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영조·정조 시대의 탕평정치와 이를 관통하였던 정치 의리를 다룬 것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탕평정치는 조화와 타협이 가능한 정치였다고 칭송되면서 배제와 대결을 일삼았던 당쟁과 대비된다. 당쟁의 수단은 공허한 이념 대결만 내세우는 성리학적 의리론이었던 반면, 탕평은 탈성리학 혹은 실학에 의거하여 실용과 실리를 추구하는 타협의 정치라고도 한다.
같은 당쟁이라도 조선중기의 붕당정치는 조화와 타협이 가능했기에 긍정 평가되었던 반면, 조선후기의 당쟁은 의리론을 내세워 상대당을 제거하려 했기에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 대안으로 주목된 것이 의리론을 억제하고 붕당 타파를 추구했던 탕평의 정치였다.
오늘날 정치 현실에서도 당쟁은 끊이질 않고 그럴 때면 언제나 소환되는 것이 조화와 타협의 모범이라 일컬어지는 탕평정치이다. 그런 가운데 의리론은 언제나 조화와 타협을 해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당쟁의 주범으로 거론된다. 명분만 내세우고 타협할 줄 모르는 의리론을 버려야 정치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의리론이 중시되었던 조선후기의 정치는 부정해야 할 봉건정치의 구태에 불과하였다. ‘정치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경전의 문구에 불과했다. 이는 천리(天理)에 부합하는 올바름을 의미하는 의리가 현실에서는 언제나 무기력했고, 기껏해야 정쟁의 구실밖에 되지 않았던 어두운 근현대사를 반영하는 역사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본격적인 연구를 위하여 작심하고 경종 ~ 순조대 실록의 지루하고 방대한 정쟁 기사들과 당론서들을 읽어갈수록, 붕당 타파를 추구했던 탕평정치 시기에도 대부분의 신하들이 성리학적 의리론에 입각한 충역 논쟁과 당쟁을 여전히 격렬하게 전개하고 있었다는 방대한 사실(史實) 앞에 사뭇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기존의 선입견을 지워 버리고, 영·정조대의 군주와 신하들이 추구한 정치 의리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하나씩 따져봐야 했다.
성리학에서 의리란 무엇인가? 세상의 이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다. 정치에서 의리란 정치 세력이 이상으로 추구하는 노선이다. 정치 의리에 입각한 노선이 없다면 정치는 이익 집단의 거래와 무엇이 다른가? 탈성리학이 조선후기 정치의 지향이라면, 성리학은 애당초 정치와 맞지않는 것인가? 탕평 군주와 신하들은 성리학을 벗어 던지려고 했던가? 탕평의 시대에 당쟁은 사그러들고 있었던 것인가? 필자가 읽고 있던 자료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쟁의 여파로 아들까지 죽이고 말았던 영조와, 그 비극으로 인하여 아버지 대신 즉위하였던 정조의 시대, 즉 여전히 당쟁이 격렬했던 시대에 탕평은 어떻게 가능했다는 것일까? 조선후기 당쟁과 탕평의 정치가 남겨준 유산은 무엇일까? 이 책은 이러한 소박한의문들에서 출발하였다.
당쟁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조선후기의 정치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도 부정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대안으로 등장한 붕당정치론 역시 당쟁은 의리론만 앞세워 상대를 부정했다 하여 붕당정치가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붕당정치론 역시 당쟁 망국론의 연장이다. 폐단으로 점철된 당쟁의 대안인 탕평정치가 성공하려면 당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대에도 당쟁은 지속되었다. 그것도 성리학적 의리론을 충역 논쟁으로 한층 격화시킨 형태였다. 필자의 관심은 당쟁이 한창 격화되었을 때 의리론을 내세운 탕평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추구했는지에 맞춰져 있다.
정치의리 논쟁, 곧 노선 투쟁은 정치의 본질이다. 이를 금압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성패의 관건은 대립하는 정치의리를 조정하는 역량에 달려 있다. 의리론을 벗어나서 이해 관계나 세력균형만으로 유혹하는 것은 한때의 미봉책일 뿐이다. 영조는 전반기에 이러한 미봉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결국에는 정치의리를 분명히 정립하는 것으로 전환하였으며 정조가 이를 계승하였다. 더 나아가 정조는 ‘영조의 임오의리’를 수정하여 ‘정조의 임오의리’를 재정립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보편적 군신의리를 확립하고자 자신의 왕위까지 내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시도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실패하였다. 이어서 등장한 세도정치 시기는 몇몇 세도 가문들이 정치 의리보다는 이해 관계에 의하여 타협과 결탁을 일삼던 때였다. 이를 제어할 군주는 더이상 출현하지 않았고, 새로이 성장하는 세력 역시 세도 가문에 종속되어 있었다. 19세기는 제대로 된 정치
의리 논쟁이나 치열했던 당쟁도 없이, 막후의 거래와 타협으로 작동하는 정치 실종의 시대이다. 그렇게 조선은 안으로 곪다가 급격한 외부의 충격을맞았던 것이다. 필자의 학부 시절은 이념 과잉과 정치 불신이 극도에 달했던 시대였다. 많은 이들이 옳고 그름을 실존의 문제와 연결하여 고민하던 때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합의는 있었다. 더이상 독재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의 힘은 결국 민주주의를 성취하였다. 필자는 답도 없는 내적 갈등만 되풀이하며 아득한 역사 학습 뒤로 숨어 있었다.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최고 권력자가 권위주의를 놓아버리자,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자유롭게 제목소리만 발산하며 정권 비판에만 몰두하는 혼란이 함께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마치 정치적 타협이 능사인냥 영·정조의 탕평정치는 부적절하게 소환되었다.
민주주의 시대에 국가 사회의 건강한 합의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필자는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필자는 영·정조대의 실록 자료와 당파 싸움의 생생한 기록인 당론서를 읽고 있었다. 어떤 역사 저술이든 동시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민주화 시대에 바람직한 정치적 합의의 근거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던 것 같다. 당론서에는 영·정조 시대까지도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쟁이란 본래 그런 측면이 있으니, 조선후기 성리학적 의리론의 탓이 아니다. 당대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영·정조대의 유명한 인물들은 거의 모두 당인들이었다. 심지어 탕평의 주역들조차 당시에는 탕평‘당’이라는 지목을 받았다. 권위적인 영조마저도 ‘임금 노릇하기 힘들다’ ‘임금 자리 내놓겠다’는 푸념으로 신하들에게 호소하던 시절이었다. 정조 역시 신하들 앞에서 목메어 흐느끼며 자신의 의리론을 설득해야 했다. 그런 속에서 영조와 정조는 어떻게 정국을 이끌면서 당인들과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는지가 탕평정치의 관건이자 이 책의 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군주가 공론에 기반한 의리의 표준, 곧 황극(皇極)을 확립하여 군신간 합의를 도출할 수 있어야 했다. 영·정조대의 당인들은 ‘신하들의 간언을 너그럽게 용납한다’는 조선 왕실의 전통에 따라 자신들의 당론을 정중하게 군주 앞에서 설파하였다. 그렇다고 군주가 당인들에게 휘둘린다면 황극은 작동할 수 없다. 그 피해는 선량한 신하들의 축출이나 조정의 혼탁으로 이어지곤 했다. 군주는 신하들보다 더욱 공정한 의리론을 제시하여 그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공정한 의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군주권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군주권만 내세워 일방적으로 신하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군주가 제시하는 정치 의리의 설득력은 당쟁의 시대에 탕평의 성패를 좌우하였던 것이다. 탕평정치는 의리론을 중심에 놓고 다시 설명하여야 한다. 조선후기 정치사는 언어의 전쟁, 의리론의 과잉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탕평 군주와 그 신하들은 어떻게 다수의 정치 세력이 동의하는 국시를 합의할 수 있었던가? 결국 군주는 신하들의 의리론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한 차원 높고 공정한 정치 의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탕평정치는 성공할 수 있었다. 필자는 정조가 이 어려운 과제를 거의 해냈다고 생각하면서 이 책을 서술하였다. 이 책은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된 당론서와 경종 ~ 순조대의 실록을 읽으면서 나름의 합의의 질서를 찾아내려 했던 필자의 여정으로 보아주면 좋겠다.
오늘날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이면서도 세련된 국가 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국가가 되었다. 그 근저에는 당론으로 상쟁하면서도 국시의 합의를 도출하는 조선후기 정치의 전통의 힘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필자는 현대 한국 정치의 성숙은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는 리더십과 한 차원 높은 국시합의의 능력을 갖추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영·정조대 탕평정치에 대한 연구가 이러한 능력치를 키우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좋겠다. 조선후기 당쟁과 탕평의 역사를 근대 한국의 정치사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일은 필자가 나머지 공부로 여기는 주제이다.
2020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