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앤드류 D. 카푸먼 (Andrew D. Kaufman)은 작가이자 교육자이며 러시아 문학 학자.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슬라브어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카푸먼은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교수, 슬라브어 및 문학 강사, 우수 교육 센터 부소장을 지냈다. 오프라 윈프리의 '오프라 북클럽'에서 러시아 문학 전문가로 활동했고 <Give 'War and Peace' A Chance: Tolstoyan Wisdom for Troubled Times and Understanding Tolstoy>, <Russian for Dummies> (공저) 등을 집필했다. 카푸먼은 도스토옙스키와 다른 작가들의 글을 수감된 청소년들에게 소개하는 'Books Behind Bars'의 창시자이며 그의 작품은 투데이쇼, NPR, PBS, 워싱턴 포스트에 실렸다.
옮긴이 최화정은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대학교 쿠란트 수학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숭실대학교 연구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청심국제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2009 개정교육과정 중등수학 교과서>를 썼고, <전체를 보는 방법>, <만화와 함께하는 즐거운 통계학> 등을 번역했다.
갬블러 와이프
종이책 1판 1쇄 발행 2022년 9월 26일
전자책 1판 1쇄 발행 2024년 1월 02일
지은이 앤드류 D. 카푸먼(Andrew D. Kaufman)
옮긴이 최화정
펴낸이 안병훈
펴낸곳 티타임(기파랑)
등 록 2004. 12. 27 제300-2004-204호
주 소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8가길 56 동숭빌딩 301호 우편번호 03086
전 화 02-763-8996(편집부) 02-3288-0077(영업마케팅부)
팩 스 02-763-8936
편 집 황인희
사 진 윤상구
이메일 info@guiparang.com
홈페이지 www.guiparang.com
전자책 제작inmoo@hanmail.net
전자책(ePub) ISBN 978-89-6523-503-3 05990
전자책 정가 18,000원
THE GAMBLER WIFE
Copyright © 2021 by Andrew D. Kaufman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2 by GUIPARANG PUBLISHING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Massie & McQuilkin LLC through EYA Co.,Ltd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 Co.,Ltd 를 통해 Massie & McQuilkin LLC 과 독점 계약한 기파랑이 소유합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1866년 10월 4일 맑고 청량한 아침, 가느다란 몸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스물한 살의 속기사 예비생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어머니의 아파트를 나섰다. 그녀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넵스키 대로의 상점가에 들러 여분의 연필과 가죽 서류첩을 샀다. 그녀는 자신이 어른스러워보이고 좀 더 사무적으로 보이기를 바랐다.
30분쯤 후 그녀는 말라야 메쉬찬스카야 거리와 스톨랴르니 길의 모퉁이에 있는 회색 벽돌 건물에 도착했고, 어두운 계단을 따라 올라가 2층 13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녀의 고용주가 될 사람의 집이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안나 스니트키나였고, 그녀를 고용할 사람은 44세의 전과자로,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독신의 유명한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였다. 안나는 손목시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약속 시간인 열한 시 30분이 되기까지는 몇 분이 남아 있었다. 젊고 신중한 안나는 고용주의 집에 여유 있게 도착하기를 바랐다. 첫 직장을 잡기를 바랄 때는 더욱 여유가 필요했다.
벨이 울리자 곧 녹색 체크 무늬 숄을 두른 투실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 숄을 본 안나의 머릿속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최신 연재 소설 <죄와 벌>이 떠올랐다. 그 녹색 숄에서 소설 속 마르멜라도프 가족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직 숄을 착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단지 자신은 속기 강사 올킨 교수의 추천으로 온 학생이며, 이 집 주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페도샤라는 이름의 그 하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식당으로 안나를 안내했다. 서랍장과 커다란 트렁크 두 개가 식당 벽에 늘어서 있었는데, 그 위에는 복잡한 모양으로 뜨개질된 덮개가 덮혀 있었다. 하녀는 안나에게 앉을 자리를 권하면서, 주인이 곧 올 거라고 말했다.
2분 후 도스토옙스키가 나타났다. 그는 인사를 차릴 새도 없이 안나에게 그의 서재에 가 있으라고 한 후, 차를 준비시키겠다며 다시 사라졌다. 안나는 크고 음울한 서재를 둘러보았다. 긴 의자는 허름한 갈색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곁에 있는 작고 둥근 탁자에는 헝겊 테이블보가 덮여 있고 그 위에 전등과 사진 앨범 두 세 권이 놓여 있었다. 두 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방은 침침하고 고요했다.”
안나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리고 그 어둑함과 고요 속에서 나는 우울해졌다.”
그 서재는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의 방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용주가 될 사람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방을 훑어보았다. 집안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초상화 속 검은 모자를 쓴 검은 드레스 차림의 유령 같은 여자가 2년 전에 죽은 도스토옙스키의 아내인지 궁금해졌다(나중에 안나는 그 궁금증을 풀게 된다.).
몇 분 후, 좀 전에 만났던 그 수수께끼 같은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안나는 자신감을 보이려고 애썼다. 바로 그때는 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고대했던 순간이었다.
스니트키나 가족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오래 전부터 친숙한 이름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현대 문학에 대한 주제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요즘은 어떤 작가가 있니? 내 시대에는 푸시킨, 고골, 쿠콥스키가 있었지. 젊은 작가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저자인 소설가 도스토옙스키가 있었어. 그 사람은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지”라고 잘라 말했다. 아버지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괜히 과거형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은 정치에 말려들어서 시베리아로 유배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 이후, 아버지가 기뻐할 일이 생겼다. 도스토옙스키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이다. 시베리아 감옥에 4년을 갇혀 있었고 다시 5년 동안 강제로 군대에서 복무한 후였다. 그는 새로운 활력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나의 아버지는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형이 창간한 잡지인 <시간>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스니트킨 가족 모두가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열성적인 독자는 물론 안나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스니트킨 같은 지식인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안나의 아버지는 <시간>과 사람들 사이에서 ‘두꺼운 잡지’라고 알려진 잡지를 구독했다. 매주 또는 격주로 발행되는 문학, 철학, 언론에 관한 개설서인 이 잡지들은 요즘의 <뉴요커>, <뉴스위크>, <사이언티픽 어메리칸>을 한 권으로 합쳐 놓은 19세기 러시아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잡지들에는 소설은 물론이고 뉴스, 서평, 문화 및 문학 비평이 게재되어 있었다. 사실, 그 시대에 거의 모든 러시아 소설가는 이 잡지로 등단하였다. 도스토옙스키도 1846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이 잡지들에 처음으로 게재했다. 그 해에 안나 스니트키나가 태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은 편지 형식으로 쓰인 소설인데 가난에 찌든 47세의 복사공과 그의 먼 친척인 가난한 고아 소녀 사이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그 시대 문학의 특징인 사회 기독교와 감상적 박애주의에 대한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인정받았다. 그 책을 읽고 당대 최고의 문학 평론가 바사리온 벨린스키는 “새로운 고골이 나타났다!”라고 감탄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직접 만났을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자신이 쓴 내용을 이해하나요?”
도스토옙스키는 그날을 오랫동안 기억했으리라. 벨린스키의 공개적인 찬사로 도스토옙스키는 즉시 엘리트 문학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 소설은 독자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처음 맛본 유명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나온 지 몇 달 후 그의 다음 소설 <분신>이 출간되었다. 페테르부르크의 관료 조직에 속해 있는 공무원에 대해 다룬 이 소설은 혹독한 비평을 받고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그 다음 단편들도 마찬가지였다. 벨린스키는 그 작품을 읽은 후 비평가에게 말했다.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천재라고 생각하여 그를 부풀려서 평가했어.”
“선구적인 비평가라는 내가 극도로 바보처럼 행동했어.”
벨린스키는 특히, <분신>의 주인공이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자신의 도플갱어와 기이한 관계를 맺는다는 환상적인 요소에 기겁하며 말했다.
“그런 주제는 정신병원에서나 다룰 일이지, 문학에서 다룰 일은 아니다. 그건 의사가 할 일이지, 시인이 할 일이 아니야.”
1843년 4월 23일, 27세의 도스토옙스키는 페트라솁스키 협회라고 알려진 혁명 모임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도스토옙스키는 거의 10년 동안 문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시 돌아온 후, 그는 <상처받은 사람들>(1861)이라는 작품으로 부활했다. 그 소설은 감상적인 멜로 드라마로서, 모든 장에 개성 있는 인물들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평가들은 그런 요소를 싫어했지만 독자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다음 대작인 <죽음의 집의 기록>(1860∼1863)은 다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시베리아 노동수용소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소설화한 작품이었다. 회고와 폭로, 문화적 비평이 섞여 있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그는, 억압받는 사람이 처한 곤경, 공직 사회의 잔인함, 기독교적인 연민이 지닌 지대한 가치 같은, 자신에게 익숙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 작품에서는 이후 도스토옙스키 예술과 사상의 중심이 된 새로운 이상의 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나중에 작가가 <죄와 벌>로 다시 돌아오는 주제 - 내적 자유를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개인의 인격과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심리적 복잡성 -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의 정신적 깊이도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안나 스니트키나가 그의 문 앞에 도착했던 그때, 이미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에서 가장 유망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최고 작가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그가 번뜩이는 천재성을 보여준 것은 틀림없었지만, 벨린스키 같은 비평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비평가는 좁은 실용주의 관점으로 작품에 접근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사회적 논평을 뒷받침해주는 심리학적 예리함을 간과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를 동시대 러시아 작가 사이에서 우뚝 서게 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학사에 매우 중요하게 만든 것이 바로 심오한 심리학적 통찰과 사회적 사실주의의 조합인데도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자신을 ‘고상한 사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안나 스니트키나에게 도스토옙스키는 그녀를 매료시키고 감동시킨 작가였을 뿐이다. 그녀의 집에 잡지 <시간>이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읽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잡지를 손에 든 채로 안락의자에서 졸고 있으면, 열다섯 살의 안나는 아버지의 손에서 잡지를 살짝 빼내서 정원으로 가져가 도스토옙스키의 최신 소설에 푹 빠져들곤 했다. 적어도 큰언니의 특권을 내세운 마샤가 몰래 다가와 잡지를 낚아채가기 전까지는.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연민은 안나의 본능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녀는 작가가 책 속에 다시 탄생시킨 억압받은 영혼에 가슴 아파했다. “나는 공상가였다. 그리고 나에게 소설 속 영웅은 진짜 사람들이었다”라고 안나는 말했다.
안나는 <상처받은 사람들>에서 아들에게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라고 강요하고 농노를 약탈하는 주인을 미워했다. 또한 아버지에게 맞설 용기가 부족해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를 끊은 순진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들을 거의 그의 아버지만큼 경멸했다. 그녀는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훗날 “내 마음은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끔찍한 생활을 견뎌야 했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으로 가득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 앞에 있는 이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남자는 그녀가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근사하고 고상한 작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도스토옙스키의 밤색 머리카락은 포마드 기름으로 매끄럽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낯빛은 낡고 푸른 프록코트에 비해 창백하고 병약해 보였다. 그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불안해 보였으며, 몇 분마다 한 번씩 안나의 이름을 되묻곤 했다. 그의 눈동자도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왼쪽 눈은 짙은 갈색인 반면, 오른쪽 눈의 동공은 너무 팽창되어서 홍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몇 년 전 뇌전증 발작 중 날카로운 물건에 부딪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속기를 배운 지는 오래 됐소?”
“반 년입니다.”
안나는 프로답게 행동한다는 생각으로 대답했다.
“당신 스승에게는 학생이 많은 편이오?”
“처음 시작할 때는 150명 이상이 그 과정에 등록했는데, 지금은 25명 정도만 남았습니다.”
“아, 왜 그렇게 조금밖에 남지 않은 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많은 사람이 속기는 간단해서 배우기 쉽다고 생각해 시작했다가, 며칠 배우다 보면 따라가기 어려워져 그만두는 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안나는 확신 없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그런 식이지, 그렇지 않소?”
도스토예스키가 말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면, 처음엔 열기가 뜨겁다가 금방 식어버려요. 그러다 다 포기하기도 하고. 당신 동료들은 당신이 일해야만 하는 걸 알고 있을 테고··· 요즘 누가 일하고 싶어 하겠소?”
그는 그녀에게 담배를 권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종종 그랬듯이 안나를 시험하는 중이었다. 그에게는 사랑, 관계, 삶 그 자체 등 모든 것이 시험이었다. 그가 특히 적극적으로 알아내고자 한 것은 안나 스니트키나가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대개혁 여파로 1860년대 러시아 전역에 나타난 진보 성향의 많은 젊은 여성과 같은 부류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대개혁은 그 당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굴욕적으로 패배한 후 도입된 일련의 전면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주도했다.
안나도 사실, 그녀 세대의 젊은 러시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을 60년대의 여성이라고 부르듯이, 자신을 해방된 60년대의 여성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새로운 길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노동으로 돈을 벌고 독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나중에 도스토옙스키와 일하는 미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상기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60년대 여성으로서 내게 독립에 대한 생각은 매우 소중했다.”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젊은 여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으로 의식이 있는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개방 정신의 흐름을 타면서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가족 구조를 철저히 변화시키기 위해 억눌려 왔던 열망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쟁 이후의 러시아 사회를 재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할 기회를 여성들에게 주라고 요구했다. 그 몇 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여성의 역할과 가족에 대한 전례 없이 많은 책과 기사가 등장했으며, ‘여성 문제’라고 알려지게 된 토론도 탄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새로운 페미니스트 운동을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여성의 지적 지평을 넓히는 일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던 그 시대의 몇 안 되는 주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교육받은 여성들을 위한 더 넓은 길이 필요하다.”
그는 1860년대 초에 이렇게 썼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신조 중 하나인 바늘, 실, 사슬뜨기, 바느질 등의 잡다한 것들로 채워지지 않은 길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안나가 읽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게재되어 있는 그 잡지에서 도스토옙스키는 페미니스트의 지지자들을 ‘해방자’로 치부한 보수적 비평가들에 맞서 페미니스트들을 옹호했다. 그는 여성 해방을 기독교적 인류 사랑의 문제이며, 상호 사랑의 이름으로, 즉 여성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사랑의 이름으로 교육하는 문제로 보았다. 그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그런 관계는 지극히 건강하고 바람직하며, 사회 자체의 수준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 그는 러시아 여성이 겪는 곤경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소설은 전형적으로 부모나 남편, 보호자 또는 후원자의 노예가 되거나 결혼, 매춘, 또는 남자와 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가난에 빠진 여성 캐릭터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페니미즘의 목표에 동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극단적인 페미니스트가 경솔하게도 자신들로부터 그를 밀어냈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신여성’이라는 말은 ‘새로운 러시아’라는 말로 인해 그가 잘못 알고 있었던 많은 것을 상기시켰다. ‘새로운 러시아’는 품위와 겸손의 가치를 잃은 나라이고, 무엇보다도 도덕을 잃은 나라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아 소유욕과 냉소주의, 물질주의에 의한 타락을 신봉하는 이 어리석은 새 세상에 개탄했고, 특히 자유 연애에 분개했다. 몇몇 진보적인 젊은 여성으로부터 거절당한 개인적인 이유로, 외로운 홀아비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류의 페니미즘에 반발했다.
그 시대의 극단적인 페미니스트와 달라 보이는 안나 스니트키나는 도스토옙스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녀는 경솔하거나 성급하지 않고 침착해 보였다. 그가 내민 담배를 그녀가 공손하게 거절하자, 소설가는 젊은 여자의 신중하면서 거의 엄격한 행동에 놀랐으며 그런 진지하고 유능한 젊은 여성을 만난 것에 기뻐했다.
안나는 그의 무뚝뚝한 태도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곧 채용될 이 여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가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안경을 쓰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게, 즉 ‘신여성’의 전형적인 반 부르주아적 습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여성스러운 겸손함과 직업인다운 요령으로 그녀는 그에게 훌륭한 첫인상을 남겼다.
“올킨 교수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추천해줘서 다행이오. 그 이유를 아시오?”
도스토옙스키가 안나에게 말했다.
“아니오. 모릅니다.”
“남자는 술을 시작하기 쉬우니까요. 당신은 술 때문에 문제 생길 일은 없겠지요?”
안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진지하게 대응했다.
“저에게는 절대 술 때문에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그럼 잘 되는지 봅시다.”
도스토옙스키는 애매모호하게 중얼거렸다.
“한번 해 봅시다.”
“그럼요, 해 보죠.”
자신에 대한 의심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아직 남아 있을까 봐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저랑 일하는 게 불편해지면 솔직하게 바로 말씀해주세요. 이 일이 잘 안되더라도 선생님을 원망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돼요.”
속기사로서 그녀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작가는 그 해에 <죄와 벌>이 연재되고 있는 <러시아 메신저>를 들고, 그녀가 받아쓸 수 있기를 바라며 무척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안나는 속기 훈련을 받았음에도 그가 읽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보통의 대화 속도로 받아쓰기를 할 수 있는지 공손하게 물었다. 읽는 데 방해받은 것에 짜증난 도스토옙스키는 몸을 숙여 그녀가 받아 적은 것을 확인했다. 그는 마침표를 생략하고 불분명하게 경음부를 쓴 것을 지적하면서 여성들은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불평했다.01 모욕에 충격받았지만 안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시 그녀에게 직업적으로 성공하여 독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그걸 위태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몇 분 후에 도스토옙스키는 쉬어야겠다며 그녀에게 이따 저녁에 다시 돌아와 소설을 받아 써달라고 부탁했다. 안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고용하려는 것임을 알고 안심이 되는 한편 혼란스러웠다. “나는 매우 우울한 기분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아파트를 나섰다”라고 훗날 그녀의 회고록 <회상>에서 밝혔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우울하게 했다.”
출판되지 않은 원고에서는 더 심한 표현을 썼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처럼 나에게 어렵고 우울한 인상을 남긴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내 앞에는 끔찍하게 불행하고 망가져서 고통스러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오늘이나 어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누군가를 잃은 사람, 어떤 끔찍한 불행에 휩싸인 사람 같았다.”
안나는 변덕스러운 천재이면서 본능적인 여성혐오주의자가 분명한 도스토옙스키를 위해 일하면서까지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사람들이 하는 불쾌한 말을 들으면서 밥벌이를 하는 것은 때로 쓰라린 경험이 될 수 있다. 근데, 우수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그가 그 정도라면 배우지 못한 사람은 오죽할까? 직업을 갖는 일로 그런 불쾌한 일을 당할 바에야 결혼을 하는 게 낫겠다.”
그녀는 자신의 고용주가 한 무례한 말을 떠올리며 일기에 썼다.
바로 그런 결정은 그녀의 어머니 세대가 택한 길이었다. 저명한 젊은 교수와 최근에 결혼한 그녀의 언니 마샤가 택한 길이기도 했다. 안나는 그 선택이 가진 매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안나는 그날 저녁에 도스토옙스키의 아파트로 돌아왔고 그 다음 날에도 방문했다. 여러 차례 계속 만나면서 그녀는 그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첫 만남 이후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훨씬 따뜻해졌고 말도 많아졌다. 그의 말은 여전히 연결이 잘 되지 않은 채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건너뛰기 일쑤였지만, 말할 때의 그는 어쩐지 더 젊어 보였다. 안나 쪽에서는 여전히 신중하면서 거의 엄격하게 대했다. 안나는 그가 아무리 편하게 느껴지더라도 업무적인 관계만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몇 시간째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안나는 작가의 활기차고 어린애 같은 열정에 매료되었다. 그는 페트라솁스키 협회에 참여한 죄로 체포된 일과 거의 사형에 이르렀던 끔찍한 경험을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이 단체가 선동적인 인쇄물을 출판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니콜라이 1세는 그 조직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849년 12월 22일, 도스토옙스키는 흰 가운을 입고 눈이 가려진 채 세묘놉스키 광장으로 끌려가서 그의 동지들과 함께 줄지어 세워졌다.
“준비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살 시간이 5분도 남지 않았음을 알았소.”
그는 안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5분은 몇 년 또는 10년처럼 느껴져서 아직도 그 순간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것 같아요!”
죄수들은 죄수복을 입고 3인 1조로 나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세 번째 줄, 전체 중 여덟 번째 자리에 서 있었다. 첫 세 명은 처형대에 묶여 있었고, 곧 그의 차례가 다가오리라.
“세상에, 내가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그때 갑자기 철수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동지들은 기둥에서 풀려났다. 그에게는 4년 동안 중노동에 처한다는 새로운 선고가 내려졌다.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처형 과정은 도스토옙스키와 다른 조직원들을 공포로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형대는 도스토옙스키와 조직원들을 겁주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무대였던 셈이다.
“그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소.”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말했다.
“나는 감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소. 삶이 내게 준 선물이 너무 기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거요.”
안나는 그가 겪은 고난과, 자신과 같이 거의 낯선 사람인 새 고용인에게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중, 어느 것이 더 충격적인지 혼란스러웠다. 그 시대의 학식 있는 러시아인들이 그랬듯이 도스토옙스키도 정치적인 활동 때문에 투옥되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용은 항상 비밀에 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젊은 고용인에게 베일에 가려진 부분을 살짝 보여주려 했다.
“겉으로 보면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 같다.”
안나는 나중에 일기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때, 그가 그런 이야기를 너무 자세하고 진솔하게 털어놓아서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해주어서 참 좋았다. 사람을 신뢰하고 마음을 열어주는 모습이.”
또 다른 이야기가 안나의 관심을 끌었다. 형 미하일이 죽고 나서, 도스토옙스키는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형이랑 함께 창간했던, 처음에는 <시간>이었다가 이후 <시대>로 이름을 바꾼 잡지는 정리해야 했다. 법적인 책임이 없었음에도 도스토옙스키는 그 잡지와 관련된 채무를 떠안았다. 뿐만 아니라 홀로 된 미하일의 아내와 조카를 부양하기로 약속했다.
그를 짓누르는 이런 책임 때문에, 채권자에 둘러싸인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공포에 시달렸다. 그 결과 1865년 7월, 표도르 티모페예비치 스텔롭스키라는 수상한 편집자이자 문예 투기꾼과 잘못된 계약을 맺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3천 루블(오늘날로 치면 3만 달러도 안 되는 금액이다)의 선금을 받는 대가로 스텔롭스키에게 이전에 출판된 모든 작품을 한 권으로 다시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양도했다. 그 작품 중에는 여전히 출간 중인 소설도 많이 있었다(참고로 비교하면,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작가인 투르게네프는 몇 년 전에 <아버지와 아들> 한 권만으로도 거의 5천 루블, 요즘으로 치면 5만 달러를 받았다.).
거기다 더한 일은, 계약상으로는 도스토옙스키가 투기꾼에게 1866년 11월 1일까지 새로운 장편 소설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이행시, 소설가는 자신의 모든 수입을 포함하여 다음 9년 동안 그가 쓴 모든 작품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어 있었다. 겨우 1년 반 정도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받기 위해 도스토옙스키는 앞으로 거의 10년 동안이나 일하면서 벌 수 있는 수입을 포기했던 셈이다.
1865년 가을, 작가는 <죄와 벌>의 연재에 몰두한 나머지 스텔롭스키에게 빚진 소설을 쓸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소설의 기한이 차기 한 달 전인 10월 초,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몇 장의 흩어져 있는 메모와 대략적인 계획뿐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자 그는 자신의 가장 오래되고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밀유코프에게 연락했다. 처음에 밀유코프는 동료 작가들을 모아 함께 소설을 쓸까 했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다른 사람의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넣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밀유코프는 다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유명 속기 교수인 파벨 올킨에게 연락하여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제자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동의했고, 그렇게 해서 안나를 자신의 방으로 이끈 구인 광고를 게시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페도샤는 신선한 빵과 뜨거운 홍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방을 드나들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저런 주제를 두서없이 이어가자, 그러다가 정작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안나는 크게 걱정되었다. 할 수 없이 자신이 온 목적을 고용주에게 상기시키려는 순간, 작가는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안나에게 받아 적기를 부탁했다. 그녀가 재빨리 자신의 가죽 가방에서 연필과 공책을 꺼냈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담배에 불을 붙인 채 문과 난로 사이를 빠르게 걸으면서 <도박꾼>이라는 새 소설을 구술하기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제 안나의 고용주였고, 그녀는 그의 고용인이었다. 그 일은 그녀의 첫 직업이었고, 러시아 여성해방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진보적인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녀는 직업을 가졌음에 황홀해 했다. “내 소중한 꿈이 실현되었어. 나는 직업을 가졌어!”라고 그녀가 회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망하던 독립은 다른 요인들로 인해 어려워졌다. 그녀가 직업을 구하러 왔다가 곧 작가이자 도박꾼의 아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혼돈과 기회의 삶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그런 실용주의적이고 야심찬 젊은 여성에게는 예상할 수 없던 결정이었다.
안나 스니트키나와 그녀의 고용주이자 연인, 남편이면서 책임자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직결된 러시아의 가장 격동적인 시대 중 하나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독재 정치를 없애고 서구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러시아를 재건하려는 자유주의자들과 수세기 동안 러시아에 존재했던 가부장제를 보존하고 황제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러한 분열은 1860년대 초에 알렉산드르 2세가 시행한 대개혁으로 더욱 첨예해져 갔다. 대개혁은 많은 보수주의자를 불안하게 하였지만 자유주의자들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구조적 변화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수세기 동안 근본적으로 봉건적이고 농업 중심이었던 사회에 자본주의가 도입되자 진보주의자와 전통주의자 모두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한편에서는 알렉산드르 황제의 개혁과 함께 ‘여성 문제’가 떠올랐다. 이런 급변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이뤄졌다. 1850년대에 페미니스트들과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던 이 문제는 1860년대에 불이 붙었고, 마침내 급성장하는 혁명 운동에 흡수될 때까지 타올랐다.
안나 스니트키나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경쟁적인 이데올로기들 속에서 독창적인 길을 개척하면서 ‘여성 문제’에 자신만의 답을 찾으려는 한 여성의 노력을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문학가들은 대부분 그 시대의 문제에 열정적으로 관여했다. 이때 수백 종의 두툼한 잡지가 등장했는데, 그들은 각기 어떤 파벌을 대변했다. 대부분 자유주의적 성향의 잡지였는데, 러시아를 위해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일이 혁명이라고 주장했던 당대 급진적인 지식인들을 대변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몇몇 두꺼운 잡지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했다. 선구적인 사상가 알렉산더 헤르젠은 자신의 잡지 <종>에서 그 시대의 분위기를 포착해내고 있다. 그는 “폭풍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 폭풍을 놓치는 건 불가능하다. 혁명파와 반동파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의 머리가 빙빙 돌고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무거운 질문이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라고 썼다.
<시간>을 창간할 당시, 도스토옙스키 형제는 대립적인 두 집단에게 화해의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1860년대 중반 러시아 사회의 이념적 균열을 막을 수 없음이 명백해지자 도스토옙스키는 보수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한때 페트라솁스키 협회의 일원이었던 도스토옙스키는 보수주의자들의 맹점을 공공연히 인정하면서도, 급진적 지식인의 무신론, 과학 숭배, 혁명적 폭력에 대한 요구를 자신 속에 깊이 내재된 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다. 그래서 보수파를 선호했다.
안나와 도스토옙스키가 만났을 때는 헤르젠이 언급한 ‘무거운 질문’이 러시아 지식 사회를 넘어 사회 구석구석에 넘쳐나고 있었다. 러시아 문학은 이러한 문화 전쟁에서 공적 역할을 키우고 있었다. 독자는 작가가 그 시대에 불타오르고 있는 사회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기 바랐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인생 경험, 1846년 그의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 이후로 쭉 탐구해온 주제들을 통해 비록 선두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그 바람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도스토옙스키의 삶에 안나가 나타난 것은 개인적이면서 사업상 빚어진,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 젊은 속기사는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라, 머잖아 그가 지닌 시민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고 세계 문학계에 내로라 하는 작가가 되겠다는 러시아 작가로서의 야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안나는 남편의 예술 세계에 몰입하게 되면서 자신의 영적 진화에 영향을 받았고 도스토옙스키가 세 가지 가장 중요한 문학 주제 - 열정의 힘, 지적 자긍심의 위험, 구원의 영속성 -에 접근해 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책 <도박꾼 아내>는 도스토옙스키와 러시아 문학,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적 혼란에 대한 수십 년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안나 스니트키나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삶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차 및 2차 자료로 신중하게 재구성되었으며, 이 자료 중 다수는 학술 출판물에 기고하는 슬라브어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발굴된 것이다. 이전의 이야기들은 스니트키나의 등장을 소설가의 삶에 극적인 변화로 인식했을 뿐, 그녀가 대행한 일이나 그녀가 등장하게 된 복잡한 사회, 문화적 배경은 도외시했다.
지금까지 스니트키나는 한 위대한 남자를 자기 파괴적인 성향으로부터 구하고 그의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빛내려는 유일한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는 인상을 주어왔다. 그러나 이제 독자들은 이런 인상을 주는 책들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기존의 전기에서 간과했던 그녀의 성격과 복합적인 면, 그녀가 한 결정, 그녀가 처했던 위험 등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와의 관계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보다는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녀는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려줌으로써 그녀를 잘 보여준다.
안나 스니트키나의 선택에 대해 말할 때,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뤄낸 방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고려할 가치가 있는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안나는 남편의 일에 헌신하면서 해방된 여성이 되고자 하는 그녀의 오랜 꿈을 저버린 것일까? 동시대의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분명히 남편과 그의 작품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헌신을 여성 해방의 꿈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을 것이다. 안나 도스토옙스카야가 도스토옙스키를 위해 치른 많은 희생과 고난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독자들도 그녀를 해방된 여성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대가 그녀를 필요로 했던 어떤 순간에 안나는 당시의 페미니스트 독자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례들은 그녀의 궁극적인 개인적 성공과 직업적 성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19세기 러시아 페미니스트 원고를 온전히 자신의 생각만으로 다시 쓰는 능력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안나 스니트키나, 이 불안한 인물들은 그들의 삶이 무척이나 풀리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이 잠기지 않은 문 사이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순간에 만났다. 도스토옙스키는 무모한 모험가이자, 창의적인 천재였으며, 작품 활동을 일관되고 꾸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미친 듯이 글을 써대는 변덕스러운 작가였다. 안나를 만났을 때 그는 궁핍에 찌들어 있었으며, 경력을 거의 망칠 정도의 자기 패배적인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다.
안나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야망이 강했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일종의 도박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보다 훨씬 더 기민하고 전략적인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시 러시아의 다른 수백 명의 젊은 여성처럼, 안나는 속기사로서 단순하지만 직업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인한 기질과 열정적인 성격을 지닌 그녀가 과연 그런 삶에 만족했을 지는 의문이다.
그들의 결합은 매우 불완전했던 만큼 복잡했다. 거기에는 현대인이 보기에는 불편한, 도스토옙스키의 나르시시즘과 학대 성향이 억제되지 않은 채 계속 나타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인내심과 판단력, 그리고 무모할 정도로 위험을 감수하는 자신의 능력을 조합하여, 그의 인생에서 다른 여성들이 실패했거나 시도조차 포기했을 때도 그와 성공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안나는 끈기와 풍부한 지략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경력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학대와 직업적인 채찍질 모두를 참고 견디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도스토옙스키가 <백치>(1868∼1869)나 <악령>(1871∼187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1880)과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 필요로 했던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안나의 적극적인 사랑은 도스토옙스키 후기 명작의 예술적 비전에 영감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성실함과 판단력, 야망을 갖춘 안나는 전례 없고 성공적인 자신의 사업체를 세울 기회를 스스로 개척하여,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출판업자가 되었다. 이 사업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와 직업적 성취에 대한 만족을 안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운영하는 안정적 수익 사업에 참여하게 하는, 요구는 많고 비양심적이기까지 한 출판사에 도스토옙스키가 위태롭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당신은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오.”
도스토옙스키는 죽기 몇 년 전에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소.”
안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삶과 경력이 어떠했을지 잘 알고 있는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책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헌정함으로써 그녀에게 최고의 명예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당신은 나를 이해한 유일한 여자라오.”
이제 드디어 독자들도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1846년 8월 30일,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는 수도원의 낭랑한 종소리와 엄숙한 군악대 음악에 둘러싸인 가운데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상쾌한 날씨의 그날은 13세기 전사인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왕자의 축일이었다. 훗날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시기와 의식에 깃든 정신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외국 침략자를 물리치고 멀리 떨어진 위대한 러시아의 부족들을 통일시킨 그녀의 수호 성인 넵스키 왕자처럼,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러시아의 전사가 되었으니까.
역설적으로 그녀는 러시아 도시 중에서 가장 서구화된 유명 도시에서 자신의 인생을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는, 후진적인 사회로 여겨졌던 것들을 현대화하기 위해 진행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러시아의 수도였다.
표트르 대제는 베네치아 양식의 아름다운 운하와 2∼3층짜리 고전적인 건물들이 늘어선 좁은 거리들을 질서정연한 격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서양으로 열린 창문’을 디자인했다. 네바강 강둑을 따라 황제의 장엄한 겨울 궁전이 도시의 중심부를 장식하고 있었다. 궁전에서는 네바강 반대편에 있는, 두 개의 기둥과 강으로 내려오는 화강암 강둑을 양쪽에 두고 있는 웅장한 증권거래소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가 보였다. 당시 그 요새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쓰였다(1849년 도스토옙스키도 선고를 기다리는 몇 달 동안 그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정치와 문화 권력의 거점인 도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거리와 건물은 더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그곳,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에 위치한 비좁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아파트가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특유의 고통받는 인물들이 사는 곳이었다.
안나 스니트키나는 도시의 중심부에서 별로 멀지 않은 2층짜리 벽돌집에서 안락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그 집은 코스트롬스카야와 야로슬라브스카야 거리의 모퉁이에 2만m²가 넘는 땅에 서 있었다. 그녀의 가족은 이 집과 같은 땅에 지어진 또 다른 집 세 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외할아버지의 유산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부유한 스니트킨스는 가장 큰 집의 2층에 살았다. 그곳은 향기 짙은 베리 관목이 있는 크고 그늘진 정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집의 다른 방들은 세입자들에게 임대했다. 활동적인 안나의 어머니가 임대료를 관리했고, 안나의 아버지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스니트킨은 정부 부처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여기서 안나는 조용하고, 신중하고,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싸움도, 극적인 사건도, 재앙도 없던 시절이었다.
문학과 관련하여 그녀가 어렸을 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권의 아동 도서가 전부였다. “아무도 우리를 ‘계발’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이 시기에는 자유방임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과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에서 유물론, 실증주의에서 경건주의에 이르기까지 자기 계발과 사회 진보의 이론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그 당시의 잡지는 성병 치료법에서부터 인생을 바꾼다는 영적 체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잡다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 두꺼운 잡지의 광고를 슬쩍 들춰보기만 해도 러시아인이 병든 인류를 치유할 만병통치약이 있다고 믿었거나 믿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유토피아적인 꿈과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약속도 스니트킨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방식을 자랑스럽게 고수하면서, 무엇보다도 근면함, 겸손함, 조용하고 일상적인 봉사에서 생기는 만족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애지중지 자란 것은 아니지만, 안나와 그녀의 형제들, 언니 마샤, 남동생 이반은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름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넓은 가족 정원에서 놀았고, 겨울에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얼음 언덕에서 썰매를 탔다. 크리스마스에 가족들은 전나무에 불을 켰고, 카니발이 열리는 주에는 부모님이 반짝이는 종과 밝게 빛나는 나팔로 장식된 마차에 태워주었으며, 일 년에 두 번은 극장에 갔다. 명절이 되면, 축하하러 온 친척들이 스니트킨 부부의 넓은 아파트에서 밤늦게까지 머물곤 했다. 안나가 태어난 때도 명절을 축하하는 기간이었다. 가족은 행복이 다가올 전조라고 기뻐했다. 훗날 안나가 결국은 실현됐다고 주장했던 그 예언이었다.
안나가 자각하는 어릴 적 기억 중 하나는 갓난아기였을 때의 일이다. 그 지역의 짐 마차가 스니트킨 가족 소유의 낡은 헛간에 돌진한 일이 있었다. 두 살배기 안나를 돌보던 어머니와 유모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지만, 잠시 후 운 좋게도 마차꾼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 년 후 그녀가 심각한 병을 앓았을 때도 똑같은 힘이 작용했다. 이때 자신을 낫게 한 것이 맨가슴 위로 기어간 거머리인지, 슈팔레르나야 거리에 있는 교회에 걸려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어머니라는 기적의 성상 앞에서, 성찬식을 받고 기도하라 했던 어머니의 고집인지 안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낫게 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순간 이후로 안나는 어떤 영적인 힘이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스니트킨 가족은 그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안나는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민첩하며 장난을 잘 치는 사람인 아버지가 젊은 시절을 철저하게 즐기다가 42세가 돼서야 청혼한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루터교 주교를 포함하여 스웨덴 학자를 배출한 집안의 날씬하고 놀랄 만큼 아름다운 스물아홉 살의 안나 니콜라예브나 밀토페우스에게 청혼했다. 시부모의 요구로 예비 신부는 결혼 전에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해야 했다.
안나 니콜라예브나는 최종적으로 답을 하기 바로 전날 저녁, 친정집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계시를 달라고 빌었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난 후, 고개를 든 그녀는 십자가 위에서 방 전체를 비추는 마법 같은 광채를 보았는데, 그 광채는 곧 사라졌다. 그녀는 두 번째, 세 번째 아우라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같은 날 밤, 안나 니콜라예브나는 그리스 정교회에 들어가 성유를 바르는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성막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십자가 위의 환영과 꿈이라는 두 징후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스니트킨과 결혼할 운명이라는 확신을 그녀에게 심어주었다(2주 후에 시모놉스카야 교회에서 실제로 개종 의식을 치르는 동안, 그녀는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그리스도의 성막 옆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안나 니콜라예브나는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된 기도문을 읽을 수 없었지만, 최근에 개종한 사람이 가진 맹렬한 믿음과 헌신을 정교회 신앙에 쏟아부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내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을 텐데, 그건 나에게 큰 고통이었을 거야.”
그녀의 딸은 어머니를 집안의 진정한 가장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흔쾌히 가장의 자리를 양보했고, 자신을 위해서는 지역 골동품 상점에 들러 장식품과 희귀 도자기를 살 수 있는 권리와 같은 몇몇 소중히 여기는 자유만을 남겨 두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끔 유순한 기질 속에 가려져 있었던 용기를 보여주어 안나를 놀라게 했다. 스니트킨이 열 살 때, 학교 가는 길에서 만난 잘 차려입은 신사가 그에게 갓 태어난 남자아이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어린 스니트킨은 주저 없이 동의했는데, 한 가족의 아이들이 모두 죽었을 경우 그 집의 신생아는 아이의 아버지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안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편안하고 활기차며 관대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예로 그 이야기를 자주 인용했다.
안나는 아버지를 닮아 동화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동화는 <이반 두라초크> 또는 <바보 이반>이었는데,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계속 내용을 바꾼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이반이 당하고 또 당하는 불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어떤 꾀를 쓰는지 알고 싶어 남동생과 언니 사이에 끼어 앉아 기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곤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언젠가 꺼내 쓸 수 있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두 가지 기술 - 스토리텔링과 생존 -을 배우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몇 년이 지난 후 안나와 도스토옙스키는 장난스러운 시를 지었는데, 그 시 덕분에 유럽 여행 중에 겪었던 매일 매일의 불행을 덜 수 있었다. 이 장난스러운 시에서는 스니트킨이 좋아하는 동화 속 황홀한 리듬과 낙천적인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스니트킨은 또한 열렬한 예술 신봉자였다. 그는 예술을 거의 종교적인 경외심으로 바라봤다. 젊었을 때 그는 유명한 비극 전문 여배우 바르바라 아센코바를 숭배해 극장에서 공연 중인 그녀를 바라보며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결국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대 뒤로 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놀랍고 기쁘게도, 아센코바는 젊은 팬에게 즉시 호감을 가져서 라신이나 코르네유의 구절을 암송하러 무대에 오를 때마다 자신의 꽃다발과 숄을 꼭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그에게 분장실까지 자신을 에스코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여배우가 결핵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젊은 스니트킨은 너무 상심한 나머지 몇 년 동안 극장에도 갈 수 없었다. 안나의 회상에 따르면, 나중에 아버지는 그녀와 언니 마샤를 데리고 이 여배우의 무덤에 찾아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명복을 빌게 했다.
안나에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소개해 준 이도 아버지였다. 10대 중반이었던 1860년에서 1863년 사이에 <시간>에 게재된 작가의 자전적인 글,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면서 그녀는 시베리아에서 수년간 힘든 노동을 하는 죄수가 내레이터인 이 이야기에 고통스러워했다.
1861년 같은 잡지에 실린 <상처받은 사람들>을 접한 안나는 몽환적이고 무일푼인 젊은 작가 이반 페트로비치를 동정하게 되었다. 작품 속에서 나타샤에 대한 이반 페트로비치의 사랑은 물거품이 된다. 나타샤의 부모가 더 안정된 직업을 가질 때까지 결혼을 미루라고 이반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나타샤는 잔인하고 부유한 상인의 쓰레기 같은 아들 알료샤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반 페트로비치가 알로샤를 더 큰 돈벌이로 유인하여 나타샤를 멀리하게 할 때까지 그들의 관계는 지속된다.
그런 내용 전개는 초기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온순하고 순수한 몽상가 기질의 예술가가 사회적 약탈자로 가득한 냉혹한 현실에 맞닥뜨린다는 내용. 평생 동안 이기주의자를 혐오했던 안나 스니트키나는 반사적으로 약자의 편을 들었고, 개인이 당한 부당함을 도스토옙스키 식으로 묘사해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타샤가 어떻게 사랑스러운 이반 페트로비치보다 쓸모없는 알료샤를 더 좋아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는걸요, ‘이반 페트로비치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나타샤가 그렇게 된 건 당연하다’라고요.”
약혼 후 그녀가 도스토옙스키에게 한 말이다. 그녀는 이반 페트로비치가 작가 자신의 대리인임을 눈치챘다.
“나에게는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이뤄지지 않은 슬픈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작품과 인생 이야기를 주의 깊게 추종했기에, 그녀는 소설의 자전적인 함축성을 알아챘다. 특히 페트로비치가 안나에게 익숙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과 매우 비슷한 작품을 쓴 작가라는 사실 덕분에 쉽게 미루어 생각할 수 있었다.
안나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걸 확인한 가족은 열여섯 살의 그녀에게 작가의 미완성 소설 중 하나에서 이름을 따서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는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더 흔히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해석된다. 이 소설은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학대받는 고아 소녀의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다.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는 어쩌다 만난 가족의 보호를 받다가 그 다음에 만난 가족과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갖는다. 소녀는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고통스러운 경험을 지나 가수로 입문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집필은 그의 체포와 투옥으로 중단되었다. 연재의 첫 두 편은 1849년 4월 그가 체포되기 전에 출판되었고, 세 번째 편은 한 달 뒤에 발표되었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했는데, 만약 완성했다면 19세기 러시아 최초의 페미니스트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조지프 프랭크라는 학자는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짓밟히기를 거부하는 여성을 묘사하는 최초의 작품이었다. 이후 그 여성은 주요 러시아 소설의 낙관적인 여주인공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런 이야기를 집필하면서, 도스토옙스키는 19세기 중반 러시아 문화에서 가장 극적인 격변 중 하나인 독특한 페미니스트 운동이 떠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페미니스트에 관한 인식은 러시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1700년대 후반부터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1856년 의사이자 교육학자 니콜라이 피로고프가 쓴 기사에 영향을 받아 비로소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피로고프는 크림전쟁에서 자신이 지도했던 여성 간호사들의 기술과 용기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국가의 물질적·정신적 안녕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남편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려면 여성들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육이 초기 러시아 페미니스트 운동의 중심 목표가 된 것은 그 덕분이다. 그 목표는 1858년 정부가 최초의 여자 중등학교를 개설하고 이듬해에는 여학생들에게 대학 과정을 개방하는 계획을 승인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또 다른 초기 주창자 미하일 미하일로프는 여성들이 고용과 생산적인 사회 활동에 관심을 돌리기 전에 일찍 자녀를 양육하여 자유로워질 수 있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사랑에 기초한 결혼을 위해 여자에게 이혼할 자유를 주는 데 찬성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다른 목소리들이 논쟁에 참여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여성이었다.
“숙녀 여러분,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자신의 두 발로 서세요!”
1860년경에 <경제 지수>라는 책을 남편과 공동 편집했던 마리아 베르나츠카야는 이렇게 외쳤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의미 없는 활동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라고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여성들을 돕기 위한 여성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듯했다. 페름의 어느 동네에서 한 주최자는 불만을 터뜨렸다.
“러시아 여성들은 사실상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전혀 없다.”
그 주최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무신경한 옷차림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러시아 여성들은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전혀 대접받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남성들이 여성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라는 주장과 함께.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특정 여성들을 지원하는 자선 운동에 에너지를 쏟았다. 예를 들어, 중하위 계층의 어린 소녀들에게 읽기, 쓰기, 바느질, 종교를 가르치는 기회를 제공한 주일 학교 운동이 인기를 끌었다. 한 교사는 이 운동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일, 공공의 이익,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를 찾는 우리의 열망을 실현해준 첫 번째 출구였다.”
1860년대 초까지 ‘여성 문제’는 당대의 잡지, 대학 강의실, 학생 아파트, 문예 살롱 등에서 뜨거운 이슈였다. 이 운동은 많은 장·단편 소설에 영감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소설은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의 1863년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이는 진정으로 해방된 여성의 모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그 전날 밤> 속의 젊은 페미니스트 여주인공은 결핵에 걸린 자유 투사와 결혼하고, 남자가 죽은 후에도 불가리아 해방이라는 고귀한 정치적 대의를 위해 계속 싸운다. 나데즈다 크보신스카야의 소설, <기숙학교 소녀>(1983)는 지방 귀족 가문의 딸인 렐렌카가 페미니스트 사상에 영감을 받아 부모로부터 벗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렐렌카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은 후에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바보 같은 짓이다. 맹세코 누군가가 나를 지배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 낡고 야만적인 관습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저들과는 반대로 나는 모두에게 내가 한 대로 하라고 말한다. 일할 몸과 강한 의지를 가진 모든 자여, 자신을 해방시켜라! 혼자 살아라. 일, 지식, 자유.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녀의 말은 곧 1860년대 급진 여성주의자들을 위한 청사진이기도 했다.
반동주의자들은, 크보신스카야의 소설 여주인공 렐렌카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을 ‘여성 허무주의자’로 치부했다. 그들이 혁명적 대의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 규범을 공공연하게 경멸하고 의도적으로 불손한 행동과 복장을 한다는 이유였다. 이 여성 중 다수는 보호자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며, 남성들이 자신을 위해 문 열어주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예의 바른 사회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젊은 여성들이 사용하는 모슬린, 리본, 파라솔, 꽃을 경멸하는 여성 허무주의자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허리를 조이지 않는 일자형의 어두운 색 모직 드레스를 입기도 했는데, 그 옷의 장식은 흰 깃과 흰 소매뿐이었다. 그들은 짙은 파란색 안경을 쓰고 외국의 과학 작품을 탐독했으며, 러시아의 순수 문학은 여리고 구식이라며 읽기를 거부했다. 한 선동가는 “우리를 당신의 동지, 인생을 함께 하는 동료, 당신과 동등한 사람들로 소중히 여겨주세요”라고 요구했다.
“우리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러면 우리도 우리가 여성임을 상기하는 횟수를 줄이려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또는 사회적 혁명에 대한 요구는 1850년대의 페미니스트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1850년대의 페니미스트들은 사회의 완전한 개편보다는 여성을 위한 취업과 교육 기회를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초기 흐름은 나데즈다 스타소바, 마리아 트루브니코바, 안나 필로소포바가 이끌었다. 그들은 실용주의와 삶의 경험을 결합한 교육을 잘 받아 강한 사회적 양심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인맥이 넓은 사람들이었다.
상류층의 다른 계몽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더 소박하게 옷을 입고, 하인에게 덜 의존하며, 예의 바른 사회에 만연한 형식주의를 피했다. 그럼에도 그 개혁 노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배경의 도움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공동 출자로 숙박 협회를 설립하여 가난한 여성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해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제공하였다. 또 여성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캠페인에 여성을 동원하기도 했다. 1863년에 이르러 트루브니코바와 스타소바는 여성출판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교육받은 여성들에게 스스로 책을 쓰고, 번역하거나, 책을 엮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혁명가라기보다는 관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타소바, 트루브니코바와 필로소포바는 진보적인 여성의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와중에도 자신들이 받은 귀족적인 가정교육의 잔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막후에서 활동했으며, 여성들에게 경제적·직업적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하지만 남녀 간의 관계 개선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또 그들은 여성 해방과 만족스러운 가정생활이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들이 성취감을 얻는 데는 가정의 행복과 집 밖의 생산적 출구가 모두 필요하다고 믿었다. 필로소포바는 딸에게 조언했다.
“이 세상에서 가족보다 더 소중한 운명은 없다.”
젊은 안나 스니트키나는 필로소포바, 트루브니코바, 스타소바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1860년대의 보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처럼 누구나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초기 여성 해방 운동의 지도자들은 안나 자신이 인식하고 공감했을 페미니스트의 힘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시켰다. 안나라면 미완성 소설 <네토치카 네즈바노바>의 여주인공을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상상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잠재력을 깨달았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작가로서 활동하지 못했던 오랜 시간 러시아는 그의 작품을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스니트킨 가족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딸이 자랑스러워하는 별명을 불러주며 여주인공인 ‘초대받지 않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간직했다. 안나는 이 별명이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초대도 안 했는데 친척집에 들르곤 했던 그녀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회상>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네토치카 네즈바노바의 이야기와 동일시하는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안나에게 문학에 대한 사랑을 심어준 사람은 아버지였고, 젊은 여성의 종교적 성향과 종교적 징후에 대한 믿음을 책임진 사람은 어머니였다. 두 사람 모두 안나가 러시아 전통에 대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게 해주었다.
1856년, 열 살의 안나와 그 가족은 모스크바로 여행했다. 고모할머니는 모스크바 크렘린의 부활 수도원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은 수녀였다. 그녀는 스니트킨 일가가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을 구경할 수 있게 수도원 개인 아파트 임대를 주선했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안나는 크렘린 종소리와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광장을 지나가던 장엄한 행렬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국가가 귀청이 터질 듯한 만세 소리와 합쳐질 때, 빛나는 황금색으로 수놓아진 제복을 입고 연대에 서 있던 군인과 궁정 직원들, 하얀 타조 깃털과 금색 술로 장식된 거대한 캐노피 아래에 있던 황제와 황후를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안나는 이후 가족과 함께 참석한 만찬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행동도 회상하곤 했다. 대다수의 사람이 거대하고 번쩍번쩍한 식당을 나서면서 각 테이블에 놓인 장식용 꽃을 기념품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손님 수보다 꽃다발이 적어서 문제가 생겼는데, 세련된 모습의 정부 관료들까지 말 그대로 꽃다발과 꽃을 찢다시피 했다. 그 바람에 꽃병에는 빈 줄기만 남았고 바닥에 꽃잎이 흩뿌려졌다. 안나는 이 광경을 공포와 혼란 속에서 지켜보았다. 우아한 대관식과 그 뒤에 일어난 이런 무례한 사건의 대조에 안나는 불안을 느꼈고, 품위와 예절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더 굳건히 하게 되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세입자들에게 온화하게 대했다고 기억했다. 안나의 부모는 친절하고 양심적인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인 러시아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스니트킨은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관리가 잘 된 넓은 아파트를 매달 5~8루블에 임대했다. 공동 마당에서 세입자 아이들과 함께 노는 동안 그들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엄격하게 교육하는 집주인의 모습에 감탄하곤 했다.
몇 년째 함께 살면서 스니트킨 가족과 한식구처럼 지내는 세입자도 많았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스니트킨 가족과 함께 보냈고, 생일과 이름의 날02에 선물을 보냈으며, 가족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에 집주인을 초대했다. 안나는 부모의 그런 행동을 가부장적인 시대의 잔재였다고 돌이키곤 했다.
“그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여성 세입자들은 특히 스니트키나 부인을 좋아했는데, 스니트키나는 어머니 같은 조언을 해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입고 갈 실크 드레스와 터키식 숄, 리본으로 장식된 모자를 빌려주기도 했다. 어느 해 사순절 기간, 이 물건들을 빌린 한 세입자가 교회에 서 있는 성상 앞에서 무리하게 무릎을 꿇다가 머리를 램프에 부딪친 일이 있었다. 램프의 기름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등 아래까지 흘러내려 빌린 모자와 드레스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지저분한 드레스 차림으로 밀랍으로 가득 찬 모자를 구겨서 들고 찾아온 세입자는 스니트키나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안나의 어머니는 괴로워하는 그녀를 위로하며, 그 옷과 모자는 쉽게 세탁해서 고칠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사실 그 옷은 수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의 관대함을 엿볼 수 있는 그 일을 안나는 잊지 않고 회상했다. “그때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더 쉬웠다. 운명이 우리에게 보낸 시련을 견디기가 더 쉬웠다”라고.
안나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조국을 사랑했지만, 그녀에게도 반항적인 면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중매 결혼의 관습은 여전했다. 사실 그녀의 언니도 그 얼마 전 중매 결혼을 했다. 하지만 안나는 열여섯 살 때부터 그 관습을 혐오한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중매 결혼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당신에게는 제품이 있고, 우리에겐 구매자가 있다’ 혹은 ‘여기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 구혼자가 있다.’”
중매 결혼의 관습은 안나에게는 자신을 사람이라기보다는 물건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관습은 부모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까지도 가장 품위 없는 속임수에 말려들게 하는 것이었다.
안나는, 가족의 친구 중 한 명이 부모의 부동산을 빌리고 싶다는 젊은 남자에게 그녀의 어머니를 몰래 소개했을 때, 자신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방문 목적은 단지 아내로 삼을까 고려 중인 스니트킨의 어린 딸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안나는 그 젊은 미남 상속자에게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초대도 받지 않은 결혼식 파티에 오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나는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 속임수 때문에 그 젊은 남자가 하찮아 보였다.”
안나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엄격한 어조로 회상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 마음을 바꾸고 ‘신랑’의 잘못을 만회하려고 했지만, 나는 양보하지 않고 내 입장을 고수했다.”
안나는 자신의 교육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아홉 살부터 열두 살까지 그녀는 성 안나 학교에 다녔는데, 그 학교에서는 종교를 제외한 모든 과목을 독일어로 가르쳤다. 이때 배운 독일어는 몇 년 후에 그녀가 남편과 유럽을 여행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안나는 페테르부르크에 문을 연, 여학생을 위한 초기 ‘김나지움’에도 다녔다. 이 학교는 1858년 여성들에게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의 일환으로 세워졌다.
그녀의 급우이자 평생 친구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스토유니나의 말에 따르면, 안나는 “활기 넘치고, 확고하고,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재능 있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안나는 졸업식에서 1등 상인 은메달을 받았다. 굉장히 매력적인 눈과 열정적인 천성을 가진 이 학구적인 소녀는 급우들 사이에서는 짓궂은 유머 감각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이 유머 감각으로 거의 모든 상황에서 코미디를 찾아내 전염성 강한 웃음을 느닷없이 터뜨리게 했다.
그러나 자신의 기질과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안나에게는 평범한 급우들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민주적’, 혹은 부르주아적 가족이라고 조롱당한 바 있는 그녀는 1850년대 후반 이후 야심찬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전형적인 행동을 따라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머리를 자르지도 않았고, 일부러 안경을 쓰거나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안나는 대부분의 급우보다 글 읽기를 놀라울 정도로 더 잘 했지만, “그녀의 부모는 단순한 사람들이었다”라고 스토유니나는 회상했다. 안나 자신도 어설퍼 보일 정도로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타원형의 얼굴에 꿰뚫는 듯한 깊은 눈, 살짝 튀어나온 이마, 강인한 기질을 나타내는 힘찬 턱, 우아한 일본인처럼 불룩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또 가지런한 치아는 푸르스름한 색을 띠었고 머리카락은 모래색이었으며 거친 손에는 끊임없는 공부로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그녀의 낯빛은 건강하지 않고 창백했는데, 그것은 깊은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창백함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은 안정되거나 평화롭지 못했고, 그녀는 떨리는 심장에서 내뿜는 불같은 천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나에게는 사람을 명확히 읽는 기이한 능력이 있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언제 침묵해야 할지 재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안나 스니트키나는 남성의 시선을 끄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만의 현명하고 직관적인 시선을 가진 작가였다. 덕분에 한눈에 상황을 파악해 나중에 화려하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가장 평범한 목적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시장에 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중대한 사건이나 눈에 띄는 장면뿐만 아니라, 가장 사소한 일의 세세한 부분까지 말할 수 있었다”라고 스토유니나는 기억했다.
“집에 돌아오면,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그림처럼, 연극하듯이 묘사했다. 그녀에게는 분명 숨겨진 예술가의 불꽃이 있었다.”
보수적 성향을 지닌 사회진보주의자, 우연히 반은 스웨덴인이었던 러시아 애국자, 전염성 짙은 웃음을 잘 웃는 진지한 학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바탕의 광기에 시달리는 강심장을 가진 젊은 여성, 실용주의자이며 신비주의자인 안나는 모순으로 뒤엉킨 존재였다. 말년에 안나의 지인은 “그녀 안에 있는 놀랍고 깊은 관심을 자극하는 그녀의 영적인 면”은 그녀가 “도스토옙스키의 아내가 아닌 그녀 자체로서”의 위치를 드러내는 인물임을 알게 한다고 주장했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 미묘하면서도 넓은 마음”과 “모든 주변 환경에 대해 끝없는 관심”을 가진 안나는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이 지인은 회상했다. 실제로,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그녀는 그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대가 없이 멈춰설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진보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안나가 여성 교육원으로 전학을 결정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성 교육원은 여성에게 허용된 최초의 러시아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안나의 부모가 그녀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들은 이미 학업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딸에게 힘이 되어줬을 것이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자연과학이 특히 인기를 끌었는데, “물리학, 화학, 동물학이 내게는 신의 계시처럼 보였다”라고 안나는 회상했다. 그러나 동물학 수업 시간에 죽은 고양이를 보고 기절한 이후, 그녀는 과학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러자 마리인스카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학교의 골칫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문학이 자신의 진정한 열정을 쏟을 분야라고 확신한 후 그녀는 자신의 흥미를 실용적인 직업으로 바꿀 수 있는 다른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866년에 러시아 최초의 속기 훈련 학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기회는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그 학교는 파벨 올킨이 페테르부르크에 설립했다. 올킨은 교과서에서, 속기는 직업 그 이상이라고 강조했다. 속기는 젊은이들에게 인내와 끈기라는 필수적인 삶의 기술을 개발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1866년 봄, 올킨의 수업에 등록했을 때 안나는 이미 그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교사와 학생은 완벽하게 어울리는 조합을 이루었다. 안나에게 속기는 해방된 여성이 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가르침에 고무된 많은 젊은 페미니스트가 가족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 반면, 안나에게는 가족을 돕고자 하는 바람이 동기가 되었다, “평생 동안, 나는 단 하나의 열렬한 소망을 갖고 있었다. 내가 먹을 빵을 마련하고, 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고,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자립한 후 필요하다면 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그녀는 일기에 썼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몇 년째 결핵으로 투병 중이었다. 1865년까지도 그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안나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병든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속기학교를 중퇴하려 했을 때 아버지는 계속 다닐 것을 권유했다.
1866년 4월 28일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스니트킨이 사망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진짜 슬픔이었다”라고 안나는 회상했다.
“슬픔은 폭풍처럼 몰아쳤다. 나는 옥타 묘지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에서 하루 종일 울었는데,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로 하여금 슬픔을 견디고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은 가족이었다.
“나의 우울한 상태에 상심한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일이라도 시작하라고 간청했다.”
미처 듣지 못한 수업을 편지로 보충할 수 있게 올킨 교수가 도와주면서 안나는 여름 동안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 부분적으로는 매일 구술해준 동생 이반의 공이기도 했다. 1866년 9월 수업이 재개되었을 때, 안나는 올킨의 최고 학생이 되어 있었다. 10월 3일, 올킨은 수업 전에 그녀에게 다가와 보수를 받고 속기 일을 해보겠느냐고 물었다.
“그 일을 제안한 사람이 누군데요?”
“작가 도스토옙스키라네. 그가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는데 속기사를 고용하기로 했다네.”
그는 안나에게 두 겹으로 접힌 작은 종이를 건넸다. 그 종이에는 ‘스톨랴니 페룰록, 말렌카야 메쉬찬스카야 거리의 모퉁이, 알롱킨의 집, 아파트 13호’라고 쓰여 있었다
“내일 열한 시 30분에 그곳에 가게.”
교수가 말했다.
“더 일찍도 말고 늦게도 말고.”
“‘그녀는 롤레텐부르크에서 돌아왔다.’ 내가 롤레텐부르크에 대해 언급했었소?”
“네, 했어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그 단어를 구술하셨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실례지만, 선생님 소설에 그런 이름의 도시가 있지 않나요?”
“그렇소. ‘룰레텐부르크’라고 불리는 도박 마을에서 사건이 일어나오.”
“그렇다면 그 단어를 제게 구술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당신 말이 맞소. 내가 여기서 뭔가와 혼동했소.”
도스토옙스키는 머릿속이 몽롱했다. 뇌전증 발작 이후에는 항상 그랬는데, 바로 그 전날 발작으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룰레텐부르크는 구술하고 있는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도박 휴양지에 그가 붙인 이름이었다.
프렌치 룰렛과 독일식 ‘-부르크’를 결합한 이 단어가 19세기 러시아인 귀에는 우습게 들리거나 억지로 붙여놓은 것 같아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의도였다. 그는 도시 자체의 인위성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 허구의 도시는 그가 생각하는 독일 전역의 도시처럼 현란하지만 영혼이 없는 무대로서, 사람들이 돈의 신에게 복종하며 살다가 죽는 곳, 그가 개탄하는 유럽 물질주의의 상징적 진원지였다. 그곳, 자신이 만든 룰레텐부르크에서, 그는 유럽의 가장 추악한 면모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무심코 자신에 관한 이야기도 하게 될 터였다.
그들은 규칙적인 일상을 보냈다. 안나는 정오에 도스토옙스키의 집으로 와서 네 시까지 머물렀다. 페도샤가 내오는 차로 하루가 시작되었고, 그 다음 구술 시간이 이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불안하게 말하거나,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