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 에도가와 류오우
“……줄리아가 납치당한 후, 12시간이 지났다.”
츄오우는 운전을 하면서 백미러 너머에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줄리아는 어제 이맘 때, SCM을 뺐다. 그 후로 24시간이 지난 것이다. 물론 아직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후지코에게서 “나는 세타가야 쪽에 붙겠어.”라는 연락이 왔다. 줄리아의 휴대전화로 말이다.
줄리아를 납치한 것은 세타가야라는 이름의 교사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줄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창밖에 있는 편의점 간판을 쳐다보았다.
“……24시간 영업 중인 편리한 전 노예.”
“그래……. 구하지 않을 거냐?”
“누가? 그런 위험을 범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 알았다. 괜한 걸 물었군. ……도착했어.”
어제 일 이후, 만약에 대비해 츄오우가 내 등하교를 차로 돕기로 했다.
그는 뒷좌석에 놓인 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맡겼던 일을 끝냈어. 네 말대로 라이터 오일에 적셨으니 엄청 무거울 거야.”
“……괜찮아. 수고했어.”
나는 가방에 그것을 넣었다.
“그럼 나중에 마중 오지.”
츄오우의 자동차가 출발했다.
태양, 하늘, 구름, 학교, 교정, 연못. 공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녹색 그물. 눈앞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학교의 교문이 있었다. 교문 너머에서는 이른 아침인데도 학생들이 교정에서 바보처럼 뛰어놀고 있다.
……학교에 불이라도 나버리면 좋겠는걸.
교문에 다가가면 갈수록 걸음이 무거워졌다. 지구의 중력이 몇 배로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어제는 흠뻑 젖은 실내화가 신발장에 들어 있었다. 오늘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을까.
‘에도가와네 집은 가난하다’, ‘어머니가 퇴폐업소에서 일한다.’
그 녀석들은 그 말의 뜻도 모르면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해댔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
나는 너희와 다르다. 너희보다 훨씬 이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SCM을 손에 넣은 후, 봄의 자메이카라는 닉네임으로 블로그를 운영했다. 그 블로그야말로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증거다. 많은 어른들이 내 블로그에 빠져들었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
줄리아가 집에 왔을 때 이 여자를 노예로 만들면 내 모든 소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교에 있는 쓰레기들이 한 말이 사실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줄리아를 노예로 만든 다음 날, 나는 엄마가 일하는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쓰레기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도 양호실에나 가자. 그렇게 생각했더니 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학교 부지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꽃잎 같은 것이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회색빛 교문 앞에서 검은색과 보라색을 띤 무언가 하늘거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것은 나비였다.
무심코 그 나비를 눈으로 쫓았다. 내 손바닥보다 작지만, 무거워 보이는 자신의 몸을 띠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갯짓하고 있는 그 나비는 아무 목적 없이 내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나비는 더욱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교문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저 나비의 종류는 뭘까. 애기세줄나비와 닮았지만, 그건 오키나와에 있는 나비다.
나비가 날아가고 있는 방향에 건물이 하나 있었다.
……줄리아가 다니는 고등학교다.
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시골드빛 머리카락과 갈색 눈썹. 화장을 해도 안 한 것 같은 얼굴로 바보처럼 웃거나, 영문 모를 소리를 하거나, 울던 여자.
내 첫 노예……였던 여자.
그러고 보니 함께 학교에 온 적도 있었다.
러시아워 시간이라 미어터지는 전철 안에서, 그 녀석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마주 쥐었다. 미어터질 듯한 만원 전철 안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나는 왜 그때, 줄리아의 손을 움켜잡은 걸까.
왜 이제 와서 줄리아를 떠올리는 걸까.
왜 나는 줄리아의 고등학교로 향하고 있는 거지?! 지금!
……젠장, 저 나비 때문이다. 저 나비 때문에 줄리아가 생각나고 말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휴대전화를 꺼낸 후, 【노예】 폴더를 열었다.
줄리아와 메구로와 후지코, 셋을 제외하고도, 폴더 안에는 여덟 노예의 이름이 존재했다.
……지금 상황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츄오우를 다시 부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방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해놓고 이제 와서 줄리아를 구출하자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웠다.
아다치 시오리는 아르바이트 중이다. 젠이치처럼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부르는 건 아예 논외다.
그 녀석들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는…… 나카노 타이쥬.
나는 타이쥬의 이름을 골라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하는 중일까.
나는 다른 이름에 주목했다.
시나가와 제로. 그 녀석의 집도 이 근처다. ……일단 걸어볼까.
벨이 몇 번 울린 후, “……여보세요.” 하고 어두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나가와 제로. 지금 바로 내가 말하는 장소로 와.”
나는 내가 있는 장소를 제로에게 전했다.
제로가 “알았어…….” 하고 말하자마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근처까지 와 있었다.
학생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조례가 시작되려면 멀었다.
교내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아마 후지코와 세타가야 츠바키는 평소처럼 출근했을 것이다.
타이토 후지코…… 그 녀석이라면 줄리아가 있는 곳을 알 것이다. 전화를 해볼까.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후지코의 번호를 선택하자, 090으로 시작되는 번호가 표시되었다. 신호가 몇 번 간 후, “웬일로 전화를 다 한 거야?”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줄리아는 어디 있어?”
“어머, 모처럼 나한테 전화를 해준 건 그 애에게 볼일이 있기 때문이야?”
“쓸데없는 소리 할 생각은 없어. 줄리아는 어디 있지?”
“배신한 나나 메구로 씨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야? 매정하네.”
“……똑같은 말 몇 번이나 하게 하지 마.”
“저기, 알고 있어? 그 애, 네 애를 임신했어.”
시야 끝에서 다시 나비가…….
“……짐작 가는 데, 있지?”
줄리아가 전철에서 자신의 손을 잡은 그 날…….
“사실이야. 하지만 너한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겨우 노예 하나가 어떻게 되든 너랑은 상관없잖아.”
나는 아무 말 없이 고등학교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이윽고 뒷문 앞에 섰다.
2미터가 넘는 철책 너머의 나무들 사이로 학교 건물이 보였다.
그 동안에도 후지코는 말을 이었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 애는 너에게서 떨어져야 행복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줄리아는 어디 있어?”
휴대전화 너머로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후, 정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는 마치 로봇─.”
나는 전화를 끊었다.
……메구로도 저쪽으로 넘어간 건가.
검은 철책 너머에 있는 건물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자리에 있어봤자 아무 소용없는데.
손수건에 싸서 호주머니 안에 넣어둔 SCM을 움켜쥐었다.
……나는 결심했다고.
호기심 삼아 SCM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조사하면 할수록 SCM의 성능을 믿게 되었고, 줄리아를 노예로 만들었을 때, 확신을 가졌다. ……엄마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 나비가 날고 있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나에게 상냥했던 것은 아니다.
하늘거리면서 날고 있는 나비는 나에게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나를 증오했다. 가능하면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죽어줬으면 했다.
보라색과 검은색의 잔상을 남기며 날갯짓하자, 나비에게서 인분(鱗粉)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강간당해 낳은 게 나니까 말이다.
나비는 검은 철책 너머로 날아갔다 다시 돌아왔다.
술에 취한 엄마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비가 인간이 만든 섭리에 얽매일 리가 없다. 나비는 인간의 법률에 얽매이지 않는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녀석들의 아버지도 엄마의 아빠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생물의 섭리를 거스른 존재인가? 인터넷을 검색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딱히 엄마가 자신을 상냥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기는.
나는 자신이 아직 어린애라는 것을 안다.
가로수를 따라 날고 있는 너는 나와 비슷하구나.
내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라도 엄마가 나를 키워주기를 바랐다. ……엄마가 말이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가득 찼다. 후지코가 한 말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 애, 네 애를 임신했어.’
느닷없이 줄리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법은 줄리아를 심판할 것이다. 그 행위에 사랑이 존재하더라도 법률은 줄리아를 벌하리라.
헛구역질이 났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나는 내 인생에 지장을 주는 것들을 올바르게 뜯어고치고 싶었다.
나비는 일반 가정집 옥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 걸림돌이 설령 엄마라 할지라도, 올바르게 뜯어고치고 싶었다.
그 가게에서 알몸으로 일하는 엄마를 본 순간, 어깨와 하복부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은 듯한 느낌이 들면서, 모든 것이 지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돈! 돈! 돈! SCM으로 돈을 벌자!
네리마를 노예로 만들고! 그 녀석의 얼굴에 돈을 집어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돈이 좋으면 배가 터질 때까지 만 엔짜리 지폐를 삼키게 해주마! 그리고 그 녀석이 싼 대변을 엄마의 빚만큼 먹게 해주마!
……하지만 왠지 지쳤다. 이 복수의 끝에서 내가 꿈꾸는 것이 평온한 생활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그 평온에서 멀어지고 있다.
시나가와 제로에게 흥미를 가진 것도 그래서다. 아무 일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으며, 마음 없는 허무감을 그가 지녔기 때문이다.
그를 속일 때도, 이 녀석에게라면 내 본심을 털어놓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내가 좋아하는 빵을 줬다. 이 녀석은 집에서 빵을 먹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의사 대신 노예로 만들기에는 너무 한심한 녀석이지만, 그때 먹은 빵을 한 번 더 먹기 위해 그 녀석을 노예로 만들었다.
하지만 제로가 준 빵이 나에게 준 만족감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노예들에게 긁어모은 돈은 약 1800만 엔.
게임, 휴대전화, 컴퓨터…… 엄마의 가격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철책 아래 단에 기대앉자, 묵직한 무언가가 내 배와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그 돈을 전자 머니로 바꿨다. 츄오우에게 받은 봉투에는 그 돈의 명세서가 들어있다. 나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그 안에 있는 서류를 보았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서류를 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열된 숫자뿐이다.
일전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이 세상 모든 열은 언젠가 반드시 식는다. 마그마도, 끓어오르는 열기도, 뜨거운 태양도, 증오의 감정도 말이다.
이 우주의 모든 열은 반드시 식는다. 그 필연에 따르듯, 내 목적조차 식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진동조차 괴멸시키는 마이너스 273.15도. 절대영도.
……내 안의 열이 식어간다.
벚꽃, 1800만, 빵, 겨울의 자메이카, 열은 진동.
머릿속에서 그런 단어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자, 잠이 몰려왔다.
기억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떠오른 말들. 그 안에서 대답을 찾았다.
진동, 열, 입술, 전철, 손, 아침 햇살, 빵, 전철, 손…….
어느 순간, 그 모든 말들이 하나가 되었다.
‘줄리아가 같이 있어줄게.’
바로 그때,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카츠시카 줄리아.
……줄리아다. 줄리아 때문이다. 그 녀석이 내 우려와 갈망을 만족시켰다.
그 녀석이 내 마음을 만족시킨 것이다!
“……젠장!”
코 안쪽에서 자극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눈이 시려왔다.
줄리아가 제2단계가 된 진짜 원인은 고독이다. 조련과 환경이 아니라 고독 때문이었던 것이다.
고독 속에서 나와 만나, 그 녀석은 제2단계가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나도……!
왜 나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지?!
왜 그 녀석의 온기를 이제 와서 갈구하는 거지?!
엄마가 없는 집에서, 그 녀석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나는, 나는…… 만족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노예가 늘어나더라도, 그 녀석만 곁에 있으면 됐다.
엄마가 지금 이대로라도, 방이 춥더라도. 그 녀석만 있으면. 미칠 것 같은 상황과 환경, 오물을 들이마셔야 하는 지옥, 그곳에서 나는 그 녀석에게 구원받았던 것이다!
그 녀석의 바보처럼 순수한 미소가, 나를……!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내 뱃속에 열기가 맺혔다.
“……그 녀석을 되찾겠어.”
모든 서류를 확인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이, 꼬맹아. 괜찮으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민가의 담벼락과 학교의 철책 사이에 난, 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까 싶은 좁은 골목길에 한 고등학생이 서 있었다.
그 고등학생은 머리카락을 새하얗게 물들이고, 왼쪽은 짧게 쳤다. 입술에는 피어스를 했다.
“배라도 아픈 거냐?”
……저 교복은 이 고등학교의 교복이다. 이 녀석은 후지코가 말했던 바로 그 문제아다.
나는 “괜찮아.” 하고 말한 후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냐? 어이, 눈이 빨갛구나. 이 학교 양호실에라도 가겠느냐?”
백발 남성은 검은 철책 너머로 학교 부지를 쳐다보았다.
이 고등학교의 양호실에는 후지코가 있다. 나에게는 현재 작전이 없다. 나를 지켜줄 노예도 없다.
후지코와 마주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으리라.
“……정말 괜찮아.”
겨우 마음이 개운해졌는데 말이야. 양아치 같은 겉모습에 어울리게 살라고. 친절하게 대하지 말란 말이야.
“정말 괜찮은 거냐?”
내가 “응.” 하고 말하면서 돌아섰을 때였다.
“저, 저기…… 류오우 군?”
“어?” 앗.
뒤를 돌아보니 겟코의 뒤편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 하프 코트와 와이셔츠, 청바지를 입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동자가 보였다. 키가 커 보이는 것은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바로 시나가와 제로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고 생각하면서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실제로는 그를 부른 지 30분이 넘어 있었다.
“류……오우? 네, 네놈이 류오우냐?!”
백발 남성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네, 네놈이 에도가와 류오우냐아아앗!”
……이 녀석, 나를 알잖아?
제로는 그의 옆을 지나, 내 앞에 섰다.
“……저 사람은?”
나는 제로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타이밍 한번 나쁘네. 저 백발, SCM 소유자야.”
“뭐? 저 녀석이?”
“하, 하하. 우햐하하하하핫! 엄청나! 마리아님이 말한 대로잖아!”
마리아님? 그 녀석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마리아님! 찾았어요! 류오우를 찾았다고요!”
“……걷어차!”
“미안해!”
다음 순간, 제로는 백발을 향해 날아 차기를 날렸다.
“크, 윽!”
제로의 발차기를 팔에 맞은 그는 그대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이, 이 비겁한 놈! 변신 중인 히어로를 공격하는 것만큼 비상식적인 짓을 하는구나!”
백발은 서둘러 휴대전화를 주우려 했지만, 그 녀석보다 내가 먼저 휴대전화를 주웠다.
휴대전화에는 ‘마리아님’이라는 글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전화번호는 080…… 이군. 좋아, 외웠어.
“돌려줘!”
“……미안.”
나는 그 녀석의 휴대전화를 부러뜨렸다. ……접이식 휴대전화라서 그런지 부러뜨리는 느낌이 좋은걸.
“아, 아닛!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제로가 앞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내 앞에 서자, 백발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우리를 노려보았다.
“내 내 이름은 3학년 B반, 이타바시 겟코!”
제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타바시…… 겟코?”
“흥! 그게 본명이다! 달의 무지개라 쓰고 겟코라고 읽지!”
달의 무지개…… 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그 자연현상인가. 꽤나 특이한 이름인걸.
“나의 여신, 마리아님의 명령에 따라 너희를 마리아님의 노예로 만들겠다!”
마리아. 이 녀석의 주인인가……. 아니. “세타가야의 동료지?”
“나는 세타가야 따위의 동료가 아니다!”
세타가야 츠바키와는 다른 파벌인 것 같다. 하지만 겟코도 세타가야를 아는 것을 보면, 그 녀석들을 조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미 접촉했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GPS 화면을 띄웠다. 주변에 있는 반응은 녹색뿐이다.
나와 제로는 SCM을 빼고 있다. 세타가야와 키타 미나미와 후지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GPS에 표시된 녹색 반응은 눈앞에 선 겟코의 것이 틀림없다.
“……마리아라는 녀석은 네 주인이 아닌 거야?”
겟코는 자신의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무대에 선 배우처럼 과장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핫! 나와 마리아님은 너희처럼 SCM으로 묶인 저속한 관계와는 다르다! 마리아님이야말로 나의 여신! 일본의 구세주인 것이다!”
SCM로 엮인 주종 관계가, 아니다?
마리아는 누구지? SCM 없이 어떻게 이 바보를 자신에게 빠지게 한 걸까?
게다가 오늘, 이 시간, 이 타이밍에, 왜 이 녀석은 이 고등학교 주위를 걷고 있는 걸까?
등교 중이었나? 그런 것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기막히다.
“……좀 확인해볼 게 있어. 겟코. SCM을 빼.”
“뭐라고? 이 상황에서 나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냐?”
“됐으니까 빨리 빼.”
겟코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친 후, SCM을 입에서 뺐다. 나는 자신의 SCM을 착용한 후, 제로에게도 SCM을 착용하라고 명령했다.
……SCM은 울리지 않았다. 제로는 분명 내 노예다.
나는 SCM을 뺀 후, 겟코를 쳐다보았다. “……이제 됐어.”
겟코는 다시 SCM을 착용한 후, 팔을 앞으로 뻗어 나를 가리켰다.
“소문대로 조심성이 넘치는 구나, 류오우! 그리고 거기 너, 이름을 밝혀라!”
제로는 겟코를 향해 돌아섰다.
“……제로야.”
“큭! 꽤 멋진 이름이구나!”
제로는 앞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쳐다보았다.
“으음, 왜 나를 여기로 부른 거야?”
“나는 지금 줄리아를 찾고 있어. 그래서 부른 거야. 그런데 저 바보가 갑자기 나타났고.”
제로는 “줄리아? 아, 그 예쁜 여자애…….” 하고 중얼거렸다.
“우오오! 류오우! 승부하자!”
겟코는 나와 승부를 내서 내 파벌을 전부 흡수하고 싶은 것이리라.
나는 그 녀석을 쳐다보았다.
“승부를 하는 건 제로와 겟코. 승부는 YES·NO 퀴즈. 겟코가 먼저 문제를 풀 것. 지금 바로 시작.”
“우옷?!”
“어?!”
두 사람은 동시에 입에 손을 댔다. ……울렸군.
제로는 나를 쳐다보았다.
“방금 찰칵찰칵했는데…… 혹시 나와 저 사람의 승부가 시작된 거야?”
“응. 승부 신청을 받았으니까 바로 시작했어.”
“으음, 내가 아니라 류오우 군이 오케이 했는데 내 SCM이 반응한 건…….”
“주인 SCM의 특권 기능 같은 거야. 근처에 있는 자기 노예가 타인의 승부 신청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지.”
“그, 그런 기능도 있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응용이야. 승부 내용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니까, 세밀한 부분까지 지정하면 그걸 노예에게 반영할 수 있는 거지. 주인의 『승부를 받아들여라』라는 명령을, 노예가 『자신이 승부를 받아들인다』로 인식하게 한 거야.”
SCM은 숙주의 인식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노예의 인식에 영향을 끼쳐,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승부가 성립된 것을 통해, 제로가 자신의 노예라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졌다.
“오, 오오! 뭘 한 거냐?! 그리고 방금 그 소리는 뭐지?!”
……겟코, 저 녀석은 초심자군.
“네가 원하는 대로 승부를 시작했어. 그리고 상대는 제로야.”
“크오옷! 이렇게 되면 제로, 너를 먼저 노예로 만들어주마!”
제로의 머리카락 사이로 불안에 찬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허리를 배배 꼬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로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형, 잊었어? 퀴즈라면 자신 있는 내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셋이서 학교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와 제로가 벤치에 앉고, 겟코는 시소 앞에 서서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겟코는 가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류오우. 그 YES·NO 퀴즈라는 것은 뭐지? 설명해 봐라.”
“연상 퀴즈나 질의응답 퀴즈 같은 건 알지? 그거랑 같은 거야.”
각자 좋아하는 말을 정한다. 예를 들어 A가 『하늘』이라는 답을 미리 정한다.
하지만 B에게는 그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리고 A와 B가 질의응답을 시작한다.
B는 A가 미리 정한 『하늘』이라는 답을 맞혀야 한다.
B는 질문을 한다. “그것은 먹는 것입니까?”
A는 “NO.”라고 대답한다.
B는 또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입니까?” 대답은 NO다.
그런 식으로 A의 답인 『하늘』을 맞히는 것이다.
“질의응답 횟수는 총 다섯 번. 대답도 횟수에 포함돼. 내가 생각한 단어를 맞혀봐.”
대답이 『하늘』일 경우, “그것은 하늘입니까?” 가 정답이 된다.
“문제를 내는 건 나. 그리고 겟코가 맞혀.”
제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오우 군이 승부하는 거야?”
“응. SCM 승부는 제로와 겟코가 하고, 퀴즈는 나와 겟코가 하는 거야.”
이번에는 겟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즉, 대타야. 내가 이기면 겟코의 패배. 내가 지면 제로가 패배하는 거지. 이걸로 불만은 없지?”
“……확실히 문제를 푸는 쪽이 불리한 것 같지만…… 그래도 상대에게 승산이 있는 승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아?”
이쪽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승부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제로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리라.
“패배감을 이끌어내려면 어느 정도 공평한 승부를 해야 해.”
그리고 이쪽은 패배를 실감하기 힘든 것일수록 좋다.
겟코는 턱을 치켜들면서 고압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흥, 재미있구나.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타파해야 내 실력을 증명할 수 있겠지. 좋다. 하지만 네가 나중에 답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답을 적어둔 휴대전화를 미리 제로에게 맡겨두겠어. 그러면 되지?”
“……흥. 좋다.”
나는 휴대전화 메일 화면에 답을 적은 후, 제로에게 건넸다.
평범한 게임인 만큼 빨리 결판이 날 것이다.
겟코는 신이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불을 붙인 것은 필터 쪽이었다. ……역시 이 녀석은 바보다.
“미안하지만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하고 말한 제로가 공원 공중 화장실로 향했다. ……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더니, 화장실 가고 싶은 걸 참고 있었던 건가.
제로가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는 다시 나와 반대편 부스로 향했다.
……실수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 걸까.
──1분도 안 되어서 제로가 돌아왔다.
“……그럼 시작하자.”
한낮의 공원에서, 나와 겟코는 YES·NO 퀴즈 대결을 시작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고, 옆에는 제로가 있다. 눈앞에는 팔짱을 낀 겟코가 서 있다.
“첫 번째 질문이다, 류오우. 그것은 인공물인가?”
“NO.”
겟코는 흠 하고 말했다.
아마 겟코는 사기를 쳐서 승률을 올릴 생각은 없을 것이다.
보통은 수십 번의 질문을 주고받지만 이번은 다섯 번뿐이다. 난이도는 극도로 높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츄오우와 함께 제로를 노예로 만들었을 때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이다. 그것은 생물이냐?”
좋은 질문이다. “YES.”
겟코는 또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차분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승부에 강한 것 같았다.
남은 질문 횟수는 총 세 번. 겟코는 지뢰를 찾듯 신중하게 나를 관찰했다.
겟코는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질문이다. 그것은 곤충인가?”
뭐?
“……YES.”
겟코는 히죽 웃었다. 제로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겨우 두 번의 질의응답으로 여기까지 알아내다니.
내 답은 ‘사마귀’다.
5회 정도의 질의응답으로 답을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텐데…….
답을 아는 사람은 나와…… 제로. 제로가 배신했다? 이 녀석은 노예가 되자마자 SCM의 효과를 무시하고 도주했다. 그 후에는 딱히 특이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류오우, 동요한 거냐? 네가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에게는 여신이신 마리아님의 가호가 함께 하니까 말이다.”
“……대체 그 마리아님은 누구야? 실존 인물이긴 한 거야?”
“무례하구나! 마리아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신! 존재하신단 말이다!”
나는 겟코에게 질문을 던졌다.
“……줄리아가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 나는 모른다.”
“SCM은 어떻게 손에 넣었어?”
“마리아님께서 하사하셨지.”
“너는 세타가야와 어떤 사이야?”
겟코는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캐물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류오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그리고 뭔가 잊고 있는 거 아니냐? 내가 다니는 학교에 검은색 반응이 나타났단 말이다.”
모든 수수께끼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마리아님이라는 녀석인가…….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겟코는 팔짱을 풀더니 허리에 양손을 갖다 댔다.
“네 번째 질문이다. 그것은 하늘을 나느냐?”
“……YES.”
……역시 틀림없다. 이 녀석은 답을 알고 있다.
“……휴대전화 줘봐.”
제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겟코가 “그건 안 되지.” 하고 말했다.
“속임수를 쓰려는 것이냐? 류오우, 대답을 바꾸게 놔둘 수는 없지.”
……방금 그 말을 통해 확실해졌다.
시나가와 제로. 이 녀석이 나를 배신한 것이다.
제로는 나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룰이 그렇다 할지라도, 내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이다.
이 타이밍, 이 시간대에 겟코가 학교 주변에 있었다. 제로가 배신자이며, 미리 겟코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앞뒤가 맞았다.
게다가 이 상황은 제로가 내 노예가 되었을 때와 매우 흡사했다. 제로를 속여 츄오우와 승부를 하게 한 후, 내가 그와 승부를 했다. 노예들에게 그를 둘러싸게 한 후, 억지로 패배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나는 제로가 당했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내 휴대전화를 제로에게 건넨 것은 승부를 시작하기 직전이다. 접이식 휴대전화라 펼치지 않으면 화면을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제로는 화장실에 갔었다. 그때 겟코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리라.
……젠장. 줄리아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졌다. 게다가 제로를 너무 믿었다.
아니, 미리 확인을 하기는 했다. 제로는 분명 내 노예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 겟코는 분명 맞힐 것이다.
“다섯 번째 질문이다, 류오우. 그것은 사마귀냐?”
어쩔 수 없다. “……YES.”
제로를 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자 위화감이 느껴졌다. 뭔가가 이상했다…….
“좋아! 답을 확인해보자! 휴대전화를 보여다오!”
겟코가 제로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아, 아닛?! 어, 어떻게 된 것이냐?!”
겟코가 보여준 휴대전화 화면에는 【나비】라고 적혀 있었다. ……역시.
“……네가, 졌어, 겟코.” 하고 제로가 말했다.
“나는 답을 맞혔다! 젠장! 어떻게 된 거냐! 으윽!”
겟코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는 위액을 토하면서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나는 천천히 제로를 쳐다보았다.
“바꿨지?”
“……역시 대단하네.”
제로의 앞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머리카락 사이에 약간 처진 눈동자가 보였다.
“……큰일 날 뻔했어. 들키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거든. 미안해, 겟코. 내가 네 노예가 되면 본말전도거든.”
제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놔.”
“류오우, 차분하게 이야기 좀 하자.”
제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매사에 오들거리던 지금까지의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눈매를 드러냈다. 진한 눈썹과 경박하고 자신감에 찬 눈동자가 드러났다.
“제로, 너 대체 누구의 노예가 된 거지?”
“지금은 그 누구의 노예도 아냐. 그는 자유야. 자, 휴대전화.”
……그? 제로에게서 건네받은 휴대전화로 GPS를 확인해보니…… 빨간색 반응과 노란색 반응이 표시되어 있었다. 노란색은 겟코. 그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빨간색은…… 제로? 하지만 방금 전에는 SCM이 울리지 않았다.
제로는 분명 내 노예였다.
노예가 해방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주인이 해방해주거나, SCM을 24시간 빼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둘 다 아니었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가 다른 사람의 노예를 거쳐 해방되었거나, 일전에 줄리아와 내 SCM을 교환한 것처럼 GPS 반응을 속이고 있는 것, 뿐이다.
제로는 다른 누군가의 빨간색 SCM을 빌려 차고 있다……?
“……그건 누구의 SCM이야?”
“다른 사람 게 아냐. 내 SCM이라고……. 뭔가가 이상하지? 류오우. 자, 그럼 YES·NO 퀴즈를 하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마음이 꺾일 때까지 하는 YES·NO 퀴즈야. 자아, 내 정체를 맞혀보라고. 룰은 조금 전과 같아. 질문은 다섯 번. 대답하는 사람은 류오우 군.”
제로는 겟코를 쳐다보았다.
“겟코. 고통스럽겠지만 도와줘.”
“하아아, 이 모든 것은 마리아님을 위해서…… 약자를 위협하고, 상처 입히는 취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죄를 갚아라, 류오우.”
겟코는 내 옆에 앉더니,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제로와 겟코는 공원 벤치에 앉은 내 양옆에 앉았다.
“죄…… 그래, 류오우. 자기가 지은 죄는 갚아야 하지 않겠어?”
그날, 제로는 SCM의 효과를 무시하고 도망쳤다. 그 수수께끼의 답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
“……너는 제로야?”
“처음부터 어려운 질문을 던지네, 류오우. 으음…… 뭐, NO인 걸로 해둘게.”
참고조차 되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어? 류오우. 그럼 특별히 힌트를 줄게.”
제로는 입을 열어 자신의 SCM을 보여줬다. 그리고 오른손에 또 하나의 SCM을 올려놨다.
두 개…… 두 개의 SCM을 사용하고 있었다.
휴대전화 트릭과 마찬가지로 SCM을 바꿔 착용할 기회는 있었다. 아마 방금 내가 제로의 SCM을 확인하고 뒤돌아봤을 때였다.
그때, 나는 승부를 피하기 위해 SCM을 빼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서 두 개의 SCM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한 사람이 하나만 사용할 수 있다는 룰은 없다. SCM의 상태에 따라 승부도 가능하다.
타인의 전용 SCM은 무리지만 프리 SCM이라면 새로운 승부를 해서 노예를 만들 수도 있다. 또한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SCM의 모순이다. 아니, 버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중대한 부작용이 존재한다.
SCM을 혼자서 두 개 사용해 SCM의 노예 신호와 승부용 혹은 주인용 신호를 하나의 뇌로 송수신한다…….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그런 짓을 평범한 인간, 엄밀히 말하자면 평범한 뇌가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SCM 하나조차도 뇌에 상상을 초월하는 부담을 주는 신호를 보내는데, 그것을 두 개나…….
열차 노선 변경 지시를 다중으로 받으면 열차의 차체가 휘어져 탈선한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페널티를 받은 것처럼 발광하고 말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SCM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 제로는 노예 SCM과 주인 SCM을 두 개나 사용하고 있다.
내 노예이면서, 다른 SCM으로 겟코를 노예로 만들었다? 불가능하다.
제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무거운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구름이 꼈었지? 류오우……. 남은 질문 횟수는 네 번. 솔직하게 대답해줄 테니까 잘 해보라고.”
……모든 것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다.
제로를 노예로 만든 그날 내가 한 일을 이번에는 제로가 나에게 하려 한다.
“……나를 패배시키려고 겟코와 함께 여기에 온 거야?”
제로는 내 팔을 바라보았다.
“YES. 팔이 정말 가녀리네……. 실은 나도 승부를 할 예정이었어. 【혁명 시스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예정이었어. 하지만 치트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지. 뭐, 너한테 이렇게 다가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 주위에는 항상 줄리아나 츄오우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겟코는 프리였어. 설마 저 녀석과 손을 잡은 거야?”
한순간, 겟코가 제로를 노려보았다.
“으음, YES. 실은 초면이야.”
……초면? 미리 연락을 취한 후, 내 앞에서 처음 만난 건가.
조금 전, 겟코는 제로에게 ‘이길 예정’이었다. 그래서 사마귀라고 대답했다. 사전에 제로에게 대답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로가 배신했다…….
“……너는 제로를 지키는 거야?”
“YES. 나에게 제로는 특별하거든.”
이 가짜 제로는 어떻게 SCM의 설정을 초월했지?
아니…… 거꾸로 한 사람이 두 개의 SCM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지?
SCM은 노예 모드나 주인 모드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전용 장치가 된다.
타액과 잇몸에서 채취한 혈액 정보로 주인을 판별하는 것이다.
……정보? 타액이나 혈액 정보가 바뀌는 건…… 불가능하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부분부터 생각해봐야 한다고 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런 게 가능할까.
아…… 설마.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제로는 오른손잡이다. 나를 잡는다면 힘이 강한 오른손으로 잡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왼손으로 내 팔을 잡고 있다. 분위기도 변했고, 말투 또한 약간 달라졌다.
그리고 담배, 불…… 그날도 츄오우가 담배에 불을 붙인 순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그렇게 본다면 제로가 변해버린 것도 납득이 되었다.
“……한 번 남았어.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류오우.”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고 있어.”
제로는 휘파람을 불렀다.
……이 녀석과 같이 있었던 시간은 짧지만, 성격과 행동은 평소 때의 제로와 판이했다.
게다가 조금 전, 제로는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려 했다.
“너…… 여자야?”
“……너, 역시 대단하구나.”
제로의 대답은 YES를 의미했다.
다중인격장애.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다중인격장애인 사람은 인격에 따라 체형과 시력, 체액이 바뀌는 사례가 있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