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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ácbạnthânmến! TôilàVũThịThanhHoa. Tôirấtcảmơnvìcócơhộichiasẻ “câuchuyệncủachúngtôi” đếnvớicácbạn. VàcũngnhâncơhộinàyTôimuốnchiasẻvớimọingườicâuchuyệnnhưsau
Tôilàcôngdânhuyện옥천, VũThịThanhHoa, NguyênquánTháiBình, ViệtNam. Theotrảinghiệmsốngcủabảnthânthìtôicảmthấynhiềungườidànhsựquantâmvềnơitôisinhrahơnlànơitôiđangsinhsốnghiệntại. Họnhìnthấymàudacủatôihọthườnghỏimộtcáchthảnnhiênđấtnướctôisinhracónghèokhông? nhàtôicónghèokhông? đãnhậnđượcbaonhiêukhiđilấychồng, bâygiờcóhaygửitiềnvềViệtNamkhông? ĐôilúccóngườicòngọiViệtNamlà “월남”, đốivớitôilàlầnđầugặpmặtmàhọtỏrathânthiệnnhưnglạinóichuyệntrốngkhông. Vànhữngđịnhkiếnnàyluônxảyraởđâuđóngoàixãhội. Cònđịnhkiếnởtronggiađìnhđóchínhlàcácchịemphụnữditrúkhôngđượcsửdụngngônngữmẹđẻ. Cácchịemtrởthànhcácbàmẹkhôngthểgiaotiếpđượcvớiconbằngchínhngônngửmẹđẻcủamình. Khôngnhữngthếmàcácchịemcònbịnhốtởnhà, bịbạolựcgiađình. CácchịemvẫncònkémtiếngHàn, khônghiểubiếtvềcácchếđộ, dướicácgóckhuấtnêncảnhsátvàchínhquyềnđịaphươngcũnglàmngơ, cácchịemkhôngnhậnđượcsựgiúpđỡnênmớitìmlốithoátchochínhbảnthânmìnhlàtrốnchạy.
Tôilàngườitrongcuộc, chínhnhữngngườibạnbèthânthânthiếtcủatôiđãphảitrảiquanhữngchuyệnđángtiếcnày. Nhưnghọđãchịuđựng. Khôngphảivìmấyđồngtiềnmàcácchịemphảichịuđựngmàhọnghĩmìnhmuốnsốngtốthơnnênmớilựachọnhướngđiranướcngoài, vàđểchứngminhchosựlựachọnnàychỉduynhấtmộtcáchlà ‘thờigiansẽminhchứng’, chỉcầnmìnhsốngtốtlàđược. Nhìncácbạnrời옥천, lybiệtcácconmàtôicảmthấyrấtđaulòng.
Vàtốtquyếtđịnhmìnhsẽkhôngimlặngnữa. Chúngtôicũnglà1thànhviêntrongxãhội, 1côngdâncủahuyện옥천, nướcĐạiHàndânquốc. Chúngtôicóquyềnlợi. Chúngtôiđãđồngtâmhiệplựcđứngdậyxâydựnglênhiệphộiphụnữditrúvớihơn100thànhviên. Đặcbiệtlànămnaythôngquahoạtđộngtìnhnguyệntôiđãbiếtđượcthêmđókhôngchỉlàsựđaukhổcủariêngmộtaiđó, khôngchỉlàvấnđềcủamộtcánhânmàđólàvấnđềvềnhânquyền, sựkìthịvàáccảm. Chúngtôiquyếtđịnhsẽtrởnênmạnhmẽhơn. Chínhsáchvềphụnữditrúkhôngphảiđiềuchúngtôimuốnphóthácvàohuyện옥천màđóchínhlàyêucầucủachúngtôiđốivớichínhquyềnđịaphương. Chúngtôisẽbỏphiếuchonhữngchínhtrịgiabiếtlắngnghevàphảnhồilạitiếngnóicủacácchịemphụnữditrúvàsẽgiámsátxemhọcólàmđúngnhưnhữngchínhsáchhọđưarahaykhông. Làmộthộitrưởngcủacộngđồnghiệphộingườinướcngoài옥천chúngtôisẽthựchiệnquyềnlợicủamình. Chúngtôisẽđấutranhđếnngàytiếngnóicủachúngtôiđượclắngnghe. Rấtmongtoànthểquývịhãycùnggắnbóvàủnghộchúngtôiđếnngàyđó.
Xinchânthànhcảmơ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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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부티탄화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들과 ‘우리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지면을 빌려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옥천군민 부티탄화입니다. 저는 베트남 타이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아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제가 태어난 곳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합니다. 제 피부색을 보며 제가 태어난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지, 제 집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그래서 얼마를 받고 시집을 왔는지, 지금도 베트남에 얼마를 송금하는지,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곤 합니다. 때론 저에게 ‘베트남’, ‘월남’이라고 부르고 처음 본 사이에도 반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편견은 집 밖에서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집 안으로 들어온 편견은 이주여성이 집에서 모국어를 쓰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아이와 대화할 수 없는 엄마가 됩니다. 이뿐 아닙니다. 이주여성을 집에 가둡니다. 이주여성이 가정폭력을 당하게 만듭니다. 한국어도 서툴고, 제도도 모르는 이주여성은 경찰도 옥천군도 외면한 사각지대에서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도망치게 됩니다.
저는 당사자이며, 제 친구들이 그런 일을 당해왔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살고 있는 것 아니며, 잘 살려고 왔다는 사실을 시간이 증명해주겠지, 나라도 잘 살면 되겠지 하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옥천을 떠나는 친구들을, 자식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바라보며, 그저 혼자 가슴 아파했습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 개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고유한 권리가 있습니다. 가족에 얽히지 않더라도, 이주여성 자체로 소중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려고 합니다. 함께 가기 위해, 우리는 옥천군이주여성협의회를 만들었고, 100명 넘는 이주여성의 뜻을 모았습니다.
특히 올해 책을 쓰는 작업을 통해 각자의 고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 혐오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린 더 당당해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이주여성 정책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관철되는 그날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날까지 함께 연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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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은 누구인가. 이들은 자신을 이렇게 명명했다. ‘가난한 집 맏딸’. 익숙한 단어다. 산업화 시기 급격히 빈곤해진 농촌사회에서 서울로 돈을 벌러 간다던 한국의 ‘맏딸’들이 꼭 그랬었으니까. 이들이 이주를 결심하게 된 건, 역사의 시계가 동일한 지점을 지나고 있을 때다. 개발도상국 위치를 점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신자유주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산업 발전을 추동하던 시기였다.
산업 발전의 그늘처럼, 농촌은 식량기지로 전락하고 빈곤율이 급증하던 시기. 하지만 90년대 세계화는 70년대 한국 상황과 다른 모습이었다. 도시에서 돈 벌어 농촌에 금의환향할 수 있는 퇴로가 막혔다. 세계화가 동남아시아 시장의 발전을 가로막는 유리벽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돈이 되는 산업’은 패권국에서 독점한다. 남은 자리는 제조업뿐이다. 이마저도 자동화에 밀리고 있는 상황. 도시에서 그야말로 장시간·고강도 노동에 시달려도 한 국가 내에서 빈곤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이동의 규모를 확장하는 이주는 거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된다. 이 와중에 동네에 ‘이주노동의 신화’가 펼쳐진다. 이주노동을 통해 송금해오는 돈으로 한 가정이 빈곤에서 탈출하는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빈곤층에게 고용허가제와 같이 1천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 대안은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국제결혼의 신화’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해외로 이주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한 가정을 살려내는 ‘효’이기도 하며, 딸이라도 잘 살게 하겠다는 부모의 ‘간절함’이기도 했다.
바다 4명 중에 첫째예요. 대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학비가 없었어요. 유치원부터 다 돈 내고 다녀야 해서 어렵거든요. 저 가난했어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도 학비 마지막에 내고 그래서 너무 창피했어요. 미운 마음만 있었죠. 그런데 커서 보니까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안 됐어요. 그래서 커서 돈을 많이 벌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계속 직장 다녔어요. 저 10프로만 쓰고 다 가져다 줬어요. 한 방에 4명이서, 한 침대에 2명이서 자면서. 나 그래도 동생들 좋은 자전거 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다가 동네에서 만난 아줌마가 한국 사람이랑 결혼하겠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여기 온 건 돈 벌려는 목적이었어요. 그런데 아빠 많이 반대했어요. 딸내미 파는 느낌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도 가서 일하면 돈 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동네에 고용허가제로 한국 와서 일하는 오빠들 집이 너무 잘 살아 보였어요. 그런데 비자 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그래서 나도 잘 살고 가족도 잘 살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한국 사람과 결혼했어요. 남편이 또 잘해줬어요. 그때 남편 처음 얼굴 보고, 10개월 떨어져 있는 동안 맨날 10분 넘게 전화했거든요. 통화료도 많이 나왔을 거예요. 저 한국말도 잘 못 할 때라 통화하면 그냥 오빠 뭐해, 밥 먹었어, 묻고 그랬죠. 어색하긴 했는데 계속 하니까 정이 들었어요.
나무 2006년. 그때 고등학교 졸업한 20살이었고요. 졸업하고 신발공장에 한 6개월 다니고 시집왔어요. 그때 좋아하는 애가 있긴 했어요. 너무 순수했죠. 우리 집에 일 있으면 도와주고 그랬고요. 저녁에 같이 산책도 하고 걷기도 하고. 좋은 기억이었어요. 그런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용돈도 못 주고 학비만 겨우 내주고 옷도 못 사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부모님이 한국 사람이랑 결혼하면 그래도 잘 살 거 같다고 말해서 결혼 생각하게 됐죠. 베트남 우리 동네에 어떤 언니가 한국에 시집왔어요. 그 언니가 소개시켜줬어요. 내 남편이 그 언니 시누이 남편이랑 친구였나 봐요. 그래서 소개해달라고 했죠. 저는 한국에 올 생각 없었거든요. 근데 엄마가 말하길 지식 있는 베트남 남자도 도박하고 그러는 사람도 있다고 했죠. 그냥 모르겠다 하고 사진 보냈죠. 그런데 한 달 뒤에 연락 왔어요. 남편이 온다고 했어요. 제가 회사 다니니까 시간 빼놓을 수 있냐고 물었어요. 그렇게 약속 잡고. 그때는 어떤 업체 통해서 왔어요. 아마 무슨 중간 업체 했나 봐요. 그때는 부모님하고 그 언니 부모님하고 결혼업체 사장님하고 같이 앉았어요. 그리고 남자 소개해줬어요. 형제 4명이고 건축업체 팀장이라고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남편 볼 때는 맘에 안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생각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 안 하려고 했는데. 나만 빼고 다 맘에 든다면서. 착하고 성실하다고. 그래서 그냥 만났죠. 엄마, 아빠는 남자가 착하고 나이 있으니까 더 챙겨줄 거라고 생각했지.
새벽 2006년에 외갓집 갔는데 그 소개시켜주는 데 있어요. 거기를 친구랑 놀러 갔는데 결혼 소리 들었어요. 저한테 장난으로 한국에 시집갈래 하고 묻길래 그냥 그래요 하고 전화번호 알려줬는데. 거기서 연락 와서 엄마한테 말했어요. 엄마는 나 시집가는 거 좋아했나 봐요. 뭐 광고 같은 거 보고 한국 가면 딸이 잘 산다고 생각했나 봐요. 우리 큰아빠 딸도 대만으로 시집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