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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김수환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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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오프모던의 건축>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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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정웰링턴이라는 한 남자에 관한 기록이 있다. 관점에 따라 불운했다고도 혹은 무능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어쨌든 자신의 ‘불능’을 통해 모든 것이 영원했던 한 세계를 증명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픽션도, 논픽션도, 그렇다고 다큐나 에세이도 아닌 이 ‘상상의’ 기록을 과연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비에트 더하기 전력Les Soviets plus l’èlectricité」(2001)을 만든 니콜라 레는 자기 영화의 장르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 영화 전체를 통칭할 수 있는 말은 없고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소설가 정지돈을 우리 시대의 뛰어난 전시 기획자로 생각해왔다. 소설과 뮤지엄의 이런 비교는 공연한 수사가 아니다. 슐레겔은 소설을 ‘장르 중의 장르’로 여겼는데, 소설이 그 속에 다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언젠가 보리스 그로이스는 19세기에 소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오늘날 수행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뮤지엄 전시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는 모든 장르와 매체를 아우를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초trans역사적인 공존과 연결을 보장한다. 그곳에서 파라오의 미라는 뒤샹의 변기와 나란히 놓일 수 있다.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전시물이 (비록 뮤지엄 공간 내부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실제 삶 속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겠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것들은 이미 인터넷에서 이뤄지고 있던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디깅과 아카이빙 문화, 그와 연결된 취향의 리스트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뮤지엄 전시의 중요한 차이점은 인터넷에서는 자신이 찾고자 했던 것들만을 찾을 뿐이지만, 전시에서는 본래의 관점이나 흥미로 볼 때 그다지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들까지를 보게 된다는 점에 있다. 정지돈의 특이한 전시 소설exhibition novel들에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던’ 지난 세기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느껴진다. 하지만 알다시피 수집가의 갤러리에 놓인 파편들은 결코 총체성의 큰 그림을 제공하는 법이 없다. 기껏해야 되려다 만 서사, 역사의 꼬인 매듭들, 모호한 시적 알레고리가 전부다.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Raphael Hythlodaeus. “허튼소리를 퍼뜨리는 사람” 혹은 “무의미한 것에 박식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토마스 모어가 이 안내자의 설명과 함께 독자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유토피아」였다. 유토피아에 붙들린 자들의 문제는 자신이 어느 시간대에 속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간에 미래의 시간을 기입했고 미래의 시간을 과거의 시간에 기입했”던 정웰링턴이 그랬고,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역사를 10년 단위로 감았다 풀었다 하는 꼴”인 젊은 맑스주의자도 그랬다. 아마도 정지돈은 이 사회의 열외자들, “누구나 공감할 만한 문제와 연결된 감수성을 갖지 못한” 자기와 같은 시대착오자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 소설을 읽어줄 거라 믿고 싶은 듯하다.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려면 무의미(혹은 무능)의 감각과 유토피아(혹은 향수)의 감각을 결합할 줄 아는 ‘정지돈스러운’ 사람들이 좀더 많아져야 한다. 내가 늘 신기해하고 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인간이란 자기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에조차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나는 그 능력이 인간다움을 측량하는 중요한 척도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싶다. 시대착오적인 향수를 간직한 이들을 위한 정지돈의 초대장이 또 한 권 도착했다. 이번엔 한국(과 북한)의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으므로 좀더 친숙하고 가까운 이야기일 것도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갖가지 이미지와 에피소드, 도큐먼트와 사물들이 어지러이 뒤섞인 전시실의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번에도 그 풍경은 지금 여기 ‘우리의’ 절박하고 중대한 (당면)현실 못지않게 한 세기 전 ‘그들의’ 멀고 낯선 과거에도 관심을 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외려 그들의 지나간 꿈과 기대, 신념과 실패를 마치 동시대인의 그것마냥 느낄 줄 아는, 조금 이상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당신 역시 “무의미한 것에 박식한 사람”이 이끄는 저 전시실의 풍경 속에서 낯선 이물감 대신 왠지 모를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경험하게 될지도. 그렇다면 이제 당신이 정지돈 뮤지엄의 관람객museum-goer이 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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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작가 플라토노프 읽기: 공산주의라는 항우울제

2012년 <체벤구르>가 번역 출간되면서 한국에도 플라토노프의 열혈 독자가 꽤 많이 생긴 것으로 안다. 하지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깊게 읽혀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플라토노프라는 특별한 세계에 감화된 전 세계 애독자의 찬탄은 20세기 내내 이어진 바 있다. 파졸리니는 <체벤구르>의 첫 장을 두고 “러시아 문학의 최고로 아름다운 현상”이라고 극찬했으며, 브로드스키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플라토노프는 자기 시대의 언어에 스스로를 완전히 종속시켰고 그 안에서 심연을 보았다”고 말했다. 소쿠로프는 장편 데뷔작으로 플라토노프의 단편을 선택했으며, 존 버거는 “플라노토프는 이제껏 내가 만난 그 어떤 이야기꾼보다 현대의 가난을 더 깊게 이해했다”라고 썼다. 그뿐인가? 제임슨은 플라노토프를 자신의 유토피아론을 뒷받침하는 핵심 전거로 인용한 바 있으며, 지젝은 베케트, 카프카와 함께 플라토노프를 “20세기의 절대 작가 3인”으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물론 플라토노프는 “실재를 향한 열정”으로 요약되는 지난 20세기의 중대한 증언자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들이 (“인류세”라는 말로 거칠게 통칭되곤 하는) 21세기를 사유하기 위한 중요한 원천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 글은 플라토노프의 대표작 <체벤구르>의 동시대적 읽기를 제안하면서, 이를 위한 핵심적 지점들을 추려본 것이다.

첫째, <체벤구르>는 인간 이외의 존재자들, 특히 기계와 동(식)물을 다룬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인간보다 기계를 더 사랑하여 기관차와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이 등장하는 1부의 이야기가 2부와 3부에서 그의 양아들인 진짜 주인공 사샤 드바노프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은 젊은 시절 과격한 기계신봉자, 급진적 코스미스트였던 플라토노프가 특이한 사회주의적 생태주의자로 변모해가는 서사의 변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을 견뎌 낸 “우엉”마저도 공산주의를 원하는 곳, “참새”들이 가난과 추위를 인간과 함께 나누는 장소, 인류 전체를 위해 “노동자 태양”이 말 없는 우정의 빛으로 대지를 위로해 주는 세계다.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식)물의 경계에 관한 플라토노프의 놀랍도록 복잡한 탐구는 포스트휴먼과 비인간을 둘러싼 이런 저런 풍문들을 훌쩍 넘어선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둘째, <체벤구르>는 규정될 수 있는 계급 바깥의 인간들, 곧 “이름 없는 잡다한 인간들”을 다룬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기타인간”이라 불리는 소설 속 존재들은 결코 우리에게 익숙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 바디우가 “정원외적 요소들element surnumeraire”이라 불렀던 “사회의 셈해지지 않는 나머지 부분들” 혹은 차라리 “다가올 세기의 섬뜩한 알레고리”에 해당하는 노동자 아닌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이 책에서 플라토노프가 보여주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아래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바, 그런 의미에서 플라토노프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동시대인” (McKenzie Wark, Molecular Red: Theory for the Anthropocene, Verso, 2016. 81.) 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체벤구르>는 “우울(증)”을 다룬 총체적 보고서로 읽어야 한다. 다만 멜랑콜리로 번역되는 그 우울과는 다르다. 이 책에서 우울, 애수, 향수, 그리움, 슬픔, 고통, 갈망, 권태 등으로 옮겨진 부분들은 모조리 동일한 원어(“toska”)의 번역어로 바꿔 읽어야 한다. 외국어에서 정확한 대응어를 찾을 수 없는 이 특별한 단어에 관해 나보코프는 이렇게 썼다. “가장 깊고 고통스런 수준에서 토스카는 대개 원인불명의 커다란 영적 고통의 감정을 뜻한다. 덜 병적인 수준에서는 영혼의 둔탁한 아픔, 목적 없는 갈망(longing), 병적인 슬픔(pining), 막연한 불안, 정신적 고통(throe)과 동경(yearning)이다. 특수한 경우 그것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향한 욕망, 향수, 애틋함이 될 수도 있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권태(ennui)나 지루함으로 등급이 매겨진다.” (Vladimir Nabokov, Eugene Onegin, a Novel in Verse, vol. 2, Alexander Pushkin, trans. Vladimir Nabokov,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141.)

여기서 핵심은 단어의 다의성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그렇기에 동사형을 취할 수 있는 그것의 적극적 용법에 있다. <체벤구르>의 농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워했던가? 나는 바로 사회주의를 그리워했던 거야(toskoval).”(198쪽). 토스카는 어떤 것에 관하여(about) 느끼는 우울함보다는 잃어버렸거나 혹은 아예 가져보지 못한 어떤 것을 향한(for) 적극적인 지향과 향수에 더 가깝다.

놀라운 사실은 이 특별한 감각이 ‘같은 것’을 느끼는 다른 존재자를 향할 때 (일시적이나마) ‘정지’될 수 있으며(수없이 등장하는 ‘우정’의 느낌이 가리키는 바가 정확히 이것이다), 그 존재자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나도 그 사람과 똑같아”라고 말하곤 하는 주인공 사샤는 “오래된 울타리”를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홀로 서 있구나.’ 가을에 덧문이 슬픈 듯이 삐걱거릴 때면, 사샤도 저녁마다 집에 앉아 있기가 우울해졌으며, 덧문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느꼈다. ‘그들 역시 우울하구나!’ 그리고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았다.”(82쪽) 그렇다면 우울(증)만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의 고리일까? 그렇지 않다. 유토피아를 향한 지향과 노스탤지어의 감정을 연결해주는 고리 또한 바로 이 특별한 정동이라는 점을 잊지 말도록 하자.

자기가 미처 가져보지 못한 것을 향한 그리움을 품은 채 헐벗고 “가난한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자가 자신들의 공통감각(“우울과 고아감각”)을 확장된 우정과 동지애로 바꿔가는 이야기! 공산주의라는 아주 특별한 ‘항우울제’를 통해 독자들을 “토스카의 민병대”로 단련시켜주는 책! 21세기를 위한 필독서 <체벤구르>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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