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캐서린 런델
1987년에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08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올 소울즈 칼리지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 옥상의 밤하늘과, 여름이면 들르던 파리의 건물들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 다른 작품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야만 소녀>가 있다.
옮긴이김진희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어린이책을 만들었으며, 대학에서 출판학을 가르쳤다. 이번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내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꿈꾸며 어떤 경우에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지붕 위 아이들의 달리기를 응원했다. 옮긴 책으로 <통가가 산딸기 따던 날><안녕, 또 만나> 들이 있다.
표지 그림 오승민|표지 디자인 신용주
바람청소년문고 4
지붕을 달리는 아이들
초판 1쇄 2015년 7월 10일
글쓴이 캐서린 런델│옮긴이 김진희
펴낸이 최진│편집주간 김난지│편집 곽미영│디자인 신용주
등록 제406-2011-000013호│전화 031-955-5243│팩스 031-622-9413
주소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동 535-7 파주출판도시 세종출판벤처타운 401호
ISBN 978-89-97984-63-3 43840
ROOFTOPPERS
Copyright ⓒ Katherine Rundell, 2013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5 by A Thousand Hope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Rogers, Coleridge & White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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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협 한가운데를 떠다니던 첼로 상자 안에서 아기가 발견되었다.
바다에는 첼로 상자와 식당 의자 몇 개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배의 꽁무니가 전부였다. 그중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기뿐이었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 연회장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너무 크고 아름다워서 아무도 양탄자 위로 물이 차오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뒤에도 바이올린 연주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질러 대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바이올린의 높은 음과 어우러져 이중주를 이루었다.
아기는 베토벤 교향곡 악보에 따뜻하게 싸인 채로 바다 위를 떠다니다 배에서 1마일가량 떨어진 곳에서 마지막으로 구출되었다. 아기를 구명보트 위로 건져 올린 사람은 침몰한 배에 타고 있던 찰스 맥심이라는 학자였다. 찰스는 불꽃색 머리카락과 수줍은 미소를 띤 아기가 여자아이란 걸 한 번에 알아차렸다.
아기가 첼로 상자에서 나와서 처음으로 본 것은 갈고리 모양의 눈썹과 기다란 팔다리였다. 찰스는 행여 놓칠세라 커다란 두 손으로 아기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기를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날은 아기의 첫 번째 생일날이 되었다. 아기의 앞섶에 매달린 ‘1’이라고 적힌 빨간 장미 리본을 본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찰스가 말했다.
“아기가 한 살이거나 대회에서 일 등을 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기들이 대회에 나가는 건 드문 일이니까 한 살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요?”
아기는 꼬질꼬질한 손가락으로 찰스의 귓불을 꼭 잡고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가야.”
찰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둘이 처음 만난 그날, 찰스는 아기에게 생일과 함께 이름도 선물했다.
“아가야, 오늘 참으로 놀랍고 특별한 생일을 보냈구나. 그러니 가장 평범한 이름으로 짓는 것이 좋겠다. 메리, 베티, 밀드레드 아니면 소피? 뭐든 네가 좋을 대로 하렴.”
그런데 찰스가 ‘소피’라고 불렀을 때, 아기가 방긋 웃었고 아기의 이름은 소피가 되었다.
찰스는 외투로 소피를 잘 싸맨 뒤 마차에 올라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둘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찰스는 그다지 날씨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고, 소피는 이미 엄청난 바닷물을 이겨 내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찰스는 소피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찰스는 소피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안됐지만 난 사람보다는 책을 훨씬 잘 이해한단다. 책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거든.”
마차는 집까지 4시간을 달렸다. 찰스는 소피를 무릎에 마주 앉히고 다과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인사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찰스는 36살이고, 키는 190센티미터이다. 사람들과는 영어로 이야기하고, 고양이들과는 프랑스 어로, 새들과는 라틴 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말을 타면서 책을 읽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앞으로는 조심할 거야. 네가 있으니까, 작은 첼로 아가씨.”
찰스의 집은 아름답지만 아기에게는 안전하지 않았다. 수많은 층계와 미끄러운 마룻바닥, 뾰족한 모서리투성이였다.
“작은 의자를 몇 개 사야겠구나. 붉은색 두꺼운 양탄자도 깔아야지. 그런데 소피야, 양탄자는 어디에서 구하지? 네가 알 턱이 없겠지만 말이다.”
당연히 소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린 데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차가 말똥 냄새가 나는 거리에 멈춰 섰을 때 소피가 깨어났다. 소피는 첫눈에 찰스의 집이 마음에 들었다. 벽은 런던에서 가장 밝은 흰색으로 칠을 해서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빛났다. 지하에는 책과 그림들이 넘칠 듯이 많고, 여러 종류의 거미들이 살았다. 지붕은 새들의 차지였다. 그 나머지 공간에서 찰스가 살았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마친 소피는 더욱 하얗고 연약해 보였다. 찰스는 아기가 그토록 작은 존재라는 걸 미처 몰랐다. 찰스 품에 안긴 소피는 너무나 작았다. 찰스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때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찰스는 의자 위에 소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떨어지지 않도록 팔걸이에 두꺼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갔다.
잠시 뒤, 찰스는 숱이 많고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와 함께 돌아왔다. 그사이 <햄릿>은 조금 축축해졌고, 소피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찰스는 소피를 안고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개수대 안에 내려놓았다. 찰스는 따뜻한 얼굴로 소피에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마라, 소피. 우리는 누구나 사고를 만난단다.”
그러고 나서야 찰스는 여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피, 이분은 국립 아동 보육국에서 나오신 엘리어트 양이란다. 엘리어트 양, 이쪽은 바다에서 온 소피예요.”
엘리어트 양은 개수대 안에 놓인 소피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가져온 꾸러미에서 깨끗한 옷들을 꺼냈다.
“아기를 이리 주세요.”
찰스는 소피를 건네는 대신 옷을 받아 들었다.
“이 아기는 제가 바다에서 데려왔습니다.”
소피가 커다란 눈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이 아기는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 제게는 이 아기를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영원히 그럴 수는 없지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아기는 찰스 씨의 피보호자이지 딸이 아니에요. 이것은 임시 조치예요.”
엘리어트 양은 강조하듯 ‘피보호자’에 힘을 주었다. 아마도 물건을 정돈하듯 사람들을 나누고 관리하는 것이 취미인 것 같았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투도록 하죠. 아기가 춥겠어요.”
찰스는 소피에게 옷을 입혔다. 그러고는 무게를 가늠하듯 소피를 두 팔로 안아 올렸다.
“보세요. 정말 총명해 보이는 아기랍니다.”
소피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어 재주가 많아 보였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불꽃색이에요. 어떻게 이 아기를 싫어할 수 있겠어요?”
“아기가 괜찮은지 살피러 다시 들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이런 일을 혼자 할 수 없어요.”
“그럼요. 언제든 들르세요.”
찰스는 참을 수 없어서 한마디 덧붙였다.
“엘리어트 양이 도저히 우리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면, 감사하도록 애써 보지요. 하지만 이 아기는 제 책임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라고요. 당신은 남자고요.”
“관찰력이 대단하시군요.”
“당신은 이 아기를 어떻게 하려는 거죠?”
찰스는 황당한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전 이 아기를 사랑할 겁니다. 제가 읽은 시에 따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찰스는 소피에게 빨간 사과를 건네려다 말고 얼굴이 비칠 때까지 소매에 대고 박박 문질렀다.
“아기를 기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찰스는 소피를 무릎에 올려놓고 사과를 건넸다. 그리고 <한여름 밤의 꿈>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완벽한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웨스트민스터 국립 아동 보육국 캐비닛 안에는 ‘보호자: 인물 평가’라고 표시된 붉은색 파일이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파란색 ‘찰스 맥심’의 파일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찰스 맥심은 책을 좋아하는 학자이다. 특이하지만 너그럽고 부지런하다. 남달리 키가 크지만 의사의 소견에 따르면 건강하다. 여성 피보호자를 돌보는 능력에 대해서 고집스러울 만큼 확고한 자신감이 있다.
찰스의 특성은 아마도 전염성이 있는 듯했다. 소피는 찰스처럼 키가 크고 너그러우며 책을 좋아하고 특이한 아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고집스러웠다.
소피의 일곱 번째 생일날, 찰스는 초콜릿 케이크를 구웠다. 가운데가 푹 꺼져서 볼품없었지만 소피는 자기가 바라던 모양이라고 좋아했다.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면 아이싱(케이크 표면에 바르는 버터크림이나 휘핑크림 등의 마무리 재료-옮긴이)을 더 많이 올릴 수 있잖아요. 난 치사스러운 아이싱이 좋아요.”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구나. ‘치사스러운’보다는 ‘사치스러운’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만. 소피, 어쩌면 일곱 번째일지도 모를 생일을 축하한다. 우리 생일을 위해 셰익스피어를 잠깐 볼까?”
소피는 자주 접시를 깼다. 그래서 둘은 <한여름 밤의 꿈> 앞표지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먹었다. 찰스는 책을 소매로 닦은 뒤 한가운데를 펼쳤다.
“티타니아 여왕 부분을 좀 읽어 주겠니?”
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난 장난꾸러기 요정 퍽이 더 좋아요.”
소피는 천천히 몇 줄을 읽었다. 그러다 찰스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책을 마루에 내려놓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찰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우아!”
이어서 탁자를 두드리며 박수를 쳤다.
“소피, 요정 같구나.”
소피는 식탁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문에 기대어 물구나무를 섰다.
“멋지구나. 점점 좋아지고 있어. 거의 완벽해.”
“겨우 ‘거의’예요?”
소피는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뒤뚱거리며 찰스를 곁눈질했다. 피가 몰려 눈동자가 화끈거렸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 다리가 곧게 뻗어 있나요?”
“거의. 왼쪽 무릎이 살짝 구부러진 것 같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셰익스피어 이래로 아무도 없지.”
소피는 침대에 누워 찰스가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찰스의 말은 틀렸다. 찰스는 완벽했다. 찰스의 눈동자 속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집과 옷도 물려받았다. 옷들은 고급 양복점이 늘어선 새빌 거리에서 맞춘 100퍼센트 실크 양복이었다. 비록 지금은 50퍼센트의 실크와 50퍼센트의 구멍으로 바뀌었지만.
찰스는 소피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새들에게도, 가끔씩 부엌으로 쳐들어오는 쥐며느리들에게도 불러 주었다. 찰스는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으며, 찰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하늘을 나는 듯했다.
소피는 때때로 배가 가라앉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기를 쓰고 올라갈 곳을 찾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야 소피는 마음을 놓았다. 찰스는 그런 소피를 옷장 위에서 자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소피가 자는 곳 바로 아래에서 잠을 잤다.
소피는 가끔씩 찰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찰스는 아주 조금 먹었고, 거의 잠자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주 웃지 않았다. 하지만 뼛속까지 상냥하고, 손가락 끝까지 예의 발랐다. 만일 걸으면서 책을 읽다가 가로등에 부딪치면 가로등한테 다친 데는 없는지 사과할 것이다.
엘리어트 양은 일주일에 한 번, 아침마다 뭔가 문제가 있는지 살피러 왔다. 소피는 따지고 싶었지만 곧 가만히 있는 법을 배웠다. 엘리어트 양은 여기저기 벗겨져 나간 귀퉁이와 식품 저장실에 가득한 거미줄을 둘러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찰스 씨와 넌 도대체 뭘 먹고 사니?”
찰스와 소피가 먹는 음식이 다른 집에 비해 흥미롭기는 했다. 찰스는 몇 달씩이나 고기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찰스는 과자와 차, 그리고 잠자리에서의 위스키 한 잔이면 충분했다. 접시들은 소피가 손만 대면 모두 깨져 버렸다. 그래서 찰스는 세계 지도 책의 헝가리를 펼쳐 놓고 그 위에 구운 감자를 놓았다.
소피가 처음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찰스는 소피가 손대지 못하도록 위스키 병에 ‘고양이 오줌’이라고 써서 붙여 놓았다. 하지만 소피는 병마개를 열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옆집 고양이의 엉덩이를 킁킁거렸다. 둘의 냄새는 전혀 달랐지만 똑같이 기분 나빴다.
“우린 빵을 먹어요. 생선 통조림도요.”
소피가 대답했다.
“뭘 먹는다고?”
엘리어트 양이 다시 물었다.
“나는 생선 통조림을 좋아해요. 우린 햄도 먹어요.”
“그래? 난 이 집에서 햄 조각 하나 본 적이 없는데?”
“매일 먹어요. 아니…….”
소피는 말을 덧붙였다. 소피는 정직한 어린이였다.
“분명히 가끔씩은 먹어요. 치즈도 먹고 사과도 먹어요. 나는 아침마다 우유를 500밀리리터씩 마셔요.”
“찰스 씨는 어떻게 널 이렇게 살게 하지? 이 생활이 어린이에게 좋다고 생각할 수가 없구나. 이건 올바르지 않아.”
하지만 찰스와 소피는 아주 잘 살았다. 엘리어트 양이 둘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엘리어트 양이 올바르지 않다고 말했을 때 소피는 깔끔하지 않다는 뜻인 줄 알았다. 소피와 찰스는 깔끔하게 살지는 않았다. 소피는 깔끔함이 행복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제 얼굴이 깔끔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찰스 아저씨가 그러는데, 제 눈이 어수선하대요. 얼룩 때문에요.”
소피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해서 추우면 얼룩덜룩해졌다. 머리카락은 엉키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소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소피가 기억하는 엄마는 자신과 피부와 머리카락이 똑같았지만, 아름다웠다. 엄마는 발목에 헝겊을 덧댄 바지를 입었고, 시원한 바람과 검댕 냄새가 났다.
어쩌면 바지가 문제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소피는 8살이 가까워질 무렵, 찰스에게 바지 한 벌을 사 달라고 부탁했다.
“바지? 여자가 입기에는 이상한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엄마도 바지를 입는걸요.”
“입었겠지, 소피.”
“아니, 입어요. 검은색으로요. 하지만 내 바지는 붉은색이 좋겠어요.”
“음, 치마가 더 좋지 않겠니?”
찰스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난 정말 바지를 입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옷 가게에는 소피에게 맞을 만한 바지가 없었다. 남자아이들이 입는 회색 반바지뿐이었다.
찰스는 붉은색 면으로 긴바지 네 벌을 만들어서 소피에게 선물했다. 그중에서 한 벌은 한쪽 다리가 다른 쪽보다 길었다.
소피는 그 옷들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엘리어트 양은 바지를 보고 기겁을 했다.
“맙소사. 봐주기 힘들구나. 여자아이들은 바지를 입지 않는단다.”
소피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우리 엄마는 바지를 입었어요. 엄마는 첼로를 연주할 때 바지를 입고 춤을 추었어요.”
“그럴 순 없어.”
엘리어트 양이 말했다. 늘 같은 말이었다.
“소피, 여자는 첼로를 연주하지 않아. 그리고 그런 걸 기억하기에는 네가 너무 어렸어. 좀 더 정직하도록 노력해라.”
“하지만 엄마는 그랬어요. 바지는 검은색이고, 무릎은 회색이었어요. 검정 구두를 신었고요. 난 기억해요.”
“네 상상이란다, 얘야.”
엘리어트 양이 딱 잘라 말했다.
“상상이 아니에요. 맹세해요.”
“소피.”
“상상이 아니라고요!”
소피는 화가 나서 “감자같이 생긴 할망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찰스와 함께 살면 뼛속 깊이 예의 바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례하게 구는 것은 더러운 속옷을 입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서 말할 때 예의 바르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은 소피가 엄마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믿었다. 소피는 그런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믿었다.
“발톱눈. 늙다리. 나는 확실히 기억한다고.”
소피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소피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엄마를 또렷이 기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머리카락과 가볍게 발을 차며 박자를 맞추던 가늘고 긴 두 다리를 기억했다. 그 다리가 치마 속에 감춰져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소피는 바다 한가운데서 문짝에 매달려 떠다니던 엄마를 똑똑히 기억했다.
어른들은 말했다.
“아기는 너무 어려서 그런 걸 기억하지 못한단다.”
또 말했다.
“엄마에 대한 너의 바람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거야.”
소피는 그런 말들을 지겹도록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소피는 엄마가 도움을 청하며 팔을 흔들어 대던 모습을 기억했다. 엄마가 불던 휘파람 소리도 기억했다. 휘파람 소리는 사람마다 특징이 있다. 경찰이 뭐라든, 소피는 엄마가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침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소피는 고집스럽게 확신했다.
소피는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엄마는 살아 있어. 어느 날 나를 찾아올 거야.
“엄마는 날 찾아올 거예요.”
소피가 찰스에게 얘기할 때마다, 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아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이잖아요.”
소피는 똑바로 서서 어른처럼 말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큰 사람 말을 더 쉽게 믿기 때문이다.
“가능성을 절대로 무시하지 말라고 항상 말했잖아요.”
“하지만 아가, 그건 결코 일어나기 힘든 일이야. 네 삶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어. 그건 잠자리 등 위에 집을 지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단다.”
소피가 엘리어트 양에게 엄마가 자기를 찾으러 올 거라고 얘기할 때마다, 엘리어트 양은 거침없이 반박했다.
“네 엄마는 죽었어. 바다에서 살아남은 여자는 한 명도 없었어. 쓸데없는 생각에 너무 빠지지 않도록 해.”
어른들은 소피가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믿기 힘들지만 분명한 사실’을 말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소피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엄마는 올 거예요. 아니면 내가 엄마에게 갈 거예요.”
“소피,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단다.”
엘리어트 양은 소피에게 헛생각을 하느니,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십자수를 배우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찰스는 바느질을 잘 못해도 사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몸소 소피에게 보여 주었다.
어느 날, 소피는 붉은색 페인트를 발견하고 하얀 벽에 침몰한 배의 이름, 퀸메리호와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의 날짜를 적었다. 엄마가 집 앞을 지나갈 때를 대비해서.
찰스는 그런 소피를 보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소피의 손이 높이 닿도록 목말을 태워 주고 붓을 씻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중에 찰스는 엘리어트 양에게 소피의 편도 들어 주었다.
“만약을 위해서,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경우에 대비해서죠. 소피는 단지 제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저 아이에게 집을 망가뜨리라고 시켰다고요?”
“아니요. 제가 아주 작은 가능성도 무시하지 말라고 늘 얘기했거든요.”
엘리어트 양은 찰스도 소피도 못마땅했다. 찰스는 돈에 관심이 없고, 늘 저녁 식사에 늦는 것이 싫었다. 소피는 사람을 쳐다보거나 얘기를 들을 때의 표정이 싫었다.
“그건 어린 여자아이의 표정이 아니야.”
현관 벽지에 글을 남기는 둘만의 습관도 싫었다.
엘리어트 양은 종이에 글자를 휘갈겨 쓰며 말했다.
“글을 벽지에 쓰는 건 건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엘리어트 양. 이렇게 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아요.”
엘리어트 양은 잉크가 잔뜩 묻은 찰스의 손과 챙이 떨어져 나간 찰스의 모자도 싫었다. 소피의 옷도 탐탁지 않았다.
찰스는 물건을 사는 일에 매우 서툴렀다. 한번은 상점들이 모여있는 본드 거리 한가운데서 갈피를 못 잡고 하루를 보내다가 남자아이 셔츠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엘리어트 양은 소피가 그 셔츠를 입은 걸 보고 몹시 화를 냈다.
“소피에게 이런 걸 입혀서는 안 돼요. 사람들은 소피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할 거예요.”
소피는 자기 옷을 내려다보았다. 소피가 보기에 셔츠는 새 옷이라 조금 빳빳한 것 말고는 아주 정상이었다.
“이 옷이 여자아이 셔츠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소피가 엘리어트 양에게 물었다.
“남자아이 셔츠는 왼쪽 옷섶이 위로 올라가도록 단추를 채운단다. 여자아이 블라우스는 오른쪽이 위로 올라가고. 그런 걸 모르다니 정말 놀랍구나. 제발 ‘블라우스’라는 단어를 적어 두렴.”
찰스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우리 소피가 단추에 대해 몰라서 놀랐다고요? 단추는 국제 문제에서 그다지 중요한 안건이 아니니까요.”
“뭐라고요?”
“소피는 중요한 것은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물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지만, 아직 아이니까요.”
엘리어트 양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구식이어서 죄송하지만, 난 여자아이한테 단추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엘리어드 양, 소피는 세계 모든 나라의 수도를 알아요.”
문가에 서 있던 소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거의.”
“소피는 책을 읽을 줄 알고, 그림도 그릴 줄도 압니다. 거북과 바다거북의 차이점도 알지요. 나무를 구별할 줄 알고, 기어오를 줄도 알아요. 오늘 아침에 소피는 어미 개가 낳은 여러 마리 강아지들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강아지를 뭐라고 하는지도 얘기했어요.”
“무녀리. 가장 먼저 태어난 새끼를 무녀리라고 해요.”
소피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소피는 휘파람도 아주 잘 불어요. 소피의 휘파람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아채지 못한다면 아주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귀가 멀었거나.”
찰스가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 뻔했다. 엘리어트 양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면서 찰스의 말을 잘랐다.
“맥심 씨, 소피는 새 셔츠가 필요해요. 여자아이 셔츠로요. 그리고 맙소사, 저 바지는!”
소피는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피에게 바지는 치마에 바느질을 좀 더 한 옷일 뿐이었다.
“나는 바지가 필요해요. 제발 바지를 입게 해 주세요. 치마를 입고는 나무에 올라갈 수 없어요. 올라갈 수 있다 해도, 사람들한테 속옷을 보이잖아요. 그게 더 나쁘지 않나요?”
엘리어트 양은 얼굴을 찡그렸다. 엘리어트 양은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일단 넘어가자꾸나. 너는 아직 어린아이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그럴 순 없어.”
“바지를 입고도 난 잘할 수 있어요. 네?”
소피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문지르며 엘리어트 양에게 부탁했다.
“아니, 절대 안 돼. 영국은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을 위한 나라가 아냐.”
엘리어트 양은 소피를 데리고 시내 곳곳을 둘러보고 싶어 하는 찰스의 바람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런던은 더러워서 소피가 세균과 나쁜 버릇을 묻혀 올 거라고 반대했다.
소피의 아홉 번째 생일날, 찰스는 소피가 의자에 서서 한 손으로 책을 읽고 다른 한 손으로 토스트를 먹는 동안 신발을 닦아 주었다. 소피는 이로 책장을 물어 넘겼다. 종이 모서리에 빵 부스러기와 침이 묻었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엘리어트 양이 들이닥친 건 찰스와 소피가 음악회에 갈 준비를 거의 마친 때였다.
“그 꼴로 소피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어요. 너무 꾀죄죄하잖아요! 그리고 구부정하게 서지 마라, 소피.”
“그래요?”
찰스는 소피의 머리 꼭대기를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엘리어트 양이 소리쳤다.
“맥심 씨, 아이 머리 꼭대기가 잼투성이잖아요.”
“그렇군요.”
찰스는 머쓱해하며 엘리어트 양에게 공손히 물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하지만 찰스는 엘리어트 양의 손이 종이에 뭔가를 적는 걸 보면서 소피 머리를 닦았다. 천으로 그림 액자를 닦듯이 부드럽게.
엘리어트 양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소매에도 뭐가 묻었군요.”
“그건 빗물이 씻어 줄 겁니다. 그리고 오늘은 소피의 아홉 번째 생일이에요.”
“생일이라고 더러워도 되는 건 아니에요. 이 꼴로 소피를 동물원에 데려갈 수 없어요.”
“알았어요. 그런데 소피를 동물원에 데려가는 게 더 낫겠다는 뜻인가요?”
찰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피는 그 모습이 예절 바른 표범 같다고 생각했다.
“표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거 같군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 애는 당신 체면에 먹칠을 할 거라고요. 나 같으면 이 애와 함께 있는 걸 누가 본다면 당황스러울 거예요.”
찰스는 엘리어트 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엘리어트 양이 먼저 눈을 내렸다.
“소피에게는 반짝이는 구두와 반짝이는 두 눈이 있어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찰스는 소피에게 표를 내밀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가야.”
찰스는 생일날에 늘 그랬듯이, 소피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춘 뒤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소피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일어나게 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떤 방법을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아마도 엘리어트 양은 나무젓가락으로 쿡 찔러서 사람을 일어나게 할 것이다. 찰스는 항상 손끝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도와주었다.
찰스는 걷는 내내 오페라 ‘코지 판 투테’의 현악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소피, 음악은 정말 멋진 거란다. 암, 멋지고말고!”
소피에게 생일 계획은 비밀이었지만, 찰스의 들뜬 마음은 그대로 전해졌다. 소피는 찰스 옆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어떤 음악회예요?”
“클래식이란다, 소피.”
찰스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고 손가락은 움찔거렸다.
“매우 뛰어나고 복잡한 음악이지.”
“와, 그거…… 멋지네요. 아마 아주 멋질 거예요.”
소피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소피는 속으로는 동물원에 가는 게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피는 클래식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계속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것도 꽤 행복할 것이다. 소피는 포크 송을 좋아하고, 춤출 수 있는 음악을 좋아했다. 이제 막 9살이 된 아이가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음악회는 소피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작이 좋지 않았다. 피아노 연주가 너무 길었다. 콧수염을 기른 피아니스트는 소피가 엄청 가려워할 때의 표정으로 연주했다.
“아저씨.”
소피가 찰스를 불렀다. 찰스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행복한 얼굴로 연주를 듣고 있었다.
“아저씨?”
“왜 그러니, 소피? 여기서는 소곤소곤 말해야 해.”
“저기, 얼마 동안 계속되는 거예요? 멋지지 않다는 건 아니고요. 그냥…… 궁금해서요.”
“고작 한 시간이란다. 나는 여기에서 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넌 그렇지 않니?”
“아, 네…….”
소피는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