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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톤의 박스를 조심스레 열면 192쪽의 종이가 아코디언처럼 하나로 쭉 이어진 한 권의 책이 자리 잡고 있다. ‘활판공방' 장인들의 수작업을 거쳐 독특한 형태로 완성된 <녹스>. 펼침 면의 왼쪽 면에는 고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시를 번역하는 과정이, 오른쪽 면에는 오빠를 먼저 떠나보낸 동생 앤 카슨의 상념이 담겨 있다. 물리적 형태뿐 아니라,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는 이채로움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앤 카슨은 1978년부터 2000년까지 22년 동안 오빠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오빠의 죽음을 맞는다. 오빠는 죽고 없지만, 그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존재를 삶으로 불러오기 위해 그와 관계된 파편들을 모은다. 카툴루스의 시 속 낱말 하나하나의 의미를 더듬어 가듯이, 오빠가 썼던 편지, 오빠와 찍었던 사진, 오빠가 남긴 유품 등을 수집하고, 그리고, 인쇄하고, 찢거나 오려 붙이고, 묻고, 의심하고, 기록하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한 권의 비가를 만들어 나간다. 밤의 단어, 밤의 문장, 밤의 구절로 이루어진 카툴루스의 시와 카슨의 산문은 아코디언이 움직이듯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반짝이는 밤의 비가로 완성된다.