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출생. 일본 정계의 최고 원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일본 총리 가운데 유일한 생존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 정계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18년 5월 도쿄 북부 지역인 군마현에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곧 바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면서 내무성에 들어갔다. 28세의 나이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다.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 때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첫 입각한 이후 방위청 장관과 운수장관과 통산장관을 지냈다. 자민당 내에서는 총무회장, 간사장 등을 섭렵했다. 화려한 경력은 훗날 총리가 된 그를 행정과 정부 개혁의 달인으로 만들었다. 1987년부터 단행된 일본국철 민영화가 총리 시절 대표적인 업적이다.
그의 정치 역정은 철저한 쟁취의 산물이다. 1982년 11월 스즈키 젠코 총리의 후임을 놓고 고모토 도시오, 아베 신타로와 3파전을 벌일 때도 그랬다. 뛰어난 정치력과 행정력을 바탕으로 5년에 걸쳐 총리로 일본을 이끌었다.
역대 총리 가운데 한일 우호를 가장 중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0년대 초반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83년에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경제협력자금 지원을 결정하는 등 양국의 우호 증진에 앞장섰다.
그러나 1985년 8월 15일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해 한국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이후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그 자신은 야스쿠니 방문을 한 번으로 끝내고 한일 우호 증진에 힘써왔다.
총리 재임 중 카운터파트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지금까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역대 대통령 취임식 때마다 단골로 참석하고 있다. 평소에도 한중일 협력을 강조해온 그는 3개국 정상의 셔틀외교와 경제협력 등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에 힘을 쏟고 있다. 나카소네는 현실주의자이다. 일본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평화헌법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교육법을 개정해 일본의 정체성을 강화하자는 지론도 펴고 있다. 본인 스스로 보수의 원류라고 밝힌 것처럼 원칙을 중시하고 현실을 인정하자는 소신을 갖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국가주의자라고 불릴 정도로 애국심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 중국을 인정해 평화적으로 공존 공영해야 한다는 현실적 감각도 갖추고 있다.
그의 아들 히로후미 전 외무장관도 대를 이은 지한파다. 히로후미는 2002년 월드컵 때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한국을 응원하기도 했다. 문부장관 시절에는 한국인 유학생 지원을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