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온 아침, 저는 용늪에 있었습니다. 산 아랫마을 끝의 마지막 집 앞에서 용늪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을 달려 올라갔어요. 온 산의 초록은 습기를 잔뜩 머금었고 늪의 골풀은 안개 속에 어우러져 천천히 일렁였어요. 아름다웠어요. 심장이 찌릿할 정도였다니까요. 그래서 완이랑 다시 오기로 결심했어요.
덤벙이 완이는 실수도 핑계도 많은 어린이입니다. 나는 꽤나 젠체하는 어른이고요. 그래서 완이랑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찌그럭 째그락 자주 다투었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어른들은 아이들과 자주 다툰답니다.) 너무 시끄럽게 툭탁거려서 바위틈으로 지켜본 산양이 코웃음을 치고 너굴 부인에게 야단도 맞았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찬란한 햇빛은 숲속 나무 사이로 깃들고 선선한 바람에 벼 향기가 밀려들던 가을 여행. 마음이 한가로워지면서 찌푸렸던 눈살이 비로소 동그란 웃음으로 바뀌었어요. 우리는 은하수를 보면서 따끈한 차를 서로에게 권하고, 짙은 안개 속에서는 손을 꼭 잡았습니다.
강원도의 산과 바다는 우리를 끌어당겨 커다란 품에 안아 주었어요. 하늘과 바다와 별과 바람을 느끼게 해 주었지요. 그제야 내 옆의 사람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완이가 재미있었다고 말해 주어서 다행이에요. “왜 힘들게 이런 여행을 해요. 나는 호텔 아니면 못 자요.” 하고 짜증 낼까 봐 조마조마했거든요.
무더위가 물러가니 가을 숲이 다시 그리워집니다. 여러분도 책장을 덮고 여행 계획을 세워 보면 어떨까요. 곧 여행하기 좋은 가을이 올 거예요.
-2021년 가을을 맞이하며
코끝이 알싸하게 바람이 불던 어느 날, 골목길에서 수와 만났을 때 수는 한겨울 눈사람 같았어요. 꽁꽁 다져진 마음은 차갑게 얼어서 누가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았어요.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모자를 쓰고 수와 함께 따뜻한 남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남쪽 끝 땅에는 이미 봄날일 테니까요.
우리는 초록이 번진 남도의 벌판에 서서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어요. 향긋한 흙 내음에 마음이 벙싯해지면서 봄의 들녘을 있는 힘껏 달렸답니다.
숨이 턱에 차오를 만큼 날듯이 달리면 화가 나는 마음, 억울한 일들이 조금은 희미해지고 마음 가득 해님의 온기가 차올랐어요.
그해, 남도의 봄 길에서 크게 소리치고 마음껏 웃으며, 수의 키는 훌쩍 크고 마음은 씩씩하게 자라났어요. 덕분에 도마뱀도 새들도 나도 모두 행복했답니다.
오늘처럼 하얀 햇빛이 하늘에 가득한 겨울 끝 어느 날이 되면 내 마음은 문득 설레어요. 다시 여러분을 만나 “안녕.”하고 인사하며 남도의 봄 길을 여행하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어떤 모습인지 잘 몰랐어요. 어른이 되어 나은이를 만났을 때 어린 내 모습이 보였답니다. 매일 같은 일상을 빙빙도는 나은이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시켜 주고 싶었어요. 활짝 웃게 해주고 싶었답니다. 두 손을 따스하게 감싸 쥐며 “너를 좋아한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나는 제주도를 아주 좋아해요. 처음 제주 여행을 갔을 때 새벽에 잠에서 깨어 창을 내다보았어요. 아직 깜깜한 어둠속에서 작게 일렁이는 불빛이 있었답니다. 자세히 보니 숙소의 관리인이 작은 불을 피워놓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먼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리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어요. 그 순간 제주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던 그 풍경 속에 나은이를 초대하고 싶었어요. 나은이랑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많이 행복했지요. 지금도 비행기를 처음 타서 들뜬 어린이,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안고 큰소리로 웃는 어린이, 바닷가에서 달리는 어린이를 보면, 여름 제주에서 여행하던 나은이가 생각납니다. 여러분의 제주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정말 궁금하답니다. 다음에 만나면 내게 이야기해 주세요. 꼭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