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들은 삶에서 가장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건너온 것들이다.
발목에 척척 감기는 무겁고 습한, 기분 나쁜 강물을 건너온 것만 같다.
반쯤 미쳐 있었으나 미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강물을 다 건너지는 못했고, 그 물을 다 마시지도 못했다.
피곤하다.
살아가면서 미치기는 쉽지 않다.
미쳐가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대개는 그 과정에서 죽음을 택할 테니까.
그러니 글에서라도 한 번쯤 미쳐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디포의 어둡고 음울하고 쓸모없는 서사를
어떻게 읽어내고 가져갈지는
오로지 당신 몫이다.
아름답고 음란한 책
이 책은 아름답고 음란한 책이다.
아름다움이 음란함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힘든 건, 설명이라는 행위 자체가 근본적으로 아름다움과 함께 그 자신이 분리되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음란함은 서로 나뉘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려드는 순간, 그 설명이 결국에는 아름다움과 음란함을 서로 분리시키고 만다. 더 이상 아름답지도 음란하지도 않은 단어의 조각들에서, 우리는 설명만으로 결코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 있음을 알아보고 이해하게 된다. 설명의 미덕은 단지 그것뿐이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고, 음란함 역시 그것이 음란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자들과 문장들이 그 자체의 빛을 가지고 있듯이. ……나는 그 빛을 어둡다고 말한 적이 있다. 빛과 어둠 또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단어들은 반대말을 가지지 않는다.
언제나 스스로 어두운 빛을 뿜어낸다.
스스로 아름다운 시가 있는 반면, 소설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하고 분리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면에서 시는 소설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소설 역시 시와 다르게 아름답다. 그 이유는 아름다움을 소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악마적인 속성과의 싸움이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설이 더 이상 소설 자신을 문제 삼지 않을 때 아름다움은 소설에서 분리되고 만다. 음란함에 대해서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책은 많지만, 아름답고 음란한 책은 흔치 않다. 왜 그럴까? 관능이 건드리지 않는 것을 음란이 건드리기 때문이다. 바로 윤리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책은 아름답고 음란하며 동시에 윤리적인 책이다. 이 책이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는지 끝없이 회의하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낸다면, 어느새 당신의 가슴 한 구석에 한 권의 검은 책이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리라. 어떤 경우든 회의하는 자만이 윤리적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자는 회의하지 않는다. 당신은 윤리적이고 나는 회의하지 않는다.
이 책을 거리낌 없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만지작거리던 시간이 더 길다.
나는 계속 바라봤다.
나는 계속 바라본다.
2011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