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志士와 범부凡夫 모두에게 만사輓詞를 바칠 수 있는 작품!
이 소설에서는 《관부연락선》에서와 같이 짧은 표면적 시간대 뒤로 근대사의 흐름을 방불 하는 장구한 시간적?공간적 부피가 내포적으로 매설되어 있다. 작가가 정람을 소설의 표면으로 밀어 올리는 방식도 순차적이고 점층적인 수순을 밟아간다. 정람과 러시아 혁명의 주인공 레닌, 정람과 폴란드 태생의 소녀 에스토라야 이야기도 그 점층법의 단계에 걸쳐져 있다. 이러한 장쾌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성, 거기에다 호활하고 유려한 문장 스타일은 한국 문학에서 이병주 소설이 아니면 목도하기 힘든 형국이다.
그런가 하면 동서고금을 누비는 박람강기와 박학다식이 놀라운 수준이다.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동물에 이르러서 현란하게 펼쳐놓은 백과사전적 지식들은, 그 자신의 말대로 어쩌면 작가로서의 ‘재능의 낭비’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보다 규준을 따른 소설 학습의 일정을 거치고, 최대 다산多産 작가로서의 창작 관행을 밀도 있게 관리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야말로 그가 일찍이 목표로 했던 ‘한국의 발자크’를 더욱 실감 있게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를 넘어서>라는 제호를 선택한 것은, 문학의 범주와 그 탐색의 내용을 두고 볼 때 문학이야말로 여러 문화적 현상 또는 삶의 형상들이 서로 맞부딪치는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분명히 그렇다. 문학에는 국경도 없고 주제와 장르의 구분도 무화될 수 있으며 시대 및 사회사의 차별도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도 내포적 차원에 있어서 문학적 원인 행위 또는 구성 분자의 각기 다른 입지점과 의미망은 확실한 구분의 선을 긋고 있기도 하다. ... 그 유형 무형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 선 양자의 정체성과 관계성에 대한 천착은, 곧 디아스포라 문학 연구의 근본적 소임이다.
한 작가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걸고 내놓은 작품의 가장 밑바탕에 잠복해 있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의 명리나 이해타산으로 좌우할 수 없는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그 무엇, 작가를 작가이게 하는 추동력을 발양하는 그 무엇을 우리는 '예술혼'이라 호명할 수 있겠다.
현대문학 1백년에 이른 우리 작가들, 개화 세대의 교사였던 이광수에서부터 동시대의 이야기꾼 천운영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의 대표 작가들은, 모두 이 예술혼을 끌어안고 혹은 불사르며 작품을 썼다. 그로 인한 창작열의 치열함과 표현 방식의 정치함이 집적되어 한국문학사를 이룬 형국이고 보면, 작가의 가슴 속에서 발아한 예술혼이야말로 유목 생활에서 농경 정착 생활로의 변화가 가능하게 한, 그리고 인류 문명 세계의 모태가 된 '볍씨'의 지위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의 풍미와 문장의 여려(麗麗)가 빼어난 두 단편 「박사상회」와 「빈영출」은 이병주의 작품세계를 넘어 우리 문학사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작이다. 소설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불문율에 속하는 사실이지만, 그 오락성이 위주가 되면 고급한 문학적 수준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세속 저잣거리의 맛깔나는 이야기를 통해 흥성한 재미와 통렬한 세태 풍자, 수준 있는 해학과 진중한 교훈성을 함께 걷어 들인 것이 이 두 소설이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좋은 비평이란 정연한 논리와 수발한 문장에 기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닌가. 작가의 내부로 되짚어 들어가 보려는, 곧 작가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좋은 비평이란 당초에 어려울 것이 아닌가. 정말 좋은 비평은, 그 비평이 없었더라면 잘 알 수 없는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30년 비평적 글쓰기 끝에 요즈음 내 의식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논점에 따라 우리 문학의 현장을 여러 시각으로 살펴본 결과에 해당한다.
이병주의 「쥘부채」는 작가의 전체적인 작품세계를 압축해 놓은 하나의 매뉴얼과도 같다. 1969년 《세대》에 발표되었으니, 늦깎이 작가의 초년병 시절이다. 단편으로서는 약간 길고 중편으로서는 좀 짧은 분량 속에, 그의 소설이 가진 문학적 성격들이 모두 요약되어 있는 형국이다. 체험의 역사성, 이야기의 재미, 박학다식과 박람강기, 지역적 특성 등이 저마다의 빛깔로 웅크리고 잠복해 있는 가운데로 시대사의 질곡에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두 젊은이의 사랑과 그 원념이 화살처럼 꿰뚫고 지나간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첫 디카시집 「어떤 실루엣」(2019)에 이어
두 번째로 「눈꽃나무」(2021)를 펴낸 이래,
첫 시집을 개정·증보하여 「징검다리」를 다시 묶는다.
새로 쓴 시로 12편을 교체하고 「해설」을 덧붙였다.
결국은 세 시집 모두 50편의 작품을 담게 되었다.
이 가슴 설레는 생활문학의 매혹으로 참 많이 행복하다.
얼굴을 아는, 또 모르는 분들과 함께 이를 나누고 싶다.
‘징검다리’라는 제목은 그래서 선택한 것이다.
고전문학 이래, 그리고 한국 현대문학 비평 100년을 살펴본다는 것은 문학비평 자체에 대한 고찰이라기보다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집적된 한국인의 내면과 사상을 고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비평문학은 문학에 담겨진바 인간의 삶이 보여주는 다양한 측면뿐만 아니라 격동의 역사 속에서 문학이 걸어온 길을 추체험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진정 문학을 통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 준다는 점에서 깊은 의의가 있다.
한국문학을 논의하는 마당에서 ‘글로벌시대’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개념을 견인한다. 글로벌시대의 어의(語義)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동시대 문학에 적용되는 시간 및 공간의 범주 구획은 점차 약화되거나 무화되어가고 있다. 8만 리 태평양을 건너 원고를 보내는 데 1초를 넘기지 않고, 어떤 궁벽한 오지에 있다 할지라도 작품만 좋으면 문단 본류와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해외에서 한글로 창작이 이루어지는 여러 지역의 디아스포라 문학 또한, 문제없이 이 글로벌시대의 호활한 날개에 탑승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남북한문학과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통합적 연구가 도저한 물결을 이루는 시발점이자, 하나의 뜻있는 시금석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안고 있다. 그 길은 멀고 험하지만, 마침내 우리 한민족 문학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가야만 하는 도정(道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