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중요성을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신앙의 뼈대를 잡아주는 일이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없는 열정은 좋지 못하다”(잠 19:2)라는 말씀과 같이, 신앙은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도움과 지도가 꼭 필요합니다. 신학이 약하거나 잘못되어 있을 때 신앙의 열정은 왜곡되고 낭비되며 최악의 경우 이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열정에서는 어느 민족의 교회에도 뒤지지 않았던 한국 교회가 맞은 위기를 타개할 길을 신학에서 상당 부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조직신학’이라고 하면 많은 그리스도인이 어렵고 지루하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신학생이 아닌 이상, 조직신학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집어 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직신학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쓴 책이 있습니다. 직접 읽어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겠지만, 저자들은 일반 성도들도 이해할 수 있게 재미있는 예화를 들어가면서 친절하게 각 주제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신학에 관심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좋은 신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읽기 쉽다고 해서 내용을 절대 허술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쟁점을 빼놓지 않고 다루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다년간의 가르침으로 숙성된 저자들의 신학적 지혜와 통찰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신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실천을 위한 조언도 주는 목회적 배려도 잊지 않습니다. 주제에 대한 교리적 발전과 함께 역사적으로 중요한 저술가들의 인용문들을 모아놓은 부분이나 추천도서 목록까지 넣은 것도 이 책의 특징인데, 저자들이 얼마나 내용 면에서 충실히 하려고 애썼으며, 또 독자에게 진리를 전달하려는 열망을 가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인용문들, 예를 들어 어떤 교부들의 인용문들의 세부 내용이나 표현까지 역자들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은 조직신학이 어떻게 성경신학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책의 ‘반드시 알아야 할 성경 본문’ 섹션은 핵심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인데,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성경 본문을 잘 선정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 신학적 체계를 세움이 신선한 시도입니다. 신학적 주장이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실증해 주는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여러 저자가 참여하여 완성한 합작품인데, 저술 및 편집한 분들은 모두 달라스신학대학원의 신학부 교수입니다. 우리 두 역자가 공부한 이 신학대학원의 교수님들은 학문적으로 탁월하시며 신앙심에서도 본보기가 되는 훌륭한 스승입니다. 우리가 강의실과 세미나실에서 여러 교수님 그리고 동료 학생과 함께 배우고 토론한 내용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매우 기뻤고, 이제 그것을 한국 교회와 신학생 그리고 성도님 여러분에게 소개할 수 있어 너무도 감사합니다.
어떤 분은 한 신학대학원의 교수님들이 공저한 책이라 특정한 신학적 평향성이 있을까 우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그 학교의 젊은 차세대 교수님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정통적인 내용으로 책을 구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본서가 신학생은 물론이고, 목사님과 열심 있는 평신도가 함께 공부하는 조직신학 입문서로 널리 사용되길 바랍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 곽철호ㆍ최정기 교수
이 책은 Preaching Today의 2016 Book Awards에서 Editor's Choice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자는 미국 달라스신학대학원의 Senior Research Professor of Preaching and Pastoral Ministries으로 봉직하면서 동시에 피부과 전문의를 겸하는 대단한 인재입니다.
쿠루빌라 박사는 본서 외에도 자신의 철학박사 학위 논문을 개정해 출판한 Text to Praxis: Hermeneutics and Homiletics in Dialogue (T.&T. Clark: 2009)와 Privilege the Text!: A Theological Hermeneutics for Preaching (Moody, 2013), Theological Commentary for Preachers 시리즈 여러 권(<창세기>, <사사기>, <마가복음>, <에베소서> 등)을 저술했습니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성서적 설교(Biblical Preaching)를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그 정의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요소에 따라 아홉 장에 걸쳐 본론을 펼쳐 나갑니다. 한 장 한 장의 내용이 다 체계적이고 속이 꽉 찬 알맹입니다.
저자는 설교의 단위 본문을 문단(pericope)로 부르고, 그 '문단' 고유의 '신학'(pericopal theology)을 추출하고 요지(thrust)로 정리해 청중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적용(application)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문단의 신학'은 단지 문법-어휘-구문론-배경 연구 등의 기존 석의 방법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법들도 소중하게 사용하지만, 더 나아가) 언어학의 화용론(pragmatics)을 활용해 본문이 말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저자가 본문을 통해 수행하는(doing) 효과도 분별하여 문단의 신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신선하게 주장합니다.
게다가, 과거의 전통적인 논리 위주의 설교, 즉 주장과 대지 위주의 설교만이 아니라(서신서에는 이런 유형의 설교가 적절할 때가 많지만), 이야기체(Narrative)의 수사와 서사 효과를 반영한 설교가 때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저자는 본문 뒤의 세계(역사비평적, 배경적, 정보적)만이 아니라, 본문 앞의 세계(본문이 그 앞에 투사하는 이상적 세계로서, 교훈과 우선순위와 실천이 야기되는 세계), 즉 본문이 투사하는 이상적 세계의 감동과 꿈과 실천을 설교자가 청중의 마음에 심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저자는 설교자가 양 떼와 가까운 관계를 통해 효과적인 적용과 설교가 가능하다는 것, 설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를 위한 것이라는 것,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 설교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설교자의 영성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 등을 영감 있게 그러면서도 체계적으로 전합니다.
설교에 관한 책이 많지만, 본서는 단지 개념적이거나 방법적인 정의가 아니라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설교의 '비전'을 그려줍니다. 그것도, 화용론이나 해석학의 최신 연구 결과를 활용해서 말입니다. 또한 매 장 끝에 '숙고하기(Reflection)' 부분을 두어 각 장의 내용을 마가복음의 여러 본문에 실제로 적용한 예를 제시합니다. 이것 또한 본서의 장점이며, 독자는 이 실습으로 실제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설교자에게 본서를 권하고 싶습니다. 본서를 펼칠 때마다 설교자의 사명과 본분, 설교자의 비전과 큰 그림, 설교자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본질과 원리를 다시 도전받으며 동시에 신선한 영감을 얻으시길 기대합니다. 그에 더해, 다양한 본문을 설교하는 데 필요한 실제적 노우하우의 새로운 통찰력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는 말씀을 주시고 또한 그 말씀을 귀한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중책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본서를 사용하셔서 많은 설교자에게 용기와 꿈과 실제적인 도움을 허락하시길,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요한계시록은 중요한 책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구속 역사의 완성이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관한 궁극적 비전을 제시하는 책이자, 종말에 대해 가장 철저한 계시를 주는 책이며, 성서를 완결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록 자체가 말씀하는 바처럼,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켜야” 할 것(계 1:3)이며, 모든 성도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또한 어렵게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래서 칼뱅 같은 신학적 거장도 계시록 주석만은 쓰지 못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요한계시록에 관한 그릇된 가르침에 현혹되기도 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요한계시록에 관한 신뢰성 있는 주석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세계적인 학자들이 쓴 계시록 주석은 빨리 많이 번역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 교회가 계시록을 더 열심히 연구해 설교하고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주석은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저술됐습니다. 계시록과 종말론의 세 가지 해석 틀은 전천년주의,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 등이지만, 요즘의 계시록 주석들을 보면 후천년주의적 주석은 거의 사라지고 있어서, 이제는 무천년주의적, 역사적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적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자들이 아닌 저명한 성경신학자들이 쓴 계시록 주석은 전에는 전천년주의적 주석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빌(Beale)의 NIGTC주석이 나온 후에는 무천년주의 입장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성서신학자들이 쓴 계시록 주석들은 아직도 전천년적 입장이 더 많습니다. 물론, 한국에는 무천년적 입장으로 쓴 주석들이 더 많지만요.
계시록 주석을 여러 다른 구분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곧, 과거주의적, 역사주의적, 미래주의적 등으로 나눌 수도 있고, 여기에 이상주의적과 문자주의적으로 나눌 수 있어서, 이 모든 범주를 혼합하면 계시록 주석의 분류는 더 복잡합니다. (더 세분해서 구분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 과거주의적-이상주의적-무천년적 계시록 주석, 상징주의적-역사적 전천년적 주석, 미래주의적-세대주의-전천년적 주석 등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점진적 세대주의 입장(최근 제3세대 세대주의)에서는 예언적 본문을 많은 경우 다중적 의미로 해석하고 상징주의적-이상주의적 해석도 상당 부분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과거주의적과 미래주의적으로 구분이 무색해집니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의 경우, 적그리스도가 과거에도 출현했고(요일 4:3) 역사상 계속 있었으며, 미래에 본격적으로 출현할 것이라는 다중 의미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게 과거주의냐, 역사주의냐, 미래주의냐하는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점진적 세대주의에서는 문자적 해석이라고 해서 비유나 상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장르별 특성과 문맥에 따라 비유나 상징을 정당하게 해석하려 하므로 과거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과는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666이라는 표를 문자적으로 보지 않으며, 그것을 (예를 들어) 컴퓨터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이런 학문적 정통 세대주의에서는 날짜를 정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 종말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요즘의 계시록 학자들은 계시록의 해석 틀에 관해서도 더 다양하고 자세히 분류합니다. 그렇지만, 점진적 세대주의의 예로 보아 짐작할 수 있지만, 최근의 각 입장의 많은 부분이 (배타적이지 않고) 겹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이슈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록 해석을 무천년적, 역사적 전천년적, 세대주의 전천년적 등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무난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유념할 것은 계시록 20장 해석, 곧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만 뚜렷한 대비가 될 뿐, 다른 본문 해석은 최근의 입장들 사이에 차이성 보다는 유사성 또는 조화성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 중에서도 NICNT 로마서 주석을 쓴 더글라스 무의 경우에는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심/구원을 믿는 입장이고(롬 11:26, 29), 환란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믿는 세대주의자들도 (소수지만) 있으므로, 두 입장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곧, 민족적 규모로 회심할 이스라엘의 종말적 역할을 인정한다면,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든 안 하든 또는 중간에 휴거되든, 두 입장이 근사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대환란(의 전반부)을 통과하든 안 하든, 분명한 것은 그 이전에도 역사가 진행될수록 교회는 점점 더 커지는 환난에 직면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문적 정통적 해석이라면, 계시록 해석 틀이 조금 달라도, 위험한 해석은 나오기 어렵고, 해석과 의미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에 차이만 있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계시록을 연구할 때, 어떤 한 해석적 입장을 유지하더라도, 개개 본문을 해석할 때는 여러 가지 해석적 선택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지혜로울 수도 있습니다.
계시록은 언뜻 보기에 어려운 책이고 또 해석의 틀도 다양하지만, 본서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입장에서 실력 있는 저명한 학자가 저술한 계시록 주석이므로 참고할 가치가 매우 큽니다. 즉, 본서는 요한계시록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로버트 마운스 박사가 자신이 쓴 NICNT의 계시록 주석을 핵심적으로 요약하여 목회자와 평신도 연구자가 읽고 활용할 수 있게 한 책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전천년설 입장의 계시록 주석은 정암 박윤선 박사의 책만이 생각날 정도로 전천년설 계시록 주석이 부족한데, 본서는 역사적 전천년설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계시록 주석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구약이라는 무대의 주된 등장인물과 신약의 카운터파트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과도 연관되는 포괄적인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주제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 왔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성경 해석과 신학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주제를 위해서 다섯 명의 학자가 모여 네 가지 입장을 대변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주장에 비평적 논평을 가하고 있습니다. 전통적 언약신학 입장을 대변하는 로버트 L. 레이몬드는 강한 어조로 전통적 언약신학에 입각한 자신의 논지를 주장합니다. 전통적 세대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로버트 L. 토마스는 문자적 해석과 한 본문의 단일 의미라는 해석 전통에 충실한 학자의 꼼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점진적 세대주의 견해를 대변하는 로버트 L. 소시는 가장 차분하고 논리적인 논지 전개를 통해 가장 최근의 세대주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무려 세 명의 학자가 로버트라는 이름과 L. 이라는 중간 첫 글자를 공통으로 쓰고 있음이 놀랍지 않습니까!) 점진적 언약신학 입장을 대변하는 채드 브랜드와 톰 프랫 2세는 점진적 언약주의라는 새로운 입장을 소개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입장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인 조지 래드의 입장과 상당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점진적’이라는 명칭이 붙은 소시, 그리고 브랜드와 프랫의 견해가 (다른 견해들과 비교해서) 서로 좀 더 가깝고 좀 더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대화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에는 모슬렘들이 세계 각지, 특히 한국에까지 많이 진출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의 나라가 기적처럼 중동의 성지에 건국된 형국입니다. 오래 역사에서, 많은 환난과 시련 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기적처럼 생존해 왔습니다. 앞으로 이 유대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지, 과연 우리는 세계 선교의 사명 가운데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섭리적 일을 이루실 것인지, 과연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이 모든 답이 본서에 대한 독서와 성서 연구로부터 독자 모두에게 얻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는 휴거, 대환란, 천년왕국, 의와 구원,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성격과 역할 등 신학에 중요한 많은 주제 영역들을 고찰하게 합니다.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의 해석과 전파에 열정을 가진 모든 거듭난 분이 본서를 펴서 읽고 성경을 펴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같은 견해를 갖지 않겠지만, 각자 이 중요한 이슈에 대해 자신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본서가 추가적인 연구와 학문적 토론의 촉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무쪼록 본서를 읽는 모든 분이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만이 아니라 종말론, 구원론, 교회론, 하나님의 나라 등 여러 영역에서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눈이 좀 더 깊어지고 넓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온전히 전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좀 더 귀하게 쓰임 받길 소망합니다.
2016년 10월
종말론에는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이신칭의의 구원,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동의하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종말론에서는 좀처럼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년왕국이 이미 이뤄졌다고 보는 ‘무천년설’과 미래에 온다고 믿는 ‘전천년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력이 많이 쇠퇴했지만, 세상이 점점 더 기독교화되어 천 년의 황금 시기가 이루어진다는 ‘후천년설’도 진보와 낙관의 시대에는 유행했었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나 이레나이우스 같은 2세기의 교부들은 당시 교회가 전천년설을 신봉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다음,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아래 무천년설이 중세 시대를 지배했고, 종교 개혁자들도 가톨릭의 종말론만큼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따금 피오레의 요아킴이나 종교 개혁기의 일부 재침례교도가 종말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켜 전천년설이 재등장하는 계기를 주었지만, 무천년설의 주도권을 뒤집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천년설은 영국의 형제 모임 지도자였던 존 넬슨 다비가 체계적으로 제시한 세대주의로 인해 다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역사적 전천년설과 다르게 이스라엘과 교회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전자에게 예언된 모든 약속이 실현되는 때로서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제시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된 다니엘의 70이레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69번째 이레에서 일시 중단이 있었다가 계시록에 기록된 7년 대환란기에 마지막 한 이레가 이어진다고 봅니다. 전통적 세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으로 시작된 교회 시대는 그 중간에 들어가는 일종의 삽입 기간으로 하나님의 경륜에서 비밀에 속한 시기로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하나님의 한 백성을 이룹니다(물론 최근의 3세대 세대주의인 점진적 세대주의 입장에서는 교회 시대를 삽입 또는 괄호로 보지 않습니다만). 이 시대에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은혜로 구원을 베푸셔서 새 언약의 약속대로 성령을 선물로 주시므로, 이 시대는 은혜 시대 또는 성령 시대라고 불립니다. 로버트 건드리(The Church and the Tribulation) 같이 환란 후 휴거설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전통적 세대주의자의 의견에 따르면, 교회는 7년 대환란의 시작 전에 휴거되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며, 이후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 강림하여 천년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다스립니다. (이상은 전통적 세대주의의 입장이지만, 1세대부터 3세대까지의 세대주의 발전과 변화에 관해서는, <점진적 세대주의: 하나님 나라와 언약> [서울: CLC, 2005]의 1장이 많은 도표와 함께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세대주의는 20세기 초 <스코필드 주석 성경>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역사가 짧다는 점 때문에 의심과 비판을 받아 온 면이 있습니다. 본서의 원제목은 <다비 이전의 세대주의>인데, 저자는 오늘날 세대주의로 알려진 미래주의적 전천년설의 흐름이 다비 이전부터, 곧 청교도 시대부터 있었다고 자세히 보여줍니다. 저자는 17~18세기 청교도들을 위시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쓴 영국과 미국의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세대주의의 특징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회복, 환란 전 휴거설, 그리고 미래적 천년왕국 등의 주장을 확인합니다.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인데, 청교도들은 충실한 개혁 신학의 계승자로서 무천년설을 계승하거나 후천년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전천년주의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일부는 오늘날 세대주의로 알려진 신학적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미국 기독교계와 복음주의 학계에서는 세대주의가 상당히 큰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계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마치 이단처럼 취급받기도 하는 실정입니다. 세대주의를 올바르게 이해시켜 줄 책이 필요한 이 시점에서 이 책이 그런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데 이바지할 거라 기대합니다.
세대주의가 한국에서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거나 이단적인(?) 면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 현상은 일부 과격하고 극단적인 그룹들이 세대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최근의 학문적 정통 세대주의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있습니다. 최근 언약신학에서도 ‘점진적 언약신학’ 입장의 책들이 나오는 만큼, 세대신학과 언약신학 양쪽의 발전과 최근 경향을 우리 모두가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성서에 대한 좀 더 성숙한 해석과 신학의 발전을 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서는 청교도 시대의 미래주의적 전천년주의, 역사적 전천년주의, 언약신학적 무천년주의 등 다양한 견해들을 잘 제시해 주고 있어서, 말 그대로 청교도 시대의 종말론 연구에 소중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구미와 한국에서 이 분야의 저술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도 청교도 신학에 관한 많은 책이 출판되어 있지만, 그 시대의 종말론에 관해서는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의 「7부: 종말론」 부분 외에는 그 분야 자료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영어로 발간된 대표적인 책으로는 Puritans, the Millennium and the Future of Israel(Peter Toon 편집)과 The Puritan Millennium(Crawford Gribben 저) 등이 있지만, 17~18세기 영미 문헌들을 직접 연구한 역사학자가 저술한 이 책은 원전을 아주 많이 인용하고, 장기간에 걸친 청교도 시대의 종말론을 포괄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 고유한 신학적 기여를 합니다.
원전의 인용문들을 직접 읽다 보면 흥미롭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창의적인 생각에는 흥미와 놀라움을 느끼겠지만, 천년왕국이나 휴거의 연대를 정하는 예들을 접하면 당황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현재의 정통 세대주의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연대/날짜를 정하지 않지만, 청교도 시대를 들여다보면 잘 알려진 청교도들이나 주류 학자들도 연대 설정을 하는 사례들을 꽤 접합니다. 또 그 당시의 사람들이 당대와 가까운 장래의 사건들을 성경의 예언들과 연결하는 적지 않은 사례들도 접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당대/미래의 사건들을 예언의 구체적 성취로 보려는 성향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본서를 끝까지 흥미와 학구열을 가지고 읽어 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본서가 균형 잡히고 성숙한 종말론을 위한 토론과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