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서양사학계, 특히 독일사학계는 독일권의 통합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3월 혁명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향에서 확인되는 것은 3월 혁명이 독일 근대사 서술에서 서너 쪽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내 독일사학계에서 간단히 취급되는 3월 혁명은 19세기 독일 및 유럽 근대사에서 적지 않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독일의 통합 과정을 객관적이고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3월 혁명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3월 혁명 기간 중 제시된 일련의 정치개혁과 독일의 통합 방안이 독일권의 실세였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이들 양국 역시 개혁 및 통합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 그것의 실현에 필요한 여러 정책도 본격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3월 혁명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자료들과 최근에 구매한 전문서들을 토대로 이 혁명을 다룬 단행본의 집필도 계획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필자는 그동안 등한시된 3월 혁명과 이 혁명 이후 구축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양강 구도 및 거기서 파생된 양국 간의 전쟁과 그것에 따른 독일 통합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본서에서는 우선 메테르니히 체제가 정립된 이후 시작된 독일의 통합운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1848년 메테르니히 체제가 붕괴한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여러 국가에서 진행된 혁명적 상황을 거론하도록 한다. 아울러 1848년 5월 18일 개원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도 언급하도록 한다. 끝으로 3월 혁명이 실패하게 된 제 이유에 관해서도 확인하도록 한다. - 책머리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부터 1780년까지?첫 25년은 단독으로, 나머지 15년은 장남인 요제프 2세와 함께?40년 동안 오스트리아 왕국을 통치했다. 여자였기 때문에 선제후(Kurf?rst)들에 의해 선출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수 없었지만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의 수장으로서 유럽에서 황제와 대등한 역할을 수행했고 또한 그것에 걸맞은 대우도 받았다. 4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강한 결단력과 여성성을 겸비하고 위정자로서의 의무 수행 및 성실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까지도 오스트리아인들로부터 국모로 추앙받고 있다.
이렇게 마리아 테레지아 및 그녀가 통치한 오스트리아가 유럽 근대사에서 적지 않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특정 국가, 즉 프로이센과 그것을 토대로 등장한 독일제국 연구에 치중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연구 성향에 따라 프로이센의 국가적 위상을 크게 증대시킨 프리드리히 2세와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비스마르크(Otto v. Bismarck)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독일권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프로이센의 역사와 더불어 당시 독일권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의 역사도 동시에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 국가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그 국가와 연계된 주변 국가들의 역사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필자 역시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 그동안 등한시되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왕국에 대한 연구 역시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우선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한 국사조칙의 제정 원인과 그 진행 과정을 다루도록 한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 및 성장 과정, 프란츠 슈테판과의 결혼, 그리고 자녀들의 양육, 특히 장남인 요제프의 양육 및 결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과 그것에 따라 발생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63)의 진행 과정 및 결과를 취급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 전쟁이 진행되는 기간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제 개혁정책, 즉 절대왕정 구축을 위해 시행된 정책들도 언급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가 갑자기 서거한 후 본격화된 요제프 2세와의 갈등과 말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펼친 제 활동을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