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우이룽吳宜蓉
대만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가오슝사범대학교 대만 역사문화 및 언어연구소를 졸업했으며 가오슝사범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웹진 『이야기, Story Studio』와 주간지 『국어일보주간國語日報週刊』 칼럼니스트이자 중학교 역사 교사로, 대만 교육부에서 선정하는 ‘특별 교사상’을 수상했다. 교사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직업인 줄 알았는데, 교사가 되고서부터 인생이 ‘인형 뽑기’처럼 짜릿해졌다. 어떻게 자랄지 모르는 학생들을 보면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뽑기를 새롭게 돌릴 때마다 여전히 기대감이 부푼다. ‘역사’라는 동전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서로는 『미처 몰랐던 세계사』 『이런 역사 수업이라면 오케이』 등이 있다.
옮긴이
박소정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 후 잡지와 논문 등을 번역하고 삼성, CJ 등 기업체에서 중국어 회화를 강의했다. 현재 번역집단 실크로드에서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심리죄: 프로파일링』 『결국 이기는 사마의』 『식물학자의 식탁』 『새는 건축가다』 『순죄자』 『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 『미처 몰랐던 세계사』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20가지 수학 이야기』 『심플한 세계사』 『관계가 상처가 되기 전에』 등이 있다.
開箱臺灣史 © 吳宜蓉, 2023
Korean edition © Hyundae Jisung, 2024
Originally published in Complex Chinese by China Times Publishing Company in Taiwa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China Times Publishing Company, through Andrew Nurnberg Associates International Limited Taiwan Representative Office and SilkRoad Agency, Seoul, Korea
All rights reserved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실크로드 에이전시와 Andrew Nurnberg Associates International Limited Taiwan Representative Office를 통해 Chinese by China Times Publishing Company와 독점 계약한 ㈜현대지성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휩쓸고 있는 TSMC와 세계 AI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 두 회사는 모두 대만에서 출발했다. 전 세계의 중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대만. 경상도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인구도 우리의 반밖에 되지 않는 대만은 과연 어떤 힘으로 세계 중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떤 여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우리가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어느새 우리 정면에 서 있는 대만. 지금까지 나온 대만사 책 중 가장 쉽고, 의미 있는 이 책을 통해 이제 대만을 제대로 바라보자.
_최태성 | 별별한국사 연구소장, 『최소한의 한국사』 저자
한국인에게 대만은 어떤 나라일까? 오래된 경쟁국?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뜨는 나라? 중국의 한 부분? 미·중 경쟁으로 위험에 빠진 접경지대? 그것도 아니면 그냥 TSMC? 수많은 생각 가운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대만인의 생각’이다. 대만인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생각할까, 대만인이라고 생각할까? 대만인은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어떤 민족의식을 느낄까?
이 책은 현대 대만인의 속내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서술한다. 더구나 역사 교사인 저자의 생각은 보편적인 한국인이 바라보는 대만과는 전혀 다르다. 저자는 창세신화와 신비스러운 동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400여 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발전한 대만만의 독특한 자부심을 마음껏 보여준다.
근현대 세계의 거센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냈다는 점에서 대만과 우리는 비슷하다. 하지만 대만의 역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식으로 똘똘 뭉친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일단 읽자, 대만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를 알고 동아시아를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좋은 책이 나왔다.
_심용환 | 심용환역사앤교육연구소 소장, 『1페이지 세계사 365』 저자
반가웠다. 새로운 대만 관련 서적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서점의 척박한 책꽂이를 떠올렸다. 대만에는 한국 관련 서적이 넘쳐나고, 대만인들은 매일 저녁 한국 뉴스를 접한다. 반면에 한국에는 대만 관련 서적이 많지 않다. 우리는 대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모른다. 대만의 맛집이나 관광지를 소개하는 책자는 많지만, 역사나 문화를 알려주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2016년에 3주간 대만을 일주하면서 테마기행 방송을 촬영했는데, 그 이후로 대만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대만인들은 특별하게 친절했고, 유별나게 다정했다. 그때부터 늘 대만인들은 왜 이렇게 타인을 배려할까, 대만 땅은 왜 이렇게 예쁠까 궁금했다. 마침 대만의 한 대학원에서 강의할 기회가 생겼고, 대만을 깊게 들여다보게 되면서 깨달았다. 대만인의 친절과 배려는 힘들고 아픈 역사 속에서 얻은 그들만의 지혜였음을.
이렇듯 과거는 현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역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가르쳐야 할까? 이 책의 저자는 시종일관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저자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독자를 대만인의 시점으로 데려간다. 저자는 한족이면서도 한족의 치부, 즉 원주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역사를 서술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독자의 호기심을 유도하면서도 열린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대만인들의 지혜를 배울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_류영하 | 백석대 중국어학전공 교수, 『대만 산책』 저자
단숨에 완독하는 대만사
차이칭화蔡清華
원짜오외국어대학교 교원양성센터 석좌교수, 전 교육부 정무차장
나는 우이룽 선생이 보낸 원고를 먼저 가볍게 훑어보기만 하고 나중에 자세히 읽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까 손에서 책을 놓기가 힘들었다. 생생한 주제와 저자의 통통 튀는 경쾌한 입담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체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다른 역사책에서는 보기 드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저자는 중학교 역사 교사로 매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청소년의 문화와 언어를 훤히 꿰뚫고 있다. 그렇기에 남다른 시선으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며, 역사적 인물들이 했던 선택을 분석해 생생한 역사를 가르친다. 이 방법은 흡사 가치명료화 기법(가치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성찰하게 함으로써 도덕적 판단 능력을 길러주는 데 효과적인 교수 학습법 — 옮긴이)과 같다. 대만은 40년 전 도덕성 발달 이론이 채택한 가치명료화 기법을 막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생들에게 공융양리(孔融讓梨, 공융이 배를 양보한다는 뜻으로 유교적인 겸손을 가르칠 때 자주 인용된다 — 옮긴이)와 이십사효(二十四孝, 중국에서 유명한 효자 24명의 이야기를 수집해 편찬한 책 — 옮긴이) 등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원칙을 강요하는 과거 제식 도덕 교육을 바로잡고, 콜버그의 세 가지 수준과 6단계 도덕성 발달 이론을 학생들의 인지적 학습 단계(미국의 교육심리학 박사인 벤저민 블룸이 구분한 인지적 학습의 6단계[지식-이해-적용-분석-종합-평가]를 가리킨다 — 옮긴이)와 배합해 점차 아이들이 윤리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교수법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 방법을 훌륭하게 구현해냈다.
둘째, 이 책에서 다루는 각 주제는 대만의 2019년 개정 교육 과정에 맞게 편성되었다. 특히 저자가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내준 숙제는 수업 요강에서 요구하는 학습 내용에 완벽히 부합한다. 예를 들면 ‘역사 자료를 활용해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설명하시오’ ‘다양한 관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 역사에서 어떤 작용을 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구하시오’ 같은 것들이다.
셋째, 저자는 몇몇 글에서 실제 수업 과정 중 있었던 감동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누군가는 역사 수업에서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 과정을 온전하게 설명해줘야 한다는 데 집착하는 반면, 누군가는 창의력을 발휘해 학생들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거리를 좁히고 공감하며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특히 저자는 계엄 시대 혹은 백색공포 시기의 위정자를 ‘마피아’로 묘사했다. 이는 영화 《반교: 디텐션Detention》에서 비밀 경찰이 직접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소리만 내는 마왕으로 묘사되었던 것과 비슷한 효과를 준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서양 근대사 지식을 결합해 대만의 관련 사건을 소개하면서, 그 사건이 일어난 동시대에 서양이나 다른 나라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비교·대조할 수 있게 해준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대만 역사와 관련한 다른 책에서는 보기 드문 특징이 많으며, 누구나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만사 책이다. 저자가 앞으로 대만사 관련 서적을 계속 시리즈로 내주기를 기대해본다.
이토록 가깝고도 먼
출판사에서 대만의 역사를 한 권으로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저는 속으로 적잖은 의문을 품었습니다. 대만사를 다룬 전문 서적과 연구서가 이미 넘쳐나고 전문 학자들이나 대가들의 작품이 이미 서가에 꽂혀 독자에게 읽히길 기다리는데, 제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학계를 이끌어온 분들과 어떻게 제가 당당하게 한자리에 설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저는 역사 교사이지,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역사학자는 관심 있는 분야를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연구하지만, 역사 교사는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역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저는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데는 소질이 없지만, 교양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대만의 역사를 집필하는 일이라면 한번 도전할 만하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될 때가 있지요. 영화 《나우 유 씨 미Now You See Me》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수록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줄어든다.” 저는 글을 쓰면서 제가 발 딛고 있는 대만이 가장 익숙하지만 낯설고, 손에 닿을 것 같지만 닿지 않는 이토록 가깝고도 먼 땅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소재를 골라 이야기해야 할지 어려울 때가 많았고, 이렇게 설명해도 될까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글을 쓸 때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쳤고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갔는데 그 모습이 대만의 역사와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대만은 복잡한 민족 관계에 갇히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뒤엉킨 국제사회의 힘겨루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좌충우돌하는 일상이 어쩌면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뚜벅뚜벅 걸어오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구는 약 2,300만 명, 언어는 47종*이나 되는 이 왁자지껄한 땅 대만에서 대체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일까 고민했습니다. 그 답은 섬나라 사람들의 넓은 도량과 이해심에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부침이 있는 대만의 역사 중에 어떤 것을 써서 독자들에게 보여줘야 할지, 대만의 역사가 낯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하다 보니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큰마음을 먹고, 쓰고 싶은 역사를 썼습니다.
*대만 행정원 자료에 따르면, 대만의 국가 언어에는 대만화어(臺灣華語, Taiwanese Mandarin), 대만대어(臺灣台語, Hokkien), 대만객어(臺灣客語, Hakka), 대만수어(臺灣手語), 마조민동어(馬祖閩東語, Mā-cū-huâ) 및 원주민족어 42종 등이 있습니다.
옆에서 함께 애쓰고 수고해준 후이전 편집장과 시보출판, 그리고 험난하고 앓는 소리의 연속이었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작품을 무사히 완성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저의 별나지만 사랑스러운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자, 모두 준비되었으면 이제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일러두기
이 책에 사용한 인명, 지명 등은 현재 통용되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현지 발음에 가깝게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근대 이전의 인물 등 필요한 경우에는 한자음으로 표기했습니다.
1장
대만 원주민의 창세신화
신화는 사실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이야기다.
각 민족 신화의 진정한 주제는
신들의 세계 질서와 감정이 아니라 인류 자신이 놓인 처지,
자연 세계, 나아가 미래의 우주 존재다.
- 인류학자, 리이위안李亦園
흔히 원주민을 가리켜 ‘대만의 보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들은 주로 남도어족南島語族에 속합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Austronesian Languages이라고도 불리는 남도어족은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어족 중 하나로 언어 1,300여 종을 포함하며,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4억 명이 넘습니다. 대만에서 시작해 남쪽으로는 뉴질랜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동해안의 마다가스카르섬, 동쪽으로는 남태평양 동부의 칠레령 이스터섬에 이르기까지 남도어족은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지역에 분포한 어족이지요.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만은 남도어족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최북단에 위치한 데다 언어가 복잡하게 분화된 점으로 보아 남도어족이 확산한 출발점일 확률이 높습니다. 대만의 구석기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5만 년 전에서 5천 년 전까지입니다. 이 시기에 어디선가 ‘용감한 사람들’이 대만으로 와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요? 신뢰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너무 적어서 고고학자에게 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믿을 만한 인류학 증거를 따라 생각해보면, 현대 원주민의 조상들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대만에 정착했습니다. 대만에서 이미 6~7천 년 정착했을 법한 부족도 있고 1~2천 년 전에야 대만 땅을 밟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족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상과 문화적 함의를 설명해줄 기록도 매우 부족합니다. 이 때문에 원주민은 항상 선사 시대(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역사) 파트에서 소개하고 탐구하는 대상이었지요.
그렇다면 문자가 없는 시대에 살던 사람들을 어떻게 조사할 수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음식은 몸집을 키우는 법이니까요. 고고학자의 발굴과 분석을 통해 고대 인류의 생활 방식을 재건하고 시대적 특징을 복원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세대를 거치며 전해진 전설과 신화를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도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해석하고 자연을 관찰한 태도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섬세한 지적 활동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유물과 유적은 살펴보지 않습니다. 석기나 도자기, 나라를 지킨다는 기묘한 물건 대신 신화의 세계로 당신을 안내해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인간과 세상의 경이로운 첫 만남을 소개할 것입니다.
신화는 과연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일까요?
‘신화는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잖아요!’라고 생각하나요?
대만의 원주민 부눙족(브눈족)에게는 돌에서 조상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상전산相傳山 정상에 있던 거대한 돌이 갈라지고 그 틈새에서 많은 사람이 튀어나왔다.” 부눙족만 ‘돌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타이야족(아타얄족), 타이루거족, 시디그족도 자기 조상이 돌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점이 신화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도 하지요.
또 수많은 원주민 신화에서 공통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인간은 쌀 한 톨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고기를 먹고 싶을 때는 숲에 가서 멧돼지, 날다람쥐, 토끼 등 먹고 싶은 동물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러면 그 동물이 고분고분 다가와서 마음껏 잡아먹을 수 있었다.” 먹고 싶은 동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라니,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요?
사실 신화가 비논리적이고 급진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허무맹랑하다는 이유로 신화를 고대인의 망상으로 치부할 필요는 전혀 없지요. 지구에 살던 고대 인류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과학적 지식이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라는 좋은 무기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갖가지 곤혹스럽고 두려운 자연 현상을 보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해와 달, 별은 왜 이동할까? 사람은 왜 죽을까?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갈까?’
호기심은 사고의 시작이며, 의심은 해답을 찾아가는 원동력이라고들 하지요. 상고시대 인류는 자신의 생활 경험에 무한한 상상력을 더해 끊임없이 신화를 창조하며 자연현상을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황당하고 해괴한 신화라도 그것은 호기심이 풍부한 조상들이 경험했던 일들의 기록이자 해석이며,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설명하려 했던 노력의 결과이지요.
『신화론』의 저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나무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습니다. “나무는 그저 나무지만, 어느 작가가 묘사한 나무는 의미를 부여받은 나무다.” 따라서 신화는 언제나 상징성을 지닙니다.
사실 신화라는 단어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단어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myth(수수께끼)’와 ‘logy(탐구, 학습)’의 합성어인 mythology는 신화 이면에 숨겨진 상징적인 의미를 밝혀내고, 수수께끼를 푸는 탐구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상식적이고 괴이한 이야기 속에서 논리를 찾고, 불분명하고 흐릿한 이야기 속에서 질서를 찾는 일이지요. 카오스(혼돈)가 어떻게 코스모스(우주)로 변하는지를 의식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신화의 특징 속 숨은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럼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대만의 신화를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은 왜 그렇게 높을까요?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다.” 『성경』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6일 동안 우주 만물을 창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인류 최초의 호기심은 자연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한 것이었지요.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서 천지를 개벽한 신은 반고盤古입니다. 알에서 태어난 반고는 머리로 하늘을 받치고 다리로는 땅을 밟고 있었는데, 반고가 자랄수록 하늘과 땅의 거리도 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대만의 원주민 신화에서는 하늘과 땅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세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다우족: 옛날 옛적에는 하늘과 땅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거인이 나타나 손과 발로 하늘과 땅 사이를 억지로 벌렸다. 이때 물고기가 바다에서 튀어나왔고, 하늘에 달라붙어 은하가 되었다.
베이난족: 옛날에 한 임산부가 쌀을 찧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너무 낮은 나머지, 절굿공이를 높이 들 때마다 하늘에 부딪히는 바람에 일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화가 난 임산부는 절굿공이를 들어 힘껏 위쪽을 쳤다. 그러자 하늘이 붕 날아올라 지금처럼 높아졌다.
쩌우족(초우족): 옛날에는 하늘이 산봉우리와 이어질 정도로 너무 낮아서 만물이 살아갈 공간이 심하게 부족했다. 산속 동물들은 한자리에 모여 어떻게 하면 하늘을 높일 수 있을지 의논했다.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비비쿠라이’라는 새가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다른 동물들은 앙증맞은 비비쿠라이를 보며 너도나도 비웃었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같은데!” 하지만 비비쿠라이는 가볍게 날갯짓을 하며 몸을 풀더니 위로 날아올라 보란듯이 하늘을 들어 올렸다.
이 세 종족의 신화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혹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종족들이 생활하는 지역과 하늘이 유난히 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보통 우리는 언제 하늘이 가깝다고 느낄까요?
등산을 해봤다면 쉽게 맞추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지대에서는 해가 엄청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햇빛이 유난히 눈부시고, 운무가 자욱할 때면 손만 뻗어도 구름이 손에 닿을 것 같지요. 산에서는 밤하늘의 별도 유독 커 보입니다. 달도 바로 내 머리 위에 있는 것 같고요. 이런 관점에서 추론해보건대 아마도 이 종족들의 조상은 고산 지대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유난히 가깝다고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신화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럼 이 세 신화에 담긴 독특한 줄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번에도 설명에 앞서 먼저 상상력을 발휘해 신화가 무엇을 은유하고 있을지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후 함께 살펴봅시다.
다우족의 물고기와 은하
다우족 신화를 보면 “물고기가 바다에서 튀어나와 하늘에 달라붙어 은하가 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우족의 이야기에서 물고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우족은 대만에서 유일하게 전통 촌락이 본토에서 남동쪽으로 70킬로미터 정도 멀리 떨어진 란위섬에 분포한 민족입니다. 매년 3월부터 6월까지 쿠로시오해류가 란위섬 해안에 날치를 비롯한 회유성 어류를 대거 데려오기 때문에 란위섬은 날치의 고향이라고 불리지요.
보통 물고기가 바다 위로 튀어 오르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날치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만새기 같은 포식자에 쫓겨 놀라서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가 활강하는 날치의 습성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GPS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바다에서 배를 몰거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 천문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별이 이동한 경로를 보면서 방위를 파악했습니다. 이는 바다 민족의 기초적인 생존 기술이었지요. 다우족의 생활 환경을 알고 나니 물고기에서 은하로 발전한 이야기도 어쩐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나요?
베이난족의 쌀을 찧는 임산부
오늘날 베이난족은 중양(중앙)산맥 남쪽 해안 지대인 화둥쭝구에 주로 분포합니다. 한번 상상해봅시다. 베이난족의 조상은 운무가 자욱한 고산 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경작할 때 햇빛을 보지 못해 어려움을 겪으며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베이난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산 아래 평원 일대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하늘과는 점점 멀어지면서 농업이 갈수록 발전했고 정미精米도 한결 수월해졌지요.
그렇다면 베이난족의 신화에서는 왜 임산부가 주인공일까요? 베이난족이 전형적인 모계사회라는 사실을 안다면 쉽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베이난족은 여성 웃어른이 가장으로서 촌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여성들은 가업을 잇고 가족을 이끌며 힘겨운 농사일을 책임지지요. 절굿공이로 쳐서 하늘을 날려버린 임산부는 세상의 반을 지탱하는 여성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쩌우족의 신령한 새, 비비쿠라이
아리산에 사는 쩌우족은 왜 작은 새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비록 몸집은 작았지만 홍황지력(洪荒之力,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을 파괴할 만큼 거대한 힘 — 옮긴이)을 지닌 비비쿠라이는 수안화미繡眼畵眉, Alcippe morrisonia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수안화미는 대만의 해발 2천 미터 이하 숲에서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조류로 손꼽힙니다. 자유롭게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는 조류는 옛사람들이 보기에 천지와 교감할 수 있는 신령한 동물이었지요. 더군다나 쩌우족은 수안화미를 전설적 동물로 여겼습니다. 쩌우족은 사냥하러 나갈 때면 동이 트기 전 숲에서 수안화미의 울음소리를 귀담아들었습니다. 부드럽고 구성진 소리가 들리면 무리 없이 출발해도 좋다는 뜻이고, 다급하고 절박한 소리가 들리면 이번 사냥이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었지요. 자연과 소통하면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나름의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 그들의 생존 지혜였습니다.
창세신화에 나타난 두 개의 태양
세계 각지의 수많은 상고 문명은 저마다 태양을 숭배한 역사가 있습니다. 에너지의 근원인 태양은 세상을 밝게 비추며 만물을 성장시키기 때문에 광명과 활력, 생육과 수확을 상징하는 동시에 출중한 능력이나 왕성한 혈기를 의미했습니다.
대만에도 태양에 관한 신화가 아주 많은데 여기에서는 두 가지 대표적인 서사 유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창세 기원’ 유형으로, 파이완족의 신화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상고 시대에 우리가 경애하던 태양신이 차차바오건茶卡包根 정상에 내려와서 빨간 알과 하얀 알을 낳았다. 태양신은 ‘바오룽’이라는 산무애뱀에게 이 두 알을 부화시키라고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알이 부화해 남신과 여신이 태어났는데, 남신의 이름은 ‘푸아바오룽’, 여신의 이름은 ‘차얼무지얼’이었다. 두 신의 후손은 훗날 파이완족 귀족의 조상이 되었고, ‘리라이’라는 파란 뱀이 낳은 알에서 부화한 이가 파이완족 평민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 신화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파이완족 귀족의 조상이 태양신의 두 자식이라는 부분입니다. 파이완족은 자신들의 지배계급이 태양신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그들은 태양신을 만물의 창조자이면서, 가장 숭배하고 존경할 만한 지고지상의 신으로 여겼지요.
그런데 태양신이 두 알을 낳고 나 몰라라 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대신 태양신은 바오룽이라는 산무애뱀을 보모로 초빙해 두 알의 부화를 맡겼습니다. 이 때문에 파이완족 신앙에서 산무애뱀은 수호신이면서, 태양신이 조상을 지키라고 보낸 ‘장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파이완족은 땅을 지키는 파수꾼인 산무애뱀을 경외했습니다. 집 처마나 대들보, 기둥 등에 수호를 상징하는 산무애뱀의 토템 무늬 장식을 새겼고, 숲에서 산무애뱀을 우연히 만나면 웃어른을 대하듯 먼저 지나가도록 양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심한 사람이라면 귀족의 조상은 산무애뱀 바오룽이 지켰던 알에서 태어났고, 평민의 조상은 파란 뱀 리라이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귀족과 평민이 서로 다른 뱀에게서 태어났다는 신화는 촌락 안에서 계급의 세습과 폐쇄성을 강화했습니다. 초기 파이완족 촌락에서는 귀족과 평민 사이 통혼이 금지되었고, 성씨든 복식이든 계급 구분이 명확했습니다. 축제에서 춤을 출 때조차 계급이 높은 순서대로 입장했습니다.
태양은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존재인 한편, 에너지가 지나친 탓에 자주 재난을 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태양 신화의 두 번째 전형적인 유형은 인류가 태양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사일전설射日傳說’입니다. 이번에는 부눙족의 신화를 한번 살펴봅시다.
옛날 옛적에는 하늘에 태양이 두 개였다. 태양이 두 개나 떠 있으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람에 몹시 무더운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마을에 아주 부지런한 부부가 있었는데, 매일 땡볕을 견디며 밭으로 나가 일을 했다. 부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이 부부는 더위 때문에 아들들이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커다란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어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늘에서 휴식하려던 부부는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작은 아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아버지는 태양을 화살로 쏘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큰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길고 긴 세월 동안 태양을 찾아다녔다.
아버지의 새카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고 큰아들이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은 태양이 사는 곳에 도착했다. 부자는 나뭇잎으로 강렬한 햇빛을 가린 채 화살로 태양을 명중시켰다. 화살에 맞은 태양은 뜨거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 부자를 붙잡고 화를 내며 물었다. “왜 나를 쏜 것이냐?” 아버지가 용감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 작은애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 태양이 분개하며 대꾸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놈들이구나! 내가 주는 빛과 열이 없다면 너희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그런데도 내게 한 번을 고맙다고 한 적이 없으니 네 작은아들이 말라 죽은 것이다. 이게 다 네가 자초한 업보니라!”
부자는 태양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태양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태양은 부자가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자 두 사람을 용서했고, 앞으로는 태양을 하나만 남겨두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나는 달이 될 것이다.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서 달이 차면 내게 제사를 지내라고 가족에게 알려라. 그러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인구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내가 닭과 좁쌀의 씨앗을 줄 테니 닭으로는 시간을 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