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
Clarice Lispector, 1920~1977
1920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그해에 러시아 내전을 피해 이주를 결심한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갔다. 1940년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신문 칼럼니스트로 일하다 1943년에 첫 장편 소설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발표하면서 브라질 문단에 충격을 안겼다.
외교관과 결혼한 그녀는 주로 유럽과 미국 등지를 오가며 생활했지만, 1959년에 이혼하면서 자녀들과 함께 브라질로 돌아왔다. 귀국한 뒤로는 화재를 겪으며 큰 화상을 입는 등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마지막 작품인 『별의 시간』을 탈고한 후, 57세 생일을 앞두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아구아 비바』, 『어둠 속의 사과』, 『삶의 숨결』 등 그녀가 남긴 많은 작품은 21세기 들어 브라질 바깥에서도 재조명되며 선풍을 일으켰다. 이 재조명 작업을 주도한 벤저민 모저는 그녀를 카프카 이후 가장 중요한 유대인 작가로 꼽았다.
Água Viva
By Clarice Lispector
©Paulo Gurgel Valente, 1973.
©Água viva,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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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3 EULYOO PUBLISHING Co., Ltd.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Paulo Gurgel Valente, through BC Agenc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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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실문고
아구아 비바
전자책 발행일
2023년 8월 25일
지은이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옮긴이 | 민승남
펴낸이 | 정무영, 정상준
펴낸곳 | (주)을유문화사
창립일 | 1945년 12월 1일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9-48
전화 | 02-733-8153
팩스 | 02-732-9154
홈페이지 | www.eulyoo.co.kr
전자책 ISBN 978-89-324-6138-0 04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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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민승남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제15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 『남편의 아름다움』,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 『넛셀』, 메리 올리버의 『천 개의 아침』, 『완벽한 날들』 등이 있다.
일러두기
1. 본 작품의 번역 판본은 Stefan Tobler가 영역한 『Água viva』(New Directions Books, 2012)이며, 브라질–포르투갈어 원서(Rocco, 2009)를 참고했다.
2. 모든 주석은 한국어판 번역자와 편집자가 작성한 것이다.
편집자 주
Água Viva는 단어 그대로를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로 번역되고, 일반적으로는 해파리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에는 공통점이 있다. 뼈대가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물’은 뼈대 즉 특정한 형태를 강제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이며, 그 살아 있는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해파리는 그 세계와 가장 닮은 개체다. ‘아구아 비바’라는 제목은 이 둘을 동시에 지칭 혹은 포괄한다.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것, 심지어 세계인 동시에 개체인 것을 그리기. 즉 모든 구조와 경계를 넘어선 그 무엇을 기록하려는 (불가능한) 시도. 이는 이 작품뿐만 아니라 리스펙토르가 늘 추구하던 목표를 집약한 표현이다. 그래서인지 뉴디렉션스판 영역본은 ‘삶의 흐름 Stream of Life’이라 번역되었던 이전 영역본(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9)의 제목 대신에 원어 제목을 그대로 옮겼다. 본 번역본 역시 위와 같은 이유로 원어 제목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힌다.
형상—혹은 물체—에 대한 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난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이 존재할 것이며, 그것은 음악처럼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어떤 신화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그림은 표현할 수 없는 정신의 왕국들을 그저 불러내기만 할 것이다. 거기서 꿈은 생각이 되고, 거기서 선線은 존재가 된다.
‐ 미셸 쇠포르 ‐
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 할렐루야가 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이별의 고통이 담긴 처절한 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할렐루야를 외친다. 이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으니까. 나는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지만—이성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배웠으므로—그러나 지금 나는 혈장을 원하고—태반의 혈장을 그대로 먹고 싶다. 나는 조금 두렵다: 다음 순간은 미지의 것이기에 나를 완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다음 순간을, 그걸 만드는 건 나일까? 아니면 그것 자신일까?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통해 함께 그것을 만든다. 투우장에 선 투우사의 솜씨로.
이 말을 해야겠다: 나는 이 ‘지금-순간’의 사차원을 포착하려 하지만, 찰나에 불과한 이 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지금-순간이 되었으며, 그것 또한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순간 속에 있다. 나는 이 ‘있음’을 붙잡고 싶다. 그 순간들은 내가 호흡하는 공기 속을 지나다닌다: 그것들은 폭죽이 되어 공중에서 아무런 소리 없이 폭발한다. 나는 시간의 원자들을 갖고 싶다. 그리고 현재를 붙잡는 일은 그 순간의 본질적인 특성상 금지돼 있다. 현재는 스르르 사라져 버리며, 모든 순간이 그와 같다. 이 순간 나는 영원한 지금 속에 있다. 오직 사랑의 행위—그 맑은 별과 같은 느낌의 추상화—만이 그 미지의 순간을, 허공 속에서 진동하는 수정처럼 단단한 그 순간을 붙잡으니, 삶은 이 말할 수 없는 순간이다, 사건 그 자체보다 큰 순간: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 순간의 보석이, 보편하는 보석이 허공에서 빛난다. 몸의 기이한 영광, 순간들의 떨림 속에서 느낌으로 승화하는 물질—그리고 그 느낌은 형태가 없는 동시에 너무도 객관적이어서 마치 당신의 몸 바깥에서 생겨나는 듯하다. 황홀경 속에서 반짝이는 것, 기쁨, 기쁨은 시간의 성분이고 순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순간 속에 순간의 있음이 있다. 나의 있음을 붙잡고 싶다. 나는 새처럼 허공에 대고 할렐루야를 노래한다. 그리고 내 노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열정이 없이는 할렐루야가 사랑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
내 주제는 ‘순간’일까? 내 인생의 주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나는 무수한 시간을 흘러가는 순간들의 수만큼 나눈다. 나 자신처럼, 혹은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찰나들처럼 조각내는 것이다—나는 오직 시간과 함께 태어나고 시간과 더불어 성장하는 삶만을 다짐한다: 나는 오직 시간 그 자체 속에서만 충분한 공간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내 모든 걸 바쳐 당신에게 글을 쓰고 있으며, 나는 존재의 맛을 느끼고, ‘당신의 맛’은 순간처럼 추상적이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온몸을 바쳐 형태가 없는 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나는 온몸으로 자신과 씨름한다. 당신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들을 뿐. 그러니 당신의 온몸으로 나를 들어라. 너무 거칠고 무질서한 내 글을 본 당신은 내게 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말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지금 내가 쓰는 것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껏 진실한 말에 가닿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나의 사차원이다.
오늘 나는 위에서 언급한 캔버스 그림을 완성했다: 가느다란 검은 곡선들이 교차하는 그림. 이유를 캐묻는 버릇이 있는 당신은—나는 이유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건 이미 과거의 문제일 뿐이니까—왜 가느다란 검은 선들을 썼냐고 내게 물을 것이다. 그건 비밀 때문이다. 지금 내가 당신을 향해 글을 쓰게 만드는 것과 같은 비밀. 나는 둥글고 돌돌 말리고 따뜻한 것, 그러나 가끔은 새로운 순간들처럼, 늘 떨리는 시냇물처럼 차가운 것을 쓰고 있다. 내가 이 캔버스에 그려 놓은 것을 말로 옮길 수 있을까? 소리 없는 말이 음악의 소리에서 암시를 얻을 때처럼.
내가 어떻게 음악을 듣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아직 말해 주지 않았다—전축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으면 손이 진동하면서 온몸으로 파동을 보낸다: 그렇게 나는 진동이 품은 전기電氣를, 현실이라는 영역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토대를, 내 손 안에서 떨리는 세상을 듣는다.
그렇게,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그레고리안 성가의 반복되는 말들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토대다. 나는 내가 아는 걸 다 말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오직 그림을 그리거나 발음할 때만 음절들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말들을 사용해야만 한다면, 그 말들이 지닌 의미는 그저 그 형태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마지막 진동과 씨름하고 있다. 당신에게 나의 토대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지금-순간’들로만 이루어진 말들의 문장을 만든다. 그러니, 읽으라,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졸졸 흐르는 음절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은 순수한 진동이다. 이걸 읽으라: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나는 이집트의 비밀을 잃어버렸으니, 그때 나는 말과 그 그림자에 홀린 채, 전자들과 양자들과 중성자들의 힘찬 움직임과 함께, 경도와 위도와 고도 속을 움직여 다녔다.” 내가 여기서 당신에게 쓰는 것은 하나의 회로도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 그저 지금인 것.
내가 당신에게 글을 써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당신이 내 그림에서 명확성 대신에 두서없는 말들을 수확해 가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구절들이 조잡하다는 건 나도 안다. 나는 너무도 큰 애정을 갖고 글을 쓰는 중이고, 그 애정이 글의 결함들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애정은 작품에 좋지 않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쓰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건 어떤 단일한 클라이맥스일까? 내 삶은 단일한 클라이맥스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글을 쓸 때는 색깔을 섞어 그림을 그릴 때처럼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온몸으로 당신에게 글을 쓴다. 말의 여린 신경에 가 박힐 화살을 쏜다. 나의 은밀한 몸이 당신에게 말한다: 공룡, 어룡, 사경룡. 그저 소리라는 의미밖에 지니지 않은 이 말들은 지푸라기처럼 마르지 않고 축축해진다. 나는 관념들을 그리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그린다. 아니면, ‘무’, 영원이나 무나 결국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림 그리기를 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단단한 글쓰기를 쓴다. 나는 말을 손에 쥐고 싶다. 말은 하나의 물체일까? 나는 순간들로부터 주어진 열매의 즙을 짜낸다. 삶의 핵심에, 삶의 씨앗에 다다르려면 나 자신을 소거해야만 한다. 순간은 살아 있는 씨앗이다.
부조화의 은밀한 조화: 나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닌,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지금까지도 만들어지고 있는 걸 원한다. 균형을 잃은 내 말들은 내 침묵이 만들어 낸 귀중한 산물이다. 나는 공중에서 곡예도 하고 피루엣도 하면서 글을 쓴다—마음 깊은 곳에서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에 글을 쓴다. 글쓰기는 오직 침묵을 더 잘 수행하도록 만들어 줄 뿐이긴 하지만.
내가 ‘나’라고 말하는 건 감히 ‘당신’이나 ‘우리’ 혹은 ‘누군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허해지라고 강요당한 나는 나 자신을 개인으로,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이다.
그래, 나는 최후의 말을 원하고, 그 말은 너무도 근본적인 것이어서 현실 속의 도달할 수 없는 부분과 뒤엉켜 있다. 나는 논리에서 이탈해 버릴까 봐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내 본능과 솔직함에, 그리고 미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미래가 되고, 모든 시간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된다. 그러니 논리에서 벗어난다 한들 무슨 손해가 있을까? 나는 날것의 원료들을 다룬다. 생각 너머에 숨어 있는 것을 찾는다. 나를 속박하려 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나는 빠져나갈 것이며 내게 꼬리표가 붙는 걸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주 새롭고 참된 단계로 진입하면서 그 단계 자체에 호기심을 느낀다. 그건 그림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직접적이다. 마치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 나는 그 순간들 속으로 깊이 내려앉았고, 그래서 그것들을 지나쳐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주위를 둘러싼 에너지에 닿은 상태이며 나는 몸서리친다. 어딘가 미친, 미쳐 버린 조화. 나도 안다, 내 시선은 세상에 완전히 항복한 원시인의 시선과 같을 것이다. 선이 굵은 선과 악만을 허용하고, 머리카락처럼 악에 뒤엉켜 있는 선에 대해서는, 선이기도 한 악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신들처럼 원시적인 시선.
나는 갑작스러운 순간들을 눌러 고정시킨다. 스스로의 죽음을 품고 있는 순간들, 탄생을 품고 있는 다른 순간들—나는 변태變態하는 순간들을 고정시킨다. 그것들이 죽는 동시에 탄생하며 이어지는 모습 속에는 끔찍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이제 날이 밝아 온다. 해변 모래밭에 드리운 새벽의 하얀 안개. 그때, 모든 게 내 것이 된다. 음식에는 거의 손대지 않는다. 이날이 깨어나기 전에 먼저 깨고 싶지 않다. 나는 이날과 함께 자란다. 이 하루는 자라면서 내 안의 막연한 희망을 죽이고 맹렬한 태양을 똑바로 보게 만든다. 돌풍이 불어와 내 원고를 흩어 놓는다. 나는 울부짖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는 비스듬히 날아가는 새가 내는 소리를, 죽음 직전의 가르랑거림을 듣는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을 밀어붙인다. 간소한 언어 특유의 엄격함을 지닐 수 있도록, 유머에서 벗어난 흰 해골처럼 적나라해질 수 있도록. 하지만 해골은 삶에서 벗어난 것이며, 나는 살아가면서 늘 몸서리친다. 나는 적나라함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걸 원하지도 않는 듯하다.
이건 삶에 의해 보이는 삶이다. 나는 의미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맥동하는 혈관이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배우는 사람처럼 당신에게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매 순간을 사진에 담는다. 음영을 넣은 그림을 그리듯 단어들에 깊이를 준다. 나는 왜냐고 묻고 싶지 않다. 당신은 언제든 왜냐고 물을 수 있지만 늘 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대답 없는 질문에 따르는 기대감에 찬 침묵, 내가 거기에 굴복할 수도 있을까? 비록 그 어느 장소 혹은 시간 속에 나를 위한 해답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하면서도 내밀한 해답을 듣고 나면, 비로소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귀 기울이라. 침묵에 귀 기울이라.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건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것들을 붙잡아 주고, 그렇게 나는 살아갈 수 있게 되고 빛나는 어둠 위에 서게 된다. 하나의 순간이 나를 무심하게 다음 순간으로 이끌고, 주제 없는 주제가 아무런 계획 없이, 그러나 만화경 속의 연속적인 형상들처럼 기하학적으로 펼쳐진다.
나는 천천히 나 자신에게 준 그 선물 속으로 들어간다. 첫 노래처럼 들리는 마지막 노래에 의해 개봉된 찬란함. 나는 한때 그림을 향해 들어갔던 식으로 천천히 글쓰기 속으로 들어간다. 넝쿨들, 음절들, 인동덩굴, 색깔들과 말들이 뒤엉킨 세계—그곳은 문턱이다. 세상의 자궁인 선조들의 동굴로 들어가는 문턱. 나는 그곳에서 태어날 것이다.
만일 내가 동굴들을 자주 그린다면, 그건 동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