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김병호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키이우(키예프)를 이미 여섯 차례나 다녀왔다. 2004년 12월 ‘오렌지 혁명’과 2014년 2월 ‘유로마이단 혁명’ 때 우크라이나의 시위 현장을 찾아가 취재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직전엔 크림공화국 수도인 심페로폴에도 들어갔다. 2016년 8월부터 1년 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소재 KIMEP대학에서 연수하며 중앙아시아와 캅카스·동유럽·발칸반도·흑해 주변의 25개국을 여행했는데 여기에는 키이우와 리비우, 오데사 같은 우크라이나 도시들도 포함됐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나와 한국외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2010년)를 받은 논문 제목이 「러시아 근외정책의 신제국주의 논쟁: 對우크라이나 관계를 중심으로」였다. 이번 전쟁을 지켜보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왜 오랫동안 악화일로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답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으로 있고,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이다. 연합뉴스 모스크바특파원, 슬라브·유라시아학회 홍보이사, 한·러대화 언론사회분과 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푸틴을 위한 변명』, 『올리가르히』, 『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의 슬픈 운명』, 『유럽변방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슬픈 우크라이나
2판 1쇄2025년 1월 24일
1판 1쇄2023년 9월 16일
지은이김병호
펴낸곳마음친구
펴낸이이재석
주 소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시민대로 230 평촌아크로타워 지니센터 D동 53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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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신고제385-251002010000319호
종이책 ISBN979-11-91882-07-0 (03920)
전자책 ISBN979-11-91882-08-7 (05920)
한국어판 출판권 ⓒ 마음친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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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하면서 벌어진 양국 간 전쟁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이런 일이 설마 일어날 수 있을까’ 하며 제발 전쟁만은 없길 바랐던 세계인들의 작은 소망을 여지없이 깨트려버렸다. 그동안 조지아와 크림반도 침공으로 몇 차례 재미를 본 러시아가 한 해 전부터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며 우크라이나 본토로 쳐들어갈지 모른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개인적 희망을 담은 전망을 주로 쏟아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근거로는 전쟁이 나면 서방의 혼연일치된 강력한 제재로 인해 침략 당사국도 얻을 수 있는 실익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에게 에너지 수출 제한이나 알 만한 외국 브랜드의 철수 같은 것은 그가 추구하는 ‘위대한 러시아’로 가는 과정에서 무시해도 될 일이었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무차별적 동진東進으로부터 러시아의 안보를 지켜내려는 지도자의 고뇌에 찬 결단을 자국 국민이 알아준다면 국제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든 문제되지 않았다. 푸틴은 러시아를 포위해 힘을 빼려는 미국의 사악한 ‘빅 픽처big picture’에 맞서 자국민이 적극 동참해주기만을 기대했다. 고난을 참고 견디는 데 워낙 익숙한 데다 러시아가 안 되기만을 바라는 서방의 음흉한 기도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론적 정의’를 오랫동안 신봉해온 러시아인들에게 우크라이나 침공(자칭 ‘특별군사작전’)은 위대한 러시아라는 대의를 위해 내 작은 것들의 희생을 감내할 수 있게 만드는 울림 있는 프로파간다였다.
여전히 미국을 위시한 서방과의 경쟁, 이를 위해 옛 소련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한 ‘덩치 키우기’에 치중하며 냉전적 사고에 찌든 푸틴으로서는 이번 전쟁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인내는 참으로 고마운 일일 것이다.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세계인들이 소통하고 여행과 사업 등으로 활발히 교류하는 글로벌 디지털 시대에 남의 나라를 침공해놓고도 한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 대다수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보다는 자위권 행사를 들먹이며 한마음으로 해외 자국민 보호, 과거 우리 땅 회복 등을 대놓고 외치기란 쉽지 않다. 서울에서 일하는 한 러시아인 지인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 자체에는 러시아인들도 반대하지만 국가 안보를 위한 푸틴의 전쟁 명분이 우리한테 크게 와닿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며 “우리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그들(서방)은 힘을 모아 언젠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국민 상당수는 침략 당한 국가를 약자로 여겨 우크라이나를 편드는 가운데 일부는 키이우 정부의 무능력을 탓하며 러시아로서도 자국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두둔한다. 전쟁의 참상이 TV나 유튜브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만큼 러시아의 전쟁 도발과 대규모 폭격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한편에서는 세력 확대와 예방적 차원의 전쟁은 늘 있었다면서 이번 일이 크게 대수롭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한 토론에 나온 전문가는 “미국도 중남미나 중동 국가들을 침략해 현지 정권을 수차례 무너트리고 불안을 조성해왔다. 미국이 러시아를 비난할 입장이 못 된다”고 말했다. 또한 “오랜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 난민이나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우크라이나인들한테 크게 동정하는 모습이 어색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다른 토론자는 “한국 언론이 서방 매체들의 반反러시아적 편향의 기사를 받아쓰는 데 익숙해져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균형 잡힌 보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내에 우세한 우크라이나 동정론을 언론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세미나의 목표는 전쟁의 배경과 전망, 우리의 대응방안을 찾아보는 것이지만 토론자마다 작정한 듯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상대측에 유리한 내용은 음모론으로 몰아가면서 토론은 별 소득 없이 평행선을 달리기 일쑤다.
내가 볼 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전쟁이 발생한 배경은 수수께끼처럼 난해한 문제가 아니다. 소련 해체 후 나토가 동유럽과 옛 소련 국가들로 확장하지 않기로 했는데 동진을 계속하면서 이제는 러시아 바로 옆에 있는 우크라이나에까지 진출하려는 상황에 이르렀고 우크라이나 역시 서방 진영에 크게 경도되어 있어 러시아는 강력한 경고 차원에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로서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계속된 러시아의 간섭에 대응한다는 외견상 이유 말고도 러시아를 기피하고 서방에 기댈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구원舊怨이 있다.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둘 중 한쪽에 전쟁의 책임을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만큼 양국 모두 이번 전쟁에 대한 각자의 논리와 명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제3자가 어느 편을 특정해 지지하는 것이 100% 정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의 경우 우크라이나에까지 나토가 확대되면 안보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는 푸틴의 말로 대변되듯이 과거의 영향력 회복 야욕, 여기에 미국과 중국 간의 ‘G2’ 대결 와중에 러시아도 아직 살아있다며 힘을 과시하려는 푸틴의 소위 관종적인 태도가 전쟁을 불러왔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나토 확대는 외부인들이 “설마 나토 같은 민주주의 세력이 먼저 러시아를 공격하겠어?”라며 가볍게 넘길 사안이 절대 아니다. 러시아 서부는 산과 바다 같은 자연적 방벽이 거의 없어 외부 공격에 취약한 평원 지대로 우크라이나와 같은 완충 지대가 없으면 국경이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침공을 기억하고 있는 러시아인들로서는 자연적 방비가 취약한 서쪽 국경에서 나토와 바로 접하는 데 따른 불안감은 제3자가 마지못해 끄덕이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1654년 러시아 제국과 ‘페레야슬라프 협정Pereyaslav Agreement’ 체결 이후 의도치 않게 러시아의 영향하에 들어가면서 이후 소련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러시아로부터 당해온 민족적 수모가 크다. 소련 해체로 독립을 얻었지만 언제든 자신들을 옥죄려는 러시아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고 선진적인 유럽 권역에 편입하려는 노력에 러시아가 줄곧 제동을 걸고 있는 데 대해 저항과 반발이 크다. 주권국인 우크라이나가 스스로의 진로를 정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이를 무력까지 동원해 방해한다는 것은 국제법상 이치에 맞지 않는 강대국 편의주의 내지 신제국주의적 망상일 뿐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따져볼 일은 우크라이나가 왜 그토록 러시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같은 동東슬라브 형제국이면서도 우크라이나는 동질감을 느껴야 할 대상인 러시아를 왜 혐오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1991년 12월 소련 해체로 독립을 맞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러시아가 여전히 포용적이지 못하고 억압과 강제로 점철된 행동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어 사용과 종교 활동을 금지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압하면서 일등 국가인 러시아를 따르라고 강요하던 DNA가 지금도 러시아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듯하다. 수백 년간 하대해왔던 우크라이나를 동등한 나라로 대우하기 싫어서인지 몰라도 나토 가입처럼 러시아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기어코 막아서겠다는 독단적인 정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당연히 러시아와 수세기 동안 호의적인 교감이 없었던 우크라이나로서는 이를 간섭과 개입으로 여겨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5년 율리야 티모셴코Yuliya Tymoshenko 당시 우크라이나 총리는 “러시아는 엄연한 주권국인 우리를 아직도 아래동생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왜 우리를 못살게 구는가. 왜 우크라이나의 모든 일에 간섭하려고 하는가”라고 울분을 쏟아냈다. 당시는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고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막으면서 갈등이 커지던 상황이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 개시됐던 2014년 2월 말 키이우에서 만난 강정식 국립외국어대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러시아가 여전히 우크라이나를 동생처럼 막 대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우크라이나는 진정한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해서라도 친서방으로 해서 러시아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고 밝혔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가 과거에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며 상전국으로 대우해온 중국이 얼마 전 사드THAAD 배치 같은 문제로 몽니를 부리게 되면 한국 사람들이 분노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혐오하게 만든 계기나 사건들은 무엇이었을까.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로부터 어떤 고난과 피해를 입었길래 생김새와 종교, 언어가 비슷하고 친인척들이 살고 있어 자주 왕래하는 러시아를 왜 그토록 미워하고 떠나려 하는 것인가.
이 점에서 나는 몇 번의 세미나에 참석해 우리가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의 비참한 모습을 봤지만 그 이전부터 왜 러시아로부터 해방을 외쳐왔는지 러시아와의 관계를 둘러싼 그들의 민족적 울분과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고 얘기해왔다. 즉 “일반인들도 러시아의 전쟁 목적과 배경, 푸틴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와 어떻게 살아왔고, 왜 러시아인들을 혐오하게 됐는지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입장을 더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언론이나 책에 잘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본인도 우크라이나에 대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시절에는 농노와 병사로서, 그리고 소련 시대에는 곡물과 자원을 수탈당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억눌린 이등국민으로서 서러운 삶을 살아왔다는 정도로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다. 1991년 독립 후 최근까지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포퓰리즘적 행태로 인해 국가의 잠재력을 훼손한 채 말로만 유럽을 외치는 우크라이나 정치권의 기만과 이를 방조한 국민의 태도에 혀를 차기도 했다. 이번 전쟁 배경을 놓고서도 처음에는 독립 후 30년이 넘는 동안 스스로를 지킬 실력을 키우지 못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업자득의 결과라며 그들의 무대책과 무능력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수한 민간인 참상 소식이 전해지고 우크라이나인들의 혼연일치된 항전 의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대통령이 국내외에 호소하며 큰 지도력을 발휘하는 모습에 우크라이나인들한테 저런 결연함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라게 됐다. 그동안 키이우를 6차례 다녀온 사람으로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에 비해 한없이 순하고 착해서 러시아와 맞붙으면 열등감 속에 곧 포기할 것으로 내다봤지만 이번 전쟁 과정은 전혀 달랐다.
이런 와중에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활동했던 극우 민족주의자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폴란드와 러시아를 상대로 테러활동을 벌인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가 현지 언론에 다시 등장했다. 이번 전쟁 중에 반데라의 초상화를 들고 러시아와의 항전 결의를 불태우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있었다. 그동안 반데라 하면 그가 주도했던 악명 높은 극우집단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조직OUN’의 활동이 워낙 과격한 탓에 서방에서조차 ‘미친 놈’ 취급을 받아왔지만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동력 중의 하나로 반데라를 재소환했다.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OUN이 충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종국적으로 반데라가 꿈꾼 것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강대국들(러시아·독일·폴란드)을 벗어나 완전한 독립 국가의 수립이었다.
독일 나치의 편에서 폴란드 유대인들을 검거하고 학살하는 데 기여한 OUN의 과오는 분명히 크다. 2016년에 나온 폴란드 영화 〈보윈Wołyń〉에서 반데라주의자들이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죽이는 광기 어린 섬뜩한 장면들을 보면 지금 인류의 보편적 정서로는 반데라 일당들의 잔학함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을 기회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나치와의 협력은 차선의 선택일 수 있었을 것이다. 수백 년간 러시아와 폴란드로부터 받아온 착취와 멸시, 압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이용한 것을 두고 외부인들이 너무 쉽게 뭐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주변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립과 생존을 찾으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몸부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절박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35년간 나라를 잃고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주도의 소련에 속했던 기간만 해도 우리의 두 배가량인 69년(1922~1991)에 달한다. 일본 강점기에 우리말을 쓰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하면서 민족혼을 없애려는 일들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소련 시대 이전부터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들은 소련 전에는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지도 못한 채 러시아와 폴란드로부터 수탈을 당하는 농노로서, 또한 그들의 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 데 총알받이 병사로서 몸 바쳐 일했다. 1654년 페레야슬라프 협정 이후 러시아 당국이 우크라이나 지도자였던 코자크 헤트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점을 감안하면 러시아에 종속된 민족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힘겹게 살아온 기간은 400년 가까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나토 확대로 느끼는 안보 불안감도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로부터 당한 수모와 고통 역시 제3자가 단정적으로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우크라이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일제日帝의 통치에 분노하며 계속해서 진정어린 사과를 요구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앙금과 울컥하는 민족감정이 남아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훨씬 길었던 만큼 러시아에 대한 사무친 감정의 골이 우리보다 훨씬 더 깊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가 안보 때문에 무기력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이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쉽게 얘기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외세의 지배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나라의 국민이라면 ‘강대국의 논리’ 운운하며 러시아 편에서 가볍게 말할 수 있겠지만 일제의 악몽과 지금도 중국의 고압적 태도를 경험 중인 우리로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한恨에 대해 남들보다 더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련 붕괴를 앞두고 우크라이나 민족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89년 9월, 민족주의 역사가로 오랫동안 활동이 금지됐던 미하일로 브라이체브스키Mykhailo Braichevsky의 연설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의 탄식과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묻어있다.
극히 작은 국가들조차 안전하게 존재하고 누구도 그들을 위협하거나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데 왜 5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우크라이나는 안전한 독립국이 될 수 없는가? 같은 5000만 인구의 영국에 비해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열등하다는 말인가? 인구 400만 명의 아제르바이잔, 노르웨이보다 못하단 말인가? … 강력한 중앙의 존재나 중앙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일체 허용해서는 안 된다. … 소련 헌법은 존재해서도 안 되고 연방정부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보흐단 나할일로·빅토르 스보보다(2002) 『러시아 민족문제의 역사』, 정옥경 역, 신아사.
오래된 한 맺힌 역사와 그로 인해 우크라이나인들이 갖게 된 러시아에 대한 깊은 원한을 고려하지 않고서 단편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가운데 누가 더 나은지, 전쟁 발발 원인을 둘 중 어디에서 찾을지를 따지는 것은 크게 의미 없는 일이다. 따라서 ‘위대한 러시아’, ‘슬라브 민족의 영광’, ‘소련의 위상 회복’ 같은 글로벌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푸틴의 야망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로부터 당해온 고난의 역사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나토 확대를 우려하는 러시아의 입장 말고도, 왜 우크라이나가 이번 전쟁으로 모진 피해를 입으면서도 유럽 품에 들어가려 하는지 보다 명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전쟁이 한창이던 2022년 5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인 티모시 스나이더Timothy Snyder가 한 말, “우크라이나 역사의 비극의 깊이는 너무 커서 우리는 우크라이나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The depth of the tragedies of Ukrainian history is so great that we haven’t really been able to perceive the country itself)”라는 표현 그대로다.
이번 졸저는 우크라이나가 과거에 러시아로부터 겪은 고난의 굴레를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짚어봄으로써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이 벌이고 있는 저항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어느 한쪽을 편들기보다는 상대적 약소국인 우크라이나가 걸어온 길을 사안별로 음미해봄으로써 양국 간의 관계를 현재만이 아닌 긴 흐름 속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책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많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유럽 내에서 입지를 구축하지 못하고 전쟁으로 치닫게 된 데 대한 그들의 과오도 지적하고 있다. 이밖에 러시아는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들의 입장도 곳곳에 언급돼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지 만 3년을 한 달여 앞둔 2025년 1월 20일,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정권이 출범했다. 트럼프의 등장은 이번 전쟁 양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 변곡점이다. 전쟁 초반부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며 러시아와의 대리전을 이끌어온 미국이 정권 교체를 계기로 군비 지원에 소극적이 된다면 전쟁이 끝날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정부가 어떤 식으로 전쟁을 매듭지으려 할지 주목된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의지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꺾어놓으려는 러시아의 의도와 맞물려 전쟁이 어정쩡하게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전쟁이 끝을 향해 가는 분위기에서 아무쪼록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갖고서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특히 2004~2005년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과 2013~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에 이어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약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우크라이나-러시아-서방 간의 국제정치적 격변 속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인지, 또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어떤 최선의 대응을 해나가야 할지 고민해보기 바란다.
2025년 1월
저자 김병호
32개 나토 회원국
우크라이나 지도
1
전쟁은 왜 장기화되었는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침공한 뒤 2주 만에 있은 주민투표를 거쳐 크림을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켰다. 러시아는 비공식적인 부대를 파견해 순식간에 크림의 주요 지역과 관공서들을 접수하면서 군사대국으로서의 위세를 보여줬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권을 친서방 혁명세력에게 빼앗긴 푸틴의 복수심과 크림 합병을 통한 군사적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푸틴은 그해 9월 조제 마누엘 바호주Jose Manuel Barroso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내가 원하기만 하면 2주일 내에 키예프를 점령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전을 키이우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엄포성 발언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언제든 무력으로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얼마나 쉽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와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처럼 푸틴 역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와 국민을 하대하는 인식이 담긴 것이다. 또한 서방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가 당신들한테 도대체 뭐길래 러시아를 상대로 감히 경제 제재를 가하는가’ 하는 불만도 들어있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시하는 분위기는 다음 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10월 7일자 사설에서도 나왔다. 해당 원고는 FT의 칼럼니스트가 뱌체슬라프 니코노프Vyacheslav Nikonov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교육위원장을 면담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니코노프는 스탈린 통치기에 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의 친손자다. 니코노프는 “내 할아버지 같았으면 이미 키예프로 쳐들어가서 1주일 만에 점령해버렸을 것”이라며 “이 점에서 푸틴은 매우 신중한 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을 통해 러시아 지도층 사이에 만연된 러시아인들의 우월감과 선민의식, 우크라이나인을 이등국민으로 여기는 그릇된 사고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당초 예상과 달리 수일~수개월 안에 끝나지 못했다. 해를 넘기면서 언제, 어떻게 마무리 될지 예측이 힘든 안갯속을 걸었다. 그렇다면 뭐가 변했길래 과거 순식간에 장악했던 조지아나 크림반도 사태 때와는 달리 이번 전쟁은 왜 장기화된 것일까.
크림 합병 땐 ‘우크라이나 피로증’ 만연
먼저 2014년 2월 말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크림반도로 돌아가 보면 우크라이나의 국방력은 그 때도 초라한 가운데 지금과 달리 서방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직전에 있은 ‘유로마이단Euromaidan’ 혁명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정권을 몰아낸 미국과 유럽은 곧바로 전개된 러시아의 크림반도 공습을 말로는 비난했지만 별도의 지원은 주저했다. 미국만 해도 시리아와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 중동 정세가 위기에 처해 있어 우크라이나의 핵심 지역도 아닌 가장 밑에 있는 크림반도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특히 2013년 11월부터 본격화된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를 넘겨 크림과 동부로까지 전선이 확대되자 서방은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일명 ‘우크라이나 피로증Ukraine fatigue’이 가중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많은 지원을 해줘도 우크라이나의 상태가 늘 제자리를 맴도는 데 대해 서방이 피로감을 느끼고 추가적인 지원을 꺼리게 되는 상황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 진영은 러시아의 크림 공격에 반대를 외치면서도 물밑으로는 우크라이나 당국에 ‘양보해서 빨리 끝내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2017년 키이우에서 만난 현지인 연구소장은 “(서방으로부터) 크림반도 침공에 우크라이나가 과하게 대응하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사태가 악화될 수 있으니 (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용인하라는 조언이 있었다”고 내게 들려줬다.
당시 푸틴은 무력사용 및 침략 행위를 금지한 국제연합UN 헌장 등 국제법상 원칙을 지키라는 서방과 우크라이나 당국의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무기 대여나 자금 원조 같은 전쟁을 막기 위한 실질적 행동 없이 말로만 떠드는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정권이 무너져 자존심이 상한 가운데 급박해진 푸틴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여기에다 유로마이단 혁명 와중에 급조된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외부 공세에 대응할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허둥댔다. 크림에 사는 주민들은 물론 현지 병력들에게 본토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정도였다. 서방의 추가 지원이 멈추자 우크라이나의 국방력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영토를 그냥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크림 합병은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진행됐던 것이다.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는 2014년 3월 6일 러시아로의 합병을 결의한 뒤 11일에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같은 달 16일에는 러시아로의 합병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치러져 96.8%에 달하는 압도적인 찬성률을 기록했다. 이후 푸틴의 합병 조약 서명과 21일 러시아 의회 비준에 이르기까지 합병 절차는 크림 침공 이후 약 3주 만에 완료됐다.
이번엔 각종 무기와 운용체계까지 지원
그러나 2022년 발발한 전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원조가 막강하고 지속적이라는 점에서 8년 전과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수도인 키이우와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사는 남쪽 변방인 크림에 대해 서방 진영이 느끼는 두 지역 간 무게감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방 각국은 과거에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십자군전쟁을 치렀던 것처럼 러시아라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듯한 비장한 각오로 처음부터 이번 전쟁에 임했다.
전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며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혐오 감정을 가진 조 바이든Joe Biden 미국 대통령은 이참에 러시아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 바이든은 푸틴에 대해 취임 직후인 2021년 3월 미국 ABC방송 인터뷰에서 “푸틴을 킬러killer라고 믿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등 불신을 드러내왔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혐의로 푸틴에 대한 민주당 차원의 원한이 커진 점도 있지만 바이든은 부통령 시절인 2011년 푸틴과 사석에서 만났을 때도 “당신은 영혼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등 푸틴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바이든은 A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대선 개입이 확인되면 보복할 것이고 푸틴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번 전쟁은 바이든의 그러한 다짐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였을지 모른다.
반대로 푸틴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전횡을 줄곧 비판해왔다. 2007년 뮌헨 국제안보회의에서 이라크 침공 등 미국의 독단적인 국제질서 재편 기도를 맹비난했던 푸틴은 이후에도 미국의 시리아에 대한 미사일 공습 등 일방적인 대외정책에 불만을 제기해왔다. 2014년 10월 소치에서 열린 ‘발다이 토론 클럽Valdai Discussion Club’에서 푸틴은 “냉전은 끝났지만 세계는 평화로워지지 않았다. 이는 ‘냉전의 승자’라는 나라가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다시 만들고자 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행태는 갑자기 큰 부를 얻은 벼락부자가 하는 것과 유사하다”며 “정치적으로 자의적인 평가가 국제법 규범을 대신하게 됐다”고 각을 세웠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와 미국 간에 첨예한 대리전 양상이 펼쳐진 데에는 두 나라 정상이 상대방에 대해 가진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탓도 크다.
실제 바이든은 개전 초기부터 푸틴을 맹비난하며 러시아를 악의 세력으로 몰아갔다. 전쟁 발생 직후 키이우 인근 부차 마을 등에서 다수의 민간인 시신이 발견되자 바이든은 푸틴을 전범戰犯이라고 칭하면서 푸틴을 국제 전범재판에 세워야 한다고 맹폭을 가했다. 바이든은 열정적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외국 정상들과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를 논의하고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경제 제재를 이끌었다. 특히 미국은 무기를 지원하며 대리전 형식으로 참전하는 것이 전범 국가에 대한 문명사회의 정당한 대응이라는 프레임을 확산하면서 중국과 한편인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도와 처음부터 전쟁을 주도해나가려 했다.
예컨대 미국 의회는 전쟁 개시 후 2개월여 만에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을 개정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각종 군수물자를 신속히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무기대여법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1941년 영국 등 연합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기 위한 절차를 간소화한 것으로 시행된 지 81년 만에 다시 태어났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때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과 정부의 결단으로 우선 시행한 뒤 추후에 비용을 정산 받는 것이다. 무기대여법의 부활은 미국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에 우크라이나를 충분히 무장시켜 러시아와 우회적인 전쟁, 즉 대리전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2023년 들어 전쟁 발발 1년이 지나면서 무기 지원을 한층 강화했다. 초기만 해도 지원된 무기는 재블린Javelin 대전차 미사일과 스팅어Stinger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처럼 군인이 어깨에 메고 쏘는 소형 무기와 구호품 위주였고 전차(탱크)와 장갑차, 미사일, 곡사포 등은 러시아와의 확전을 우려해 제외됐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러시아의 공세 수위가 높아질 것을 우려한 서방 각국은 자신들의 주력 전차를 내주며 화력을 보강했다. 여기에는 영국의 ‘챌린저2’, 미국의 ‘M1 에이브럼스’, 독일의 ‘레오파르트2’ 등 실전 성능을 검증받은 최신예 전차들이 포함됐는데 이는 이번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방의 결의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또한 미국은 ‘고속기동 포병로켓시스템’인 하이마스HIMARS를 전쟁 초기에 공급한 데 이어 이보다 2배의 사거리(150km)를 가진 ‘지상발사 소직경폭탄GLSDB’ 시스템도 제공했다. 하이마스는 전투트럭 위에 로켓발사시스템을 탑재하고 사거리 80km의 정밀 유도미사일 6발을 동시에 쏠 수 있는 무기체계다. 2022년 6월부터 전장에 투입돼 우크라이나군이 동부와 남부 지역을 수복하는 데 활약하면서 이번 전쟁의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았다. 우크라이나군은 ‘재블린’으로 불리는 대전차미사일FGM-148을 공수 받아 러시아 탱크들을 대거 격파했다. 이는 어깨에 메고 쏘는 소형 미사일이지만 러시아의 주력 전차인 T-80과 T-90을 고철덩어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지녔다. 개전 초기 키이우 북동부 브로바리 전투에서 러시아의 제 90전차사단은 매복 중이던 우크라이나군의 재블린 공격에 사단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재블린 미사일을 안고 있는 ‘성(聖) 재블린’ 삽화가 등장할 정도였다.
특히 미국은 2023년 8월 러시아와의 확전을 우려해 꺼려왔던 F-16 전투기 제공을 전쟁 발발 1년 6개월여 만에 승인해주기로 했다. F-16 전투기를 보유한 다른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전달 승인을 요청할 경우 미국 정부가 이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한 달 전에는 불충분한 포탄 지급을 보충하기 위해 전 세계 각국이 금지한 ‘집속탄’을 우크라이나에 공수하기도 했다. 집속탄의 비인도적 공격 가능성에 따른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정부는 끊임없이 지원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튀르키예가 전쟁 초반에 기증한 군용 드론인 ‘바이락타르 TB2’가 러시아 탱크부대를 기습하며 성과를 냈다. 미국도 자폭 드론을 제공해 러시아군의 무기와 보급품들을 다양한 위치에서 대거 파괴했다.
주목할 점은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것은 단순히 군사물자만이 아니라 각종 무기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운용시스템까지 제공했다는 것이다. 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적군이 있는 지역을 찾아내 한꺼번에 대규모 공습을 진행할 수 있는 전술체계를 갖추지 못한다면 공격의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미국은 분산된 무기들을 연결해 특정 지점을 타격할 수 강력한 네트워크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러시아를 상대로 효과적인 공격이 이뤄질 수 있었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견해다. 예컨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수많은 통신 첩보들을 신속히 감청함으로써 러시아군의 정보 보고가 몰리는 지점을 찾아 급습하고 러시아제 전차나 미사일에 대한 기존 정보를 바탕으로 AI가 그 위치를 정확히 판별해냄으로써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미군 당국이 차세대 전쟁에 대비해 연구해온 일명 ‘모자이크 전쟁Mosaic Warfare’을 이번 전쟁에서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모자이크 전쟁은 미국 국방부 산하 다르파DARPA(방위고등연구계획국)가 2017년부터 추진해온 전쟁 수행방식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분산된 무기 전력을 유연하게 결합해 군사능력을 효율화시킨다는 목표에서 출발했다. 국내 국방연구 논문(2020)에 따르면 모자이크 전쟁은 미래전 개념으로 AICBM(인공지능·사물인터넷·클라우드·빅데이터·모바일)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들을 군사 분야에 접목시켜 네트워크화된 다양한 전력을 분산해 전장戰場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신속 대응하는 전쟁 수행방식이다. 변화하는 전장의 조건과 새로 발생하는 상대방의 취약점을 적시에 파악해 공격의 적응력을 높이는 것이다.
미군의 향후 군사혁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모자이크 전쟁은 초연결, 초지능화, 융복합을 기반으로 해서 적은 군사력을 갖고도 효율을 높이는 방식인데 이번 전쟁에서 서방의 무기 지원과 함께 운영돼 러시아의 전투 능력을 크게 훼손시켰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최첨단의 초연결 네트워크를 가진 미국과 이를 구축하지 못한 채 2차 대전 때의 전투방식을 고수한 러시아 간의 전쟁구도가 됐다”면서 이번 전쟁이 길어지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도 한다.
무기력한 러시아군 VS 항전의지 높은 우크라이나군
당초 개전 후 빠르면 48~72시간 내에 키이우가 점령될 것이라는 예측이 크게 빗나간 이유로 러시아군의 무기력함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군사대국이라는 러시아지만 전쟁 초반 부족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우크라이나군에게 자국 전차와 군함이 공격당하는 등 허술한 전투 능력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러시아는 우호 관계인 벨라루스를 통해 북쪽에서 육로로 키이우를 공격하면 동부에서 진격하는 것보다 거리가 가까워 승산이 높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의 산발적인 저항에 막혀 키이우를 점령하지 못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러시아군은 무기가 모자라 이란에서 무인 드론과 미사일을 공수하고 북한한테도 포탄과 탄약을 지원받아 전쟁을 이어가야 했다.
특히 전쟁이 1년을 넘어서면서 어느 한 쪽도 뚜렷하게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지구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군은 2023년 5월 러시아가 점령한 도네츠크주의 동부 도시 바흐무트를 기습해 러시아 최정예 부대 중 하나로 꼽히는 72자동소총여단을 궤멸시키고 영토 일부를 수복하기도 했다. 바흐무트는 동부의 거점 지역으로 양측은 전쟁 초기부터 이곳에서 결사 항전을 벌여왔고 수만 명의 군인들이 희생된 가운데 러시아가 매우 힘겹게 일부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예상보다 고전한 이유를 놓고 나름의 견해들을 제시했다. 전투 전략의 부재와 같은 기술적 요인과 함께 푸틴이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을 얕잡아본 것이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로 들기도 한다. 2014년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도 없이 사실상 무혈 입성했던 경험 때문이었는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신들을 꽃을 들고 환영해줄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과거와는 다른 거센 반격이었다. 결국엔 적은 병력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러시아의 자만심이 화를 불렀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여기에다 침공을 앞두고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내부 공략을 위해 심어두었던 현지의 첩자들이 개전과 동시에 도망쳐버려 무용지물이 되는 등 보안 관리에 소홀했고 정보당국이 크렘린에 전황을 거짓 보고해왔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엉터리 보고에 분노한 푸틴이 연방보안부FSB 담당 국장과 그 밑의 직원들을 대거 해고하고 이들을 형무소로 보냈다는 등 여러 부정적인 보도들을 보면 러시아 내부에서 혼란이 커졌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일본 외무성 정보분석관을 지낸 러시아 군사안보 전문가인 고이즈미 유小泉悠는 자신의 책에서 러시아의 후속부대가 공항을 통해 원활한 이동을 하지 못한 점이 패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개전 초기 러시아군이 200여대의 헬리콥터로 공항을 확보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이 포사격과 전투폭격기로 활주로를 파괴해 러시아의 후속 수송기 부대가 착륙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공항 방어 책임자가 일본 아사히신문에 “이것이 결정적이었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러시아군의 작전은 처음부터 꼬였다고 지적했다. 또 “중장비를 갖춘 후속부대 수송기가 착륙할 수 없게 됨으로써 키이우를 점거하고 젤렌스키 정권을 제거하려는 푸틴의 전쟁 기본구상 자체가 깨져버렸다”고도 했다.
국내에서도 러시아의 군사 전략을 놓고 많은 세미나가 열렸는데 박주경 전 육군 참모차장은 2022년 12월 한국국방연구원KIDA 주최 발표에서 러시아군이 고전하는 이유가 군수軍需 분야에서 총체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부정부패와 비리 때문에 군 현대화를 위해 배정된 자금의 40%가 집행되지 못해 군수물자 상태가 불량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값싼 중국산 타이어 때문에 전투용 차량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유통기한이 20년이나 지난 전투식량이 보급됐다”며 “러시아군 100만 명 가운데 25%가 징집사병인데 이들은 1년 복무 기간으로 인해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제대로 잘 싸우지 못한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 의지가 남달랐던 점도 전쟁이 오래 지속되는 데 기여한 변수다. 당연히 본인들의 조국이 침략당한 쪽에서 그 수복을 위한 결의가 상대방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지만 서방의 강력한 지원과 맞물려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전쟁 초기부터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가족을 떠나 총을 들고 전쟁터로 자발적으로 나갔지만 러시아에서는 2022년 9월 징집 동원령이 떨어지자 젊은이들이 해외 각지로 도망치는 행렬이 방송을 탔다. 러시아가 전쟁 중에 30만 명의 병력을 긴급 조달하기 위해 동원령을 발동한 것 자체가 병력 준비 태세가 그만큼 미흡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징집을 피하지 못하고 전장에 끌려간 불운한 러시아 병사들로는 의욕에 찬 우크라이나군을 당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박정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박사는 서울대 세미나에서 “이번 전쟁이 러시아와 나토 간 대리전 성격인 관계로 우크라이나군은 서방으로부터 작전 정보나 군사 지원을 잘 받고 있다”며 “우크라이나가 잘 싸우고 있는 것은 팩트인데 이는 전쟁 승리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 (러시아군보다)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진호 한국국방연구원 박사도 같은 토론에서 “2014년 크림이 침탈되고 나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국방력 강화로 여론이 통일됐고 정부도 나름 전방위적인 국방 계획을 세워 대비한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반면 러시아에 대해서는 “교만해서 정보 판단을 제대로 못했고 러시아군끼리 서로 연결하는 총합적 지휘통제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앞서 언급한 일본인 전문가 고이즈미 유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맹공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병력 규모가 부족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았다. 그에 따르면 전쟁 개시 직전 우크라이나의 병력은 약 19만 6000명에다 돈바스 전투를 치른 국가친위대 6만 명, 국경경비대 4만 명 등 준準군사부대까지 합치면 총 30만 명에 달했다. 개전 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총동원령이 발동돼 2022년 7월까지 병력 규모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침공한 러시아군의 병력(15만 명)과 동부 친러 무장세력(4만 명)을 합한 숫자인 19만 명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또 예브게니 프리고진Yevgeny Prigozhin이 소유했던 용병 공급회사 바그너Wagner 그룹의 외국인 용병과 죄수들, 이후 강제 징집한 민간인들까지 더해도 우크라이나 병력 숫자에 모자랐다. 고이즈미는 “개전 후 한 달간 우크라이나군은 조직적인 전투력을 갖추고 키이우, 체르니히우, 수미, 하르키우 같은 중북부 주요 도시를 끝까지 방어했다”며 “이곳을 러시아 동부와 서부 군관구에서 선발된 주력부대가 공격했던 점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군의 놀라운 전투력과 끈기가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세계 여론 “21세기 전쟁범죄국 응징해야”
이와 함께 전쟁이 장기화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세계 시민 여론이 버텨주었기에 가능했다.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와의 전쟁이 길어져 추운 겨울이 들이닥치면 여론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없으면 고질적인 에너지난을 겪는 만큼 겨울이 다가올수록 종전終戰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힘을 얻을 것으로 예상됐다. 따라서 유럽 각국은 내부 여론에 밀려 2022년 하반기부터는 전쟁 종결을 외칠 것으로 보였다. 이는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서구인들에게 ‘우크라이나 피로증’이 서서히 몰려올 시점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유럽은 또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면 에너지 수입 부담이 커질 뿐 아니라 완제품 수출시장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대응은 온건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영화와 게임에서나 볼 법한 대규모 폭격이 연일 발생하고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는 소식이 실시간 전해지면서 유럽인들은 추위와 같은 각자의 불편함을 참고서라도 무도한 러시아를 상대로 문명사회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려는 대오에 동참했다. 유럽인들은 이번 만큼은 추운 겨울을 보내겠다고 작정한 듯 한파를 견뎌낼 수 있는 준비에 들어갔다. 유럽 각국 정부는 구체적인 에너지 사용 절감 대책을 내놨고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산 에너지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사회평론가인 복거일 씨는 이번 전쟁을 세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지한 전쟁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제정치 문제에서는 지도자들이 정책을 세우고 시민들이 따르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시민들이 먼저 러시아의 침공에 반응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정부에 강요했다. 세계화가 ‘세계 시민들’을 만들어냈고 따라서 이번 전쟁은 세계 시민들의 전쟁”이라고 칼럼에 썼다.
글로벌 유명 기업들도 불신이 커진 러시아에서 성과를 내기보다는 과감하게 러시아 시장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전쟁 초반부터 미국과 유럽 회사들은 하나둘씩 러시아 사업을 접으면서 당국의 러시아 고립 작전에 호응했다. 전쟁 직후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에 이어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는 러시아에서 생산을 중단했고 프랑스 업체인 르노도 현지 자회사와 공장 지분을 러시아 정부에 매각하고 떠났다. 애플과 나이키, 맥도널드 같은 다국적 기업들도 러시아 내 매장을 철수하는 등 러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 압박 대열에 동참했다. 키이우경제대학 연구소에 따르면 러시아에 진출해 있던 외국 기업 3129개 가운데 전쟁 후 1년 동안 60%가 넘는 1895곳이 사업을 철수하거나 중단 및 축소 운영에 들어갔다. 지금도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위해 현지 당국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해외 업체들이 많다고 한다.
러시아는 에너지 및 곡물 수출 중단으로 맞대응하며 인플레이션을 키웠지만 세계 각국은 전쟁이 가져온 그러한 부수적인 고통을 버텨나갔다. 커져가던 인플레이션에 전쟁이 기름을 붓게 되자 각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면서 세계 경제는 위축이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세계 시민들은 때 아닌 전쟁이 가져온 불편과 불이익을 감내하고 있다. 이로써 명분 없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식으로 쉽게 전쟁이 끝날 수 없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24년 3월 양국이 모두 대선을 앞두고 전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 싸움이 치열한 만큼 언제, 어떤 식으로 종결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미국도 같은 해 11월에 대선을 예정하고 있어 바이든 정부는 중간 평가로서 이번 전쟁을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다.
푸틴은 어떻게든 러시아가 이겼다고 일방적인 승리를 선언하면서 2024년 3월 17일 대선에 출마해 종신 집권의 꿈을 키우고 있다. 젤렌스키 역시 2주 뒤에 치러질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연임을 이루기 위해 러시아에 맞선 전쟁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 이후 우크라이나 대통령들(유셴코·야누코비치·포로셴코)이 연임에 성공하지 못하고 줄곧 5년 단임이나 중도 퇴진에 그쳤던 반면 젤렌스키는 이번 전쟁을 기회로 쿠치마 이후 20년 만에 첫 연임을 노리고 있다. 결국 내년에 두 나라에서 가장 큰 정치적 이벤트를 앞두고 상대국과의 갈등을 대선에 활용하기 위해 서로가 적절한 묘수를 찾을 때까지 전쟁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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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전쟁을 왜 일으켰는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단순히 영토를 늘리려는 ‘땅따먹기’ 차원이 아니다. 디지털 기술 및 경제 우선 시대에 물리적 영토가 갖는 중요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을 푸틴과 러시아 당국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영토를 추가하는 것은 그에 비례해 엄청난 관리비용을 수반하는 일인 만큼 남의 땅을 직접 빼앗기보다는 꾸준히 그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다.
2000년 푸틴이 집권하고 나서 러시아와 벨라루스 간에 통합국가 논의가 진전됐지만 이후 지지부진하게 된 것도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다는 것이 법과 제도를 고치고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는 데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소련이 무너진 것도 공산주의가 지닌 태생적 비효율성도 있지만 15개에 달하는 공화국들을 억지로 엮어놓음으로써 각국에서 반反소련 독립 열기가 폭발 직전까지 갔고 결국에는 소련 제국을 관리하는 비용이 임계점에 달하게 되자 내부에서부터 곪아터진 것이다.
따라서 푸틴이 말하는 ‘강한 러시아’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소련 크기의 면적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크렘린에 순응하는 국가들과 연대해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의미가 있다. 러시아가 옛 소련 일부 국가들과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경제동맹EAEU,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등을 만들어 주도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푸틴이 이 지역에서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통합 방안이다.
모두가 탐내는 우크라이나의 잠재력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연합CIS자체는 물론 다양한 역내 통합 모임에서 벗어나 있는데 푸틴이 긴밀한 통합 형태를 가장 이식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 바로 우크라이나다. 나토의 동진을 막고 슬라브 연대의 위상을 과시하려면 4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입장에서 가장 탐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 책략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연대하지 못한다면 러시아는 급증하는 이슬람과 아시아 인구가 상당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백인 유럽 국가로서의 존재감이 약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같은 동슬라브 국가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의 연대는 서방에 맞서 슬라브 세력의 입지를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러시아는 특히 유럽과의 완충 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안보적으로 유리한 상태로 확보하고 유럽에 천연가스를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와의 협력은 필수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우크라이나를 상실한다면 우리는 머리를 잃는 것이다(Если мы потеряем Украину, то потеряем голову)”라고 밝힌 것도 러시아에게 있어 우크라이나가 실체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는 농산물 생산 및 천연자원의 보유 대국이다. 소련 시절부터 식량 공급지이자 기계나 철강 같은 중공업 생산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곡물 작황에 유리한 전 세계 흑토(초르노젬)의 33%를 차지하며 예로부터 ‘유럽의 빵바구니’로 불렸다. 우크라이나산 옥수수와 밀은 전 세계 수출 물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12%와 10%로 4~5위이고 해바라기유油는 50%로 세계 1위다. 우크라이나의 연간 곡물 생산량은 7000만 톤으로 이 중 5000만 톤을 수출할 수 있다.
2022년 7월 22일 UN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참여하는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Black Sea Grain Initiative’ 협정이 체결됐는데 이는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의 선적 항구가 봉쇄되자 세계 농산물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이 협정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산 곡물과 식량, 비료의 안전한 수송을 위한 것으로 흑해에 접한 오데사, 피브데니, 초르노모르스크 등 3곳의 항구를 통해 수출이 가능하다. 협정은 발효 후 120일 동안 효력을 가진 뒤 같은 해 11월과 2023년 3월 두 차례 연장됐고, 5월 18일 만료 직전에 다시 2개월 추가 연장됐다. 하지만 2개월 뒤 러시아는 협정 종료를 통보했다.
2022년 8월 캐나다 소재 싱크탱크인 세크데브SecDev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는 티타늄, 철광석, 리튬, 석탄, 우라늄 등 총 12조4000억 달러 가치의 지하자원이 매장돼있다. 산업 생산에 널리 쓰이는 120개의 광물 가운데 117개가 우크라이나에 부존해있는데 이 중 생산량 기준 상위권 광물로는 갈륨(세계 2위)과 게르마늄(5위), 티타늄(6위), 철광석(7위), 망간(8위) 등이 있다. 세크데브의 공동창립자는 “만일 러시아가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의 석탄까지 차지하면 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기존에 자원 개발과 중공업 위주에서 최근에는 정보기술(IT 분야로도 산업을 확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투자펀드UkraineInvest에 따르면 자국의 IT산업은 2003년 1억1000만 달러에서 2020년에는 50억 달러 규모로 17년 동안 약 46배가 커졌다. 연간 성장세는 20~25%에 달한다. 투자펀드 홈페이지에는 “IT산업 성장은 폭넓은 인재풀, 유럽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 기존의 과학기술 유산, 경쟁력 있는 임금 수준 등이 결합된 결과”라며 “영국과 폴란드보다 매년 두 배나 많은 전공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푸틴 “우크라이나는 인공적인 국가”
주목할 점은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당국자들이 우크라이나를 중시하면서도 그 나라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러시아의 일부라는 개념을 지금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국가성statehood 자체를 푸틴이 무시했기 때문에 큰 거리낌 없이 침공이 이뤄질 수 있었다. 푸틴은 전쟁 직전 ‘특별군사작전’에 돌입하는 배경을 설명하면서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대에 만들어진 인공적인artificial 산물”이라고 밝혔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국가적 정체성을 부인하고 러시아와 합쳐도 되는 대상으로 여겨온 기존의 인식을 반복한 것이다.
푸틴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을 거쳐 1922년 수립된 소련은 민족별로 공화국 제도를 도입해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대등한 소련의 구성공화국으로 만들면서 우크라이나에 국가적 성격을 비로소 처음 부여했다. 이로 인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선물’ 내지 ‘소련의 발명품’에 불과한 것이고 소련이 공화국들에게 이탈의 자유마저 허용하면서 우크라이나가 1991년 소련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 푸틴의 해석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러시아인과 구별 없이 그 지배하에 살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레닌의 잘못된 결정을 통해 소련 시절에 이르러 민족 단위의 공화국 지위를 얻었을 뿐인데 우크라이나는 그러한 은혜를 잊은 채 주권을 외치며 소련의 해체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친서방을 내걸고 러시아를 위협하는 상황이 된 마당에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일부라는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푸틴은 앞서 2008년 4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신규 후보로 가입시키는 논의가 진행됐을 때에도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일부는 동유럽에 있지만 다른 일부는 우리가 준 선물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고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만큼 이럴 경우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지도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며 지금의 침공을 염두에 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14년 10월에는 전직 폴란드 외무장관인 라도슬라프 시코르스키Radosław Sikorski가 푸틴이 2008년 2월 도널드 투스크Donald Tusk 당시 폴란드 총리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분할 방안을 제안했다고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시코르스키에 따르면 푸틴은 “우크라이나는 인공적인 국가이고 지금의 우크라이나 르비프(우크라이나어로 리비우)는 폴란드 도시다. 왜 폴란드는 르비프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각각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를 나눠 갖자는 모종의 제안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다. 푸틴은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합병한 뒤 행한 기념연설에서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하나의 같은 민족’이라면서 우크라이나의 개별적인 국가 및 민족적 실체를 부인했다.
2013~2020년 크렘린 행정부실장과 부총리, 대통령 고문 등을 지내며 막후 의사결정자를 뜻하는 ‘회색 추기경’으로 불렸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Vladislav Surkov 역시 푸틴의 최측근 참모로서 우크라이나의 존재를 지우기 일쑤였다. 대외관계를 주로 담당했던 수르코프는 “(국가로서) 우크라이나는 없다. 단지 우크라이나적인 느낌이 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라고 칭하는 책자만 있을 뿐 우크라이나의 실체는 없다”고 주장했다. 수르코프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통제 노선을 강조한 ‘주권 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를 입안한 인물로 유명한데 러시아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친서방화에 대해 극도의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러시아가 2022년 키이우 본토까지 공격을 감행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실체를 부인하는 푸틴과 크렘린의 내부 분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너무 큰 나머지 그냥 놔두면 서방에 유리한 쪽으로 현상 변경이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를 떨쳐내기 위한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지속적인 협력 파트너가 되지 못하고 나토와 손잡고 러시아를 공격하는 길목으로 활용된다는 것은 러시아인들에게는 끔찍한 악몽이기 때문이다.
전략적 종심을 중시해온 러시아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안보 차원에서 전략적 ‘종심縱深·Depth’ 확보를 우선시해온 점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가능성은 그 자체만으로 러시아인들에게 공포스럽고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종심이란 특정 국가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바깥 국경에서 중심지까지의 물리적 거리를 뜻하는데 전쟁 때 효과적인 기동에 필요한 공간과 작전의 준비시간을 확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우호국으로 두고 있으면 유럽에 대한 전략적 종심은 폴란드에 접한 우크라이나 서부 국경까지 확대되지만 우크라이나를 잃게 되면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으로부터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짧아진 거리를 종심으로 두게 된다.
즉 우크라이나에 접한 폴란드 동부 도시인 프세미시우에서 모스크바까지 거리는 1500km가 넘지만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수미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약 700km로 절반도 안 된다. 그만큼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를 붙잡지 않으면 종심이 짧아져 나토 공격에 신속한 대응을 강구하기 힘들어진다. 푸틴이 개전 이유를 밝히면서 “우크라이나에서 발사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은 모스크바까지 35분, 하리코프에서 발사된 탄도미사일은 7~8분, 극초음속 공격무기는 4~5분이면 도달한다. 이는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이라고 밝힌 것도 종심 축소에 대한 우려를 담은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 방어를 위한 자연적인 지형지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종심을 길게 확보하는 것이 맹추위와 더불어 외적을 막는 방편이 되어 왔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의 침입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공습을 막은 것은 추위의 역할도 컸지만 길어진 종심 때문에 가능했다. 파죽지세였던 이들 외부인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로마노프 왕조와 소련 제국은 각각 프랑스와 독일 부대가 우크라이나 평원지대를 거쳐 러시아로 진입하기까지 긴 종심을 갖고 있어서 공격에 대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후 러시아가 폴란드와 체코, 루마니아 등 동유럽을 위성국가 체제로 정비해 영향권을 확장한 것도 러시아 서부 국경에 험난한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적인 장애물이 없는 만큼 종심의 외연을 넓히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러시아는 주변국들의 영토를 합병하거나 자신의 영향권 지대로 두지 않으면 외세의 공격에 매우 취약해지는 만큼 자위권 차원에서 국경 주변을 두텁게 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각에서 과거 유럽 열강의 해외 진출은 부富를 쌓기 위한 것이었지만 러시아는 순수하게 안보와 생존을 위해 먼 나라가 아닌 주변국들을 상대로만 대외 경략이 이뤄졌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심 확보 차원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소련 대통령은 자유화된 동유럽 지역으로의 나토 침투에 대해 결연히 반대했다. 동유럽이 나토에 포섭되면 유럽으로부터의 종심이 단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유럽 국가들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이들 나라에게 서방 진영을 선택할 자유를 주더라도 그 조건으로 나토 가입만은 안 된다는 약속을 서방으로부터 받아냈던 것이다.
반면 소련 내 공화국들에 대해서는 이들의 독립을 수용할 경우 모스크바의 종심은 러시아의 외부 국경선까지로 짧아지는 만큼 고르바초프는 공화국 단속에는 완강했다. 동유럽 각국이 서방에 속하게 되더라도 우크라이나 등 기존 공화국들을 종심의 시작점으로 계속 두어야만 소련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 체제를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공화국들을 통제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면서 소련은 파멸의 길을 걸었고 이후 친서방·반러시아 국가들이 잇따라 출현해 러시아의 종심은 점점 짧아지는 위기에 처했다.
‘나토 확대 불가’ 약속 위반한 서방
어쩌면 러시아의 안보 우려는 서방 측이 당초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커진 것이다. 1990년 1월 31일 한스 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 서독 외무장관은 공개 연설에서 “유럽의 변화와 독일 통일은 소련의 안보 이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며 “나토는 동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해 2월 9일에는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미국 국무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면담하면서 “나토는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not one inch eastward)”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당일 세 번씩이나 했다.
다음 날인 10일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 수상은 고르바초프로부터 나토가 동진하지 않는다면 소련은 독일 통일에 대해 원칙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는 동·서독으로 나뉜 독일의 통일 문제에서 소련의 양보가 필수였기 때문에 독일도 나토 확대 불가라는 입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높은 경제력과 인구가 많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 합병하는 형태가 될 것이기 때문에 통일된 독일은 서방 진영에 남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독일은 소련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치기 힘든 지역이 될 것이고 소련은 모종의 안보 대가를 받아두어야 했다. 이는 동유럽으로 나토 확대 대신에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해방된 동유럽 지역을 서유럽과 소련(러시아) 사이에 완충지대로 남겨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은 앞서 언급한 약속들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렸다. 오랫동안 소련의 외압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동유럽 국가들은 선진적인 유럽의 일원이 되기를 꿈꿨고 미국은 이들을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던 만큼 EU와 나토 확대로 선회했던 것이다. 서방은 1994년부터 CIS 및 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가입을 위한 중간 단계로서 ‘평화를 위한 동반자계획PfP’을 만들어 문호를 개방했다. 특히 1997년 4월 러시아와 나토 간 ‘상호협력과 안보에 관한 기본조약’에서는 신규 회원국 영토에 핵무기 배치 포기 등을 규정하면서 나토 확대가 사실상 용인됐다. 이에 러시아 내에서는 나토 동진을 수용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1999년 체코와 폴란드, 헝가리가 가입한 이후 푸틴이 대통령과 총리로 있는 기간에만 12개 나라가 나토에 들어갔다. 2004년(불가리아·루마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과 2009년(알바니아·크로아티아), 2017년(몬테네그로), 2020년(북마케도니아), 2023년(핀란드·스웨덴)까지 순차적으로 나토 가입이 이뤄졌다.
당시 나토의 회원국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도 러시아 당국은 내부 혼란으로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1998년 8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을 선포한 상황에서 임기 말년의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이 서방 국가들을 설득해 동유럽 3개국의 나토 가입을 막아내기란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또한 푸틴 대통령도 집권 초기에는 나토 확대에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발트 3개국의 나토 가입은 푸틴이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비치면서 전격 성사됐다.
푸틴은 2001년 뉴욕 9·11 테러를 계기로 나토와 국제 테러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고 이듬해 5월부터는 정례적인 ‘나토-러시아 이사회NRC’가 열리는 등 서방과 활발한 협력을 진행했다. 발트 3국이 나토 회원국이 된 것은 러시아와 나토 간의 관계가 역대 최고로 긍정적인 순간에 이뤄진 것이다. 물론 러시아는 나토의 외연이 확대될 때마다 겉으로는 반대를 외치면서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동유럽이 아닌 옛 소련 국가들로 나토가 확장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2003~2004년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자 러시아의 위기감은 고조됐다. 미국은 시민혁명을 통해 새로 들어선 정부에 나토 가입을 독려했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반발을 모른 체하며 서방 쪽에 바짝 붙었다. 그 때부터 푸틴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토 확대 반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소련 해체 직전 동독에서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으로 근무했던 푸틴은 독일 통일을 소련이 용인해주는 대신 서방으로부터 나토 확대는 없다는 약속을 수차례 받았던 장면을 생생히 지켜봤다. 하지만 그들은 소련 붕괴로 약해진 러시아를 우습게 여기며 그 약속을 내팽개쳤고 이제는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 국경에까지 다가오는 처지에 놓였다. 푸틴이 서방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자국 안보에 대한 우려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만일 나토 지도부가 우크라이나의 가입 조건으로 “나토는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더라도 서방의 잦은 배신을 경험한 푸틴과 일반 러시아인들조차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좌파 지식인들의 푸틴 옹호
나토가 조금씩 동쪽으로 확대돼온 과정을 보면 푸틴이 그동안 서방의 약속 위반에 대해 오히려 너무 관대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로 인해 소련 해체 후 나토의 무차별적 동진을 비난하는 서방의 논객들도 많다. 이들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는다는 이유로 나토가 먼저 무리한 확대를 시도해 러시아를 자극한 것이 지금의 전쟁을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좌파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교수는 “이번 전쟁의 원인은 푸틴에게 있지 않고 당시(2008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나토의 일부로 만들기로 한 서방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2008년 4월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의 직전 단계인 ‘회원국 행동계획MAP’ 승인을 받을 것이 기대됐지만 무산됐다. 미국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반발을 두려워 한 유럽 각국의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3년 7월 빌뉴스 나토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는 MAP 절차를 면제받아 나토 가입 가능성을 높였다. MAP은 나토 가입 기준을 충족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입장을 줄곧 두둔해온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교수 역시 이번 전쟁에 대해 “나토나 EU의 확대, 미국이 재원을 대는 현지 비정부기구NGO를 통한 민주주의의 확산은 서로 연합할 경우 화약통으로 변해 성냥을 가져다대기만 하면 (러시아의 폭발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전쟁을 일으킨) 푸틴의 반응이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對 소련 ‘봉쇄정책’의 원조인 조지 케난George Kennan 전 소련 대사는 1998년 5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토 확대는 비극적인 실수이고 새로운 냉전의 시작이 될 것”이라며 “러시아인들은 점차 매우 적대적인 반응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또 “우크라이나를 유럽화하는 대신에 냉전 시절 오스트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우크라이나를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 완충지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강조했다.
푸틴은 동유럽을 넘어 우크라이나로 나토 확대 논의가 진전되자 과거에 서방으로부터 당한 배신과 기만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러한 불만이 누적되는 와중에 더 이상 참기 힘든 계기들이 몰려오면서 키이우 공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경에 긴 종심 확보와 나토 확대 반대라는 큰 그림 속에서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에 따른 달라진 대외 환경, 푸틴의 장기 집권에 대한 내부 반발 무마 등의 요인을 꼽는다.
경계심을 촉발한 미국-우크라이나의 밀월
2021년 1월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은 미국과 러시아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신호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전 대통령은 유럽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푸틴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반면 바이든은 같은 민주당 출신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처럼 푸틴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오바마는 2020년 자서전에서 푸틴에 대해 “시카고나 뉴욕의 조폭 두목 같다”며 “뇌물, 금품 갈취, 사기 등을 거래 수단으로 삼는 조폭을 떠올리게 한다”고 혹평했는데 오바마 정부에서 8년간(2009~2017) 부통령을 지낸 바이든 역시 푸틴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공유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바이든이 “푸틴은 부도덕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완전 깡패이자 잔인한 독재자”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도 그간의 불신과 앙금이 담겨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바이든의 차남이 2014년 5월부터 우크라이나 천연가스 기업에 임원으로 일하며 막대한 보수를 받고 대미對美 정치권 로비에 활용됐다는 의혹이 일면서 선거 때마다 바이든의 이른바 ‘우크라이나 게이트’는 그를 괴롭힌 단골 이슈였다. 그만큼 바이든은 사적으로도 우크라이나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푸틴과 러시아에 대한 민주당 정부의 반감은 러시아에 맞서는 우크라이나를 향해 더 큰 지지와 협력으로 나타났다. 트럼프가 막대한 미국의 돈이 투여되는 나토의 존재를 경시하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무심했던 반면 바이든은 푸틴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를 포섭하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여 만에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강제 합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내놓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때마침 우크라이나에서도 새 대통령으로 젤렌스키가 2019년 5월 취임해 반러시아 행보에 나서고 있었다. 젤렌스키의 강점은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던 기존의 수구 정치인이 아닌 코미디언 출신의 참신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적합한 측면이 있었다. 다만 젤렌스키는 과거에 방송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는 데 치중했던 것처럼 정치에 입문해서도 현실성 없는 과장된 발언을 자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젤렌스키는 2019년 대선 때부터 러시아가 장악한 영토를 탈환하고 나토 가입을 실천하겠다고 외쳤지만 당연히 구체적인 행동계획은 내놓지 못했다. 푸틴과의 담판으로 동부 분쟁을 끝내겠다고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2022년 들어 확전擴戰을 가져왔을 뿐이다.
젤렌스키의 과장된 표현과 바이든의 ‘크림 합병 불인정’ 같은 도발적 발언들은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에 강한 연대를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져 푸틴을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반도 수복을 위한 국제적 공감대를 확산하고자 2021년부터 ‘크림 플랫폼Crimean Platform’이라는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는데 그 취지부터가 푸틴을 도발하는 것이었다. 그해 8월 키이우에서 열린 첫 회의에는 국가 정상과 국제기구 대표 46명이 참가했고 바이든도 지지 성명을 보냈다. 전쟁 중이던 2022년에 열린 2회 행사에서 젤렌스키는 “유럽과 전 세계 안보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림반도를 잃고 동부 지역도 빼앗길 우려가 커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서방 편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미국은 이를 도와줄 최고의 파트너였다. 전 세계에 자유민주주의 확산을 외쳐온 바이든에게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물리쳐야 할 적敵인 반면 우크라이나는 이를 실행하는 데 조력자나 대리인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 이로 인해 트럼프 시절 소원했던 나토의 합동군사훈련이 재개됐고 우크라이나군과의 훈련도 실시됐다. 나토 회원국들 간의 ‘디펜더 유럽Defender-Europe 2021’은 미군 주도의 다국적 합동훈련으로 2021년 3~6월에 10개국, 30여 곳에서 진행됐는데 여기에는 우크라이나 주변 지역도 포함됐다. 같은 해 7월에는 흑해에서 ‘시 브리즈Sea Breeze’라는 나토와 우크라이나군의 합동 해상 훈련이 시행됐다. 당연히 러시아 정부는 크게 반발했고 미국이 훈련을 기회로 비非나토국인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러시아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어 갔다.
이 무렵 벌어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논의는 또다시 러시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젤렌스키의 취임 직전인 2019년 2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나토와 EU 가입을 헌법에 명기한 개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