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이 지리산과 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난 이후 우리나라가 문명의 극에 이르렀다고 언급하였다. 남명은 만년에 지리산 아래 진주 덕산으로 들어가 조용히 지내면서 학문을 더욱 온축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전국에 명성이 더 알려져 이후 10여 년 동안 제자들이 줄을 이어 문하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목릉성세(穆陵城勢)로 알려진 선조 임금 시대에 덕계 오건, 약포 정탁, 수우당 최영경, 내암 정인홍, 각재 하항,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부사 성여신, 망우당 곽재우 등 쟁쟁한 인물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와, 한편으로는 정계에서 한편으로는 학계에서 남명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나라 안에 크게 떨쳤으며,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그의 문인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문인과 재전 문인들이 총궐기하여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킴으로 인해 결국은 왜적이 물러가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선조 임금이 ‘산천초목(山川草木)도 그대의 이름을 알고 있다’던 그 정인홍은 선조에 이어 광해군의 예우를 극진히 입었으나 인조에 의해 일어난 계해정변(癸亥政變)으로 인해 적신(賊臣)으로 몰린 뒤 300여 년 동안 신원(伸冤)이 되지 못함으로 인해 남명학파는 정치적·학문적으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100여 년 뒤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에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 인물들이 참여함으로 인해 지역적으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지명당 하세응 같은 이가 학문적으로 중심을 잡고 남명의 학문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왔기에 남명학파가 진주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까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그 명맥을 굳건하게 이어올 수 있었다.
이번에 진주문화연구소에서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기획시리즈의 하나로 본 주제를 선정하여 필자에게 의뢰함으로 해서 이러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정신을 수양하는 자세와 의리에 입각한 처세 태도, 현실을 바탕으로 합리와 실질을 추구하는 남명의 학문 정신이 진주는 물론 경상남도, 나아가 우리나라 전역에까지 광범위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알려진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한층 고양될 것임은 물론 정치나 경제의 측면에서도 세계 제일의 경지에 이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진주문화연구소의 김중섭 소장과 편집위원 김준형 명예교수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독자 여러분의 진심 어린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2022년 8월 27일 문산 연묵서사(淵黙書舍)에서
이상필은 두 손을 모은다. -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