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네프! 국내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사실은 워렌 버핏, 피터 린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투자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업계의 통념을 거부하고 그만의 원칙과 방법으로 22년이나 시장을 평정하면서 펀드 규모를 무려 57배로 성장시켰으며, 윈저펀드를 미국 내 최대 최고의 펀드로 만들었다.
이제 일선에서 영광스럽게 물러난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거둬온 경이로운 실적의 근간이 된 주가수익비율(PER) 원리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동시에, 주식투자의 필승 전략과 기법 등을 소개한다. 또한 그만의 트레이드마크인 ‘가치투자 value investing’ 기법에 대한 상세한 조언 및 지침, 주가수익비율 활용법, 시장의 새로운 동향을 파악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소중한 교훈과 통찰을 제시한다.
특히 월스트리트에서의 삶을 연대기로 서술한 존 네프의 ‘투자일지’(3부)는, 그가 거둔 최선(또는 최악)의 투자 결정 이면에 숨겨진 놀라운 통찰력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의 혁신적 투자 스타일이 어떤 경로로 변천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월스트리트의 한 천재가 오랫동안 실천해온 성공적 투자 전략을 상세하게 소개한 이 책은, 투자를 꿈꾸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존 네프John Neff
1995년 은퇴 전까지 윈저펀드의 투자자문업체 웰링턴 매니지먼트 컴퍼니 수석 부사장 및 경영 파트너로 일했다.
스티븐. L. 민츠Steven. L. Mintz
이코노미스트 그룹의 간행물로, 주로 최신 금융기법을 발굴하고 그 기법이 오늘의 시장에서 어떻게 운용되는지를 연구하여 소개하는『CFO』지의 뉴욕 지국장이다. 다른 저서로는『Beyond Wall Street』『Five Eminent Contrarians』등이 있다.
김광수(kwsookim@hanmail.net)
중앙대학교 문과대학을 졸업하고 인디애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비즈니스 및 자기계발서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서번트 리더십』『작게 시작하여 크게 성공하라』『잘나가는 기업, 남다른 경영』『실행에 집중하라』『나는 CNN으로 세계를 움직인다』『브레인 파워』『리딩업』『유도전략』『퍼니 비즈니스』『로열티 경영의 원칙』『나의 꿈을 이루는 변화의 법칙』『마틴 루터 킹의 리더십』『마음의 휴식』등 20여 권이 있다.
표지 이창욱
가치투자, 주식황제 존 네프처럼 하라
전자책 발행일 2024년 5월 1일
지은이 존 네프· S. L. 민츠
옮긴이 김광수
펴낸이 김성실
펴낸곳 시대의창 등록 제10-1756호(1999. 5. 11)
주소 03985 서울시 마포구 연희로 19-1
전화 02)335-6121 팩스 02)325-5607
전자우편 sidaebooks@daum.net
ISBN 978-89-5940-842-9 (15320)
정가 12,000원
JOHN NEFF ON INVESTING
Copyrightⓒ1999 by John Neff and Steven L. Mintz
All Rights Reserved. Authorised translation from the English language edition published by John Wiley & Sons Limited. Responsibility for the accuracy of the translation rests solely with WINDOW OF TIMES and is not the responsibility of John Wiley & Sons Limited. No part of this book may be reproduced in any form without the written permission of the original copyright holder, John Wiley & Sons Limit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2004 by WINDOW OF TIMES
This translation published under license with John Wiley & Sons, Inc. through EYA(Eric Yang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에릭양 에이전시)를 통한 John Wiley & Sons, Inc. 사와의 독점계약으로 시대의창 출판사가 소유합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감사의 글 | ||
JOHN NEFF |
그동안 가족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아내 릴리, 사랑스러운 리사와 스티븐. 우리 가족 모두는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적극적인 후원과 관심, 이해를 아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저술 과정에서도 도움을 아끼지 않은 열정적인 참여자들이기도 하다.
공동 편찬인으로 참여해준 스티븐 민츠는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힘을 보태주었고, 각 장별 내용을 완성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동안 스티븐이 보여준 인내와 근면성실, 우호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어떤 감사의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부족할 따름이다.
윈저 펀드의 운용과 더불어, 최근 16년간 나는 밥 도란과 던컨 맥팔랜드, 닉 손다크 등과 함께 웰링턴 매니지먼트 컴퍼니(2000억 달러의 일임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투자자문업체)에서 경영 파트너로 일했다. 이들의 성실한 노력과 현명한 판단, 헌신, 유머감각, 탁월한 실적은 웰링턴을 일류 투자기관으로 발전시키는 버팀목으로 작용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잭 보글과 잭 브레넌을 비롯한 뱅가드의 여러 이사들로부터 변함 없는 격려와 후원을 받았다. 물론 일시적인 불협화음도 없진 않았지만 유능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확신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윈저 펀드의 성공 뒤에도 내 임기 동안 적극적인 헌신을 아끼지 않은 팀이 있었다. 내 후임자인 척 프리먼은 지난 26년간 윈저 펀드의 성공을 위해 절대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프리먼은 탁월한 혜안과 식견을 우리와 나누었고, 그 결과 탠디와 시티콥, 크라이슬러를 비롯하여 다양한 성공투자의 길을 열어주었다. 아울러 짐 에이브릴과 짐 모디 역시 10여 년 넘게 윈저의 운용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투자 매니저로서의 길을 걷기까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 분의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내가 투자 비즈니스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과거 톨레도 대학 회계학과 학장이셨던 시드니 로빈스 박사님 덕분이다. 박사님은 내가 이 분야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셨다. 영국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아서 T. 보나스 교수님은 졸업 후 첫 직장을 얻는 데 많은 애를 써주셨을 뿐 아니라, 주식투자업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관심 어린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또한 모건 스탠리 딘 위터 소유의 투자자문업체인 ‘밀러, 앤더슨 & 셔레드’의 공동 창업자이자 8년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신 폴 M. 밀러 교수님 역시 아낌없는 조언으로 내 인생 여정이 한층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 밖에도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을 밝혀준 후원자들은 더 있다. 자넷 라구사는 뱅가드 이사들에게 날아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편지를 일일이 정리하여 일지로 작성했으며, 이 책에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이 일지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보좌역을 성실히 수행해준 달라 노울 덕분에 나는 체계적인 사고와 투자관리의 효율을 높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기대 이상의 실적을 낳을 수 있었다. 그리고 프랜 켈리는 내가 비상근직으로 일할 때 따뜻한 배려로 나를 보살펴준 사람이다.
지난 몇 년간 이 책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우정어린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은 세 사람도 빼놓을 수 없다. 훌륭한 찬사로 이 책의 서문을 장식해준 찰스 엘리스, 윈저 펀드의 성공 토대를 만들어준 빌 힉스, 이 책과 관련하여 많은 의견을 제공해준 진 아놀드가 바로 그들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지난 시간동안 지혜와 우정을 나누어준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추천의 글 | 가치투자의 승리, 여전히 살아 있는 신화 | |
JOHN NEFF |
존 네프는 투자업계의 가치투자 전문가다. 일찍이 존 네프처럼 대규모 뮤추얼펀드를 장기간 성공적으로 운용해온 투자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30년간 윈저 펀드를 운용하며 이룩한 업적은 가히 놀라울 정도다. 전문 투자 매니저들의 수익률이 저조하여 시장평균을 갉아먹던 시절에도 네프의 연평균 수익률은 ‘시장 평균’보다 적어도 3퍼센트 이상을 기록했다(시장평균보다 정확히 3.5퍼센트 높았다. 그리고 30년간 비용을 제외한 평균 순수익률은 시장평균보다 3.15퍼센트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복리 개념(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복리법이야말로 인류가 창안한 가장 빛나는 아이디어라고 했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네프가 이룬 업적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년 3퍼센트씩만 복리로 계산하더라도 24년이면 투자원금의 ‘두 배’를 달성하게 된다. 그런데 네프의 수익률은 시장 평균보다 적어도 3퍼센트 이상 높았고 운용 기간도 24년보다 훨씬 길었다.
존 네프의 화려한 업적이 수많은 투자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높은 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해 투자자는 더 많은 리스크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인데 반해, 그가 허용하는 리스크는 주식시장의 평균 수준보다도 오히려 낮았다. ‘시류를 거스르는 투자자가 되어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물론 역행투자가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겸손의 미덕이 몸에 배인 탓에 애써 입으로 떠벌리지는 않지만, 그의 ‘역행적 사고’ 또는 독립적 사고의 이면에는 분명한 ‘원칙’이 존재한다. 네프는 시류와는 반대 방향을 지향할 때가 많았다. 자신이 투자할 기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창적이고 독립적이며 ‘지극히’ 합리적인 평가가 가능했던 비결도 남보다 많은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더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 전문가들에게 수여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네프의 ‘비결’ 가운데 하나가 밝혀졌다.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그는 일을 정리하고 집에(또는 다른 곳을 방문하더라도) 조용한 공간을 마련한 후 『월스트리트 저널』을 한 단어도 빠트리지 않고 정독하며 다음 한 주의 비즈니스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존 네프라는 뛰어난 투자자가 엄격한 자기훈련을 통해 투자운용이라는 전문 직종에서 경쟁력을 쌓아온 한 가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존 네프는 유능한 증권분석가들(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일류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이든)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대화를 통해 이들의 가정과 분석기법, 계획 등을 파악하고 나면 독자적인 주가판단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준비가 덜된 분석가가 네프를 무작정 따라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가 추구하는 기준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정보와 통찰만큼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치밀한 사전준비’를 지향하는 네프의 엄격한 원칙은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그의 포트폴리오 회전율과 거래비용이 예상외로 낮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투자자는 문제를 유발하는 것 못지않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세금이 단기이윤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 모두를 효과적으로 최소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존 네프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이사회 일원이다(이 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와튼 경영대학원 교수로 활동한 바 있다.). 학교 측의 요청으로 자산운용을 맡은 그는 1억 7000만 달러의 초기자본을 16년 만에 18억 달러로 늘리는 등 뛰어난 운용실적을 올렸다. 또한 웰링턴 매니지먼트 컴퍼니의 경영 파트너 세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수년간 재직하며 투자 역량을 발휘하여 비즈니스 실적 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존 네프는 전문 투자자일 뿐 아니라 ‘헌신적 수탁인’의 모범이기도 하다. 그는 얼마 안 되는 돈을 아껴 자신이 운용하는 뮤추얼펀드에 투자한 개인과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내 경우에는 25년 전에 일명 ‘캐피탈주Capital share’로 불리던 제미니 듀오펀드duo-fund를 매수한 것이 생애 최고의 투자결정✽✽이었다. 듀오펀드(지금은 법으로 금지한다)란 뮤추얼펀드의 한 가지 형태로, 최초 공모 당시에 자본의 절반만을 투자해도 배당금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취득할 수 있는 제도였다. 당시처럼 약세시장에서는 대부분의 주식이 실제보다 저평가되어 있었으며 대다수 투자자들도 투자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이런 환경은 특히 네프와 같이 ‘가치투자’를 추구하는 역행투자자들에게 큰 기회를 열어주었고 실제로도 막대한 성과를 창출했다. 제미니의 캐피탈주 역시 당시의 시장상황과 맞물려 할인가로 거래되었다. 따라서 시장이 회복기로 접어들 무렵에는 캐피탈주의 듀오펀드 구조 덕분에 주가가 엄청난 속도로 상승할 것이며, 주식시장이 침체기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에 따라 ‘가치주value stock’도 저평가된 만큼 네프가 운용하던 포트폴리오가 앞으로는 큰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게 당시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런 뛰어난 실적은 당시 시장의 할인현상을 제거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 내 생애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았던 투자는 이와 별개였다. 20여 년 전, 몇몇 파트너와 나는 벅크셔 해스어웨이Berkshire Hathaway에 투자하여 최고의 수익을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때는 지식에 의존하기보다 워렌 버핏의 조언에 따라 투자했다.
당시 네프는 최고의 투자 매니저란 평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명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여러 차례 뛰어난 투자실적을 거두었다. 따라서 나는 제미니 펀드에 투자하면서 존 네프, ‘가치주’, 현재의 시장할인, 미미한 수준의 침체, 시장의 활황 가능성 등 다섯 가지를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투자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소는 무엇보다도 존 네프라는 사람이었다. 고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치밀한 리스크 분석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자산을 운용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미국의 투자자들이 ‘단기투자’에 열을 올린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나는 시장의 하락 가능성을 무시한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나는 최대 수익률을 20퍼센트로 점쳤다. 이 예측이 옳다면 중개인으로부터 증거금의 최대 30퍼센트를 빌려 몽땅 제미니 캐피탈주에 투자하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고 나는 그대로 실행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머잖아 주식시장은 반등으로 돌아섰고 캐피탈주는 할인주에서 우량주로 변모했다. 또한 가치주가 시장의 총아로 자리매김했고, 회의론자들도 듀오펀드의 위력을 실감했으며, 네프는 계속해서 뛰어난 실적으로 다른 투자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앞의 다섯 가지 요소가 마치 긍정적인 조화를 이루어 결과를 이끌어내는 듯했다. 게다가 증거금을 이용한 투자도 성공을 거두면서 내 아이들의 교육비를 넉넉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25년 전, 적은 비용으로 고수익 투자를 원한다면 존 네프를 찾으라며 처음으로 내게 권고해준 제이 셔레드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사실 네프와 나의 인연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35년 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대단히 현명하고 박식할 뿐 아니라 지식을 향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이나 옷매무새도 마음에 들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DLJ(Donaldson, Lufkin & Jenrette)의 투자전략가 존 코코란John Corcoran이 다양한 시장 부문에 대한 투자를 주제로 강연을 할 때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투자 매니저들은 코코란의 강연에 감화되어 어떤 종목이 반등 가능성이 높은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열띤 분위기는 네프의 한마디에 일순간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코코란 씨, ‘리스크’는 어떻게 하구요?”
이때의 장면은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존 네프야말로 독립적 사고의 진정한 모범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네프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빠트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나 역시 그가 운용하는 뮤추얼펀드의 주주였으므로 AIMR(미국 투자관리연구협회)에서 주최한 회의나 DLJ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세미나 등에도 참여했고, 최근에는 그리니치 협회 회원으로서 이 협회 회장을 맡은 네프와 자주 접촉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존 네프가 이 책을 저술하도록 처음부터 강력히 권고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래야 나와 내 아이들, 친구들, 나아가 투자를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 위대한 투자자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코네티컷 주 그리니치에서
― 찰스 D. 엘리스Charles D. Ellis
저자 서문 | 그럴듯한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수익을 위하여 | |
JOHN NEFF |
1998년 봄, 나는 필라델피아의 와튼 경영대학원에서 대학원생들의 세미나를 지도하고 있었다. 학생들과의 열띤 토론은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내가 지향했던 투자 프로세스의 본질과 왜 내가 이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책에는 당시 학생들과 나눈 대화 내용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이란 분명 일방적인 대화 매체다. 그러나 책도 차트나 그래프 등을 활용하여 저자의 관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익한 대화와 다를 게 없다.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이 책을 여행하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투자에 관한 것들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투자와 관련된 화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게 아니라, 지난 30년간 윈저 펀드를 운용하며 내가 직접 경험했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아이디어에 주안점을 두었다. 일반적인 투자지식이라면 다른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국 해군에서 복무하며 항공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이후 주식거래에 몸담게 되었고, 1985년에 새 주인을 만나 문을 닫기 전까지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뮤추얼펀드로 군림했던 윈저 펀드를 31년간 운용했다. 투자 부문에서의 경력은 어쩌면 내가 숫자를 헤아리기도 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나는 대단히 고집이 센 아이였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나를 ‘존 브라운’John Brown(미국의 노예제도 폐지론자―옮긴이)에 비유하며 “가만히 서 있는 표지판과도 싸울 아이”라고 했을까! 어머니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해야 맞다. 나는 직업 인생 전부를 주식시장과 싸우며 보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윈저 펀드의 운용 실적이 보여주듯 나는 주식시장과의 싸움에서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더 많았다.
투자 비즈니스와 같이 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분야에서는 사실상 학습곡선의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주식시장의 희망적 요소이자 절망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전문가를 동원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투자자로서 정말로 알고 싶은 것, 즉 ‘내일, 내주, 내년의 시장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로운 정보의 끊임없는 유입은 과거에 누구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환경을 창조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는 “같은 강물을 두 번 밟을 수는 없다”고 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투자자도 같은 시장에서 같은 걸음을 두 번 내딛기는 불가능하다. 시장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심 있게 살펴보면 시장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도 있다. 시장은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적대적이면서도 또 때로는 우호적이고 조화롭다. 그리고 시장에는 좋은 날도 궂은 날도 있으며 좋은 해와 궂은 해도 있다. 이 모두를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시장은 빠른 속도로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얻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다. 이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야말로 ‘넉넉한 수입’이라는 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
역행투자자의 한 사람인 나는 이 책을 구성하면서 의도적으로 일반 투자지침서와는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그럴듯한 이론을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분기별 그리고 연도별로 실질적인 수익을 일구어내자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1부(윈저를 향한 여정)에서는 내가 지닌 투자성향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2부(변함 없는 원칙)에서는 투자의 목표와 기법을 설명하며, 3부(시장 일지)에서는 윈저 펀드를 운용해온 지난 4반세기 동안 발생한 다양한 사건들을 소개한다. 일 년에 한 주를 거래하든 아니면 하루에 한 주를 거래하든(후자는 그다지 권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내용은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투자를 돕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쯤에서 최근의 가치투자 경향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낳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른바 가치펀드value fund로 불리는 뮤추얼펀드의 상당수는 그동안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역행투자자의 한 사람인 나는 이런 결과를 예정된 수순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가치투자가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한 상황에서 굳이 가치투자에 대한 책을 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쪽에서 한물갔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그동안 운용해온 윈저 펀드는 여러 차례 시험대를 통과했을 뿐 아니라 당시에도 여전히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고 있었다.
개인 투자자는 전문 투자자에 비해 한 가지 중요한 이점을 누린다. 오늘날처럼 치열한 시장환경에서 전문 투자자는 분기별 실적을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는 반면에, 개인 투자자는 원하는 종목을 골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투자할 수 있다. 가치투자(저PER 종목)를 위해서는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치밀한 분석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더욱이 시장이 강세로 돌아선 상황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확실한 수익과 저PER을 보이는 우량기업의 우량주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시간을 두고 냉정히 판단하며 여기에 행운까지 따라주는 투자자라면 장기간 성공적인 투자가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의 행운이 한순간에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투자게임의 본질이다. 나는 많은 투자자들이 장기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얻도록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을 꿰뚫지 못하거나 너무 성급하게 덤비는 투자자는 차라리 그 돈을 다른 데 쓰는 편이 백 배 나을 것이다.
1999년 6월
펜실베이니아 주 밸리포지에서
― 존 네프
감사의 글
추천의 글
저자 서문
프롤로그
PART01윈저를 향한 여정 그리고 열정
1전 재산 20달러의 가난한 청년, 기회의 땅을 찾다
포탄의 흔적과 티커 테이프
운 좋은 출발
2악착 같은 노력, 그것밖엔 달리 길이 없었다
사업가의 피를 물려받다
얼음장수의 유혹
3투자세계로 가는 길목, 기초 훈련을 쌓다
여러 직장 그리고 아버지와의 재회
투자 개념에 눈뜨기 시작하다
스승을 만나다
4은행가의 시대, 어설픈 첫걸음을 떼다
어설픈 첫걸음
자연스러운 의문
넉넉지 않은 급여
고루한 조직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
5어수선한 시절, 기회의 보금자리를 틀다
시장 밖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라
6미시간 촌뜨기, 마침내 윈저를 지휘하다
전략의 진화
“제럴드 차이가 사들이고 있대…!”
PART02변하지 않는 원칙
7윈저의 투자 스타일, 흔들림 없는 원칙이 있다
저PER 투자
7퍼센트 이상의 펀더멘털 성장
배당수익률 방어
총수익률과 PER의 긍정적 관계 견인
PER을 감안한 순환노출
확실한 성장기업
강력한 펀더멘털
8가치투자 핵심 전략, 할인매장에서 보석을 찾아라
그 날의 저가주를 공략하라
‘주가가 왜 떨어졌지?’
악재도 때로는 호재가 될 수 있다
두드러진 주가 하락은 미래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비인기주를 찾아라
양질의 성장세를 유지하는 기업을 찾아라
다른 사람이 모르는 투자 기회를 포착하라
잘못 분류된 기업을 찾아라
임계치를 확보한 기업을 찾아라
‘덤’의 기회를 포착하라
‘나만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라
좁은 영역에 얽매이지 말라
‘나만의 지평’을 확장하라
투자 소신을 세워라
9저PER 포트폴리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곡점에 주목하라
여론을 경계하라
윈저의 청사진 : ‘계산된 참여’
‘인기 성장주’에 목숨 걸지 마라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
‘비인기 성장주’를 공략하라
‘적정 성장주’는 건강한 시민과 같은 존재다
‘순환 성장주’는 다시 반등한다
시장은 수익률이 최고점에 이른 순환주에 투자하지 않는다
모든 순환주가 예측한 사이클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시장이 선호하는 종목에 현혹되지 마라
하향식인가, 상향식인가
동향을 유발하는 ‘뭔가’에 주목하라
‘사실자료’를 작성하라
팔아야 하는 확실한 근거를 대라
확고한 매도 전략을 수립하라
영원히 붙들고 있지 마라
상황이 좋지 않으면 쉬어가거나 돌아가라
변화의 시대에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PART03가치에 집중한 투자일지
10비수기(1970∼1976), 그 혼돈의 강을 건너 승리하다
1970 : 복합기업 & 차이니즈 페이퍼
1971 : 비포장 도로 위에서
1972 : 모건이 선택한 종목이라면…
1973 : 탠디는 멋있었다
1974 : 다시 현실로 돌아오다
1975 : 윈저, 승리하다
1976 : 조이 오브 스톡The Joy of Stocks
11짙은 안개 속(1977-1981), 그래도 나는 전진한다
1977 : 나무랄 데 없는 이력
1978 : 낙천주의자 클럽
1979 : 쉴 틈 없는 한 해
1980 : 바람에 맞서며 얻은 교훈
1981 : 윈저의 길이 곧 대세다
12훌륭한 재료(1982-1988), 결단과 타이밍이 중요하다
1982 : 새로운 차원
1983 : 회전, 회전, 회전…
1984 : 약진 앞으로
1985 : 기대심리 & 펀드멘털
1986 : 실속 없는 질주
1987 : 부활의 해
1988 : 대폭락의 여파
13가치로 고른 유망 종목(1989-1993), 결국 그 진가를 발휘하다
1989 : 퇴보의 시기
1990 : 반격에 나서다
1991 : 마침내 전세가 역전되다
1992 : 반등
1993 : 최고의 투자기관으로 우뚝 서다
요약
14예지력,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인기 성장주 후보
적정 성장주 후보
비인기 성장주 후보
순환 성장주 후보(선과 악 그리고 추함)
에필로그
프롤로그 | JOHN NEFF | |
나의 성공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 시티뱅크 투자 무용담
1991년 5월, 많은 투자자들이 시티뱅크Citibank를 걱정하고 있었다. 개발도상국에 지원한 자금의 회수가 어려워진 데다 부동산 담보대출에서도 막대한 손실을 입어 시티뱅크의 앞날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은행 경영진은 부동산 담보대출을 비롯한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십 억 달러의 자금을 투여했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다른 은행들이 대부분 해결단계에 있었던 반면에, 시티뱅크는 여전히 각종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금융규제기관에서는 이 은행의 회계장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게다가 컨티넨털 뱅크Continental Bank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한 투자자들은 유서 깊은 시티뱅크가 내일 당장 무너지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주가도 연일 폭락을 거듭했고 언론에서는 직업인생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시티뱅크의 회장 존 리드John Reed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윈저 펀드를 운용하며 시티뱅크의 상황을 면밀히 저울질한 우리는 이때야말로 시티뱅크 주식을 매수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당시 윈저에서는 이미 시티뱅크 주식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은행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때는 1987년으로, J.P. 모건에 투자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둔 후 투자 대상을 전환하려던 무렵이었다. 이때 시티뱅크 주식은, 전직 회장인 월터 리스턴Walter Wriston이 취임하여 시티뱅크의 전성기를 연 이후 수익률이 무려 7∼8배에 이르렀다. 실제로 리스턴은 시티뱅크를 매년 15퍼센트 이상 성장시켰다. 그뿐 아니라 1970년대 초에는 주식시장의 평균수익률을 상회하는 50가지 종목을 의미하는 ‘니프티 피프티Nifty Fifty’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처럼 거듭되던 시티뱅크의 성장이 정체되어 투자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키지 못할 무렵 윈저의 공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대했던 것만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실 시티콥Citicorp에서도 애초부터 윈저와 같은 역행적 사고를 고수했다. 1987년, 시티뱅크는 주가수익비율PER을 감안하여 주가를 상당 수준 할인했다. 이 할인정책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지원한 차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멕시코에서는 유가 하락과 맞물려 심각한 문제를 유발했다. 그러나 주식시장에서는 중대한 사실 한 가지를 간과했다. 1985년과 1986년 사이 시티뱅크의 수익성이 더욱 악화된 가장 큰 이유는 차관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금을 확보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간과한 많은 투자자들이 시티뱅크로부터 등을 돌렸다. 하지만 우리가 내린 결론은 달랐다. 당시 공개된 시티뱅크의 수익성은 지극히 보수적인 계산방식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보다 높으리라는 게 우리의 판단이었다.
이런 우리의 믿음이 드디어 보답을 받는 듯했다. 적자를 기록한 이듬해인 1988년, 시티뱅크의 실적은 점차 호전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불경기가 극에 달하면서 그 여파는 과잉상태에 이르렀던 상업용 부동산 개발시장에 치명타를 안겼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줄줄이 파산에 이르렀고 부동산 대출에 나섰던 은행들도 실적 악화로 덩달아 위기에 직면했다. 실제로 자본금 충당의 압력에 시달렸던 은행들은 대출금액의 50퍼센트 이상을 탕감해주면서 적극적으로 회수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시티뱅크는 부동산 대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윈저는 이 절망적인 금융서비스 분야에 대한 투자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그러나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특히 시티뱅크는 더더욱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이때부터 나는 윈저의 투자 문제로 존 리드와 자주 접촉하며 그의 단호함과 성실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상황은 어렵지만 골프를 그만두지는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투자설명회 자리에서 존 리드를 소개하다가 그의 이름을 잘못 말한 적도 있다. 언론에서 하도 그를 “궁지에 몰린 존 리드beleaguered John Reed”라고 떠들어댄 탓에 ‘beleaguered’를 그의 이름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199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시티뱅크 주식을 더 많이 사들였다. 부동산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지만 시티콥의 소비자 인지도를 감안할 때 머잖아 시장에서 인정받는 날이 오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시티뱅크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상업용 부동산 비즈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이 은행의 소비자금융 부문은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주력 부문인 신용카드 비즈니스 역시 뛰어난 실적을 창출했다. 게다가 리스턴 회장의 유산인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출 부문도 서서히 수익성에 보탬이 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통상적인 주기대로 부동산 부문이 다시 뜨기 시작하면 시티뱅크의 주주들은 막대한 수익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보았다. 1990년대에 시티뱅크에서 수익을 기록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부동산 대출과 관련된 준비금 탓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시장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밖의 분야에서는 부동산 대출 부문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할 만큼의 수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티뱅크는 우리의 기대를 또 다시 저버렸다. 1991년 한 해 동안 윈저에서 투자한 은행 가운데 수익을 내지 못한 곳은 시티뱅크 단 한 곳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 움직였다. 시티뱅크 한 주에 쏟아 부은 비용이 평균 33달러에 달했고 당시 주가가 14달러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매수를 계속했다.
1991년이 끝나갈 무렵 주가는 더 떨어졌고 시티뱅크를 향한 각 언론사들의 비난은 이제 일상화되었다. “시티뱅크의 악몽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비즈니스 위크』 1991년 11월호 헤드라인을 장식한 문구다. 게다가 12월에는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Institutional Investor』에서 썩은 생선 사진을 전면에 실어 시티뱅크를 향한 월스트리트의 불신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티뱅크의 파산을 점쳤고, 로스 페로Ross Perot와 같은 유명인이 이 은행의 주식을 공매 처분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게다가 시티콥이 발표한 재무제표의 수치보다 상황이 더 어렵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투자자들의 극단적인 행동은 도를 더해갔다.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시티뱅크 경영자들은 금융규제기관의 시험대를 무사히 통과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이미 무성해진 소문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그 무렵 윈저는 시티뱅크 주식을 2300만 주나 보유하고 있었고 약 5억 달러의 자산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주택금융위원회 의장이자 하원 의원인 존 딘글John Dingle은 시티뱅크 문제가 기술적으로 해결 불가능하다는 의사를 비쳤고, 그 여파는 이 은행의 아시아 지점들에까지 확산되었다. 그 결과 주가는 곤두박질을 거듭하여 1991년 말에는 8달러까지 떨어졌다.
낙관적인 시기는 분명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이 은행의 주식이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가져다주리라 믿었다.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티뱅크의 수많은 지점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 우리의 이런 믿음을 뒷받침해주었다. 더욱이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르면서 수익을 향한 우리의 기대는 점점 더 무르익었고, 1991년 이후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수익성이 급격히 높아지리라 예측했다. 우리에게 시티뱅크는 1987년의 뱅크 아메리카Bank America와 같은 존재였다. 1987년 당시 바닥권을 맴돌던 뱅크 아메리카의 주가는 이후 8배 이상이나 치솟은 바 있었다.
오랫동안 주위의 우려와 비난을 무릅쓴 끝에 드디어 결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1992년 초부터 시티뱅크 주가가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해가 바뀌기도 전에 오랜 기다림의 대가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시티뱅크와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특히 투자의 성공은 반드시 우량주나 강세시장과 직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우리의 성공 이면에는 현명한 판단과 꺾이지 않는 의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현명한 판단 덕분에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고, 꿋꿋한 의지 덕분에 남들은 모두 다른 방향을 향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았다. 시티뱅크 사례는 투자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아무리 열등한 주식도 때로는 화려하게 거듭날 수 있다. 겉보기에 멋들어진 포트폴리오만을 추구했더라면 아마 윈저 펀드의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윈저에서 시티뱅크와 같은 주식에 투자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 | JOHN NEFF | |
전 재산 20달러의
가난한 청년, 기회의 땅을 찾다
1955년 1월초,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겨울 아침, 투자 매니저를 향한 내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 날 아침, 해군 출신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23세의 청년이던 나는 톨레도 진입로에서 서성거리며, 오하이오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뉴욕을 향해 출발하는 자동차들을 향해 손짓을 하고 서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좋은 조건에 특혜까지 누리며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취직하는 오늘날의 일부 계층에게는 이처럼 축복받지 못한 시작이 의아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비행기나 멋진 호텔은 고사하고 버스 승차권 하나 마련해준 사람도 없었다. 손에 들린 가방 하나와 그 속에 담긴 간식거리, 주머니에 있는 20달러가 직업 인생을 시작하는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그래서 다음 날 뉴욕에서 열리는 취업 인터뷰에 참가하기 위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차를 빌려 타는 것이었다.
1950년대 주州를 넘나드는 고속도로에는 자동차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범죄는 더더욱 적었다. 더군다나 내 옷차림이 소박해 보여서인지 차를 빌려 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를 타고 뉴욕까지 가면서 운전사와 나눈 대화를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오하이오 주에서 뉴욕까지 가다보니 한 해 전인 1954년에 열렸던 월드시리즈에 대해 자연스럽게 몇 마디를 나눴다. 그 해 월드시리즈에서는 당시 뉴욕 자이언츠 팀이 클리블랜드 인디언즈(오하이오 연고팀―옮긴이)를 단 4게임만에 쓰러뜨리고 정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팀의 팬이었기 때문에 오하이오 출신의 운전사와는 달리 비교적 담담하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내가 투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야구에 대한 지식보다도 적었다. 시장에 대한 지식이라고 해봐야 학교시절 강의 시간에 몇 번 들은 게 전부였다. 게다가 나는 투자업계의 가치에 대해 설교할 준비도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대공황(1929년)의 여파는 주식시장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1929년의 최고점을 회복하기까지 무려 26년이나 걸렸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동승한 운전사가 왜 뉴욕에 가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목적지가 달라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내린 나는 다시 지나가던 트럭을 얻어 탔다. 트럭 운전사는 언론인 출신으로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텍사스 주 남부의 코퍼스 크리스티에서 주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유랑자였던 것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는 자발적인 유랑자였다는 점에서 달랐다면 달랐을까…. 운전사는 조지 파George Parr라는 사람을 맹렬히 비난했다. 194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조지 파가 선거운동을 잘못하는 바람에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이 경쟁자인 코크 스티븐슨Coke Stevenson을 94표 차이로 누르고 과반수를 얻어 당선되었다는 이유였다. 당시의 선거전은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단 몇 백 표 차이로 당락이 뒤바뀔 수도 있었고, 만약 그랬다면 미국의 대통령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라며 그는 열변을 토했다.
자동차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며 16시간 동안 거의 1000킬로미터를 달려온 나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저지 시티에 인접한 어느 트럭 터미널에 도착했다. 뉴욕에 입성하려면 아직도 적지 않은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그 날 저녁은 34번가에 위치한 YMCA에서 쉬기로 했다. 이곳의 숙박시설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두 가지 일을 하며 묶던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의 YMCA보다 훨씬 못했다. 하지만 다음 날 계획된 네 번의 인터뷰를 무사히 치르려면 잠을 충분히 자야 했으므로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포탄의 흔적과 티커 테이프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이곳 뉴욕에는 내가 구직활동에 나섰던 1955년 초 이후로 새로운 고층건물이 수도 없이 들어섰고, 특히 정보화 시대는 뉴욕증권거래소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와 브로드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듯하다. 증권거래소가 여전히 한쪽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취임선서를 했던 페더럴 홀Federal Hall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 번째로 인상적인 건물은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 세운 은행이다. 이 은행의 외벽에는 1920년 9월의 어느 혼잡한 목요일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월스트리트를 공격하면서 남긴 포탄의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투자업계에 몸담은 이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보다 훨씬 큰 위력의 폭발이 월스트리트를 강타한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10년간 월스트리트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이야 전자거래 덕분에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실시간으로 거래할 수 있으므로 중개인들의 수수료가 적은 게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아예 거래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합당한 수수료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식거래는 주로 남성 중개인들이 부유한 개인이나 가정 또는 몇몇 신탁기관의 주문을 받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한 게 사실이다. 게다가 중개인들의 상당수가 부유층 출신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들과 관련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의 대공황 이후 제정된 법률은 보통주의 소유를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금기금이나 기타 기관 투자가들은 주로 채권이나 가장 안전한 주식에만 투자했다. 그 결과 뮤추얼펀드라고 부를 만한 투자 형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유한 가정도 얼마 되지 않았고 컴퓨터는 더더욱 드물었던 1950년대 환경에서는 실시간 투자정보를 얻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환경에서 주식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투자자들이 주로 의지한 것이 바로 티커 테이프ticker tape(증권시세 표시기에서 출력되는 테이프―옮긴이)였다. 하지만 과거에는 시세 표시기의 성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해 10개 종목을 인쇄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10개를 인쇄하곤 했다. 따라서 하루 거래량이 500만 주를 넘는 경우가 극히 드문 시대였음에도(오늘날에는 한 번에 500만 주 이상을 거래하는 경우도 많다) 시세 표시기의 인쇄 속도가 실제 거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때가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매수 또는 매도 주문을 일일이 손으로 용지에 기록했다. 이렇게 기록된 용지는 압축 튜브를 통해 자동으로 거래 처리실로 옮겨져 주문이 처리되었다. 또한 증권거래소 관계자들은 시세 변동 상황을 객장에 표시하기 위해 기둥에 톱니 장치가 부착된 다이얼을 설치하여 수작업으로 조정했다. 하지만 주문이 폭주할 때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서 중개업체 대부분은 기록요원을 따로 두어, 처리한 주문을 삭제하고 새로운 주문을 기록하는 식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오늘날의 유력 투자은행 가운데 1950년대 뉴욕의 금융 중심지를 거치지 않은 은행은 거의 없다. 당시에는 일명 ‘와이어 하우스’(wire house, 처리할 고객 주문을 전달하기 위해 통신기술을 사용하던 비교적 큰 규모의 증권회사를 말한다―옮긴이)가 월스트리트를 지배했다. 와이어 하우스에 포함되는 증권회사들은 뉴욕 이외의 다른 도시에도 사무소를 개설하여 매도·매수 주문을 전송 방식으로 처리했다. 가장 큰 규모의 와이어 하우스로는 메릴린치Merrill Lynch가 대표적이었으며, 이 회사의 추천 종목은 시장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미쳤다. 예를 들어 메릴린치에서 특정 업체의 주식을 추천하면 곧 수십 만 주의 매수 주문이 이어져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반면에 톨레도나 클리블랜드와 같은 시골 지역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중개업체들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돌이켜보면 월스트리트에 가기로 했던 결정은 내 직업 인생 내내 고수해온 투자철학의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1955년에는 투자 비즈니스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똑똑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해당 업종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포드나 제너럴 일렉트릭과 같은 대기업에 지원서를 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대기업 대신에 나는 『배런스』Barron’s(미국의 투자전문지―옮긴이)의 기사에서 소개한 대로 전국 규모의 4대 주식중개업체(메릴린치, 블라이스, 스미스 바니, 바체)에서 실시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리고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하겠다는 개인적인 자신감도 없지 않았지만, 대학시절 투자업계에서 일해보라며 소개해주신 교수님의 권유도 내가 이 길을 선택하는 과정에 적잖은 역할을 했다. 시드리 로빈스 교수님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는 투자 비즈니스가 운 좋은 사람이나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분야라며 그냥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운 좋은 출발
내가 투자업계에 몸담은 시기는 의외로 적절했다. 이 분야에 대한 세간의 평판이야 별로 나아진 게 없었지만 주식시장은 서서히 회복세를 타고 있었다. 성장에 대한 기대 속에 유니언 카바이드와 다우 케미컬, 미네소타 마이닝 & 매뉴팩처링, 이스트먼 코닥 등이 상한가를 기록하며 지수를 견인했다. 또한 보통주에 대한 믿음이 다시 확산되면서 일반 투자자들은 자본소득을 얻기 위해 상여금은 말할 것도 없고 매월 급여까지 쏟아 부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점차 안정되면서 경제는 다시 살아났고 주가도 안정세를 되찾았다. 1954년 말의 미국 국민총생산GNP은 4000억 달러에 육박하여 전후 최고를 기록했고, 이런 번영의 증거는 골프 인구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통계에 따르면, 1954년에는 380만 명의 골프 인구가 약 5000개의 골프 코스와 150만 에이커에 달하는 면적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954년은 20세기 중에서도 여섯 번째로 물가상승률이 낮았던 한 해로 기록되었으며, 경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 해의 물가 수준은 1차 세계대전 직후보다 44퍼센트나 낮았다고 한다. 모든 징후는 긍정적이었다. 각 부문의 상품 선적이 활기차게 이루어졌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1955년 1월 3일자 기사를 통해 기업 경영자들이 낙관적 전망을 토대로 생산시설 확충에 돌입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1955년의 거래 첫날인 1월 3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408.89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베들레헴 스틸, 크라이슬러, 제너럴 모터스, 이스트먼 코닥,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등이 상한가를 기록하며 주가를 이끌었고, 특히 듀퐁은 4포인트나 뛰어올라 171.5포인트를 기록했다. 이날 하루만 약 500만 주의 주인이 바뀌었다(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결코 높은 수치가 아니지만, 당시에는 5년 내 최고 거래량이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한 시점은 이처럼 열광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네 번의 취업 인터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끝났다. 해군에서 2년을 복무했고, 대학시절에는 금융 관련 강의를 여러 과목 수강했으며, 오하이오 주 톨레도의 어느 유명한 남성복 판매점에서 구두 판매원으로 일했던 경험 등 다양한 이력 덕분에 인터뷰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매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보다 긴 테스트와 인터뷰를 받은 것도 내가 그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를 평가받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튼 인터뷰는 무난하게 끝났고 나는 꽤 괜찮은 결과를 예상했다. 그러나 좋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시중은행인 내셔널 시티뱅크National City Bank에서 또 다른 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까지 시간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여유로운 여행을 위해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랐다. 뒷자리에 앉은 여러 명의 트럭 운전사들이 흥에 겨워 밤새 노래를 부르는 사이 버스는 클리블랜드에 다다르고 있었다.
뉴욕에서의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직장을 얻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메릴린치와 블라이스에서는 나를 고용 후보자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스미스 바니에서는 다시 한 번 테스트와 인터뷰를 받으라는 연락이 왔고, 바체에서 제의한 내용은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자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바체에서는 내가 원했던 주식 중개인이 아니라 증권 분석가(애널리스트)를 제의했다. 나중에야 내린 결론이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주식 중개인보다 증권 분석가나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차라리 나았다. 주식 중개인은 뛰어난 실적을 올렸을 때만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으며 시간의 대부분을 보유 주식을 거래하는 데 쏟아 부어도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는 직종이다. 따라서 주식 중개인보다는 증권 분석가가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왕 이 직업을 택할 바에는 클리블랜드에서 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4개월 전에 결혼한 아내 릴리가 바로 이곳 톨레도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셔널 시티뱅크에 증권 분석가로 입사하게 되었다.
나를 냉담하게 대한 대가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뉴욕을 떠나 클리블랜드로 돌아온 이후 월스트리트는 극심한 시련 속으로 빠져들었다. 1955년 1월 6일 목요일, 주식 매수에 따른 증거금 규정액을 매수 가격의 50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상향조정한다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발표가 있은 후 다우지수는 2.2퍼센트나 급락했다. 다음 날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는 이 정도의 낙폭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최대 규모라고 보도했다. 게다가 주가지수는 1월 14일까지 계속해서 떨어졌다.
내가 전문 투자자의 길로 들어서던 바로 그 시기에 이처럼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사실 당시의 나는 이런 사건들을 일일이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수립한 계획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앞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탓이었다.
2 | JOHN NEFF | |
악착 같은 노력,
그것밖엔 달리 길이 없었다
한물간 주식에 주로 투자하는 성향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실적을 장담할 수 없다. 투자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굽히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다. 주변의 대다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고집할 수 있는 의지력 말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직관과는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다.
인내가 무엇인지를 처음 배운 곳은 미시간 주 그랜드 필즈에 있던 우리 집 지하실에서였다. 다섯 살 정도였을 때 나는 외할아버지가 지하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할아버지는 석탄을 퍼 아궁이에 집어넣고 열심히 불을 땠다. 뜨거운 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석탄 때문에 온몸이 시커멓게 될 정도로 힘든 일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그 일을 마칠 때까지 묵묵히 참아내었다. 이때 이후로 나는 미시간의 혹한에 맞서 늘 우리 집을 따뜻하게 데워준 할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이처럼 유년시절에 겪었던 많은 경험들은 내가 성장하여 투자업계에 몸담은 이후에도 소중한 교훈으로 작용했다. 인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 절약, 의지, 성실, 치밀한 분석 등 이 모든 것들이 성공적 투자 전략의 디딤돌이 되었다.
손쉬운 방법만을 찾다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많은 투자자들은 1950년대의 인공위성 열풍에서 1990년대의 첨단기술 붐에 이르기까지 당장 유행하는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성공을 거둔 투자자는 극히 소수일 뿐 나머지 대다수는 낭패를 당하고 만다. 쉽게 오는 것은 그만큼 쉽게 떠나버리는 법이다.
성장하면서 나는 성공이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부모님의 결혼도 비슷한 경우였다. 부모님은 내가 네 살 때 이혼했다. 미시간 주 마운트 플레전트의 작은 마을인 바바라 브라운 출신인 어머니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에 아버지와 결혼했다. 뒷날 어머니는 내게, 당신의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아버지와 결혼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결혼 2년 후인 1931년 9월 19일에 첫 아들인 나를 낳았다.
결혼이 파탄에 이르기 전 우리는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다. 디트로이트에 거주할 때는 아버지가 주유소와 정비소를 상대로 자동차 윤활유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아버지는 이사까지 하며 새로운 시작을 모색했지만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우리 가족은 찢어졌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약 14년이나 지나서야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기구한 현실이 눈앞에 드러났다.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어머니는 그토록 싫어했던 그랜드 필즈의 부모님 집으로, 그것도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까지 안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하실에 난방용 아궁이가 있던 그 집은 그랜드 필즈 메디슨 애비뉴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보험상품을 판매하여 번 돈으로 우리 모두의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미시간 주 마운트 플레전트와 오하이오 주 브라이언에서 도시가스 사업을 한 적도 있었다. 대공황이 엄습한 상황에서도 난방과 조리를 위한 가스 수요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지만, 다른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의 사업체도 심각한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1920년대 말의 대공황기에는 과다한 부채로 인해 기업들이 연이어 쓰러지면서 뮤추얼펀드도 덩달아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이 내게는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모두가 할아버지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랜드 필즈에서 살던 내내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생활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인들과 폴란드 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인 탓인지 내게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네프Neff가 독일계 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그랜드 필즈의 인근 지역이면서 생활 수준이 비교적 높은 주택지구인 이스트 그랜드 필즈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나는 집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초등학교에 다니며 2년을 보냈다. 그랜드 필즈와 이스트 그랜드 필즈는 도로를 따라 설치된 여섯 개의 소화전을 기준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행정적 경계 때문에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좋은 학교가 있는데도 멀리까지 다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종종 두 학교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비교하곤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프리츠라는 이름의 여선생님이었다. 언젠가 프리츠 선생님은 내 성적표 평가란에서 ‘pugnacious’(‘논쟁 또는 싸움을 즐기는’이란 뜻의 형용사―옮긴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이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논쟁에서 지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가만히 서 있는 도로표지판과도 말싸움을 벌일 아이라며 커서 틀림없이 변호사가 될 거라고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했을까! 어머니의 생각은 옳았던 것 같다. 먼 훗날 나는 주식시장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1939년, 병으로 몸져눕기 전까지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후 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와 함께 미시간 주의 중심지역인 마운트 플레전트로 이사했다. 할아버지가 마련해준 재산과 보험금으로 받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재산을 잘못 투자한 바람에 문제가 발생했다. 할아버지가 힘들여 모은 재산의 거의 전부를 도즈 외삼촌의 슈퍼마켓에 몽땅 쏟아부었던 것이다.
사업가의 피를 물려받다
나는 사업가 집안에서 성장했다. 방식이야 어떻든 우리 집안에서 창업을 한 사람은 도즈 삼촌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조부인 존 조지 네프John George Neff는 1834년에 펜실베이니아 가문에서 태어나 한동안 교사로 활동한 뒤 어느 벽돌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공장을 인수했다(융자로 인수 비용을 마련했더라면 더 빨리 공장을 인수했을 것이다). 1873년, 벽돌 공장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여러 필의 말과 농장을 구입한 고조부는 그 공장을 세 아들에게 팔았다. 세 아들 중에는 내 증조부인 벤자민 프랭클린 네프Benjamin Franklin Neff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형제는 오하이오 주 브라이언 인근에서 벽돌 공장을 운영했다.
내 어머니의 삼촌과 숙모도 성공한 사업가였다. 두 사람은 1930년대에 그랜드 필즈와 그 인근 지역을 무대로 슈퍼마켓 체인을 만들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슈퍼마켓 체인이라는 소매 방식은 초창기에 해당했다. 푸드 시티Food City라는 이름의 이 체인점들을 나는 지금도 여러 곳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체인점들의 규모는 오늘날 대형 슈퍼마켓에 딸린 정육점 정도의 면적에 불과했다. 가격이나 판촉 프로그램을 바꿀 때는 페인트공을 불러 유리창에 바뀐 내용을 직접 그려 넣도록 했다. 특히 셀러리의 가격할인을 광고하기 위해 페인트공이 그렸던 화려한 그림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슈퍼마켓 체인은 페인트공의 작업 과정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와 더불어 많은 이웃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바로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투자업계에 몸담은 이후로 저렴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주식은 단 한 주도 구매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푸드 시티에서 고용한 도매업자의 비서로 일했고, 도즈 삼촌은 슈퍼마켓 속의 식품점을 운영하며 이 분야의 일을 배웠다. 그러나 어머니의 삼촌과 숙모는 아들(도즈 삼촌)이 슈퍼마켓을 운영해보기도 전에 푸드 시티 체인을 절반으로 쪼개어 그랜드 필즈에 있는 것들만 동업자들에게 넘기고 나머지를 서부 미시간으로 이전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즈 삼촌은 자신이 보유한 지분을 다른 슈퍼마켓 체인인 얼라이드 슈퍼마켓Allied Supermarkets에 팔아 현금을 챙겼다. 이때가 1960년대 초였다. 삼촌의 판단은 현명했다. 머잖아 얼라이드 체인이 파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도즈 삼촌은 외할머니를 찾아와 자신의 슈퍼마켓을 열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했고 할머니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성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가게 사정이 어려워진 탓인지 삼촌은 연일 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삼촌은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했고 가게도 문을 닫고 말았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나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돈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감정적 애착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저평가된 기업에 대한 투자가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셋째, 지나친 음주는 비즈니스도 아니요 삶의 미덕도 아니다.
나는 결손가정에서 자라면서도 미처 그런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늘 화목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두 분의 격려 속에서 성장한 나는 누구보다도 강한 자신감을 형성한 반면에 초등학교 5학년 치곤 자제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훗날 내가 관습을 배격하는 성향을 갖게 된 것도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지극한 관심 속에서 성장한 결과인 듯하다.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없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우리 가정에서는 도즈 삼촌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메워주었다. 삼촌은 조카를 위해 여러 가지 경험을 시켜주었다. 가끔씩 우리는 지도를 보고 그랜드 필즈보다 큰 외국의 유명 도시를 찾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토요일이면 11센트를 들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당시에 11센트면 단막 코미디 한두 편과 진 오트리나 로이 로저스가 등장하는 서부영화를 몇 편 정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서부영화의 주인공들이 곤경에 처했다가도 기적적으로 살아나곤 했던 장면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미국의 8년제 초급 중학교―옮긴이)에 다닐 때 나는 주식시장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시간 주 맥킨리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 우리는 주식시장에 대해 공부했다. (여태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알래스카는 또 왜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는지도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거래에 처음 눈을 뜬 시기는 그랜드 필즈에서 생활하던 5학년 무렵이었다. 방학이면 나도 여느 아이들처럼 술래잡기나 야구 같은 놀이를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야구 카드를 교환하기도 했다. 야구 카드는 매우 귀한 놀이 도구였다. 인기가 많은 카드일수록 구하기도 어려워서 평범한 카드를 세 장, 네 장, 때로는 다섯 장을 줘야 겨우 한 장을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야구 카드는 이상할 정도로 아이들의 인기를 끌었다. 카드가 마치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비싼 가격에 카드를 팔려고 했다. 당시 5학년이던 내 생각에도 이런 유혹은 너무도 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