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thieu Zazzo/Pasco and Co
베르나르 키리니
Bernard Quiriny
1978년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2005년에 발표한 첫 소설집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로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 프랑스어권 작가에게 주는 보카시옹상을 수상했고, 2008년에 두번째 소설집 『육식 이야기』로 벨기에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빅토르 로셀 상과 독특한 스타일의 글을 쓰는 현대 작가에게 주는 스틸상을, 2012년 출간된 세번째 소설집 『아주 특별한 컬렉션』으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에 주어지는 ‘그랑프리 드 리마지네르’ 상을 수상했다. 키리니는 환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단편들로 프랑스 문단에서 에드거 앨런 포, 보르헤스, 마르셀 에메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며, <르 마가진 리테레르> 등 여러 문예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장편소설 『사라진 마을』(2014), 소설집 『죽이는 이야기』(2015), 에세이 『미스터 우울』(2013) 등이 있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 장편소설 『목마른 여자들』은 출간된 해에 르노도상, 메디치상, 플로르상 후보에 오를 만큼 문단의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1970년 페미니즘 혁명으로 탄생한,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여성 제국으로 수십 년 만에 발을 들이게 된 프랑스 지식인들의 여행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성이 존재마저 위협받는 세계, 여성 독재자가 통치하는 세계에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보고도 외면하는 눈먼 지식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풍자적이고 익살스럽게 선보인다.
LES ASSOIFFÉES
by Bernard Quiriny
Copyright ⓒ Editions du Seuil(Paris), 2010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2016
This Korean edition wa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Editions du Seuil through Bestun Korea Agenc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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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베스툰 코리아 에이전시를 통해 프랑스 Seuil 출판사와 독점 계약한 (주)문학동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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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원주’라고 밝히지 않은 주석은 모두 옮긴이주이다.
2. 본문 중 고딕체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이다.
1970년, 혁명이 네덜란드의 지배 체제를 뒤엎는다.
이듬해, 혁명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번진다.
유럽 한가운데 자리한 옛 베네룩스 3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가 되었다.
기차가 떠나려면 두 시간이나 남았지만 랑글루아는 굴드와 만나기로 한, 역 근처 카페에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굴드가 되도록 짐을 적게 가져오라고 했기에 그는 여행 가방 하나와 어깨에 멜 작은 배낭 하나, 사진기와 수첩만 챙겼다. (잠시 후 그는 다른 일행들이 자기처럼 짐을 줄이지도 않고, 굴드 또한 트렁크처럼 커다란 여행 가방을 두 개나 끌고 온 걸 보고 짜증이 나게 된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생각했다. ‘벨기에로 가는 거야. 벨기에로!’ 곧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한 달 전, 피에르장 굴드가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굴드는 카퓌신 로트, 레오노르 알베르, 뤼시앵 보르도, 장미셸 골란스키 등 그가 잘 알지 못하는 네 명의 유명 인사도 같이 초대했는데, 모임의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굴드는 잔뜩 들떠 있었다. 그가 응접실 탁자에 유럽 지도를 천천히 펼쳤다. 그러고는 사인펜 끝으로 도시 두 곳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파리와 브뤼셀. 손님들이 영문을 모른 채 그를 쳐다보자, 그는 설명이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출발지와 도착지야. 나와 함께 벨기에로 가자는 거지. 여행할 생각들 있어?” 그러고 나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자신이 던진 말의 효과를 음미했다. 몇 초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자리에 모인 달변가들에게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보르도가 억지로 웃으며 침묵을 깼다.
“농담이지! 농담이야!”
그는 숨이 넘어갈 듯 껄떡이다가 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농담 맞지?”
그러나 굴드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보르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네가 우리를 저기로 데려갈 수 있다고?”
“그래.”
이렇게 해서 랑글루아는,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굴드가 이 년 전부터 계획해온 이 파격적인 모험에, 바로 벨기에 여행에 끼게 된 것이다.
굴드는 왜 그를 선택했을까? 그는 다섯 명의 원정대원 가운데 굴드를 가장 잘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강연회, 그리고 라디오방송에서인지 텔레비전 방송에서인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을 뿐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랑글루아는 굴드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를 언변 좋은 과대망상증 환자요, 피곤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그러듯 조금은 그에게 감탄했고, 그의 개성을, 그리고 때로는 그의 위풍당당함을 인정했다. 그와 마음이 통하기도 했다(어찌나 변덕스러운지 굴드가 대부분의 사람들과 번갈아가며 마음이 통한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누가 굴드를 비방하면 랑글루아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를 비판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한 사람도 저녁 모임에서 굴드가 건네는 인사를 받기 위해서라면, 카페에서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남몰래 값비싼 대가라도 치르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4월부터 9월까지 바이외에 있는 굴드의 집에서 열리는 주말 사교 모임에 초대받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굴드에 대해 빈정거리는 사람들을 변호하자면, 그의 험담을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고 그러지 않기가 오히려 어렵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수군거리자면 할 얘기가 너무도 많았다. 무엇보다 지성인이라기보다는 영화배우처럼 보이는 차림새가 그랬다. 괴상망측한 색(노란 밀짚색과 자홍색이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의 재킷, 그가 수집하는 특이한 안경들, 정치 구호가 적힌 셔츠들, 불빛 아래 서면 반지르르 광이 나는 민머리. 더구나 영화계에는 그를 동료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걸핏하면 이 시대의 양심 같은 표정을 짓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며 젠체하다가, 대개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태도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았다. 모든 영역에서 자신이 천재인 양 으스대며 온갖 주제를 건드리고 싶어하는 강박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글을 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만능 예술가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에세이뿐 아니라 소설, 시, 극작품까지 출간했다. 대형 추상화도 왕성하게 그렸는데, 완성된 그림들은 친구들이 그의 평판을 높여주려고 눈을 질끈 감고 샀다. 심지어 조각까지 시도했지만 끌에 손을 다친 뒤로 포기했다. 몇 안 되는 그의 조각 작품 가운데 하나는 어느 변두리 지방 도시의 중심 광장을 장식하고 있다. 그 시절 한 친구가 시장으로 있던 도시의 시청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 연주를 음반으로 만들었다가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그리고 라디오 좌담도 진행했는데, 십 년 동안 이어진 이 좌담에 프랑스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거쳐갔다. 텔레비전 출연도 시도했지만 방송이 두세 번 나가다가 중단되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장황한 탐방기사를 쓰고, 사진을 곁들인 책들을 펴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돌출 행동, 잦은 파티, 상대를 가리지 않는 논쟁, 세 번의 결혼. 그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고 보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굴드에 관한 책이 두 권 출간되어 있었는데, 랑글루아는 그에게 호감을 가져보려고 그 책들을 읽었다. 첫번째 책은 출세를 염두에 둔 여기자가 쓴 약간 밋밋한 전기였다. 그녀는 ‘인물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일컬은 측면에 대해서는 일부러 침묵했다. 다른 책은 두 명의 노련한 논쟁꾼이 쓴 작품으로, 바로 그 어두운 부분을 겨냥했다. 형성된 경로가 수상쩍은 굴드의 엄청난 재산, 마피아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얻어낸 이득, 변절, 숱한 거짓말들. 그가 대놓고 학력을 위조하고, 유명 인사들과 친구 사이라고 속이고, 내세울 만한 행동들을 지어낸 걸 보면 장난인지 아니면 병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에 대한 책을 읽다가 랑글루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변화무쌍하고 의심스럽고 못 미더운 사람을 따라 원정을 떠나는 것이 분별 있는 행동일까? 그렇지만 내심 자신이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벨기에는 유럽 한가운데 자리한 신비스러운 나라였고, 모든 기자들이 가기를 꿈꾸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당국에 방문 요청이 물밀듯이 쇄도했으나 이십여 년 전부터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1990년대에 마지막으로 여성들이 그곳에 정착한 뒤로 그들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 벨기에는 미지의 나라로 온갖 추측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굴드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랑글루아가 그 나라에 갈 한 번뿐인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그럴 리가! 게다가 굴드는 결단코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일에 뛰어들 때에는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해 확실하게 실현시키고 만다. 이 여행을 위해 이 년 동안 준비 작업을 했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벨기에 당국과 끝없이 뒷거래를 하고 제국의 밀사들을 비밀리에 만났다지 않는가. 모든 것이 제대로 준비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환영받을 것이고, 무엇 하나 우연에 기대는 일 없이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다. 랑글루아의 들뜬 머릿속에서 그 나라를 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그 땅을 밟고 싶다는 부푼 마음이, 굴드와 네 명의 패거리 사이에 자신이 낄 만한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눌러버렸다.
네 사람 중에서 랑글루아가 아는 사람은 장미셸 골란스키뿐이었다. 골란스키가 창간해 운영하고 있는 주간지 〈랭스탕〉에 그가 쓴 기사가 몇 번 실린 적이 있었다. 골란스키는 과묵하고 변덕스럽지 않은 외교 수완가이고, 주변 사람들을 졸게 만드는 단조로운 목소리를 지닌 살짝 지루한 오십대 남자였다. 그는 화내는 법 없이 언제나 예의바르며, 누구의 주장에도 반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질이 그의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불똥을 피해다녔고, 적을 두지 않았으며, 갈등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랑글루아 또한 중용을 지키는 그의 태도를 비현실적으로 여기면서도 높이 평가했다. 그렇게 한결같은 태도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골란스키가 감정을 분출하는 통로를 따로 두고 남몰래 시커먼 분노를 터뜨리고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그와 함께 며칠을 지내보면 이 가설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어쨌든 그는 골란스키를 성실한 언론인이라고 여기며 좋아했다. 게다가 무척이나 수다스러운 세 사람 옆에 그렇게 차분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뤼시앵 보르도는 작가이자 기자인데, 랑글루아는 그의 글을 전혀 읽어보지 못했다. 그의 소설들은 평판이 좋았다. 무엇보다 랑글루아는 그를 언론인(보르도는 『뤼니베르셀』지를 운영하고 있었다)이자, 부인인 마리클로드 랑티에—P.F.F.* 당원으로 무시무시한 선전문을 작성하는 준엄한 지식인이었다—의 영향을 받아 신봉하게 된 페미니즘을 위해 싸우는 운동가로 알고 있었다. 파리에서 이 부부가 벌인 소동은 유명했다. 마리클로드가 생제르맹 대로에서 뤼시앵 보르도의 목에 개 줄을 묶어 산책시키는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 연출을 통해 그들은 남녀의 관계를 전복하려는 욕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혹은 그들의 본거지인 인도 카페 ‘마하라자’에서 보르도가 네발로 걷고 짖으며 그녀가 던져주는 땅콩을 받아먹는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 기상천외한 행동은 그의 평판에 해가 되지 않았고, 그들 부부는 극단적 페미니즘의 대표 인물로 통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을 불렀고, 그들의 의견이 모범처럼 받아들여졌다.
* Parti Féministe Français. 프랑스 페미니스트당. (원주)
랑글루아는 이십 년째 이어지는 보르도와 굴드 사이의 우정을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고, 각자 조명을 받으려고 서로 싸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머지 두 여자, 세속적인 알베르와 전투적인 로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레오노르 알베르는 노련한 기자로, 정치와 문화행정 쪽으로 방향을 틀어 국가 중책을 맡았다. 그녀는 1980년대에 페미니즘에 뛰어들어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그 태만으로 그녀는 독단적이라는 평판을 얻었는데, 조금 잘못된 평판이었다. 사실 그녀는 언제나 공식 노선을 따랐기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그제껏 텔레비전에서만 보아왔던 그녀를 굴드의 집에서 만나고 나서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텔레비전에서는 화장발 덕분에 십 년은 더 젊어 보였던 것이다. 눈앞의 그녀는 나이가 예순쯤 되어 보였다.
카퓌신 로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로, 그와 동갑인 서른다섯 살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와 동그란 눈 덕분에 어려 보였다. 그러나 동안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녀는 야심 많은 과격한 활동가로 어떤 여자들보다 목자를 숭배했다. 그녀가 P.F.F.의 수장이 되면 프랑스 남자들은 벌벌 떨게 될 거라는 말이 나돌았다. 랑글루아는 논쟁에서 맹렬히 활약하는 로트를 보았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잠자고 있는 여성 비하 사상을, 모든 견해들 밑에 숨어 있는 편견을 들춰내는 데 챔피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살짝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생각했다. ‘로트하고 있을 땐 조심해야 해.’ 스스로를 잘 통제해 혹독한 심문을 초래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었다간 체면을 구길 게 뻔하다. 아주 피를 말릴 것이다.
저런! 하필 로트가 제일 먼저 카페에 도착했다. 그녀는 카페 안을 둘러보며 굴드를 찾았다. 그녀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끔찍해진 랑글루아는 굴드가 있어서 대화를 이끌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굴드는 없었다. 로트가 랑글루아를 발견하고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랑글루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가 맞는지 확신이 안 서는 듯한 태도였다. 굴욕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최근 몇 주 사이에 네 번이나 만났는데. 마침내 로트가 그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는 거대한 여행 가방을 힘겹게 끌고 그가 있는 자리로 와서 친근하게 볼인사를 했다. 그녀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더니 종업원을 불러 커피를 주문했고, 타고 온 택시의 운전사가 불친절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랑글루아는 예의바르게 그녀의 말을 들었고, 자신은 잠을 잘 못 잤고 뱃속도 더부룩하다며 이 중대한 날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았다.
“당신은 안 그래요?” 그가 물었다.
“아뇨.”
실제로 그녀는 매우 편안해 보였다. 스키장으로 놀러가기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랑글루아는 혼자 생각했다. 어떻게 전혀 흥분하지 않는 거지? 어쩌면 당에 소속되어 있어서 벨기에가 낯선 땅이 아니라 자기 집 같은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녀 역시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은 없었다. 제국은 모든 외국인에게 국경을 굳게 닫았다. 자매 조직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로트 역시 직접 보지 못한 제국을 노래하듯 찬양해왔다. 제국이 내놓는 정보와 묘사를 토대로 말이다.
“혹시 보고 실망하게 될까봐 걱정은 안 되세요?” 그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첫번째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우물쭈물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어쩌면 현실은 다를지도 모르잖아요……”
그녀가 말을 잘랐다. “왜 제국이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죠?”
이 대답에 랑글루아는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거듭 말했다.
“벨기에 당국이 하는 말을 믿지 말아야 하나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그는 뒷걸음을 쳐서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여군주 유디트의 영광을 노래했다. 그러다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자신은 이제 로트의 머릿속에 수상쩍은 인물로 인상이 박혀버렸다는 걸 깨닫고 화제를 바꾸었다. 정치는 제쳐두고, 두 사람이 공유하는 유일한 친분인 굴드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곧바로 굴드를 칭찬했다. 그가 여성의 입장을 지지하는 투사이고 자신이 그의 친구라는 사실이 기쁘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내 꿈을 실현하게 해준 것에 대해 그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슨 꿈 말입니까?”
“벨기에를 보는 것이죠.”
그는 동의했고, 그것으로 대화는 끝나버렸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잔을 찻숟가락으로 저으며 서로 상냥한 미소를 띤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행히 굴드가 여느 때처럼 요란하게 도착했다. 그가 들어서면서 종업원과 부딪치는 바람에 종업원이 잔을 떨어뜨렸다.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고,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모피 목도리가 달린 빨간색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그의 아내, 여배우 미슐린 브라슴은 희끗한 머리 위에 귀마개를 쓴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이 년 전에 결혼했다. 그녀는 굴드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지만 정확히 몇 살 차이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는 이 부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낳았다. 모두들 이혼을 예상했다. 야심 많은 젊은 여자들이 그 원인이 되려고 덤벼들었고, 굴드는 곧 뜻대로 되리라는 환상을 심어주며 여자들의 침대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는 미슐린과 헤어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미슐린도 남편의 불륜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 부부에게 이롭다고 판단했다.
굴드는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가죽가방을 들고 있었다. 미슐린이 남편의 여행 가방 두 개를 끌었다. 두 사람은 의자를 요란하게 잡아당기며 로트와 랑글루아가 앉은 탁자 앞에 자리잡았다. 굴드가 두 사람에게 유쾌하게 인사를 하더니, 보드카 두 잔을 가져오라고 종업원에게 소리쳤다.
“날씨가 따뜻하지 않아서 말이야! 게다가 오늘 난 러시아 사람이 된 기분이거든.”
그러더니 아내의 담비털 귀마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슐린도 그래.”
보드카가 나왔다. 그는 단숨에 자기 잔을 비웠다.
“그래, 지난밤에 잠은 잘들 잤고?”
랑글루아가 아니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굴드가 틈을 주지 않았다.
“난 한숨도 못 잤어! 어찌나 흥분되던지. 잊은 건 없는지, 모든 게 제대로 준비됐는지, 그런 생각이 내내 끊이질 않는 거야. 해결해야 할 자잘한 문제들도 있고, 여행 가방도 채워야 하고. 게다가 우리를 기다리는 게 벨기에잖아!”
그렇지만 랑글루아의 눈에는 그가 밤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주 원기 왕성해 보였고, 생기 넘치는 얼굴로 오만 가지를 한꺼번에 떠들어댔다.
“오늘 아침에도 기차 때문에 전화를 걸었는데, 모든 것이 제대로야. 기차는 제시간에 떠나.”
그는 팔을 들어 보드카를 한 잔 더 주문했고, 기다리는 동안 아내의 잔에 입을 댔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내가 말했지?”
랑글루아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굴드는 다시 설명했다.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릴에 도착할 거야. 그리고 기차를 타고 코민까지 가야 해. 거기서 내가 빌려둔 미니버스를 타고 중립지대까지 갈 거고. 그런 다음……”
그는 확신이 없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그다음은 나도 몰라. 내 연락책들이 모호한 지시를 보내와서 그대로 미니버스 운전사에게 넘겼어. 이름도 없는 국경 분기점 같은 중립지대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군. 가보면 알게 되겠지.”
두번째 잔이 나오자 그는 첫번째 잔처럼 비웠다.
“오늘 저녁에 우리가 어디서 자게 될지도 몰라. 브뤼셀에서 자게 될까? 그 고약한 벨기에 여자들이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거야. 뭐 할 수 없지!”
보드카 때문에 몸이 더워진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쯤 오고 있지? 늦으면 안 되는데!”
때마침 다른 일행들이 택시를 함께 타고 도착했다. 흡족한 얼굴의 보르도, 미소 띤 알베르, 조심스러운 골란스키. 인사와 농담이 오갔다. 자리는 떠들썩하고 유쾌했다. 심각하고 장중한 출발을 상상했던 랑글루아는 그런 분위기에 무척 놀랐다. 그래도 굴드와 그의 패거리가 자신을 침울한 인간으로 생각할까봐 그들처럼 유쾌한 척하려 했고, 모두가 폭소를 터뜨리는 보르도의 문학계 험담에 웃으려고 애썼다. 랑글루아는 미슐린 브라슴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그녀가 유명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는 것을 보고 어린아이 같은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어린 척하길 좋아하는 알베르보다 더했다. 저렇게 잘난 척하는 남자와 저렇게 경박하게 아양 떠는 여자가 만나다니, 참으로 기이한 커플이었다!
굴드는 한참을 떠들고 나서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랑글루아와 로트에게 한 말을 반복했다. 오후 다섯시에 릴 도착…… 골란스키가 파리에서 왜 이렇게 늦게 떠나는지 묻자 굴드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벨기에에 도착하는 시간을 벨기에 당국이 정했는데, 오후 일곱시 이전에는 안 된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꼭 우리가 밤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군.” 골란스키가 말했다.
로트가 어깨를 으쓱했지만 랑글루아는 그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다.
오후 네시가 되자 굴드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승강장에는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출발을 ‘영원히 남기려고’ 그가 부른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자신의 팀(그는 “내 팀”이라고 말했다)에게 언론에 말하지 말라며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했다. 제국의 적들이 비난을 퍼부을 것이고, 그 자신의 적들도 기를 쓰고 일을 망치려 들 뿐만 아니라, 반反벨기에 성향의 신문들이 공세에 나설 거라는 등 온갖 이유를 댔다. 모두가 그의 말을 따랐다. 심지어 혀를 가만히 놓아둘 줄 모르는 보르도까지도. 그런데 정작 굴드 자신은 파리 구석구석에 여행에 대해 떠들어댔고, 그 결과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문기자들이 몰려오고, 마이크, 카메라까지 동원된 것이었다! 랑글루아는 생각했다. 굴드는 미디어에서 스타처럼 각광받고, 이 집단의 우두머리로 보이고 싶었던 걸까? 그라면 충분히 그럼직했다. 아니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의 습성 때문에 이런 언행불일치를 초래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굴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나자, 미슐린 브라슴이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했고, 남편에게 신중을 기하라고, 그리고 너무 지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잘 감시해주세요.” 그녀가 골란스키에게 말했다. 마치 천식 걸린 아들을 여름방학 캠프에 보내는 엄마 같은 모양새였다. 랑글루아는 그녀가 그들이 하려는 여행의 목적을 아는지, 이 여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적 여행이라는 것을 아는지 궁금했다.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정치 문제를, 세상사를 조금이라도 알까?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각한 문제에 끼어들려는 굴드와 피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 브라슴은 그야말로 대조적이었다!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의 결혼이 성공적인지도 몰랐다. 랑글루아는 두 사람이 약간 뒤로 물러나서, 지나가는 행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소년들처럼 오래도록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행인들을 놀라게 하는 걸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보르도와 알베르는 미소 지었지만, 수줍음을 타는 랑글루아는 거북해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브라슴이 떠나자, 굴드는 로트의 엉덩이를 철썩 소리가 나게 한 대 치고는 불량한 찬사를 덧붙였다. 우두머리의 행실에 아연실색한 랑글루아는 정작 그 일을 당한 당사자가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도 자기방어를 잘하던 여자가.
아스트리트 판 모르의 일기
2월 3일. 아침에 병원에 들어서자 여자들이 힘내라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측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불안해서 작업 일지에서 내 이름을 찾아보았다. 베텨가 나를 폐쇄 병동에 배치했다. 또!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조퇴할 뻔했다. 지금은 그러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베텨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그녀는 취임한 바로 다음날, 나에게 두 달 전 승진 발령을 받은 보안대 병실을 떠나 일반 병실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곳에 일손이 달린다는 이유를 댔지만 거짓말이었다. 부당한 조치였지만 참으라는 동료들의 말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오늘은 베텨가 나를 미워하지만, 내일이 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나를 잊을 테고, 공무원과 군인을 간호하도록 보안대 병실로 돌려보내줄 거라고. 나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런데 웬걸! 보안대 병실로 돌아가기는커녕 매주 폐쇄 병동 근무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하는 거지? 대개는 잘못을 저질러 처벌을 받아야 그곳에 보내지고, 그렇더라도 하루 이상을 넘기지 않는다. 한데 내 경우는 하루 이상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사흘 내리 이어진다. 사람들은 페스트 환자라도 보듯 나를 바라보며 내가 온종일 벌거벗은 남자들 사이에서 지낸다며 등뒤에서 수군거린다.
이번만큼은 베텨에게서 설명을 듣고 싶었다. 난 잃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병원에서 최악의 부서가 폐쇄 병동인데, 그녀는 이미 나를 그리로 내몰고 있지 않은가. 화가 나서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녀는 없었다. 조수들뿐이었다. 멍청한 여자 둘이 나를 보고 비웃었다. 분했지만 이 형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약국에 가서 세탁물과 붕대와 약을 수레에 실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수레를 지옥으로 밀었다.
폐쇄 병동은 1987년 새로 제정된 혼성混性 법에 따라 병원의 옛 작업장들을 의료용으로 개조한 곳이다. 누구도 그곳에서 일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의사를 뽑고 간호사를 지목해야만 했다. 날이 갈수록 병원은 그곳에 할애하는 예산을 줄였다. 현재 예산은 제로에 가까운 것 같다. 황폐한 상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병동은 병원에서 1980년대 이후로 보수하지 않은 유일한 구역이다. 페인트칠이며 이음새며 니스칠이 모조리 썩어 바스러진다. 탈출을 막기 위해 밖에서만 열리게 되어 있는 문을 밀고 들어서면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각층에서 들려오는 쉰 고함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것이 환자들과의 첫 만남이다.
나는 당직 간호사 유터에게 가서 내 소개를 한 뒤, 베텨가 나를 오늘의 당번으로 정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나에게 안됐다고 말하더니 수레를 가져온 것에 고마워했다. 우리는 그녀의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왜 폐쇄 병동에 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자원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난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헌신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헤아리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을지라도 말이에요.”
함께 병실을 돌면서 나는 그것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폐쇄 병동의 상태는 끔찍하다. 불결한 매트리스가 빽빽이 들어차고 난방장치도 없는 쉰 개의 병실이 벨기에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많은 환자들이 벌거벗었고, 이불조차 없는 환자들도 있다. 병원에서 이불을 주지 않았거나 다른 환자들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해골처럼 앙상하다. 식사는 불규칙한데다 고기는 나온 적이 없다. 많은 환자들이 욕실까지 갈 힘이 없어 자기 몸에서 나온 배설물 웅덩이 속에 처박혀 지낸다. 욕실에 가봤자 더운물은 나오지 않고, 배수관도 모두 막혀 있다. 유터는 마스크와 장화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나를 나무랐다. 그곳에서 간호를 하려면 꼭 필요한 장비라는 것이다.
의사들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유터처럼 영웅적인 간호사 몇 명이 나처럼 운 나쁜 인간의 보조를 받아 환자들을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거나, 형편이 되는 대로 주사를 놓는다. 그조차 떨어지면 치료를 중단하고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사실 폐쇄 병동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이곳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간호사들이 기겁하듯 남자들을 간호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내들이 처해 있는 상태다. 그곳에는 세상의 온갖 질병이 다 있다. 오늘만 해도 열병, 암, 괴저, 대상포진, 간질 환자들을 보았고, 미친 사람들도 수없이 보았다. 삼백 명의 환자 가운데 오십 명은 유디트에게 봉헌을 했다. 회개를 하면 병동에서 나가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곳에 남게 되자 자기 서류가 분실되어 봉헌을 한 사실이 기재되지 않았다고 넘겨짚고 자신들이 행정 착오에 희생되었다고 믿는다. 절망한 그들은 절단된 가랑이 사이를 간호사들에게 보여주며, 자기 일을 행정처에 알려 그곳에서 내보내달라고 애원한다. 그들의 불행한 사례가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봉헌을 하면 구원받으리라 믿고, 온갖 수단을 써서 거세를 한다. 그러다보니 대거 파상풍이 발생하고, 그들의 굳은 음경은 포르말린에 담긴 채 투명한 유리병 속에 수집된다. 유터는 말했다. “저 모든 걸 버려야 하는데 관례적으로 지하실에 보관해왔어. 수백 개나 돼. 엄청난 광경이지.”
내일 나는 그곳에 다시 갈 용기를 낼 수 있을까?
2월 4일. 베텨가 나를 폐쇄 병동에서 일반 병실로 도로 보내주었다. 한숨 돌렸다. 하지만 다시 돌려보내는 데 얼마나 걸릴까?
2월 7일. 내 시종이 또 바뀌었다! 어제저녁 집에 돌아와보니 클레먼스가 아닌 도뤼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 나는 클레먼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딸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나를 잘 도와줘서, 집을 맡겨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좋은 점이 또 있었다. 그는 내게 숨길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걸 보안대에 증명해주었다(그는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시종들이 으레 그러듯 그 역시 보안대에 모든 것을 보고했다). 덕분에 나는 두 번이나 가택수색을 면제받았다.
내가 미적지근하게 대했는데도 도뤼스는 다정한 얼굴이었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고, 올해에 자기 봉헌과 포기를 실행할 계획이다. 유디트와 비르지니가 그를 받아들였다. 그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들을 재운 뒤 나는 그와 함께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호감 가는 얼굴이고 똑똑해 보였다. 내가 사는 아담한 빌라가 그가 지금까지 일해온 자매 숙소와 달라서 기분 전환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유디트가 태어나기 전에는 나 역시 자매 숙소에서 살았다고 했다. 물론 원칙적으로 나는 그런 생활 방식을 지지하고 그 이점을 믿는다. 그런 생활 덕에 얼마나 자주 내가 무심코 하는 좋지 못한 행동을 피할 수 있었던가? 그리고 거기서만큼 다른 여자들, 그러니까 나의 자매들과 맺는 유대를 절실히 느낀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 생활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겠다. 방 다섯 칸짜리 아파트에 네 가족이 함께 살면서 끊임없이 부대끼느라 미칠 것만 같았다. 나와 함께 산 자매들의 이름은 베티, 우커, 야코바였다. 모두가 버릇없는 딸아이를 하나씩 두고 있었고, 저마다 성깔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달라서 집단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베티는 채식주의자여서 우리가 고기 먹는 걸 견디지 못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고기를 좀 얻어 아파트로 가져오면 벌컥 화를 냈고, 우리가 고기 요리 하는 걸 막으려고 했다. 우커는 결벽증이 있었다. 쉬지 않고 모든 걸 닦아대며, 우리가 게으르다고 비난했다. 야코바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성질이 괴팍했다. 차라리 난폭한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남자 같다고 마음 편히 비난이라도 했을 텐데. 하지만 우커와 베티는 착한 여자들이어서, 야코바가 자기들에게 은근히 못된 짓을 하고 끊임없이 비난을 쏟아내며 등뒤에서 욕설을 중얼거려도 잠자코 참았다. 그저 자매 아파트에서 으레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야코바의 딸 마르타는 내내 아팠다. 그 아이는 세상의 온갖 바이러스를 집으로 가져와 내 어린 딸 비르지니에게 옮겼다. 비르지니는 병을 이겨낼 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자기 딸이 고열에 시달릴 때마다 야코바는 내 딸도 곧 아플 거라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자매애란 공유하는 거야, 세균까지도 말이야!” 내가 그녀의 의견에 반박이라도 할라치면 목자의 ‘책’ 뒤로 숨었다. 그녀는 ‘책’을 달달 외우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해 필요한 구절을 암송하곤 했다. 매일 저녁 ‘책’을 두 쪽씩 읽었고, 자기처럼 ‘책’을 읽으라며 우리를 부추겼다. 나와 베티와 우커가 거부하자 우리에게 저급한 페미니스트들이라고, 자기가 꿈꿔온 자매 아파트는 이런 것이 아니라며 보안대에 우리를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 날들이 팔 년간 지속됐다. 유디트가 태어나자 엄마 친구분들이 나에게 단독 빌라를 얻어주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혜를 받았다는 양심의 가책은 들었지만 감수할 만했다.
동네 이웃들도 나와 같은 시기에 비슷한 처지에서 둘째 딸이 태어나자 집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목자님이 통치 10주년 되는 해에 태어난 아기들에게 모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를 바랐기 때문에 우리 동네엔 유디트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넘쳐났다.
2월 8일. 비르지니가 배지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블라우스에 배지를 달지 않고 학교에 갔던 모양이다. 아이는 울었다. 착한 녀석! 아이를 달래며 놀리는 아이가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할머니가 대목자님의 동료였으며, 그 사실이 어떤 배지보다 잉리트와 유디트에게 바치는 헌신을 입증해준다고.
4월 4일. 텔레비전이 다시 작동한다! 행운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저녁에 방영된 다큐멘터리는 내가 이미 열 번이나 본 것이었다. 혁명에 관한 다큐멘터리. 체제를 뒤엎은 혁명 말이다. 쓰지 말아야 할 이야기지만, 우리가 달달 외우고 있는 10월의 사건, 대행진, 잉리트의 연설 영상 말고 다른 걸 보고 싶어하는 건 지나친 바람일까? 중립지대 가까이에서는 외국 방송도 볼 수 있다고들 한다. 물론 그걸 볼 권리는 없지만, 그래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채널도 여러 개라고 한다. 수십 개나 되는 모양이다. 그다지 믿기지는 않는다. 외려 불가능해 보인다. 어쨌든 이곳에 컬러 방송을 볼 수 있는 채널이 두 개라도 있으면 좋겠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꽤나 비싸게 주고 샀는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결국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지난번에도 느꼈던 거지만 1970년의 사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방송에서 다루는 방식이 너무 달라서 충격을 받았다. 해설을 듣다보면 모든 것이 환희였던 것만 같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자연스럽게 억압에서 자유로 미끄러지듯 이행했고, 혁명은 고통 없는 출산이었던 것 같다. 충돌에 대해서도, 약탈에 대해서도, 프리슬란트에서 일어난 내전에 대해서도, 림뷔르흐에서 자행된 학살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베아트릭스 이야기 역시 언급조차 없었다! 내부에서 아주 가깝게 모든 것을 목격한 내 어머니가 들려준 얘기와는 달랐다. 과거에 혁명가였던 어머니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 모든 것에 전혀 다른 빛을 비추었다. 어머니가 자주 들려주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술 취한 민병대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잉리트의 군인들이 헤이그에서 권력을 장악한 뒤 이어진 며칠 동안 네덜란드의 술집이란 술집은 죄다 돌아다니면서, 완전히 취해(모든 의미에서 취했다. 술에 취하고, 권력에 취하고, 앞으로 자신들이 통치할 테니 권한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는 생각에 취했다) 길거리에서 마구 총을 쏘고 사방에 소란을 일으키며 사냥감 쫓듯 남자들을 추격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텔레비전에서도, 다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어쨌든 말해봤자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여자들이 술을 마셨다고? 에이, 여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
5월 11일. 이번 미사는 즐거웠다. 사제는 모두가 조는 강론 대신 우리에게 남자 초상화들을 붙여놓은 벽 앞을 지나가게 했다. 한 사람씩 남자를 골랐다. 그런 다음 신호가 떨어지자 “강간범! 강간범!” 하고 외치며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아가씨들은 신이 나서 열성을 다했다. 우리는 실컷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인 혁명 초기에는 그런 벽이 곳곳에 있었다. 우리는 구체제하에서 권력을 누렸던 남자들의 초상화를 벽에 그려놓고 마구 더럽혔다. 그 벽들이 왜 사라졌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시그리트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지난밤에 가택수색을 당했는데, 보안대가 그녀의 집에서 금서를 여섯 권이나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그 책들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말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자, 측은한 마음이 든 한 보안대원이 그녀에게 이런 사소한 일로 법정에 서는 일은 거의 없으며 벌금과 자기비판으로 끝날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항상 최악의 경우를 내다보는 시그리트는 자신이 잡혀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집에도 의심을 살 만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시종보다 더 교활할지도 모르는 새 시종이 들어왔으니 더더욱 그랬다. (도뤼스는 포기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니 보안대에 잘 보일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주인을 고발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시그리트에게 기운을 북돋워주려고, 나는 베텨와 폐쇄 병동 때문에 내 쪽도 상황이 좋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병동이 아직까지 존재하는지 몰랐지만, 그곳이 있는 게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플 때 병원에서 난폭한 여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을 거 아냐. 그러니 남자들을 우리와 격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리고 대개 환자들은 반쯤 벗은 실내복 차림으로 돌아다니잖아. 그러니 남자들을 가까이 두는 건 위험할 거야.” 그러나 바로 그 사람들을 간호하도록 나를 폐쇄 병동으로 보낸다고 하소연하자 그녀는 할말을 찾지 못했다.
대화는 목자님 즉위 20주년 기념일로 옮겨갔다. 시그리트는 그 날에 관해 몇 가지 비밀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리에주의 아파트에서 같이 살았던 한 자매와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데, 그 자매가 승진해 요즘 정부 부처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매의 말에 따르면 전국에서 공연과 불꽃놀이를 곁들인 성대한 축제가 준비중이었다. 일주일 동안 공휴일이 선포될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시그리트는 기뻐했다. 그러나 나는 축제에 탕진하게 될 수백만 크로네의 비용을 생각했다. 다른 곳에 쓰면 훨씬 좋을 텐데. 어째서 일주일 동안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걸까? 차라리 그 돈으로 일 년 동안 좀더 편안하게 사는 쪽을 택할 수 있을 텐데. 시그리트는 내가 너무 암울한 생각만 한다고 반박했다. 그녀의 말이 옳다. 축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벌써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5월 13일. 다시 시그리트의 집에 들렀다. 차를 준비하는데 응접실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낡아빠진 스피커(초기에 설치된 모델 중 하나였다)가 소름 끼치는 소음을 냈다. 소리를 낮추지 못하도록 볼륨이 최고 수준으로 맞춰져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유디트가 막 새로운 시를 지었으며, 나라 곳곳에서 그 시를 들을 수 있도록 낭송을 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시그리트가 말했다. “목자님이 영감을 얻으셨나봐. 이달 들어 벌써 세번째야.” 유디트가 좋아하는 여배우 티나 베르나울트가 시를 읊었고, 우리는 경건한 자세로 그녀의 낭송을 들었다. 유디트가 최근에 지은 작품들이 모두 그렇듯 꽤나 난해해서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아주 멋진 시였고, 언제나 열광적인 비르지니는 시 낭송이 끝나자 족히 일 분 동안 박수갈채를 보냈다.
기차는 릴을 향해 달렸고, 장미셸 골란스키는 기차 안에 있는 것이 기쁜지 자문했다. 무엇보다 그는 여행을 싫어했고,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했다. 부득이하게 일상을 떠날 땐(8월과 크리스마스 때 아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다) 매일, 거의 매시간 할 일을 미리 체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해서 일정표를 짰다. 그런데 지금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굴드는 벨기에 사람들이 짜둔 프로그램에 대해 일절 밝히지 않고 얼버무렸다. 따라서 이건 모험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여행 동료들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어서 그들과 함께 일주일을 견딜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굴드 외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이를테면 보르도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 그를 좋아하긴 하지만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루종일 그와 가까이 있게 된 것이 걱정스러웠다. 말이 많다는 점이 거슬리는 게 아니라(골란스키는 수다스러운 사람을 고맙게 여겼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면 그는 입을 다물고 있어도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동시에 횡설수설해서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굴드도 끊임없이 거드름을 피우며 이야기하지만 좀 달랐다. 몇 안 되는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한 번만 들으면 충분했다. 그러고 나면 쉴 수 있었다.
역시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레오노르 알베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반면에 젊은 랑글루아는 그의 마음에 들었다. 성실하고 기지가 번득이는 독립적인 청년이었다. 랑글루아는 〈랭스탕〉에 훌륭한 기사를 여러 차례 보내왔고, 그는 그 기사를 실었다. 랑글루아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골란스키는 그저 웃어넘길 뿐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퓌신 로트가 남았다. 그녀는 톡톡 튀는 매혹적인 여자였다. 그는 그녀가 젊고 성가시며 떠들썩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늙은이가 아이 앞에서 느낄 만한 거북함을 느꼈다. 게다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으며, 무엇 하나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성가시게 굴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고 저절로 방어태세를 취하게 되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녀가 없었으면 싶었다.
그럼에도 그는 굴드에게 가겠다고 했다. 그가 기사를 쓰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건 몇 년 만에 있는 일이었다. 이렇듯 벨기에는 칩거 생활을 하는 사람조차 집밖에 나서게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탐방기사가 실릴 〈랭스탕〉을 자극적으로 홍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골란스키는 벌써부터 표지와 제목을 상상했다. 멋진 사진도 곁들이고 싶었는데, 사진작가를 자처하는 굴드가 전문가의 작업을 거부하고 직접 사진을 찍겠다고 나서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결과를 속단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골란스키는 조금 불안했다.) 벌써부터 판매 부수에서 이번 여행의 효과가 느껴졌다. 대중은 〈랭스탕〉 최근 호들을 앞다투어 샀다. 역설적이게도 온통 여행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다른 언론보다 여행에 대해 덜 다루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벨기에와 매출,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이 기차에 타고 있었다. 보르도와 알베르와 로트가 뒤에서 떠들어댔지만 골란스키는 메모에 집중하려 애썼다.
성실한 그는 벨기에에 관한 온갖 자료를 준비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색인 카드로 정리했고(페미니스트당의 안내문, 증언, 역사책, 선전 책자 모두), 서른 편의 영화를 보았으며, 전문가 스무 명과 그가 아는 활동가들을 전부 철저히 인터뷰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해본 결과, 서로 모순되는 관점들이 도출되었다. 그것들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벨기에는 어떤 이들에게 일종의 여성 천국이었다. 여자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경이로운 나라,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사는 부유한 나라, 목자가 그 어머니의 대를 이어 훌륭하게 통치하는 나라였다. 이것이 벨기에가 하는 통상적인 선전이었다. 또 어떤 이들에게 제국은 지옥의 강인 스틱스의 복사판이었다. 여자들은 구속받고 남자들은 박해받는 경찰국가였다. 국민을 먹여 살리기 힘들 만큼 가난한 나라, 병든 관료 체제로 국가를 제멋대로 운영하고, 임의 체포와 테러리즘과 산업재해가 난무하고, 기대수명이 형편없는, 한마디로 말해 중세로 돌아간 나라였다. 여론의 90퍼센트가 이 두 범주에 속했다. 그 중간에 있는 10퍼센트의 분분한 의견은 골란스키가 의견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신중한 기질의 소유자인 그는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점은 그의 직업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지금으로선 그가 확실하게 믿는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제국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가 속한 사회에서는 그러는 것이 정치적 도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르도나 로트 같은 맹렬한 페미니스트들의 태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골란스키는 시험 날 아침처럼 수첩에 코를 박고 자신의 메모를 다시 읽었다. 젊은 기자 시절에 몸에 밴 반사적 행동이었다. 그 시절 그는 온갖 주제를 아우르는 백 가지 질문을 준비하지 않고는 아무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그는 찾아낸 정보—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적어도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일종의 편람을 만들었다. 주요 통치자들의 이름이 적힌 권력 조직도, 지방 경계가 표시된 제국 지도, 그리고 문화 정보도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예술가들, 가장 많이 읽히는 소설가들, 큰 국가 행사 등등. P.F.F.가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프랑스인들은 벨기에 혁명 문학과 예술에 관해 그다지 많이 알지 못했다. (당은 전시회를 개최하고, 매년 ‘여성 출판’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수천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별도의 상을 수여했다. 요컨대 별도의 문화계를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일군의 공식 작가와 예술가들을 먹여 살렸다. 그렇지만 그 세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렸고 대중은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기 위해 골란스키는 빳빳한 종이에 벨기에 혁명의 중요한 날짜들과 사건들을 적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1922년. 잉리트 페르마르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출생.
1955년. 외동딸 유디트 출생. 부친은 신원 미상(광신도들은 그녀가 처녀생식으로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1961년. P.F.E.(유럽 페미니스트당) 창설.
1962년. 베아트릭스 훈 입당. 잉리트와 공동대표.
1965년. 잉리트와 베아트릭스, 네덜란드에 정착.
1967년. 첫번째 쿠데타 시도 실패.
1970년 10월 2일: 헤이그 혁명. 율리아나 여왕과 페트뤼스 더 용 총리가 벨기에로 피신, 그후 스페인으로 도피. 10월 12일: 여성 제국 선포. 잉리트 즉위. 전 세계 여성들이 네덜란드로 운집.
1971년 7월 9일~14일: ‘대행진’. 삼십만 명의 여성이 헤이그에서 브뤼셀로 몰려가 벨기에 왕위를 전복함. 벨기에의 권력이 평화적으로 이양됨. 룩셈부르크 병합. 9월 30일: 베네룩스 3국 전체를 아우르는 여성 제국이 공식적으로 탄생함. 수도는 브뤼셀.
1972~1976년. 수만 명의 남녀 이민자들이 새 국가의 국경으로 몰려듦. 급여에 관한 성차별적 법률이 처음으로 제정됨. 브뤼셀에서 감독하는 유럽 자매당들 탄생.
1973년. 영국과의 협정 위반. 두 나라 간의 긴장 고조. 헤이그 연해에서 영국 순양함 한 척이 침몰됨. 영국 정부의 보복 위협. 유럽이 떠들썩한 소란에 휩쓸림. 영국 정부의 사과문 발표.
1977년. 잉리트와 베아트릭스 결별. 베아트릭스는 지하조직에 들어가 테러를 지휘함. 이후 그녀의 생사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음. 제국은 수많은 사보타주와 암살을 그녀의 소행으로 여김.
1978년. 성차별적 법률이 더욱 강화됨.
1980년. 이성 결혼 금지.
1983년. 제국 주변에 중립지대 설정.
1988년. 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
1992년. 잉리트 사망. 유디트가 권력을 승계함.
1995년. 벨기에가 국제기구를 탈퇴하고 국경을 폐쇄한 뒤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함. 더이상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됨.”
5월 15일. 그레고르를 보고 온 뒤로 이 일기장을 열 때마다 마음이 불안하다. 오늘도 온갖 감정이 뒤섞여 마음이 괴롭고 뒤숭숭하다. 불법행위를 했다는 수치심과 후회, 아들을 가졌다는 혐오감, 보안대가 찾아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어렵게 아이를 만나는 괴로움. 때로는 유모에게서 아이를 되찾아와 다른 남자아이들과 같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모를 쓰는 비용이 비싼데다 위험부담도 너무 크다. 불법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 이러다가도 곧바로 생각을 바꾸고, 그런 생각을 한 걸 자책한다. 더구나 그레고르를 국가에 내놓으면 내게 해명을 요구할 것이다. 아이를 숨긴 것을 질책할 것이고, 난 재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는 아이를 보지 못하겠지. 가장 두려운 일이 그것이다. 아이를 영원히 빼앗기는 것. 지금도 아이를 잘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영영 못 보는 것보다는 낫다. 아이를 만지고 안을 수도 있고, 비록 우성의 성性은 아니지만 나한테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아이에게 느끼게 해줄 수 있으니.
의사가 딸이 아닐 거라고 말한 순간을 나는 종종 떠올린다. 몸이 산산조각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럴 리가 없었다. 규칙대로 수정受精했는데! 선별 과정에서 실수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피펫에서 백에 하나꼴로 착오가 생겨 수컷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법은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출산해서 아이를 다른 사내아이들과 함께 공동 육아소로 보내거나, 아니면 당장 없애야 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틀 뒤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다른 의사가 나를 맞이했다.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의사는 다른 해결책을 제안했다. 물론 불법이었다. 출산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딸을 사산했다고 신고한 다음, 그녀가 잘 아는 시골 유모 집에 아이를 숨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하 세계로 이어지는 불법 경로들을 발견하고, 수천 명의 사내아이가 매년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의사가 말했다. “위험할 건 없어요. 이미 여러 차례 해본 일이에요. (자신이 출생을 도운 다른 여자의 아이들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자기 자식들을 말하는 걸까?) 유모 집에서 매달 만나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결국 나는 출산했고, 아기는 숨겨서 헨트 지역의 렘베커에 있는 한 농가에 보냈다. 그후 나는 두 달에 한 번씩 그곳에 간다. 눈에 띌까봐 더 자주 가지는 못한다. 처음에는 발각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공포에 떨었다. 보안대가 내가 사는 지역을 순찰할 때마다 날 잡으러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잠은 잘 자지 못한다. 요컨대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다른 이유로 불안했을 것이다. 이 나라는 완벽한 여자들을 위한 곳이다. 완벽하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잘못을 저지를까 조마조마하고 법망을 벗어나게 될까 두렵다. (우리가 알기도 전에 법이 자주 바뀌어 법을 어길 위험이 더 크다. 그렇지만 훌륭한 시민이라면 본능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기 때문에 꼭 법을 알아야만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비르지니는 말할 것이다……) 유모는 아들을 숨겨둔 사람이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상류층에도 있는 일이라고 했다. 군인, 보안대원, 각료들도 의뢰한다고. 그녀는 음모자 같은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어떤 인물들인지 내가 입을 열면……” 사실일까? 아니면 흥미를 끌려고 그냥 하는 말일까? 행정기관에는 그런 일이 득이 될 것이다. 남자아이에게 공동 교육을 시키자면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나 자기 아들을 숨기는 여자는 제 주머니를 털어 유모에게 돈을 지불한다. 따라서 국가의 비용이 절감된다. 그래서 눈감아주는 것이다. 원칙대로 보안대가 이따금 유모들 집을 기습하지만 대개는 눈감아준다. 유모는 그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십 년째 이 일로 먹고살고 있어요. 십 년요. 그런데 단 한 번도 조사를 받지 않았어요. 십 년 동안 나를 고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겠어요? 아니죠. 절대 아니에요! 틀림없이 누군가 나를 고발했을 거예요. 보안대도 틀림없이 알고 있어요. 난 이미 오래전에 수용소에 들어가야 했을걸요. 다시 말해 보안대가 신경을 안 쓰거나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지시를 받은 거죠. 그러니까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말이었다. 나는 그 시스템을 이용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매달렸다. 궤변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내게 짐이 되고 있는 그레고르 문제만 빼면, 내가 완전무결한 시민이 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으며 엄격한 혁명 원칙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는 생각 역시 나를 안심시켰다. 이 정도만 해도 스스로에게 꽤 엄격한 것 아닌가? 가능한 한 투철한 혁명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더 그러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그레고르를 보러 갔다. 렘베커에는 늘 기차를 타고 간다. 자동차를 빌리는 건 비용이 너무 비싸다. 게다가 목적지며 이동 시간, 이유 등을 신고서에 기록해야 한다. 그건 내가 사내아이를 숨겨두고 있다는 걸 보안대에 직접 알리는 꼴이나 다름없다! 나는 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나서 헨트까지 기차를 탔고, 거기서 다시 에클로까지 버스를 탔다. 농가까지 남은 5킬로미터는 걸어서 갔다.
시골은 얼마나 가난한지! 풀밭이 텅 비어 있었고 가축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드문드문 채소밭이 보였다. 내 아이를 키우는 유모는 으깬 채소 죽으로 연명했다. 유디트가 연설에서 말하는 현대적인 농가, 엄청난 가축떼, 황금빛 밀밭은 어디에 있는 걸까? 농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여성의 집’을 찾은 강연자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녀는 벌컥 화를 내며 의심을 했다고 나를 비난했다. 내가 시골에 대해 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녀는 나에게 브뤼셀에서 벗어나도록 허락을 받았느냐고 물었고, 보안대에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협박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실제로 보안대에 알리는 바람에, 며칠 뒤 나는 수도를 벗어날 때마다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공문을 받았다.
그레고르는 그다지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척 말랐고 거의 자라지 않았다. 네 살인데도 잘 걷지 못해 계속 넘어진다. 영양 결핍 때문인지 아니면 종종 듣는 말처럼 수컷의 체질이 원래 허약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유모는 그렇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맡고 있는 아이들—지금은 세 명을 맡고 있다—대부분이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수컷의 신체 구조를 고려해볼 때 나이를 막론하고 수컷의 생존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주장한 어느 저명한 의사의 논문이 기억난다.) 어쨌든 그레고르에게 수컷 기질이 없지는 않다. 한번은 정원에 함께 있는데 녀석이 바지를 내리더니 도발적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선 채로 잔디에 오줌을 눴다. 나는 아연실색해서 녀석을 앉히려고 했다. 아이는 처음엔 버티더니 곧 복종했다. 유모가 말했다. “늘 저래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문제는 다른 아이들도 따라 한다는 거예요.”
돌아오는 길에 보안대가 기차를 세우더니 한 시간 동안이나 붙잡아두었다. 보안대원들은 기차에 올라 승객들을 조사하고 수색했다. 베아트릭스와 패거리가 또다시 제일란트에서 테러를 벌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분노한 유디트가 온 나라를 샅샅이 뒤져 범인들을 색출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대원 하나가 나를 오랫동안 심문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거짓말을 했고,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 말을 받아 적었다. 내가 배지를 달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내 신분증도 검사했다.
베아트릭스와 반역자들은 왜 계속 나라에 혼란을 조장하는 걸까? 테러가 일어나면 보안대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걸 모르나? 자기들이야 쉽지! 폭탄을 설치하고 시골로 사라지면 그만이니까. 그렇지만 그 결과를 감수하는 건 우리 몫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그들이 좀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목자님 말이 옳다. 검열과, 검열 때문에 종종 생기는 사고사의 책임은 저들에게 있다. 테러가 없으면 억압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5월 29일.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한 베텨. 두 달 전만 해도 그녀는 나를 싫어해서 틈만 나면 폐쇄 병동으로 보내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보안대 병실로 다시 보내주겠다고 하고, 나를 자기 사무실에 불러 차까지 대접한다! 동료들 말로는 그녀가 나한테 끌리면서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처음엔 나를 미워하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자 나를 유혹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난 웃으면서 아니라고,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항변했다. 어쨌든 베텨는 프리다와 이미 결혼하지 않았는가?
이 일과는 별도로 20주년 행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공식 행사였다. 텔레비전에서 떠들어대고, 스피커에서도 쉴새없이 공지 사항이 흘러나왔다. (달달 외울 정도로 우리를 질리게 만들었다.) 비르지니는 잔뜩 들떴다. 자기 반이 선발되어 집단무용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익혀야 할 동작이 그려진 노트 한 권을 받아왔다. 수준 높은 동작들이었다. 비르지니가 운동을 잘하긴 하지만 그런 동작들을 따라할 수 있을까? 녀석은 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연습이 시작되기만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다. 6월부터 매일 네 시간씩 연습을 할 것이다. 그만큼 수업은 줄어들겠지만, 유디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인데 일 년쯤 허비한들 그게 뭐 그리 문제겠는가?
비르지니가 비용 문제는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의상과 소품이 공짜로 제공되기 때문에 내가 지불할 것은 없단다.
얼마 후. 텔레비전 뉴스에서 유디트가 테르뷔런 궁에 막 개장한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즐거워 보이던지! 그녀는 물을 좋아한다. 그녀의 일생에 관한 영화를 보면, 혁명 몇 년 전 두 살이던 그녀가 잉리트의 손을 잡고 콕세이더의 파도 속으로 달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수영장에 있는 그녀를 보니 마치 내가 수영을 하는 것 같았다.
또다른 소식. 몇 가지 단어가 수정되었다. 바뀐 걸 전부 써두지는 못했지만 이것만큼은 기억한다. ‘노력’은 앞으로 여성형 명사로 바뀌고, ‘몽매蒙昧’는 남성형 명사가 된다는 것. 앞으로 내가 자주 틀려서 딸들이 놀릴 거 같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빨리 익히니 내가 틀릴 때마다 고쳐주면서 재미있어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헷갈리지 않을까? 벌써 얼마나 많은 단어의 성이 바뀌었지? 어쨌거나 웃을 일이 아니다. 조심해야 한다. 작년에 바버르 지역 전체가 감찰을 받았는데, 단어의 성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재교육을 받으러 갔다. 재교육! 이 말은 여성형이지만 나를 두렵게 만든다.
6월 8일. 작은딸 유디트가 아파서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 마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