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신인철
대학시절 첫 배낭여행으로 르네상스의 심장, 피렌체를 다녀온 후 여러 차례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인간이 온전히 세상의 주인이 되었던 르네상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살았다. 직장인 인문학 연구모임인 ‘르네상스 워커스’를 공동 설립해 2010년부터 6년간 대표를 맡았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세계적인 화학기업의 조직문화개발 팀장으로 근무하며 언택트 리더십, 가상 오피스, 워케이션 등 다양한 일하는 방식을 연구하게 되면서 수십 년간 머리와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르네상스 시기의 선배들을 소환하게 되었다.
‘머리는 마키아벨리처럼, 가슴은 뒤러처럼 그리고 양손은 미켈란젤로처럼’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으며, 잠시 어두워졌던 세상에 다시금 사람 냄새나는 빛이 비쳤으면 하는 바람에 인문학의 기반에 경영학을 접목시킨 다양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활동과 재능기부 활동 등을 벌이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한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최고의 그린바이오 및 스마트팜 기업에서 최고인사책임자(CHO)로 근무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나이키에서 배웠다》, 《미술관 옆 MBA》, 《링커십》, 《토요일 4시간》 등이 있다.
르네상스 워커스
전자책 발행 2023년 8월 1일
지은이 신인철 펴낸이 이성용 책디자인 책돼지
펴낸곳 빈티지하우스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성산로 154 4층 407호(성산동, 충영빌딩)
전화 02-355-2696 팩스 02-6442-2696 이메일 vintagehouse_book@naver.com
등록 제 2017-000161호 (2017년 6월 15일)
전자책 ISBN 979-11-89249-77-9 05320
정가 14,000원
ㆍ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빈티지하우스의 서면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ㆍ빈티지하우스는 독자 여러분의 투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으로 펴내고 싶은 원고나 제안을 이메일(vintagehouse_book@naver.com)으로 보내주세요.
본 전자책은 주식회사 북틀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주소│서울특별시 마포구 어울마당로 35 신보빌딩 3층
대표전화│070-7848-9387
대표팩스│070-7848-9388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시에는 형사/민사상의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본 컨텐츠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회의의 KoPub서체와 토끼활자공장의 HS봄바람체2.0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최유성과 딸 신율교
서울과 창원의 두 부모님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우리와 마찬가지로
엄혹했던 시기를 겪으면서도
찬란한 ‘인간의 시대’를 만들어 낸
르네상스의 선배님들께 감사하며…….
Praefatio1
평행이론
Theoria parallela2
1 ‘머리말’이라는 뜻의 라틴어.
2 ‘평행이론’이라는 뜻의 라틴어.
이탈리아의 비극적인 사나이
1349년 12월의 어느 날,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한 농촌 마을 어귀.
한 사내가 시신들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어……
모든 것이 끝났어……”
시신들은 그의 양손으로 차마 다 안지 못할 만큼 여러 구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집안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큰딸, 자신을 도와 소작농들을 부리고 농장을 관리했던 듬직한 큰아들, 늘 애교가 넘쳤던 쌍둥이 딸들 그리고 그런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사랑으로 따뜻한 가정을 꾸려나갔던 사랑스러운 아내……. 그들 모두가 단 며칠 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저 멀리서 묵묵히 구덩이를 파고 있는 아들 하나뿐이었다.
시원찮은 농기구로 잘 파지지 않는 땅을 파느라 흙투성이가 되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모습이었지만, 그래 봐야 이제 열 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고 누이들과 장난치며 놀던 아이였지만, 단 며칠 사이에 부쩍 어른스러워진 듯했다. 땅을 다 파고 난 막내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잠자코 서 있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바로 눈앞에 엄마와 형 그리고 누나들의 시신을 둔 열한 살 어린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어린 나이에 너무나 큰 일을 당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듯싶기도 했다.
지난 몇 년은 유럽, 특히 토스카나 사람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시절이었다. 1345년 여름, 피렌체를 관통하여 토스카나 지역을 휘감아 흘러나가는 아르노강이 범람했다. 흐름이 완만하고 적정한 수량을 유지했던 이전까지의 아르노강을 기억하는 토스카나 사람들에게 홍수는 무척이나 낯선 일이었다. 흉작이 들었고, 창고에 쌓아 놓았던 수확물도 못 쓰게 되어 버렸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힘든 시기를 넘겼다. 그런데 이듬해 또다시 강이 넘쳤다. 이번에는 더 크게……. 이재민이 속출했고, 먹을 것이 부족해서 동네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건강상태가 엉망이었다.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서 거리에는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닐 정도였다.
홍수 피해를 겨우 수습했을 무렵, 이번에는 ‘괴질병’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떤 사람은 “삽시간에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죽어 버리더라”라고 전했고, 또 다른 사람은 “내가 본 사람은 단 사흘 만에 온몸에서 피를 흘리다가 새카맣게 타 죽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찌 됐든 걸리면 매우 짧은 시간 내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게 되는 무서운 병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1348년 늦봄부터 돌기 시작한 괴질병에 대한 소문은 이내 전 토스카나 지방으로 퍼져 나갔고, 동네마다 죽은 이들의 장례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전 사내의 가족 중 큰딸이 먼저 쓰러지더니 단 며칠 만에 아내, 쌍둥이 두 딸 그리고 건강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큰아들마저 연달아 쓰러져버렸다. 손쓸 새도 없이 모두 숨을 거두고 만 것이었다.
알레산드로D’Alessandro라는 성씨의 이 사내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아내, 아들, 딸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막내의 도움을 받아 시신들을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어린 아들이 판 터라 구덩이의 깊이가 그리 깊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새카만 낯빛의 시신들은 금방 흙과 뒤범벅이 되어 잘 눈에 띄지도 않았다. 얕게 흙을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아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수선화를 꺾어 얹었다.
사람의 심사가 참 간사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었는데, 몇 줌 흙으로나마 시선을 가리니 순간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아야 한다’
막내의 얼굴에 묻어 있던 흙이 두 줄기 눈물에 씻겨 내려가자 아직 앳된 아이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엄마 잃은 저 어린아이와 함께 어떻게든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껏 주저앉아 울부짖던 자신의 행동이 철없는 사치로 느껴졌다. 그는 조촐한 장례식을 마친 뒤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인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이삿짐을 쌌다. 가족을 모두 잃은 집에서 하루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살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사나이
2022년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날 새벽, 대한민국 서울 마포에 사는 김경환(가명)3씨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차 트렁크에는 빈 가방 세 개가 실려 있었다. 일명 ‘이민 가방’이라 불리는 바퀴 달린 대형 가방이었다. 그의 차가 도착한 곳은 한 빌딩의 지하 주차장, 그 빌딩에는 얼마 전까지 자신이 경영하던 회사의 사무실이 입주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올라갔지만 불 꺼진 사무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회사는 오늘부로 폐업 신고를 할 예정이었다. 그 전에 개인 짐들을 빼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선 것이었다. 아직 가족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내는 회사 사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몇 달 전부터 짐작하고 있는 듯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고, 두 딸과 아들은 아예 모르는 듯했다. 아니, 몰라야 했다. 특히, 재수생인 큰딸과 외고 진학 준비를 하는 중3 아들은…….
3 개인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름을 포함해 신상과 관련된 내용 역시 맥락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부 각색을 하였다.
그의 회사는 기업체에 사내 교육 강사를 섭외해주고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는 업체였다. 한때는 손에 꼽히는 그룹 계열사 두 곳의 강사 섭외와 굵직한 행사 진행을 대행해 주면서 승승장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전 세계에 들이닥친 바이러스성 괴질병이 그에게는 핵폭탄이 되고 쓰나미가 되어 사정없이 쓸어가 버렸다. 교육과 행사가 한두 개씩 취소될 때만 해도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뉴스에서도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면 바이러스가 소멸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특정 도시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확산세가 심각해지더니 이내 본격적인 취소와 연기의 도미노가 이어졌다. 회사를 지탱하기 위해 다른 분야로도 진출했지만,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고 격리가 생활이 되면서 그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자금줄이 말랐고, 직원들 상당수를 내보냈지만 반전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다.
사업이 바닥을 칠 무렵 어머니를 모신 요양병원에서도 괴질병 환자가 발생했다. 코호트 격리4가 시작되었고 외부인 면회가 전면 중지되었다. 가뜩이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하던 터였다. 그렇게 못 찾아뵌 지 한 달이 넘었을 때, 결국 어머니도 괴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뜩이나 기저질환이 있었기에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괴질병 치료와 상관없이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이뤄졌다.
4 코호트란 ‘같은 형질을 지니는 집단’으로, ‘코호트 격리’라 함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동일 감염 질환의 환자, 의료진들을 일정 병동에 모아 격리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민 가방에 개인 물품을 집어넣었다. 사무실 비품은 중고 사무용품 처리업자에게 헐값에 넘겼기에 건드릴 것이 없었다. 챙길 것은 바쁠 때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일하느라 가져다 놓았던 각종 옷가지와 신발이 대부분이었다. 차곡차곡 가방에 담는데 눈물이 툭 하고 쏟아졌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TV에서는 자영업자들이 영업제한, 집합금지령으로 줄폐업을 하고 있다는 뉴스가 쏟아졌지만, 그게 자신의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사무실로 향하고 별다른 약속이 없더라도 저녁 10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생활을 수십 년간 해왔다. 무리하지 않고 허튼짓하지 않으면 갑부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망하지는 않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적어도 2019년 연말까지는 유효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그리고 전혀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도 없는 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막다른 골목까지 몰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짐들을 가방에 넣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아내였다. 혹시라도 눈치챘나 싶어 눈물을 훔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수화기 건너편 아내의 목소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축 처져 있었다.
“출근한다는 말도 안 하고……사무실이야?
……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어머니……돌아가셨대”
김경환 씨는 사실 내 대학 선배이자 절친한 형님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상갓집에서 소주잔을 앞에 두고 선배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날 보았던 선배의 모습과 들었던 이야기를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았던 이들,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2020년대의 초반 몇 년간 우리 곁에는 수많은 알레산드로와 김경환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5
5 2014년 개봉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영화 〈인터스텔라〉의 메인 캐치프레이즈로 한국말로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정도로 번역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불길한 결말을 예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알레산드로와 김경환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알레산드로는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데리고 피렌체로 갔다. 많은 이들이 전염병을 피해 인적이 드문 시골로 피난을 간 것과는 정반대의 동선이었다. 그리고 텅 빈 도시에서 자신이 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귀족 신분이었기에 평상시 같으면 아무 일에나 뛰어들지 못할 터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김경환 씨 역시 알레산드로처럼 삶의 터전을 옮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이자 정체성이었던 회사의 폐업 신고를 한 뒤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해 석사학위까지 딴 뒤 평생을 몸담아 왔던 분야가 기업교육 분야였던 지라 다른 일에는 이렇다 할 경험도 인맥도 지식도 없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체가 쌓여 있고 다 죽어가는 도시일 것만 같았던 피렌체가 실제로 가서 보니 알레산드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두 집 건너 한 집마다 초상집일 정도로 많은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만큼 새롭게 도시로 유입된 사람들이 있었다. 문 닫은 줄만 알았던 술집마다 사람들이 북적였고, 그들은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렸다. 썰렁해진 거리에는 새로운 조각상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전과 다르게, 숭배하던 신이 아니라 적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낸 장군, 도시를 재건한 시장,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위대한 시인들이었다.
김경환 씨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사무실을 연 성수동 역시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괴질병이 창궐한 이후 호텔, 레스토랑 등에서 직장을 잃은 이들이 새롭게 식당을 열고 있었고, 해외여행 송출업을 그만둔 이들은 기존의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직수입 브랜드, 직구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업체를 창업하고 있었다. 동네의 인기에 편승해 그럴듯한 인테리어로 승부하던 가게들이 문을 닫고 나간 자리에 그동안 비싼 임대료 탓에 제대로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던 젊은 실력자들이 자신들의 가게를 열고 있었다.
이후 성수동의 김경환 씨는 새롭게 도전한 사업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뒀다. 새로 창업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기존의 사업모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고, 사무실 임대, 직원 고용, 거래계약 등 모든 것을 자신이 알던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해야 했다. 이전 같았으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변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감히 변해야겠다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래야 했다.
피렌체의 알레산드로는 재혼을 하며 가정을 다시 꾸렸고, 고향 인맥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집안을 일으키게 된다.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고 고향에 영토를 마련해 가문의 기틀을 다시금 다지게 되었다. 특히, 홀로 살아남은 막내아들은 아버지가 일군 터전 위에 더 큰 성공을 일궈내 그의 가문을 명실상부한 지역 내 유력 가문으로 성장시켰다. 아버지가 새롭게 결혼하며 이룬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분가를 해 유럽 내 다른 지역으로 뻗어 나간 막내아들의 후손들은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롭게 명문가를 일궜는데, 그 후손 중 한 사람은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6이 되었다.
14세기 피렌체의 알레산드로와 21세기 성수동의 김경환, 말 그대로 그들은 인간이었고 인간이었기에 답을 찾은 것이다. 늘 그랬듯이…….
지금부터 우리는 14세기 말부터 17세기 중엽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떠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김경환 씨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수백 년 전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을 겪었던 사람들을 만나보려 한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어떻게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셨습니까?”
이런 질문?
아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괴질병으로 인한 환난의 시기가 끝난 뒤에 그들이 보여준 모습에 대한 질문이다. 괴질병으로 인해 거의 모든 것이 초토화된 뒤 어떻게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다시 한번 일어설 힘을 얻었는지, 사람으로 인해, 사람 사이에서 퍼져 나가는 질병을 겪었음에도 어떻게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새로운 부활의 단초를 인간에 대한 탐구가 이뤄진 최초의 시기(그리스·로마 시절)에서 찾을 생각을 했는지, 찾은 단초들을 그냥 활용하지 않고 어떻게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는지,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해 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줄 이들을 편의상 이렇게 부르고자 한다.
‘르네상스 워커스Renaissance Workers’
2020년이
우리에게 깨우쳐 준 것
모두가 알지만 생소한 그 단어
내게는 친한 개그맨 선배가 한 분 있다. 모 라디오 방송의 아침 프로그램을 함께 하며 친분을 나누게 된 사이인데, 그 흔한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인기스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선배의 얼굴을 보면 “아! 저 사람”할 정도쯤은 되는 유명 개그맨이다.
어느 날인가……청파동 숙대 앞에서 돼지껍데기를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시는데, 그 선배가 한숨을 쉬며 푸념을 하는 것이었다.
“아, 대박을 치거나, 광고모델 좀 하려면
유행어 한두 개는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실제로 선배는 활동 경력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유행어가 단 하나도 없는 개그맨으로 유명했다. 젠틀한 외모에 고품격 언어유희를 구사하는 개그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데도 쉽게 유행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듯했다. 유행어라는 것이 귀에 쏙 들어온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정서를 자극해야 하고, 그런 자극이 지속적 반복적으로 계속되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무색하게 불과 몇 해 전, 단시간 내에 엄청난 유행어가 된 단어가 있다. 그것도 특정 세대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한 나라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유행한……. 다들 예상했을 듯싶은데, 2020년대의 첫 몇 년간 세계 최고의 유행어였던 ‘팬데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2020년대 초반,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팬데믹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한국의 서울에서, 미국의 뉴욕에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팬데믹을 입에 올렸다. 사실, 이 단어의 구성과 뜻을 보면 이러한 유행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유행이었던 것에는 틀림이 없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단어를 들먹이고, 사용하고, 퍼트렸으니까…….
팬Pan, 그리스어 발음으로 판은 영어의 올All이나 한자의 범汎과 비슷한 뜻으로 ‘대부분’, ‘모든 것’을 의미하는 한정사 단어다. 소싯적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 보았거나,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다시피 신화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신들을 모신 신전을 판테온Pantheon이라고 하는데, 그때의 판이 바로 이것이다. 영어로 만병통치약을 파나세아Panacea라고 하는데 이때의 판 역시 같은 의미다.
뒤에 붙은 데믹demic이라는 단어 역시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단어다. 데믹은 ‘사람(인구)’ 또는 ‘(사람이 사는) 지역, 국가’라는 남성형 단어 데모스demos에서 유래했다. 이 데믹이 판과 결합하면서 팬데믹은 지역 질병, 풍토병을 넘어서 전 세계 대다수의 지역이나 국가로 전염병이 확산된 현상을 일컫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처럼 단어를 나눠서 살펴보면 별 뜻 아니지만, 과거에는 전염병을 연구하는 학자나 일부 보건정책 전문가들만 사용했을 이 단어를 어느 때부터인가 전 세계 도처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입에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단어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현상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또 다른 단어가 하나 더 우리 주변에 등장했다.
‘엔데믹’
팬데믹이 끝난 이후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이제는 기억 속의 단어로 점차 사라져가는 팬데믹이라는 단어가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해서 심심치 않게 우리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끝난 것일까? 확실하게 끝난 것이 맞을까? 팬데믹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완전하게 사라져 버렸고, 이제 우리는 엔데믹 상황을 맞이해 그에 적응해 나가야 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는 지난 기간 어떠한 변화를 겪었고, 그 변화는 우리를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 우리는 그런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 다시 모든 것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니 되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변화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으니 그에 적응해 잘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쉽게 답이 나올 질문들이 아니니,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식혀 보자.
모두가 처음으로 겪어야 했던 세상
예년만큼의 인기는 없지만, 그래도 매년 연말연초가 되면 언론에서는 경쟁적으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쏟아낸다. 지난해에 벌어진 일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거나, 다가올 새해에 벌어질 현상들을 예측한 사자성어는 그럴듯한 풀이까지 곁들여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교수신문〉이라는 매체에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다.
‘교수’라는 단어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갖는 지나칠 정도로 높은 위상과 신뢰에 수십 년간 ‘매년 발표’라는 꾸준함까지 더해지면서 매년 발표 즉시 큰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다. 2001년 연말 즈음에 처음으로 발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2001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발표된 것은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한자어였다. ‘전후 사정을 분간할 수 없어 일이 앞으로 어떤 방향, 어떤 모습으로 전개가 될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말할 때 사용되는 조금은 부정적인 사자성어인데, 실제로 2001년은 우리나라가 1997년 말에 있었던 ‘IMF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을 겨우 벗어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같은 해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포함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테러와 그에 대한 미국의 응징 차원에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발발 등으로 인해 세계정세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던 시기였다.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라는 사자성어가 딱 들어맞는 한 해였다.
그렇다면 지난 2020년 우리 사회를 가장 잘 표현한 사자성어는 무엇일까? 물론 〈교수신문〉을 비롯한 기타 매체에서 선정한 사자성어는 따로 있었지만, 지난 2020년을 상징할 만한 사자성어를 물으면 아마 많은 이들이 큰 이견 없이 ‘사상초유史上初有’라고 답할 것이다. ‘인류가 살아온 역사 속에서史上’, ‘처음으로 있는 일初有’을 의미하는 이 사자성어를 2020년 초부터 우리는 뉴스에서, SNS에서, 시중의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들 속에서 입에 달고 살아야 했으니까.
‘사상초유’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거의 모든 교육기관이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집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사상초유’로 수많은 기업이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재택근무를 하도록 했다. ‘사상초유’로 고향의 부모님들이 도시로 나가서 사는 자녀들에게 명절에 고향을 방문하지 말도록 부탁하는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으며, 평일에도 긴 줄을 세워 손님들을 기다리게 했던 콧대 높던 맛집들이 ‘사상초유’로 손님들을 찾아 배달 영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외에도 코로나가 우리 주위를 휩쓸었던 2020년대의 첫 몇 년간 우리는, ‘사상초유’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2020년대의 첫 몇 년간 우리에게 닥쳤던 팬데믹 상황, 그리고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일들이 과연 우리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맞닥뜨린 상황인가 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인류 역사상 팬데믹이라 할 만한 대형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들 사람들은 유럽에 페스트Pest가 발병했던 시기를 첫손에 꼽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이기도 하고, 역사 기록이 소상하게 잘 남아있기도 하며, 르네상스라는 인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문명의 진보가 뒤이어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인류는 여러 차례 문명의 소멸 혹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전쟁이나 자연재해 이상으로 극심한 전염병 사태를 겪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모세의 인솔에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로 인해 퍼진 가나안 땅의 전염병 사태다. 잦은 범람을 하던 나일강 유역은 예로부터 곡창지대에 인구밀집 지역이었기에 수시로 전염병이 발병했다. 큰비가 내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가면 여지없이 각종 전염병이 돌았다. 그러나 수천 년간 그 땅에 살아온 이집트인들에게는 면역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유행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고는 했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의 사람들은 상황이 달랐다. 면역이 형성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옮긴 이집트 전염병과 풍토병에 의해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그때 가나안 땅이 겪었던 혼란과 괴로움이 어찌나 컸던지 당시의 모습은 《구약성경》의 신명기 등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페스트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 유럽의 서쪽 편에서는 다른 질병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며 세상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번 걸리면 고열과 함께 극심한 발진이 일어나 목숨을 잃게 되고 다행히 목숨을 건져도 평생을 흉터가 진 피부로 살아야 하는 천연두라는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질병의 무서움을 제대로 맛본 것은 대서양 건너편의 신대륙 주민들이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의 수많은 탐험가와 군인 등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뎠다. 이들을 통해 유럽의 풍토병이었던 천연두가 아메리카 대륙에 전파되었다. 물론, 당시 유럽에서도 영유아 사망률을 높이는 주범으로 꼽혔던 천연두였지만 그래도 건강한 성인들에게는 그렇게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무자비한 죽음의 사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특히, 중남미 도시 지역에서는 원주민의 절반 가까운 숫자가 천연두로 인해 사망했고, 인구 구조 자체가 붕괴되면서 정복자들에게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다시 한번 인류를 절망에 빠트렸던 팬데믹 상황은 19세기 무렵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물이나 음식을 잘못 먹은 사람들이 흔하게 걸리는 배앓이 정도로 여겨졌던 병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기 시작했고, 이내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콜레라라고 불린 이 병은 탈수 증세와 더불어 극심한 설사가 주된 증상이었다. 하수 처리시설이 변변치 않았던 당시, 환자의 오물은 식수원을 금방 오염시켰고 오염된 식수가 흐르는 수로를 따라 콜레라는 삽시간에 다른 지역, 이웃 나라로 퍼져 나갔다. 기존의 다른 전염병들이 팬데믹이라고는 하지만 특정한 대륙에서만 유행하다가 소멸된 반면, 콜레라는 인도에서 시작되어 동남아시아로 전염되었다가 극동아시아로 북상했고 이후로는 유럽, 북미, 아프리카 등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자동차, 기차, 증기선 등의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했고, 그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콜레라균은 기존의 전염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넓게 감염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조선 순조 시절이었던 우리나라도 당연히 이 무렵 콜레라 팬데믹을 빗겨날 수는 없었다. 조선왕조 《순조실록純祖實錄》에는 ‘신사년 괴질辛巳年 怪疾’이라 하여 순조 21년인 1821년 가을 무렵 ‘콜레라가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득세하기 시작해 수많은 백성이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추산으로 1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질병의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과장한 숫자라 치더라도 분명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조선 시대 인구수를 기록한 자료를 보면 1820년대까지 7백만 명 중반대로 보고되던 인구가 순조 대를 지나 1830년대 헌종 대에 이르러 늘어나기는커녕 갑자기 6백만 명대로 훅 줄어든 기록을 보더라도 이때 조선이 콜레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우리에게 찾아온 팬데믹은 지난 코로나 초창기부터 언론에 지속적으로 등장했던 몇 차례의 인플루엔자 창궐 사태다. 시작은 ‘러시아 독감’으로도 불리는 1889년의 인플루엔자다. 걸리면 고열로 시달리다가 호흡기 증상이 심해져 폐렴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질병이었고 고령층 사망률이 높게 나타났다는 측면에서 여러모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곧잘 비교되곤 하는 인플루엔자였다. 처음 등장 이후 세 차례의 겨울 동안 러시아를 포함해 유럽과 일부 아시아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후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이 등장해 역시 약 3년에 걸쳐 서유럽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1968년에는 홍콩 독감이 창궐했다. 그리고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물론, 그 사이사이에 조류 독감, 사스SARS라고 불리는 중증 급성 호흡기 중후군, 메르스MERS라고 불리는 중동 호흡기 증후군 등의 질병이 유행했지만, 다행히 팬데믹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환란의 평행이론
이 외에도 인류의 보편타당한 삶, 안정적인 일상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찾아보면 꽤 여러 가지가 있다. 수많은 혁명과 전쟁, 경제위기와 또 다른 형태의 대규모 사회 혼란. 그런데 이런 모든 환란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발생하는 모습을 달리하고, 피해 규모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찌 되었든 끊이지 않고 주기적으로 우리에게 닥친다는 점이다. 앞서 예를 든 팬데믹 상황도 그러하지만, 전쟁 역시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이 꾸준히 발생해 왔다. 주기를 달리하고, 양상과 범위 및 그로 인한 피해 규모만 조금씩 달리했을 뿐 전쟁은 늘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의 역작 《역사의 교훈》에 담긴 내용을 인용하여 설명하자면, 문헌 등에 기록된 인류의 3,421년 역사 중 ‘전쟁war’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은 해는 단 268년에 불과하다고 한다. 전체 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작 7.8퍼센트에 불과한 기간만 전쟁이 없었던 셈이다. 그마저도 역사 문헌 등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전쟁으로 기록이 유실되었을 수도 있고,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지역적으로 국지적인 분쟁이 일어났을 수도 있으니 실제로는 전쟁이 아예 없었던 해는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연구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1800년대 초부터 2010년까지 지구에서는 늘 2개 이상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나마 1942년과 1943년에만 단 한 개의 전쟁만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 전쟁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최대 규모의 피해를 입힌 전쟁이라 평가받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으니 하나 마나 한 전쟁 숫자 세기다.
경제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이 대규모 경제위기라고 하면 아마도 ‘검은 화요일’로 알려진 월스트리트 증시 대폭락 사태로부터 시작된 1929년 ‘대공황’을 떠올릴 것이다. 이듬해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했고 보유하고 있던 주식이 휴지쪼가리가 되어 버리고, 전도유망한 자산가에서 삽시간에 빚쟁이로 전락해 버린 주식투자자들은 길거리로 나 앉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시장은 붕괴했고 우량했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파산해 버렸다.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되었고 가난한 이들, 병약한 이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극심한 가난이 전 세계를 덮쳤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대규모 경기침체가 있었지만, 그중 강력했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IMF’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그리고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와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대표되는 2008년도의 금융위기였다.
그런데 사실 이런 금융위기 역시 고대부터 쭉 발생해 왔었다. 다만, 우리나라가 세계 무대에 등장하기 이전이라 우리와는 큰 연관이 없었고, 과거의 세계는 지금처럼 서로가 서로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위기의 원점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체감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우리들이 잘 모르는 것일 뿐, 최근의 경제위기와 비교해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크고 치명적인 경제위기는 숱하게 발생해 왔다.
이처럼 사상초유의 일들이 밥 먹듯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지난 시기. 그러나 그때도 우리 인간들은 그저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만나지 말 것Untact’을 강요받던 시기에도 ‘만나지 않고도 만난 것처럼Ontact’ 많은 것들을 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퍼부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보고하고 회의하는 일이 힘들어지자 ‘화상회의’ 시스템을 도입해 금방 적응했다. 비대면 수업도 불편해하기는 했지만 열심히 참여했고, 각종 콘서트, 운동경기도 나름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진행되었다. 심지어 온라인 화상회의나 SNS 등을 활용해 각자의 집에서 따로 술과 밥을 먹으면서도 함께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건배사를 외쳤던 ‘랜선 회식’, 방역 때문에 식당에 함께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자 그에 맞춰서 인원을 나눠서 들어가 다시 어울렸던 ‘쪼개기 회식’ 등 기상천외한 시도들도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왜, 우리 인간은 서로가 서로와 연결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선(線)이 있고 없음에
지배당해 온 인류
Contact를 넓히기 위한 인류의 노력
문명의 발전 단계를 구분한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생물학적 진화 단계에 따른 분류도 있고, 경제구조의 성숙 정도에 따른 분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분류는 사용하는 도구에 따른 분류로, 흔히 구석기 시대니 청동기 시대니 하는 분류가 되겠다.
최근에는 산업화의 정도와 산업화에 주로 사용되는 원동력과 도구에 따른 분류를 많이 사용한다.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했던 농경사회부터 시작하여 석탄을 사용한 증기기관으로 생산력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온 1차 산업혁명, 전기 에너지를 활용하여 전구, 전기모터 등을 사용한 2차 산업혁명, 컴퓨터라는 도구의 발명과 활용으로 정보통신 사회를 구축한 3차 산업혁명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 완성된 상태도 아니고 그 실체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로봇 등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완성되면 정보통신 기술과 생산 기술의 융합 발전을 통해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생산성은 근원적인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인류 문명의 발전 단계를 살펴보고 싶다. 바로 ‘콘택트Contact’, 즉 접촉이라는 관점에서 문명의 발전을 살펴보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가히 콘택트를 형성하고 넓히기 위한 노력의 집합체였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갔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세상 너머 새로운 땅, 새로운 종족, 새로운 문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외부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일부는 그 결실을 보게 된다. 그 소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세상에 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풍랑이 몰아치는 희망봉으로, 해적이 득실대는 말레이 해협으로 배를 몰았다.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칭기즈칸, 광개토대왕 등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말을 몰고 병사를 이끌고 미지의 세계로 원정을 떠났다. 물론, 땅을 차지하고 그 땅의 재화를 독차지하겠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 저변에는 새로운 세상과 접촉해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콘택트에 대한 의지 덕분에 대항해 시대와 원정의 시대가 열렸고, 산업혁명이 시작될 때까지 수천 년간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Contact하지만 Contact하지 않기 위한 노력
직접적인 접촉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를 무렵, 인간들은 무슨 생각인지 이번에는 접촉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른바 콘택트하지만 콘택트하지 않는 혹은 콘택트하지 않지만 콘택트하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에는 접촉이 있어야만 소통이 가능했고, 소통을 해야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부탁을 해야만 했다. 황금을 구하거나 향신료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가서 접촉해서 구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편지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우편이 서로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누군가는 “편지 역시 우편물, 편지지 등을 매개체로 서로 접촉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대면 접촉을 통해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교역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직접적인 접촉은 줄이면서도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취하려는 노력의 시발점으로 보고자 한다.
‘편지’라는 발명품이 촉발시킨 비대면 콘택트의 역사는 더디게 발전과 변화의 모습을 보이다가 근대에 들어와서 획기적인 진화를 하게 된다.
그 시작은 1844년 미국 워싱턴 DC에 있던 대법원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촉망받는 화가였던 한 사내는 사랑하는 아내를 코네티컷 뉴헤이븐에 있는 자신의 집에 두고 홀로 워싱턴 DC에 머무르며 작업을 했다. 어느 날 지인이 말을 타고 달려와 그에게 아버지의 편지를 전했는데, 편지에는 그의 아내가 아프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서둘러 고향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아내는 죽어서 장례식까지 치른 뒤였다. 임종은커녕 아내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인 그는 그토록 좋아하던 그림조차 포기하고 ‘어떻게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곧바로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는 특별하게 고안된 기계의 양쪽을 전선으로 연결하여 약한 전기를 끊었다가 잇는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는 방법을 개발한다. 또한, 끊고 이어지는 두 가지 신호를 조합하여 특정 단어나 숫자를 표현하는 부호도 함께 고안했다.
그는 1844년 미국 연방 대법원 건물에서 메릴랜드 볼티모어에 위치한 철도창고 간에 선을 깔고 기기를 연결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로 콘택트하고 싶은 두 대상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실험에 성공한다. 그의 이름은 새뮤얼 모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스 부호’의 창시자였다. 그리고 이날 그가 실험에 성공한 기기는 인류 최초의 유선 통신기였던 모스 수신기였다.
새뮤얼 모스가 첫 신호탄을 올리자 이후로는 눈부신 속도로 콘택트하면서 콘택트하지 않는 시대가 펼쳐진다. 1858년에는 미국 뉴펀들랜드와 바다 건너 아일랜드를 연결하는 대서양 횡단 전신케이블이 구축되었고, 두 대륙 사이에 유선 통신망이 연결된다.
1876년에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특수한 송수화 장비를 개발하여 통신선만 연결되면 떨어진 지역에서도 직접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술을 상용화한다. 물론, 같은 시기 수많은 기술자가 비슷한 실험에 성공하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실험을 완수한 사람은 벨이었다. 그는 최초의 전화회사 ‘벨 텔레폰 컴퍼니’를 설립해 본격적인 전화의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인류는 직접적인 콘택트를 하지 않고도 콘택트가 가능한 세상을 이룩했다.
다시 Contact를 넓히기 위한 노력
이후 인류는 콘택트하지 않고도 콘택트가 가능한 세상을 유선이 아닌 무선으로까지 확장해 나간다. 유선은 어찌 되었든 연결하고자 하는 두 대상을 통신선을 통해 직접 연결하는 형태였다. 정보 소통을 위해서는 통신선을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중간에 장애물이 있으면 어려움이 발생하는 등 확장성에 문제가 있었다. 유선 통신에 만족한 인류는 이제 직접 선을 연결하지 않고도 콘택트가 가능한 세상을 꿈꾸게 된다.
그 꿈을 1901년 어느 추운 겨울 이탈리아의 발명가 한 사람이 실현시켜 주었다. 볼로냐 출신의 전기 기술자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오랜 연구 끝에 캐나다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와 영국 콘월 폴듀 사이의 무선 통신 실험에 성공한다. 물론, 그전까지 짧은 거리에서의 실험은 여러 사람에 의해 수차례 성공한 바 있었지만, 실제로 상용화할 수 있을 정도로 원거리에서 진행한 무선 통신 실험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두 지역 사이에는 대서양이 위치하여 거리는 무려 3,600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로써 인류는 바다 건너편 혹은 대륙 너머에 있는 사람과 좀 더 자유롭게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직접 접촉하는 것처럼 필요한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콘택트라는 목적을 두고 발전한 인류의 역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콘택트를 활성화하고, 그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역사였다.
인터넷의 개발과 함께 이제까지 음성 정보 정도를 주고받던 것이 그림과 움직이는 영상까지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모습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에 ‘이제 사람들은 실제로 콘택트하지 않게 될 것이다’, ‘콘택트하더라도 예전만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그러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이제는 직접 콘택트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알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서로 직접적인 콘택트를 즐겼다.
전화로 해도 될 이야기를 굳이 카페에서 만나 얼굴을 마주 보며 직접 전달했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으면 모두가 알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수백 명이 모이는 워크샵이나 컨퍼런스를 개최하였다. 집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로마 검투사 경기장과 흡사하게 생긴, 심지어 몇몇은 ‘오클랜드 콜로세움’이니 ‘알리안츠 아레나’니 해서 실제 로마시대 경기장의 이름 그대로 가져다 쓴 경기장에 모여 응원을 하며 경기를 즐겼다.
온라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SNS가 등장하고, 가상세계를 기반으로 한 소통 및 공유 서비스가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활용해 실제로의 만남을 추구했다. 이른바 콘택트리스Contactless한 삶을 도와주는 도구를 실제 콘택트를 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콘택트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생은 한 번이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스위스 한적한 마을에서 시작된 혁명
새로운 전기는 뜻밖에도 서구 문명사회에서 ‘변화’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스위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수십 년 전부터 매년 1월이면 인구 1만 명의 스위스 시골 마을은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 독일 태생의 스위스 경제학자 클라우스 슈밥이 창립한 ‘세계 경제 포럼’이 매년 이곳 다보스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1971년 급속도로 성장하는 미국 경제계에 예속될 지경에 이른 유럽의 현실에 위협을 느껴 시작한 학습모임이었던 ‘유럽 경영 포럼’이 큰 인기를 끌면서 전 세계적인 행사로 성장한 것이다.
우리에게 ‘다보스 포럼The Davos Forum’으로 더 친숙한 이 행사는 세계 각국의 정부 지도자 및 글로벌 기업의 수뇌부가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협업할 방안을 찾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이 포럼을 두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엘리트들의 비밀 회합’이라며 끊임없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회운동가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기도 하다.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전 세계를 뒤흔든 키워드 하나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우리는 지난 1차 산업혁명부터 3차 산업혁명까지 산업혁명의 역사를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끝이었다. 더 이상 극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산업혁명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보스 포럼 창시자인 클라우스 슈밥이 2016년 포럼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포럼의 주요한 아젠다로 제시하면서, 이 단어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각국의 정부는 제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고 난리를 쳤고, 학교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인재를 길러내겠다며 내용을 알 수도 없는 온갖 커리큘럼을 가져다가 교육과정을 개발했다. 심지어 고깃집에서도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활용해 숙성시킨’ 따위의 홍보 문구를 사용할 정도로 어의없는 광풍이었다.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제4차 산업혁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많다. 애매하다는 사람도 있고, 아예 본질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폄훼하는 전문가도 여럿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있건 없건 간에, 그런 화두가 나온 2016년 무렵을 기점으로 우리 세상이 또다시 엄청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조로 모든 것이 다시 연결된 세상의 시작이었다.
극단적인 Contact가 이뤄진 세상
유비쿼터스Ubiquit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