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나는 왜 브랜드를 말하는가
199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광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명색이 광고 기획자라는 사람이 ‘브랜드’라는 것에 대해서 처음 생각하기 시작했던 때가 그즈음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코래드는 다국적 광고 회사인 오길비 앤 매더Ogilvy & Mather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당시 국제기획국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씩 한국에 왔던 오길비 앤 매더의 크리에이티브 총책임자 노먼 베리Norman C. Berry 선생과 꽤 많은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분께 브랜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브랜드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광고를 만드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던 당시 국내 광고업계의 현실 속에서 선생은 ‘single minded message가 중요하다.’는 한 문장으로 브랜드가 무엇인지 알려주셨다. 그런 관점과는 무관하게 광고 크리에이티브만 생각하는 업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퇴사 후 ‘KS, the Brander’라는 명함을 파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한동안 일했다. 이것이 내가 브랜드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이다.
개인의 성장사를 말하자는 건 아니다. 이렇게 맺은 브랜드와의 인연을 아직까지 중요하게 이어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어 앞 이야기가 길었다. 내가 광고 회사에 들어갔던 1989년은 광고라는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어제 티브이에서 보았던 주윤발 주연의 밀키스 광고를 화제로 삼았고, 초코파이의 ‘정’ 캠페인은 광고가 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광고를 잘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차를 몰아 어디로 가느냐보다 차를 얼마나 멋지게 모는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뜻이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그 두 가지는 크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차를 멋지게 몰면 대체로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가부장적 카피로 삼성전자의 VTR은 인기를 얻었고,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느닷없는 멘트 하나로 파워디지털 017은 브랜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던 시절이니 광고보다 브랜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별 매력이 없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21세기 들어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PC 통신으로 소통하던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고, 종이 신문이나 백과사전이 하던 역할을 포털이나 검색 엔진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온라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2007년 스티브 잡스는 인터넷이 탑재된 아이폰을 세상에 선보였고, 아이폰을 위시한 스마트폰은 빛의 속도로 삶 속으로 들어왔다.
당시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광고 미디어의 중심이 티브이에서 온라인과 모바일로 넘어갈 것이라 예측했다. 예측은 빠른 속도로 현실이 되었고, 당시 수많은 온라인 광고 회사들이 탄생했다. 나의 예측 방향은 좀 달랐다. 광고 미디어의 중심이 바뀌는 수준의 변화를 뛰어넘어 삶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라 내다봤고 이런 생각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온라인과 모바일의 생활화는 정보의 쌍방향 흐름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티브이 광고 카피보다 SNS나 온라인 제품 리뷰에서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얻기 시작했다. 광고는 점점 힘을 잃어갔고 소비자는 빠른 속도로 똑똑해졌다. 광고로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포장하는 일은 힘들어지고, 그럴 필요도 사라지고 있다.
마케팅이 시장을 흔들던 질풍노도의 50년을 지나 다시 본질의 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제대로 된 본질이 없다면 그 무엇의 도움도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뒤집어 말하면, 본질을 중심으로 브랜드를 잘 만들어가면 별다른 도움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특별한 기술과 뛰어난 아이디어를 제품이나 서비스로 만드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면서 본질이 훌륭한 브랜드의 묘목들이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다. 그들이 제대로 자라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려면 ‘별다르지 않은 도움’ 하나가 필요할 것이다. 브랜드의 개념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어쩌면 독자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해봤던 생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리 ‘별다르지 않은 도움’이라 고백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노먼 베리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렇게 옳고도 당연한 이야기를 나는 왜 이제야 알게 되었나?’라고 반문했었다. 그런데 당시 광고계 선배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면 대부분 콧방귀를 뀌었다. 나에게는 당연한 이야기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귀에는 시답잖게 들렸던 것이다. 아마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들릴지도 모르겠다.
좋은 본질을 가진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 당연한 이야기를 나는 왜 이제야 알게 되었나?’라는 반응을 얻고 싶은 것이 내가 브랜드를 말하는 이유이다.
내가 노먼 베리 선생을 만났을 때쯤 유행했던 맥심 커피의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나도 이 책을 통해 ‘가슴이 따뜻한 브랜드와 만나고 싶다’.
책 서문에 엔딩 크레디트처럼 등장하는 감사 인사는 생략하겠다.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다. 따로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도리일 것이다. 탈고의 기쁨을 수백 일의 새벽과 함께 나누고 싶다. 새들도 깨지 않은 그 새벽 시간들이 몇 주째 고민하던 주제를 떠올리게 해주었고, 엉망이던 글을 몇 번이고 고쳐 써서 글의 꼴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시간 늘 내 곁을 지켜주었던 반려견 산이의 명복을 빈다. (원고를 마친 2023년 8월 2일 마치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 세상을 떠났다.)
2023년 8월 버릇처럼 깬 새벽
이근상
“그럼 우리는 브랜드가 아니란 얘기네요?” 꽤 규모가 큰 기업과의 브랜드 관련 회의에서 담당 임원이 다소 격앙된 투로 말했다. 브랜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그 기업이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핵심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하자 나온 반응이었다. 회의 내내 그분은 각 사업부의 매출을 어떻게 늘려야 하며, 경쟁사의 활동을 어떻게 따라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도대체 그런 일들이 브랜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브랜드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회의를 주최한 쪽에서도 ‘하나의 핵심 가치’에 집중하는 일이 매출이나 기업 위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브랜드 캠페인을 준비하거나 진행하는 도중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일에 비하면 위의 사례는 프로젝트 시작 전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한참 일을 진행하다 보니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브랜드’라는 하나의 단어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이다. 브랜드가 지향해야 하는 하나의 인식을 만들기 위해 광고를 만들었는데, 그것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디테일을 수정하기도 한다. 수정 사항을 다 받아주다 보면 광고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게 된다. 브랜드의 방향성에 대해 동의한 이후에도 브랜드 슬로건을 좀 더 광고적으로 다시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수정의 방향성을 들어보면 당시 인기 있는 다른 브랜드의 슬로건처럼 ‘멋진 것’을 개발해 달라는 것이다. 정작 브랜드가 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내실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는데, 슬로건 하나로 브랜드를 띄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브랜드의 개념은 이해하고 있지만, 다양한 이유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례도 많이 경험했다. 사업 목표나 매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브랜드의 활동을 한 방향으로 집중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긴 하다. 당장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보이는데도 그것이 브랜드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기 힘든 일이 생기기도 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당장 해결하는 일이 장기적인 브랜딩보다 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단기적으로는 불가피해 보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브랜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예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브랜딩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상황보다도 더 브랜딩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면서 스스로를 브랜드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제품과 브랜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판매 촉진 활동과 브랜딩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잘 모르면서 브랜드, 브랜딩, 마케팅 등의 용어를 마구 쓴다. 이런 경우에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보다 투입되는 비용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루고 싶은 것과 하고 있는 활동이 다르니 효율적일 수 없다. 그리고 판매 촉진 활동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운동을 할 때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훈련을 하는 사람과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겉모습만 따라 하는 사람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원리를 모르고 하는 동작으로는 힘의 전달 효율성이 떨어져 제대로 된 파워를 내기 힘들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는 일은 가능할지 몰라도 고수의 길로 들어서는 일은 불가능하다. 브랜드가 아니면서 자신을 브랜드라고 착각하면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제품의 단계를 뛰어넘어 브랜드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진정한 브랜드가 되고 싶다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브랜드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한 것인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브랜드가 진정한 브랜드인지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음 10가지 질문에 답해 보자. 그중 몇 가지에 해당되어야 진정한 브랜드인가를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로 가는 길의 어느 부분에 당신의 브랜드가 위치해 있는지 판단하는 척도로 쓰면 좋을 것이다. 현재 위치한 곳에서 그다음 질문에 답하기 위한 행동을 준비하면 된다.
1. 당신의 브랜드를 잘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형용사가 있는가?
2. 그 형용사가 너무 범용적이어서 브랜드의 자산이 되기 어렵지 않은가?
3. 그 형용사는 경쟁 브랜드와 차별화된 인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인가?
4. 그 차별화된 인식은 소비자나 고객의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인가?
5. 차별화된 인식을 만들어가기 위한 (적어도) 3년 이상의 계획이 있는가?
6. 브랜드가 소비자의 삶과 성공적으로 연결된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가?
7. 브랜드에 관한 모든 의사 결정은 차별화된 인식을 기반으로 한 것인가?
8. 매출 증대를 위해 브랜드의 정체성과 무관한 활동을 한 적이 있는가?
9. 브랜드와 관련된 의사 결정 구조는 단순하며 일관성 있는가?
10. 조직 구성원 전체가 브랜드의 개념과 정체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나의 브랜드는 브랜드가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해 보라.
그 순간부터 제대로 된 브랜딩이 시작된다.
Q.
“식품 회사에서 일하다 나와서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했습니다. 대기업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밀키트와 관련된 일을 준비하고 있는데, 생산이나 물류 등과 같은 일에 집중하다 보니 브랜드나 브랜딩과 같은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막상 비즈니스 론칭을 앞에 두고 그런 일들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브랜드에 관한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브랜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브랜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명확하게 설명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저마다 생각하는 ‘브랜드’의 정의도 조금씩 관점이 다르다.
브랜드를 제대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일단 제품(또는 서비스)과 브랜드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해해야 한다. 개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공장에서 생산된(또는 현장에서 제공되는) 무엇인가가 제품이라면 그에 대해 소비자나 고객이 갖는 인식을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 패턴을 만들고 기능성 옷감을 이용해 만들어진 바람막이 재킷은 제품이고, 그 위에 붙은 로고(좁은 의미의 브랜드)와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인식이 브랜드이다. 그 인식은 제품과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 홍보 기사나 광고 등을 통해 수용된 메시지, 브랜드의 다양한 마케팅 활동 등을 통해 쌓인 것이다. 마치 바닷새가 나뭇잎, 지푸라기, 해초, 타액 등을 사용해 새집을 만드는 과정처럼 인식이 만들어지게 되고, 새집이 그러하듯 멀리서 보면 그 인식은 하나의 형태를 갖게 된다. 브랜딩이란 그렇게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일, 즉 새집과 같은 하나의 인식을 만들기 위해 브랜드를 키워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간 과정을 생략한 터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명제로 브랜드를 정리해 보겠다. ‘브랜드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사람을 키우는 일과 같다.’를 줄여 말한 것이다. 아이를 낳아 원하는 인간상으로 키워가는 과정이 브랜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드는 것은 아이를 낳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아이의 부모는 이 아이가 커서 어떤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꿈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브랜드의 비전, 즉 소비자나 고객이 이 브랜드에 대해 가지길 바라는 인식(desired perception)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교육과 동기 부여 등을 통해 ‘그렇게’ 성장하도록 지원한다. 이것이 마케팅과 브랜딩이다. 이 개념만 이해하고 나면 많은 문제들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다.
일본의 산악인 다쓰노 이사무가 만든 ‘몽벨’이라는 아웃도어 브랜드가 있다. 이 브랜드의 철학, 즉 꿈은 명확하다. ‘Light and Fast’이다. 산을 빠르게 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경량성이라 정하고 그에 적합한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에 적용시켜 몽벨을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011년, 이 브랜드의 국내 광고 캠페인을 맡았다. 기능성이나 품질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브랜드 인지도나 선호도가 상당히 낮았다. 시장 점유율이 낮으니 광고 등을 위한 마케팅 예산도 당연히 넉넉하지 않았다. 제품이 가진 기능성, 특히 경량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광고 예산이 넉넉한 메이저 브랜드들처럼 유명 모델이 산에 오르는 뻔한 광고를 해서는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PROVE’라는 캠페인 주제를 제안했다. 세 명의 일반 모델이 나와서 경량 재킷, 초경량 텐트, 접지력이 뛰어난 등산화의 기능성을 보여주는 단순한 형태의 광고를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만들었다. 캠페인은 성공적이었으며, 광고 이외에도 실제로 제품의 기능성을 소비자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PROVE Team’을 운영하면서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이 캠페인은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제품이 가진 특성의 일부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는 내부의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다른 브랜드들처럼 ‘유명 모델이 산에 오르는’ 광고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고 브랜드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그러한 노력은 십중팔구 자신의 특장점을 희석시키는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특히나 소비자의 취향은 점점 세분화․개인화해 가고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경쟁하는 브랜드의 숫자가 늘어나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팔방미인형 인간보다는 구체적인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밀키트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는 카테고리 중 하나이다. 우선 수많은 경쟁 브랜드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소비자에게 ‘어떤’ 밀키트를 제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만드는 일이 바로 브랜딩이다. ‘맛있는’, ‘좋은 재료를 사용한’과 같은 형용사는 브랜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 질문에는 아주 위험해 보이는 대목이 있다. “생산이나 물류 등과 같은 일에 집중하다 보니”가 바로 그것이다.
생산하는 제품의 특성과 물류 시스템의 구조는 어떻게 결정되었을까? 창업자의 사업 방향성이 구체적이어서 그것에 맞추어 제품 생산과 물류 체계 개발이 진행되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 방향성이 ‘잘’, ‘효율적으로’, ‘더 나은 방법으로’와 같은 것들이었다면 브랜딩의 과정은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창업자가 제품의 구체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고 비즈니스를 준비했다면 바로 그것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 관리에 관심을 가진 소비자를 위한 밀키트’를 만들겠다는 방향을 설정했다면 브랜드의 네이밍, 패키지 디자인, 제품의 종류와 구성, 유통 채널의 선택 등이 그 방향으로 집중될 수 있을 것이고, 자기 관리에 힘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차별화된 마케팅 아이디어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하나의 ‘멋진’ 인격체를 만드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과 ‘멋진’의 자리에 들어갈 자신만의 구체적인 형용사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용사가 목표로 하는 바가 달성될 수 있도록 모든 활동을 한 방향으로 집중하면 된다.
물론 사업을 운영하다 보면 다양한 변수로 인해 한 방향으로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루하루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효율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그 대응책에 대한 의사 결정 역시 정해진 방향성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브랜드를 키우는 일은 하나의 인격체를
성장시키는 일과 같다.
‘어떤’ 인격체로 키울 것인가 결정하고 그에 집중하라.
Q.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피자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선한 재료를 고집하며 어떤 피자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맛의 화덕 피자를 만들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 브랜드로 서울에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유튜브 강의를 보니 브랜드 DNA를 강조하던데, 그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왜 필요한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좋은 재료로 피자를 잘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것이 브랜드의 DNA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브랜드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떠올리면,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그대로 브랜드에 대입해 생각보다 쉽게 브랜드와 관련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다.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실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인식perception’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식’을 매개체로 소비자와 관계를 맺는 일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제품이나 서비스의 단계를 넘어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브랜드를 사람으로 치환해 보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는지 생각해 보자. 내 삶에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 ‘만날 때마다 맛있는 것을 잘 사주는 사람’, ‘곤란한 일을 척척 해결해 주는 사람’ 등의 긍정적 형용사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도 그 대상이고, ‘지적질을 일삼는 사람’, ‘밥값을 잘 내지 않는 사람’, ‘약속에 잘 늦는 사람’ 등의 부정적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사람도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전자와는 긍정의 관계를 맺고 후자의 사람들과는 부정의 관계, 즉 의도적 회피나 절연 등을 하게 된다. 나머지 큰 의미가 없는 사람들은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이다. 내 삶에 필요한 브랜드란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 같은 것이다.
DNA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키, 생김새, 마음씨, 행동 방식 등을 결정하는 유전자이다. 이것이 ‘인식’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브랜드에도 이러한 DNA가 반드시 필요하다. 고전적 마케팅에서는 이것을 브랜드 이미지, 브랜드 콘셉트, 포지셔닝 등으로 표현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굳이 DNA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실체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브랜드 이미지나 포지셔닝도 실체가 없이 만들어지기는 힘들지만, 실체보다는 어떤 인식이 마케팅에 유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1980년대 펩시콜라가 코카콜라를 이기기 위해(실제로 이겼다.) 자신들을 “the choice of next generation”이라고 자리매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과연 펩시콜라의 어떤 점이 젊은 세대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들이 대대적으로 펼친 광고 캠페인 이외에는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그 당시는 그런 것이 가능했다. 물론 지금도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나 마케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실체 없는 이미지나 자리매김은 지속되기 어렵다.
피자 레스토랑의 사례를 이야기해 보자. ‘좋은 재료로 제대로 만든 피자’는 훌륭한 실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좋은 인성을 갖추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말은 너무 옳은 말이어서 누군가의 캐릭터를 설명하기엔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내 인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특정하기도 어렵다. 점점 늘어나는 브랜드의 숫자는 소비자에게 좀 더 구체적인 선택의 이유를 요구한다. 왜 A 대신 B인가가 아니라 A-1이 아닌 A-36을 왜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라고 부르는 DNA는 ‘삶의 어떤 순간에 어떤 의미를 가진다.’라고 말할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소비자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좋은 재료로 제대로 만든 피자’를 판매하는 피자 레스토랑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내가’ ‘이 피자 브랜드’를 선택할 구체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피자의 형태(예를 들어 네모난 피자), 재료의 특이성(이를테면 산나물 토핑), 목표 소비자층의 구체화(비건용 피자)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실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작지만 중요한 실마리 하나를 찾아서 그것을 확대하고 강화해 자신만의 DNA로 만들어야 한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블랭크 스트리트 커피 Bla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