장이었다. 아니면 그새 바람이 잦아들어 등을 간질이는 미풍으로 변했기 때문에 느끼는 공포와 수치심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밧줄을 붙들고 있어서, 나는 기구가 완전히 땅에 내려앉거나 소년이 정신을 차려 밸브를 찾아내 기체를 배출할 때까지, 혹은 어떤 광선이나 신, 혹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만화 속 영웅이 나타나 그를 들어올려줄 때까지 그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희망을 품고 있는데 그의 손이 밧줄 끝까지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직도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2초, 3초, 4초. 그가 손을 놓았다. 그때도, 그가 떨어지기 시작하던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이한 물리법칙이나 광포한 온난 상승 기류 혹은 우리가 목격한 현상만큼이나 놀라운 어떤 것이 개입해서 그를 받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가속도가 붙는 것도 보았다. 용서가 없었고, 신이 특별히 허락한 육신이나 용기, 친절도 없었다. 오직 잔인한 중력만 존재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아마도 로건에게서, 혹은 어느 무심한 까마귀에게서, 꺅 하는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나와 고요한 하늘을 갈랐다. 그는 밧줄에 매달려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뻣뻣하고 작은 검은색 막대기 같은 모습으로 추락했다. 나는 그렇게 추락하는 남자보다 더 끔찍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둘
속도를 줄이는 게 좋겠다. 존 로건이 추락한 후 30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추락과 동시에 혹은 그 직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말들이 오고 갔으며, 우리가 어떻게 움직였고 혹은 움직이질 못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등의 요소를 따로 떼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 이후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고, 이 일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너무나 많은 갈래가 나뉘기 시작했으며, 사랑과 증오의 갈림길이 생겨났기 때문에,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고 시시콜콜하게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실을 가장 잘 묘사하기 위해 꼭 현실의 속도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우주의 역사에서 최초의 30초에 전념하는 책들과 연구팀이 얼마나 많은가. 혼돈과 격변의 아찔한 이론은 우수한 초기 조건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므로, 초기 조건들을 공들여 묘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미 와인병의 촉감과 고통에 찬 고함으로 나의 시작을,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일들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작은 점은 유클리드기하학의 점만큼이나 관념적이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일지 몰라도, 내가 클래리사를 공항에서 데리고 나와 소풍을 계획한 순간, 혹은 소풍 장소나 우리가 점심을 어느 들판에서, 언제 먹을지 결정했을 때 내가 불러온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일에는 항상 선행하는 원인이 존재한다. 시작은 의도적인 선택이고, 한 시작이 다른시작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그 시작이 그다음에 벌어지는 일을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인병의 차가운 감촉과 제임스 개드의 고함,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한 이 순간들이 상황의 전환점이었고, 예상에서 벗어나게 된 출발점이었다. 우리가 맛보지 않은 와인(그날 밤 우리 둘이서 괴로움을 잊으려고 다 마셔버렸다)에서부터 기구 사고에 휘말리게 된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때까지 영위했고 계속 그럴 것이라고 예측했던 즐거운 생활에서부터 그후 견뎌내야 했던 시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예상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와인병을 떨어뜨리고 기구와 요동치는 바구니를 향해, 제드 패리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을 때 나는 평화로운 삶이 배제된 갈랫길을 선택한 것이다. 밧줄을 붙들고 씨름한 것, 연대가 깨어진 것, 로건을 떠나보낸 것은 우리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분명하고 어마어마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로건의 추락 직후, 다가올 미래를 뒤흔들 미묘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로건이 땅에 떨어진 순간은 내가 선택할 수 있었을 또하나의 시작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끝이 되었어야 했다. 그 오후는 단순한 비극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로건이 땅에 닿는 데 걸린 그 1~2초 동안 나는 기시감을 느꼈고 그 발원지가 어딘지 즉시 알아차렸다. 내가 20~30대에 가끔 꾸었던 악몽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악몽의 배경은 달랐지만, 기본 요소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재난 현장이 잘 보이지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서 지진이나 고층 건물 화재, 선박의 침몰, 화산 폭발과 같은 재난을 지켜보았다. 거리가 멀어 하나로 뭉뚱그려져 보이는 무력한 사람들이 곧 죽을 운명인 것도 모르고 공포에 사로잡혀 허둥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몸은 너무나 작은데 겪는 고통은 너무도 거대했고, 그 극명한 대비로 인해 공포심이 생겨났다. 인간의 목숨이 참으로 하잘것없었다. 개미보다 크지 않은 수천 명의 인간이 전멸을 앞두고 살려달라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내가 도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나는 그 꿈에 대해 생각했다기보다는 그 꿈에서 느꼈던 감정의 격류—공포와 죄책감, 무기력감—를 더 크게 경험했다. 그리고 예감이 실현된 것 때문에 구역질을 했다.
우리가 있는 언덕 아래 평지는 목초지로 사용되었는데, 윗가지를 다 쳐낸 버드나무가 빙 둘려 있어 울타리 역할을 했다. 그 너머에 더 큰 목초지가 있었고, 거기서 양들과 새끼 양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로건이 추락한 곳은 그 목초지의 한복판으로 언덕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다. 나는 충돌 순간 그 작은 막대기가 점성액 방울 같은 액체를 땅에 흘리거나 쏟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적 속에서 실제로 본 것은 동그랗게 웅크린 작은 점이었다. 가장 가까이,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양은 풀을 씹다 마지못해 고개를 한번 들었을 뿐이었다.
조지프 레이시는 발목이 부러져 일어서지 못하는 동료 토비 그린을 돌보고 있었다. 내 옆에는 제드 패리가 있었다. 우리 뒤로 좀 떨어진 곳에 제임스 개드가 있었다. 그는 로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옥스퍼드 계곡을 지나 저 멀리 늘어서 있는 고압선 철탑 쪽으로 떠가고 있는 기구 속의 손자를 걱정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손자를 쫓아가려는 것처럼 우리 옆을 지나 언덕을 몇 걸음 달려내려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 그 모습을 보며 객쩍은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클래리사가 뒤에서 다가와 두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내 등에 얼굴을 댔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미 울고 있었는데(내 셔츠 등판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에 슬픔이 나에게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꿈을 꿀 때처럼 일인칭도 되었다가 삼인칭도 되었다. 나는 연기를 했고, 연기하는 나 자신을 지켜보기도 했다. 능동적으로 생각했고, 그 생각들이 화면에 자막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마치 꿈을 꾸듯, 내 감정적인 반응은 실재하지 않았거나 부적절했다. 클래리사의 눈물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두 다리를 벌려 땅을 단단하게 디디고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저 멀리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자막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저 남자는 죽었다. 몸속에서 온기가 퍼져나갔다. 일종의 자기애였다. 나는 두 팔로 나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 어떤 특정한 시점에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는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우연히도 살아남았다. 제드 패리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이때였다. 그의 길고 여윈 얼굴에 고통스러운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곧 벌을 받을 개처럼 불쌍한 표정이었다. 이 낯선 이의 맑은 청회색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던 그 1~2초 동안, 나는 살아 있음을 자축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품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야겠다는 마음도 잠깐 들었다. 내 생각이 화면에 흐르고 있었다. 이 친구, 충격이 크군.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
나의 이 눈길이 당시에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고, 나중에는 어떻게 해석될 것이며, 그것을 기반으로 그의 마음속에 어떤 세상이 구축될지 알았더라면, 그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통스럽고 질문하는 듯한 표정 속에 첫번째 조짐이 떠올랐는데, 당시 나는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느꼈던 평온함은 내가 받은 충격의 한 증상에 불과했다. 나는 패리에게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여 예의를 표하고, 내 뒤에 서 있는 클래리사는 모른 척한 채—나는 바쁜 사람이고 일을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하는 사람이었다—깊고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뻔한 거짓말이 가슴속에서 얼마나 천연덕스럽게 울려퍼졌는지 그 말을 한 번 더 할 뻔했다. 아니, 한 번 더 말한 것 같다. 로건이 추락한 후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이 나였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때 갖고 있었던 모든 소지품 중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나는 청년의 눈이 약간 커지는 것을 존경심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그 단단하고 작은 판 쪼가리를 손에 들고 그 손 엄지손가락으로 9를 세 번 누르면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느낀 감정이기도 했다. 나는 장비와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긴급 구조 상황실과 연결되자 나는 경찰과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추락 사고와 어린 사내아이가 기구를 타고 날아간 사고에 대해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한 후 우리가 있는 위치와 도로를 통해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이 내가 흥분을 억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모음을 불분명하게 발음하면서 큰 소리로 지시하고 경고하고 싶었다. 나는 불안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지만, 아마도 표정은 행복해 보였을 것이다.
전화를 끊자 조지프 레이시가 말했다. “구급차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발목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린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실어 가야 하니까 필요하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렇지. 내게 필요한 것은 이거였다. 해야 할 일.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고, 기꺼이 나가 싸우고 달리고 춤추고,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안 죽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말했다. “가능성은 항상 있으니까. 내려가서 살펴보죠.”
이 말을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비탈길을 성큼성큼 호기롭게 걸어내려가고 싶었지만, 균형감각을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비탈길을 올라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패리에게 말했다. “같이 가죠.” 제안으로 한 말이었는데, 요구처럼 들렸다. 패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나긴 집착의 겨울을 날 땔감용으로 모든 것을, 내 모든 몸짓과 말을 모으고 쌓고 비축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에서 클래리사의 두 팔을 떼어내고 돌아섰다. 그땐 내가 쓰러지지 않게 그녀가 붙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려가보자.” 내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 어조가 부드러워지고 목소리가 작아진 것이 내 귀에도 들렸다. 나는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이제 그가 애인에게 말한다. 클로즈업으로 잡은 친근한 투 숏.
클래리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중에 그녀는 그때 내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 그녀가 속삭였다. “가만히 좀 있어.”
“왜?” 내가 좀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들판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다들 잠자코 있었다. 클래리사가 나를 바라보았고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였지만 내가 왜 나서지 말아야 하는지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풀밭에 서서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난 저 사람한테 내려가볼 겁니다. 같이 가실 분?”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릎에서 힘이 풀려 후들거려서 보폭을 줄여 걸었다. 20초 후에 뒤를 돌아보니, 다들 그대로 서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흥분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내린 결정의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외로웠다. 그리고 두렵기도 했다. 두려움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들판에 옅은 안개처럼 퍼져 있었고, 중심으로 갈수록 강렬해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선택의 여지 없이 그 두려움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돌아서면 다시 언덕을 올라가야 하고 그러면 두 배로 치욕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희열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퍼져나갔다. 만나고 싶지 않은 죽은 남자가 들판 한복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아직 살아 있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발견하는 일일 터였다. 그러면 파티에서 써먹는 속임수처럼 어설픈 응급처치 기술로 나 혼자 그를 돌봐야 할 것이다. 그는 살아나지 못하고 결국 죽을 것이고, 그의 죽음은 온전히 내 책임이 될 것이다. 나는 돌아서서 클래리사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그들이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저 위에서 허세를 부리고 내려왔기 때문에 돌아서기가 창피했다. 이렇게 긴 언덕을 내려온 것이 내가 받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