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무라 겐키
1979년 요코하마 출생. <고백>, <악인>, <모태솔로 탈출기>, <늑대아이>,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등의 영화를 제작. 2011년 뛰어난 영화 제작자에게 주어지는 ‘후지모토상’을 사상 최연소로 수상. 2012년 첫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발표하였고 동 작품은 전 세계 25개국에서 출판되었다. 2018년 처음으로 감독을 맡은 작품 <Duality>가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 2021년 첫 번역 그림책 『나, 두더지, 여우, 말』을 간행. 2022년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각본 · 감독까지 맡은 영화 <백화>가 제70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공식경쟁 부문에 출품, 일본인 최초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했다. 그 외 저서로 소설 『억남』, 『신곡』, 대담집 『직업』, 『이과계.』 등.
옮긴이 이영미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과 『캐러멜 팝콘』 번역으로 일본국제 교류기금에서 주관하는 보라나비 저작·번역상의 첫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 외의 옮긴 책으로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면장 선거』, 요시다 슈이치의 『분노』, 『동경만경』,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 『약속된 장소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솔로몬의 위증』, 가와무라 겐키의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등이 있다.
4월이
되 면
그녀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SHIGATSU NI NAREBA KANOJYO WA
Copyright © 2016 Genki Kawamura inc.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by Bungeishunju Lt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Genki Kawamura inc.
9년 만이네요.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편지를 씁니다.
편지 쓰는 것쯤이야 간단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놀라울 정도로 마음대로 안 되네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펜을 손에 쥐고 제대로 편지를 쓰는 건 10년 만일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위해 뭔가를 쓴다. 그건 너무 어렵고 쑥스러운 일이군요.
100년 후에는 종이에 소식을 적어 보내는 건 사라지고 없겠죠. 그렇지만 그 글이 엮이는 시간은 분명 깊은 밤일 테고, 에두른 말만 이어져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몇 번이나 고쳐 썼는데도 구두점은 이상한 자리에 찍혀 있고, 어쨌거나 볼품없고, 그럼에도 절실한 심정에는 변함이 없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나는 지금 볼리비아의 우유니라는 도시에 있어요.
새하얀 소금 호수로 에워싸인 도시. 해발고도 3700미터. 공기는 희박하지만 맑고, 물빛 하늘에는 볼록하게 부푼 구름이 떠 있습니다. 이곳 소금호수는 비가 내리면 물이 얕게 고여 거울처럼 변합니다. 그 거울에 끝없이 열린 하늘이 반사되어 세상이 온통 하늘이 됩니다.
호숫가에 있는 소금호텔에서 바위처럼 딱딱해진 빵과 파슬리를 넣은 짭짤한 수프를 먹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곳은 벽도 소금, 복도도 소금, 소파와 침대, 테이블과 의자, 꽃병까지도 소금이에요. 이틀만 있으면, 누구나 장아찌 같은 기분이 들 테죠. 소금투성이인 이 호텔에서 나는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옅은 갈색 주근깨가 두드러져 보이는 하얀 피부와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아르헨티나 사람입니다. 소금호텔에 체류한 지 어느덧 반년. 줄곧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하나같이 옅은 색을 써서 덧없어 보였어요. 젖빛 필터가 덮인 것 같은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 그림들이 좋다고 말했고, 그림을 보여준 보답으로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줬어요.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내 사진도 어딘지 모르게 연하고 담백한 세상을 담아낸 것이죠. 그는 그 사진들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어요. 자기가 바라보는 경치와 비슷하다고.
유명한 축구선구와 이름이 같은 그는 스페인어와 짧은 영어로 나에게 좋아하는 음식과 소설, 영화와 음악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어요. 흰살 생선과 와인을 좋아하고, 옛날 탐정소설과 아메리칸뉴시네마(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의 미국영화 중 기성세대로부터의 단절이나 미국사회의 부정적 현실에 관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었던 영화)를 사랑하고, 잠들기 전에는 라벨을 듣는다고. 좋아하는 색깔은 흰색과 남색. 여우비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그것들은 때로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그는 이 세상에서 나와 그를 연결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라도 더 많이 확인하려는 듯이 사랑하는 것들에 관해 계속 얘기했어요.
만난 지 사흘이 지난 후, 그는 나를 호수로 데려갔습니다.
초승달이 뜬 밤.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이 호수에 비쳐서 온 천지가 전부 별로 뒤덮여 있었죠. 너를 소중히 여기겠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대답하고, 새벽녘까지 별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이틀간. 천공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줄곧 생각했어요.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여름날 해 질 녘. 베란다에 앉아 거세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보던 나는 비가 그치기 몇 분 전에는 미리 그걸 예감했습니다. 아, 이제 곧 비가 그치겠네.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언제나 비는 그쳤고, 황금색 빛이 하늘에서 내리쬐었죠. 나는 그런 예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내게는 당신과의 사랑의 시작이 그런 거였어요.
그때의 내게는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어요. 당신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이 분명 잘 풀릴 거라고 믿을 수 있었죠.
그리고 내 안에서는 그 4월이 아직도 어렴풋한 윤곽을 유지하며 계속 이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렴풋하게,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편지 또 쓸게요.
이요다 하루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교차점 반대편에서 밀려오는 검은 인파를 향해 후지시로는 셔터를 눌렀다. 일안리플렉스카메라의 셔터 버튼이 확고한 무게감과 함께 내려앉으며 찰칵 하는 소리가 두개골에 울려퍼졌다. 리와인딩 레버를 재빨리 감고, 잇달아 필름에 담는다. 하루는 옆에서 스크램블 교차점의 상공에 떠 있는 계절에 걸맞지 않은 소나기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시부야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무리.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소나기구름으로 하루는 카메라를 돌렸다.
자그마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필름식 일안리플렉스카메라. 묵직해 보이는 은색 바디에 검은 대구경 렌즈가 붙어 있다. 오래됐지만 정성 들여 손질을 했고 사랑받으며 사용된 카메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가 그 카메라를 목에 걸고 후지시로 앞에 나타난 것은 흩어진 벚꽃 꽃잎이 거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렵이었다.
은행나무 가로수를 빠져나가면, 그 앞에 벽돌로 지은 낡은 대학 교정이 나온다. 만담연구회, 경음악부, 축제 실행위원회와 영화동아리 등의 방들이 늘어서 있는 한쪽 구석에 고요히 가라앉듯이 사진부 방이 있었다. 의학부 3학년생이 된 후지시로는 일찍부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동아리 방으로 도망쳤다.
저녁때는 회원들이 모여들어 시끌벅적해지는 방도 지금은 조용해서 텔레비전 게임의 전자음만 들린다. 두 번이나 낙제한 4학년생 누시가 소파에 드러누워 게임에 빠져 있었다. 검은 던전(dungeon, 게임에서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구분된 장소) 속을 용사 대열이 뱀처럼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후지시로를 보고 누시는 “어”라고 한마디만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나더니 소파에 앉을 공간을 내주었다. 후지시로는 “고마워요”라며 옆자리에 앉아 책꽂이에 꽂힌 권수가 드문드문 빠진 오래된 개그만화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침묵의 시간이 한참 지나고, 천장 가까이 있는 작은 창으로 강렬한 석양이 비쳐들기 시작한 무렵, 노크 소리가 났다.
“신입생?”
문을 빼꼼 열고, 숨어들 듯 들어온 그녀를 향해 후지시로가 말을 건넸다. 그녀가 “네”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입생에게 동아리에 들라고 권유하는 시기도 지났고, 올해 획득한 회원은 고작 두 명뿐이었다. 제 발로 동아리 방을 찾아온 귀중한 신입회원 후보를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후지시로는 최선을 다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카메라에 눈길이 멎었다. 가냘픈 몸에 매달린 추처럼 보였다.
“매뉴얼 일안리플렉스네. 카메라가 엄청 크다.”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았어요. 그런데 무거워서…….”
색이 옅은 얼굴 중심에 자리잡은 핑크빛 입술일 조그맣게 움직였다. 커다란 눈동자가 매우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먼지가 석양빛에 반사되어 금가루처럼 춤추고 있었다.
“진짜 무거워 보인다.” 후지시로는 그녀의 경계를 풀어주려고 천천히 얘기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신입생용 명부를 건넸다. “일단 여기에 이름과 연락처를 써줄래?”
그녀는 가늘고 흐르는 듯한 필체로 이름을 썼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은 목덜미 길이로 짧게 커트되어 있었다. 깔끔하고 가지런한 앞머리. 몸집은 작지만 팔다리는 길고, 넉넉한 크기의 티셔츠 소맷자락 사이로 하얀 팔뚝이 보였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으면서 이따금 겁먹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무리도 아니다. 동아리 방에 들어오자마자 비좁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무기력한 두 남자. 한 사람은 게임, 다른 한 사람은 개그만화에 푹 빠져서 사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요다 하루 씨, 잘 부탁해. 학부는 어디지?”
후지시로는 연락처를 다 적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루에게 물었다.
“문학부예요. 선배님은요?”
“의학부 3학년, 후지시로 슌.” 개그만화를 들어올리며 후지시로가 말을 이었다. “보기에도 이래도 사진부 부회장이야. 안 믿기겠지만.”
아뇨 그럴 리가요, 라며 하루가 고개를 저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작은 웃음소리가 세 평쯤 되는 비좁은 동아리 방에 울려퍼졌다.
“카메라는 언제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요. 만지기 시작한 지 2년쯤 됐네요.”
“일단 신입회원은 선배랑 같이 거리로 나가서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현상까지 하는 전 과정을 한 차례 배워야 하는데.”
“암실이 있으면 기쁘죠. 고향 집에는 있는데, 도쿄에 오면 어쩌나 고민하던 중이었거든요.”
“고향은 어디지?”
“아오모리요. 혼슈 북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고장.”
하루가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위를 가리켰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공중을 나는 잠자리 같았다.
“뭔가 멋진데. 북쪽 끝자락이라.”
“완전 시골이에요. 그래서 집도 넓이 하나는 넉넉해요. 그렇다 보니 안 쓰는 방을 암실로 만들었어요.”
“이제 사진부에서 필름카메라를 쓰는 사람은 나랑 누시 선배뿐인데…….”
후지시로가 게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 누시를 쳐다보았다. 화면 속에서는 푸른 불길에 휩싸인 드래건이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컨트롤러 버튼이 딸깍딸깍 연속으로 눌렸다. 용사들 레벨을 너무 많이 올려서일까, 드래건은 눈 깜짝할 새에 쓰러졌고, 요란한 팡파르 소리가 들려왔다. 누시는 무표정이라 전혀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늘 저런 분위기라…… 네 담당은 내가 맡게 되겠지.”
후지시로는 씁쓸하게 웃은 후, 기자재 관리를 위해 매달 500엔씩 회비를 걷는다는 얘기, 여름에 촬영회를 겸해서 합숙을 한다는 얘기, 동아리 분위기는 느긋해서 사진에 스토익한 회원은 적다는 얘기 등을 시간을 들여 찬찬히 들려주었다. 하루는 동아리 방의 벽면 한쪽에 붙여둔 회원들의 사진을 둘러보며 말없이 얘기를 들었다.
너는 현상도 할 수 있고 딱히 가르칠 게 없을 것 같으니 부족하게 느껴질지도 몰라. 방에서 떠날 때, 문을 연 하루에게 후지시로가 말했다. 왠지 그녀에게는 솔직하고 싶었다.
“괜찮아요. 마음을 정하고 왔으니까.”
하루는 몸을 돌리더니 후지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었다.
“아오모리에서는 어떤 사진을 찍었어?”
시부야 센터가의 인파 속에서 주춤거리며 카메라를 잡는 하루에게 후지시로가 물었다.
평일 낮인데도 시부야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줄지어 늘어선 패스트푸드 가게에서는 간장과 소스가 뒤섞인 진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파인더에서 눈을 들고 대답했다.
“사물이나 경치 같은 거, 가까이 있던 것들이요. 2년간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다녔는데, 마지막에는 더 이상 찍을 게 없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마을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마을이라.”
“네, 진짜로. 대단하다 싶을 만큼.”
길거리 광고 화면 속에서 금발 여성가수가 허리를 비틀며 춤을 추었다. 선정적인 입매가 화면에 크게 잡혔다. 요란한 신시사이저 소리가 고층빌딩 틈새로 반사되었다. 후지시로는 패스트푸드점 앞의 맨바닥에 앉아 거대한 햄버거를 게걸스럽게 베어 먹는 소년들에게 카메라를 돌렸다.
“도쿄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넘쳐나니까 찍을 게 없어지진 않겠지. 그렇지만 그게 정말로 찍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런가요?” 하루가 하늘로 카메라를 돌리고 셔터를 눌렀다. 고층빌딩의 계곡 틈새로 탁 트인 맑은 푸른빛이 엿보였다. “저 하늘은 아오모리보다 아름다운 것 같은데.”
“정말? 아오모리 사진 좀 보여줘.”
후지시로가 하루의 큰 배낭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지금요?”
응 지금, 이라고 후지시로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진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기술 같은 건 엉망일 텐데.”
허둥지둥 어깨에서 배낭을 내린 하루가 휘젓듯이 손을 찔러 넣고 조그만 앨범을 꺼냈다.
센터가 외곽에 있는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앨범을 넘겼다.
눈 속에 파묻힌 도로표지판, 메마른 논들 가운데 서 있는 편의점, 비에 젖은 목조건물 초등학교, 쓸쓸한 역 앞에 있는 낡고 허름한 빵집. 하나같이 색이 옅은 풍경이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여러 가지 것들이 차츰 사라졌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해서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고. 그러는 사이 친구도, 근처 초등학교도, 단골로 다녔던 빵집도 모두 사라졌죠.”
하루가 속삭이듯 말했다. 오고가는 자동차 엔진소리가 그 소리를 집어삼키며 단편적인 말토막으로 만들었다.
“이건 사과나무 꽃인가?”
말없이 앨범을 계속 넘겨보던 후지시로가 손길을 멈췄다. 사진 속에서 흘러넘칠 정도로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맞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엄청나게 많이 찍었어요.”
하루가 앨범을 곁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름답네, 라고 말한 후지시고가 앨범 페이지를 넘겼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새하얀 꽃이 이어졌다.
“그 꽃은 어떤 사람을 위해서 찍었어요.”
“어떤 사람?”
“집 옆에 사진관이 있었어요. 오래된 작은 가게였죠. 가게 주인아저씨가 늘 혼자 카메라를 고치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많이 놀아주셨죠. 전 그분에게 카메라를 배웠어요. 카메라뿐만이 아니고, 어떤 장난감이든 시계든 다 고쳐내는 마법사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병에 걸려 쓰러져버렸죠.”
후지시로는 앨범에서 눈을 들어 하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남은 생이 얼마 안 된다는 선고를 받은 아저씨는 어찌할 바를 몰라 수술도 거부하고 온종일 가게 앞에 놔둔 작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매일 사진관에 갔어요. 내가 죽으면, 넌 날 잊어버릴 거야.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어요. 넌 틀림없이 내 얼굴도 목소리도 걷는 모습도 잊어버리겠지.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내가 여기서 카메라를 만지고, 너와 얘기를 나눈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몹시 괴로워 보였다. 후지시로는 그저 말없이 그 옆얼굴만 바라보았다. 고층빌딩의 상공을 날아가는 헬리콥터 소리가 멀리서 울려퍼졌다. 그토록 시끌벅적했던 시부야의 거리가 그녀를 위해 조용히 숨을 죽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저는 매일 사과밭에 다녔어요. 그 꽃에 카메라를 대고 셔터를 계속 눌렀죠. 사과나무 꽃은 무정하고 수수해. 금세 떨어져버리는 데다 벚꽃처럼 인기도 없지. 그래도 좋아해. 작지만 열심히 살아가지. 아저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일주일이 지나고 사과 꽃이 떨어지기 시작한 날에 아저씨는 세상을 떠났죠. 사진을 보여줄 순 없었어요.”
“보여드리고 싶었겠네.”
후지시로가 다시 앨범을 들척이기 시작했다.
“아뇨, 그거면 됐어요. 저는 아저씨에게 사진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아저씨를 위해서 찍었죠. 내가 그때 아저씨에게 품었던 마음은 여기 남아 있어요.”
별안간 바로 앞에 있는 중고옷 가게의 셔터가 올라가더니, 거대한 스피커에서 힙합뮤직이 뿜어지듯 흘러나왔다. 후지시로는 중저음 리듬에 쫓기면서 앨범을 넘겼다. 눈 같은 순백색이 겹쳐지며 번져 보였다.
“……후지지로 선배는 어떤 걸 찍고 싶어요?”
굉음 사이를 뚫고 하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후지시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찍고 싶은 것을 찾아 눈을 돌렸다. 멀리 보이는 길거리 광고 화면에서는 또다시 금발 여성가수가 허리를 꿈틀대고 있었다. 교차점을 건너는 사람들 무리가 밀려들었다.
“인물사진을 찍고 싶어.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을 수 있게 되고 싶어.”
후지시로가 하루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보며 얘기할 수 있었다.
“인물사진은 어렵잖아요. 저도 서툴러요.”
하루도 후지시로의 시선을 맞받았다.
“좋은 인물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아. 그런데 나한테는 그런 욕구가 없어.”
“욕구, 요?”
“그래. 인간의 깊은 내면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고 할까.”
“그 느낌, 알 것 같긴 해요.”
“이요다는 앞으로 어떤 걸 찍고 싶지?”
하루는 말없이 파인더를 들여다봤다. 눈앞에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발들로 렌즈를 돌렸다. 프레임 속을 통과하는 빨간 바닥 하이힐, 형광색 운동화, 검은 가죽구두, 철 지난 비치샌들. 한참동안 신발들을 쫓던 하루가 대답했다.
“찍히지 않는 거라고 할까요?”
카메라를 들고서 희한한 소리를 다 한다며 후지시로가 웃자, 하루가 파인더를 들여다보며 “그러네요”라고 대답했다. 그 옆얼굴은 기분 탓인지 미소 짓고 있었고, 예쁘장한 귀는 열기를 띤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저는 비 냄새나 거리의 열기, 슬픈 음악이나 기쁜 듯한 목소리,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같은 걸 찍고 싶어요.”
“분명 찍히지 않는 것들이긴 하네.”
“네. 그렇지만 확실하게 거기 있는 것들이죠.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유는 찍히지는 않지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만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때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느꼈던 뭔가를 남기기 위해 셔터를 누르죠.”
“난 절대 못 찍겠군. 하지만 그런 사진을 보는 건 좋아해.”
열심히 할게요. 그녀가 카메라에서 얼굴을 들며 말했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앨범을 살며시 건네받았다.
검은 페인트를 거칠게 칠한 벽에 설치해둔 스테인리스 개수대가 무디게 빛났다. 벽돌 건물 지하에 차려놓은 비좁은 암실에 있으면, 시간 감각이 점차 사라진다. 하루가 물결치는 현상액 속에서 인화지를 흔들었다. 30초, 40초. 후지시로가 시계를 봤다. 빨간 안전등 불빛을 받아 인화지에 흐릿한 상이 떠올랐다. 붉은 하늘에 떠 있는 붉은 소나기구름. 숨이 막힐 것 같은 아세트산 냄새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졌다.
“조금만 더.” 후지시로가 등 뒤로 다가가며 하루에게 말했다. 봄 잔디 같은 냄새가 났다. 머리칼 냄새일까 목덜미 향기일까.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열기가 가셨다. 현상액 속의 붉은 소나기구름에 음영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후지시로가 되풀이했다. 그런데 하루가 갑자기 집게로 인화지를 끄집어냈다. 아니 아직, 이라는 후지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상이 흐린 인화지를 그대로 정착액 쟁반에 흘리듯 미끄러뜨렸다. “조금 빠른 거 아닌가?” 후지시로의 목소리를 그제야 들은 하루가 “네?”라고 놀라더니, 미안하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인화지가 마를 때까지 두 시간. 암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기다렸다. 후지시로는 드문드문 몇 권이 빠진 개그만화를 읽고, 하루는 독일 카메라맨의 사진집을 들척였다. 실험 결과를 기다리는 것 같은 이 시간이 좋았다. 두 시간 후, 암실을 열고 사진을 클립에서 빼서 빛 속으로 들고 나왔을 때 결과를 알 수 있다. 그 사진이 정말로 찍고 싶은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후지시로는 암실 구석에 기분이 좋을 정도로 딱 들어맞게 자리를 차지한 냉장고에서 우롱차 캔 두 개를 꺼내서 하루에게 하나를 건넸다. 그녀 옆에 앉아 뚜껑을 따려 했지만, 잘 따지질 않았다. 단둘만 있는 암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살짝 시원했지만,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간신히 뚜껑을 따고, 쑥스러움을 감추듯 입을 댔다. 냉장고는 늘 최저 온도로 설정해놔서 지나치게 차가워진 우롱차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밖에서는 색소폰과 클라리넷, 플루트와 오보에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취주악부 회원들이 동아리 방 건물의 규칙을 깨고 제각각 복도에서 연습하고 있지만, 아무도 타박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뒤섞인 악기 소리가 흘러들었다. “여어, 펜탁스”라며 후지시로가 손을 들었다. 펜탁스사의 티셔츠에 최신 디지털 일안리플렉스카메라를 들고 키가 큰 남자가 들어왔다. 2년 전, 거의 매일같이 똑같은 옷차림으로 동아리 방에 오는 그에게 동기인 후지시로가 ‘펜탁스’라고 이름 붙였고, 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는 기색으로 그 별명을 받아들였다. 사진부의 수다쟁이 회장. 이제부터 최소한 30분은 그의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이요다, 컨디션은 어때?”
펜탁스가 영어로 ‘한 획을 긋는 명기. 그 의심할 나위 없는 우수성’이라고 적힌 티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편의점에서 사온 닭튀김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아주 즐겁다고 하루가 대답하자, 그는 그때부터 한동안 펜탁스사에서 만든 카메라의 우수성에 관해 열변을 쏟아냈다. 그가 그 사랑을 얘기할 때는 늘 흡사 팝콘이 튀듯 말들이 잇달아 흘러넘친다. 프레젠테이션이 한 차례 끝나자, 시부야에서 뭘 촬영했냐고 하루에게 물었고,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도쿄라는 도시를 여성적인 시선으로 포착해서 좋군”이라는 비평을 덧붙였다. 그는 지난달에 찍었다는 노선이 폐지된 사설 철도 사진을 보여주면서 “지금의 너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해”라고 얘기를 매듭지었다. 하루가 그 사이에 뱉은 단어는 채 열 개가 되지 않았다.
얘기가 끊긴 틈을 타서 후지시로는 하루를 데리고 암실로 돌아가 클립에서 사진을 살며시 빼냈다. 인화가 끝난 사진은 색소가 옅어서 하루처럼 보였다. 빌딩숲 계곡으로 보이는 구름,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계단, 살짝 어긋난 초점으로 잘라낸 전광게시판, 튀어 오르듯 걸어가는 여고생들의 뒷모습, 그 모든 것이 얇은 베일에 덮인 부드러운 세계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멍하니 바라보던 거리의 풍경 같았다.
후지시로와 하루가 동아리 방으로 돌아가자, 펜탁스와 여학생 회원 세 명이 안쪽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서 각자 사온 과자를 먹으며 트럼프 게임에 빠져 있었다. 누시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무표정인 채로 드래건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방 한구석에서 후지시로가 하루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요다의 사진, 난 아주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색이 좀 옅은 이유는 뭐야? 노출 부족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찍을 때인지, 인화할 땐지, 아니면 양쪽 다인지. 나중에 보면 늘 옅어요.”
“희한하네.”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런데?”
“내가 보고 싶은 경치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보고 싶은 경치, 라고 중얼거리고 후지시로는 벽 한 면에 가득 붙어 있는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브루스 웨버, 해리, 캘러헌, 브레송과 만 레이. 전설의 사진들에 뒤섞이듯 회원들이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벚꽃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속으로 달려가는 열차와 해바라기로 가득한 밭, 버려진 세발자전거에 아무도 없는 수영장 등등, 시대와 공간이 막연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나에게도 있을까, 그런 경치가?”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럴까.”
후지시로는 여전히 아세트산 냄새가 남아 있는 하루의 사진들을 들척였다. 사각형 빌딩에 잘려나간 하늘 사진이 이어지다가 뜬금없이 남자 얼굴이 나타났다.
포커스가 안 맞는 옆얼굴. 은색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전철 안에서 문 옆에 선 채 온 얼굴을 구기며 웃고 있었다. 아이가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틈에 찍혔을까. 마음이 술렁이고, 심장 고동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웃는 얼굴이었다.
시야 한쪽 끝에서 빨간색이 튀어 올랐다.
여자아이가 있는 힘껏 손을 뻗어 아빠가 들어 올린 손바닥에 닿으려고 점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뗐을까. 그 손은 닿지 않고, 몸의 중심이 무너져 바닥에 나뒹굴고, 빨간 원피스 자락이 팔랑거렸다. 터지듯 쏟아져 나온 웃음소리가 흰색을 또다시 표백한 것 같은 공간에 울려퍼졌다.
“완전히 사라졌나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잡지를 팔랑팔랑 넘기던 야요이가 어느새 손길을 멈추고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뭐가?”
후지시로가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우리의 연애.”
야요이가 잡지를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제목을 덧그렸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신부 사진 위에 핑크색 문자가 춤추고 있었다. 결혼의 현실. 우리의 연애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뭐야, 그게?”
후지시로는 웃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어미 돌고래에게 바짝 붙어서 헤엄치는 새끼 돌고래 사진이 나왔다. 캐나다 수족관에서 큰돌고래 새끼가 태어났다는 뉴스. 몸길이는 130센티미터, 몸무게는 30킬로그램. 돌고래 새끼는 민감하고 생존율이 낮기 때문에 일반 공개는 한동안 미뤄질 것 같다.
“이젠 결혼은커녕 연애하기도 힘들다. 돈도 들고 시간도 뺏긴다. 자기 페이스를 흩트러뜨리리고 싶지도 않다. 요컨대 혼자가 부담 없고 좋다는 게 남자들의 본심이다.”
야요이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기사를 읽은 후, 추궁하듯 후지시로를 쳐다봤다. 옅은 갈색 눈동자. 굵게 말린 긴 머리칼 사이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혼자는 외로울 것 같은데.”
후지시로가 씁쓸한 웃음으로 답했다.
“정말로?”
“거짓말 같아?”
“결혼하고 2년만 지나면 그런 감정도 사라진다. 사랑이 정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음독을 끝낸 야요이가 지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꿈도 희망도 없네, 라고 중얼거리며 후지시로는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돌리고 화면을 스크롤했다. 아이슬란드에서 관측된 개기일식 뉴스. 다음은 1년 후, 인도네시아에서 태양과 달이 겹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만큼 일식이 설레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런데…… 확실히 최근에는 없네.”
야요이가 잡지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며 말했다.
“뭐가?”
후지시로가 그녀의 옆얼굴을 향해 물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거나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질투한다거나, 뭐 그런 거.”
분명 그렇긴 하네, 라고 말하려던 후지시로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곁눈으로 야요이를 쳐다봤다. 몸에 익숙지 않은 멋진 감색 정장을 입고, 빨간 원피스 여자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의 공백을 메우듯이 스피커에서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들려왔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멀리 있는 자리에서는 엄마가 바닥에 뒹군 여자애를 안아 일으켜서 젖혀진 원피스 자락을 매만져주었다.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치지만, 표정은 부드럽다.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지, 라며 아빠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머리를 땋아 올리고, 광택이 도는 검은색 바지정장을 입은 여성이 눈앞의 자리에 앉았다. 옷깃에 장식이 많은 하얀 셔츠가 재킷 사이로 엿보였다.
“여기에 플랜 몇 개를 가져 왔으니 살펴보시죠.”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야요이가 잡지를 덮고 눈을 들었다. 그녀에게 맞추듯이 후지시로도 스마트폰을 린넨 재킷 주머니에 넣고, 바지정장 여성을 쳐다봤다. 30대 후반쯤 됐을까. 완벽한 미소와는 대조적으로 그 손에는 피곤이 배어 있었고 은반지가 유난히 반짝거려 보였다.
“성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신랑분은 후지시로 슌 씨, 신부님은 사카모토 야요이 씨. 한자도 맞나요?”
야요이가 맞다고 대답했고, 후지시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석 바닥에 똑같은 실루엣의 바지정장을 차려 입은 웨딩플래너들의 발소리가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울려퍼졌다. 호화로운 샹들리에, 무수한 웨딩드레스. 고급 호텔 안에 자리한 웨딩숍에 늘어선 유리 테이블에서는 여러 쌍이 동시에 예식 절차를 정하고 있었고, 호들갑스럽게 풍성하게 꽂아둔 백합이 당신들은 행복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대답하기 곤란하지 않다면 여쭙겠는데, 두 분의 직업은?”
“저는 의사고, 이 사람은 수의사입니다.”
“두 분 다 의사시군요. 잘 어울리시는 두 분께 최적의 예식을 제안해드리겠습니다.”
역겹기 그지없는 그 말에 후지시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야요이도 옆에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웨딩드레스는 정하셨나요?”
“아직 못 정했어요, 지금부터 정하려고요.”
야요이가 대답했다.
“둘 다 늘 시간이 촉박해서.”
후지시로가 말을 덧붙였다.
“그럼, 신혼여행도?”
“그렇죠, 아직 아무것도.”
“저나 이 사람이나 휴가가 좀처럼 맞질 않아서.”
“유럽을 돌아보고 싶긴 하지만.”
“고작해야 하와이나 갈 수 있을까.”
호흡이 척척 맞는 대답. 야요이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고, 후지시로가 뒤이어 인정했다.
드레스는 화려한 것보다는 소재가 좋은 것. 케이크는 모조품 말고 다 같이 나눠 먹을 수 있는 것. 스틸 카메라는 필요하지만, 비디오카메라는 필요 없다. 부모님에게 드리는 편지는 할애한다. 답례품은 카탈로그에서, 청첩장은 모노톤. 뭘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뭘 하고 싶지 않은지로 선택한 것들. 의견 대립은 없었다.
웨딩플래너는 기분 좋은 맞장구를 치고, 때로는 다른 시점의 조언을 곁들이면서도 공감을 이끌어냈다. 불쾌한 것, 싫은 것,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 후지시로와 야요이가 공유하고 있는 부정적인 감각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흡사 진찰 같다고 후지시로는 생각했다. 신랑신부에게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지만, 그녀에게는 수백, 수천 번 중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