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조선어사전 편찬위원, 기독신문사 주필 등을 역임하며 한글 보급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힘쓴 교육자 · 국어학자 · 독립운동가.
호는 환산(桓山) · 한뫼. 경상남도 김해 출신. 용준의 아들이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김해 합성학교(合成學校)에서 교편을 잡은 뒤, 다시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서 수업하였다.
1913년부터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 ·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사로 재직 중 3 · 1운동에 관련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중국에 건너가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1924년 귀국하여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협성(協成) · 경신(儆新) · 동덕(同德) · 배재(培材) · 중앙(中央) 등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주1의 조선어사전주2 편찬위원이 되었고, 민족정신의 보전 · 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 ·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해부터 4년간 여름마다 동아일보사 · 조선일보사 등에서 벌인 하기한글강습회 강연차 지방을 순회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주3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이 되고,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전임집필위원이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주4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반 옥고를 치른 뒤, 1939년 대동출판사(大同出版社)에 근무하였다.
1941년 기독신문사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보급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주력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주5으로 동지들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47년 유고 『표준한글사전』(1953)이 간행되었다. 이는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한글마춤법통일안」과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기준삼아 처음으로 엮은 것이다.
그 밖에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한성도서출판주식회사, 1931), 『문예독본(文藝讀本)』 상 · 하권(상권: 진광당, 1931, 하권:한성도서출판주식회사, 1932) 등의 저서가 있으며, 박지원(朴趾源)의 『도강록(渡江錄)』을 초역(抄譯)하여 『문장』 1권 10호(1940.12.)에 연재한 것을 엮어 단행본(대성출판사, 1946)을 출판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