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의 어느 마을에서 1955년에 태어났다. 일제와 육이오로 훼절된 역사의 상흔을 떨쳐내지 못하고 여전히 앓으며 살고 있다. 전주의 살던 옛 동네에서 꽤 망나니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더러 소갈머리 없이 술독에 빠져 진창만 밟고 다니던 아들의 청춘 무렵을 지켜보셨던 어머니는 그런 자식이 ‘아그덜 겔치는’ 선생이 된 걸 아주 기뻐하시기도 했다.
교사로서의 품성을 배우고 갖추려 김제평야 끄트머리 금구면 소재의 고등공민학교(정규 중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 졸업과 고등학교 입시 자격 기회를 주는 학교)에서 소작인의 자녀들을 가르치며 농업·농민 문제를 알게 되고 추후 현직 교사로서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잠시 하게 됨과 동시에 농업·농민소설을 주로 쓰게 된 문학적 천착의 지점을 만나기에 이른다.
학교에서 아이들 만나며 즐겁던 교사 생활 이면에 ‘학교가 이래서는 안 되지 않은가?’, ‘학교가 죽었군’ 하며 교육운동에 발을 내딛고 몸을 부리다 해직되기도 했다.
이제 학교 밖으로 나와 전남 구례의 어느 산속에 토굴을 짓고 어슬렁거리며 텃밭 일구고, 멍때리면서 지낸다. 그 집을 이이재(耳耳齋)라 부르는 건 순전히 내 독선이지만, 자연의 소리에 귀를 더 열어 두고자 하는 탓인 걸 어쩌랴.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에 〈해리댁의 망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1986, 학교》(2022)가 있고, 소설집 《오래된 잉태》(2002), 《강진만》(2006), 《푸른농약사는 푸르다》(2019)가 있으며, 미니픽션 창작집 《민규는 ‘타다’를 탈 수 있을까?》(2023)를 냈다. 산문집으로 《다시, 학교를 디자인하다》(2013)가 있고, 2004년 동인 소설집을 내면서 결성된 소설 동인 ‘뒷북’의 일원으로 그동안 아홉 권의 동인 소설집에 작품을 싣고 함께해 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인간이 아프니 지구가 건강해진다’는 역설을 증명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고, 이 명제는 인류 문명의 진화 속에서 참 정의로 굳힐 공산이 크다고 본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맞아 가장 안타까운 존재가, 어떤 횡액의 계제에서건 그래왔듯, 서민들이고 청년들이었다. (중략)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해 가는 과정에서 청년들은 더욱이나 암울한 미래에 덜미를 잡힌 채 매몰되어 가고 있다. ‘압축성장’을 해온 한국의 산업사회에서 베이비 붐 세대들이 일궈온 성과에 익숙해 있는 그들은 더욱 가중되는 불안한 미래에 휘둘리며 힘들게 버티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끊임없이 줄어들고, 그들이 원하는 삶의 질은 실현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아직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있지 않은 현 상태의 인공지능(AI) 시대에서도 이럴진대, 자율주행 시대가 전면화되고 플랫폼 기업이 전체 산업을 이끌어 가게 되면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게 뻔하다. 로봇밀도가 9년째 전 세계의 상위권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의 산업 현장에서 청년들에게 배려가 이뤄질 수 있는 현실은 희망도, 기대도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중략)
이러한 시대에 글을 쓰는 작가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어야 할까? 특히, 미래세대의 몫까지 미리 끌어다 쓰며 누려온 필자와 같은 베이비 붐 세대의 작가는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어찌해야 하는 걸까? 문학적 시선이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외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