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1937년에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했으며, 열여섯 살 되던 해부터 부산·여수·광주 등지에서 고학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후 서울에서 문학에 관심을 갖고 대학을 다녔으나 중퇴하고 한국학 및 한국사 탐구에 열중했다.
민족사·민중사·생활사 중심의 한국사 기술에 열정을 쏟았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 등을 통해 역사를 대중화하는 일에도 힘써왔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한국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고,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계간 〈역사비평〉 편집인, 서원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년 타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후광학술상 수상.
지은 책으로 『허균의 생각』 『위대한 봄을 만났다』 『이이화의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국사 이야기』(전22권) 『역사 속의 한국불교』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10권)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이 있다.
예전 나라 안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은 전봉준을 ‘역적’으로 몰아서 좋은 주장도 나쁘게, 바른 행동도 옳지 못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바른 행동도 일부러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흉악한 인간’으로만 몰아갔습니다. 특히 일본사람들은 전봉준을 친일파로 끌여들여 이용하려고 온갖 회유와 음모를 꾸몄으나 전봉준은 “내 수많은 부하들이 죽었는데 나만이 목숨을 구걸할 수 없다” “당신네들이 우리나라를 도와준다고 하지만 내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얼마든지 살릴 목숨을 대의를 위해 버렸던 것입니다.
올해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날 전봉준이 바라던 평등과 자주의 세상이 열렸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