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젊은 뇌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스탠퍼드대학교 신경과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이언스〉 〈네이처〉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뇌 가소성, 시간 지각, 공감각, 신경 법학 분야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2009년 《썸》을 출간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5년 미국공영방송 PBS TV 프로그램 ‘데이비드 이글먼의 더 브레인’을 진행하며 뇌과학의 최신 이슈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함으로써 “뇌과학계의 칼 세이건”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외과적인 수술 없이 뇌-기계를 이어주는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기업 네오센서리 대표로, 청각장애인을 위해 소리를 진동으로 바꿔 전달하는 조끼 등 다양한 장치를 개발함으로써 감각 대체 연구에 이바지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더 브레인》 《창조하는 뇌》(공저) 등이 있다.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는 원제 ‘인코그니토Incognito’에서 드러나듯 ‘신분을 숨긴’ ‘익명의’ 범인, 즉 우리 무의식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 뇌에 대한 무한한 탐구다. 우리의 모든 판단, 선택, 행동을 좌우하는 1.4킬로그램의 작은 머릿속 독재자가 설계한 세계가 펼쳐진다.
옮긴이 김승욱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스토너》 《킹덤》 《시인》 《행복의 지도》 《우주, 시간, 그 너머》 《나보코프 문학 강의》 《모스트 원티드 맨》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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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뇌과학의 대답
우주가 이렇게 광대할 줄을 우리가 결코 상상하지 못했듯이, 우리 자신이 이렇게 대단할 줄을 직관과 성찰로 알아내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내면 우주의 광대함을 처음으로 언뜻 목격하는 중이다. 뇌는 우리에게 외계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기관이지만, 그 세세한 회로 패턴이 우리의 내면생활을 조각해낸다. 뇌는 얼마나 당혹스러운 걸작인지. 그리고 이 뇌에 주의를 돌릴 수 있는 의지와 기술이 있는 시대에 살게 된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우리가 우주에서 발견한 가장 놀라운 것. 그것이 뇌이고, 그것이 우리다. 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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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GNITO
Copyright ⓒ 2011 David M. Eagl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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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내 머릿속에 누가 있는데, 내가 아니야
거울 속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라. 멋지고 잘생긴 모습 뒤에,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기계가 숨은 우주처럼 움직이고 있다. 정교하게 맞물린 뼈대, 튼튼한 근육망, 상당량의 특수한 액체, 서로 협업하는 내부 기관들로 이루어진 그 기계는 어둠 속에서 칙칙폭폭 열심히 움직이며 우리 생명을 유지해준다. 자가 치유 능력을 갖춘 하이테크 감각 소재로 이루어진 막, 즉 우리가 피부라고 부르는 막이 이 기계를 매끈하게 덮어 보기 좋은 모양을 연출한다.
이 기계뿐만이 아니라, 뇌도 있다. 우리가 우주에서 찾아낸 것 중 가장 복잡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게가 약 1.4킬로그램인 뇌는 두개골이라는 장갑 벙커 안에서 작은 통로들을 통해 신속하게 전달되는 정보를 모아 모든 작전을 주관하는 통제 센터다.
뇌는 뉴런이라고 불리는 세포와 교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포들이 수천억 개나 된다. 이 세포들은 각각 도시 하나만큼 복잡하며, 그 안에 인간의 게놈 전체를 품고 있다. 수십억 개의 분자들을 복잡하고 효율적으로 교환하는 역할도 한다. 각각의 세포는 초당 최대 수백 번 다른 세포에 전기 펄스를 보낸다. 뇌에서 오가는 이 수많은 펄스들을 각각 광자로 표시한다면, 눈이 부시다 못해 멀 것 같은 광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 세포들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서 인간의 언어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수학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뉴런은 이웃 뉴런들과 약 1만 번 접속한다. 뉴런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뇌 조직 1세제곱센티미터에서 이루어지는 접속 횟수가 은하수의 별들 숫자와 맞먹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두개골 속의 이 1.4킬로그램짜리 기관, 젤리 같은 농도의 이 분홍색 기관은 우리에게 낯선 계산기다. 자체 구성이 가능한 소형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꿈에서나 그려보는 모든 기계를 까마득히 앞선다. 그러니 만약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거나 삶이 따분하게 느껴진다면, 기운 내기 바란다. 우리는 이 행성에서 가장 분주하고 가장 밝게 빛나는 존재다.
우리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상에 우리만큼 복잡한 시스템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스템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해독하는 일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다. 데스크톱 컴퓨터가 주변기기를 스스로 통제해서, 제 커버를 벗기고 웹캠의 렌즈를 그 안의 회로 쪽으로 돌린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두개골 안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사실은 인류의 지성이 이룩한 가장 의미 있는 발전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가 하는 행동, 생각, 경험의 수없이 다양한 측면들이 광대하고 촉촉하며 화학물질과 전기로 움직이는 네트워크, 즉 신경계와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실. 이 기계는 우리에게 낯설기 그지없지만, 어쨌든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엄청난 마법
1949년 아서 앨버츠가 뉴욕주 용커스의 집에서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와 팀북투 사이의 마을들로 여행을 떠났다. 아내와 동행한 그가 가져간 것은 카메라 한 대와 지프 한 대,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프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녹음기 한 대였다. 그때 그가 서구 세계의 귀를 열어주고 싶어서 녹음한 음악은 일찍이 아프리카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음악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1 그러나 앨버츠는 녹음기를 사용하다가 그곳 사회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서아프리카 토박이 한 명이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앨버츠가 “자신의 혀를 훔쳐갔다”고 비난한 것이다. 앨버츠는 거울을 꺼내 그 남자의 혀가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납득시킨 뒤에야 간신히 주먹질을 면할 수 있었다.
그곳 주민들이 녹음기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목소리는 덧없어 보인다. 깃털이 가득한 봉투를 열었을 때, 산들바람에 깃털이 죄다 흩어져 결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목소리에는 무게도 냄새도 없다. 목소리를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그러니 목소리가 물리적인 존재라는 말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공기 중의 분자에 가해지는 아주 미세한 압력까지 감지할 만큼 예민한 기계를 만든다면, 밀도의 변화를 포착해서 나중에 재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기계를 마이크로폰이라고 부른다. 현재 지구에서는 수십억 대의 라디오가 한때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여겼던 깃털을 봉투에 담아 자랑스럽게 제공하고 있다. 앨버츠가 녹음한 음악을 녹음기로 다시 틀어주었을 때, 서아프리카 주민 한 명은 “엄청난 마법”이라고 말했다.
생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각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무게가 나가는 물건 같지는 않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덧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생각에 형태나 냄새 같은 물리적인 성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도 일종의 엄청난 마법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생각도 물리적인 영향을 받는다. 뇌가 바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의 종류도 바뀌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깊은 수면 상태에서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 뇌가 꿈을 꾸는 수면 상태로 옮겨가면, 기괴한 생각들이 저절로 나타난다. 낮에 우리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상적인 생각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알코올, 마약, 담배, 커피, 운동 등을 뇌의 화학적 칵테일에 첨가해서 그런 생각을 열심히 조정한다. 물리적인 뇌의 상태가 생각의 상태를 결정한다.
물리적인 뇌는 정상적인 생각이 기능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고로 새끼손가락을 다치면 괴롭겠지만, 우리 의식이 경험하는 일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새끼손가락과 맞먹는 크기의 뇌 조직이 손상되면, 음악을 이해하거나 동물을 구분하거나 색깔을 구분하거나 위험을 판단하거나 결정을 내리거나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어내거나 거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능력이 변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베일에 가려져 있는 머릿속 기계의 기묘한 작용이 밝혀진다. 희망, 꿈, 포부, 두려움, 개그 본능, 훌륭한 아이디어, 페티시즘, 유머 감각, 욕망의 근원이 모두 이 기묘한 기관이다. 뇌가 변하면 우리도 변한다. 직관적으로는 생각에 물리적 기반이 없어서 바람에 날리는 깃털 같다고 여기기 쉽지만, 생각은 사실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1.4킬로그램짜리 작전 통제 센터의 온전함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 자신의 뇌 회로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가장 먼저 간단한 교훈 하나를 얻는다. 행동과 생각과 느낌 대부분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뉴런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정글이 알아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의식을 지닌 나, 아침에 눈을 뜰 때 깜박거리며 살아나는 ‘나’는 뇌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가장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뇌의 기능에 기대어 내면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뇌는 스스로 쇼를 진행한다. 뇌가 수행하는 작전의 대부분은 우리 의식이 지닌 보안등급을 넘어선다. ‘나’에게는 그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 의식은 대서양을 건너는 증기선에 몰래 숨어든 아주 작은 밀항자와 같다. 이 밀항자는 발밑에 존재하는 거대한 기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행의 공을 자기 몫으로 돌린다. 이 책은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다룬다. 우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사람, 시장, 비밀, 스트리퍼, 퇴직금 계좌, 범죄자, 예술가, 율리시스, 주정뱅이, 뇌중풍 환자, 도박꾼, 운동선수, 블러드하운드, 인종차별주의자, 연인, 우리가 지금껏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결정과 관련해서 이 사실이 무엇을 설명해주는지.
남자들에게 여자들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며 얼마나 매력적인지 점수를 매겨보라고 한 실험이 있었다. 20×25센티미터 크기의 사진 속에서 여자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거나, 앞모습이 4분의 3쯤 보이는 각도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여자들의 눈동자를 실제보다 더 확대한 사진이 절반 섞여 있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눈동자가 커진 여자들에게 일관되게 더 큰 매력을 느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쪽 사진보다 이쪽 사진의 눈동자가 2밀리미터 더 크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도 콕 집어낼 수 없는 이유로 특정한 여자에게 더 마음이 끌렸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대체로 접근이 불가능한 뇌의 작용 중에, 여성의 팽창된 눈동자가 성적인 흥분 및 준비 상태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뭔가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뇌는 이 사실을 아는데, 실험에 참가한 남자들은 몰랐다. 적어도 명백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이라는 개념과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수천만 년 동안 자연선택을 거치며 조형된 프로그램과 단단히 연결되어 조종당하고 있음을 몰랐을 것이다. 가장 매력적인 여성을 고를 때 그들은 선택의 주체가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수십만 세대를 거치며 뇌의 회로에 깊이 각인된 성공적인 프로그램이 선택의 주체였다.
뇌는 정보를 수집해서 행동 방향을 적절하게 조종하는 기능을 한다. 의사결정에 의식이 관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은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주제가 커진 눈동자든, 질투든, 매력이든, 기름진 음식에 대한 사랑이든, 지난주에 떠올린 훌륭한 아이디어든 상관없이 의식은 뇌의 활동에서 가장 작은 역할을 한다. 뇌는 주로 자동으로 움직이며, 의식은 자신의 기저에서 움직이는 그 거대하고 신비로운 공장에 거의 접근하지 못한다.
저 앞에서 빨간색 도요타 한 대가 진입로를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발이 벌써 브레이크를 향해 절반쯤 다가가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저쪽 편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다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알아차리는 것, 이유도 모른 채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신경계가 ‘육감’을 제공하는 것이 증거다.
뇌는 복잡한 시스템이지만, 그것이 곧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자연선택을 거치면서 우리의 신경회로는 조상들이 진화과정에서 직면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조성되었다. 뇌도 비장이나 눈과 똑같이 진화의 압박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우리 의식도 마찬가지다. 의식이 발달한 것은 그편이 이롭기 때문인데, 그 이로움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들의 특징적인 활동을 생각해보자. 공장이 돌아가고, 통신선을 따라 신호가 분주히 오가고, 기업은 제품을 배송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음식을 먹는다. 하수로가 폐수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경찰은 넓은 국토 전역에서 범죄자를 뒤쫓는다. 사람들은 거래가 성사됐음을 악수로 확인한다. 연인들이 만난다. 비서는 걸려 오는 전화를 처리하고, 교사는 가르치고, 운동선수는 경기하고, 의사는 수술하고, 버스 기사는 운전한다. 내가 사는 훌륭한 나라에서 어느 특정한 순간에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 해도, 이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 모든 정보가 쓸모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약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문을 집어 든다. 〈뉴욕타임스〉처럼 묵직한 신문이 아니라 〈USA 투데이〉처럼 가벼운 신문이다. 앞에서 말한 활동들이 신문에 전혀 실려 있지 않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뿐이다. 우리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세법을 의회가 방금 통과시켰다는 사실은 알아야 하지만, 그 세법과 관련된 상세한 이야기(변호사와 기업과 필리버스터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이 나라의 식량 생산과 관련된 온갖 시시콜콜한 정보들(소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그들 중 몇 마리가 식용으로 사용되는지 등)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광우병이 갑자기 증가하는 경우 그 사실을 빨리 알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쓰레기가 만들어지고 처리되는 과정 또한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쓰레기가 우리 집 뒷마당에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으면 된다. 공장의 기반시설에도 우리는 관심이 없다.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문에서 이런 정보를 얻는다.
우리 의식이 바로 이런 신문과 같다. 뇌는 24시간 내내 분주히 움직인다. 거의 모든 활동이 국지적으로 일어난다는 점도 국가와 똑같다. 작은 집단들이 끊임없이 결정을 내리고 다른 집단에 메시지를 보낸다. 이런 국지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더 큰 연합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정신이라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읽을 무렵이면, 중요한 활동과 거래는 이미 이루어진 뒤다. 막후에서 벌어진 일에 우리는 거의 접근할 수 없다. 놀라울 정도다. 우리가 느낌이나 직감이나 생각이라는 형태로 낌새를 알아차리기 전에 모든 정치적 움직임이 이미 바닥부터 지지를 얻어 멈출 수 없는 수준까지 진전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정보를 맨 마지막에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한 종류의 신문 독자라서 헤드라인을 읽으면서 마치 자신이 그 생각을 처음 해낸 것처럼 공치사를 한다. “방금 좋은 생각이 났어!” 기쁨에 차서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이 천재적인 발상이 뇌리에 떠오르기 전에 뇌가 이미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놓았다. 막후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올려보낸다는 것은, 신경회로가 몇 시간, 며칠, 몇 년 동안 정보를 통합하고 새로운 조합을 시험하는 작업을 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후에 숨어서 움직이는 이 광대한 기계에 별로 감탄하지 않고 그 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이런 우리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뇌는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엄청난 마법처럼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그 거대한 운영 시스템을 의식이 인지하고 조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뇌는 자신을 숨긴 채 작전을 지휘한다.
그렇다면 훌륭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공은 정확히 누구의 것인가?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1862년에 전기와 자기를 통합한 중요한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둔 어느 날 기묘한 고백을 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의 어떤 것”이 그 유명한 방정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디어가 자신을 찾아오는 과정을 전혀 모른다고 시인했다. 아이디어가 그냥 떠오를 뿐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도 긴 이야기 시인 〈밀턴〉과 관련해서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는 미리 생각해둔 것 없이 즉석에서 구술하듯이 한 번에 12행쯤, 때로는 무려 20행까지 쓰는 방식으로 이 시를 썼다. 심지어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시가 써질 때도 있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중편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쓸 때 자신의 의식이 기여한 것은 사실상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마치 손에 쥔 펜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사례도 생각해보자. 그는 1796년부터 아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래 치통과 안면 신경통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곧 돌이킬 수 없이 중독돼서 매주 아편제 2쿼트(약 2.3리터)를 꿀꺽꿀꺽 마셔댔다. 이국적이고 몽롱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시 〈쿠빌라이 칸〉을 쓸 때 그는 아편에 취한 상태였는데, “일종의 환상”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에게는 아편이 잠재의식 속 신경회로에 접근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우리가 〈쿠빌라이 칸〉의 아름다운 시어들을 콜리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멀쩡할 때는 그런 단어들을 잡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시의 저자는 정확히 누구인가?
카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 핑크 플로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머릿속에 누가 있는데, 내가 아니야.”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모두 우리의 의식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 사실 이편이 더 낫다. 의식이 모든 걸 자기 공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뇌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때에는 옆으로 물러나 있는 편이 최선일 때가 대부분이다. 의식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세한 부분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피아노 건반에서 손가락을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곡을 잘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의식의 간섭이 어떤 장난을 치는지 증명하려면, 친구에게 화이트보드용 마커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여주고, 오른손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쓰면서 동시에 왼손으로는 이름을 거꾸로(거울에 비친 것처럼) 쓰라고 해보라. 친구는 그 일을 해내는 방법이 하나뿐임을, 즉 그 일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방법뿐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의식의 간섭을 배제하면, 왼손이 오른손의 동작을 거울처럼 따라 하는 복잡한 움직임을 문제없이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동작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금방 머뭇거리는 선들이 가시나무처럼 복잡하게 뒤엉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의식을 불러들이지 않는 편이 최선이다. 의식은 보통 해당 정보를 가장 마지막에 알게 된다. 야구공을 방망이로 때리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1974년 8월 20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사이의 경기에서 놀런 라이언은 시속 100.9마일(161.44킬로미터, 초속 44.7미터)의 강속구를 던졌다고 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 이 속도로 계산해보면, 라이언이 던진 공이 투수 마운드에서 18.44미터 떨어진 홈플레이트까지 0.4초 만에 날아왔음을 알 수 있다. 야구공에서 출발한 빛 신호가 타자의 눈에 도달해 망막의 회로를 통과해서 뇌 뒤편의 시각 시스템이라는 슈퍼 고속도로를 따라가며 세포들을 연달아 활성화하고, 광대한 거리를 가로질러 운동영역에 도달해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데 필요한 근육의 수축을 조정하기에 빠듯한 시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0.4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강속구를 때리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 현상을 인식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약 0.5초가 걸린다. 즉, 타자의 의식이 공을 인식하기에는 공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뜻이다. 정교한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의식이 그 동작을 인식할 필요는 없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내 쪽으로 날아온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도 전에 내가 그 가지를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는 것, 전화벨이 울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 몸은 이미 벌떡 일어서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의식은 뇌에서 일어나는 일의 중심에 있지 않다.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속삭임을 먼 가장자리에서 듣기만 할 뿐이다.
중심에서 멀어진다는 것의 좋은 점
우리가 뇌를 점점 이해하게 되면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바뀌고 있다. 우리가 모든 활동의 중심이라는 직감에서 더 정교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감탄하는 시각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전에도 본 적이 있다.
1610년 1월 초 어느 날, 별이 총총한 밤에 토스카나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자신이 고안한 튜브 끝에 한쪽 눈을 대고 있었다. 그 튜브는 물체를 스무 배나 확대해서 보여주는 망원경이었다. 그날 밤 갈릴레이는 목성을 관찰하다가 별 세 개가 목성을 가로지르며 일렬로 늘어선 것을 보았다. 그 현상에 주목한 그는 그 별들이 목성 근처에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다음 날 저녁에도 다시 그 지점을 관찰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별 세 개가 모두 목성과 함께 움직인 뒤였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별들은 원래 행성과 함께 움직이지 않는 법인데. 그래서 갈릴레이는 매일 밤 그 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월 15일에 마침내 의문을 해결했다. 그 별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성 주위를 도는 행성 같은 천체였다. 즉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 관찰 결과로 천구 이론이 부서졌다. 천동설에 따르면, 천구의 중심은 지구 하나뿐이고, 모든 것이 그 주위를 돌았다. 반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달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내놓았으나, 전통적인 우주론 학자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운동의 중심이 둘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조용한 1월에 목성의 위성들이 중심이 여러 개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거대 행성 주위의 궤도를 데굴데굴 도는 커다란 바위들은 천구 표면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지구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의 궤도들이 있는 천동설 모델이 부서졌다. 이 관찰 결과를 설명한 책 《별 세계의 보고Sidereus Nuncius》는 1610년 3월 베네치아에서 발간되어 갈릴레이를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별을 연구하는 다른 사람들이 목성의 위성을 관찰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데에는 6개월이 걸렸다. 곧 망원경 제조 시장이 크게 활발해지면서 천문학자들이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가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를 상세한 지도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4세기 동안 우리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중심에서 미끄러져,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우주 속 아주 작은 점 하나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이 우주에는 은하집단 5억 개, 대형 은하 100억 개, 왜소 은하 1000억 개, 항성 2조×10억 개가 있다(폭이 약 150억 광년인 이 우주는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아주 큰 전체 우주에서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이 엄청난 숫자들은 우리의 위치에 대해 예전에 생각하던 것과는 당연히 근본적으로 다른 현실을 암시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굴러떨어진 것을 대단히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지구는 창조의 모범이 될 수 없었다. 그냥 다른 행성과 똑같은 행성일 뿐이었다. 이렇게 지구의 권위가 도전받으면서, 우주에 대한 인류의 철학적 인식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약 200년 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갈릴레이의 엄청난 발견에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모든 발견과 의견 중에서, 인간의 정신에 이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해도 된다……. 지구는 둥글고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우주의 중심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내려놓아야 했다. 인류가 이보다 더 큰 것을 요구받은 적은 아마 없지 싶다. 이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아주 많은 것들이 안개와 연기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에덴, 우리의 순수한 세계, 경건한 신심과 시는 어떻게 되었는가? 감각의 증언은? 시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의 확신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이 모든 것을 놓아 보내지 못하고, 가능한 한 저항하려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전향자들에게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니 아예 꿈도 꾸지 못했던 위대한 생각과 견해의 자유를 승인하고 요구했다.
갈릴레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새 이론이 인류를 왕좌에서 끌어내렸다고 비난했다. 천구가 박살난 뒤 다가온 것은 갈릴레이의 몰락이었다. 1633년 그는 가톨릭교회의 종교재판정으로 끌려 나갔다. 지하감옥에서 정신이 무너진 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지구가 중심이라고 인정하는 문서에 괴로운 서명을 남겨야 했다.2
그래도 갈릴레이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보다 수십 년 전, 그와 같은 이탈리아인인 조르다노 브루노도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았다가, 1600년 2월에 이단 혐의로 광장에 끌려 나왔다. 그를 붙잡은 사람들은 유창한 언변으로 유명한 그가 군중을 선동할까봐 얼굴에 철가면을 씌워 입을 막았다. 산 채로 화형당하는 동안 그의 눈은 철가면 뒤에서 구경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건의 현장에 있고 싶어서 집에서 나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브루노는 왜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임을 당했는가? 갈릴레이 못지않은 천재였던 그가 어쩌다 족쇄를 차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급격히 바뀌는 것을 확실히 모든 사람이 좋아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변화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들이 알았다면! 확신과 자기중심주의를 잃은 인류는 우주 속 우리의 위치에 경탄과 경이를 느끼게 되었다.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있을 확률이 무지막지하게 낮다 해도, 예를 들어 10억 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해도, 생물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행성이 수십억 개는 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생명체가 있는 행성에서 의미 있는 수준의 지능을 지닌 생명체(예를 들어, 우주 박테리아 이상)가 탄생할 가능성이 고작 100만 분의 1이라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낯선 문명 속에서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행성이 여전히 수백만 개는 될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굴러떨어진 우리는 이런 식으로 훨씬 더 큰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주 과학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뇌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뇌과학에서도 우리가 자아의 중심에서 쫓겨난 뒤, 훨씬 더 찬란한 우주의 모습이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그 내면의 우주로 들어가 낯선 생명체들을 탐사할 것이다.
광대한 내면 우주를 처음으로 일별한 사람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인간의 행동이 선善에 대한 숙고에서 나온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행동 중에 이성적인 고찰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들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딸꾹질, 무의식적으로 리듬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는 것, 농담을 듣고 갑자기 터지는 웃음 등등. 그가 세운 이론의 틀에서 이런 것들이 약간의 걸림돌이 되었으므로, 그는 이런 행동을 인간의 적절한 행동과는 별개의 카테고리로 처리했다. “이성의 숙고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3이었다. 이 카테고리의 정의에 그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의 첫 씨앗을 심었다.
그 뒤로 400년 동안 누구도 이 씨앗에 물을 주지 않다가, 박식한 사람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나타나 접근할 수 있는 부분과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 융합된 것이 정신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젊었을 때 라이프니츠는 하루아침에 육보격六步格 시 300편을 라틴어로 지었다. 그 다음에는 미적분, 이진법, 철학 학파 여러 개, 정치이론, 지질학 가설, 정보기술의 기반, 운동에너지 방정식,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구분이라는 개념의 첫 씨앗을 만들어냈다.4 이렇게 많은 아이디어들이 자신에게서 쏟아져 나오자 그는 (맥스웰, 블레이크, 괴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에 접근할 수 없는 깊은 동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지각이 있다면서, 그것을 ‘미소지각微小知覺’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동물에게 무의식적인 지각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그것이 없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비록 추측을 바탕으로 한 논리였지만, 그는 이른바 무의식 같은 것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몹시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게 될 것이라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인지하지 못하는 소체小體가 자연과학에 중요하듯이, 인지하지 못하는 지각이 [인간 정신의 연구에] 중요하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5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노력과 성향(“강한 욕구”)이 존재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무의식적인 충동을 처음으로 지적한 의미 있는 설명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자신의 주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인간 이해에 관한 새로운 에세이》에 이런 생각을 열심히 적어두었지만, 이 책은 그의 사후 거의 반세기 뒤인 1765년에야 출간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시각과 충돌했기 때문에, 거의 1세기가 흐를 때까지 인정받지 못한 채 시들어갔다. 씨앗이 또 동면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그동안 다른 사건들이 실험적이고 실질적인 학문으로서 심리학이 부상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스코틀랜드의 해부학자 겸 신학자인 찰스 벨(1774~1842)은 (척수에서 전신으로 섬세하게 뻗어나간) 신경이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며,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으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운동신경은 뇌의 지휘센터에서 나온 정보를 밖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고, 감각신경은 정보를 뇌로 가져가는 역할을 했다. 그때까지 신비에 싸여 있던 뇌의 구조에서 처음으로 패턴을 찾아낸 중요한 연구 결과였다. 그 뒤에 등장한 선구자들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뇌가 모호하고 균일한 조직이 아니라 세세한 조직으로 이루어진 기관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1.4킬로그램짜리 조직에서 이런 논리를 찾아낸 것이 학자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이었다. 그래서 1824년에 독일의 철학자 겸 심리학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는 생각 그 자체를 구조적인 수학적 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 생각에 반대되는 생각을 대비시키면, 첫 번째 생각이 약해져서 의식의 문턱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는 것이었다.6 반면 유사한 생각들은 서로가 의식 속으로 떠오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었다. 새로운 생각이 위로 올라가면서 비슷한 생각들을 함께 끌고 가는 식이었다. 헤르바르트는 생각이 고립된 상태에서 의식 속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식 속에 있는 다른 아이디어 복합체와 동화되었을 때에만 의식에 들어올 수 있다는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 ‘통각統覺 집합체apperceptive mass’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헤르바르트는 핵심적인 개념 하나를 세상에 소개했다. 의식적인 생각과 무의식적인 생각 사이에 경계선이 존재하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생각도 있다는 개념이었다.
이런 과정을 배경으로 삼아, 독일인 의사 에른스트 하인리히 베버(1795~1878)는 물리학의 엄밀함을 정신 연구에 적용하는 데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창시한 이 ‘정신물리학’은 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는 것, 반응속도, 그들이 정확히 지각하는 것의 정량화를 목표로 삼았다.7 사상 처음으로 지각이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측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결과들이 새어나왔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감각을 통해 바깥세상을 당연히 정확하게 인지한다고 생각했으나, 1833년 무렵 독일의 생리학자 요하네스 페터 뮐러(1801~1858)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했다. 눈에 빛을 비춰도 압력을 가해도 시신경에 전기자극을 줘도, 시각이 인지하는 감각은 비슷했다. 즉, 압력이나 전기보다는 빛만 감지했다는 뜻이다. 그는 우리가 바깥세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계의 신호만 인지하는 것 같다고 짐작하게 되었다.8 다시 말해서, 신경계가 ‘저 바깥에’ 뭔가가(예를 들면 빛이)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대로 믿는다. 그 신호가 어떻게 도달했는지는 상관없다.
이렇게 해서 물리적인 뇌가 지각과 관련되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될 무대가 마련되었다. 베버와 뮐러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인 1886년에 제임스 매킨 커텔이라는 미국인이 ‘뇌 활동에 걸리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9 이 논문의 결정적인 대목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우리가 질문에 반응하는 속도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해야 하는 생각의 종류에 달려 있다는 것. 번쩍이는 빛이나 빵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간단히 답하기만 하면 되는 경우라면, 우리는 상당히 신속하게(빛의 경우 190밀리초, 소리의 경우 160밀리초)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빨간색 빛을 봤는지 초록색 빛을 봤는지 말하시오”)라면, 수십 밀리초가 더 걸린다. 그리고 방금 본 것을 직접 말해야 하는 경우(“파란색 빛을 봤어요”)라면,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커텔의 이 간단한 연구 결과는 지구인들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사실은 세계관이 우르릉거리며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산업시대가 시작되면서, 지식인들은 기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이 컴퓨터 은유를 사용하듯이, 당시에는 기계 은유가 사람들의 생각에 스며들었다. 19세기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생물학의 발전으로 행동의 여러 측면들을 신경계의 기계 같은 작용과 편안히 연결시킬 수 있었다. 생물학자들은 눈에서 신호가 처리되어 축삭돌기를 따라 시상까지 간 다음, 신경 고속도로를 타고 피질로 이동해서 마침내 뇌 전체의 정보처리 패턴에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은 조금 다르다는 인식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다. 물리적인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또는 영적인 세계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이라는 특별한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 같았다. 커텔의 연구는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자극은 그대로 두고 과제를 바꿈으로써(이러이러한 유형의 결정을 내리시오) 그는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뇌와 정신 사이의 대응 관계를 확립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런 간단한 실험이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사이의 완전한 대응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강력한 증거”를 가져다준다고 썼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으로 뇌의 변화 속도와 의식의 변화 속도를 한꺼번에 측정할 수 있다는 데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10
19세기의 분위기 속에서, 생각에 시간이 걸린다는 연구 결과는 ‘생각은 비물질적’이라는 세계관을 지탱하는 기둥들에 부담을 주었다.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생각 또한 엄청난 마법이 아니라 기계적인 바탕을 갖고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신경계가 수행하는 정보처리과정과 생각을 등식화할 수 있을까? 정신이 기계와 비슷할까? 이제 막 싹을 틔운 이런 주장에 의미심장하게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활동이 자신의 명령에 따라 즉각 나타난다는 직감을 계속 따랐다. 그러나 이 간단한 주장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뀐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 나 자신, 그리고 빙산
찰스 다윈이 혁명적인 책 《종의 기원》을 발간한 시기에, 모라비아 출신의 세 살짜리 사내아이가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사람이 다른 생명체와 다르지 않으며 인간의 복잡한 행동에도 과학적인 빛을 비출 수 있다는 다윈의 최신 세계관과 함께 자라났다.
청년이 된 프로이트는 의대에 진학했으나, 임상적인 응용보다는 과학적인 연구에 더 매력을 느꼈다. 그는 신경학을 전공하고 곧 심리적 장애를 다루는 개인병원을 열었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을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 인간의 다양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 정신적 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신은 막후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기계였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의식에서 행동의 원인을 전혀 찾을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뇌를 기계와 비슷하게 보는 새로운 견해를 이용해서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원인이 틀림없이 저변에 깔려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새로운 시각에 따르면, 정신은 단순히 우리에게 친숙한 의식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큰 부분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빙산과 비슷했다.
이 간단한 생각이 정신의학을 바꿔놓았다. 전에는 정신적인 이상현상을 약한 의지력, 악마 빙의 등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물리적인 뇌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뇌를 조사하는 현대적인 기술이 등장하기 수십 년도 더 전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법이 그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는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정신상태를 바탕으로 뇌의 상태를 추정해보려고 했다. 그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말실수, 글자 실수, 행동 패턴, 꿈 등에 포함된 정보였다. 그는 이 모든 정보가 숨겨진 신경 기계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환자는 이 기계에 직접 접근할 길이 전혀 없었다. 표면으로 삐죽 고개를 내민 행동을 조사하면서, 프로이트는 그 아래에 무엇이 잠복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11 빙산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것을 살펴볼수록, 그는 그 깊이를 더욱 인정하게 되었다. 그 숨은 부분에서 사람의 생각, 꿈, 충동에 대한 설명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깊어졌다.
프로이트의 멘토이자 친구인 요제프 브로이어는 이 개념을 응용해서, 히스테리 환자를 돕는 전략을 만들어냈다. 환자에게 가장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에 관해 아무런 제한 없이 이야기하라고 권유하는 이 전략12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프로이트는 이 기법을 다른 신경증에도 적용하면서, 환자가 묻어둔 과거의 정신적 충격이 갖가지 공포증, 히스테리성 마비, 편집증 등의 숨은 원인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문제들이 의식으로부터 숨겨져 있다는 것이 그의 추측이었다. 해법은 그 문제들을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려 직접 대면함으로써, 신경증을 일으키는 힘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그 뒤 한 세기 동안 정신분석의 기반이 되었다.
정신분석의 인기와 세부적인 부분은 지금까지 상당한 변화를 겪었지만,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이론은 뇌의 숨겨진 부분들이 생각과 행동에 관여하는 과정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것이었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1895년에 함께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나, 무의식적인 생각의 성적인 기원을 강조하는 프로이트에게 브로이어가 점점 실망하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이 갈라선 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탐사한 중요 저서인 《꿈의 해석》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촉발한 일련의 꿈과 자신의 감정적 위기를 분석했다. 이런 자기분석 덕분에 그는 아버지에 대한 뜻밖의 감정을 밝혀낼 수 있었다.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감정에 증오와 수치심이 섞여 있다는 발견이 한 예다. 표면 아래에 이처럼 광대한 것이 숨어 있다는 생각은 자유의지에 대한 숙고로 이어졌다. 프로이트는 숨겨진 정신적 과정에서 선택과 결정이 유래하는 것이라면, 자유로운 선택이란 환상이라고 판단했다. 설사 환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전에 생각하던 것보다 더 단단하게 구속되어 있을 터였다.
20세기 중반 무렵, 사상가들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아의 중심이 아니었다. 은하수 속의 지구, 우주 속의 은하수처럼 멀고 먼 변방에서 소식을 별로 듣지 못하는 존재였다.
무의식적인 뇌에 대한 프로이트의 직감은 정확했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현대적인 신경과학이 꽃을 피우기 수십 년 전이었다. 지금은 인간의 두개골 속을 들여다보면서 세포 하나의 전기신호 스파이크에서부터 뇌의 광대한 영역을 가로지르는 활성화 패턴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현대기술 덕분에 내면 우주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이 영역들을 함께 여행할 것이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정확히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는 것인가? 폭포를 빤히 보다가 바위를 보면, 왜 바위가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가?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관은 뇌졸중으로 몸이 마비된 것이 모두의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왜 미식축구도 하고 등산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까? 코끼리 톱시가 1916년에 토머스 에디슨이 흘려보낸 전기에 목숨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이자가 전혀 붙지 않는 크리스마스 계좌에 돈을 보관하면서 좋아하는가? 술에 취한 멜 깁슨은 반유대주의자이고, 술이 깬 멜 깁슨은 그것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진짜 멜 깁슨이 따로 존재하는가? 율리시스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한 달 중 특정한 시기에 스트리퍼들의 수입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름이 J로 시작하는 사람이 역시 이름이 J로 시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 비밀을 말하고 싶다는 유혹이 그토록 강렬한 이유는 무엇인가?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남들보다 더 높은 배우자의 유형이 있는가? 파킨슨병으로 약을 먹는 환자들은 왜 강박적으로 도박을 하게 되는가? 아이큐가 높은 은행원이자 과거 이글 스카우트였던 찰스 휘트먼이 갑자기 오스틴의 텍사스대학교 타워에서 마흔여덟 명을 총으로 쏜 이유가 무엇인가?
뇌의 막후 활동과 이 모든 일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다.
2장
감각의 증언: 경험이란 정말로 어떤 것인가?
경험의 해체
1800년대 후반의 어느 날 오후, 물리학자 겸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는 각각 균일하게 색이 칠해진 종이 띠들을 나란히 놓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지각의 문제에 관심이 있던 그를 잠시 멈칫하게 만든 것은, 이 띠들이 조금 이상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는 띠들을 분리해서 따로 살펴본 다음 다시 나란히 놓았다. 그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각각의 띠를 따로 떼어서 보면 색이 균일한 것 같았지만, 나란히 놓고 보니 색조가 순차적으로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띠의 왼쪽이 조금 밝고, 오른쪽은 조금 어두웠다. (다음 페이지의 그림 속 띠 하나하나의 밝기가 사실상 균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면, 하나만 제외하고 모든 띠를 가려보라.)1
‘마흐의 띠’라는 이 환상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다른 곳에서도 같은 현상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두 개의 벽이 만나는 귀퉁이에서는 빛의 차이로 인해 귀퉁이 바로 옆이 더 밝아 보이거나 더 어두워 보인다. 지금까지 이런 현상이 눈앞에 뻔히 있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먼 산이 살짝 파랗게 물든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어느 시점부터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때부터 산을 그렇게 그리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화가들의 눈앞에서 단 한 번도 감춰진 적이 없는데도, 그때까지 미술사를 통틀어 누구도 그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뻔한 사실을 지각하지 못하는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관찰하는 능력이 정말로 이렇게 형편없는가?
그렇다. 우리의 관찰력은 놀라울 정도로 한심하다. 게다가 이런 문제에서는 내적인 성찰 능력도 쓸모가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사실을 지적해줄 때까지 자신이 세상을 잘 보고 있다고 믿는다. 마흐가 종이 띠들의 색조를 주의 깊게 관찰했듯이, 우리도 앞으로 자신의 경험을 관찰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우리의 의식적인 경험이란 정말로 어떤 것인가?
직감에 따르면, 우리가 눈을 뜨자마자 세상이 보인다. 아름다운 빨간색과 황금색, 개와 택시, 분주한 도시와 꽃이 만발한 풍경이 모두 눈앞에 있다. 시각에는 따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사소한 예외를 빼면, 정확하기도 하다. 우리 눈과 고해상도 디지털 비디오카메라 사이에 중요한 차이는 별로 없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귀도 세상의 소리를 정확히 기록하는 소형 마이크로폰과 비슷하고, 손끝은 세상의 3차원 형태를 감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직감은 모두 틀렸다. 이제 현실을 살펴보자.
우리가 팔을 움직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자. 뇌는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전달하는 수많은 신경섬유에 의존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번개 폭풍 같은 신경활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의 팔이 움직여서 어딘가 다른 위치에 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뿐이다. 초창기 신경과학의 선구자인 찰스 셰링턴 경은 지난 세기 중반에 한동안 이 사실 때문에 발을 굴렀다. 표면 아래의 광대한 기계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하긴 신경, 근육, 힘줄에 대해 상당한 전문지식을 지닌 그도 종이를 주우려고 움직일 때 “근육 자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어려움 없이 올바르게 그 동작을 수행한다”2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만약 자신이 신경과학자가 아니라면 신경, 근육, 힘줄의 존재를 짐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여기에 몹시 흥미를 느낀 그는 결국 팔을 움직이는 경험이 “정신적인 산물…… 우리가 그 자체로서 인식하지 못하는 요소들에서 유래…… 정신이 그것들을 이용해서 지각의 대상을 만들어낸다”고 추론했다. 다시 말해서, 신경과 근육의 폭풍 같은 활동을 뇌는 인지하지만, 우리 의식 앞에 대령되는 결과물은 상당히 다르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의식을 신문으로 본 비유로 다시 돌아가 보자. 헤드라인의 임무는 기사 내용을 단단히 압축하고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의식은 신경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을 더 단순한 형태로 투사한다. 전문화된 수많은 메커니즘이 레이더망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일부는 감각 데이터를 수집하고, 일부는 운동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대다수는 신경망의 주요 임무를 수행한다. 정보 조합, 곧 다가올 일에 대한 예측,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 그런 임무다. 이런 일들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의식은 큰 그림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요약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자신의 짝이 될 수 있는 사람, 강, 사과 등을 파악하는 데에 유용한 요약본이다.
눈을 뜨다
‘보는’ 행위는 워낙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그 과정 저변의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인간의 뇌에서 약 3분의 1이 시각에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뇌는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광자를 똑똑히 해석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시각적인 장면은 모두 모호하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은 약 500미터 거리에서 바라본 피사의 사탑일 수도 있고 팔길이 정도의 거리에서 본 탑의 장난감 모형일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우리 눈에는 똑같은 이미지로 보인다. 뇌는 눈에 닿은 정보에서 모호한 점을 벗겨내기 위해 맥락을 고려하고, 가정하고, 우리가 곧 배우게 될 수법들을 이용하는 등 엄청난 수고를 들인다. 그러나 이런 일이 모두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앞을 보지 못하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좋은 예다. 그들은 곧바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3 처음에는 갖가지 형태와 색깔이 시끄러운 일제사격처럼 쏟아진다. 눈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뇌는 들어오는 데이터를 해석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평생 앞을 보며 살아온 사람들이 시각이 구축되는 것임을 제대로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시각체계가 착각을 일으킬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착시 현상은 우리 시스템이 진화하면서 처리할 수 있게 된 것들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 현상은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강력한 창문 역할을 한다.4
‘착각’을 엄밀하게 정의하는 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착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부 시야의 해상도는 김이 서린 샤워실 문으로 바깥을 볼 때와 대략 비슷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변부를 선명하게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중심시야가 향하는 곳이 모두 선명히 보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번 해보자. 친구에게 색색의 마커나 형광펜 한 줌을 옆으로 쥐고 있으라고 한 다음, 나는 친구의 코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 상태에서 친구가 쥐고 있는 마커나 형광펜의 색깔을 순서대로 열거하려고 시도한다. 이 실험의 결과는 놀랍다. 주변부 시야에 몇 가지 색깔이 보인다 해도, 색깔 순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변부 시야는 우리가 직감적으로 생각하는 수준보다 한참 더 뒤떨어진다. 전형적인 상황에서 뇌는 주인이 관심을 보이는 대상을 해상도가 높은 중심시야로 곧바로 바라볼 수 있게 눈 근육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리든 시야가 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야 전체가 선명하다고 가정해버린다.*
* 이것과 비슷한 질문으로 냉장고 내부 조명이 항상 켜져 있는지 묻는 것이 있다. 우리는 냉장고에 살금살금 다가가 문을 열 때마다 불이 켜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냉장고 조명이 항상 켜져 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가 시야의 경계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바로 앞에 있는 벽의 한 점을 빤히 바라보면서 팔을 뻗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 다음에는 손을 귀 쪽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시점에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제 손을 다시 앞으로 움직이면 손가락이 보인다. 우리가 시야의 경계선을 오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야에 경계선이 있고 그 너머는 우리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평소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항상 관심이 있는 대상에만 시선을 주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야가 원뿔 모양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고 살아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각을 더 파고들어갈수록, 딱 맞는 조건이 갖춰지기만 하면 뇌가 너무나 설득력 있는 지각을 내놓는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진다. 깊이에 대한 지각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의 두 눈은 서로 몇 센티미터 떨어져 있어서 각자가 보는 세상의 이미지가 조금 다르다. 몇 센티미터 떨어진 위치에서 각각 사진을 찍은 다음, 두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눈동자를 가운데로 모아 두 사진을 보면, 두 사진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깊이가 나타난다. 정말로 깊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평평한 사진에서 생길 리가 없는 깊이가 생겨나는 현상은, 시각 시스템의 계산이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딱 맞는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