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우리는 인문학을 유용성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편견 내지 선입견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 교육을 중요시하는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과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왜 이러한 편견 내지 선입견을 품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러한 편견을 형성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 교육’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와 인문학 교육을 어떻게 시행하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경우 일제치하 이후로 추정되는데, 모든 공교육에서 인문학 교육이 슬그머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시키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일꾼 내지 산업 역군을 양성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의 보고로서의 인문학이 담고 있는 가치를 염두에 둔다면 인문학에서 제기하고 있는 물음과 그 속에 담고 있는 지혜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평가는 인문학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이거나 지배를 위한 논리를 아무런 반성 없이 받아들인 결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인문학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명을 바탕으로 삶의 가치와 좌표를 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다. 특히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한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여러 현실적 문제에 대한 답변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문학을 근간으로 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가치는 확보될 수 없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2013년 1학기 중앙대학교 산업·창업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전공 수업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원생들과 세미나를 실시한 것에서 비롯된다.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세미나 성과물을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는 강의 계획을 밝혔고, 각자의 관심 분야에 따라 발표 주제를 부여했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원생들의 관심이 각자 다른 것은 물론 지금까지 강의를 토대로 책을 출간한 경험이 없는 관계로 출간 계획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과연 계획대로 될 수 있겠냐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한 학기를 거치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전체 주제에 맞추어 학생들은 잘 따라 주었고, 각자 맡은 주제에 대해 최선을 다해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표 성과에 대한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각자 맡은 인문학의 주제들에 대해 원생들 나름대로 고민하고 생각해 오기는 했지만, 막상 한 편의 글로 만드는데 있어서는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는 원생들의 투정을 워크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생들은 각종 자료를 근거로 자신이 맡은 주제에 대해 나름의 분석과 평가를 통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물론 발표 전 담당교수와 검토를 거친 후 발표 및 토론을 거치고 또다시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계획된 기간 내에 출간할 수 있게 하려고 책의 수준을 유지하는 작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점도 아울러 밝혀 둔다. 김장용, 서민규, 최현철 교수님의 글과 최수정 선생님의 글은 각 분야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인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논의를 보다 심화시키기 위하여 별도로 요청한 글이다. 바쁜 와중에도 원고를 선뜻 보내주신 점 이 지면을 빌려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제시된 논의로 ‘인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문학에 대해 보다 폭넓고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한 계기를 마련한 것만으로도 이 책의 소임을 어느 정도 한 것으로 여기고자 한다. 끝으로 어려운 출판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준 어문학사 윤석전 대표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3년 7월
내리 연구실에서 저자를 대표하여
홍병선
1.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 열풍
몇 년 전부터 대학과 기업 그리고 사회를 중심으로 거센 바람을 일으킨 ‘인문학 열풍’이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2006년경 고려대학교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1)한 이후 인문학 위기에 대한 찬반양론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당시 인문학 위기의 문제는 교육부의 학과 통폐합에 따른 열병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최근 들어 부는 인문학 열풍은 그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바람’과 사회적 관심은 고사 직전에 몰린 ‘인문학 구하기’의 일종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현상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생계 문제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여기에 과연 더 이상 동조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코, 그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인문학에 대한 진단이 분명하지 않을 경우에 초래되는 상황이 앞에서 언급한 국내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위기가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을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생계 문제로 맞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위 인문학의 위기라고 일컫는 데 대한 보다 엄밀한 진단의 필요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2000년 초중반 미국에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당시 정부 및 대학에서 취한 조치는 인문학, 특히 철학에 주목하면서 대대적으로 커리큘럼을 조정하고 각종 자격시험에 철학 관련 과목을 채택하는가 하면 대학에서는 필수과목으로 인문학 관련 교과목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왜 그런 조치를 취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술과 기교, 기능 중심의 교육으로는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확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의적 인재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지속적인 아이디어 창출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응용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 낸다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데 비해 인문학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제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이 고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가치의 생산성이 사람에게서 비롯된다고 했을 때, 기존 교육 시스템으로는 가치 창출을 위한 토대의 구실을 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 따른 조치임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 즉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여해 줄 수 있는가?” 등에 대한 답변을 통해 최근 인문학 열풍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인문학 제자리 찾기
지난 2005년은 ‘인문학 열풍’의 원년이었다. 당시 인문학 공부와 인문서 다시 읽기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2005년 인문학 열풍은 그 진원지가 인문학 연구의 본령인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니라, 기업과 대안 인문 공간이었다. 물론, 많은 대학들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인문학 열풍’에 동조하거나 휩쓸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들과 거리가 있었던 대학을 박차고 나가 학문적으로 독립한 인문학 연구자들이 만든 대안 인문 공간이나 ‘실용’을 주 무기로 하는 기업들에게서 ‘인문학’이 번창하고 그 세가 확장되어 나갔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일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다’는 것은 인문학 바람의 진원지가 인문학의 본거지이자 주체인 대학이 아니라는 점이고, ‘의미심장하다’는 것은 대안적 인문학도와 기업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 ‘핫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몇 년간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던 인문학 열풍이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금 불어 닥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1년 서울대를 시작으로 해서 속속 개설된 대학들의 인문학 위주의 대학원 최고과정 개설과 일반대중을 위한 인문학 시민강좌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경영학이나 사회과학, 공학 등 응용학문 분야를 선호하던 것에서 인문학으로 그 선호도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이는 취업 트렌드의 변화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기업이나 사회에서의 새로운 인재상 요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5년 사이 약 두 배로 불어난 대안 인문 공간, 교양 과정을 강화하는 대학, 점차 강화되는 기업들의 인문학 학습 바람 등을 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2000년 중반에 인문학의 위기라고 일컫던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말하자면 외적 요인이 아닌 내적 요인에 의한 열풍이라는 점에서 자생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인문학 제자리 잡기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인문학 단절의 극복과 연속성 확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단절의 극복이란, 일제치하와 외세의 영향에 의해 단절되었던 인문학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연속성의 확보란, 인문학을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한 통찰의 가능성 확보와 아울러 인문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인문학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성찰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고, 인문학이 갖는 저력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 있었다는 점 역시 간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플라톤(Plato)이 생각한 이상국가를 현실 속에 구현한 역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역사인 ‘조선시대’로 여겨진다.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국가란 철인(哲人), 즉 현자(賢者)가 지배하는 시스템인데, 조선이 바로 인문 고전을 업으로 삼는 사대부(士大夫)가 통치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상당 부분 왜곡되기는 했지만, 플라톤의 이상국가 모델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철인들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논쟁적인 측면은 차치(且置)해 두고라도 한 공동체와 거기에 속한 사람의 이면을 꿰뚫고 있지 못하는 자가 통치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한 공동체의 통치 이념을 실현하고 공동체의 미래지향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문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명을 바탕으로 삶의 가치와 좌표를 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특히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한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여러 현실적 문제에 대한 답변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문학을 근간으로 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가치는 확보될 수 없다. 산업사회와 달리 현대 지식기반사회에서는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여 이를 적용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정보를 재구성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주어진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그러한 지식을 통합하여 미래지향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한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능력의 함양은 다름 아닌 인문학에서 비롯된다.
3. 인문학의 본래적 가치
최근까지도 국내 베스트셀러 목록에 꾸준히 오르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저서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셀리 케이건(Shelly Kagan)의 저서에 대한 선호가 인문학에 대한 요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의란 무엇인가』의 경우 공정한 부의 분배는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과 무관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또한, 경제뿐 아니라, 역사와 정치, 사회, 교육 등 모든 문제와 그 해결점은 결국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명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 인문학 열풍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학은 상식적인 견지에서 당장의 효용성이 없는 비경제적인 학문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인간과 공동체의 본성 및 가치에 대해 해명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가치 창출의 토대가 되는 학문이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인문학자는 ‘인문학이 죽었다’고 종언을 고한 바 있다. 그 이유로 과학적 사고방식의 팽창과 물질지향주의, 기술 혹은 기능 우선주의의 확대는 인문학을 쓸모없는 비효용성의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많은 인문학자는 공감했고 인문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곡해는 결국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공언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문학이란 삶의 가치를 다루는 학문의 영역으로, 인문학의 중요 분야인 문학이나 철학 그리고 역사학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의 여정에서 어떠한 태도로 재화를 벌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삶의 질을 고양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양적 잣대로 학문의 효용성을 평가할 때, 인문학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의미 있는 주장이고 이에 공감할 수 있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은 어떠한가? 미래지향적인 국가경쟁력을 어디에서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 답변이 선행되지 않고서 마땅히 인문학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한다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우리가 풍요로워지고 빈곤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하고 경제적 부를 위해 앞으로만 달려온 현실을 지금의 현실로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물론 물질적 풍요로움이 가져다주는 우리의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문학의 가치가 여기에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이 지니는 가치가 현실적 유용성이라는 측면과 결코 동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삶의 문제와 무관한 학문이 존속했던 적은 없다. 물론 현실적인 효용성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 그것이 미시적인 것이냐 거시적인 것이냐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될 따름이다. 이는 인문학이 지니는 본래 가치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인문학이 지니는 경제적 가치가 미시적인 측면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은 실용학문이나 공학이 아니다. 순수 과학 없이 응용과학이나 실용기술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학문으로서의 인문학 없는 응용학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순수학문은 응용학문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밖에도 실제로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수많은 복합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개별학문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특히 미래지향적 가치 확보와 관련된 문제라고 한다면, 그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한 대안으로 ‘인문학’을 요청할 수 있다. 인문학은 단순히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에 대해 그 좌표의 구실을 해준다는 점에서 유용성을 갖기에 충분할 것이고 인문학 열풍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 인문학의 지식 생산성
인문의 어원2)이 그렇듯이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식견을 얻을 수 있으며,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 속에서의 의사소통 능력 그리고 자아를 개발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 심미적 감성, 도덕적 판단력, 논리적 사고력을 배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인문학을 핵심적인 학문 영역으로 받아들인다. 이 말은 인간은 인문학 공부를 통해서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다움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사학·철학(文史哲)을 통칭하여 인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인문학을 ‘기초학문’이라고도 한다. 기초학문은 사회 일선에서 직접 활용되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응용학문의 토대를 제공하는 학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초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갖는 역할은 과거도 그러했겠지만, 현재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도 그렇겠지만, 인문학은 단지 기초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응용학문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만도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명문대학의 경우 대부분 기초학문으로 학부가 이루어져 있어 인문학부만을 수료하고도 곧장 사회 일선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이는 필시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인문학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문학 기반 기초학문을 통해 어떠한 능력을 습득하게 되는 것일까? 이를 핵심역량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역량은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이 갖는 성격을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인문학은 창의적 발상을 이끌어내는 상상력과 통섭(通涉)3)의 자양분이다. 문학은 언어와 인간모델의 보고(寶庫)이며, 역사는 체험의 보고다. 또한, 철학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정신의 보고다. 경영은 철학, 문학, 종교, 역사와의 통섭을 통해 지속가능한 경영을 이끄는 경영이념, 리더십, 인재경영, 마케팅전략, 고객관리, 사회적 책임의 방향을 제시한다. 인문학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서로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상상력의 원천인 셈이다.
“애플(Apple Inc.)의 DNA에는 기술뿐만 아니라 인문학이 녹아 있다.”라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선언에는 과거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해 내고, 이를 통해 사람이 살아가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원동력은 인문학을 근간으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 첨단산업의 근간으로 꼽히는 문화산업에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는 상상력이나 창의력의 근간은 다름 아닌 인문학에서 비롯된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 어떠한 기술적 혁신도 기술 그 자체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통찰력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원천기술의 개발을 위하여 기초과학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인문학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제 인문학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문화산업은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시대임이 분명하다. 국가경쟁력 제고(提高) 차원에서 문화산업이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산업이 되어가는 만큼 인문학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그렇다고 인문학만을 앞세우자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실용학문의 중시 풍조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역할을 응용학문이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상호 유기적인 조화 속에서 지식 생산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인문학의 인기는 날로 줄어들지만 이를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일 그럴 경우 국가 경쟁력 확보는 물론 우리의 미래지향적 가치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인문학, 무엇이 문제인가
전통적으로 휴머니즘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Humanity)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교육의 주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과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와 함께 그것을 인간교육에 적용해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즉 가치 지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간상을 구현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인문학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 대해 규범적으로 반성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인문학 교육은 이러한 반성을 토대로 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성향과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다움의 이념을 실현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은 바로 인문학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문학을 유용성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편견 내지 선입견을 품고 있다. 인문학 교육을 중요시하는 선진국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교육 시스템과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왜 이러한 편견 내지 선입견을 품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러한 편견을 형성시키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 교육’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일제 치하 이후로 추정되는데, 모든 공교육에서 인문학 교육이 슬그머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시키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를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어떠한 역사에서도 피지배층에게 인문학을 가르친 사례는 없다. 만일 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칠 경우 지배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배층의 뜻대로 피지배층을 통치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 세월 그래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교육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이른바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늘 지적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물론 반성조차 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인문학이 빠진 교육을 하고 있다. 공교육에서 인문학이 빠진 교육을 여전히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능 또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교육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마는 셈이 될 것이다.
지혜의 보고로서의 인문학이 담고 있는 가치를 염두에 둔다면 인문학에서 제기하고 있는 물음과 그 속에 담고 있는 지혜는 지금도 유효한 것이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이거나 지배를 위한 논리를 아무런 반성 없이 받아들인 결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문학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왜 탐구해야 하며 무엇을 위해 인문학 교육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함으로써 ‘미래지향적 가치’를 확보하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일 것이다.
2. 인문교육의 힘
한 공동체 혹은 사회에서 가장 절실하고도 우선으로 요구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의 안녕과 행복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목적일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안정된 질서를 만들고 이를 유지하려 노력해 왔다. 그러한 질서의 이면에는 예외 없이 계층의 구분이라는 방식을 통해 구성원들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 역사에서 공동체에는 어떠한 형태로건 계층이 존재해 왔다. 이러한 계층을 크게 둘로 구분해 본다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두 계층은 늘 함께 공존하면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계층의 구분 이면에는 질서를 유지하려는 방안을 특정한 계층끼리 공유해 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을 공유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이다. 인문학을 공유한 계층이 곧 지배계층을 형성해 왔지만, 이를 공유하지 못한 계층은 피지배계층을 이루어 온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지배계층 역시 고급 교육의 혜택을 입은 소수가 전통적인 의미의 지배계층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는 인문학으로 무장한 계층인 것이다. 이처럼 인문학으로 무장한 계층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서를 꿰뚫고 지식과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나 민족의 성격에 따라 계층을 구분해 볼 경우 지배계층이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국가로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이를 통치한 지배국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못한 국가는 피지배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개발도상국일수록 인문학 기반 지식이 허약한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문 고전은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쓴 진정한 천재들이 자신의 모든 정수를 담아 놓은 지식의 보고인 셈이다. 현재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석학 중에 철학이나 역사를 외면하고 자신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거나 창조하는 근간은 인문학에 기반을 둔 융합적 사고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자연과학에서의 창의적 아이디어는 자연과학에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학문 분야가 되었건 제기되는 물음의 성격이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 확인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물론 그 귀결점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법칙의 출발점을 이루는 과학적 가설은 과학자 상상력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어떠한 이론을 확보해 낼 수 있느냐의 여부를 결정짓게 된다. 그러한 그들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과학의 영역 내에서는 그러한 상상력의 확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과 그 공동체 그리고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안목과 통찰 없이는 그 어떠한 상상도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 정신사를 이끌어 왔던 대부분의 선구자는 인문학적 상상력에 기반을 두어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 후, 새로운 고전을 집필하여 후대에 남겼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토대는 인문 고전 필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정신적 대화의 지속을 통해 세상의 지혜와 진리를 터득하고 이를 발견해 나가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창조가 가능했다.
우리 교육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초·중·고를 합쳐서 무려 12년이나 교육을 받고 대학에 입학해서 또다시 4년을 배우고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과 창의력 넘치는 인재는커녕 심하게 말해서 바보가 되어 사회에 나온다는 지적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대학원까지 졸업해도 마찬가지라는 점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부분의 지적은 창의적인 발상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는 구조적 모순이 너무 많은 현행 교육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답변이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평가는 매우 중요한 지적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현행 교육 방식이 일방적인 지식 전달에만 치중할 뿐, 소크라테스(Socrates)식의 인문 고전 습득 방식에서 보이듯 스승과 제자가 깊은 대화를 통해 진리 혹은 지혜를 터득하는 교육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칼 비테식 ‘다른 교육’에 대해 살펴보자.4) 200여 년 전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서 목회하던 칼 비테(J. H. F. Karl Witte)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비록 아들의 지능이 떨어지긴 하지만 ‘다른 교육’을 받으면 얼마든지 천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두 살 때부터 칼 비테는 고전을 읽어주었고, 여덟 살 때부터는 혼자 그리스 로마 고전을 원전으로 읽게 했다. 칼 비테 주니어의 두뇌는 위대한 천재들이 집필한 인문 고전을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기적처럼 변해 갔다. 그는 고작 아홉 살에 라이프치히 대학교(University of Leipzig) 입학 자격을 취득하고 열세 살에 기센 대학교(Justus-Liebig-Universitat Gießen)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열여섯 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Universitat Heidelberg)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베를린 대학 법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칼 비테의 ‘다른 교육’은 그동안 구속 받던 교육체계에서 벗어나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진정한 배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주는 좋은 사례이다. 지식을 소유하는 것 그 자체로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인문 고전에 기반을 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지혜를 통해 생겨나는 것이다. 즉, 칼 비테식의 ‘다른 교육’은 인문 고전 독서를 통해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3. 인문학의 가치 생산성
인문 교육에 있어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정치, 문화, 예술 등이 고대 중국에 뿌리를 둔 것처럼 서양은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중국과 그리스의 공통점으로는 문학, 역사, 철학 고전을 집필하고 이를 전파한 국가라는 점, 그리고 당시 세계에서 최강국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지방(스파르타[Sparta])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그리스인들보다 뛰어난 것이 지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싸움과 용기로 얻은 것이라고 인식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뛰어난 이유가 상세히 밝혀지면 모든 사람이 지혜를 갖추려 애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이 비밀은 잘 지켜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스파르타 예찬가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계교에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권투를 하거나 가죽끈을 손에 감고 운동에 열을 올리거나 짧은 외투를 몸에 걸치거나 하여 그들의 흉내를 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스파르타인들이 모든 그리스인 앞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5)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중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스파르타’, 스파르타 하면 어떤 국가로 인식되는가? 군사적인 측면을 포함한 과두정치, 강인함, 강력한 국가로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달리 전쟁을 위한 체력 단련보다는 학문을 숭상하고 철학을 더욱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편에서 말하고 있듯이 실제로 탈레스(Thales), 솔론(Solon) 등과 같은 고대 그리스의 7현인이 부러워하며 칭송할 정도로 최고의 철학 및 변론 교육을 했던 폴리스(polis)가 바로 스파르타였던 것이다.
고대 중국 역시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문학 고전이 쏟아져 나왔고 인문 고전을 읽는 전통 역시 가장 확고하게 세운 민족으로 꼽힌다. 그다음으로 인문 고전을 업으로 삼은 아시아 민족을 들면 당연히 우리 민족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은 백성 개개인의 지적 수준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인문 고전 독서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한다. ‘자치통감’6)을 대량으로 인쇄해서 전국에 배포하라는 명을 내렸고 노인들 또한 읽을 수 있도록 큰 활자를 주조해서 책을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문 고전 독서를 업으로 삼아왔던 중국 및 한국과 달리 옆 나라 일본은 미개하기 이를 데 없는 섬나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본이 어떻게 아시아 최대강국으로 탈바꿈되고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을까?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이자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인문 고전 독서 사랑이 곧 그 성장의 이유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지독한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난 후 서양 학문을 받아들여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닦았고, 그의 사상을 물려받은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동양고전, 서양고전을 번역하여 일본 국민들에게 대량 공급하게 된다. 우리는 메이지 시대 국가 주도의 인문 고전 독서 열풍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중등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1930년대 일본 고등학교 교육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제1고교 학생들은 3년 동안 매주 열 시간 이상 외국어 수업을 받았다. 라틴어가 필수 공통과목이었고 영어, 독어, 불어 중 두 과목이 선택이었다. 외국어 수업이 많았던 이유는 서양고전 원전을 국어처럼 술술 읽는 능력을 기르기 위함이다. 제2고교는 모든 신입생이 칸트(Kant, Immanuel)의 ‘순수이성 비판’을 읽고, 모든 재학생이 최소 하루 한 권 이상의 인문 고전을 읽고 독서일기를 쓰는 전통이 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명문 고교와 대학생들은 독서일기를 쓰는 습관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에 4,000권 이상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경우가 평범한 사례에 속할 정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일본의 정계, 관계, 재계는 이미 학창시절에 그리스, 로마, 유럽, 중국, 인도, 일본의 인문 고전을 읽은 인재들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었고 국력을 혁명적으로 신장시킬 수 있었던 원천이 되었다.7)
일본은 국가가 나서서 인문 고전 독서를 공급, 독려, 교육을 하였고, 그 결과 짧은 시간 내에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식민정책이며, 독도 문제 등을 지속적으로 거론하여 우리에게는 달갑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겠지만, 인문학 교육으로 다져진 인재의 산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인문학 교육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 교육과 관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