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푸크너Martin Puchner
하버드대학교의 바이런 앤드 애니타 윈 드라마 교수이자 영문학과 비교문학 교수이다. 베스트셀러 시리즈인 《노튼 세계 문학 선집(Norton Anthology of World Literature)》을 편집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온라인 대형 공개 강좌인 HarvardX를 통해 4,000년에 걸친 문학의 역사를 소개해왔다. 《글이 만든 세계(The Written World)》, 《혁명의 시(Poetry of the Revolution)》, 《도둑의 언어(The Language of Thieves)》, 《변화하는 행성을 위한 문학(Literature for a Changing Planet)》 등의 저서가 있으며 2017년에는 뛰어난 역량의 학자 및 예술가에게 수여되는 구겐하임 펠로십을, 2021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업적을 쌓은 연구자에게 수여되는 훔볼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옮긴이 허진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조지 오웰의 《조지 오웰 산문선》, 샐리 루니의 《친구들과의 대화》, 엘리너 와크텔의 《작가라는 사람》(전 2권),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 마틴 에이미스의 《런던 필즈》와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 나기브 마푸즈의 《미라마르》, 아모스 오즈의 《지하실의 검은 표범》 등이 있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
마틴 푸크너는 대담한 동시에 짜릿할 정도로 지적인 작가이다. 수천 년의 인류 문화를 조망하는 그의 여정은 흥미진진하고 눈을 뗄 수 없다. 문화의 교류와 차용이 얼마나 아름답고 필연적인지를 드러내는 이 역작은 점점 더 음울하고 폐쇄적으로 변하는 시대를 향한 완벽한 해독제이다.
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저자
마틴 푸크너는 특별하고 귀중한 재능을 가진 작가이다. 그는 대담한 지적 능력, 눈부신 박식함, 폭넓은 사고로 단련된 통찰력, 거대한 문제를 해결할 작은 실마리를 발견하는 인문주의자의 눈을 갖고 있다. 푸크너는 탁월하게 선택된 장면들 사이를 대담하게 뛰어다니며 문화적 변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변화는 우연적이고 연약하며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람과 사물과 사유를 교환하려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옥스퍼드 세계사》 저자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이 책은 숨 막히는 세계사 기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또한 우리가 과거를 판단하는 것처럼 언젠가 우리도 판단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무시하거나 지우려 하는 건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루이스 메넌드, 《메타피지컬 클럽》 저자, 퓰리처상 수상 작가
사상, 서사, 음악 등의 문화가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획기적이고 매혹적으로 분석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러한 문화가 어떻게 살아남고, 변화하고, 사라지고, 차용되고, 다듬어지고, 재조합되고, 접합하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행위는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세계적 명성의 교수에게 인문학 역사 강의를 듣는 것과 같다. 나는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앤서니 도어, 《클라우드 쿠쿠 랜드》 저자
마틴 푸크너의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체 덕분에 유려하고 매력적이며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책이 탄생했다. 문화의 상호 교류에 대한 경쾌한 찬사 이면에는 저자의 두려움이 담겨 있다. 분노에 가득한 후손들이 과거와 타지의 문화를 거부하고, 순환 대신 고립을 선택하는 파괴적이고 폐쇄적인 시대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월 스트리트 저널〉
전 세계 어디에서나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작품이다. 마틴 푸크너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인데, 그가 엮은 이야기는 거의 우화에 버금가는 구성을 자랑한다. 발단과 전개, 결말이 있고, 인물들에게는 동기와 야심, 그리고 승리와 비극이 있다. 각각의 장은 독자들이 다음 페이지로 빠르게 넘어가도록 만든다. 저자는 또한 명료하고 유려한 산문을 만드는 데에도 신경을 쓴다. 《컬처》는 탁월한 사유가 어떻게 서사 구조를 통하여 명쾌하게 표현될 수 있는 보여주는 사례이다.
〈보스턴 글로브〉
저자는 외국의 서사를 수입하여 자신들의 문화로 바꾼 긍정적인 사례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문화 혼합의 힘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일관성 있는 서사 구조와 공감을 자아내는 상상력으로 구성되었다.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
15개의 흥미진진한 연대기적 장을 통하여 푸크너는 문화의 접목, 차용, 저장, 재발견, 쇠퇴, 부흥을 탐구한다. 그의 목표는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고, 모든 독창성은 다른 곳에서 빌린 것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빌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빌리느냐이며, 빌린 것으로 무엇을 만드느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과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
인류 문화의 역사를 망라하는 거대한 책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문화적 전유의 가치와 필요라는 중심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일부는 유명하고, 일부는 생소한 15개의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이 책은 다소 용감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 매혹적인 책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문화를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자원으로서 중립적으로 대하는 시대가 진정 새로운 문화를 생산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하버드 매거진〉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 남아시아 여신의 조각상, 케이팝의 부상에 이르는 역사를 통해 마틴 푸크너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인문학이 어떻게 지식의 전 세계적 전파를 가능하게 하고, 문명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지 설명한다. 시간과 거리를 초월한 이들(가령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중국에 돌아온 현장법사)은 지금도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타임〉
흥미진진하다. 우아한 서술과 광범위한 지식으로 가득 찬 이 생생한 역사서는 표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조명한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마틴 푸크너의 새로운 책은 문화를 집단, 국가, 종교, 인종이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질책이다. 능숙한 이야기꾼인 저자는 모든 인류가 자신들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남의 것을 능숙하게 훔쳐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서사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뉴욕 타임스〉
수 세기를 흐르는 문화에 담긴 인간의 창의성을 세심하면서도 광범위한 시각으로 보여준다.
〈커커스〉
이 책은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가로지르는 여정으로 독자들을 데려가며, 언어, 예술, 음악의 전환점들에 대해 알려준다.
〈하버드 가제트〉
CULTURE: THE STORY OF US
Copyright © 2023 by Martin Puchner
All rights reserved.
Korean editon published in agreement with the author, c/o BAROR INTERNATIONAL, INC., Armonk, New York, U.S.A. through Danny Hong Agency, Seoul, Korea.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4 by Across Publishing Group,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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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은 볼드체로 표시했다.
• 인명 및 지명은 본토 언어를 기준으로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 및 표기 용례’를 따라 표기하되 ‘트로이’와 같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표기법이 있는 경우 그에 따랐다.
사랑받는 이에게
서문
문화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여기, 문화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 있다. 바로 지구에는 여러 인간 집단이 살고 있고 각 집단은 공통의 풍습으로 하나가 된다는 관점이다. 저마다 독특한 관습과 예술을 지닌 문화는 그 문화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것이자 외부의 간섭에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문화가 일종의 자산이며 그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유라고 가정한다. 이 관점의 한 가지 장점은 사람들이 유산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고, 미심쩍은 상황에서 취득한 물건은 정당한 소유자에게 돌려주도록 박물관에 압력을 가하는 등 유산을 지킬 기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민 배척주의자부터 외부인에게 문화적 자산을 침범하지 말 것을 언명함으로써 문화 전유를 막으려는 사람들까지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가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연합은 놀랄 만큼 광범위하다.
문화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은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 관점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인도에 가서 불교 경전을 가지고 돌아온 중국인 현장법사이다. 그리스 철학을 번역한 아랍과 페르시아 학자들도 이 관점을 받아들였다. 수많은 작가와 교사, 예술가 들이 자신의 문화와 멀리 떨어진 외부에서 영감을 찾으며 이 관점을 실행에 옮겼다. 우리 시대에는 나이지리아 작가 월레 소잉카를 비롯해서 유럽 식민주의 여파 속에서 작업해 온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관점을 지지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문화란 한 공동체의 자산으로만 만들어진다기보다 다른 문화와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또한 개개인의 직접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표현하게 만들어주는 차용된 형식과 사상으로도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자산으로서의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이 인물들이 침입자, 전유자, 심지어는 도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가 순환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았기에 겸손하고 헌신적인 자세로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갔다. 그들은 자산과 소유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한계와 제약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표현 형태가 빈약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컬처》는 위대한 저작을 찬양하는 책도, 서구 정전正典을 옹호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문화를 보는 관점은 그보다 더 난잡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더 흥미롭다. 문화는 접촉을 통해 결합되어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치고, 깨진 전통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서 혁신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관점을 옹호하는 인물들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중 몇몇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소수의 전문가들밖에 알지 못한다. 나 역시 확립된 정전 너머를 들여다보기 전, 이 책의 주인공들 손에 이끌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과 숨겨진 골목길로 들어가기 전에는 몰랐던 사람들이 많다. 내가 그들에게 배운 것은 착취적 관광을 제한하고, 다른 문화를 무례하게 이용하는 것을 피하고, 궁지에 몰린 전통을 보호하고 싶다면 자산과 소유권이 아닌 다른 언어를, 문화가 실제 작동하는 방식에 맞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의 업적으로부터 새로운 문화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서로 놀라울 정도로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끼치는 이야기이다. 항상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며 아름답게 그려서도 안 되지만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야기다. 문화를 만드는 종種으로서 인간의 역사,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들어가며
기원전 3만 5000년경 쇼베동굴에서
인간이 지구에 등장하기 오래전 남프랑스 쇼베동굴에는 물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은 침식되기 쉬운 석회암에 깊은 골짜기를 만든 다음 전부 빠져나가 아르데슈강 높은 곳에 동굴을 남겨놓았다. 방문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몇천 년 동안 곰 가족들이 깊은 굴에 들어가 동면했다. 곰들이 사라지고 나서는 늑대 한 마리가 다녀갔다. 한번은 아이벡스가 캄캄한 내부 깊숙이 들어가서 펄쩍 뛰어올라 쾅 착지하다가 좁고 작은 동굴로 미끄러졌다.1 아이벡스는 막다른 곳임을 깨닫고 겁에 질려 재빨리 뒷걸음질쳐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돌아서서 딱 멈추었다.
곰들과 늑대, 아이벡스가 동굴을 버린 뒤 인간이 처음으로 그곳에 들어갔다.2 횃불을 들고 들어가 서로 연결된 동굴들을 비춰보았더니 바닥이 놀랍도록 평평했고 땅과 천장에는 몇천 년 동안 물이 똑똑 떨어지면서 만든 기묘한 기둥이 자라고 있었다.3 깜빡거리는 불빛이 앞서 이 동굴에 거주했던 동물들의 자국을 드러냈다. 횃불을 든 자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먹고살았기 때문에 자국을 읽는 데는 선수였다. 36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어른 곰들이 잤던 자리가 움푹 파여 있었고 벽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은 자국도 있었다. 늑대도 흔적을 남겼고, 아이벡스의 불운은 부드러운 진흙 바닥에 깜짝 놀란 발자국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인간은 동물이 남긴 자국을 읽기만 하지 않았다.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면서 동굴을 새로운 환경으로 바꾸는 기나긴 과정이 시작되었다.4 인간은 곰이 그랬던 것처럼 동굴 표면, 즉 진흙이 얇게 덮인 오래된 석회암을 손가락이나 간단한 도구로 긁어 형체와 풍경을 새기기도 했다.5 그들은 앞서 동굴에 살았던 동물들을 기리듯이 곰과 늑대, 아이벡스의 실루엣을 그렸지만 표범과 사자, 매머드와 오록스, 순록과 코뿔소처럼 다른 동물들도 불러왔다. 홀로 또는 떼를 지어 배고픈 포식자에게 바짝 쫓기는 모습이었다.
새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이 꺼지면서 생긴 숯을 이용해 더욱 정교한 형체와 풍경을 그렸고, 때로는 진흙과 재를 섞어 윤곽 안쪽을 채우기도 했다. 동굴 벽은 평평하지 않았으며, 예술가들은 이 울퉁불퉁함을 이용해 갑작스레 모퉁이를 돌아 질주하는 말 떼를 그려서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 작품을 그리는 동안 점점 솜씨가 좋아진 예술가들은 사자의 주둥이나 말갈기를 점점 더 정확하게 포착해 냈다. 그들은 동굴 여기저기에 전략적으로 그림을 배치했고, 횃불을 든 사람들에게 최대의 효과를 내도록 종종 높은 곳에 그렸다. 어둑한 공간에서 횃불을 들고 움직이면 그림이 하나씩 나타나는 것이다.6
곰과 달리 인간은 동굴에서 살지 않았다(불을 피운 자리에서 동물 뼈와 같은 요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이 피운 불은 동굴을 밝히고 그림 그릴 숯을 만드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인간은 3만 7000년 이상 전에 이 작업을 시작했고 코뿔소, 아이벡스, 매머드 등 특정 동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한 공동의 감각에 따라 몇천 년 동안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3만 4000년 전 산 사면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입구가 봉쇄되었다.7 당시 동굴 안에 화가는 없었지만 이는 많은 세대에 걸쳐 이어진 작업과 인간을 단절시킨 재난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인간과 동물이 계속 동굴을 이용했다면 작품을 변형시키거나 파손했을 텐데 입구가 막히면서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쇼베동굴은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중심 역학을 보여준다. 아마도 인간은 아무렇게나 남겨진 곰의 흔적에서 영감을 받아 동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이 생겼고 세대를 거듭해 전해지는 의도적인 예술이 되었다. 이것이 곰과 인간의 근본적 차이다. 곰(과 동굴에 들어왔던 다른 동물들)은 찰스 다윈이 처음 설명했던 자연 진화 과정을 통해 발달했는데 그것은 몇십만 년, 심지어는 몇백만 년 단위로 측정되는 무척 느린 과정이다.
물론 인간 역시 느린 진화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우리는 또 다른 진화 과정을, 언어와 문화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과정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 과정은 유전자 변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정보와 기술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구성을 변형시키지 않거나 최소한만 변형시키면서 지식을 축적하고, 저장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도록 만들어주는 전파 과정이다. 이 두 번째 과정은 생물학적 진화보다 무한히 빠르며 그 덕분에 인간은 (생물량이 인간을 초과하는 지렁이, 미생물과 함께) 지구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이 될 수 있었다.
문화의 저장과 전파를 위해서 인간은 DNA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지식을 저장하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기억술, 즉 교육과 외부 기억 장치를 이용해서 지식을 전파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쇼베동굴이 바로 그러한 장치, 즉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누구도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는 곳이다. 각 세대 예술가들은 기술을 배우고 앞 세대 예술가의 작업을 이어받아서 계속했으며, 이전 세대가 만든 것을 보존하고 개선했다. 인간이 단 하나의 동굴에서 몇천 년 동안 같은 양식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초기 인류는 지식의 저장과 보존 그리고 사상 전파의 중요성을 무척 첨예하게 의식했다.
쇼베동굴 같은 곳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진 공동 작업을 통해 무엇이 전파되었을까? 인간은 처음부터 노하우know-how를, 즉 도구를 만들고 불을 피우는 기술과 같이 자연을 다루는 방법과 자연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하우가 점점 커져서 곡물 경작과 마침내는 과학 기반 기술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노하우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사원, 도서관, 수도원, 대학과 같이 지식을 보존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더욱 정교한 기관이 필요해졌다.
그러나 쇼베동굴 벽에 기록된 것은 노하우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술과 종교의 결합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더욱 가깝다. 동굴 예술가들은 여러 칸이 이어진 동굴 가운데 한 칸에서 제단 장식처럼 튀어나온 바위에 곰의 두개골을 올려놓았다. 이곳에서 행해진 의식의 흔적이다. 어느 그림에는 소의 머리를 가진 인간과 비슷한 형체가 여성과 얽혀 있는 모습을 그려놓기도 했다. 분명 다산과 관련이 있을 이 한 쌍은 포식자에게서 달아나는 짐승 떼 같은 다른 벽화들과 달리 창작자들이 사는 세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화를, 특히 중요한 이야기와 관련된 이미지를 재현한다. 또한 추상적인 기호들도 있다. 어쩌면 이 기호들 역시 그것을 동굴 밖 일상생활과는 무척 다른 상징적 질서의 일부로 만드는 이야기들이나 의식을 통해 의미를 획득했을 것이다.
두개골, 신화적 인물, 추상적 상징은 이 동굴이 의식, 빛의 효과, 이야기, 음악과 관련된 특별한 경험의 무대였음을 암시한다.8 선사 시대 동굴에서 피리와 타악기가 발견되었으며, 벽에 남은 표시의 일부는 특정 음향 효과를 내는 장소를 알려주어 가수와 음악가가 서야 할 위치를 가르쳐주었을지도 모른다.9 인간은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벽에 그려진 것처럼 포식자와 끊임없이 싸우는 바깥세상에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쇼베 같은 동굴들로 갔다. 이들이 동굴에 간 것은 노하우를 조금 더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다른 동물들과 특정한 관계에 놓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과 사는 무엇이고 기원과 종말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째서 우주와 자신의 관계를 이해할 능력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동굴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장소였다. 그것은 방법에 대한 지식 노하우know-how가 아니라 이유에 대한 지식 노와이know-why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굴 속 그림과 상징, 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다른 관습으로 발전했다. 노하우가 늘어나면서 인간은 거주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중 일부는 피난처로 사용했지만 일부는 의식을 행하고(사원과 교회), 공연을 하고(극장과 공연장), 이야기를 하는 특별한 경우에만 방문했다. 노하우를 발전시킬수록 우주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 우리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새로운 방법도 더욱 발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노하우의 이야기는 도구, 과학, 기술 그리고 자연계를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노와이의 이야기는 의미를 만드는 활동인 문화의 역사와 관련된다. 그것은 인문학의 영역이다.
쇼베에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몇천 년 후, 아마도 또 다른 산사태로 인해 동굴 입구가 잠시 드러났고 또 다른 인간들이 그것을 발견했다. 몇천 년이라는 간격이 있었기에 이들은 동굴에 처음 그림을 그린 예술가들과 무척 달랐다. 다른 문화 출신이라서 신화와 이야기, 의식, 상징,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달랐던 후대의 인간들은 아마도 머나먼 선조가 그린 정교한 그림을 보면서 지금의 우리처럼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들을 동굴로 이끌었다. 그들은 이 머나먼 과거의 이해할 수 없는 유적에 자신이 아는 문화를 적용하여 해석하려 애썼을 것이다. 심지어 기존 그림에 새로운 그림을 더해 동굴 속 작품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또다시 산사태가 일어나 2만 8000년 동안 동굴이 봉쇄되면서 이 풍성한 그림들을 숨기는 동시에 보존했다. 그 후 1994년이 되어서야 장-마리 쇼베가 이끄는 아마추어 탐험가들이 동굴을 발견했고, 현재 동굴의 이름은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산사태는 문화 전파가 얼마나 취약한지 알려준다. 문화 전파는 보통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소통에 의지한다. 생물학적 진화는 천천히 진행되지만 DNA에 적응 변화를 더욱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반면 문화 전파는 인간이 만든 기억과 교수법에 의존한다. 이러한 기법과 그 기법을 실행하는 기관은 사람들이 흥미를 잃으면 너무나 쉽게 쇠퇴하고 외부의 힘에 의해 파괴되기도 한다. 산사태 때문이든 기후 변화나 전쟁 때문이든 전파 통로가 끊어지면 지식은 사라진다. 동굴벽화와 같은 흔적, 한때 후대에게 무엇을 전파하고자 했는지 어렴풋이 알려줄 수 있는 물질적 유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지식은 사라진다. 동굴의 장식은 더 큰 문화의 파편, 설명이 없는 파편일 뿐이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이러한 흔적의 온전한 의미를 알려줄 공연과 의식, 신화가 빠져 있다. 그러나 흔적일 뿐이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흔적 덕분에 두 번째로 동굴을 발견한 사람들과 세 번째로 발견한 우리가 앞선 시대의 무언가를 엿볼 수 있다.
쇼베동굴에서 발견된 손자국의 네거티브 임프린트. 특정한 개인의 표식이 있다. (사진: Claude Valette)
동굴 예술가들은 진흙이나 염료에 손을 담갔다 빼서 벽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아마 곰이 남긴 흔적을 떠올리며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 바위에 손을 놓고 염료를 뿌려서 나머지와 확연히 구분되는 윤곽을 남기기도 했다. 몇몇 손자국은 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 만큼 독특하다. 이 자국들은 개인적 표현이다. 내가 여기 있었다. 내가 이 상징적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나는 미래를 위해 이 자국을 남긴다.
두 번째 사람들이 쇼베동굴의 입구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문화 전파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말해 준다. 바로 복원이다. 쇼베 이후에도 자연재해나 인간이 일으킨 재난으로 수많은 동굴과 사원, 도서관이 파괴되었다. 파괴 행위가 일어날 때마다 문화 전파의 통로가 하나씩 단절되었는데 만약 그 통로가 복원된다 해도 오랜 기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이는 두 번째로 쇼베동굴을 발견한 사람들처럼 인간이 그동안 잊혔던 문화 유적을 수없이 발견했다는 뜻이다. 이 경험은 무척 널리 퍼져 있고 놀라울 만큼 생산적임이 밝혀졌다. 고대 이집트는 대부분 머나먼 과거에 세운 거대한 피라미드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중국 문인들은 주周나라 왕조의 황금시대를 숭배했다. 아즈텍 사람들은 멕시코 분지에서 발견한 사원 유적을 귀중하게 여겼다. 근현대 이탈리아인들은 화산이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화산재로 덮어 그대로 보존해 놓은 폼페이에 매료되었다. 과거를 들여다보면서 이해하고, 심지어는 되살리려고 노력하자 종종 놀라운 혁신과 개혁이 일어났다.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본래 ‘돌아간다’라는 뜻이었다.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새롭게 복원된 과거를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탄생했고, 실제로 그렇게 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중국 학자 한유(768~824년)는 유교의 좋은 본보기를 잃었다는 생각에 불교를 거부하고 유교 고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10 그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옛 문헌을 되살린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비평과 해석, 교육을 확립한다는 뜻이었다. 근동에서는 철학자 이븐 시나(980~1037년)가 그리스 철학을 포함한 이슬람 이전 시대의 문헌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운동에 참여하여 이슬람 환경에서 다양한 지식 형태를 새롭게 종합했다.11
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몇몇 이탈리아 시인과 학자들이 고전 필사본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중 일부는 아랍 주해자들 덕분에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이 호기심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옛 필사본을 찾아서 편집하고 자신이 배운 것에 따라 자기네 문화를 바꿈으로써 잃어버린 세계(즉 그들이 잊고 있던 세계)를 서서히 발견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고전 지식이 잊혔던 시기에 중세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단절을 표시했다. 그 후 재탄생, 즉 르네상스가 이어졌다. 이러한 용어가 숨기는 것이 있다. 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예외적인 재탄생의 시대가 아니라 어렴풋한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의 파편들과 만나는 또 한 번의 경험일 뿐이며, 이른바 중세 시대나 암흑시대에도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화사 전체는 단절과 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저장, 상실, 복원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쇼베동굴 같은 곳에 아주 오래전 인간이 남겨둔 흔적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극장, 불교와 기독교 사원, 섬 도시 테노치티틀란(멕시코), 이탈리아 스투디올로와 파리의 살롱처럼 인간이 만든 문화적 공간까지, 또 현재의 우리가 과거를 맛보고 싶을 때 방문할 수 있는 박물관, 호기심의 방(진귀하거나 희귀한 물건을 수집해서 모아두는 방–옮긴이), 수집품 컬렉션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장소와 의미를 만드는 제도에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다. 이 모든 곳은 예술과 인문학적 지식을 생산하고, 보존하고, 변화시키고, 다음 세대로 전파하는 제도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제도는 조각과 그림부터 이야기, 음악, 의식儀式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저장 기법을 토대로 세워졌는데, 아마도 그중 가장 강력한 기법은 문자일 것이다. 다양한 쓰기 기술이 개발되면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필사 학교, 아랍의 도서관, 중세의 필사실(‘글을 쓰는 곳’), 르네상스 수집품, 계몽주의 백과사전, 인터넷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인쇄술은 중국에서 처음 개발되었다가 북유럽에서 재발명되었는데,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문자로 기록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림도 널리 퍼질 수 있었다. 문자와 인쇄술뿐만 아니라 구술 전통과 비공식적인 지식망도 오늘날까지 존속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두 번째 주요 방법이 되었다.
기억술과 저장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문화재와 관습은 계속 사라지고 파괴되고 버려지기 때문에 이후 세대는 자신들이 더는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일부만 엉터리로 보존된 문화적 표현을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쇠퇴와 상실로 인해 오해가 널리 퍼질 수밖에 없고, 새로운 세대는 과거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만들어낸다.
물론 전파의 단절과 오류는 한탄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의 진화를 멈추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는 생산적인 힘으로 작용해 새롭고 독창적인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생물학적 적응이 유전자배열의 (무작위적) 오류를 통해 진행되듯이, 문화적 적응은 전파 오류를 통해서 진행된다. 오류는 문화의 실험 방법이며, 이 덕분에 새로운 세대는 자신의 관심사를 과거에 투영하고 과거의 전승을 중요하게 여긴다.
문화 전파를 둘러싼 하나의 드라마가 보존, 상실 그리고 (종종 오류에 취약한) 복원이라면 또 다른 드라마는 여러 문화의 상호작용이다. 이는 전쟁과 침략뿐 아니라 교역과 여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새로운 문화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위대한 문명 가운데 일부는 다른 문명으로부터 차용함으로써 발전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어느 왕은 페르시아에서 기둥을 세우는 기술을 들여왔고, 로마인들은 그리스에서 문학과 연극과 신을 들여왔다. 중국인이 불교 경전을 찾으러 인도에 갈 때 일본 외교관들은 문헌과 건축 양식, 새로운 종교 예식을 배우러 중국으로 건너갔고, 에티오피아인들은 히브리인과 기독교 성경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아즈텍인들은 멕시코 분지에서 옛 문화들을 발견하여 차용했다.
문화 상호작용의 장점이 명확해지자 선견지명을 가진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상호작용을 장려했다. 일본 황제들은 중국으로 외교 사절단을 보냈고, 바그다드의 하룬 알 라시드는 지중해와 근동에서 지식을 흡수하여 지혜의 창고를 만들었다. 이러한 문화적 차용에는 항상 오해와 오류가 뒤따랐지만 오히려 생산적인 경우가 많았고, 새로운 형태의 지식과 의미 생산으로 이어졌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의 만남이 파괴, 절도,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유럽 식민지 제국주의의 부상이 그런 경우였다. 제국주의로 인해 세계 여러 지역 사람들이 문화적 자산을 비롯한 자산과 노동력을 빼앗아가려는 낯선 이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두 문화가 접촉할 경우 광범위한 폭력이 뒤따랐지만 공격받는 문화는 놀라운 저항 및 회복 전략을 만들어냈으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생물학적 진화와 달리 문화적 적응은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책에서 대략적으로 살피는 문화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수많은 교훈을 준다. 자연의 힘이나 방치, 고의적 파괴로 인해 중요한 기념물들이 사라지는 일이 점점 더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머나먼 과거의 지식을 추적해서 복원하는 일에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이다. 새로운 저장 기술 덕분에 텍스트와 이미지, 음악을 최소 비용으로 저장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같은 소셜 미디어의 도움으로 이렇게 저장된 콘텐츠를 더 편하게 그 어느 때보다도 널리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만들어진 문화 유물과 관습을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문화 콘텐츠가 풍성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된 파일 형식, 웹사이트,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없게 되는 속도 또한 가공할 정도로 빨라졌기에 과연 우리가 조상들보다 과거를 정말로 잘 보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문화의 저장과 배포 기술은 바뀌었지만 문화가 작용하는 방식, 즉 저장되고 전파되고 교환되고 복원되는 방식을 지배하는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의 거의 모든 문화가 끊임없이 서로 접촉하는 세상에서도 보존과 파괴, 상실과 복구, 오류와 적응의 상호작용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된다. 우리는 과거와 그 과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누가 문화를 소유하고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두고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싸운다.
우리는 독창성과 온전함, 전유와 혼합에 관해 논의하다가 때로 문화가 소유물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네주는 것이라는 사실임을 잊는다. 문화는 과거의 작은 파편들을 가져와 새롭고 놀라운 의미 생산 방식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이다. 이 책은 후대가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만든 고대 석주石柱를 훔친 술탄에 대해서, 역사에서 지워진 이집트 왕비를 발굴한 아랍의 고고학자에 대해서, 만들어진 방식과 상관없이 모든 지식을 수집한 칼리프에 대해서, 그리스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낸 그리스인과 로마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낸 로마인에 대해서, 십계명을 이용해 자기 부족의 기원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에티오피아 여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화사의 일화에는 항상 의미를 만드는 어려운 일을 힘들게 해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판단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겸손해야 한다. 쇼베동굴 이후 너무나 많은 것이 만들어졌지만 살아남은 것은 너무나 적다. 오만한 후대의 사람들이 당대의 종교적·사회적·정치적·윤리적 이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옛 문화 유물과 관습을 방치해서 그렇게 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라면 더 잘해 낼 수 있을까? 더욱 다양한 문화적 표현이 번성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문화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문화가 그 잠재력을 모두 실현하려면 종종 오류와 몰이해, 파괴가 뒤따른다 해도 과거와 그리고 서로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문화, 서로의 문화와 절연한다는 것은 문화를 살아 있게 하는 산소를 제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창작자는 미래를 믿는다. 미래에는 가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 해도 후대가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지 않으리라 믿는 것이다. 《컬처》의 목표는 우리가 인류 공동의 유산을 다음 세대로, 또 그다음 세대로 계속 전달하기 바라면서 인간이 하나의 종으로서 지금까지 만들어온 숨 막히도록 다양한 문화 작업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차례
그녀를 제일 처음 본 사람은 모함마드 에스-세누시Mohammed es-Senussi였다.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 에스-세누시와 일꾼들은 심하게 손상된 왕의 흉상을 파냈고, 그 근처에서는 부서지기 쉬운 조각들을 발견했다. 분명 평범한 발굴지가 아니었다. 가장 조심스럽고 숙련된 발굴자였던 에스-세누시는 이곳에 묻힌 섬세한 조각상들을 훼손할까 봐 다른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고 혼자 작업을 계속했다. 잔해가 1미터 정도 쌓여 있었는데 에스-세누시는 지금까지 여러 번 그랬듯 조심스럽게 괭이를 휘둘러 잔해를 치웠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한때 흰색이었으나 이제 낡은 티가 나는 넉넉한 튜닉 차림이었고 커다란 머리와 짧게 깎은 까만 머리카락을 모자로 덮고 있었다. 그가 동쪽 벽을 향해 천천히 작업을 진행하자 조각상 파편이 여러 개 나왔다.1
에스-세누시와 그가 이끄는 발굴단은 이 지역에서 1년 넘게 발굴 작업을 하다가 커다란 주택 유적을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조각상과 작은 입상, 부조가 많은 매장지였다. 에스-세누시가 지금 작업 중인 작은 방은 그런 유물들이 유난히 빼곡하게 들어찬 듯했다. 마른 진흙과 모래 속에서 더 조그만 파편들이 나오더니 놀랄 만큼 생생하게 채색한 실물 크기 조각상의 목 부분이 보였다.
에스-세누시는 괭이를 내려놓고 손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인상적일 만큼 키가 크고 비대한 사람의 특별히 섬세할 것 없는 손이었지만 그는 연약한 파편을 아주 세심하게 다룰 줄 알았다. 에스-세누시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조각상 주변을 더듬었다. 고깔 모양 왕관이 서서히 드러났다.
빽빽하게 묻혀 있는 다른 물건들을 먼저 파내야 했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에스-세누시는 얼굴을 바닥으로 향한 여성의 흉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조각상을 파내어 뒤집자 얼굴이 보였다. 에스-세누시는 3244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이었다. 1912년 12월 6일 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제 막 색칠한 것 같다. 뛰어난 솜씨. 설명하려 애써도 소용없다, 직접 보아야만 한다.”2
에스-세누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로 청동색 피부와 튀어나온 광대뼈, 타원형 눈, 통통하지만 날카롭게 그려진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입가에 주름이 살짝 있지만 미소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귀가 약간 부서지고 한쪽 눈이 없을 뿐, 흉상의 보존 상태는 기적에 가까웠다. 이름은 없었지만 왕관을 쓴 것으로 보아 에스-세누시가 들고 있는 것은 분명 왕비였다. 에스-세누시가 사람들을 불러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보여준 다음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는 왕비를 품에 안은 채 한 손으로는 무게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커다란 머리의 균형을 잡고 있다. 그는 무척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보물을 조심스럽게 내려다본다. 왕비는 그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불러일으킨 흥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으며, 자신이 가장 유명한 유물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또는 곧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조각가 투트모세의 복합 주택에서 출토된 네페르티티 흉상을 든 에스-세누시. (Universitätsarchiv, Universität Freiburg)
이 조각상은 당시 이어지고 있던 수수께끼의 일부였다. 이것이 발견된 알-아마르나는 고대 이집트의 두 거대 도시인 북쪽 멤피스와 남쪽 테베에서 각각 똑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알-아마르나 유적은 멤피스 근처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이나 테베의 궁전과 신전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한 세기 전에 건물과 무덤 터가 서서히 발견되었고, 고고학자들은 여기에 이름 모를 대도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3 에스-세누시가 발굴한 것과 같은 조각상들과 무덤을 보면 이 도시에 왕과 왕비가 살았으리라 추정되었다. 여러 해 동안 찾은 끝에 드디어 도시의 이름을 알려주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 에스-세누시가 발굴한 조각상은 고귀한 여인, 최고의 찬사를 받으시는 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여주인, 아멘호테프 4세의 아내 네페르티티 왕비였다. 이 신비로운 왕비는 누구일까?
이집트인들은 왕과 왕비를 기록으로 남겼으나 네페르티티도 아멘호테프 4세도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더 많은 수수께끼가 드러났다. 도시는 진흙 벽돌을 이용해서 빠르게 지은 것이 분명했고, 따라서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마도 도시를 건설한 이들에게 버림받은 듯했다. 또 다른 수수께끼는 네페르티티 흉상을 비롯한 이 도시의 조각상들이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조각상과는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완벽한 얼굴에서 왜 눈 하나만 없을까? 왕비의 한쪽 눈에 사례금이 내걸렸지만 에스-세누시를 비롯해 그 누구도 찾지 못했다.
한 가지 사실은 비교적 빠르게 밝혀졌다. 에스-세누시가 발굴한 것은 어느 조각가의 창고였다. 고대 이집트 조각가들은 자기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 복합 주택에서 발견한 마구馬具의 이름표에 투트모세라는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하여 투트모세는 드물게도 우리가 이름을 아는 고대 예술가가 되었다. 복합 주택의 크기로 보아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다. 복합 주택 전체가 담장에 둘러싸여 있고 출입문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아마 경비가 그 문을 지켰을 것이다. 큰 마당은 견습생이 사는 좁은 공간과 작업장 등 여러 건물과 이어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투트모세가 가족들과 함께 지낸 공간으로, 이 공간에서 이어지는 정원으로 나가면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물이 귀한 이 땅에서 우물은 무척 중요했다. 그의 생활공간 바로 옆에는 곡물 창고가 있었고 보리와 밀을 보관하는 대형 항아리가 네 개 있었다. 곡물로 1년 내내 가족과 작업장 일꾼들을 먹여 살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화폐 없는 경제에서 곡물은 황금처럼 부를 저장하는 역할을 했고, 물물교환으로 거의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4
투트모세의 저명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는 나일강의 번잡한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이 복합 주택의 위치다. 부두 앞에는 밀, 보리, 맥주, 가축 등 배로 운반한 각종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었다. 그 주위에 작업장이 밀집한 지역이 있었지만 투트모세의 복합 주택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의 집은 더 멀리, 거의 시내 가장자리에 위치한 조용한 거주 구역에 있었다. 그의 작업장 뒤로 멀리 떨어진 곳에 일꾼들의 마을이 있고, 그 옆에는 힘들게 석재를 자르는 채석장이 있었다. 작업장에서 네페르티티의 다른 조각상들도 발견된 것으로 보아 투트모세는 왕비의 특별한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세누시 같은 발굴자들의 끈질긴 작업 결과 이집트 역사상 가장 독특한 이야기가 서서히 밝혀졌다.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테베(현재의 룩소르)에서 자랐는데, 당시 테베는 주민이 8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테베는 북쪽의 나일강 어귀부터 남쪽의 테베까지 약 1290킬로미터에 걸친 이집트 중심부의 남쪽 거점이었다. 한때는 수단과 교역하는 장소에 불과했지만 네페르티티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수도가 되었고, 커다란 신전들은 스핑크스가 늘어선 대로와 거대한 기둥을 뽐냈다. 파라오와 귀족들은 몇백 년째 강 건너 왕들의 계곡에 매장되었다.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에게는 테베에서 자란다는 것이 역사의 후대로서 과거의 기념물들 사이에서 자란다는 뜻이었다.
테베 어디에나 고대 역사가 존재했지만 이집트 북쪽 끝 기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왕국의 왕들은 1000년도 더 전에 그곳에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 개 지었고, 그중 하나를 거대한 스핑크스가 지켰다. 사실 이집트의 거의 모든 것이 과거의 무게를 느끼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집트는 다른 어떤 문화권보다도 시간을 거스르는 일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했다. 파라오뿐 아니라 귀족 그리고 여유가 되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신전과 묘실 건설에 동원된 일반인들의 열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산을 파서 만든 무덤과 피라미드 안쪽 깊숙이 숨겨진 묘실에는 음식부터 나체의 여성까지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전부 갖추어놓았다.5 지금까지 모든 인간 사회는 죽은 이를 매장하고 기억했지만 이집트에서는 죽은 이를 매장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보존했다.
아멘호테프 4세의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는 이 같은 과거 숭배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멀리 메소포타미아까지 수많은 속국을 가진 통일 이집트를 물려받았다. 막대한 자원을 가졌던 아멘호테프 3세는 테베 북부의 거대한 고대 카르나크 신전을 중심으로 야심 찬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6 과거의 기념물은 복원하는 것이 의무였기에 그는 카르나크 신전의 일부를 복원했다.7 단순한 복원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아멘호테프 3세는 더욱 웅장한 양식으로 신전들을 다시 지었고, 거대한 주랑이 있는 고대 룩소르 신전도 그중 하나였다.
기원전 1351년 아멘호테프 3세가 세상을 떠나자 규정에 따라 아들 아멘호테프 4세가 아버지의 미라 작업과 매장 의식을 주재한 다음 왕좌에 올랐다. 그는 네페르티티와 결혼하고 그녀를 정비로 지정했다. 파라오에게 결혼은 일종의 정치였기에 그때까지 수많은 파라오들이 자기 누이나 친척과 결혼해 정비로 삼은 다음 유익한 동맹을 맺기 위해 외국 공주들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네페르티티는 왕족이 아니었지만 권세를 가진 서기이자 행정관인 아이Ay의 피후견인 또는 딸로 자랐다.8 이집트 궁정은 강한 여성에게 익숙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어머니는 막후의 실세였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궁정에서 영향력을 휘둘렀다. 아멘호테프 4세가 즉위하고 네페르티티와 결혼함으로써 혈통의 영속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는 영속에 관심이 없었다. 두 사람은 적어도 건물과 제도에 있어서만큼은 전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먼저 그들은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이자 주요 신 아몬에게 바친 카르나크 신전을 전략적으로 무시했다.9 아몬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들은 영향력이 무척 컸다. 아몬 신이 사는 신전을 무시한다는 것은 권력의 핵심을 겨냥한다는 의미였다.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는 한발 더 나아가 비교적 중요하지 않았던 아톤 신을 격상시켰다. 몇 년이 지나자 아몬 신과 거대한 신전이 중심을 차지하던 테베의 구질서가 뒤집히고 새로운 아톤 신 숭배가 중심 무대를 차지했다.
다신교를 믿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이 변화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몬 역시 초기의 두 신이 합쳐져서 탄생했다.) 그러나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변해야지 이렇게 폭력적으로 아몬을 끌어내리고 아톤을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는 이 갑작스러운 역전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른 신 모두를 무시했고 점차 아톤만이 중요한 신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구질서와 이해관계로 얽힌 모든 사람, 이를테면 아몬 신의 수많은 사제들뿐 아니라 대다수 지배 엘리트까지 불만을 품고 반격했다.
이렇게 권력 다툼이 한창일 때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는 급진적 결정을 내려 모든 것을, 신전, 조상이 묻힌 무덤, 아몬에게 바친 수많은 기념물을 비롯해 과거의 기념물로 점철된 도시 전체를 버리고 떠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조각가 투트모세를 포함해 궁정 전체를 챙겨서 배에 올랐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 나일강 하류로 약 320킬로미터 내려갔다.10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가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정착지가 아예 없고 한 면은 나일강에, 다른 세 면은 위압적인 절벽에 면한 사막뿐이었다.11 새로운 도시는 독특하게도 허허벌판에 세운 계획도시가 될 예정이었다.
새로운 도시는 과거의 짐에서 해방되어 도시의 이름을 따온 새로운 신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아케타톤Akhetaten, 즉 태양(아톤)의 지평선이었다. (현재의 명칭인 아마르나는 이후 그곳에 정착한 부족에서 따왔다.) 아톤 대신전과 소신전을 중심으로 도시를 세우고, 대궁전이 두 신전 사이에 위치했다. 이 상징적 일직선 주변을 나머지가 둘러쌌다. 태양의 지평선 아케타톤은 정확한 기하학적 축을 가진 새로운 도시였고, 신전과 정부 건물은 직각을 이루었으며 작업장과 일꾼들의 마을 위치도 확실하게 계획했다.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는 옛 수도를 버렸지만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않았다. 도시 전체를 건설하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어느 모로 보나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만큼 거대했다.
그러나 기자와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모든 일이 빨리 진행되어야 했으므로 당장 이용할 수 있도록 서둘러 싸게 만들었다는 점이다.12 그 결과 거의 모든 것을 진흙 벽돌로 제작했고, 기둥과 커다란 신전에만 석재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궁전이 우아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궁전 벽을 정교하게 장식했고, 왕의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네페르티티는 왕족이 아니라는 점뿐 아니라 남편과 같은 침실을 썼다는 점에서도 독특한 왕비였다. 이것은 어쩌면 두 사람이 온 나라를 뒤흔든 혁명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13 이 지역은 이집트 중에서도 특히 물이 부족했지만 궁전이 강가에 위치했기 때문에 네페르티티와 아멘호테프 4세는 바람을 즐길 수 있었다. (네페르티티는 수많은 이집트 왕비들처럼 머리를 밀었기 때문에 사막의 열기 속에서 조금 더 시원하게 지낼 수 있었고 상황에 맞는 가발을 쓰기에도 용이했다.14) 아멘호테프 4세는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조상들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에게 아케나톤Akhenat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페르티티는 이름을 바꾸지 않았지만 태양 또는 원반이라는 단어(아톤)를 덧붙여서 네페르네페루아톤Neferneferuaten이 되었다. 아톤의 아름다움은 완벽하다는 뜻이었다.15 왕과 왕비는 새로운 신에게 새로운 신전을 바쳤고 새 도시를 절대 떠나지 않기로 맹세했다.
석회암으로 만든 아케나톤 습작. 아케타톤 시대에는 길쭉한 머리와 튀어나온 코가 일반적이었음을 보여준다.(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새로운 양식으로 표현하려 했다. 따라서 투트모세처럼 새로운 일을 수주하고 싶었던 조각가들에게 새로운 도시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각적 재현 방식이 아무 변화도 없이 몇백 년 동안이나 그대로 이어졌다.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관 장식과 묘실 장식은 물려받은 레퍼토리였다. 파라오들은 3차원의 조각에서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고 2차원의 부조에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특징적인 옆얼굴을 드러냈다. 조각가와 화가에게는 혁신이 권장되지 않았다. 독창성은 가치가 아니라 실패였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투트모세와 동료들은 전통에서 벗어나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이 조상들과는 다른 통치자임을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었으므로 다른 예술 양식이 필요했다. 새로운 양식은 현대의 눈으로 보면 종종 과장되고 기이해 보인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의 옆얼굴을 보면 턱과 입이 길쭉해서 개의 주둥이를 닮았다. 머리는 앞으로 내밀었고 목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다. 가장 이상한 것은 역시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어 보이는 뒤통수이다. 에스-세누시가 발굴한 투트모세의 네페르티티 채색 흉상 역시 이러한 특징에 따라 기다란 왕관을 쓴 채(그 아래 숨겨진 머리 모양이 어떤지 누가 알겠는가) 긴 목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또 다른 혁신은 아케나톤을 양성적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그는 종종 가슴과 넓은 골반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19세기 고고학자들은 그를 여성으로 착각하곤 했다.16
이집트 미술과 조각은 자연주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이 옆으로 걸었다고 믿을 이유가 없듯이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이 실제 조각상처럼 생겼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17 고대 이집트에서 회화와 조각은 글에 가까운 것으로, 매우 추상적인 시각적 의사소통 체계였다. 상형 문자 역시 생각과 소리의 조합을 나타내는 표준화된 이미지였으므로 이집트인은 회화, 부조, 조각상을 상징적으로 읽는 것에 익숙했다. 예를 들어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의 쭉 뻗은 머리와 길쭉한 얼굴은 왕관을 쓸 운명이었던 것처럼 왕관 모양에 딱 맞는다고 볼 수도 있다. 또는 왕족이라는 신분이 제2의 천성이 되어 사람들과 생김새가 달라졌기 때문에 머리가 왕관 같은 모양으로 변했다고 볼 수도 있다. (피부색 역시 자연주의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집트 예술가들은 밝은 갈색부터 거의 검정에 가까운 색까지 다양한 색을 썼지만 표현하는 인물의 인종과는 상관없었다. 이는 이집트인들이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생물학적 인종 개념과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집트어를 말하고 이집트인처럼 살면 누구나 이집트인이었다.18)
태양신 아톤의 빛을 쬐는 아케나톤, 네페르티티, 세 딸. 석회암 부조.(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 이집트관. 사진: Gary Todd, World History Pics.com)
새로운 이미지는 또한 새로운 신 아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했다. 다른 신들은 보통 매개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도시에 굳건히 자리 잡은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그러한 체계를 버리고 그들의 신 아톤과 다른 모든 사람을 잇는 유일한 매개자로 직접 나섰다.19 두 사람은 여러 이미지에서 아톤의 빛을 듬뿍 쬐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생명을 주는 신의 힘을 직접적으로 받는 유일한 인간들이었다. 또 두 사람의 자녀가 등장하는 이미지도 많은데 흥미로운 가족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 역시 무척 예외적 일이었다. 귀족들 집에서 발견된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의식을 행하는 일종의 성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0
투트모세가 만든 네페르티티 흉상 역시 비슷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조수와 견습생들에게 왕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형으로 이용되었을 개연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한쪽 눈은 투트모세가 자기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남겨두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에스-세누시는 투트모세의 집터에서 여러 가지 모형과 미완성 작품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보면 석조 조각상이 만들어진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투트모세는 먼저 밀랍이나 진흙으로 얼굴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아마도 네페르티티에게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 석고상을 만들었고, 그다음에야 돌에 조각을 새겼다.21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모형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무척 대칭적인 이유도 설명된다. 대칭을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 모형은 투트모세를 비롯한 조각가들이 완성한 네페르티티의 조각상들과는 무척 다르다. 조각가들은 손가락 너비로 비율을 측정했는데, 네페르티티 조각상은 그러한 측정 체계에 딱 들어맞는다.22 이는 네페르티티 흉상이 일종의 추상임을 암시한다. 즉 왕비를 묘사한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작풍과 상징적 의미를 전부 제거한 시연용 모형인 것이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의 새로운 이미지들은 아톤을 새로운 신, 즉 새로운 종류의 신으로 상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 아톤 역시 새로운 시각적 형태로 표현해야 했다는 뜻이다. 아톤은 본디 매의 머리를 가진 신이었지만 점차 태양 같은 원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이 생각을 더욱 밀어붙여 빛 자체로 아톤을 나타냈다.
이러한 추상화 과정은 시각적으로 나타낼 수 없었고 따라서 새로운 신은 궁극적으로 조각이 아닌 글로 표현되었다. 그것이 바로 아케타톤의 어느 묘실에 새겨진 〈아톤찬가〉이다. 보통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의 서〉 구절을 새기는 위치에 이 찬가가 대신 새겨져 있었다. (아케타톤의 일부 개인 무덤에는 〈사자의 서〉 151장의 주문이 새겨져 있다.)23 다른 찬가들이 초기 태양신에 대한 칭송, 즉 어둠의 패배와 멋진 일출, 우울한 일몰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듯 이 찬가는 아톤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곧 한 걸음 더 나아가 아톤을 식물과 동물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살리는 존재로 격상시킨다. 아톤은 다음과 같은 신이다.
여자의 몸 안에서 씨가 자라게 하고
정자에서 사람을 만들어내고
어미의 자궁에 들어 있는 아들을 먹이고
아들을 달래 눈물을 멈추네.
자궁 속의 유모,
숨결을 주시는 분,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키우시네.24
아톤은 모든 것을 키우며, 모든 호흡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서 생명 그 자체를 키운다.
찬가는 아톤을 추상화하고 그에게 권능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아톤은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땅 자체를 창조한 신이다. “당신 혼자서 스스로 원하는 바와 같이 땅을 만드셨네/모든 민족과 모든 동물과 모든 무리를.” 아톤은 창조주로, 다른 신의 도움도 없이 모든 것을 혼자서 만들었다. 일신교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여러 신이 나란히 존재하면서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는 다신교에 익숙한 사회에서 이러한 생각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톤찬가〉는 아케나톤이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가 아톤과 무척 밀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듯한 생각이지만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서기와 관련이 있던 네페르티티가 썼을 가능성도 있다. 과거에 왕족의 아내들은 보통 종교 의식에서 작은 역할이나 기껏해야 종속적 역할을 수행했지만 아톤 숭배에서는 네페르티티의 역할이 남편의 역할과 동등했다.25 흥미롭게도 〈아톤찬가〉는 애초에 여성의 육체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 안의 생명에 영양분을 제공하고 먹여 살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심지어 출산 과정까지 설명한다. “아이가 태어난 날/숨을 쉬려고 자궁에서 나왔을 때/당신은 그 입을 벌리고/필요한 것을 주었네.” 아톤은 점점 더 초월적 신으로 변하지만 여기서는 그가 태어난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모습이 자세히 그려지는데 경험이 있어야만 이를 묘사할 수 있다. 〈아톤찬가〉는 “위대한 왕비”, “두 땅의 여인/영원히 죽지 않는 네페르네페루-아톤 네페르티티” 네페르티티를 부르면서 끝난다.
아케타톤에서 일어난 예술 혁명은 의미 생산 연합체로서 예술과 종교의 밀접한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과거를 살펴볼 때 현재의 생각과 범주를, 사실 그것을 인식도 못했을 사회에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과 종교의 구분이 그중 하나로, 바로 예술을 종교에서, 종교를 예술에서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케타톤 혁명은 머나먼 과거에서나 오늘날의 수많은 사회에서나 의미 생산이 예술과 신앙이라는 깔끔하게 구분된 영역을 넘나드는 근본적 질문들과 관계된 활동임을 보여준다.
아케타톤 혁명은 갑자기 시작된 것처럼 갑자기 끝이 났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이집트 제국의 유지보다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과 새로운 신의 숭배, 새로운 조각상 의뢰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점차 군사적 도움이 필요해진 속국들이 전역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주로 당시 중동의 공용어였던 아카드어로 점토판에 적은 설형 문자 편지였다. 테베의 숙적들은 분명 두 사람의 무관심을 이용했을 것이다.26
여기에 질병까지 덮쳤다. 밀집된 도시 생활로 인해 결핵, 말라리아, 그 밖의 이름 모를 전염병이 이집트를 휩쓸었다. 혹자는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이 전염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염병은 그들을 따라갔고 곧 새로운 도시에도 전염병이 돌았다.27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이러한 재앙에도 새로운 도시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꿋꿋하게 지켰다. 아케나톤은 세상을 떠난 뒤 의식에 따라 매장되었으며, 그의 육체는 미리 지어둔 왕족의 무덤에 보존되었다. 아케나톤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기에 전통적 방식으로 영원을 생각했다. 그는 어쩌면 새로운 도시가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더욱 영구적으로 재건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파라오가 세상을 떠나면 늘 그렇듯 후계가 중요한 문제였다. 아케나톤의 뒤를 이은 두 파라오는 각각 1년도 통치하지 못하고 금방 세상을 떠났다. 네페르티티가 그중 하나였다는 추측도 있다. 아직 어렸던 아케나톤의 아들 투탕카톤Tutankhaten이 고위 서기이자 행정관인 아이의 지도하에 왕좌에 오르자 정세가 안정되었다(아이는 훗날 직접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안정을 위해서는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이 만든 모든 것을 되돌려야 했다. 투탕카톤은 아버지의 신앙을 버리고 아몬 신에게 돌아갔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름을 투탕카몬Tutankhamun으로 바꾸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궁정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테베로 다시 옮겼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아톤 숭배를 전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으며, 20세기 초 극적으로 발견된 그의 무덤에서는 아버지의 비범한 실험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아톤의 그림도 나왔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아톤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궁정이 이전하자 다른 사람들도 이 척박한 사막 지역에 살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아케타톤은 점차 버려졌다. 왕가의 후원으로 먹고살던 투트모세가 아케타톤을 떠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고,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남겨둘지 신중하게 선택했다.28 미완성 작품의 석고상은 쓸모가 없으므로 큰 비용을 들여 테베나 멤피스로 가져가지 않았다. 미완성이든 완성이든 아케나톤과 아톤의 조각과 부조는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역시 남겨두었다.
아름다운 네페르티티 흉상 모형도 마찬가지였다. 투트모세는 그 이후로 이 흉상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비율을 측정하는 정확한 방법을 견습생들에게 보여주지도, 얼굴에 눈을 그려 넣는 법을 시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혁명적이었던 왕과 왕비를 섬긴 세월을 기리며 모든 조각상을 조심스럽게 창고에 넣고 벽을 세워 봉했다. 궁정은 아케타톤과 이 도시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투트모세는 자신이 두고 가는 작품들이 약탈자들 손에 더럽혀지기를 원치 않았다. 네페르티티 흉상은 그렇게 봉해진 창고 안에 안전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다 목조 선반이 부서지면서 그 위에 놓여 있던 흉상이 땅에 떨어졌고, 나일강이 실어온 진흙이 그 위에 조금씩 쌓였다. 다행스럽게도 진흙은 3000년 동안 흉상을 보존했고, 마침내 에스-세누시가 크지만 섬세한 손으로 진흙을 치우고 흉상을 뒤집어 놀라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를 없애는 일은 쉽지 않다. 때때로 과거는 몇천 년 동안 지하에 묻힌 채 다시 발굴될 날을 기다린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이집트의 통치자와 서기들은 이집트 제국의 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변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반정착민 유목 집단들은 자신의 운명이 이집트 대군주들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러한 집단 가운데 하나가 특히 이집트가 큰 역할을 한 자기 민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라는 목동이 등장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다. 의욕이 넘치고 부지런한 일꾼이었던 요셉은 이집트 제국에서 출세하여 결국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다. 그는 자원을 신중하게 관리하여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파라오의 관심을 끈다.
요셉이 비축을 활용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집트가 저장 혁명에서 이익을 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장 혁명의 바탕에는 농업이 있다. 인간은 이를 통해 도시에 정착하고 붐비는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수자원뿐 아니라 영양분 가득한 범람원까지 제공하는 나일강은 이러한 새로운 생활 방식에 완벽했다.
곡물과 여타 식량의 저장으로 또 다른 종류의 비축, 즉 부의 비축이 가능해졌다. 유목 민족은 비교적 평등했으며 지도자가 있긴 해도 부의 차이는 사람들이 등에 지거나 말에 싣고 다닐 수 있는 것에 국한되었다(물론 말을 여러 마리 가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저장 혁명이 일어나면서 원칙적으로는 부의 차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었다.29 땅과 노동력을 통제하는 사람은 곡식을 저장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 것이 가능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요셉은 저장의 힘을 이해했고 파라오를 설득해서 풍년이 들면 흉년에 대비해 곡물을 저장하도록 했다. 가뭄이 닥쳤을 때 요셉은 이집트인들을 먹이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힘든 시기가 오자 요셉은 동족 유목민을 가나안에서 이집트 중심부로 데려와 정착시켰다. 요셉이 사망하자 지위에 걸맞게 이집트식으로 방부 처리된 후 매장되었다.
요셉이 죽고 우호적인 파라오까지 세상을 떠난 후 이집트는 외국인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그중에서 모세라는 이는 다행히도 새로운 파라오의 양자가 되어 왕족의 일원으로 교육받고 특권을 누렸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파라오를 설득해 동족들과 함께 선조의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받았으며 그때부터 동족과 그들의 유일신 종교를 이끌었다.
이집트 서기들이 남긴 많은 기록 어디에도 가나안 출신 목동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 기록이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드넓은 이집트 제국의 변방에서 온 반목축민은 파라오들과 국무 기록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왔다가 갔다. 이집트인은 민족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외국 여성과 결혼하고 외국인 노예를 샀다. (혹자는 네페르티티라는 이름이 ‘아름다운 이가 왔다’라는 뜻으로 그녀가 외국에서 왔음을 의미한다고, 그녀가 메소포타미아 출신일지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목동들과 이집트 군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목동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도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작은 왕국을 건설한 뒤 후대에 남긴 글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 글이 바로 히브리 성경이다.30
그들의 성경에 따르면 이 집단의 두 중요한 인물, 즉 모세와 요셉은 이집트의 행정관이자 서기이다. 이집트어로 ‘어린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모세는 전통에 따라 자기 민족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인물로, 문자와 상관없는 생활을 했던 집단에 이집트의 필경 문화를 도입했다.
히브리 성경에서 정의하는 종교는 유일신을 바탕으로 하며 당시의 그 어떤 종교와도 무척 달랐다. 그러나 네페르티티의 단명한 신 아톤은 유일한 예외다.31 무척 밀접하게 연결된 두 문화가 일신교라는 형태로 당시에는 무척 새로웠던 실험을 한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물론 이집트의 기록에는 아톤 숭배 실험이 삭제되어 있다. 히브리 성경은 (이집트가 모세와 요셉의 삶에서 크나큰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지만) 자기 민족이 이집트에서 독립한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을 터이며, 이집트 모델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차용이 발생한 후 그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19세기 말에 아톤 숭배 실험이 세상에 알려진 후 많은 문화계 인물들이 아톤 숭배와 유대교의 연관 가능성에 흥미를 느꼈다. 노벨상 수상 작가 토마스 만은 10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하여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를 네 권짜리 소설로 썼고 요셉을 아케나톤의 궁정 인물로 만들었다.32 동시대의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한발 더 나아가 모세가 이집트인이라고 주장했다. 아톤 숭배 실험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모세가 아케나톤 사망 후 망명하여 가나안 사람들의 유일신교로 개종했고, 그 신앙이 천천히 변해서 우리가 아는 유대교가 되었다는 것이다.33
나는 그렇게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 투트모세 같은 조각가들이 만든 아톤 숭배는 급진적이기는 해도 유대교와 그 뒤를 잇는 기독교나 이슬람에서 우리가 연상하는 일신교와는 전혀 달랐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다른 신들을 무시했지만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히브리 성경의 첫 번째 계명처럼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다.34 유대교와 달리 아톤 숭배는 일반인의 의무가 아니었으며 궁정 신하들과 엘리트 계층만의 의무였다(일꾼들 집에서는 네페르티티나 아케나톤, 아톤의 조각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이집트 신을 섬기는 이들은 새로 지은 수도 바깥에서 숭배를 계속했다.
또한 우리가 아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아톤 숭배 실험에는 신의 묘사를 금지하는 급진적인 법이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조각가들이 아톤의 빛을 듬뿍 쬐는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을 묘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문헌, 즉 성경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이집트는 일부 문헌을 신과 연관시켰지만 〈사자의 서〉와 〈아톤찬가〉는 신과 사람들 사이의 매개체이자 유일한 출전인 히브리 성경이나 《코란》과 전혀 달랐다.35
그러나 매우 밀접하게 얽힌 두 문화가 시대는 달랐을지라도 우리가 일신교라고 부르는 것을 발전시켰다는 흥미로운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은 영향의 문제, 직접적인 차용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는다. 모든 독창성은 다른 사람에게 빌린 것에서 비롯된다. 문화 저장 기술이 발전하여 과거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이후 우리 모두는 후발 주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차용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차용했느냐, 또 우리가 발견한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망명한 유대 민족이 아톤 숭배 실험을 접했다 해도 그들이 이를 이용해 만들어낸 것은 전혀 다른 결과물이었으며, 어찌 됐든 위대한 성취로 기억될 가치가 있다.
다른 문화를 차용하는 방식의 중요성은 과거를 차용하는 방식, 즉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왕의 계보에서, 조각상에서, 다른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어 거의 잊혔다. 혹시 이 급진적인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비난을 위해서였다. 이후 몇천 년 동안 아케나톤은 ‘아마르나의 범죄자’로만 알려졌다.36 이러한 삭제는 놀랄 만큼 효과적이었고 역사에서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 두 사람의 실험을 제거해 냈으며 수수께끼만을 남겼다. 이는 19세기와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왕과 왕비가 과거에서 지워지다니 참으로 씁쓸한 아이러니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을 지운 것이 일신교 실험 때문이었다면 이제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일신교가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집트 역사 속 이 짧은 시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이 계속 다신교 안에서 살았다면 아톤 실험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나 역사의 각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관과 경험에 따라 과거를 본다. 아케타톤을 과거에 저항하는 위대한 반란이자 처음으로 잠깐 들여다본 새로운 세계로 만든 것은 바로 미래, 우리의 미래였다.
아케타톤 이야기는 과거가 가만히 앉아서 발견되거나 무시당하기만을 기다리진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과거를 두고 끊임없이 싸운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이 아몬 신전을 버리고 무너지게 놔두었듯이 두 사람의 후계자들은 새로운 도시가 쇠퇴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범죄자인 이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혁신의 영웅이 된다. 우리는 과거를 이용하면서 우리의 필요와 편견에 따라 그것을 끊임없이 세웠다가 무너뜨린다.
역설적이게도 당대 이집트인들이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 두 사람의 신 아톤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그들의 도시를 버리는 바람에 도시가 오히려 보존되었다. 분명 도굴꾼들은 아케타톤의 많은 무덤을 파괴했다. 투탕카몬이 아버지의 미라를 테베로 이장한 것도 도굴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37 버려진 도시가 무방비 상태로 약탈에 취약해지리란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버려진 도시, 심지어는 약탈당한 도시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 도시보다 훨씬 많은 것을 후대의 고고학자들에게 알려준다. 지속적인 사용은 놀라울 만큼 파괴적이다. 예술 모형을 재활용하고 오래된 건물의 자재를 이용해서 새 건물을 짓기 때문이다. 아케타톤에서는 저렴하고 내구성이 떨어지는 건축 자재를 썼기 때문에 남은 것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누구도 건드리지 않고 시간 속에 얼어붙은 도시는 왕족의 삶과 일반인의 삶을 똑같이 들여다보고 투트모세 같은 조각가의 작업 방식을 파악할 전례 없는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네페르티티 흉상은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의 작은 방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다. 어둑하고 조심스러운 간접조명이 환한 색을 끌어낸다. 네페르티티가 그곳에 가게 된 사연도 보존과 파괴의 역학에 대해서 말해 준다. 에스-세누시의 발굴 작업은 프로이센 고고학자들의 자금을 지원받아 그들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다. 고대 이집트에 매료되어 발굴에 열을 올렸던 유럽인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 이후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몇천 년 동안 인간의 지식에서 잊혔던 상형 문자를 해독하자 유럽인들은 대거 이집트에 몰려들었다. 수많은 유럽인 이집트 학자들은 식민국의 힘을 이용해 발굴한 유물을 도굴꾼처럼 유럽 박물관으로 보내고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고, 보존을 위해서였노라고 정당화했다. 이집트 등 이렇게 강탈하는 과학자들이 찾아간 여러 나라들은 아주 느린 속도였지만 문화재 절도 금지법을 제정했다. 프로이센이 자금을 대고 에스-세누시가 네페르티티를 찾아낸 1912년 발굴에서는 귀중한 유물이 나오면 일부는 이집트가 갖고 일부는 독일에 보내기로 했다. 네페르티티는 독일행 무더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독일에서 네페르티티는 소란스럽고 위험한 한 세기를 보냈다. 고고학자들은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유적지를 보존하는 흙을 파내고 나면 그곳은 영원히 노출되고 소란스러워진다. 더없이 꼼꼼한 기록과 조심스러운 절차만이 과거를 침해하는 이러한 조사를 정당화할 수 있다. 한편, 네페르티티 흉상처럼 부서지기 쉬운 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